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時煥 대법관, “북한을 反국가단체로만 볼 수 없다”
법조계, " 박 대법관의 주장은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대법원 판례의 역사적 의미를 도외시 한 것"

조갑제닷컴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朴時煥(박시환) 대법관이 대법원 판결문에서 ‘북한을 무조건 反국가단체로만 볼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22일자 문화일보가 보도했다.
  
  박 대법관은 2010년 7월24일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의 이적성 여부에 대한 판결문에서 “북한을 그 자체로 단순히 反국가단체라고 보는 다수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13명의 대법관 중 ‘북한을 反국가단체로만 규정할 수 없어 실천연대를 이적단체로 규정하는데 반대한다’는 취지의 소수의견을 낸 것은 박 대법관 1명 뿐이었다고 문화일보는 전했다.
  
  정부가 그간 북한정권을 국가로 대접하면서 접촉해온 상황에서 북한을 무조건 反국가단체로 인정하면 법 적용의 혼란이 된다는 취지이지만 헌법해석에 따라 ‘북한의 反국가단체’ 성격을 인정해온 판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박 대법관은 “북한이 실질적으로 국가와 다름없는 체제와 구조를 갖추고 대한민국 역시 북한을 여느 국가와 크게 다르지 않게 상대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북한을 대한민국 顚覆(전복)을 노리는 反국가단체라고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북한의 反국가단체적 성격에 직접 연결되는 사항에 한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지 않으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 문화계 인사 누구를 막론하고 일단 북한과 접촉하면 국보법 적용의 대상이 된다”는 우려를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다수 대법관들은 “박 대법관의 의견은 역사를 지나치게 일방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잘못을 범했고 대법원 판례의 역사적 의미를 도외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남북관계 현실을 무시한 주장’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자칫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해석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좌파진영 일각에서는 ‘신선한 접근’이라는 반응도 나와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고 문화일보는 전했다.
  
  보수성향의 법학자들의 경우, 대법원의 다양성 측면에서 박 대법관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된 현실을 외면한 주장이라는 입장이다.
  
  문화일보는 원로 헌법학자인 허영 헌법재판연구원 이사장의 의견을 소개했다. 허 이사장은 “북한의 反국가 단체성은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상태”라며 “설득력이 없는 개인의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허 이사장은 “북한의 반국가 단체성을 검사가 입증해야 한다는 것도 납득할 수 없는 논리”라고 말했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 역시 “지금의 안보관이나 국민의식에서 본다면 북한의 반국가단체성을 전제한 대법원의 다수의견이 유효하다고 봐야한다. (박 대법관의 의견은) 비현실적인 의견에 불과하다”고 했다.
  
  좌파 성향 법조계 인사들은 박 대법관의 해석이 “국가보안법 적용과 통일운동 보호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문화일보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을 인용해 “박 대법관의 해석에 따르면 북한은 자동적으로 반국가 단체성을 갖지 않으며 특정 사건에서 북한이 反국가단체인지는 검사가 증명을 해야하는 사안이 된다”며 “향후 남한 내의 통일운동을 보호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뒷받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참 조 >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2000년 말 6·15남북공동선언 정신을 잇는다는 취지로 출범했다. 그러나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 7월23일 실천연대의 간부 김모씨(32)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이 단체는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이적단체단체에 해당하며, 김씨가 소지한 ‘2008년 실천연대 정기 대의원 대회 자료집’ 등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이적표현물에 해당한다”고 선고했다.
  
  ■ 박시환 대법관
  박시환 대법관은 진보성향의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의 ‘좌장’격인 인물이다.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을 계기로 출범했다. 제2차 사법파동은 전국의 소장팡사 430여명이 노태우 정부의 대법원장 유임 움직임에 반발해 서명운동을 벌인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진보세력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 그해 8월 우리법연구회의 모체가 탄생했다.
  박 대법관은 우리법연구회 태동 당시 그 명칭을 직접 작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노무현 정부 첫해인 2003년, 서울지방 부장판사로 재직하면서 서열위주의 대법관 인선에 반대하며 사표를 냈다. 그는 4차례의 사법파동 가운데 3차례나 주역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 6월 3차 파동에서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사법부 개혁요구’ 성명 발표를 주도하기도 했으며 2003년 8월 4차 사법파동에서는 최종영 당시 대법원장의 대법관 인사를 비판하며 연판장 작성을 주도했으며 2년 뒤에 서열을 뛰어 넘어 대법관에 임명됐다.
  
[ 2010-11-22, 14:2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코나스넷  |  리버티헤럴드  |  뉴데일리  |  뉴스파인더  |  뉴포커스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