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산 평화 '전연의 盟’
鄭淳台의 역사기행- 北宋(북송)의 敗亡史가 남긴 교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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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수가 많고 경제력이 강하다고 해서 군사력도 그와 비례해서 강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오히려 배고픈 군대가 배부른 군대를 이긴 경우가 더 많다. 北宋은 文臣 優位, 武臣을 천시한 나쁜 풍토를 만들어 멸망을 자초했다.

 

鄭淳台st-jung@hotmail.com

 

돈으로 산 평화 ‘澶淵(전연)의 盟’

 

中國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지만, 국방력은 가장 허약해 민족적 굴욕을 감수해야 했던 漢族의 나라가 宋나라였다. 宋은 북방에서 흥기한 기마민족들인 거란・西夏(서하)・金(금)・몽골 등에 대해 돈과 비단을 주고 평화를 구걸하는 정책을 구사하다가 결국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말았다.

 

宋나라의 굴욕외교를 오늘의 한국인은 비웃을 자격이 없다. 좌파정권의 집권 당시, 이런저런 명목으로 북한의 金正日에게 수십억 달러의 현금을 제공, 그것이 北核이란 부메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利敵(이적)행위를 국법으로 처벌하지 못하고, 아직도 일각에서 ‘행동하는 良心(양심)’ 운운한다면 한국의 미래는 아직 어둡다. 남한 사회 내부에 親北 좌파의 국가반역행위를 보장・고무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宋의 3代 황제 眞宗(진종) 때, 거란족의 나라 遼(요)의 成宗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왔다. 이에 겁을 먹은 眞宗은 매년 銀 10만 량과 비단 20만 필을 바치기로 하고 遼와 화해했다. 이것이 바로 ‘澶淵(전연)의 盟’(1004년)이다. 전연은 황하 북안의 군사도시 澶州(전주)에 위치한 호수의 이름으로, 이 호반에서 전연의 盟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굴욕을 당하고도 일단 평화가 회복되어 宋의 국가경제는 다시 호전되었다. 眞宗은 굴욕외교를 호도하고 추락한 황제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해 秦始皇(진시황)과 漢武帝(한무제)처럼 山東의 泰山(태산)에서 封禪(봉선)의 제례를 올리느라고 막대한 국고를 낭비했다. 그래도 宋의 財政이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封禪은 오랑캐를 물리치고 國泰民安을 이룩한 황제만이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漢族왕조의 국가적 이벤트였다.

 

그러나 眞宗 다음 仁宗 때 지금의 甘肅省(감숙성), 陜西省(섬서성) 일대에서 西夏(서하)가 흥기하여 宋의 서북 변경을 침략했다(1038년). 이후 수년간 막대한 戰費(전비)를 투입한 탓에 宋의 경제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西夏는 티베트系 탕구트族이 세운 나라이다. 西夏의 영걸 李元昊(이원호)는 자국산 淸白鹽(청백염)의 수출이 宋의 소금 專賣制(전매제)에 의해 막히게 되자, 그 자신을 宋의 황제와 대등한 大夏皇帝(대하황제)라 일컬으며 宋에 도전했던 것이다.

 

西夏․宋의 전쟁은 一進一退(일진일퇴)를 하며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런 틈을 타 遼는 宋에 대해 關南(10개 縣)을 할양하고 宋의 公主를 妃(비)로 보내라고 협박했다(1042년). 2正面 전쟁이 불가능했던 宋은 또 다시 遼의 武裝干涉(무장간섭)에 굴복했다. 협상 결과, 宋이 종래의 歲幣(세폐:중국 역대왕조가 북방의 유목국가에 일정액의 물자를 수여하기로 한 외교적 和親政策)에다 비단 10만 필과 銀 10만 량을 증액하여 遼에 지급하기로 했다.

