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斗煥 장군에게 88 올림픽 유치 권유
현해탄의 密使, 세지마 류조 이야기(1)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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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望’에서 ‘不毛地帶’까지
  
  안동농림학교 시절, 金載圭(김재규)학생의 별명은 노기 대장이었다. 노기 대장은 러일전쟁 때 여순요새를 함락시킨 장군이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부인과 함께 따라서 자결한 일본 무사정신의 화신이었다. 金載圭는 노기 대장을 존경했고, 그를 닮으려고 했다. 그런 그가 카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을 배출하기도 했던 일본 요카이치(四日市)항공병학교의 특별간부후보생으로 지원, 입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겠다.
  10·26직전 金載圭가 ‘사무라이 문화’에 심취해 있었다는 증언은 많다. 사무라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즐겨 보았고, 무사들의 노래가 녹음된 카세트를 승용차에 꽂고 다니며 들었으며, 사격장에 나타나 기관단총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金載圭가 애독한 소설은 《대망(大望)》이었다. 일본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荘八)가 쓴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번역판인 《대망》은 1970년대 초 국내에서 수십만 질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죽음의 美學(미학)’을 추구하는 일본무사들의 激情(격정)과 때를 기다리며 隱忍自重(은인자중)하는 도쿠가와의 야망이 한국인들을 매료했던 것이다.
  10·26당일 대통령의 두 경호원을 사살했던 명사수 朴善浩(박선호)는 검찰관의 신문에서 “金부장은 본인의 은사이고, 직업도 알선해 주고, 본인을 알아주고, ‘삼국지’·‘大望(대망)’ 등과 같은 책을 읽어라, 검소한 생활을 하라, 우쭐거리는 행동을 삼가라는 등 좋은 말씀을 하여 왔기에 본인이 평소부터 존경하여 왔습니다”고 진술했다.
  궁정동 경비원들이 무조건 朴善浩의 명령에 따라 총질을 하고, 朴善浩도 金載圭의 갑작스런 지시에 무조건 복종함으로써 10·26이 일어났다. 이들은 재판정과 서울구치소의 교수대에서까지도 그런 무조건적인 복종관계를 유지하면서 사라져갔다. 《대망》에 이어 슈퍼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여류작가 야마자키 도요코(山崎豊子)가 쓴 대하소설 《不毛地帶(불모지대)》였다.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대본영 참모 이키 다다시(壹崎正)가 참혹한 시베리아 수용소의 포로 생활을 거치고 귀환, 종합상사에 들어가 종횡무진의 활약을 하는 이 소설은 특히 기업체에서 많이 읽혀졌다. 삼성 李秉喆(이병철)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이 책을 권했고, 독서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선 이 책을 교재로 쓰기도 했다. 이 책의 주인공은 ‘현대 일본의 사무라이’인 상사맨이었고, 그런 점에서 《대망》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일본 사무라이 정신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에서 두 소설은 비슷하고, 실제로 독자층도 거의 같았다고 한다.
  《대망》이 크게 히트한 그 바탕에서 《불모지대》도 많이 팔릴 수 있었다는 얘기다. 《불모지대》가 날개 돋친 듯 팔리던 바로 그때 몰락한 제세산업의 창업주 李彰雨(이창우)가 쓴 《옛날, 옛날, 한 옛날에》가 역시 베스트셀러가 됐었다. 毒舌(독설)이 많은 이 책엔 좌절한 젊은 기업가가 상사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몰이해에 항변하는 내용이 가득 들어 있어 상사맨의 활약상을 미화한 《불모지대》와는 미묘한 대조를 보였다.
  
