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族은 왜 騎馬民族(기마민족)의 ‘밥’이 되었던가
奸臣(간신) 3人 때문에 멸망한 경제대국 南宋 ③: 賈似道(가사도)의 戰果 조작과 16년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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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 st-jung@hotmail.com

   

北宋 멸망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南宋의 외교


中國 본토에서 여진족의 金과 漢族의 南宋이 싸움과 화해를 되풀이하고 있을 때 북방에 대두한 제3의 세력이 몽골족이었다. 칭기즈칸이 즉위했던 것은 宋의 한탁주가 실지 회복을 위해 金과 전투를 했던 해(1206년)이었다.


全몽골의 지배자가 된 칭기즈칸은 西夏를 토벌하고, 바이칼湖 주변의 부족을 공격하는 등 급격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몽골은 그 직전까지 金에 예속하여 공물을 바쳐왔는데, 이런 관계가 이제 역전되었다.


1213년, 칭기즈칸은 남침을 개시. 山東・河北 등의 50여 郡을 점령했다. 金은 公主 및 소년・소녀 각 500명, 馬 3000두, 黃金, 비단 등을 바치며 화평을 구걸했다. 전리품을 얻은 칭기즈칸은 미련 없이 회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몽골은 약탈만 하고 땅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 몽골·금·남송 형세도

 

金의 宣宗(선종)은 수도 燕京(연경)에서 버티기 어렵다고 보고, 1214년 5월 汴京(변경: 옛 北宋의 수도 開封)으로 천도했다. 칭기즈칸은 金의 천도가 몽골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트집을 잡아 출병, 1215년 연경을 함락시켰다.


1219년, 칭기즈칸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西征(서정)의 길에 올랐다. 당시 中央아시아의 최강국은 아무江 유역 사마르칸트에 도읍하고 있던 호라즘 왕국이었다. 몽골군은 破竹之勢(파죽지세)로 호라즘 왕국을 정복하고, 1225년까지 南으로는 인더스江 유역에, 西로는 카스피海를 넘어 南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 하에 두었다.

 

▲ 몽골의 騎馬전술. 몽골군은 馬上에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파르티아 샷에 능숙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귀환하던 칭기즈칸은 1227년 西夏(서하)를 토멸하고, 나아가 金으로 진공하려 했지만, 감숙성 六盤山(육반산)에서 병사했다.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은 그 자손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2代 오고타이 칸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아 1230년부터 金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오고타이 칸이 親率(친솔:몸소 인솔)한 몽골 기병군단은 大同(山西省)을 거쳐 남하했고, 그의 동생 투루이가 이끄는 군단은 河南을 크게 우회하여 金의 수도 변경에 쇄도했다. 金의 哀宗(애종)은 포위를 돌파하여 歸德(지금의 하남성 商丘縣)으로 도피했다. 


오고타이 칸은 汴京(변경) 진공에 앞서 南宋에 사자를 파견, 汴京을 협격하자고 제의했다. 몽골측은 이 작전에 성공하면 河南의 땅을 南宋에 반환하겠다고 약속했다. 金의 哀宗은 歸德으로 탈출했지만, 糧道(양도)가 끊어져 다시 南으로 내려가 蔡州(하남성 汝南縣)으로 들어갔다. 


南宋과 몽골은 蔡州를 협격한다는 약속에 따라 南宋이 병력 4만으로 동남쪽을, 몽골군이 서북쪽을 포위했다. 1234년 1월, 金의 哀宗은 帝位를 承麟(승린)에게 양도했다. 南宋軍과 몽골軍이 蔡州城에 돌입하자 哀宗은 목을 매어 자살하고, 帝位를 이은 承麟은 몽골군에게 붙잡혀서 살해되었다.


金의 멸망 후 南宋에서는 몽골 측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론보다 失地회복이란 강경론이 우세했다. 南宋은 河南으로 출병, 開封과 洛陽(낙양)을 회복했다. 이에 몽골군은 이를 배신행위라고 규탄, 이 兩都를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 해인 1235년 일제히 南下를 개시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공세는 長江을 방벽으로 한 南宋軍의 분전과 몽골의 내부사정에 의해 일시 중단되었다. 몽골은 1235년 이래 바투(칭기즈칸의 長孫)를 대장으로 하는 50만 대군을 서방에 보내어 中部 유럽까지 석권하여 사상 최대의 제국을 만들었다. 南宋으로서는 몽골의 유럽 정벌, 오고타이 칸의 사후 후계자 다툼에 의한 몽골의 政情(정정) 불안 등에 의해 위기를 일단 모면했던 것이다. 


賈似道(가사도)의 戰果 조작과 16년 執權


그러나 4代 뭉케 칸이 즉위 이후 몽골은 본격적으로 南宋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257년, 뭉게 칸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蜀(촉: 四川省)에 침입, 重慶을 공격했다. 뭉케 칸의 동생 쿠빌라이의 別軍(별군:본대 밖의 독립부대)은 河北・河南으로부터 남하, 鄂州(악주: 지금의 武昌)을 포위했다. 악주의 수장은 制置使(제치사: 총독) 賈似道(가사도)였다.

