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滯北 행적
“한 줌도 안 되는 매국노와 외세를 몰아내라!”고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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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호 月刊朝鮮에서 인용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고 일곱 차례 金日成을 만난 혐의로 기소된 ‘장길산’의 작가 黃晳暎씨(49·본명 黃秀暎) 재판이 지난 7월12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25부(재판장 梁三承 부장판사)에서 열렸다.
  
   黃씨가 서울을 떠난 것은 1989년 2월28일이었다. 소설 ‘무기의 그늘’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려고 일본에 간 그는 이토 나리히코 교수와 일본 사회당 위원장 도이 다카코에게 부탁하여 3월16일 북한 ‘조선문학예술 총동맹’ 백인준 위원장(73·‘범민련’ 북측 의장) 명의의 초청장을 받았다.
  
   북경을 거쳐 3월20일 평양 순안비행장에 도착한 黃씨는 세 차례 김일성을 만났는데 한번은 文益煥씨와 함께 金日成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 金日成은 “黃동무의 소설 ‘장길산’을 읽어보았는데 재간이 대단하더라. 앞으로 통일의 역군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하였다 한다.
  
   4월24일 북한을 떠난 黃씨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金주석은 통일 열망이 대단했다. 이제는 金日成이란 호칭은 삼가고 金주석으로 불러야 한다”, “주체사상은 인간의 창조성과 자주성을 으뜸으로 보는 사상이며 사랑과 평등을 구현하는 사회적 생명체다”, “金日成 주석은 을지문덕 이순신 세종대왕처럼 우리 역사상 위인의 한 사람이다”는 등의 발언을 하였다.
  
   1989년 9월 독일 체류 중이던 黃씨는 북한에 있는 이모 전경숙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평양에 갔다. 이모의 장례식과 평양에서 개최된 윤이상 음악회 등에 참석한 그는 10월 독일로 돌아왔다. 1990년 4월18일에는 黃씨의 처 김명숙씨(39)와 아들이 독일로 출국, 黃씨와 합류했다.
  
   1990년 8월2일 그는 가족을 데리고 범민족대회의 남측대표 자격으로 세 번째로 입북하였다. 8월13일엔 백두산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개막식 겸 백두-한라 대행진 출정식’에 참가했으며 다음날엔 金日成경기장에서 열린 ‘범민족대회 대표단 환영 평양시 군중집회’에 참석, “조국의 허리에 채워진 철쇠의 상징고리 판문점을 넘어 대행진을 하자. 반제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조국의 평화통일 만세”라고 연설하였다.
  
   8월15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 온 그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한줌도 안 되는 매국노와 외세를 몰아내자”라고 주장했다. 8월19일 범민련 출범식에서 대변인에 임명된 黃씨는 범민련 출범을 공식선언하였다. 그가 독일로 돌아온 것은 8월29일이었다.
  
   1990년 12월6일 네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고 1991년 1월에는 허리 디스크 치료를 명목으로 부인과 함께 다섯 번째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5차 방북에서 黃씨는 조선영화촬영소 등에서 광주사태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각색한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감수했다. 또 ‘4·15창작단’에서 집필한 金日成 80돌 기념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전 10권 발간 계획) 1,2권 원고를 감수했다.
  
   다섯 번째 입북에서 黃씨는 金日成을 두 차례 만났다. 이때 黃씨가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는 것을 안 金日成은 “黃동무는 조국통일의 보배이니 미국에 가지 말고 물 좋은 조선에서 나의 회고록 집필을 도와주고 치료나 하며 살면 어떻겠느냐고”고 권유하였으나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한다.
  
   1991년 5월 그는 4개월간의 체북(滯北)생활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왔다. 黃씨는 1991년 6월29일부터 이틀간 열린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단 회의 및 1991년도 범민족대회 준비회의’에 맞춰 독일에 있던 전대협 소속의 성용승군과 박성희양을 만나 이들을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991년 11월15일 미국 뉴욕으로 옮겨간 黃씨는 잠시 범민련 활동을 중단하고 6·25전쟁시의 소위 ‘신천대학살’을 집필하고 계간지 ‘남·북·해외’의 발간을 추진하였다. 1992년 12월 중순엔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온 북한 통일전선부 부부장 한시해로부터 미화 25만 달러(약2억원)를 받았다.
  
   올해(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보안법 위반사범들에 대한 특별사면을 단행하자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이 黃씨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정부의 사전보장 없이도 귀국할 것인가’ 등을 묻는 공개질의서를 黃씨에게 보냈다. 黃씨는 ‘남북정상회담의 물밑 대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식의 요지를 전해왔다고 한다. 마침내 뜻을 굳힌 黃씨는 金日成에게 ‘민족문학의 길에 다시 서기 위하여 귀국을 택하였다’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다 한다.
  
   黃씨는 귀국에 앞서 북한 유엔대표부의 주동진에게 11만 달러를 돌려주었다 한다. “정전 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 “북한의 핵사찰 거부는 자주권의 발동이다”, “나는 구시대의 유물인 보안법의 마지막 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등의 귀국성명서를 발표하고 지난 4월27일 귀국하였다.
  
[ 2013-05-18, 12: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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