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운전기사를 암살기도범으로 모는 데 평생을 바친 노벨평화상 수상자
트럭사고를 박정희 정권의 암살기도라고 주장한 김대중 日記를 공개한 유족들의 책임도 크다.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오늘 유족들이 공개한 김대중 日記 6월2일자에는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라는 대목이 있었다.
  
  김대중씨는 이미 단순교통사고로 밝혀진 사건을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살인음모라고 주장하였다. 유족들이 이 부분을 삭제하지 않고 공개함으로써 트럭운전사를 살인미수자로 모는 중대한 명예훼손을 저지른 셈이다. 김대중씨가, 박정희를 惡黨으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 무고한 시민을 살인미수범으로 조작하였다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85년 4월15일 저녁 필자는 月刊朝鮮 기자로 근무중이던 吳効鎭씨와 함께 김대중씨를 만나러 갔다. 그가 동교동 자택을 개축하기 위하여 비우고 길 건너 창천동에서 집을 전세 내어 입주한 직후였다. 2층 서재에서 김씨는 밤이 늦도록 김대중 납치사건과 트럭사고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生(생)과 死(사)를 오고간 장면에다가 권력자의 음모가 등장하고 미국 CIA 이야기까지 나오니 흥미진진하였다. 박 정권이 트럭을 동원하여 자신의 승용차를 밀어 죽이려 하였다는 술회 끝에 김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은 내가 다 알아요. 누가 시켰다는 걸.'
   ― 누가 시켰습니까?
   '당시 대통령 측근들이예요. 그 트럭의 소유자가 그 당시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모 변호사예요. 그 운전사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는 갈려버리고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1년 징역을 받았는데 다 살지 않고 나왔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했어요. 저는 다섯 번의 죽을 위기에서 다 살아나왔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써, 당신의 목적에 쓰시려고 그렇게 구해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박정희가 트럭으로 政敵(정적)을 죽이려 하였고, 실패하자 증거인멸을 위하여 운전자를 없애버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1987년 大選(대선) 운동기간중 김대중씨는 연설을 통해서 이 트럭사고를 자주 언급하고 다녔다. 나는 월간조선 그해 11월용 기사로 ‘1盧3金의 약점’이란 주제의 글을 준비하다가 이 트럭사고를 취재하게 되었다.
  
  
   필자가 알아보니 사고 트럭은 범한화물(주) 소속이었다. 사장은 洪國泰(홍국태)씨. 그의 아버지가 사고 당시 공화당 전국구의원 후보였던 洪承萬(홍승만·작고·당시 대한변협회장). 洪사장은 기자에게 『그 사고는 단순 교통사고였다』면서 『신민당원들이 사고 운전사 집에 몰려가 괴롭혔다. 수사와 재판은 공정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金大中씨로부터 『운전사가 의문의 죽음을 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운전사와 접촉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는 부산시 동래구 연산 6동에서 살고 있었다.
  
   權重億(권중억·당시 51세)씨는 아직도 회사 출퇴근 버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와 통화를 해서 15년 전의 사고 이야기를 꺼냈더니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 사고가 문제가 되어 있습니까』
  
   權씨는 이렇게 사고를 설명했다.
  
   『그때 비가 좀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기 영 7-4755호 트럭을 몰고 목포로 가는데 무안군에서 마주 오던 차량 행렬을 보았습니다. 택시가 맨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오던 세단차―여기에 金大中씨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사고 뒤에 알았습니다―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제가 보고 당황했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비탈길에 비가 내려 그런지 왼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세단을 약간 스치고 뒤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죽었습니다. 저는 뛰어내려 택시 승객부터 끌어냈고, 지나가는 차들한테도 구원을 청했습니다. 세단차는 길 아래로 처박혔는데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달아났습니까.
  
   『아뇨. 거기에 있다가 경찰차가 조사하러 와서 경찰로 끌려가 구속되었지요. 금고 10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형을 다 살고나와 보니 살림이 엉망이 되고, 결국 아내와 헤어진 뒤 두 딸을 키우며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세단차에도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
  
   『법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사고를 유발시킨 것은 세단차의 중앙선 침범이었어요. 그래도 저의 잘못이 크지요』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고의성 있는 사고라는 쪽으로 추궁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없었습니다. 지금 선생님한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1997년 11월15일 도서출판 산하에서 출간된 당시 대통령 후보 金大中씨의 自傳的 에세이 「나의 삶 나의 길」에도 트럭사고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암살음모설을 유지했다. 金大中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이 에세이에서 「나는 그(사고) 때문에 반년 이상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했고 다리와 허리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서 진찰해 보니 股關節(고관절)에 장애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야만적인 독재정권이 선물한 교통사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고 썼다.
  
