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지킨 김부식의 三國史記

이상흔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이 글은 月刊朝鮮 李相欣 기자의 칼럼에서 뽑아온 것이다.
  
  '삼국사기'의 중요성
  
  
  요즘 고구려 문제로 떠들썩 한데 삼국사기 한줄 읽지 않고 고구려 어쩌고 하면 큰일 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역사의 99%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어 역사를 왜곡하고, 심지어 많은 역사책을 없애버렸다'는 오해.
  
  김부식이 없었으면 삼국의 역사 전체가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캄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전해준 것 하나를 가지고도 우리민족은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 김부식의 말을 잠시 들어 보겠습니다.
  
  “(전략) 생각컨대 성상폐하께옵서는 唐堯(당요)의 문사를 갖추시고 夏禹(하우)의 근검을 본받으사 바쁘신 여가에 전대의 사서를 博覽(박람)하셔서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학사대부가 오경, 제자의 서라든지, 진한역대의 사기에 대하여는 혹 널리 통하여 자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나라의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하여 그 시말을 알지 못하니 매우 유감된 일이다.
  
  더구나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이 정립하여 능히 예로써 중국과 교통한 때문에 원엽의 漢史라든지 宋那(송나)의 당서에 다 그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는 자기 국내에 관한 것을 상세히 하고 외국에 관한 것은 간략히 하여 자세히 실리지 아니하였고, 또 그 古記로 말하면 글이 거칠고 졸렬하고 사적의 遺漏(유루)가 많아, 이런 까닭에 임금의 선악이라든지 신자의 忠.邪, 나라의 안위, 인민의 치란에 관한 것을 다 드러내어, 써 후세에 勤戒(근계)를 보이지 못했으니, 마땅히 三長의 材를 얻어 일가의 역사를 완성하여 이를 만세에 끼치어 일성과 같이 환하게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신과 같은 자는 본래 삼장의 재도 없고 또 깊은 지식도 없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는 더욱 날로 정신이 혼몽하여, 비록 독서에 부지런히 하여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며, 붓을 들매 힘이 없고 종이를 대하매 죽죽 내려가지 아니합니다. 신의 학술이 이와 같이 천박하고 전대의 사적이 저와 같이 아득합니다. 이러므로 한껏 정력을 다하여 겨우 권책을 이루었으나 결국 보잘 것이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뿐이외다.
  
  바라오니 성상폐하께옵서 이 疏漏(소루)한 編纂(편찬)을 양해하여 주시고 妄作(망작)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이것이 비록 명산에 비장할 거리는 되지 못하나 간장병 뚜껑과 같은 무용의 것으로는 돌려보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신의 구구한 망의는 천일이 비추어 내려다 볼 것입니다.(이병도 譯)”
  
  이처럼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 이미 ‘삼국시대’는 수세기 전의 아마득한 역사가 된 때였습니다.
  
  일부에서 삼국사기를 헐뜯기 위해 “신라는 분량이 더 많은데 고구려, 백제는 적게 기록했냐”는 소리를 합니다.
  삼국사기에서 신라본기가 백제나 고구려 본기보다 더 양이 많은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여 기록이 더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려가 신라를 곧바로 계승한 나라였고, 신라 경순왕의 큰 아버지 딸이 고려 왕건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후에 이 혈통이 고려 왕실을 이루기 때문에 신라 왕가는 결국 고려 왕가의 외가가 됩니다. 신라가 백제나 고구려보다 분량면에서 우세한 기록을 유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삼국사기에 신라의 기사 분량이 조금 더 많다고 하지만 각 나라 본기의 분량을 살펴보면 세 나라 모두 오늘날 우리를 만족시키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내용의 충실도 면에서도 오십보백보 인지라 안타깝기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 입니다.
  
  김부식이 각종 역사서를 소멸시켰다는 소리도 많은 학생들이 사실인양 믿고 있습니다. 소위 일부 학생을 가르친다는 선생님들과 역사학자들도 이런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려 말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의 동명왕편은 거의 전부가 ‘구삼국사’에서 인용되었고, 삼국사기보다 130년 늦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중국 사서 27종, 구삼국사 등 우리나라 역사서 및 문집류 50 여종, 그 외 각종 문헌을 20 여종, 기타 개인의 시나 말을 수없이 인용했습니다.
  
