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을 가다!
장애자도 자원해서 군대에 간다. 사병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전투참여 금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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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스라엘 국가 지도부
  
  
   현대전은 전쟁의지가 勝敗를 결정한다. 연평도 도발을 통하여 드러난 국가 지도부의 전쟁意志 문제. 북한은 이스라엘을 닮고, 한국은 아랍을 닮아 가는가?
  
  
  
   폭격명령은 내려오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원래 지저분하게 싸운다. 변칙과 속임수가 長技(장기)이다. 뒷골목 싸움꾼이다. 이들과 싸울 때 저들이 만든 戰場(전장)에 들어가면 불리하다. 그들과 똑같이 뒷골목 싸움, 게릴라전, 기습전, 항공테러, 암살 등 비정규전으로 대응하여서는 勝算(승산)이 없다. 국제법이 통하는 정규전으로 싸워야 한다. 뒷골목이 아니라 규칙이 통하는 링 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저들을 링 위로 끌어내야 한다. 2010년 11월23일은 그렇게 할 수 있는 絶好(절호)의 찬스였다. 북괴군이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 F-15와 F-16 여덟 대가 신속하게 출격, 연평도 상공에서 대기중이었다. 射程(사정)거리가 긴 고성능 유도폭탄과 미사일을 싣고 있었다. NLL(북방한계선)을 넘을 필요도 없이 한국 영공에서 발사, 敵(적) 진지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무기였다. 한국 공군은 늘 북한 공군과 붙으면 10대 0으로 깰 수 있다는 자랑을 하고 다녔다.
   대통령과 軍 수뇌부는 그러나 폭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얻어맞는 쪽을 선택하였다. 얻어맞는 게 체질이 된 군대요 대통령이기에 찬스가 와도 잡을 수가 없었다. 폭격명령이 떨어졌더라면 F-15K 전폭기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가진 유도폭탄으로 敵(적)의 해안포대를 박살내고 도전하는 북괴 공군의 낡은 미그23을 모조리 격추시켰을 것이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의, F-15가 主力인 공군이 미그23이 主力인 시리아 공군과 대결, 85-1로 이긴 베카 계곡 공중전이 再演(재연)되었을 것이다.
  
   최후통첩을 했어야
  
   敵陣(적진)을 초토화시켜놓고 데프콘 3을 발동하면 韓美동맹 체제가 가동한다. 미군이 사령관을 맡은 韓美연합사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한다. 미군 사령관은 멋대로 권한을 행사하는 게 아니고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으로부터 합의된 지시를 받는다. 즉, 미군이 개입하는 것이다. 겁이 나서 비행기도 타지 못하는 김정일이 긴장된 韓美연합군에 도전하는 것은 自殺행위임을 잘 알 것이다. 이때는 물론 미국의 航母(항모)전단이 한국 海域으로 전개된다.
   국민들과 국군은 불타는 敵의 해안포 陣地(진지), 격추되는 미그 23의 동영상을 구경하면서 환호하였을 것이다. 6·25 남침 이후 얻어맞기만 하였던 한국이었다. 이 화려한 大勝은, 김정일 정권의 氣(기)를 꺾고, 조국이 오랜 피해의식에서 탈출, 자신감을 회복,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드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李明博 대통령이 23일 놓친 기회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軍 지휘부도 이런 대응을 건의하지 않은 듯하다. 국가 지도부는, 국군이 북괴군에 지도록 만들기 위하여 누군가가 꾸며놓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희한한 交戰수칙을 들먹이면서 "擴戰(확전)하지 말고 위기를 관리하자"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대통령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찬스가 지나간 뒤였다. 그래도 기회는 남아 있었다. 북괴군은 포격 이후에도 再侵(재침)을 위협하고 위협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敵(적)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이므로 우리가 전투기를 출격시켜 위협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自衛權(자위권)의 발동이다. 대통령은 이것도 하지 않았다.
   지난 11월29일 對국민 담화 때도 찬스는 있었다. 여러 번 不渡(부도)어음이 된, '추가 도발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다짐하기 전에 김정일과 북괴군에게 최후통첩을 하였어야 했다. 예컨대 "12월12일까지 전쟁범죄행위에 대하여 사과하고 책임자를 문책하고 피해를 보상하고 해안포를 철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위권을 행사할 것이다"고 선언, 공을 김정일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한국空軍의 폭격 훈련 비행을 강화하고, 全軍에 비상을 걸고, 韓美공조를 굳힌다. 대통령과 軍 수뇌부는, "우리는 전면전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敵이 원하면 응할 수밖에 없다. 이는 통일전쟁이 될 것이다"는 메시지를 계속하여 보낸다. "敵이 우리의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으면 우리의 막강 공군은 연평도 도발의 원흉인 해안포대를 없애버릴 것이다. 敵이 여기에 대항하면 擴戰도 불사, 북한의 核시설을 폭격할 것이다"는 정보도 언론에 흘린다. 미국의 대규모 航母전단이 한국海域에 투입된다. 중국 정부가 중재하겠다고 달려와도 우리는 응하지 않는다. 6者회담은 중국과 북한이 공모하여 국제사회를 속이는 사기 도박판임을 李明博 정부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억 달러짜리 전투기는 에어쇼用이 아니다
  