  종합상사 계획에 자문 역할
  
  《불모지대》의 주인공 이키 다다시의 모델인 세지마 류조(瀨島龍三)가 密使(밀사)의 임무를 띠고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과 일본의 政界(정계) 및 財界(재계)를 무대로 소설보다도 더 거창한 스케일의 활약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불모지대》가 국내 독서계를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이 전설적인 대본영 참모출신이 일부러 그런 시나리오를 쓴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한국등장은 타이밍에서 절묘한 바가 있었다. 사무라이적인 분위기가 《대망》을 타고 맨 먼저 상륙하여 整地(정지)작업을 한 뒤, 신화적 이름이 《불모지대》로 소개되어 무대가 준비되고, 드디어 장본인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과정은 ‘스타탄생’의 연출로선 압권이었다.
  그가 ‘나카소네의 밀사’로서 韓日(한일)경협 40억 달러 타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직후, 한국의 어느 재벌은 세지마 류조의 전기를 번역하여 社員(사원)연수교재로 썼다. 일본엔 ‘세지마 류조를 연구하는 모임’이 많다고 한다. 세지마 류조가 한국의 경제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첫 번째 관여는 1973년이었다. 이해 2월 일본 종합상사 이토추(伊藤忠)의 부사장 세지마는 李洛善(이낙선) 당시 상공부 장관의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의 경제사정을 살핀 뒤 ‘한국에서의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계획서’를 李장관에게 제출했다. 세지마는 1981년 3월17일 이토추 회장실에서 서울대학교 경영대학 趙東成(조동성) 교수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金鍾泌(김종필) 총리가 그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至上(지상)명령이라면서, 그것을 위해 종합상사 육성에 관한 자료를 만들어 서울에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계획서를 만들었다”고 말했었다. 세지마는 이 계획서에서 종합상사가 이익을 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리므로 정부가 강력한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趙교수는 1981년 인터뷰에서 세지마 회장(당시)에게 “수출실적(매출액)과 이윤 가운데, 종합상사는 어느 쪽을 더 중시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세지마는 주저하지 않고 “일본이나 한국이나 국가의 요구는 수출이 최우선이고, 따라서 수출실적을 이윤보다 중시해야 한다. 이익이 나지 않아도 수출을 중단해선 안 된다. 다른 영업이익을 수출 쪽으로 轉用(전용)해서라도. 국가의 발전 없이는 기업의 발전도 없다”고 말했다. 종합상사를 단순한 영리집단으로만 보지 않고 국가의 한 기관으로 보는 세지마의 국가주의적 관점이 잘 드러난 얘기였다.
  《한국종합상사》란 책을 쓰기 위해 200여 명의 경영자를 면담했던 趙교수는 “세지마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머지 면담자들의 얘기를 다 모아놓은 것보다 더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직관을 보여주더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세지마 계획서’를 접수한 직후, 다시 삼성·대우 등 재벌기업에 대해 종합상사 설립에 대한 건의안을 내도록 했다. 정부는 이 국내기업의 건의서와 ‘세지마 계획서’를 참고하여 1975년 4월30일 ‘종합상사 지정요령’을 공포, 종합상사 중심의 수출전략을 채택했다. 세지마는 삼성물산이 종합상사가 되자 李秉喆 회장의 부탁을 받고 부장급 직원 4명을 삼성에 파견, 무역관계 업무를 자문하도록 했다.
  이 이토추 직원들은 삼성의 고문 대우를 받았는데 1983년에 물러났다. 이들 파견 직원 중 한 사람인 고바야시는 “종합상사의 기능은 정보 그 자체이며,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고 강조하곤 했다. 세지마는 1980년에 대만 정부의 부탁을 받고 그곳의 종합상사 계획에도 자문을 했다. 한·중·일 3국의 종합상사 운영에 작전 참모역할을 한 것이다,
  
  세지마―李秉喆·金貞烈·權翊鉉
  
  세지마와 친한 소수의 한국인 중 반드시 꼽히는 사람은 李秉喆(이병철) 회장이다. 나이는 李회장이 1910년생으로 한 살 위다. 두 사람은 인상이나 체격도 흡사하였다. 깐깐한 분위기도 共有(공유)하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李회장은 가장 일본적인 인사관리를 하는 경영자로 꼽혀 서로 통하는 점도 많았을 것이다. 소설 《不毛地帶(불모지대)》에는 주인공 이키 다다시의 한국인 친구가 등장한다. 李(이)모라는 이 친구는 이키와 육사동기이며 큰 회사사장이고, 한국고위층과도 잘 통하는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한때 이 친구는 고 李鍾贊(이종찬)장군이나 金貞烈(김정열)장군을 모델로 한 것이란 추측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엔 세지마의 陸士(육사)동기생이 없었다. 세지마는 일본육사 44기다. 李炯錫(이형석) 장군(소장예편)은 44기로 입교했으나 병을 얻어 1년 쉬고 45기로 졸업했다. 李장군은 재학 때나 졸업 뒤 한 번도 세지마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고 李鍾贊 장군도 세지마와 별 면식이 없었다고 그의 동생 李鍾勝(이종승, 보라매회 회장, 공군대령 예편)은 말했다. 金貞烈 장군은 세지마보다 나이는 여섯, 일본육사 기수로는 10기 후배다. 국제화재보험의 申應均(신응균) 고문(일본육사 53기, 육군중장예편)은 “아마도 작가가 李炯錫, 李鍾贊, 金貞烈 장군을 모델로 하여 한 인물로 적당히 빚어낸 듯하다”고 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金貞烈(국무총리 역임)은 세지마와 친면이 있다고 한다. 1971∼1973년 사이 삼성물산 사장으로 일한 그는 李秉喆 회장과 친한 세지마를 자연스럽게 알게 됐던 것 같다. 제5공화국 때 한국 政界(정계)에서 세지마의 상대역을 맡았던 權翊鉉(권익현) 전 민정당 대표(한일의원연맹 한국측 회장 역임)도 자신이 10·26 뒤 세지마와 가깝게 됐다는 항간의 추측을 부인하면서 삼성정밀의 전무시설(1978∼1979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세지마는 1995년에 회상록 ‘幾山河’(기산하)를 썼다. 이런 대목이 있다.
   <한국에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人材(인재)가 적지 않았다. 거의가 나의 후배에 해당하였다.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교제하였다. 예를 들면 총리를 지낸 金貞烈, 국방장관을 지낸 劉載興(유재흥),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朴元錫(박원석) 같은 이들이다. 경제계에선 李秉喆(이병철) 회장을 비롯하여 鄭周永(정주영), 金宇中(김우중), 崔鍾賢(최종현) 회장과 친하였다>
  李秉喆 회장이 1987년 11월19일 他界(타계)하였을 때 일본에 있는 友人(우인)을 대표하여 弔辭(조사)를 한 이도 세지마였다. 그는 회상록의 ‘추억 속의 인물들’ 속에 李秉喆을 포함시켜 이렇게 썼다.
  <李 회장은 모든 분야에 걸쳐 확고한 철학을 가진 분이었다. 그리고 위대한 한국인이고 애국자였다. 종업원을 사랑하고,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한 분이라, 나는 여러 번 감동을 받았다. 위대한 국제인으로서 一衣帶水(일의대수)의 日韓(일한) 양국의 우호협력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분이었다. 나에겐 참으로 마음으로부터 敬愛(경애)하는 선배이고 형님이었고 또 교사였다>
  세지마―李秉喆라인은 여러 갈래로 가지를 친 것 같다. 세지마는 자신을 모델로 한 《불모지대》를 읽지 않았다고 말했다. 작가인 야마자키는 한두 번 만났다는 것이다. 소설 내용은 비서가 읽고 이야기 해주어 대충 알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權翊鉉씨는 세지마를 만난 자리에서 소설 내용이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세지마는 “시베리아 억류 생활을 묘사한 부분은 거의 사실이지만 그 뒤 商社(상사)생활이나 여자관계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세지마와 가까운 일본인 중에는 세지마가 《불모지대》를 실제로는 읽었지만 일부러 안 읽은 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평생을 참모형으로 살아온 세지마다운 처신이란 얘기다. 그런 태도가 적어도 일본에선 그의 인기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는 듯하다.
  세지마는 生前(생전)에 매스컴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다. 공식 석상에서 강연은 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는 삼가는, 입을 아주 조심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사나 책은 거의가 세지마 주변인물을 상대로 취재하여 쓰여진 것이다. 그가 한일관계에서 있어서 수행한 역할도 그의 입을 통해 확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사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정보장교 출신인 權翊鉉씨도 “상대방이 말을 않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權씨는 그러나 세지마와 김해공항 귀빈실에서 비밀회담을 한 사실은 시인했다.
  
