朴正熙와 효자손
연재 60/1979년 10월26일 오전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효자손, 카빈소총, 벽돌
  
  
  썰렁한 침대 위에서 朴正熙 대통령은 눈을 떴다. 맞은편 벽에 걸린 故 陸英修 여사의 커다란 초상화가 맨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동창 밖으로 번지는 여명에 아내의 미소 띤 얼굴이 점차 또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화로 그려진 초상화 아래로는 붙박이 단이 있고 그 위에는 국화가 꽂힌 노란색 화병 두 개와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책은 朴木月 시인이 쓴 ‘육영수 여사’로 나무 상자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서 文世光의 총탄에 喪妻(상처)한 이후 아내 생일에는 직접 꺾은 국화 송이를 초상화 밑에 가지런히 얹어 놓곤 했다. 아내가 없는 공간을 대신한 것은 朴正熙의 머리맡을 차지한 ‘효자손’이었다. 스테인리스 막대 끝에 플라스틱 손이 달린 것이었다.
  
  62세로는 단단한 체구를 가졌던 박정희는 그 무렵 노인성 소양증세를 비롯해 세 가지 질병을 갖고 있었다. 온몸, 특히 등쪽이 가려웠던 박 대통령은 이 때문에 순면 내복을 입었고 가려움증을 없애준다는 알파케일을 주치의로부터 구해 목욕물에 풀어 몸을 적셔 보기도 했지만 별무효과였다. 밤중에 가려움이 심해도 등을 긁어 줄 사람이 곁에 없어 효자손을 반려자로 삼고 있었던 홀아비가 박정희였다.
  
  1960년대에 그는 축농증의 일종인 副鼻洞炎(부비동염) 수술을 받았으나 곧 재발했다. 1978년 하반기에 대통령은 국군서울지구병원에서 다시 코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코를 통한 호흡이 원활하지 못하여 편도선주위염이나 목감기를 자주 앓았다. 그 며칠 전에도 대통령은 목감기에 걸렸었다. 노인 박정희를 괴롭힌 세 번째 질병은 가벼운 궤양성 소화장애였다. 그 1년 전쯤 박 대통령은 2층 침실에서 자다가 토사곽란을 만난 적이 있었다. 고통을 참지 못한 대통령은 1층 부속실로 통하는 인터폰 부저를 눌렀다. 숙직 중이던 朴鶴奉(박학봉) 비서관이 뛰어 올라왔다. 대통령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내가 변소에 열 번 이상이나 다녀왔는데……”라고 했다. 주치의를 긴급 호출한 박 비서관은 대통령의 배를 주물러 드렸다. 연락을 받은 주치의가 한밤중에 청와대로 달려와 진통제를 주사했다. 잠시 후 고통이 수그러들자 비로소 대통령은 잠이 들었다. 박 비서관은 잠든 대통령에게 이불을 덮어 드렸다. 그 휑한 방에 대통령을 혼자 남겨두고 나오려니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침대 발끝 오른편엔 카빈소총 두 정을 걸어 둔 나무 총가가 놓여 있었다. 탄창과 실탄은 총가 밑 서랍에 들어 있었다. 대통령은 한 달 전쯤 박 비서관을 시켜 이 총을 청와대 경호단에 반납시켰다. 총가가 있던 자리에는 희미한 자국만 카펫 위에 남아 있었다. 총으로 권력을 쟁취했던 박정희는 그 銃口(총구)가 언젠가는 자신을 향할 것이란 불길한 예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통령은 맨 먼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동쪽 창문을 비롯, 서재와 거실의 창문들을 활짝 열어 젖혔다. 청와대 본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창문 여는 소리와 함께 아침 일과를 시작했다. 지어진 지 40년째가 되었던 청와대 본관은 대통령이 욕실에 들어가 물 트는 소리조차 아래층에서 다 들을 수 있었다. 침실 옆 욕실 변기의 물통 속에는 대통령이 아무도 모르게 넣어 둔 빨간 벽돌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자신이 일과시간에 사용하는 1층 집무실 옆 대통령 전용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석유파동 이후부터 골프를 삼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나면 어김없이 본관 부속실로 연결된 인터폰을 눌렀다.
  
  “운동하자.”
  