   이렇게 압박하면 김정일은 고민에 빠진다. 全面戰을 결심하지 않는 한 한국 정부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습전이나 테러가 먹히는 戰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이 최후통첩에 응하지 않아도 좋다. 한국은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때릴 권리를 갖게 된다. 이게 주도권이다. 이 주도권을 슬기롭게 구사하면 김정일을 갖고 놀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 武力은 해안포가 아니다. 한국 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이다. 1억 달러짜리 F-15전폭기를 에어쇼用으로 도입한 건 아니다. 敵의 해안포와 長射程砲(장사정포)에 대한 武力응징用으로 도입한 것이다.
   나의 최후통첩 전략의 핵심은, 韓美연합군의 海, 空軍이 前面(전면)에 나오는 정규전의 링 안으로 마적단 수준의 북한군을 끌어내는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것과 달리 전면전은 우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홧김에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김정일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할 때만 일으킨다. 韓美연합戰力은 그런 승산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기회는 당분간 계속된다.
  
   전쟁의지의 대결
  
   김정일이 연평도 사태를 일으킨 의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분석이 전개된다. 多數說은 외부에서 긴장을 조성, 흔들리는 내부 체제를 단속하고 김정은 세습 과정을 편하게 하기 위한 도발이란 주장이다. 朴勝椿 전 국방부 정보본부장(예비역 육군 중장)은 다른 견해였다. 그는 對南적화 전략에 따른, 2012년 大選 판을 겨냥, 전쟁공포증을 확산시키기 위한 도발이라고 했다.
   "대낮에 민간 지역까지 포격한 것은 한국인들에게 그 장면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전쟁을 두려워 하게 되면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없을 것이고, 2012년에 친북세력이 다시 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남한의 容共정권을 통하여 韓美동맹을 해체, 남한을 赤化한다는 게 그들의 불변의 전략입니다."
   朴 장군은 "북한정권이 對南적화 전략을 포기하고 체제유지에 주력한다고 보는 것은 너무나 안이한 판단이다"고 했다. 對南적화 전략을 포기하면 북한정권은 존재이유를 상실한다. 체제의 생리상 赤化전략을 버릴 수가 없게 되어 있다. 북한정권은 武力도발의 목표를 군사적 승리에 두지 않는다. 남한에서 벌어지는 정치판에서 승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연평도 도발에 대한 한국군의 응징으로 북측이 大敗하더라도 전쟁공포증이 남한에서 확산되어 從北세력이 집권할 수 있게 되면 정치적으로 이기는 것이 된다. 北의 도발은 한국인의 전쟁의지를 꺾기 위한 것이란 이야기였다.
   朴 장군은 "정부가 국민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韓美동맹이 유지되는 한 김정일이 절대로 全面戰(전면전)을 일으킬 수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 전쟁공포증 확산을 차단하여야 한다"고 했다. "국민들에게 전쟁은 없지만 敵의 도발은 계속된다고 솔직히 알리고, 도발이나 局地戰엔 적절히 대응할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안보에 관한 한 國論이 통일되어 있음으로 敵을 강력하게 응징할 수 있지만, 한국은 좌익들이 평화至上주의를 퍼뜨리고 정부와 여당은 安保를 경시, 그런 여론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안보 태세 해체 행위가 北의 도발을 불러들였으니 그들이야말로 전쟁유도세력이지요. 정부가 누가 진짜 전쟁세력인지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1996년 강릉 잠수함 사건으로 한국은 準戰時 상황이 되었지만 1년 뒤 국민들은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2002년 6월 北은 서해교전으로 한국 해군 함정을 격침시키는 도발을 하였지만 그해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06년 10월 北은 핵실험을 하였지만 노무현 정권은 韓美연합사 해체 계획을 밀어붙였다. 2010년 3월26일 천안함을 폭침시켰지만 그 직후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親北세력이 승리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관찰해온 김정일 정권은 자신들의 도발이 安保세력을 결속시키는 것보다는 전쟁공포증을 증폭시켜 친북세력을 돕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연평도 도발이 한국인의 생각을 전쟁공포증으로 바꿀 것인지, 一戰不辭쪽으로 바꿀 것인지에 따라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반격하면 전쟁 난다’는 誤判이 부른 2차 대전
  
   1936년 3월7일, 3개 대대의 독일군이 비무장 지대인 라인란트(라인강 주변의 독일영토)로 진주,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였을 때 히틀러가 독일군에 내린 명령은 '프랑스군이 나타나면 싸우지 말고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독일군이 프랑스軍과 정면승부를 하기엔 아직 力부족이라고 판단하였다. 만약 프랑스군이 연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였더라도 독일군은 물러났을 것이고 독일 군부가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켜 히틀러를 몰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프랑스가 패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프랑스군은 安保의 생명선인 라인란트 완충지대가 독일군 주둔지로 변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나? 프랑스 군부가 아주 패배주의적인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므랑 원수는 不法(불법)진주한 독일군에 반격하면 全面戰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므로 총동원령을 내린 뒤 반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국방부도 이 판단에 동조하였다. 그런데 총동원령을 내리면 하루 3000만 프랑의 경비가 들 것이다. 당시 프랑스는 外債가 많아 국가不渡 직전으로 몰렸고 선거를 앞두었다.
   프랑스 집권세력은 총동원령을 결단할 수 없었다. 오히려 독일군에 반격하지 않는 데 대한 변명을 찾아 나섰다. 외무장관을 영국으로 보내 "영국이 합세하면 독일군을 치겠다"고 압박한다. 영국이 냉담하게 나올 것임을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들에게 영국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꺼리를 만들었다. 프랑스 국민들도 決戰(결전)의지가 없어 정부의 애매한 태도를 수용하였다.
   연평도에 대한 북괴군의 포격이 있은 직후 한국군의 지휘부서와 대통령이 과감한 대응을 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도 '우리가 전투기로 敵의 해안포대를 폭격하면 전투가 확대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국군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프랑스 군대처럼 守勢的 자세를 취하고 만 것이다. 프랑스가 영국을 끌어들이려 한 것처럼 한국도 미국의 도움을 청하였다. 영국과 달리 미국은 신속하게 航母戰團을 전개하였다.
  
