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才들을 사랑한 프라하" 이야기
趙成寬 기자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열대림. 1만8000원)이란 책을 냈다.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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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의 편집위원으로서 왕성한 집필을 하고 있는 趙成寬 기자가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열대림. 1만8000원)이란 책을 냈다. 프라하를 배경으로 창작활동을 하였던 카프카, 드보르자크, 스메타나, 포르만, 그리고 극작가 출신 대통령 하벨 같은 천재들의 이야기를 프라하 위에 입힌 듯한 글이다. 관광도 하고 영화도 보고 역사도 느끼고 음악도 즐기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다가 6년 전 프라하를 여행할 때 썼던 기행문이 생각 나서 여기에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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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刊朝鮮 여행단은 오전 8시에 뉘른베르크를 출발하여 프라하로 향했습니다. 한 2시간 달리니 국경 검문소가 나왔습니다. 독일에서 체코로 들어가는 트럭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운전기사 톤다氏가 우리 일행 40명의 여권을 모아 체코 입국 관리소에 건네 주었습니다. 수속에 40분이 걸렸습니다. 프랑스-독일 국경 사이엔 아예 검문소가 없습니다. 다른 EU(유럽연합) 국가의 국경통과는 여권 검사 없이 이루어집니다. 체코는 1999년에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으나 EU에는 내년에 가입할 예정입니다. 따라서 유로貨를 쓰지 않고 「크로나」라는 自國 화폐를 씁니다. 국경 출입국 관리소 내 환전소에서 바꾸니 1유로가 30크로나였습니다.
   체코로 들어가 프라하로 달리는데 프랑스 농촌과 비슷한 풍요한 농촌 풍경이 전개되었습니다. 잘 뻗은 고속도로, 정비된 농토, 관리된 山林 등 정리정돈이 잘된 나라의 山河였습니다.
  
  
   필센 맥주
  
   우리는 중간에 「필센」이란 도시에 들러 점심을 먹었습니다. 필센은 현대 맥주 제조법을 발명한 도시입니다. 필센 맥주는 최고급 맥주입니다. 그 맛의 상큼함, 적당히 쓴맛, 깊은 느낌은 저 같은 反주류파에게도 부드럽게 다가왔습니다. 필센은 13세기에 건설된 도시인데, 聖 바톨로뮤 성당 광장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넓었다고 합니다. 1295년에 건축이 시작된 이 고딕 성당의 첨탑은 높이가 102.6m로서 체코에서 최고입니다. 광장은 200m×150m쯤 되어 보였는데 광장을 둘러싼 건물群은 르네상스, 바로크 등 여러 형식의 경연장 같았습니다.
   우리는 용케도 큰 식당을 하나 찾아내 점심을 시켜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필센 생맥주가 무척 맛있었습니다. 유럽의 고급식당은 단체 손님을 잘 받지 않습니다. 4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을 구하는 것이 「코스 디자이너」 愼鏞碩씨의 고민거리였습니다.
   필센은 공업도시입니다. 1859년에 설립된 스코다 기계공장은 무기와 자동차를 생산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집중공습을 받았습니다. 이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스코다 자동차는 공산주의 시절 동구권의 총아였습니다. 필센의 역사를 보면 15세기 종교개혁가 후스의 운명과 연결됩니다. 필센市는 후스에 동조했습니다. 이 도시는 세상의 종말이 올 때 구원받을 다섯 도시 중 하나로 일컬어졌습니다. 후스가 화형당한 뒤 그의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필센市는 그들과 맞서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신교도들이 1618년 프라하에서 신성로마제국과 로마교황을 상대로 봉기하자 필센은 신교도 군대에 점령당했습니다. 2년 뒤 신교도 군대는 구교도 군대에 대패했고 그 뒤 300년간 독립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의 지배권을 공인받은 이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방은 신교에서 다시 구교화됩니다. 이런 역사의 격변을 지켜본 聖 바토로뮤 성당은 오늘도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프라하로 가는 車中에서는 건축학을 전공한 한 여행단원의 건축강의가 이어졌습니다.
   『건축의 역사는 내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건물은 외관보다 내부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서양의 교회는 神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조각이 많고 조각은 거의 성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모르면 서양 건축 특히 고딕 건축을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서울에서 세계에 내놓을 만한 건물이 하나 있다면 宗廟(종묘)이다. 위엄 있고 소박한 모습이 자랑스럽다』
  