  대통령을 측근에서 수발하는 제1부속실 직원은 당시 박학봉 비서관과 李光炯(이광형) 부관 두 사람이었다. 이들이 대통령 집무실에 근무하면서 교대로 숙직을 했다. 그날 아침 숙직한 직원은 이광형 부관(당시 32세)이었다. 李 부관은 운동복 차림에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현관 앞으로 나와 대통령을 기다렸다. 잠시 후 대통령도 운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 달렸다. 청와대 본관을 빙 둘러쳐진 철망을 벗어나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가면 상춘제가 나타나고 이어서 실내 수영장이 보인다.
  
  석유파동 직후 대통령은 “수영장에 물을 넣고 하면 돈도 많이 드는데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이나 치도록 하자”고 지시해 실내 수영장이 실내 배드민턴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환갑을 넘긴 대통령과 배드민턴을 치고 나면 젊은 이 부관도 땀으로 온몸을 적셔야 했다. 운동이 끝나자 이 부관은 도구를 챙겨 들고 대통령과 함께 본관으로 돌아왔다.
  
  이날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에 참석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이 부관은 박 대통령의 양복과 구두를 챙기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2층 거실의 대통령으로부터 인터폰이 울렸다.
  
  “예, 이광형입니다.”
  
  “어제 입었던 그 양복하고 구두, 그거 가져오게.”
  
  “예, 알겠습니다.”
  
  ‘어제 입었던 양복과 구두’란 허리단을 수선한 곤색 양복과 금강제화에서 맞춘 검정색 구두를 말한다. 한해 전 코 수술을 받은 직후부터 담배를 끊었던 대통령은 몸무게가 60kg에서 3~4kg쯤 불었다. 1층 집무실로 출근할 때 자신이 전날 입었던 양복바지를 든 채 내려온 적도 있었다. 대통령은 부관에게 바지를 뒤집어 허리 뒷단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정확히 폭을 재 보이고는 “여기 요만큼만 더 늘려 주게”라고 했다. 부속실 직원들은 을지로 2가에 있던 ‘세기 양복점’으로 옷을 보내어 고쳐 오도록 했다.
  
  그날 대통령의 마지막 양복을 준비했던 이광형은 “바지는 수선해서 입고 구두 뒤축을 갈아 신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이 부관은 평소보다 십여 분 늦게 양복과 구두를 들고 2층 거실로 올라갔다.
  
  그때까지 대통령은 거울 앞에서 하얀 와이셔츠에 자주색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체는 반바지 모양의 팬티 차림 그대로였다. 대통령은 李 부관이 들어서자 “어, 어, 이리 가져와” 하며 반겼다. 농촌 시찰이 있는 날이면 대통령은 소풍 가는 소년처럼 들떠 있곤 했다. 이날도 늦게 올라온 양복을 받아 입으며 연신 어깨를 들썩이면서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흥얼했다. 권력이란 갑옷을 걸치기 직전 朴正熙(박정희)라는 한 인간의 내면을 엿보게 하는 것은 孤獨(고독), 武人(무인), 節約(절약)의 상징물인 효자손, 카빈 그리고 변기 속의 벽돌이었다. 그는 양복을 입음으로써 이 같은 자신의 내면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감싸 버렸다.
  
  
  대통령의 장부
  
  
  대통령과 아침운동을 마친 李光炯은 즉시 부속실로 돌아왔다. 웨이터 전영생이 주방에서 부속실 직원의 아침식사를 쟁반에 담아 이광형에게 갖다 주었다. 부속실 직원은 대통령보다 먼저 식사를 하고 대통령보다 먼저 마쳐야 했다. 식사 도중에 대통령으로부터 인터폰을 받게 되면 부관은 입속에 든 밥을 얼른 손바닥으로 받아 낸 다음 즉시 물로 입을 헹군 뒤 인터폰을 받곤 했다.
  