   역사는 세 번째 기회를 주지 않았다
  
   프랑스 군부가 독일군을 치면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각에 보고한 것은 전쟁을 기피하기 위한 고의적 과대평가였을 가능성이 높다. 민간인들에게 그렇게 겁을 주어야 전쟁을 말리려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1939년 가을과 겨울 프랑스 군부는 똑 같은 실수를 한다. 이때 독일군의 主力은 폴란드 침공에 투입되어 서부戰線에선 프랑스 군사력이 독일군을 압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때 프랑스가 先制공격을 하였더라면 독일군은 손을 들었을 것이라는 게 戰史學者들의 거의 일치된 평가이다. 이때도 프랑스군은 가므랑 원수가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開戰을 결심하지 못하여 결정적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격전으로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은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킨 뒤 1940년 5월 프랑스를 공격하였다.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가 있었으면 독일군의 기습은 성립할 수 없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르덴느 돌파전이 성공, 프랑스는 6週만에 손을 들었다. 역사는 두 번 기회를 놓친 프랑스를 버린 것이다.
   李明博 정부와 한국군 지휘부는 천안함 爆沈에 대한 응징을 포기하는 첫번째 실수에 이어 연평도 도발에 대한 응징도 포기하곤 '추가 도발에 대하여서만 응징한다'고 물러났다. 두 번 절호의 기회를 놓친 李明博 정부에 역사가 한 번 더 기회를 줄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 끝이 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라인란트 점령은 군사작전으로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럽에 커다란 새로운 전망을 열어 놓았으며, 라인江의 다리를 건너 3개 大隊가 진주한 것으로 유럽의 戰略(전략) 정세가 뒤흔들렸을 뿐 아니라, 다시는 회복시킬 수 없을 만큼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히틀러(그리고 영국에서는 처칠)뿐이었던 것 같다. 1936년 3월 西歐(서구)의 두 민주주의 국가는 중대한 전쟁의 위험 없이 나치스 독재자와 그 제도를 붕괴시킬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윌리엄 L. 샤이러, ‘제3제국의 흥망’)
  
   舊正공세의 교훈
  
   毒가스를 쓴 1차 세계대전은 化學의 전쟁, 原爆을 쓴 2차 대전은 물리학의 전쟁, 월남전쟁은 심리학의 전쟁이라 불린다. 월맹이 심리전으로 미국의 전쟁意志를 꺾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과 신예 전투기로 무장한 미국이 거지군대 같은 월맹군에 진 것은 무기가 뒤져서가 아니다. 군인 숫자가 모자라서도 아니다. 돈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국가지도부의 전쟁의지가 월맹 지도부의 혁명전쟁 방식에 의하여 꺾여버렸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패배한 것도 전쟁의지가 강한 거지 군대가 이긴 경우이다. 전쟁에 대한 최근 연구는 전쟁의지의 문제를 해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한국군이 천안함 爆沈, 연평도 도발 등 계속해서 북한군에 패배하고 있는 것도 武器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전쟁의지에서 북괴군에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전쟁의지가 李明博의 전쟁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김정일은 고물 해안포에다가 전쟁의지를 더하여 연평도를 공격하는 데 성공하였다. 李明博 정부와 군은 최신예 전투기에서 전쟁의지를 빼버림으로써 고철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전쟁의지가 약하면 기회는 위기로 둔갑한다.
   1968년 1월30일 월남의 공산군(越盟 정규군과 베트콩)은 휴전약속을 깨고 유명한 舊正공세를 시작하였다. 공산군은 全國에서 서른 곳의 목표물을 일제 공격하였다.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건물 안으로까지 쳐들어왔고 미군 사령부를 쳤다. 古都 후에는 공산군에 한달간 점령당하였다.
   군사적으론 공산군의 大敗였다. 게릴라들이 숨어서 싸우지 않고 미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한 것이다. 그들이 유리한 정글이 아니라 大路上에서, 도시에서 싸우니 火力이 우세한 美軍과 월남군 등 연합군의 밥이 되었다. 특히 베트콩은 구조적인 대타격을 입었다. 그 후 월남전은 월맹 정규군이 主導하게 되었다.
  
