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평등해진 건 李承晩의 농지개혁 덕분

金容三(월간조선)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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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업적을 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이다. 현대사 전문가들은 건국 직후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시행된 토지개혁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다.
  
   조선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는 물질이나 돈을 비천한 것으로 규정했다. 황금 천시(賤視)사상은 곧 상업 천시로 이어졌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도 하에서 상업을 가장 비천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가 깊이 뿌리내려졌다.
  
   농업을 제외하고는 산업이 태동하지 못해 민족자본 축적이 불가능했고, 그 결과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야 하는 산업화는 엄두도 못내는 상황에서 해방을 맞게 됐다. 국내에 남은 유일한 민족자본이라고는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까지 이어져 온 토지자본이 전부였다.
  
   선각자 이승만의 앞선 사고방식
  
   이승만 대통령은 세계 최고의 선진 공업국이었던 미국에서 수십 년을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엘리트 교육을 받은 당대의 선각자이자 지성인이었다. 그는 미국 망명 생활과 독립운동 과정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선진 공업국의 장점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건국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한국 사회의 근본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야 한다’는 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야만 수천 년 이어온 지주-소작인의 갈등 관계를 청산하고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는 토양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의 방법론에 있어 북한 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신문(1948년 12월7일자) 보도에 의하면 이대통령은 “북한식 농지개혁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에 노예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에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또 같은 신문 12월10일자에는 “자본이 대부분 토지에 있는 한국에서는 지주들이 다 토지를 내 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태로 농지개혁을 진행하고, 지주들에게 토지대금으로 지급된 자금으로 산업화로 나갈 방침을 밝혔다.
  
   당시 의회의 다수 의석은 지주 계급이 주가 된 한민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지주계급에 결정적 타격이 가해질 농지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비장한 각오와 비상한 수단이 필요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지개혁을 반드시 성공시켜야만 나라가 바로 선다는 각오 아래 과거에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씨를 농림부장관에 발탁하여 한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지개혁을 강도 높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 1950년 3월부터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점은 농민들에게 분배 농지 예정 통지서를 발급한 것은 법과 시행령이 완성되기 이전에 이대통령의 의지로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대통령은 “춘궁기가 촉박했으므로 추진상 불소한 곤란이 있더라도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개정 법령과 시행령이 미처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먼저 행정적 조치들이 신속히 추진됐다.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로부터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농지개혁이 시행된 지 3개월만에 6ㆍ25 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파괴한다. 돈의 가치라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정부는 마구 돈을 찍어 유통시킴으로써 전시(戰時) 인플레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가지수는 서울 도매 물가를 기준으로 1945년을 100으로 할 때 1947년 855, 1950년 2974, 1951년 1만8753, 1952년 4만605, 1953년 5만863으로 폭등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 양상을 보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지주들은 전시 인플레로 인해 휴지 조각처럼 변한 지가증권을 투매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그 결과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지주 계급은 몰락했고, 경제 부흥과 산업 발전에 쓰여졌어야 할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은 지주들의 생활비나 소비 자금으로 유실되어 갔다.
  
   우리와 달리 대만은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한 나라다. 특히 중소 규모의 지주들이 내놓은 토지를 대가로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만은 건실한 중소기업 위주의 산업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우리 나라는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소 지주들의 지가증권이 제 역할을 못하고 소비됨으로써 특히 중소기업의 뿌리가 근본적으로 취약한 경제 구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축적이 미약한 상황에서 산업화가 추진된 결과 우리 기업들은 만성적인 자본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원조자금이나 해외 차입금, 은행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또 중소기업의 뿌리가 허약해 대기업 위주의 경제발전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가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우리 나라 유일의 민족자본이었던 토지자본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이 6ㆍ25를 맞아 몰락해 가자 정부는 귀속 기업체 매수자가 타인 명의의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이를 귀속 기업체 인수 대금으로 지불할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 즉 지주가 아닌 제3자가 지가증권을 매입하여 귀속 기업체 매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한 것이다. 정부는 지가증권이 더 이상 부스러기 돈으로 공중분해되는 것을 막고, 산업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전시 인플레에 시달리고 피난살이의 와중에 생활비 해결에 애를 먹던 지주들은 지가증권을 액면가의 40%~80%로 처분하고 몰락해 갔다. 반면에 신흥 기업가들은 지가증권을 싼값에 매입하여 귀속재산 불하 대금으로 납입함으로써 손쉽게 산업 자본가로 도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6ㆍ25를 맞아 지가증권의 투매현상에 대해 조선일보(1981년 3월27일)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지가증권을 사면 돈 번다는 소문이 퍼지자 피난 시절의 부산시 광복동 길거리에는 지가증권을 사고 팔겠다는 사람들로 붐볐다. 별의 별 이름의 증권회사 간판들이 즐비하게 나붙었고 가죽가방을 들고 “증권 사려”를 외치고 다니면서 거두어들인 것들로 신흥 증권업자를 자처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정부로부터 정식 증권회사 인가를 받은 증권업자는 대한증권주식회사 하나뿐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나머지 그 많은 증권회사, 업자들은 모두 무면허 가짜 증권업자들이었던 것이다.>
  
   삼양사의 김연수(金秊洙) 회장은 1950년대 초 울산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설립하면서 투자 대금의 일부를 지가증권으로 조달했다. 두산그룹의 박두병 회장은 동양맥주 불하 과정에서 34억원의 불하 가격 중 10%를 부친(박승직) 명의의 지가증권으로 납부했고, 나머지 대금도 액면가의 30%로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일부 충당했다. 선경직물의 창업자 최종건 회장도 선경직물 불하 과정에서 수원 지역 토착 지주인 차철순씨의 지가증권으로 매수 계약금 13만환을 지불했다. 또 한국화약 창업자 김종희 회장은 1951년 6월에 한국화약공판이란 회사를 불하 받는 과정에서 계약금의 일부인 1억원을 시중에서 싼값에 구입한 지가증권으로 충당했다.
  