 

1044년, 宋-西夏의 강화도 성립되었다. 강화 조건은 宋이 西夏에 대해 매년 비단 15만3000필, 銀 7만2000량, 茶 3만 斤(근)을 歲幣(세폐)로 지급하기로 한 것이었다. 國初 이래 매우 풍부했던 宋의 국가재정이 仁宗 중반 이후 기울기 시작해 말년에는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 그 원인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군사비의 증대였다. 國初에 40만이었던 병력이 仁宗代에는 12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遼와 西夏에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병사에 대한 급여가 급증하여 국가재정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宋은 돈이 많이 드는 傭兵制(용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둘째, 관료에 대한 인건비도 급증했다. 매년 관료의 수가 늘어난 데다 관료에 대한 대우가 중국 역대 왕조 중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遼와 西夏에 대한 歲幣 지급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北宋 仁宗 때(1044년)에 편찬된 <武經總攬>에 수록된 宋代의 갑옷 圖解(도해). 왼쪽은 重裝騎兵用(중장기병용) 馬甲, 위쪽은 强弩(강궁)도 파괴하지 못했다는 步兵 갑옷.>>

 

王安石(왕안석)의 개혁新法 시행

 

仁宗에 이은 英宗 때(1063-67)가 되면 국가재정은 완전 적자로 전락했다. 재정적자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이 宋 왕조의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英宗을 승계한 神宗(신종)은 王安石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王安石의 개혁정치인 新法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北宋의 富國强兵策을 추진한 王安石>>

 

*靑苗法(청묘법)-당시의 빈농은 端境期(단경기)가 되면 식량은 물론 볍씨까지 소비해버려 地主로부터 돈을 빌렸는데, 그 이자가 6개월에 70-100%에 달해 소작인 혹은 農奴로 전락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와 같은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정부가 저리의 영농자금을 융통해 주는 빈농보호법이었다.

 

*保甲法(보갑법)-國民皆兵制(국민개병제)의 民兵조직을 만드는 법이었다. 宋代는 원래 傭兵制(용병제)를 채택했는데, 요․서하의 침략에 대비한 병력의 증가에 따라 국가재정이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농촌에 10家의 保, 50家의 大保, 500家를 都保로 하는 자치조직을 만들어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실시, 兵農一致(병농일치)의 민병조직으로써 국방력을 증강시키려 했다. 王安石의 계산에 의하면 保甲制가 완성되면 용병제의 10분의 1 정도로 국방 관련 인건비가 삭감될 수 있었다.

 

王安石의 新法에는 중소 상공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市易法(시역법), 戰馬를 확보하기 위한 保馬法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법은 宋의 富國强兵策이었다. 新法은 王安石의 재임 중에 상당한 성과를 올려 국가재정이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 新法은 지주・관료・豪商(호상)・皇族(황족) 등 기득권 계급의 이익을 심대하게 침해하여 이들의 맹렬한 반대에 봉착했다. 이로써 新法黨과 舊法黨의 정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王安石은 재상직에서 사임했다(1076).

 

神宗이 3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1085년). 개혁 君主의 퇴장은 宋왕조의 불행이었다. 그의 장남 哲宗이 승계했지만 겨우 10세의 소년. 哲宗의 조모 宣仁太后(선인태후)가 攝政(섭정)이 되었다. 태후는 진작부터 아들 神宗이 추진하던 개혁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1086년 舊法黨의 司馬光이 재상으로 등용되자 新法은 완전히 廢棄(폐기)되고, 仁宗시대의 舊法으로 되돌아갔다.

<<北宋의 개혁을 반대한 사마광>>

 

司馬光은 대중의 환호를 받았던 표퓰리즘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資治通鑑(자치통감)>을 저술한 超일류 학자이기는 했지만, 정치가로서는 失格(실격)이었다. 그는 재상 재임기간중에 아무런 代案조차 제시하지 못했고, 反動정치로써 사회 혼란만 유발시켰다. 정치가로서의 인기가 實績과 일치하지 않은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계속)

 

[ 2009-10-24, 11: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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