   군사적 승리가 정치적 패배로
  
   군사적으로 大敗한 공산 월맹측은 그러나 정치적으로 大勝하였다. 미국 존슨 행정부의 전쟁의지를 꺾는 데 성공한 것이다. 3월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극적인 연설을 하였다.
   <북위 20도 以北에 대한 폭격을 일방적으로, 그러나 부분적으로 중단한다. 만약 공산군측이 협상에 응하면 완전히 중단한다. 미군의 增派를 중단한다. 나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는다>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서 월남 평화 협정을 맺은 헨리 키신저는 '외교술'이란 책에서 <이 연설은 戰後 미국 역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대통령의 결정 중 하나였다>라고 했다. 실패한 舊正 공세에 의하여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공산군을 계속해서 압박하였더라면 훨씬 유리한 高地에서 협상을 할 수 있었는데, 일방적인 양보를 한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월남전의 패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존슨 대통령의 전쟁의지는 왜 부러지고 말았는가? 여론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여론조사에 따르면 61%는 '매派(강경대응지지층)'였고, 23%가 '비둘기派(온건대응론자)'였다. 70%는 北爆의 지속을 지지하였다.
   문제는 言論과 식자층의 비관론이 정치인들에게 준 영향이었다. 영향력의 절정에 있던 CBS 뉴스 진행자 월터 크롱카이트는 "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우리가 擴戰하면 敵도 擴戰으로 대응한다. 끝없는 지구전으로 갈 것이다"는 요지의 논평을 했다. 존슨 대통령의 월남전을 지지하던 월스트리트저널과 타임誌도 反戰으로 돌았다. 時事논평가 월터 리프만도 "월남전에서 우리는 질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였다. 言論이 만든 비관적 분위기에 흔들린 것은 정치인들이었다. 맨스필드, 풀브라이트 같은 大정치가들도 擴戰에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를 월맹측은 즉시 받았다. 그 전의 협상제의들을 거부해오던 월맹이 서둘러 협상테이블로 나오기로 한 것은 舊正공세의 실패로 위기에 몰렸기 때문이다. 1996년 월맹의 전쟁 영웅 지압 장군은 CNN과 인터뷰하면서 "舊正공세의 전략적 목표는 미국측으로 하여금 擴戰을 중단시키고 협상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월맹은, 舊正공세를 통하여 미국의 여론과 언론을 反戰으로 돌아서게 함으로써 미국 정부를 압박,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제의하도록 꾸몄다는 것이다. 월맹의 작전은 월남의 戰場에선 실패하였지만 미국내의 심리戰場에선 성공한 것이다. 미국 지도부의 전쟁의지를 꺾은 것이다.
   존슨 대통령의 협상제의는 미국이 월남전에서 공산군에 이길 생각이 없다는 공개선언이었다. 시간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확신하게 된 공산월맹측은 협상을 질질 끌면서 '완전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파리에서 시작된 평화 협상은 5년간 이어졌다. 월맹측은 '미군철수와 월남정부의 顚覆(전복)'를 요구하였다. 이는 미국의 무조건 항복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은 미군철수는 약속하였으나 사이공 정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 미국과 월맹이 주도한 협상에서 사이공 정부는 들러리로 전락하였다.
   1973년 초 미국과 월맹측은 평화협정을 맺는다. 駐越미군은 철수하고, 월남에 들어온 월맹군은 그대로 두고 휴전하기로 하였으니 사이공 정부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월맹은 휴전협정이 발효되자 말자 그것을 어기면서 전투를 재개하였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그러나 이를 응징할 의지를 상실하였다. 미국의 언론과 의회가 휴전협정 준수를 강제할 美軍의 개입을 막았다. 1975년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이스라엘 정부의 ‘빅 스리’는 特攻작전통
  
   이스라엘 정부는, 11월 23일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직후 직설적인 용어를 사용,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국 정부의 반응이 ‘擴戰 말라’는 수준이었는데 우리보다 더 분노한 모습이었다.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 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고 했다.
   천안함 爆沈과 연평도 도발 이후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보복해야 한다” “우리도 이스라엘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들이 많이 나왔다. 이스라엘, 월맹, 북한정권의 공통점은 지도부의 강력한 전쟁의지이다. 이스라엘은 국가 지도부의 구성과 생리가 한국과 너무 다르다.
  
  
  
  
  
  
  
  
  
   이스라엘의 現 국가지도부는 ‘특공대’라 불릴 만하다. 대통령 시몬 페레스는 국방차관 시절엔 비밀 핵(核)개발을 주도하였다. 국방장관으로서 1976년 7월4일에 있었던 엔테베 작전을 총괄적으로 지도한 사람이었다. 엔테베 작전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이 이스라엘 사람 약100명이 탄 에어 프랑스기를 납치, 우간다의 엔테베에 착륙시켜놓고 이스라엘에 수감된 테러리스트 석방을 요구한 데서 발생하였다. 특공대원을 실은 이스라엘 공군기 석 대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작전으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 인질(人質)들을 구출한 사건이다. 이 특공작전의 지휘관은 요나탄 네탄야후 중령이었다. 그는 적탄(敵彈)을 맞고 죽었다. 이 작전에서 죽은 유일한 이스라엘 군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 영웅의 동생이 현재의 총리 벤자민 네탄야후이다.
   그 또한 특공대원이었다. 1972년 5월 벨기에의 항공사 사베나 여객기가 100여 명의 승객을 태운 채 납치되어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에 착륙하였다. 이 인질 구출작전에 투입된 이스라엘 특공대의 지휘관은 현재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자 부총리인, 참모총장 출신 에후드 바락이다. 총리 네탄야후는 그때 바락의 부하였다. 네탄야후는 구출작전 때 동료가 쏜 총탄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대위로 제대한 그는 미국에 건너가 하버드와 MIT에서 공부하였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이 터지자 귀국, 전투에 참여한 뒤 다시 도미(渡美)하였다.
   에후드 바락이 지휘한 벨기에 여객기 인질구출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스라엘 특공대는 정비사로 위장, 기내(機內)에 들어가 테러리스트 남자 두 명을 사살하고 여자 두 명을 체포하였다. 인질이 된 승객은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다 구출되었다. 이 특공작전 성공의 경험이 엔테베 작전을 낳은 것이다. 엔테베 작전을 기획하는 모임에 바락도 참여하였다. 바락은 수많은 특공작전과 암살 작전을 지휘하고 3군 참모총장이 되었으며 총리를 지낸 뒤 지금은 국방장관 겸 부총리이다.
   역대 이스라엘 총리 중 1996년에 암살된 라빈과 바락은 3군 참모총장 출신이고, 샤론은 4차 중동전쟁 때 수에즈 운하 도하(渡河) 작전을 성공시킨 전쟁 영웅이다. 전임 총리 에후드 오메르트는 장교 출신이다. 사병으로 종군(從軍)하였던 이 사람은 국회의원 시절에 장교 교육을 따로 받았다. 이스라엘 내각엔 군 장성 출신들이 많다.
   이스라엘의 국가적 성격인 된 ‘특공정신’은 특공(特攻) 전력을 가진 이들을 중용(重用)한 데서 생긴 것이다. 한국 국가 지도부의 ‘빅 스리’인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 대표는 군대 경험이 없고, 이스라엘의 빅 스리인 대통령, 총리, 부총리는 특공작전 전문가들이다. 이게 국격(國格)의 차이로 나타난다. 한국도 내각, 국회, 청와대에 장교 출신들이 많이 들어가면 연평도 도발과 같은 사건에서 대처가 달라질 것이고 국가의 분위기도 많이 바뀔 것이다.
  