  박 대통령 부속실에서는 세 가지 장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족장부’는 대통령을 제외한 두 딸과 한 아들의 잡비 씀씀이를 다룬 것이었다. 1979년 10월에는 27만 9,388원이 지출됐다. 2층 내실 담당 가정부 미스 원에게 10만 원, 신당동의 대통령 사저를 관리하고 있던 박환영 비서관과 아주머니에게 월급 이외의 보조비로 2만 원씩, 선물인 듯한 동양란 구입비 3만 2,000원, 志晩 생도의 콘택트렌즈 구입비 5만원, 세탁비 2만여 원 등이었다. 본관에는 식당이 있었다. 본관 근무자와 대통령 가족이 식사하는 곳이었다. 저녁에 대통령이 주관하는 수석비서관 회식, 특별보좌관 회식도 여기서 했다. 이 식당의 식료품 구입비는 1979년 8월에 80만 8,765원이었다. 박 대통령의 개인지출을 기록한 장부에 따르면 그는 1979년에 약 70만 원을 양복, 허리띠, 구두 구입비로 썼다. 10월 3일에 구두 세 켤레 11만 2,200원, 8월 5일에 흰색 반바지 두 벌 3만 원, 허리띠(반바지용) 2만 원, 5월 28일에 잠옷 네 벌 2만원……. 박 대통령 개인 잡비는 대통령 이름으로 된 통장에서 빼 쓰고 입금해 두기도 했다. 1979년 초에 9만 9,830원이 전년도에서 이월됐다가 10월 26일 현재 9만 7,330원이 잔고로 남아 있었다.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항상 2층 침실 옆 작은 식당에서 했다. 웨이터 전영생은 본관 1층 부속실 옆에 있는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나면 주방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2층 식당으로 음식을 날랐다. 대통령의 두 딸 槿惠, 槿暎이 먼저 자리에 앉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2층 식당 한쪽 구석에는 전자 오르간과 톱악기, 퉁소도 있었다. 대통령은 밤에 홀로 퉁소를 불기도 했다. 적막한 청와대 본관에 울려 퍼진 퉁소 소리는 애끊는 음률이었다고 한다. 1층에는 피아노가 놓인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대통령은 가끔 피아노방을 찾아가 혼자서 ‘황성 옛터’ 같은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모든 직원들이 퇴근한 오후 6시 이후가 되면 525평의 본관에는 대통령과 두 딸 그리고 숙직 당번인 부속실 직원, 그리고 경호원들만이 남았다. 청와대 본관에서 근무한 사람들은 일과 후를 ‘적막강산’이라 표현했다. 외부세계와 철저하게 차단된 이곳에서 대통령은 못다 본 서류를 열람하거나 국가의 중대사 그리고 자신의 몫이었던 고독과 대면했다.
  
  1960년대 중반 대통령이 패기만만했을 당시에도 청와대는 항상 도시 속의 쓸쓸한 섬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수없이 되뇌인 말이 있었다.
  
  “이자들이 나만 이 깊은 감옥에 처넣고 저희들은 마음대로 뛰어다니며 사사건건 말썽만 부리니…….”
  
  이 고독의 섬에 아침이 찾아오면 대통령은 자신의 썰렁한 내면을 이불 개듯 걷어 접고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정장 차림으로 가족들과 아침을 함께했다. 청와대의 아침 식단은 찌개와 멸치볶음 등 대여섯 가지 밑반찬이 전부였다. 대통령의 오른편으로는 조간신문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대통령은 늘 그러하듯 커피까지 마시고 일어섰다. 이때 근혜 양이 선물로 들어온 족자를 들고 와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대통령은 족자를 펴 벽에 걸어 보더니, “그 사람이 벌써 이렇게 됐나”면서 흐뭇해했다. 그 족자는 그로부터 40여 년 전 경북 문경에서 박정희가 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제자였던 사람이 써 보낸 것이었다. 대통령이 2층 식당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그 시간에 맞은편 비서실장실에서는 金桂元 실장이 주재하는 수석비서관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매일 오전 8시부터 열리는 회의였다. 柳赫仁 정무 제1수석, 高建 정무 제2수석, 徐錫俊 경제 제1수석, 吳源哲 경제 제2수석, 崔侊洙 의전수석, 朴承圭 민정수석, 林芳鉉 공보수석비서관들이 참석했다. 매주 1회꼴로 대통령에게 친인척 관련 상황보고를 해 온 박승규 민정수석은 비상계엄령이 펼쳐진 부산지역의 민심동향을 조사하고 올라왔었다. 그는 다음 날인 토요일에 대통령을 면담, 민심동향과 함께 대통령의 친인척들에 대한 보고를 하기로 돼 있었다. 이날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나자 김계원 비서실장은 박승규를 따로 불렀다. 박 수석은 이렇게 보고했다.
  
  “부산지역에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단 병력이 시민들을 때려 민심이 反정부적으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내일 각하에게 그 사실을 보고할 때 金載圭 부장과 車智澈 경호실장의 불화에 대해서도 보고하시오. 특히 차 실장의 월권적 행동에 대해서 보고하시오.”
  