 

▼ 쿠빌라이

쿠빌라이는 악주성을 맹공, 城內 사상자가 1만3000명을 웃돌았다. 賈似道는 겁을 집어먹고 密使를 쿠빌라이에게 파견했다. 앞으로 南宋은 신하로 몽골을 섬기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는 강화조건을 제시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제, 南宋의 운명이 끝나는 것 아니냐 하는 때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長江 상류 重慶(중경)을 수비하던 南宋의 장군으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重慶을 공격하던 뭉케 칸이 급사했다는 급보였다. 賈似道는 호기라고 판단, 다시 쿠빌라이에게 밀사를 보내 거듭 강화를 제안했다.

 

뭉케 칸의 죽음은 물론 쿠빌라이에게도 전해졌다. 더욱이 카라코룸에는 末弟(말제:막내동생)인 아릭 브카가 大칸位를 노리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와 있었다. 쿠빌라이를 섬기고 있던 漢族 관료 郝經(학경)이 진언했다.


“만약 弟君이 뭉케 칸의 유언이라 칭하고 帝位에 올라 새로 몽골 영토가 된 中原에 조칙을 내리고 長江 일대에 大赦令(대사령: 일반 사면령)을 발한다면 主君께서는 돌아가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습니다. (중략) 南宋과 화의하고 輕기병을 이끌고 급히 귀환하십시오. 그리고 대군을 파견하여 先帝의 靈柩(영구)를 맞이하여 장례를 주재하는 한편 친킨 殿下(쿠빌라이의 장남)에 명하여 거점 燕京(연경)을 굳히십시오. 그러면 帝位는 저절로 主君에게 돌아오고, 국가의 安泰(안태)도 기할 수 있습니다”

 


쿠빌라이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賈似道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北으로 철수했다. 뒤에는 張傑(장걸) 등 장군을 남겨 雲南으로부터 침입해 湖南까지 도달해 있는 우량카다이 부대가 北上할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우량카다이와 張傑은 악주에서 만나 부대를 이끌고 長江을 건너 북으로 철수했다. 南宋의 賈似道는 철수하는 몽골군의 후미를 급습하여 약간의 타격을 가했다. 그런 후 쿠빌라이에게 굴욕적인 화의를 했던 사실을 감추고 理宗(이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드디어 악주의 애움을 풀어 南宋의 社稷(사직)도 安泰하게 되었습니다.”


理宗은 賈似道를 국가 再興(재흥)의 공로자로 찬양하면서 재상으로 삼았다. 賈似道는 <宋史>에서 蔡京・秦檜・韓侂冑(한탁주)와 나란히 奸臣列傳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누나가 理宗의 側室(측실)이란 연줄로 制置使를 거쳐 右丞相(우승상)이 되었다. ‘악주탈환의 공적’에 의해 理宗의 신임을 얻은 그는 그 후 16년간 정권을 장악했다.


쿠빌라이는 악주 戰線에서 북상 중 開封 교외에서 高麗 태자 王倎(왕전)을 만났다. 왕전은 고려국왕 高宗이 오고타이 칸에게 보내는 表文을 휴대하고 있었다. 태자 倎을 접견하고 몽골 주건자의 대리로서 表文을 받은 쿠빌라이의 기쁨은 컸다.


“高麗는 만 리 밖의 나라. 옛날 唐 태종이 親征(친정: 몸소 정벌함)을 해도 굴복치 않았다. 지금 太子가 스스로 찾아와 나에게 귀순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高麗는 1231년 이후 일곱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을 받아 섬과 일부 山城을 제외한 全국토가 유린되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들어가 29년간 항전했지만, 崔씨 武人정권이 타도한 후 몽골의 和議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태자 倎은 쿠빌라이를 뒤따라 燕京에 입성했다. 쿠빌라이는 燕京에서 태자 倎에게 그의 출국 중에 병사한 고려 高宗의 부음을 전하면서 호위부대를 붙여 귀국하도록 조치하고 그 자신은 北上했다. 귀국 후 태자 倎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原宗(원종)이다.


당시 예케몽골우루스(大몽골國)의 새로운 大칸의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그의 동생 아릭 부케가 대립했다. 쿠릴타이(部族대회의)가 개최될 카라코룸의 뭉케 칸 政府 측 사람들은 아릭 부케를 選好했다. 더욱이 뭉케칸의 南宋 親征中 아릭 부케가 수도 카라코룸 지구를 지키고 있었다.

 

1260년, 쿠빌라이는 카라코룸까지 올라가지 않고 內몽골의 동남단 開平府(난하 상류)에서 자파 세력만 참가하는 쿠릴타이를 열고 大칸位에 올랐다. 아릭 부케도 1261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을 개최, 대칸이 되었다. 이후 內戰에서 중국의 경제력을 활용한 쿠빌라이는 名分에 앞선 아릭 부케에 승리했다. 1264년,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몽골 본토와 중국 점령지에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다. (계속)

[ 2009-11-20, 10:5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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