  따라서 구삼국사를 포함한 김부식이 참조한 각종 서적은 최소한 고려말 더 나아가 조선초까지 전해 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 삼국사기 서문에 인용된 말대로 구삼국사(고기)는 '글의 수준이 졸렬하고, 빠진 것이 너무 많고, 怪力亂神(괴력난신) 같은 허황된 소리가 많아서' 당시 식자층에게 배척을 받았습니다. 당시 고려왕 인조는 이를 매우 안타깝게 여겨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삼국통일 전쟁을 기록한 것 중에 구.신당서를 인용한 기사가 더러 있습니다. 이는 이미 김부식이 당시 국내에서는 더 상세한 관련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우리의 조상들은 역사를 왜곡하거나 조작하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이는 조선의 사관제도를 조금만 살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관이 되기 위해 직계와 외가의 수대 조상까지 온갖 신원조회를 다 통과해야 하고, 인품이나 자질을 엄격하게 테스트 받아야 했습니다. 그나마 실록의 기록이나 보존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당대에 그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것은 물론이요, 그 후손은 왕조가 망하지 않는 한 영영 벼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록을 가끔 수정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때도 무슨 사건자체를 정반대로 고쳐 넣은 것이 아니라, 누락된 기사를 집어넣거나 기사를 약간 삭제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원본실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실 자체를 반대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는 역사를 기록할 때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사실 자체를 아예 누락시키거나 간략하게 기록을 하면 했지, 사실을 반대로 조작이나 왜곡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선조초기 약 20년간의 기록이 몽땅 불탔습니다. 실록보다 그 양이 훨씬 방대했던 승정원일기도 몽땅 불탔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20년 정도의 기록이니까 대충 기억을 되살려 기록하면 되겠지 하겠지만 우리 조상들은 확실하지 않은 것은 기록할 수 없다하여 복원이 명확한 것 외에는 부실한 채로 그대로 두고 실록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선조실록 20년간의 기사는 매우 부실하게 기록되었습니다.
  
  드라마에 보면 흔히 ‘승자의 역사...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는데 이는 마치 정권을 잡은 자가 마음대로 역사를 썼다는 오해를 줄 수 있는 표현이자, 우리 역사를 조롱하는 표현이 될 수 있으므로 극히 삼가고 조심해야 할 말입니다.
  
  명예 하나를 걸고 자신의 어려운 임무를 묵묵히 수행했던 우리 역사의 수많은 사관들이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500년간 왕조실록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록은 오로지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에게 전해주기 위해’ 조상들이 그 고생을 해서 기록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김부식 삼국사기를 쓸 때 이 책이 중국에 들어가는 것을 염두해 두었을 것이고, 당시 국제 기준이나 질서에 문제가 없는 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라고 못을 박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가 우리나라 역사임을 명확히 하였고, 실제로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을 기록한 대목에서는 我軍(아군)이라고 표현하는 등 당시 우리민족이 삼국통일 이후 가졌던 역사의식을 그대로 반영했습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나라 역사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고구려 사서를 만들지 않았고, 한번도 삼국사기를 가지고 “왜 남의 나라역사를 너희들 역사로 기록해 놓았냐”는 시비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이 제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가 그냥 팔짱만 끼고 있어도 유리한 입장이 되는 것은 바로 '삼국사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신화나 전설로 내려오고 있던 사실을 누락을 시킨 것입니다. 이는 김부식 자신이 당대 내놓으라 하는 유학자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당시 정사를 대하는 시대의식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일연이 스님이라는 개인 신분을 이용해 '귀신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기록해 놓을 수 있었고, 이것이 오늘날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 왕조가 망하면 전 왕조의 기록을 후 왕조가 편찬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고려왕조도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아무도 챙기지 않은 발해는 200년 역사가 흔적도 없는 데 반해, 신라는 삼국통일로 망해버린 왕조의 기록을 그 정도라도 보존하여 고려왕조에게 전해 주었으니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다만 신라든 고려든 우리역사에서 가야사를 따로 정리해 놓지 않았다는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입니다.
  
[ 2004-01-15, 19:0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