  김 실장은 그전에도 한번 대통령에게 “차 실장이 정치에서 손을 떼도록 하셔야 되겠습니다”라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차 실장이 국회의원을 했기 때문에 정치를 잘 알아”라고 했다. 김 실장은 비슷한 건의를 다시 하기가 뭣해서 박 수석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이었다. 김 실장은 박 수석의 그런 보고 후 대통령을 만나 김 부장과 차 실장의 암투가 심하니 차라리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꾸어 주자는 건의를 할 예정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이날 아침 8시 20분쯤 연희동 집을 떠났다. 차 실장은 두 부관을 데리고 있었는데, 이날 그를 수행한 것은 李錫雨였다. 李 부관은 아침 8시에 연희동 車 실장 집에 도착, 1층에서 근무 중인 경호실 직원으로부터 차 실장의 5연발짜리 리볼버 권총이 든 가죽 손가방을 넘겨받았다. 차 실장은 8시 40분쯤 청와대 정문 우측 첫 번째 4층 건물인 경호실에 도착했다. 그는 집무실에 들어가자마자 金載圭 정보부장을 전화로 찾아 통화했다. 8시 45분경이었다.
  
  金 부장은 이날 박 대통령이 들르게 돼 있는 KBS 唐津(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하고 싶다면서 대통령과 함께 헬리콥터 1호기에 동승할 뜻을 비쳤다. 김 부장은 그런 뜻을 김계원 비서실장에게도 전했으나 결정권은 차 실장이 갖고 있었다. 차 실장은 김 부장에게 “지금 시국이 불안하고 대통령께서 서울을 비우시니까 김 부장은 자리를 지켜 주면 좋겠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
  
  
  
  서재 풍경
  
  朴 대통령은 오전 9시쯤 2층 식당에서 일어나 1층 집무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몸을 옮겼다.
  
  “나 오늘 삽교천에…….”
  
  대통령은 “갔다 올 거야”라는 뒷말을 망설이다 끝내 하지 않았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세요.”
  
  두 딸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이것이 영원한 작별인사가 됐다. 박 대통령은 필기도구와 안경, 연설문 따위가 담긴 누런 가죽가방을 직접 챙겨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2층에서 1층으로 출근한 것이다.
  
  김계원 실장은 이런 식의 출근이 대통령의 기분전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별채건물을 지어 내실을 그곳으로 옮기자고 건의했으나 청와대 건물에 돈을 쓰는 것을 싫어한 박 대통령에 의해 거부됐다. 대통령은 빨간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와 우측으로 난 문을 열고 집무실로 통하는 ‘전실’로 들어섰다. 부속실 역할을 하는 전실에는 박학봉 비서관과 이광형 부관이 교대로 ‘미스 리’라 불리는 李惠蘭과 함께 근무했다. 이광형 부관과 이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통령에게 인사를 했다. 대통령의 가죽가방은 이혜란이 받아 들었다.
  
  박 대통령이 집무실로 들어가자 잠시 후 김계원 실장이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김 실장은 정보부와 경찰에서 올라온 일일 보고서를 노란 봉투에 넣어 대통령에게 올렸다. 평소에는 대통령이 봉투 끝을 잘라 보고서를 꺼내 읽어 보지만 이날은 봉투째 서랍 속에 집어넣었다.
  
  박정희의 집무실은 서재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군인 출신이었지만 책 속에서 살았다. 이 서재 겸 집무실에는 약 600권의 책이 꽂혀 있었는데 소설이나 수필집, 시집은 단 한 권도 없었다. 세계대백과사전, 파월한국군전사, 난중일기, 박정희 대통령(중국어 판), 불확실성의 시대, 감사원 결산 감사 보고서, 성경, 성경사전, 崔水雲 연구, 단재 申采浩 전집, 白斗鎭 회고록, 지미 카터 자서전, 자본론의 誤譯(오역)(일어판), 金日成(일어판), 사상범죄론, 한국 헌법, 다국적기업, 정경문화(잡지)…….
  
  《암살사 연구》란 책도 있었다. 朴鐘圭 경호실장 시절인 1973년에 경호실의 연구발전실에서 펴낸 상하권으로 된 책이었다. 세계 각국의 암살 사례를 분석, 암살을 예방하는 방법을 개발하자는 취지로 쓰인 책이었다.
  
  이 도서목록이 풍기는 분위기는 실용주의자의 그것이었다. 관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실무적이고 물질적인 소재로 꽉 차 있었다. 집무실 비품들을 보면 재미있는 것들이 있었다. 계산자, 돋보기, 은단통, 소독솜통, 라디오, 정원수 整枝用 톱, 그리고 부채와 파리채.
  
