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과 합당, 그리고 閉黨(폐당) 제조기
유시민의 새우당원 유괴 수법이 이번에도 성공한다면, 대한민국의 정의와 정당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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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희재, bignews@bignews.co.kr 등록일: 2009-10-19 오후 5:09:43
  
  창당과 합당, 그리고 폐당 제조기 유시민이 또 다시 친노신당에 합류하여 정당을 창당할 것을 공식 선언했다. 유시민은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의 인터뷰에서 '언제 입당하면 좋을지는 그분들(국민참여신당 추진세력)이 판단해서 이야기해주면 입당할 계획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특히 친노신당에 합류하여, 지자체 등 선거 때 민주당 등과 연합공천도 가능하다고 언급하여, 예의 정치공학적 발상도 아울러 밝혔다.
  
  <여섯 번의 당적 변경, 세 번의 창당, 정치 철새 1인자>
  
  유시민은 평민당 시절 당시 이해찬 의원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데뷔한 이래로, 벌써 개혁당, 열린우리당, 대통합민주신당, 다시 민주당을 거쳐, 이제 친노신당에 몸을 담으며, 6번째 당적을 옮기게 된다. 사실 상 본격적으로 정치를 시작한 지는 2002년 개혁당 창당부터이니 7년 만에 화려한 정치적 변신의 경력을 쌓고 있는 것. 특히 유시민은 이인제 의원과 달리 개혁당과 열린우리당은 사실 상 직접 창당해놓고서, 타 당과의 합당을 위해 본인이 앞장서서 죽였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유시민은 2002년 10월 민주당 후보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고래를 삼키는 새우가 되겠다”며 개혁당 창당에 나섰다. 오마이뉴스 등 친노 인터넷매체의 지원 아래 개혁당은 창당하자마 무려 4만명의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한나라당 출신의 김원웅 의원을 당대표로 영입하여, 원내 정당이 되었다. 노무현 후보는 당선되자마자 민주당이 아닌 개혁당을 찾아, 유시민과 함께 축배를 맥주잔을 들었다.
  
  그뒤 2003년 4월 유시민은 개혁당의 후보로 고양 덕양갑에 출마한다. 이 당시 유시민은 “절대 구태 정당인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는 없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워 개혁당 당원들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아 민주당의 송영길, 정동영 등은 민주당 후보를 사퇴시키며, 개혁당과 후보단일화에 합의한다. 개혁당의 당원들은 강력히 반발했지만 유시민은 특별히 해명하지 않고 유유히 당선되었다
  
  유시민은 개혁당을 중심으로 한 친노신당 창당의 깃발을 내세웠고, 유시민이 움직일 때마다 민주당은 크게 흔들렸다. 특히 민주당 내의 신기남, 친노세력 내의 이강철의 활약이 돋보였다.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 등 친노언론들은 연일 민주당의 구태를 비판하며 신당창당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나팔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한다. 급기야 2003년 8월 민주당은 크게 요동치며, 2003년 9월, 김근태, 이해찬, 문희상, 정동영, 신기남 등 42명은 민주당을 탈당 독립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이들 외에도 한나라당에서 이부영, 김부겸 등 5명이 탈당, 이들은 2004년 1월 11일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정치적 대도박을 감행했다.
  
  이들이 노린 것은 2004년 총선이었다. 유시민은 이에 이론적 기틀을 제공하며 “민주당의 이름으로는 절대 영남권에서 당선될 수 없다”는 점을 선동하여, 결국 신당을 창당하기에 이르렀다. 노무현은 곧바로 민주당을 탈당, 민주당은 재집권 1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유시민이 주도한 일련의 민주당 분당 사태는 세계 정치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정당 민주주의 파괴였다. 물론 1995년 정계복귀하며 민주당에서 분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 김대중식 방식과 매우 닮아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분당 때의 민주당은 당시 야당이었다. 수법은 비슷했으나, 국민의 심판을 받기 전이었으므로 유시민의 정당 파괴와는 격이 달랐다. 유시민의 경우는 민주당 후보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노무현 대통령을 빼내어 신당을 만들면서 여당을 야당으로 만들어버린 상식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방법을 택했다. 2004년 총선 전까지 노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총선은 여당이 없는 기형적인 구도에서 선거가 펼쳐진 것이다.
  
  <유시민, 자신이 창당한 개혁당 죽이기 위해 온갖 술책>
  
  여기까지는 당시의 언론보도만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법한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이 한 가지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개혁당이다. 고래를 삼킬 새우가 되겠다는 개혁국민정당은 어떻게 되었을까?
  
