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했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용기가 없었다
奸臣(간신) 3人의 利敵행위로 멸망한 경제대국 南宋④: 귀양길에서 賈似道는 호송병에게 갈비뼈를 꺾여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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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淳台



몽골軍의 襄陽城(양양성) 집중 공략


한편 재상에 오른 賈似道는 쿠빌라이 칸의 사자 郝經(학경)이 화평 교섭을 위해 南宋으로 내려오자 거짓말이 폭로될 것을 우려, 그를 軍營(군영)에 가두어버렸다. 南宋 조정에서는 가사도가 악주전투 때 굴욕적인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했던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학경이 구류되자 쿠빌라이 칸은 새로운 南宋 침공작전을 기도했다. 그는 開封에다 대규모 보급물자를 집적시키는 동시에 河北의 교통망을 정비하여 후방지원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제1차 공세의 목표는 漢水 중류의 요충지 襄陽城(양양성: 지금의호북성 襄樊市<양번시>)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襄陽은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空白의 防壁(방벽:淮河 유역을 말함)과 長江이란 물의 防壁을 최단거리로 돌파할 수 있는 절호의 전략지점이었다.

 


몽골의 동원병력은 약 10만, 총사령관 아쥬(우량카다이의 아들)의 기병부대와 부사령관 史天澤(항복한 漢族 장군)의 보병부대로 편성되었다. 이에 대한 南宋군의 荊湖(형호)군관구의 총병력도 약 10만. 양양성의 주둔부대는 군벌 呂文煥(여문환)이 지휘한 정예병 2만이었다. 여기서 장장 6년 동안 양양성의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몽골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1268년 10월,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土木工事부터 시작했다. 10만 대군은 땅을 파서 양양성과 그 쌍둥이 城인 樊城(번성) 주위에 해자를 만들고 그 흙으로 토성을 축조했다. 이 봉쇄선은 양양 수비대뿐만 아니라 南宋의 구원군을 저지하기 위해 내측과 외측 2중구조였고, 이를 環城(환성)이라고 불렀다.


여문환은 몽골군의 축성이 완성되지 않는 중에 環城을 파괴하기 위해 성내로부터 출격했지만, 적의 병력에 압도되어 퇴각했다. 일단 돌파를 단념한 그는 양양성과 번성을 배다리(舟橋・주교)로 연결하여 방어의 통합을 도모했다. 몽골군은 이 시점에는 有力한 水軍을 보유하지 못해 南宋軍의 走橋(주교) 건설을 저지할 수 없었다.

 


다음해인 1269년, 漢水의 水上連絡線을 둘러싼 공방전이 일어났다. 南宋 수군은 3월 增水期(증수기;물이 불어날 시기)에 쾌속 함대에 의한 威力偵察(위력정찰)을 실시했다. 이어 7월 증수기에 양곡과 물자를 가득 실은 대함대로 양양성과의 連絡線을 打通(타통)시키려 했다. 몽골군은 이 무렵 현지에서 건조된 함선으로 맞섰지만, 아직 경험과 훈련 정도에서 우세한 南宋 함대에게 방어선을 돌파당했다. 농성중인 여문환 부대에 대한 대규모 보급 작전이 성공했다. 그러나 귀항 중의 南宋함대는 몽골부대의 邀擊(요격)을 받아 상당한 손상을 입었다.

1271년, 쿠빌라이는 몽골의 國號(국호)를 大元으로 변경했다. 이 해 南宋軍은 드디어 양양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작전 준비를 끝냈다. 그 병력은 수륙연합의 정예 10만, 사령관은 近衛군단장이며 여문환의 사위인 范文虎(범문호)였다. 이에 쿠빌라이도 병력 수만 명을 증파했다.


新병기 回回石砲(회회석포)의 위력


몽골군은 그날을 기다리며 水軍 훈련을 반복했다. 양양성의 郊外는 몽골 수륙군의 합동 훈련장으로 변했다. 이때 몽골 水軍은 함선 5000척, 병력 7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몽골 수군의 건설은 南宋의 四川군관구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劉整의 지도에 따른 것이었다.

  

4월, 범문호 軍은 長江으로부터 바로 漢水로 진입했다. 6월, 몇 번의 전초전 끝에 양양 下流의 鹿門山(녹문산) 기슭에서 결전이 벌어졌다. 南宋군은 수륙으로 진격했지만, 수군은 增水期의 대하를 거슬러 오르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불리했다.