  대통령은 기름을 절약한다고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창문을 열어 놓고는 부채를 부치며 파리를 잡았다. 그해 여름 이광형 부관이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대통령은 더위를 먹은 듯 얼굴이 벌겋게 돼 있었다. 李 부관은 보일러실 직원을 불러 에어컨을 정식으로 틀지 말고 실내 공기순환만 시켜 달라고 했다. 그날 저녁 박 대통령은 가족과 식사를 하다 말고 근혜 양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놈들이 에어컨을 틀었더군. 갑자기 시원해지던데 내가 모를 줄 알고. 앞으로는 절대 틀지 말라고 해.”
  
  비품 중에 재떨이가 없었던 것은 박 대통령이 말년에 금연을 선언한 때문인데 간혹 한 개비씩 피우기도 했다. 대통령은 가끔 부속실 직원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고 하여 개비 담배를 빼내 피웠다. 점심을 먹고는 김계원 실장을 불러 마치 고교생이 숨어서 담배 피우듯 함께 피우기도 했다. 대통령의 건강 파수꾼 노릇을 했던 金秉洙 국군서울지구병원장이 말렸더니, 대통령은 “임마, 그러면 너는 뭣 때문에 있노?” 하더란 것이다.
  
  서재에는 비디오테이프도 몇 개 있었다. ‘일본 후지 텔레비전과의 인터뷰’, ‘吳元春사건’, ‘500MD 헬기’ 등이었다. 서재 겸 집무실은 1967년에 청와대 본관을 증축하면서 기존의 벽을 헐고 방을 낸 것으로 약 40평 정도가 됐다. 그때까지는 전실을 집무실로 사용해 왔다.
  
  서재 남쪽 벽으로 출입문이 하나 있었다. 밖에는 잔디밭에 평행봉과 철봉이 설치돼 있었다. 이 문 옆에는 가로 50cm, 세로 80cm가량 되는 커다란 日曆이 걸려 있었다. 매일 아침 부속실 직원이 청소부를 데리고 들어가 청소를 하면서 한 장씩 찢어 내고 있었다. 일력은 날짜만을 크게 인쇄하고 연도와 달을 작게 표기한 것으로 1979년 10월 26일자가 걸려 있었다. 서재에 걸렸던 일력은 이날로 역사의 化石이 됐다.
  
  이날 오전 9시 20분경 김 비서실장은 보고를 마치고 집무실을 나왔다. 이때부터 대통령은 그날 결재할 서류를 모두 처리하고 일상적인 여타 업무도 거의 다 정리했다.
  
  얼마 후 둔중한 프로펠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K-16’ 성남비행장(현재 서울 비행장)에서 이륙한 세 대의 청색 UH-1H 헬리콥터가 청와대 동편으로 날아와 지하벙커 지붕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막 넘어설 무렵이었다. 헬리콥터가 착륙한 직후 전실 입구 복도에 차지철 경호실장과 千炳得 수행과장이 도착했다. 김계원 비서실장도 2층 집무실에서 복도로 내려왔다. 비서실장을 본 車 실장은 들으라는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비서실장도 내려가는데 中情부장까지 거길 가려 하다니…… 이런 비상시국에는 서울을 지켜야지…….”
  
  조금 전에 있었던 김재규 정보부장과의 통화내용에 관한 언급이었다. 김계원은 일언반구 대응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 이윽고 문이 열리고 박 대통령이 걸어 나왔다. 기다리던 세 사람은 인사했다. 대통령을 뒤따라 나온 이혜란이 박 대통령의 가죽가방을 천병득 과장에게 넘겨주었다. 현관을 나서는 대통령의 뒤에서 미스 리와 이광형 부관이 “안녕히 다녀오십시오”라고 인사했다. 대통령은 연신 콧노래에 맞춰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인사에 답했다.
  
  본관 앞마당에는 대통령 전용차량 슈퍼살롱과 비서실장 차량 및 경호차량 등 다섯 대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행사에 참석할 수행원들과 관계 장관들이 차 옆으로 도열해 서 있다가 대통령을 보고 일제히 인사를 했다. 청와대 내 헬리콥터 착륙장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차에는 김계원 비서실장이 대통령 왼쪽에 동승했다.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실장 모친이 편찮으신 모양인데, 내일모레는 내가 찾지 않을 테니 고향에 다녀오시오”라고 했다.
  