   부시 만류 묵살, 시리아 원자로 폭격
  
   2007년 여름 이스라엘 수상 오메르트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시리아가 북한의 도움을 받아서 짓고 있는 원자로를 미군이 폭격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부시는 安保관계 참모들에게 검토를 시켰다. 답은 부정적이었다. 특공대를 보내 부수어버리는 방안도 검토하였으나 위험이 크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미국 CIA 부장 헤이든은 문제의 시설 안에 북한의 도움으로 만들어지는 원자로가 있을 가능성은 높지만 핵무기 제조시설이 보이지 않아 시리아의 핵무장 의도에 관한 가능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보고를 하였다.
   부시는 오메르트 총리에게 "우리 정보기관이 核무기를 만들기 위한 시설이란 점을 확인하지 않는 한 다른 主權국가를 공격할 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였다.
   부시 회고록에 의하면 이때 오메르트는 "이 건은 우리나라의 신경을 매우 심각하게 자극하는 것이다"고 했다. 그는 "시리아의 핵개발 계획은 우리에겐 생존 차원의 문제이다"고 덧붙이면서 "귀하의 전략은 나에겐 매우 실망스럽다"("Your strategy is very disturbing to me.")"고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고 한다. 부시는 통화를 끝낸 뒤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그래서 이 사람이 좋단 말이야. 그는 배짱이 있어"라고 말하였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2007년 9월 시리아의 원자로 시설을 폭격, 몽땅 부숴버렸다. 때린 쪽은 물론이고 얻어맞은 시리아도 침묵하였다. 부시는 회고록에서 '이스라엘은 미국의 事前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부시는 또 얻어맞은 시리아가 침묵하였고, 폭격 받은 시설을 서둘러 위장한 것으로 봐서 '핵무기용 원자로를 짓고 있었음이 확실해졌다'면서 CIA의 조심스런 평가에 대하여 '정보는 정확한 과학이 아니란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평하였다.
   국가생존에 관련된 문제는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해결해야지 아무리 우방국이라도 외국에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 지도부의 확고한 철학이다. 부시는 이 폭격 작전의 성공을 널리 알리는 게 어떠냐고 이스라엘 총리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면 시리아의 지도자 아사드를 코너로 몰 것이라면서 거절하였다고 한다.
  
   “믿을 것은 우리뿐이다.”
  