  2003년 10월 27일, 유시민을 비롯한 구 개혁당 집행부는 세상에서 가장 신기한 전자투표를 감행한다. 안건은 “우리 당은 신당에 전원 참여한다. 참여방법 및 전국당원대회 결과에 따른 법률적 절차 등은 전국상임위원회에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안건 자체가 위법이었다. 정당 해산에 관한 안건은 무조건 전당대회에서 결정해야한다. 그러나 그런 안건을 올리면 통과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 신당참여를 안건으로 올려놓고, 그 방법까지 함께 물었던 것이다. 이미 유시민 등의 집행부에 불만을 갖고 있던 당원들이 집단 탈당한 뒤였지만, 투표에서조차 가까스로 이 안건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불법으로 개혁당 해산을 선언한다. 이들의 횡포에 대해서 선관위는 개혁당 해산을 인정하지 않았고, 개혁당은 다수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한 뒤 2기 집행부 체제로 유지되었다. 즉 유시민은 정당법까지 어겨가면서 개혁당을 해산시키려 했으나 이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살아있되 정치적으로는 죽었다'는 유시민의 말처럼 개혁당의 숨통은 사실 상 끊어져있었다. 구 집행부가 열린우리당으로 탈당한 이후 그간 그들의 우군이었던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은 개혁당에 대한 보도를 일체 하지 않았다. 심지어 불법적 해산이 자행되었을 때조차 이에 대한 비판기사는 단 한 건도 보도하지 않았다.
  
  유시민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하면서 고래를 삼키겠다는 새우들의 정당 개혁당은 잊혀졌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일생 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유시민세력이 떠난 개혁당을 살리기 위한 2기 집행부는 유시민이 개혁당의 자금을 유용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 사건도 곧 잊혀지고, 유시민은 노무현 정권 실세로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한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유시민에 배신당한 평범한 서민 개혁당원들에 대해서, 친노언론들은 어디도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잇따른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점점 침몰하고 있었다. 이에 열린우리당은 호남에서의 참패를 극복하기 위해 잔류한 민주당과의 통합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에 김한길 등은 선도 탈당하여 민주당과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남은 열린우리당과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었다. 여기서 쟁점이 되었던 사안은 바로 열린우리당의 창당의 주역 유시민의 태도였다.
  
  유시민의 열린우리당 창당의 명분은 호남당을 탈피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남에서 지지를 받아 수도권의 지지로 확산, 호남도 이에 따라오도록 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므로 잔류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다시 합당하게 되면 유시민의 명분은 사라지는 판이었다. 열린우리당의 강경 친노세력은 유시민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시민은 2007년 5월 22일 전격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을 사퇴하여 당으로 돌아온다. 당에 복귀한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당원들을 대상으로 “열린우리당의 정신을 승계하지 않는 신당에는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발언하여 당원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는다.
  
  <개혁당에 이어 열린우리당 해산 때도 유시민이 주도>
  
  그러나 이러한 유시민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이해찬이 주도하여 열린우리당과 잔류 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당하기로 합의한다. 문제는 여기서도 개혁당 때와 똑같은 문제가 남게 된다. 열린우리당에서 합당을 결의할 전당대회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개혁당 때는 전당대회를 통한 결의가 불가능할 거라 판단한 유시민 세력이 전자투표라는 편법을 동원했으나, 선관위로부터 무효 판결을 받았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전당대회를 열어 재적 대의원의 과반수가 출석하도록 해야했던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2007년 8월 18일, 고양 킨텍스에서 전당대회를 개최, 전격적으로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의 합당을 결의한다. 이 과정에서도 유시민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맹활약한다. 유시민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대선출마 출정식을 열며, 자신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 대의원들을 대거 모았다. 당시 8월 17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확인한 대의원 명부 5374명이, 그 다음날 전당대회 직전, 5200명으로 줄어드는데, 최고위원 회의는 개최되지도 않았다. 단 하루 사이에 대의원 174명이 사라졌는데, 이를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는 최고위원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참여 정족수 문제를 개결하기 위해 전체 대의원수를 전당대회 당일날 줄여버린 것이다.
  
  이러다보니 언론 역시 혼란을 겼었다. 머니투데이의 경우 8월 18일 오후 2시발 기사에서 재적 대의원을 5374명으로, 과반 정족수를 2674명으로 보도했다. 김혁규 의원 측에서는 이미 정족수 확보가 불가능하다 보고, 기자들에게 대의원 대회가 무산되었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오후 4시10분,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느닷없이 재적 대의원이 5200명이고, 2641명이 참여하여 정족수를 채웠다고 성원보고를 했다. 윤호중 대변인은 “17일까지 5374명이었는데, 이중당적자와 탈당자를 정리하여, 18일 오전 5200명으로 선관위에 보고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대의원명부를 확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당 의결기구인 최고위원회의가 열렸다는 말은 없었다.
  