  
  가버린 목소리
  
  
  청와대 내 헬기장에서 세 대의 헬리콥터가 이륙한 것은 이날 오전 10시 30분쯤이었다. 3호기에는 보도진, 2호기에는 수석비서관들과 경호실 수행팀이 탔다. 대통령이 탄 공군 1호기는 승무원을 포함하여 정원이 13명이었다. 앞의 네 자리는 조종사, 부조종사, 정비사, 공군연락관 차지였다. 그 뒷자리에 박 대통령이 앉았다. 대통령 좌석에는 쌍안경과 큰 지도가 놓여 있었다. 이 지도에는 주요시설, 공장, 공단, 공사장이 표시돼 있었다. 경호실 소속 상황실에서는 이 지도에 새로운 정보사항을 늘 유지하여 대통령이 잘 알아볼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공중시찰을 많이 하여 지리에 밝았다. 전에 없던 시설물 같은 것이 보이면 궁금해했다. 그럴 때는 수행과장이 지상으로 긴급 무전 연락을 취해 상황을 파악, 보고해야 했다. 이날 대통령 옆자리에는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의 주무장관인 李熺逸 농수산부장관이 앉았다. 그 뒤로는 김계원, 차지철, 徐錫俊 경제수석 비서관 및 천병득 수행과장과 吳世林 계장이 경호원으로 자리 잡았다.
  
  機內에서 박 대통령은 이 장관에게 전날 확정된 추곡 매입가 결정에 따른 농민들의 반응을 물었다. 추곡 매입가 결정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경제기획원에서는 前年대비 10% 선의 인상을, 농수산부에선 20% 이상의 인상을 주장하여 좀처럼 결말이 나지 않았다. 申鉉碻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와 李 농수산부장관이 대통령 앞에서도 합의를 보지 못하자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인상률을 22%로 결정했다.
  
  ‘박 대통령이 농민들에게 주는 보너스’라고 표현된 선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통령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다. 박 대통령은 농촌 시찰에 나서면 언제나 신이 나는 사람이었다.
  
  비행 중에 박 대통령은 쌍안경으로 地上을 두루 살폈다. 반월공단 위를 지날 때는 자신이 펼쳐보던 지도와 일일이 대조하기도 했다. 아산 화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굴뚝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가리키며 “이곳은 공장입지가 좋은 곳”이라고 설명도 했다. 김계원 실장은 대만 대사로 오래 근무하여 국내 사정에 어두웠다. 박 대통령은 김 실장에게 그동안의 업적을 자랑하듯 지상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경지정리가 잘 돼 있고 막 추수가 끝난 농촌지역은 평화로웠다.
  
  헬기가 唐津 禮山 상공을 지날 때 김 실장은 대통령에게 말을 건넸다. “각하, 초가집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저기에는 남아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우선 큰 길가부터 하고 있소.”
  
  대통령 일행을 태운 세 대의 헬기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장인 당진군 신평면 운정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 2분이었다. 헬기는 새로 닦인 포장도로 위에 착륙했다. 헬기에서 내린 대통령은 도열한 현지 주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답례를 했다. 넓은 공터에 설치된 단상까지 약 50여 미터를 걸어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관계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행사장 앞줄에는 마을 노인들이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대통령은 방조제 건설 유공자 표창을 한 뒤 약 8분에 걸친 致辭(치사)를 낭독했다. 대통령은 “국토개발이 국력의 원천”이며 “오는 83년부터는 홍수와 가뭄이 없는 농촌이 될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목소리가 예전 같지 않았다.
  
  이희일 장관은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쇳소리 나는 특유의 카랑 카랑한 음성이 아니고 그날은 힘이 좀 빠진 듯했어요. 나이를 드신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지요”라고 했다. 경호실 수행계장 오세림은 “목감기 때문에 저런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수행과장 천병득은 “그날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바람소리를 제거하기 위해 방송국에서 오디오 시스템을 조작한 때문이 아닐까”라고 했다. 박수 속에 치사를 마친 박 대통령은 단상에서 내려와 테이프 절단식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그날 맨 앞줄에 참석한 노인들 가운데는 갓을 쓴 이들도 보였다. 대통령은 동행하던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고을의 元老 어른이 어디 계신가. 이런 경사에 같이 모셔야겠지. 가서 모시고 오게.”
  