   2009년 1월 이스라엘을 포격하는 하마스 조직을 치기 위하여 가자 지역을 침공했다. 그들이 테러조직으로 규정한 하마스 섬멸 작전은 국제여론에서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엔 안보리가 즉시 휴전을 결의한 데 대하여 오메르트 당시 총리는, "우리는 이를 무시하기로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는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외부기관이 결정권을 가지도록 동의한 적이 없다. 이스라엘 국방군은 국민들을 지키기 위한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의 識者(식자)들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하여 우리가 응징을 할 경우 유엔헌장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놓고 말씨름을 벌이곤 한다. 이스라엘은 安保를 모든 정책의 최상위에 둔다. 安保문제에 대하여는 "유엔도, 미국도 이래라 저래라 해선 안된다. 국가생존의 문제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다수 아랍인들에 의하여 포위된 가운데서 한 번도 외국군대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지킨 적이 없다. 미군은 물론이고 어떤 외국군대의 주둔을 허용한 적이 없다.
   외국군대가 주둔하여 안보를 도와주게 되면 국민들의 정신상태가 해이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국회도 자주 격돌하지만 정치의 주제는 항상 국가 생존이다. 거창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정치투쟁은 나름대로의 美學이 있다. 한국처럼 安保를 무시하고 사소한 데 목숨 거는 정치는 추하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전에 대하여 국제여론은 비판적이었지만 이스라엘 국내에선 지지여론이 90%나 되었다. 가자 전투에서 1,202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고, 5000명 이상이 부상, 이스라엘 군인은 10명이 戰死, 2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발표되었다.
   2010년에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로 구호품(이스라엘은 危害물품이 있다고 주장)을 싣고 가던 터키 배를 公海上에서 停船(정선)시키고 반항하는 운동가 9명을 사살하였다. 국제사회에서 비난 여론이 높았으나 네탄야후 수상은 직후 연설에서 한 마디도 사과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이스라엘 軍의 조치를 옹호하면서 배가 또 들어오면 똑같이 저지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뒤부터 구호선은 이스라엘 군대의 停船, 檢問(검문), 檢索(검색)에 순응하였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행동의 대담성에 있어서 ‘다이하드’와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특공작전은 이스라엘식(式)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태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버리는 모진 자기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중국을 협박, 굴복시킨 이스라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2010년 6월 핵무기 개발 의혹을 사고 있는 이란에 대한 추가 제재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2표, 반대 2표로 통과시켰다. 브라질과 터키가 반대표를 던졌으며 레바논은 기권했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인 중국은 당초 추가 제재에 부정적이었으나 이스라엘이 강하게 중국을 압박해 결의안에 동조하도록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하였다. 이스라엘은 지난 2월 중국에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중국 측에 이란의 核무기 개발 의지를 담은 비밀문서를 보여주곤 국제사회가 이란의 核무기 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이 이란의 核시설을 폭격하겠다고 통고하였다고 한다. 그럴 경우 原油의 11%를 이란에 의존하는 중국 경제가 어떤 타격을 받게 될지도 자세히 설명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이스라엘의 前歷(전력)으로 보아 이런 압박이 공갈이 아님을 잘 알았을 것이다.
   한국이 중국에 대표단을 보내 "만약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을 중국이 계속 감싼다면 우리는 북한의 잠수함 기지와 해안포대를 폭격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었을 때 廣州(광주) 아시안 게임이 제대로 치러지겠는가"라고 압박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 "지도자는 앞에 서는 사람"
  
   지난 여름 訪韓(방한)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중앙일보 김영희 기자로부터 "대통령께서는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스라엘은 核보유국입니다. 核을 가진 이스라엘이 남의 나라에 대해 核을 갖지 말라고 요구할 도덕적 권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답하였다.
   “이스라엘의 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누구를 먼저 공격한 적이 없어요. 위협을 받는 건 우리입니다. 이스라엘은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혹이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리고 이런 의혹 자체가 억지력이 될 수 있다면 그걸 왜 마다하겠습니까. 核을 이용하는 것보다 核보유 의혹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지요. 예전에 아랍연맹 사무총장이 내게 이스라엘 核시설이 있다고 의심받는 지역을 좀 가보자고 해요. 내가 말했지요. ‘내가 미쳤습니까? 가보면 아무 것도 없을 텐데 그렇게 되면 의혹이 해소되고 나는 목이 잘릴 거요.’ 의혹으로 충분해요.(웃음)”
   87세의 페레스 대통령은 세계 국가원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 그는 리더십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사람들 위에 서지 않고 낮은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들 위가 아니라 앞에 있는 것뿐입니다. 리더가 되려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돌격 앞으로!"가 없다고 한다. 장교는 항상 "나를 따르라!"라고 호령한다.
   이스라엘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때 프랑스·영국과 합세하여 對이집트 작전에 가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와 비밀核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 기술의 도움으로 네게브 사막에 재처리시설, 원자로 등 핵무기 개발 단지를 만든다. 이스라엘 建國의 아버지인 벤구리온 총리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골다 메이어(뒤에 총리 역임) 등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국방차관으로서 비밀 핵개발을 지휘하였던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그 과정을 자세히 썼다. ‘核무장 선택권’이란 의미이지만 사실상 핵개발을 뜻하는 ‘뉴클리어 옵션’(Nuclear Option)이란 용어를 사용, 비밀核개발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돌파해야 했던 여러 난관들을 설명했다. 그중의 하나. 페레스 당시 국방차관이 1959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방문하고 있는데 벤 구리온 총리로부터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돌아오니 벤구리온 총리, 골다 메이어 장관, 정보기관인 모사드 책임자 하렐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리의 설명인즉, 소련의 첩보위성이 네게브 사막의 核시설 건설공사 현장을 촬영했고 이 사진을 갖고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지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덜레스 美 국무장관에게 그 사진을 들이대고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에 대해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 간청을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페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가 미리 이실직고하면 약점을 잡히게 된다. 그냥 가만히 있자. 도대체 소련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에 뭐가 나오나. 땅을 판 구멍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런 취지의 설득이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核개발을 계속 추진해 지금은 核강대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유독 核무장에 성공한 것은 벤구리온과 페레스 같은 배짱 있는 정치인의 리더십과 自主국방에 대한 정치권의 全面的(전면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美軍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다면 核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라빈, “테러두목 죽었다고 애도하란 말인가”
  