   1998년 7월 하순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부산으로 내려가 權重億씨를 찾아갔다. 62세인 그는 여전히 부산시 연산동 달동네에서 재혼한 부인과 어렵게 살고 있었다. 모 회사의 야간 경비 근무로써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權씨는 트럭 사고의 피해자가 대통령이 되어 상당히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는 『동네에서도 직장에서도 모르고 있는 일』이라면서 『제가 이 사실이 알려져 직장을 그만두게 되면 세 식구가 굶어죽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당시 수사 검사:『외압은 없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전에 그는 광주 경찰서에 불려가 트럭 사고와 관련하여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權重億씨는 사고 상황에 대해서는 1987년에 趙甲濟 기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을 되풀이하였다.
  
   『사고가 난 날은 비가 왔습니다. 왕복 2차선 도로이고, 커브를 지나자마자 맞은 편에서 중앙선을 침범해 달려오는 차를 보았습니다. 급 브레이크를 밟았지요. 빗길에 차가 밀리는데 아무리 핸들을 틀어도 틀려야 말이지요. 차가 90도 각도로 10m쯤 미끄러졌는데 스키드 마크 자국이 선명히 났습니다. 조사한 사람들이 그것을 다 보았고, 조사 기록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禹鍾昌 기자는 1998년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대통령님, 오해를 푸십시오」란 題下의 기사를 취재 중 金大中 대통령의 둘째 아들 金弘業씨의 아내 申仙蓮씨의 아버지 申鉉守씨(前 감사위원)가 사고를 낸 트럭회사의 사장이던 洪國泰씨와 인척 간임을 밝혀냈다. 洪國泰씨의 할머니가 申鉉守씨의 고모가 된다는 것이었다. 申씨는 공직에서 물러난 뒤 洪國泰씨가 소유하고 있는 한국 컴퓨터의 상임고문에 취임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禹鍾昌 기자는 또 이 트럭 사고를 수사한 검사가 국민회의(현재 민주당) 소속 許京萬(허경만) 전남지사임도 알아냈다. 許지사는 당시 목포 검찰 지청 소속 검사였다. 그는 『상당히 고의적으로 난 사고일 가능성이 있고, 金대통령도 그렇게 주장했었다』면서 『金대통령에게 「그런 의심은 가지만 운전사가 졸았다고 주장하고 있고 본인이 자백해 주지 않으면 살인 예비혐의로 기소하기에는 참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얘기하고 그렇게 처리했던 사건이다』는 요지로 말했다.
  
   許京萬 지사는 金大中씨의 주장과는 달리 자신이 이 사건을 끝까지 맡아 기소했고 그 뒤에 인사발령에 따라 인천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수사할 때 외부로부터의 압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급제동을 걸 때 생기는 스키드 마크도 있었다고 기억했다.
  
   禹鍾昌 기자는 『그 트럭 운전사가 요즘 뭘하고 있는지 압니까』 하고 물었다.
  
   『미국으로 이민 갔다가 현지에서 무슨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그 후 金대통령 측근으로부터 들었습니다』
  
  
   2000년 12월10일 밤 金大中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었다. 필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수상 연설에서 『독재자들에 의해서 일생에 다섯 번에 걸쳐서 죽을 고비를 겪어야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다. 2001년 1월호 月刊朝鮮 「편집장의 편지」에서 기자는 「金大中 대통령이 오해해서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운전사) 權씨를 살인미수범으로 몰고 있다면 노벨평화상의 수상 자격을 의심받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1985년 김대중씨가 나에게 말하였던 음모설은 전부가 근거 없는 것임이 밝혀졌다. 의문의 죽음을 했다는 운전사는 살아 있었다. 더구나 수사검사는 아무런 압력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김대중씨는 단순 교통사고자를 살임미수범으로 몬 데 대하여 한 마디 사과는커녕 오늘 공개된 일기를 통하여 또 다시 權씨를 괴롭혔다. 이젠 김대중씨 유족들이 수십년간 계속해온 허위의 주장에 대하여 도덕적,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한 시민의 人權을 이렇게 짓밟아놓고도 사과 한 마디 하지 않고 저승으로 갔다.
[ 2009-08-21, 22: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