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수, "대한민국은 아버지를 버린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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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을 버린 나라?
한국이다.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켜 독립국으로 만든 투사를 버린 나라?
한국이다.
6.25동란을 극복하고 경제건설의 토대를 만든 위인을 버린 나라?
한국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데모가 일어났다. ‘4.19 의거’다.
당시 경무대로 달려오던 군중들을 경찰관들은 카빈 소총을 발사하며 저지했다.
‘인의 장막’에 둘러싸인 대통령은 총성을 듣고서야 사태를 파악한다. 그리고 4월 26일 김정렬 당시 국방장관에게 말한다.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그래. 그렇게 하지”라고.
그리고 경무대를 찾아온 시위학생 대표 중 한 명인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兪一羅)에게 말한다.
“국민이 원하면 물러가야지.”
독재자였다면 4.19 하야가 가능했을까?
왕손으로 태어나 왕정 개혁을 부르짖다가 감옥살이한 청년,
미국서 독립을 지키려 애쓰다가 망국의 설움을 안고 민주주의 를 공부하여 박사가 된 천재,  
자유 민주주의를 조국에 심으리라 대한민국을 세운 독립투사,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던 건국 대통령은 자신이 키워낸 민주국민의 힘에 하와이로 망명해야 했다.
국민들이 아버지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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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 ⓒ 뉴데일리
건국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의 오늘의 위상을 보려면 서울 종로구 이화동 이화장에 가면 된다. 동네사람이나 알까? 택시기사들도 낯설어한다. 내비게이션엔 뜬금없이 이화장 예식장 또는 웨딩홀이 나온다.
우남 이승만 박사 기념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의 이화장은 서울시 지방문화재에서 최근 국가문화재로 승격됐다. 하지만 이름만 그럴 뿐, 작고 초라하다.
이 곳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 이인수 박사(전 명지대 교수)와 조혜자씨 부부가 살고 있다.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44주기를 앞둔 16일 이화장을 찾았다. 이 대통령의 44주기 추도식은 18일 오전 10시 동작동 현충원에서 거행된다.
 
이인수 박사는 1961년 12월 13일 하와이에서 이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니'하고 물으셨다. 나는 군사혁명 후 아직 전도를 알 수 없으나 이 대통령이 마련하신 한미상호조약과 미군이 주둔해 있고 군사정부가 반공정책을 지켜나간다면 우선 국가의 안전이 지켜질 것으로 보고 '젊은이들이 나서서 잘해보겠다고 하니 잘 되겠습지요'하고 나도 모르게 자신 없이 대답을 해드렸다.
그러자 아버님은 '그 잘 돼간다는 말을 너는 믿지 말아! 내가 그 말을 믿다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니?'하시며 우리나라가 지정학적으로 국제정치의 어려움 속에서 민족의 건전한 생존과 발전을 기하려면 그렇게 쉽게 잘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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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수 박사 ⓒ 뉴데일리
망명지에서도 나라걱정을 하던 건국대통령은 그렇게도 그리워했던 조국 땅을 끝내 못 밟고 하와이에서 숨을 거뒀다.
“4.19 이후 50년간 모든 정권이 이 대통령을 매도해왔습니다. 평생을 구국운동과 독립운동, 건국운동으로 바친 분에게 너무 매몰찼습니다.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을 버린 것은 우리가 어려웠지만 꼭 기억해야할 한 시대를 스스로 매장한 것이나 같습니다.”
이인수 박사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대한민국이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긴 나라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을 교과서에서 빼거나 왜곡한 것은 우리나라의 건국사와 건국이념을 송두리째 외면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뿌리를 없앤 것이죠. 나라의 정체성을 부인한 것입니다.”

없어졌던 나라를 찾아준 나라의 아버지, 이 대통령의 업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대통령의 교육입국 이념은 건국에서부터 전시에도 반영이 되었거니와 전후엔 국민 일반의 열화 같은 교육열과 함께 각급 학교는 활기에 넘쳤습니다. 교육자가 존경받는 위신이 섰던 시대였지요. 이것은 1982년 하버드 대학의 갈브레이스(J. K. Galbraith)교수가 말한 것처럼 후진국 경제발전에는 먼저 일반교육이 보급되어야 하고 정치적 안정, 그리고 자본과 기술의 도입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그 수순이 이미 1950년대 이 대통령 치하에서 경제적 도약을 위해 준비되고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50년대 이 대통령이 양성했던 인재들은 60년대와 70년대 이 나라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끄는 전사가 된다.

요즘 말 많은 국방 역시 이 대통령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이 대통령은 1953년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선 말 이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불안정이 주변 열강간의 전쟁을 유발해 결국 우리는 일제 36년의 지배를 받았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에는 북한 공산집단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미방위조약으로 국가안보를 확고하게 다진 것입니다. 안보가 바탕이 되지 않고 경제발전이 가능했겠습니까?”
이 박사는 이 방위조약을 노무현 정권이 작통권 환수라는 어처구니없는 카드로 무너트린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은 분 아닙니까?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5.10선거 당시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과의 합의에 따라 선거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건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인수 박사는 “당시 김구와 김규식은 김일성에게 놀아난 꼴”이라고 말했다.
5.10선거를 두고 반쪽선거라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당시 북한은 이미 소련에 의한 김일성 정권이 완성돼 있었다. 그런데 선거를 하려면 기존 김일성 정권은 문을 내려야 한다. 이를 김일성 정권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
최근 ‘한국진보세력 연구’를 펴낸 원로 언론인 남시욱 씨도 “이 대통령의 남한만의 정부 수립을 남북분단의 원인처럼 보는 것은 넌센스”라고 지적했다. “당시 국제정세에 밝았던 이 대통령이 공산화의 위험을 예지해 결단을 내린 것”이라는 것이 남시욱 씨의 분석이다.

“대통령부터 결심해서 우리나라 건국대통령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있어야 합니다. 교과서에도 우리나라의 건국이념과 건국대통령의 업적이 다뤄져야 하고요.”
이인수 박사는 얼마 전 이화장을 찾은 한 지인이 해준 얘기를 소개했다.
“어린 손자가 어디 가시냐고 물어서 이화장 간다고 했대요. 그랬더니 이화장이 뭐냐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이 사시던 곳이라고 했더니 ‘독재자의 집엔 왜 가냐’고 하더랍니다.”
이 박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 기요틴에서 숨을 거뒀다. 프랑스 혁명 얘기다.
처형식의 군중들은 루이 16세의 피를 온몸에 뿌리며 춤을 췄다. ‘타부’를 낳은 원시인들의 살부(殺父) 의식이나 비슷하다.
한국은 5년마다 이 같은 살부(殺父)의식이 답습되는 나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은 죽음의 도마에 오른다. 구속되고 자살하고…. 현대판 ‘피의 축제’다. 
우리는 근현대사에 존경할 위인이, 기댈만한 어른이 없는 나라가 됐다.
존경할 누구도 없는 나라의 국민은 고아나 다름없다. 비극이다. 
집안에 어른들이 없는 나라의 국민은 누구의 말도 듣지않고 믿지않는다.
줏대없는 나라, 줏대없는 국민, 대한민국은 오늘도 떠돌고 있다.

 

 

[ 2009-07-19, 00: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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