   그러나 지가증권을 활용한 지주의 자본 전환 성공률은 지극히 낮은 수준이었다.
  
   연세대 이지수씨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농지개혁 당시 20정보 이상의 농지를 분배당했던 호남지역 지주 418명을 조사한 결과 산업 자본가로 전업한 지주는 이 가운데 47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불과 11%의 지주만이 성공을 거두었을 뿐,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농지개혁 때 일반 보상으로 지급된 지가증권의 총 보상액 가운데 귀속재산 매입에 동원된 비율은 54%로 집계됐다. 전체 귀속 기업체 불하대금의 절반 정도만 지가증권으로 납입되어 산업자본화했고, 나머지 절반은 생활 자금, 소비 자금 등으로 부스러기 돈으로 흩어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부흥부장관, 재무부장관을 역임하며 경제정책 입안과 시행의 사령탑 역할을 했던 송인상(宋仁相)씨(효성그룹 고문)는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농지개혁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의해 지주ㆍ소작 제도가 아니라 농민이 그 땅을 소유한다는 원칙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만에서 보듯이 농지개혁에서 얻은 지주자본이 귀속재산 불하와 연결되어 공업자본화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지금도 있다.
  
   농지개혁 직후 한국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연간 50%를 넘었다. 인플레 때문에 지주가 가지고 있던 지가증권의 가치가 폭락했고, 그 결과 산업자본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유일한 민족자본이었던 토지 자본이 공업자본화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자본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이런 의견에 대한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우리 나라 지주 계층이 근대식 경영을 해 본 경험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토지자본이 산업자본화 했다 해도 실제 경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 격이 김각중(金珏中) 전 전경련 회장(주식회사 경방 회장)이다.
  
   김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 근대식 방직공장이 들어온 것이 1850년대. 그 후 일본은 산업혁명을 경험한 나라들이 겪은 과정을 그대로 답습하며 산업화의 길을 걸었다. 즉 방직업에서 기계산업, 중화학공업 등으로 이행한 결과 태평양전쟁 무렵에는 미국이나 유럽 열강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세계적인 공업국 대열에 오를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에도 그들은 산업화에 대한 100여 년의 풍부한 경험과 기술진이 그대로 남았으며, 대규모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경영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본만 뒷받침될 경우 손쉽게 전후(戰後)복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에 우리 나라는 사회 지도층이었던 지주와 양반 계급이 해방될 때까지 공업이나 산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없었다. 해방 후에는 우리 나라 기업인이 창업한 기업 중 경성방직이 유일한 산업 시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산업 수준이 보잘 것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농지개혁으로 지주들이 받은 지가증권을 산업자본화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산업 시설 운영 능력이나 경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제대로 성공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전주 지방에서 120정보를 소유하고 있던 이부영(李富榮)씨를 비롯한 지주들의 전주방직 실패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이부영씨를 비롯한 전주 지방의 대지주 5명은 지가증권의 3분의 2씩을 투자하여 방직공장을 불하 받고 실무는 일제 때 근무했던 종업원들을 모아 그들에게 경영을 맡겼다. 그러나 근대적인 회사 경영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지주들에겐 예기치 않았던 부담이 뒤따랐다. 공장을 인수하여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불하자금 외에 운전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5명의 지주들은 다시 돈을 모아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그러나 운영자금 외에도 상당한 부담이 뒤따랐다. 결국 회사 운영을 포기하고 삼양사에 공장을 넘기고 말았다. 사업에 뛰어든 지 불과 1년만에 다섯 명의 지주는 지가증권을 다 날리고 빚만 잔뜩 지게 됐다. 이런 사례는 당시 우리 나라 지도층들이 산업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이해시키는 일반적 사례일 것이다.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사연을 가슴에 안은 채 시행된 농지개혁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라는 차원에서 복잡한 문제들이 노출된 것은 예기치 못한 전쟁이 가져다 준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지주계급은 대대로 토지를 세습했고, 소작인 계급은 대를 물려 소작인으로 존재함으로써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 현상을 되풀이해 왔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지주 계급이 소멸됨으로써 뿌리 깊게 이어져 오던 지주-소작인, 즉 부자와 빈자(貧者)간의 갈등을 일거에 불식시킨 것이다.
  
   학자들은 세계의 여러 나라 중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면서도 소득 분배가 한국처럼 공평하게 이루어진 나라는 유래를 찾기 힘들다고 평한다. 그 뿌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은 근대화 출범 초기부터 지주-소작인간의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균질한 사회로 출발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첨예한 계급 갈등의 소지를 미래 해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농지개혁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성과다.
  
   동아시아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한 일본, 한국, 대만은 중산층이 두텁게 자리잡아 경제 성장의 초석이 됨은 물론 사회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한 반면, 남미(南美) 여러 나라들은 농지개혁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극단적인 빈부 격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가 된 것을 비교하면 그 뚜렷한 성과가 나타날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는 조선조 500년 동안 뿌리 깊게 이어졌던 반상(班常)의 계급 구분이 사라졌고, 건국 후 농지개혁으로 인해 부자와 빈자(貧者)의 격차가 무너졌다. 전 국민이 계급 없고, 빈부 격차가 사라진 ‘차별 없는 시대’가 열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기회의 균등이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 풍토가 훗날 한국인을 상징하는 ‘하면 된다(Can do spirit)’는 의욕과 참여 동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김용삼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 2009-09-06, 09:1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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