  이에 열린우리당 지킴이 등의 평당원들은 전당대회 현장에서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 건은 결국 법원에까지 넘어갔지만, 이미 결의된 사항이 뒤집어질 수는 없었다.
  
  전당대회에서, 개혁당 출신의 김원웅, 그리고 김혁규 등등은 합당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며 반대 연설까지 했었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쇼일 수는 있으나 100년 갈 정당이라 선전하여 기간당원을 모집한 당지도부로서 당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던 것이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한 유시민 만큼은 단 한번도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대선출정식을 같은 장소에서 개최하여, 전당대회 표결 결의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로 출마, 결국 이해찬 캠프까지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유시민은 개혁당 때와 마찬가지로 역시 단 한 번도 당원들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개혁당 때도 열린우리당 때도 유시민에게 당원이란 당을 만들 때만 필요한 도구였지, 이들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역시 친노언론들은 마지막까지 열린우리당을 지키겠다는 개미당원들의 목소리를 전하지 않고, 유시민 등 권력의 나팔수 역할만 충실히 이해행했다.
  
  <불편한 관계, 손학규 대표되자, 명분없이 탈당>
  
  이렇게 정치 폭력으로 만들어진 대통합민주신당, 유시민은 대선 직후 또 다시 이 당마저 탈당한다. 명분은 없었다. 단지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세력과 불편한 관계인 손학규가 당 대표가 되자 전격적으로 탈당했다. 표면적으로라도 내세운 명분은 “현재 대통합민주신당에서는 진보적 가치가 살아숨쉴 수 없어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시민의 명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일단 일반적인 진보적 가치의 측면에서 유시민은 이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가장 중점을 둔 사안은 한미FTA 반대였다. 유시민은 한미FTA를 추진한 친노세력의 상징이었다. 그가 내세우는 진보적 가치는 주로 이러한 정책이 아닌 정당 민주화였다. 그러나 그는 개혁당을 창당했다 파괴했고, 그 파괴의 산물로 만들어진 열린우리당도 파괴했고, 역시 그 산물로 창당된 대통합민주신당에서도 탈당했다. 그야말로 정당 제조기이자 정당 파괴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리고 탈당 직후 선언했던 진보정당, 친노신당에 합류하여 6번째 정당이자, 세 번째 창당을 주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번에도 친노 네티즌들은 유시민을 응원하고 있다.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시절 유시민에 배신당한 새우 당원들의 눈물을 보도하는 언론도 없다. 유시민의 창당 및 파괴쇼가 리바이벌될 수 있는 이유이다.
  
  <유시민은 서민 당원 유괴범, 정당 민주주의 종언 또 선언될까>
  
  개혁당 창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때와 달리 유시민은 구 민주당 세력과의 연합공천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시절, 호남정치세력과의 연합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강경 입장과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노무현이라는 절대 권력의 우산 밑에 있었던 반면, 현재로서는 민주당이 진보좌파 진영의 기득권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마치 개혁당 시절 민주당과 연합공천은 없다고 주장하여 당원들의 지지를 받다가, 자신의 당선을 위해 당원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를 했듯이 말이다.
  
  유시민이 친노신당을 주도하면, 현 민주당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될 전망이다. 유시민의 “고래를 삼키는 새우가 되겠다”라는 선언은 2002년에 이어 지금도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 민주당 내에서는 안희정, 한명숙 등 친노세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유시민의 친노신당이 뜨게 되면, 친노신당과의 합당 및 연합공천 문제로 민주당은 분열될 것이며, 유시민과 친노세력은 또 이렇게 민주당을 통째로 삼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가 역사는 비극으로 한번, 희극으로 한번 되풀이된다 했지만, 유시민 세력은 늘 같은 수법을 희극으로 성공시키고 있는 셈이다.
  
  유시민만의 다른 정치철새들과 다른 독특한 수법은 창당시 반드시 서민 새우 당원들을 모아서, 이들의 돈으로 창당한 뒤, 정권이나, 구 민주당 같은 기득권 세력과 연합공천이나 합당에 임한다는 것이다. 새 정치를 한다고 해서 참여한 수많은 서민 새우 당원들이 반대하면, 친노언론을 활용해 이들의 목소리를 차단시켜, 자신의 정치적 수법을 관철시킨다. 그야말로 정당 파괴범을 넘어 아예 서민당원 유괴범 수준이다. 고래를 삼킨 건 유시민 한 명이고, 나머지 서민 새우당원들은 모두 고래와 야합한 유시민의 뱃속에 들어갔을 뿐이다.
  
  만약 유시민의 새우당원 유괴 수법이 이번에도 성공을 거둔다면, 대한민국의 정의와 정당 민주주의는 사라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시민이 대한민국의 정당 민주주의 종언을 고할 수 있을지 섬세하게 지켜보겠다.
[ 2009-10-20, 17: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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