   북한정권은 남파간첩의 존재를 인정하고 2000년 9월에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을 데리고 가서 영웅으로 대우하였다. 한국의 歷代 정권은 북파 공작원의 존재를 숨겼다. 북한으로 공작원을 들여보내는 것을 무슨 죄나 짓는 일로 생각한 것이다. 공작원을 영웅으로 만드는 체제와 죄인시하는 체제가 대결하면 승부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은 북한식이다. 시리아 고위층에 잠입, 골란高原(고원)의 병력 배치상황을 파악, 조국을 도왔다가 붙들려 사형집행된 코헨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 암살 작전도 거의 공공연하게 인정한다.
   기자는 1996년 11월 초 라빈 당시 수상을 인터뷰하였다. 피살되기 하루 전이었다. 이런 問答(문답)을 남겼다.
   <―며칠 전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가 말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사드의 관련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리께서는 올해 초 지하드를 지칭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다. 어떤 국경도 당신들의 보호막이 되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접 국가의 主權도 침범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입니까.
   “1993년 이후, 이스라엘-PLO 사이의 평화 협상이 진전되어 갈수록 지하드와 하마스 조직에 의한 테러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폭탄으로, 수류탄으로, 자살공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테러 희생자의 70%가 이스라엘人들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평화협상에 반대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온 방식 그대로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하드 두목을 누가 죽였는가는 먼 장래에 역사가 알려 주겠지요. 우리는 그 可憎(가증)할 테러 조직의 두목이 제거된 데 대해서 애도할 입장은 아닙니다.”>
  
   뮌헨 올림픽 테러 관련자 20년간 추적, 모두 암살
  
   1972년 西獨의 뮌헨 올림픽 기간에 선수촌으로 침입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이 이스라엘 선수 및 코치 11명을 죽였다. 독일 경찰과 총격전으로 테러단 5명이 사살되고, 세 명이 잡혔다. '검은 9월단'은 그 뒤 서독의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납치하여 西獨 정부를 위협한 끝에 잡혀 있던 세 명의 동료를 구해냈다.
   화가 난 골다 메이어(여성) 이스라엘 총리는 이 테러를 기획하고 가담한 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을 만들게 하였다. 정보기관 모사드와 이스라엘군이 합동으로 특수조직을 구성했다. 이 팀의 첫 작전은 1973년 4월 레바논의 베이루트로 침투,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의 정보책임자 모하메드 유수프 알 나자르 등 세 명을 죽이는 일이었다. 이 特攻(특공)작전의 지휘관은 나중에 참모총장, 그리고 수상이 된 에후드 바락(현재 국방장관)이었다. 이 국가公認(공인) 암살단은 주로 유럽과 중동을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 테러단을 추적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실수를 하였다. 1973년 6월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한 모로코인을 뮌헨사건 관련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誤認(오인)하여 암살하였다가 요원 다섯 명이 붙들렸다. 이스라엘 정부는 끈질긴 외교 교섭 끝에 옥살이하던 요원(여성 2명, 남성 3명)을 2년 뒤 전원 송환받았다. 이스라엘 암살 팀은 살라메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드디어 1979년 1월22일 그를 베이루트에서 찾아내 원격조종 폭탄으로 죽였다.
   뮌헨 보복작전은 '신의 분노'라는 암호명을 가졌다. 1992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테러관련자들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이 이스라엘 같이 보복하였더라면 1·21 청와대 습격사건 관련자,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관련자, 아웅산 폭파사건 관련자, KAL기 폭파사건 관련자들은 다 죽었을 것이다. 거기에 김일성, 김정일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지의 핵심은 보복의지이다. 보복의지의 핵심은 애국심과 분노일 것이다.
  
   “외국군 주둔하면 국민정신 망가진다”
  
   1996년 기자가 이스라엘 군대를 취재할 때 만난 군사전문기자 지브 시프氏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당시 텔아비브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安保분야의 전문기자였다. 이스라엘 상류층에서는 “라빈 수상도 쉬프 기자에게 보고한다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였다. 시프氏는 “자주국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위산업의 기초이다”고 했다. 그는 “방위산업의 독자적 운용이 있어야 무기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외교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고 충고했다.
   내가 물었다.
   “유태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천재성(天才性)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까.”
   “유태인은 군사 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 식민지 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국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건국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주력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人力수요에 대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人材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강군(强軍)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시프 기자는 잊을 수 없는 충고를 하였다.
   “우리는 수십 배의 국력과 병력을 가진 아랍의 적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이 장기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의 단합성과 정신무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살찐 돼지와 야윈 늑대
  
   가끔 ‘웰빙 체질’ ‘살찐 돼지’로 표현되는 한국의 국가 지도부와 ‘야윈 늑대’ 같은 북한정권의 지도부를 비교하면 北은 이스라엘, 南은 아랍을 닮은 것 같다. 가령, 한국이 북한 처지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행동하였을까?
  