  천병득 수행과장은 즉시 무전으로 경호원들에게 지시했다. 孫守益 충남지사도 부하 공무원들에게 재촉했다. 이들이 마을 이장을 통해 원로를 찾는 사이 대통령은 노인들이 서 있는 곳에 다가가 “연세가 제일 높으신 분은 나오셔서 저와 함께 테이프를 끊으시지요”라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테이프 절단식장은 방조제 입구에 마련되어 있었다. 대통령은 가위를 받아 이희일 장관 등 관계 공무원들과 함께 테이프를 자르기 위해 줄을 섰다. 그동안 합덕읍에 사는 李吉淳(이길순·당시 83세) 노인이 그날 참석한 사람들 중 가장 연로한 사람임이 밝혀졌다.
  
  하얀 턱수염에 돋보기를 끼고 새마을 모자를 쓴 한복 차림의 이 노인은 몸 둘 바를 모르며 대통령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다. 대통령보다 작은 체구의 이 노인은 주위에서 급히 마련해 준 흰 장갑과 가위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대통령은 한 손으로 이 노인이 자를 오색 테이프의 한 허리를 들고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기다렸다.
  
  긴장한 이 노인의 오색 테이프는 좀처럼 잘려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가위질을 도와주었다. 주위에서 박수가 터졌다. 대통령은 자리를 뜨지 않고 잠시 이 노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올 농사는 잘 지으셨겠지요. 댁내도 모두 편하시고”라고 안부를 물었다. 박 대통령은 “버튼도 같이 누르시죠” 하며 이 노인을 끌었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눌렀다. 이 순간을 잡은 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 사진이 됐다. 버튼을 눌러도 삽교호의 막혔던 물이 갑문을 통해서 서해로 쏴- 빠져나가는 장면은 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은 옆에 있던 이희일 장관에게 “어디야, 어디야?”라고 물으면서 두리번거렸다.
  
  박 대통령은 배수갑문이 열린 삽교천 방조제 위로 걸어가 갑문 사이로 물이 빠지는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이희일 장관과 함께 승용차로 3,360m의 방조제 위를 달렸다. 李 장관은 방조제 도로 옆에 자란 잔디가 몇 달 전에 씨를 뿌렸던 미국産 ‘켄터키 블루’라고 설명했다.
  
  건너편 牙山군 쪽에 도착한 박 대통령은 湛水碑(담수비)를 제막했다. 물개 세 마리가 하늘을 향해 서 있는 모양이었다. 碑를 감싼 흰 천이 세찬 바람에 휘감겨 있어 박 대통령이 줄을 잡아당겨도 벗겨지지 않았다. 급기야 수행 경호원들이 비 위로 올라가 천을 벗겨 내려야 했다.
  
  
  死神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담수비 제막을 마친 뒤 주위의 평야에 야적된 볏단을 바라보더니 수행한 관계자들과 출입기자들을 향해 말했다.
  
  “물이 괸 논은 십자형으로 나무를 세우고 벼를 다발로 묶어 그 위에 걸쳐 말리면 습기가 완전히 제거되어서 벼이삭도 잘 건조됩니다.”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던 공군 1호기에 오른 대통령은 헬기가 이륙준비를 하는 동안 먼 들판을 응시했다. 기체가 떠오르기 직전에 그는 좀 떨어진 곳에 모여 있던 출입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공식 행사가 기다리고 있는 唐津을 향해 출발한 시각은 11시 40분경.
  
  박 대통령이 삽교천 행사장을 둘러보던 그 시각, 金聖鎭 문공부장관은 두 시간째 꼬불거리는 시골길을 달려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김 장관은 하루 전날 도고호텔로 내려와 있었다. 10월 26일 오전에 김 장관은 삽교천 행사장을 들르지 않은 채 느지막이 승용차편으로 새로 건립된 KBS 對北방송 중계소로 향했다. 예전 같으면 먼저 열리는 행사장에 장관이 참석했다가 대통령을 모시고 자신의 소관 행사장으로 와야 했다. 차지철의 경호실은 대통령과의 과잉접촉을 근절한다는 이유로 이 관례를 바꾸어 주무장관은 자신의 행사장에서 대통령을 기다려야 했다.
  
