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城
시리아의 크락 드 슈발리에 紀行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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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1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는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민족과 문화의 요람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古都 파밀리아에서 산 '시리아의 문명'이란 책의 첫 문장이 나를 압도시켰다. '시리아는 33개 문명의 산파이다'. 시리아 유적의 특징은 크다는 점이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포함한 터키 남부-이라크-이스라엘-나일강 유역을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 부른다. 가장 먼저 무역, 농업이 발달했던 이 지중해 연안은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富와 기술과 문화를 쌓아왔다. 거대한 건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바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2007년 초 尙美會(02-734-1245)의 시리아 여행단을 안내한 여성 가이드 라미스씨는 "로마에 가보고 놀랐다. 시리아의 로마 시대 유적보다 초라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우리 여행단은 약8000년간 인간이 계속해서 거주했다고 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로 꼽히는 다마스커스를 떠나 버스 편으로 北上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시리아 풍경이 나타났다. 시멘트색 不毛의 산과 나란히 돌밭과 관목이 번갈아 나타나는 황량한 들판이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새 비옥한 푸른 색 평야가 전개되고 순해 보이는 야산들이 나온다.
  오늘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城 크락 드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이다. 크락 드 슈발리에는 프랑스어로 ‘騎士의 城’이란 뜻이다. 십자군 전쟁 때 탄생한 '聖 요한 騎士團'이 만들고 지켜냈던 中世의 城인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1272년 제9차 십자군 지휘자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이 성을 보고는 감탄하여 이를 모델로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에 성을 만들었다. 전설적인 영국의 정보장교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은 이 성을 보고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고 평했다. 19세기의 유명한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빅 부르크왈트도 "내가 본 중세 건물중 최고 걸작이다"라고 했다.
  
  이 성은 터키의 남부 도시 안티옥에서 베이루트와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를 감제할 수 있는 650m 산 꼭대기에 만들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戰艦 같다. 버스는 산비탈을 따라 생긴 오랜 마을들 사이를 지나는 좁은 도로를 따라서 올라가 성문 앞에 섰다. 주위의 평야,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이는 이슬람 지배하 알레포(다마스커스에 이은 시리아 제2의 도시)의 領主로서 1031년이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 툴루스 영주 레이몽 4세가 이 성을 점령했다. 1144년에 이 성의 관리는 聖요한 기사단으로 넘어갔다. 요한 기사단은 템플 기사단, 투톤 기사단과 함께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존재이다. 요한 기사단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모여서 예루살렘 지역의 구급의료단으로 출발했다가 기사단으로 바뀐 경우이다. 동양의 僧兵과 비슷한 조직이다. 騎士 겸 神父라고 할까?
  
  기독교 신념으로 무장한 騎士집단이므로 전투력이 막강했다. 聖 요한 기사단은 나중에 중동에서 밀려나자 지중해 로도스 섬으로 옮겨가 이 섬의 주인이 되었다.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 슐레이만 大帝의 20만 군대가 이 섬을 강습했다. 요한 기사단은 불과 8000명의 병력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요한 기사단의 영웅적 싸움은 슐레이만 대제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슐레이만 大帝와 명예로운 撤軍에 합의하여 지중해의 또 다른 섬 말타로 옮겨갔다. 요한 기사단은 40여년 뒤 다시 이곳을 쳐들어온 투르크의 10만 大軍을 물리쳤다. 거의 100 대 1의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에서 이긴 것이다.
  
  요한 기사단은 18세기말 말타를 나폴레옹 군대에 넘겨주고 로마로 옮겼다. 말타 기사단은 지금도 準국가처럼 활동하고 있다. 유엔에 오버저버로 가입하여 70여개국과 國交를 맺고 있다. 요사이는 본연의 의료봉사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11세기 예루살렘에서 요사이의 앰뷸런스 제도를 처음 만든 것이 요한 기사단이고 우리 눈에 익은 앰뷸런스의 로고와 복장이 바로 요한 기사단의 그것이다.
  
  크락 드 슈발리에 城을 인수한 요한 기사단은 이 성을 보수, 확장하여 예루살렘 부근에서 가장 큰 城으로 만들었다. 城의 외벽을 새로 쌓았는데 두께가 3m였다. 성벽을 따라 일곱 개의 탑을 올렸다. 그 두께는 10m이다. 보통 때 이 성에서는 50~60명의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약2000명의 보병을 지휘했다. 돌산 같은 성 안으로 들어가면 층층이, 겹겹이 쌓인 요새속에서 하나의 소도시가 전개된다. 마굿간(2000 마리 수용능력), 우물, 해자, 교회, 회의실, 식당, 곡식 창고(길이가 120m나 된다), 비밀통로, 빵 굽는 곳, 그리고 맨 꼭대기에 사령관실이 있다. 사령관 자리에 앉아 벽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성을 둘러싼 수많은 공방전의 함성과 비명과 砲聲과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도 이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1188년 그는 잡은 프랑스 영주를 문앞으로 끌고 와서 항복을 권유하도록 했다. 이 영주는 아랍 말로썬 “항복하라”고 소리치고 프랑스 말로는 “抗戰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城이 이슬람 군대에 넘어간 것은 1271년 4월8일이었다. 이집트 맘루크(투르크 계통의 傭兵인데 나중에 이집트의 정권을 잡고 왕조를 만들었다) 왕조의 창시자 바이바르 왕이 이끄는 군대가 요한 기사단을 속인 것이다. 즉, 트리폴리(리비아에 있는 도시가 아님)의 십자군 영주가 기사단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쓴 것처럼 위조하여 이들을 성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 뒤에도 이 성 주변에선 많은 전투와 地震이 있었지만 크락 드 슈발리에는 원형을 보존할 수 있었다. 중세 城이 이처럼 잘 보존된 경우는 유럽에서도 드물다. 보존성이 높은 건물의 특징은 아름다움이라고 한다. 정복자들은 敵의 건물이라도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부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적개심도 아름다움에 압도된다. 예외라면 金泳三 대통령이 부숴버린 한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건물인 옛중앙청(조선총독부)일 것이다. 무식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 크락 드 슈발리에를 점령한 맘루크 군대는 노예용병 출신들이었지만 이 城의 효용성과 아름다움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감수성을 가졌던 모양이다.
  
  참고로, 크락 드 슈발리에 城을 함락시킨 바아바르는 이집트와 近東을 400년 가까이 지배한 맘루크 王朝의 창시자이다. 그는 지금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에 살던 騎馬용사였다. 몽골군이 그를 잡아 노예로 팔았다. 그를 산 시리아 하마의 이슬람 領主는 바이바르의 용모에 압도되어 그를 맘루크 용병단에 다시 팔아넘겼다. 바이바르는 장신이고 금발이었으며 눈에 흰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집트 일대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아유비드 왕 아윱의 호위병이 되었다.
  
  맘루크 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한 바이바르는 1250년에 프랑스의 루이 4세가 이끈 제7차 십자군을 무찔렀다. 바이바르가 지휘한 맘루크 군대는 1260년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자루트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결전을 벌여 승리했다.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보낸 無敵의 몽골 기마군단을 전멸시킴으로써 中東의 이슬람 문명권을 지켜낸 것이다. 이 전투 직후 그는 이집트 왕 쿠투즈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맘루크 왕조를 열었다. 13세기 몽골군대의 침략을 저지한 나라는 일본, 월남, 그리고 바이바르의 맘루크뿐이다. 이 세 군대의 공통점은 몽골-투르크계통이란 점이다. 몽골군은 몽골계통에는 약했다. 서로 약점과 장점을 잘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 2010-02-12, 14:3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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