그에 대해 아쥬는 몽골 함대를 3隊로 나누어 우선 중앙 함대를 南宋 함대의 정면으로 돌격시켜 적을 교란시킨 데 이어 兩翼(양익)의 함대로 측면공격을 감행했다. 南宋의 함대는 궤멸했고, 수군의 지원을 잃은 육상부대도 붕괴했다.


범문호 軍의 대패로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바랄 수 없다고 판단한 여문환은 최후의 도박을 걸었다. 수비대를 출격시켜 봉쇄선 최남단에 위치한 白丈山(백장산)의 몽골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또다시 격퇴당했다. 그럼에도 양양성은 그 후 2년간을 더 버텼다.


쿠빌라이 칸은 新병기 사용을 결정했다. 그것은 훌레구 울루스(일칸國)에서 개량・개발된 거대한 투석기이다. 페르시아語로 만자니크, 한문으로 回回石砲(회회석포)라고 했다. 1273년 봄, 戰線에서 조립된 만자니크는 投射중량과 사정거리 면에서 수비군을 압도했다. 우선, 방비가 비교적 취약한 樊城(번성)에 대해 사격이 개시되었다. 1개월에 달한 사격에 의해 성벽에 돌파구가 생겨 몽골군은 성내로 돌입했다. 그들은 舟橋를 불태워 번성을 고립시키고, 시가전을 벌여 南宋군을 제압했다.


11월에는 양양성에 대한 사격이 개시되었다. 성 안의 건축물 및 방어시설이 차츰 파괴되었다. 新병기의 위력에 여문환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全병사・全성민의 救命을 조건으로 1274년 2월 양양성의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勇氣 부족으로 外敵(외적)에 수모 당해

양양성의 失陷(실함)에 의해 南宋의 방어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했다. 1274년, 쿠빌라이는 28만의 대병력을 동원해 양양성을 새로운 발진기지로 삼아 남하하여 長江에 진입했다. 총사령관에는 훌레구 울루스(國)에서 파견한 바얀(伯顔)이 기용되었다.


賈似道는 수도 臨安에 최고사령부를 설치하고, 全軍을 지휘했다. 몽골군이 建康(지금의 南京)까지 남하했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그는 드디어 예하 부대를 이끌고 本營(본영)을 출발했다. 그러나 故意(고의)로 우회하여 安慶으로 나아가 長江 하류의 적을 견제한다고 했지만, 이미 3일 전에 安慶의 守將 범문호는 몽골군에 항복하고 있었다. 南京과 揚州가 함락되어 수도 臨安도 위험해졌다.


臨安에 계엄령이 발령되자, 南宋의 벼슬아치들은 야음을 틈타 속속 도망쳤다. 安慶에서 회군하자마자 賈似道는 탄핵되어 귀양의 길에 올랐다. 귀양길에서 賈似道는 호송병에게 갈비뼈를 꺾여 살해되었다.


1276년, 몽골군은 당시 세계 제1의 도시 臨安(임안)에 無血 입성했다. 여섯 살짜리 황제 恭宗(공종) 및 태황태후・황태후는 바얀에게 항복했다. 9代 황제, 高宗 이래 150년 만의 패망이었다. 南宋의 정규군은 常時 100만이 넘었고, 멸망 당시에도 아직 60만 명의 대군이 南宋의 전국에 남아 있었다.


宋은 인구・경제력・무기생산에서 당시 세계 제1이었다. 특히 제철기술은 유럽의 기술수준을 훨씬 능가했다. 이 같은 先進 제철 방식에 의해 年間 3만5000-4만 톤의 철을 생산했다. 이 막대한 철은 무기・농기구・교량・화폐와 일상생활 용구 등의 제작에 사용되었다. 北宋-南宋 시기의 鐵 생산량은 産業革命 직전의 전체 유럽 생산량을 능가했다. 宋代 과학・기술 발달을 견인한 것은 인쇄술이었다. 宋은 당시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였다.

이런 南宋이 왜 민족적 수모를 당하면서 멸망했을까? 그것은 內部의 敵에 의해 漢族의 국민주의가 消磨(소마)된 데다 주변 騎馬민족의 불타는 내셔널리즘에 눌려 패배주의로 흘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유했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용기가 부족했다. (끝)  

[ 2009-11-21, 08:2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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