  건평 500평 남짓한 2층 건물에 안테나 두 개가 솟아오른 자그마한 중계소는 아주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은 중앙정보부가 관할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에 金載圭가 대통령 전용기에 동승할 뜻을 비쳤던 것이다. 김 장관이 중계소에 상주할 직원들과 함께 건물을 먼저 둘러보는 동안 맑은 가을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모래 섞인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공군 1호기와 2호기가 중계소 앞뜰에 착륙했다. 2호기에서 내린 경호원들이 경호 배치를 한 후 1호기에서 박 대통령이 내려오고 차지철이 그 뒤를 따라 내려왔다. 대통령을 모시고 행사장으로 간 김 장관은 대통령과 함께 중계소 현관 앞에서 준공과 개관을 축하하는 테이프를 잘랐다. 그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몇 가지 시설들을 설명한 뒤 미리 준비해 둔 방으로 안내했다. 시멘트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 들어선 박 대통령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순간 김 장관은 흠칫 놀랐다.
  
  “그토록 또렷하던 대통령의 날카로운 눈빛이 간데없었어요. 나를 바라보던 눈빛은 퀭하니 眼光이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얼굴에는 윤기도 없고 대통령 특유의 긴장감도 없었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 장관, 나 물 한 잔 주어.”
  
  대통령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작은 행사를 마치고 대통령이 이렇게 기진맥진한 채 물을 청하는 모습에 김성진 장관은 목이 멨다. 냉수를 받아 든 대통령은 단숨에 꿀꺽꿀꺽 다 들이켰다. 그러고는 어깨의 힘을 쭈욱 빼더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묵묵히 무엇인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때까지 박 대통령을 만 9년 동안 모셔왔던 김성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광경에 애가 탔다. 김 장관은 불안해졌다.
  
  ‘어디가 편찮으신가? 아니면 삽교천 행사 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언짢은 일이 있었나?’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잠시 후 대통령은 밖으로 나가 예정된 기념식수를 한 뒤 헬리콥터로 향했다. 헬기 동승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김 장관은 대통령의 뒤를 따라가다가 헬기 문밖에까지 전송하게 됐다. 헬기에 올라탄 박 대통령은 김 장관을 보더니 “왜 안 타나?”라고 했다. 행사 후 KBS 직원들과 동네 유지들을 모시고 점심을 같이하기로 되어 있었던 김 장관은 대통령의 채근에 헬기로 뛰어올랐다. 먼지를 일으키며 1호기가 이륙했다. 뒤따라 이륙을 시도하던 2호기는 엔진 고장을 일으켜 주저앉고 말았다. 약 30분 동안 2호기는 KBS 중계소 앞뜰에서 긴급수리를 해야 했다. 먼저 이륙한 1호기는 한 시간 전에 행사를 치렀던 삽교천 방조제 부근 상공으로 비행했다. 그동안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무슨 생각에 골몰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며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김 장관이 귀를 기울여도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서 계속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김 장관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김 장관이 머뭇거리자 박 대통령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또다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도고호텔 앞마당에 공군 1호기가 착륙한 것은 12시 40분이었다. 소음으로 가득 찬 좁은 공간에서 바람과 먼지가 휘말려 올랐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사슴 사육장에서는 헬기 소리에 놀란 새끼 밴 사슴 한 마리가 머리를 벽에 들이받고 죽었다. 잇단 사고들은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도고호텔 2층 회의실에서는 오찬이 있었다. 대통령의 좌석은 맨 끝에 독상 차림으로 마련되어 외딴섬처럼 느끼게 되어 있었다. 그 좌우로 길다란 탁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孫守益 충남지사 등 17명이 앉았다.
  
  예전에는 대통령과의 오찬석상에서 비서관들은 예의를 깍듯하게 차리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는 데 지혜를 모으곤 했다. 웃음도 있었고 농담과 재담이 넘치곤 했다. 그날 김성진 장관은 ‘딱딱하게 말라 버린 가랑잎 같은 존재들만이 대통령을 저 멀리 쳐다보면서 밥술만 뜨는 참으로 한심하고 송구스러운 점심’으로 기억했다.
  
  농담은 대통령이 주로 했다. 대통령은 “金元基 장관이 뜻밖에 준공식장에 나타나 이상하게 생각했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이 “당진이 제 고향입니다”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그렇군”이라고 가볍게 받으면서 농담조로 이런 말도 했다.
  
  “이희일 장관이 청와대에 있을 때는 쌀값을 높게 책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니 농수산부 장관이 되자 추곡수매가를 올리자고 하는데 입장이 바뀌면 모두 그렇게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은 또 7일 전에 있었던 싱가포르 李光耀(리콴유) 수상과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이 수상이 그러는데, 공산당과의 싸움에서는 내가 죽든지 적을 죽이든지 하는 두 길밖에 없다는 거야.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 2009-04-08, 16: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