  全斗煥 장군에게 서울 올림픽 권유
  
  세지마는 朴正熙(박정희) 대통령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육사 57기 졸업인 朴대통령에게 세지마는 나이는 여섯, 기수로는 13기가 위다. 대본영 작전 장교로서 태평양 전쟁계획의 일부를 起案(기안)한 적이 있는 세지마는 만주 주둔 關東軍(관동군)에서 일한 적도 있어 만주 軍官(군관)학교 출신인 朴 대통령도 그의 名聲(명성)을 옛날부터 알고 있었으리란 추측이다. 세지마가 한국의 고위층과 더욱 가깝게 된 것은 10·26이후였다. 朴대통령의 죽음으로 韓日(한일) 인맥도 단절된 상황에서 그 맥을 다시 잇기 보다는 새로운 파이프라인을 부설해야 할 필요성이 양국간에 다 같이 대두됐던 것이다. 이른바 한일 新(신)시대에 어울리는 비공식 채널의 탐색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지마 회상록에 의하면 1980년 3월경 李秉喆 삼성 그룹 회장이 이런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한번 조용히 訪韓(방한)하여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장군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었으면 한다. 경제관계의 문제도 있을 것이니 도큐(東急) 그룹의 고토(五島昇) 회장을 동행해주었으면 한다.”
  그해 6월 두 사람은 서울에 와서 신라호텔에서 權翊鉉씨의 안내로 全, 盧 장군을 만났다.
  <두 사람은 溫厚寬容(온후관용)하고 視野(시야)가 넓은 인물이었다.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세 시간 이야기하였다. 全 장군으로서는 장시간 대화한 최초의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때는 광주사태 직후였다. 全 장군은 한국을 둘러싼 북한, 미국, 일본 등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나와 고토씨도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였다. 그 두 달 뒤인 8월에 우리 두 사람은 또 全 장군의 요청을 받고 서울로 갔다. 국내 분위기가 가라 앉아 있었다. 全斗煥 장군이 대통령이 되는 수밖에 없다는 흐름이었다. 청와대 근처의 迎賓館(영빈관)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면서 회담하였다. 고토씨는 일본의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올림픽 유치나 세계박람회 유치가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全 장군은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하여 나고야가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상공회의소 회장이던 고토씨도 유치위원이었다. 귀국 후 고토씨는 나고야 측에 대하여 서울 올림픽에 반대하지 말도록 조정하는 데 苦心(고심)하였다>
  
  세지마는 全 장군이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하여 즉석에서 이런 글을 써주었다고 한다.
  
   <나갈 때는 이름을 내려 하지 말고, 물러날 때는 罪를 피하지 말라>
  
   1988년 11월 全斗煥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가기 전에 "나의 재임중에 있었던 모든 과오는 누가, 어느 기관이 저질렀던간에 최종결정권자이고 감독권자인 나의 책임이다"는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써주었던 그 문장을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 2010-01-12, 17: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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