  
   프라하 카를 다리 위에서
  
   우리 여행단이 체코의 프라하에 도착한 것은 9월24일 오후 4시 무렵이었습니다. 프라하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예약해 놓은 음악회를 보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꼬불꼬불 좁은 프라하 거리를 관광객 틈에 섞여 몇 번 돌아나가자 오래된 건물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이 건물은 클레멘티눔이라는 수도원이었습니다. 예배당이 연주홀이었고 간이 의자가 300개 정도 놓여 있었습니다. 연주시간인 오후 5시가 되자 기타, 플루트, 첼로, 오보에로 구성된 4중주 악단이 나와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연주곡은 모차르트, 드보르작, 비발디, 스메타나 등의 곡목이었습니다. 드보르작이 작곡한 「신세계」 교향곡의 라르고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프라하에서 들으니 두 음악가의 애국심이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음악도 역사적 현장감이란 게 있는 모양입니다.
   저녁을 먹은 뒤 밤늦게 일행 네 사람과 함께 舊市街 광장과 카를 다리를 걸어 보았습니다. 이 광장과 다리는 프라하城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구경거리입니다. 독일 젊은이들을 필두로 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들뜬 기분으로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리와 광장의 조명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광장 근처에 있는 고딕 성당의 첨탑 부분이 창공에 솟아올라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청동색으로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선죽교가 있다』
  
   이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의 동상이 있습니다. 1372년 후스는 보헤미아(체코의 지역 이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났습니다. 그는 프라하의 카를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고, 신학대학 학장도 지냈습니다.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영국의 종교개혁 신학자 존 위클리프였습니다.
   당시 부패한 천주교는 보헤미아 지방 토지의 반을 차지하고는 농부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배층에 대한 반감이 종교개혁 사상과 맞물려 후스를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체코 왕을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당대의 두 권력집단인 정권과 교회를 다 敵으로 돌린 것입니다. 1415년 종교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火刑에 처해졌습니다.
   舊市街 광장의 후스 동상은 1915년 화형 500년이 되는 해에 만들어졌습니다. 후스가 처형된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신교도 군대를 만들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이 200년 뒤인 17세기 초 30년전쟁의 불씨가 되어 이 지역을 戰亂으로 몰아넣습니다.
   카를 다리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가 1400년에 완공한 길이 500m, 높이 50m, 너비 20m의 돌다리입니다. 舊시가 쪽 다리는 높이 40m 가량의 탑이 서 있고 다리 난간을 따라서는 30여 개의 조각상이 서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다리입니다. 블타바江(독일어로는 몰다우江)은 한강의 반 정도 폭을 가진 강인데 프라하의 한가운데를 흐릅니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는 아름답기도 하고 견고하기도 합니다. 만든 지 550년간은 사람, 마차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통과시켰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차량통행을 금지시켰습니다.
   밤중에 이 다리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 위의 프라하城과 舊市街 광장의 성당 첨탑이 은은한 조명 속에서 오막살이처럼 경건한 불빛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매우 힘들 것입니다. 다리 위에선 집시로 보이는 걸인 여자가 큰 셰퍼드犬을 끌어 안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여 동전을 던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작년 여름에 블타바강에 큰 홍수가 나서 카를 다리가 유실될 뻔했다고 합니다. 시내의 침수로 지난 연말까지 지하철이 운행되지 못했습니다. 프라하에는 카를 4세 大帝가 만든 다리, 학교, 城 등이 무척 많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라하를 수도로 정하고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한 모양입니다. 다리 입구에 놓인 그의 동상은 세종대왕처럼 아주 인자스러운 임금님 모습입니다.
   잘 만든 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편의뿐 아니라 즐거움을 주고, 훌륭한 관광자원으로서 후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 주는가 하면, 시민들의 놀이터이고 거리 악사들의 무대일 수 있다는 것을 카를 다리가 모범으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힘이 셉니다. 우리 여행단의 한 사람이 『이 다리가 만들어지던 때가 朝鮮개국 무렵인데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체코에 카를 다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선죽교가 있다』
  
  
   『어설프게 권력에 도전하면 이렇게 맞아 죽는다』
  
   프라하에는 600년 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카를 4세 때가 이 도시의 전성기인데 그때부터 600년간 戰火에 휩쓸리지 않았으므로 이 도시는 여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하나 추가해 가면서 진주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프라하에 오면 슬라브 냄새보다는 독일 냄새가 더 많이 납니다. 체코 민족의 피에는 폴란드나 러시아와는 달리 슬라브 민족과 독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습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합니다. 슬라브 민족의 양순함, 憂愁, 예술성, 독일 민족의 근면과 성실과 치밀함이 융화된 것이 체코의 민족성, 예술성, 그리고 역사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술과 공업과 맥주로 유명한 체코의 국가적 성격을 만든 것이 아닐까요. 블타바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800년에 걸쳐 건설된 城은 길이 570m, 너비 128m입니다. 그 안에 성당과 대통령궁 등 건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城門이 대단합니다. 城門 위에 큰 석조상이 두 개 있는데,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고 찔러 죽이는 모습입니다. 우리 여행단의 안내인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체코를 지배하면서 너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만든 조각이다』고 설명했습니다.
   여행단의 일원이 『그렇다고 저런 식으로 피지배 민족을 자극해서야 되겠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 조각상은 1767~1770년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 타이탄像입니다. 맞아 죽고 찔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두 청년인데, 그 손동작이 끝까지 칼과 몽둥이를 든 사람에게 저항하는 모습입니다. 이 조각상을 본 체코 사람들은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왔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여행단의 일원은 『金泳三 前 대통령이 여기에 와서 저 조각상을 보았으면 민주화에 역행한다고 중앙청처럼 당장 때려부수라고 했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상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했습니다. 「권력자에게 어설프게 대들다가는 맞아 죽는다」는 뜻.
   이 조각상 밑에서 不動자세로 서 있는 두 군인의 옷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분청색깔의 군복인데, 이 옷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체코 출신의 영화감독 밀로시 포르만이 감독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프라하에서 촬영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하벨 대통령은 이 영화의 의상담당자를 불러 대통령궁 성문지기 군인들을 포함한 전체 군인들의 정복을 새로 디자인해 달고 했다는 것입니다. 분청색 군복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존재했던 체코공화국의 군복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이날(9월25일) 城은 인파로 붐볐습니다. 한 해에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은 6000만~1억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체 입국 관광객의 열 배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근 독일지역 관광객들이 와서 하루 만에 돌아가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만, 지금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프라하임은 확실합니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가 관광객 半, 시민 半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으면 소매치기도 많은 법, 종일 여권이 든 호주머니를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30년전쟁의 발화점
  
   城 안에는 옛 王宮이 있습니다. 이 건물 안에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파견한 총독이 근무했던 총독부 방이 있습니다. 1618년 5월28일 新敎로 개종한 체코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보낸 관리들과 그 비서들을 이 방의 창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들은 죽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이 사건은 그 뒤 중앙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몰아간 「30년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프라하이지만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가 여기서 發火된 것입니다.
   체코는 1938년 뮌헨 협정의 희생물이 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한 원인으로 제공됩니다. 1968년에는 공산정권下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가 소련군의 개입으로 침묵했지만 1989년 11월 「우단 혁명(Velvet Revolution)」을 통해서 공산독재를 무혈로 끝장냅니다. 체코 사람들이 보여 준 최근의 행태는 「현명」과 「신중」과 「교양」이란 말로 상징됩니다. 실력과 분수에 넘는 행동을 자제하다가 결정적 시기가 오면 결정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역사를 확실하게 전환시키는 힘은, 저의 추측입니다만, 과거의 시행착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30년 전쟁은 체코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결말이 났습니다. 구교도 세력이 이 지역에선 이겼기 때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교도들을 再구교화하는 정책을 폅니다. 체코 사람들은 30년전쟁을 통해서 현명함을 체득했고, 그것은 1989년 11월 공산정권 타도 때 가장 극적으로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1989년 11월17일 공산당 지배下의 체코 정부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구타했습니다.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바츨라프 광장에서 연일 계속되었습니다. 한때는 70만 명의 시위대가 이 광장을 메웠습니다. 1989년 11월24일 이 광장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국립박물관 발코니에 알렉산더 두브체크(196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서기장)와 바클레브 하벨(뒤에 대통령)이 나타나 공산당 정권 타도를 선언했습니다. 공산정권은 즉시 정부를 인계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오전에 우리는 민주화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을 거닐었습니다. 지금은 철거된 우리 중앙청과 거의 같은 크기의 국립미술관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 국립박물관의 위치가 옛 중앙청을 개조해서 쓰던 중앙박물관과 비슷했습니다. 다시 한 번 중앙청을 부수어 역사를 파괴한 정치인들의 無知에 흥분하는 목소리들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지도층은 체코 사람들과는 달리 역사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형식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아주 위험한 경향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교훈을 살리지 못하고 그 뒤 40년 사이에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었습니다. 피할 수 있었던 것을 우리가 스스로 불러들인 전쟁이지요.
   6ㆍ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인명을 잃고도 지금 한국은 그 전쟁을 초래했던 金正日 세력에 속고 국내 좌익세력의 발호를 허용하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여행객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당하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프라하 관광은 대부분 도보로 이루어 집니다. 차도와 인도 할 것 없이 시내 대부분의 도로는 작은 직사각형 돌조각을 박아서 만들었기 때문에 편한 신발을 신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가 있습니다.
  
   어리숙한 척하는 체코인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 저녁식사는 프라하의 분위기가 넘치는 곳에서 했습니다. 「콜코보나」라는 술집 겸 음식점이었는데 우리의 허름한 맥주집 같은 곳이었지만 명소라고 합니다. 공산주의 시절 체코의 지식인과 反체제 인사들이 이 술집을 드나 들며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오리 요리가 아주 일품이었지만 그것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음식이 너무 많아 거의 손도 대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생맥주 한 잔이 1유로(1300원). 독일권에선 와인이 맥주에 밀리고 있었습니다.
   9월26일, 우리 여행단은 프라하의 메리오트 호텔에서 駐체코공화국 李浚熙 한국 대사를 모시고 강연을 들었습니다. 체코에 대한 단편적 지식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정리해 주는 것 같은 유익한 강의였습니다.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는 쉽고 간략한 법입니다.
   李대사는 체코의 역사를 잘 해설해 주었는데, 그 핵심은 체코인들이 일찍부터 독일, 오스트리아와 소통하면서 서구와 일체가 되어 움직였다는 점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게르만 문화권과 함께 발전해 왔기 때문에 슬라브的 후진성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체코인들의 특징을 李대사는 「교양있고, 진지하고, 겸손하며, 잘 훈련ㆍ교육된 점」이라고 요약했습니다. 체코 사람들은 현명하고 똑똑한데도 어리숙한 척하기도 하면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 간다고 했습니다. 무식하면서도 똑똑한 척하고, 실력이 없으면서도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지도층에 너무나 많은 한국의 사정과 퍽 다릅니다.
   체코는 현재 1인당 GNP가 약 7000달러, 구매력은 1인당 1만4000달러 수준으로 한국을 바짝 좇아 오고 있습니다. 문화와 역사의 축적에서 우러나는 체코의 저력이 아주 단시간에 공산치하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서구로의 복귀를 성공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 2009-05-19, 11: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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