   1. 東西 냉전에서 국제공산주의 세력이 승리, 미국과 일본이 赤化되고 韓美동맹이 사라진다.
   2. 북한정권은 미국, 일본과 수교한다.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하지 못하여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3.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고립된 한국은 미국, 일본 시장을 잃고 성장동력을 상실, 실업률이 늘고 무역赤字가 계속된다.
   4. 북한은 중국, 소련, 일본, 미국과 교역을 하면서 고도 경제성장을 계속한다.
   5. 2010년 현재 북한의 1인당 주민소득은 2만 달러를 넘었다. 한국은 300 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6. 드디어 한국에서 餓死者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국을 탈출, 중국을 거쳐 북한지역으로 넘어가는 인원이 한 해에 5000명 정도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한국의 대통령, 여당, 군대가 지금과 같다면 과연 북한의 공세에 며칠을 버틸 것인가? 전쟁도 못해보고 자진하여 북한에 흡수당하지 않을까?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김정일의 북한정권은 불리한 조건에서도 이스라엘처럼 外軍의 도움 없이 自主국방을 하고 있고 한국은 유리한 조건에서도 美軍의 도움을 받아 국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북한정권의 鬪志가 한국 지도부의 그것을 압도하고 있다. 아시아 역사는 잘 사는 나라가 못 사는 유목민족에게 당한 사례를 수도 없이 기록해놓았다. 북방유목민족들이 만든 거란, 금, 몽골에 차례로 당한 宋은 부자나라였다. 여진족에 당한 明, 징기즈칸 군대에 당한 이란의 文明은 찬란했다. 신라에 당한 백제도 그러했다. 한국의 풍요가 가난한 北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한국의 군대와 정치인들은 좋은 권총을 갖고도, 몽둥이를 든 惡黨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길 수 없는 비겁자들이 아닌가. 富를 武器와 勇氣로 전환시키지 못하면 빼앗긴다.
   나쁜 세력은 자동적으로 망하고 착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이긴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착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이 모자라서 망한 나라는 없다. 惡黨에게 몽둥이를 드는 용감한 사람이 없어서 망하였다.
  
   기습을 허용하고 반격하는 나라는 못 쓴다
  
   權泰榮(권태영) 박사는 육군사관 학교 제18기 출신으로서 KAIST 산업공학 박사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군 안팎에서 존경 받는 戰略(전략)연구가이다.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국방부 군사혁신기획단장 등 現業(현업)에 평생 종사하였고, ‘21세기/통일대비 국방발전방향’ 등 많은 著書(저서)가 있다. 그가 노훈 박사(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와 함께 쓴 ‘21세기 군사혁신과 미래전’(法文社)은 우리나라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맞추어 ‘先制(선제)공격’을 포함한 공세적, 예방적, 억제적 방위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權 박사는 이 책을 포함한 자신의 책과 논문에서 북한군에게 기습을 절대로 허용하여선 안 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1. 북한군은 핵무기, 화학생물 무기, 그리고 長射砲(장사포) 등 장거리 기습 및 타격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수도권에 인구의 반, 國富(국부)의 7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데다가 휴전선과 인접한 포천, 의정부, 고양 지역이 급격하게 개발되었다. 따라서 기습을 당하였을 때 물러날 공간이 없다. 물러났다가 반격작전으로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수도권의 황폐로 實益(실익)이 없다.
    3. 따라서 과거와 같이 敵(적)에게 영토를 양보한 다음 반격해서 失地(실지)를 회복하는 방위개념으로부터 벗어나 敵地(적지)내 작전으로 단기간 내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전쟁을 사전에 예방, 억제하는 방위개념의 채택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억제 및 예방차원의 방위(Preventive Defense)를 하려면 과거의 ‘守勢(수세)-소극’ 방위에서 ‘공세-적극방위’로 전환하고, ‘선제 기습적 공격/타격(Preemptive Attack/Strike)’도 필요시 허용한다는 ‘위엄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4. 방위의 목표와 수준을 ‘적극, 예방, 억제 방위’로 格上시키려면 군사력을 첨단 情報技術軍(정보기술군)으로 탈바꿈시켜야 하며,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허약한 정권이 기습을 허용하면 自滅
   
   
    先制(선제)공격 개념은 이스라엘이 實戰에서 활용한 바 있다. 1967년 6월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기는 아침 출근시간에 맞추어 이집트 공군 비행장을 기습, 수백 대의 전투기를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파괴하여 전쟁의 향방을 전투 30분 만에 결정지었다.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공격을 천명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은 自衛的(자위적) 차원의 결단이란 인상을 국제사회에 심어주었다.
   
    1973년 10월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이집트의 기습을 받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습을 허용하였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중대한 誤判(오판)을 하였다. 이집트 군이 開戰(개전) 전에 여러 차례 벌인 훈련은 전쟁 企圖(기도)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속아 넘어갔다. 이집트 군대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것을 알고도 “또 훈련이군”이라고 안심하였다. 전쟁 몇 달 전에 이스라엘은 이집트군의 훈련을 전쟁준비라고 판단, 예비군에 비상을 걸어 약4000만 달러의 예산을 날린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이건 전쟁이다”는 판단을 내린 것은 開戰 여덟 시간 전이었다. 골다 메이어 수상, 모세 다얀 국방장관, 그리고 참모총장이 모여 先制(선제)공격 與否(여부)를 놓고 토론하였다. 결론은 “얻어맞자”는 것이었다. 만약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면 침략자로 규정되어 미국으로부터 軍援(군원)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 대신 예비군 10만 명을 우선 소집하기로 하였다. 미국 닉슨 행정부에 긴급 연락을 취하여 소련과 아랍 국가들에 압력을 넣어 이집트가 기습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효과가 없었다. 닉슨의 안보 보좌관 키신저도 메이어 수상에게 “先制공격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만약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였더라면 미국은 여론의 악화로 이스라엘을 도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기습을 당한 이스라엘 군대는 처음 1주일간 苦戰(고전)하였다. 한때 다얀 국방장관은 수상에게 核폭탄을 사용할 준비를 하자고 건의하였다. 수십 개의 히로시마급 원자폭탄을 점검하였다.
    곧, 이스라엘 군대는 미국이 急送(급송)해준 수만 톤의 신무기의 도움도 받고 해서 반격작전에 성공하였다. 보름간 계속된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약3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부상자까지 합하면 1만 명이 戰死傷(전사상)한 것이다. 그때 인구가 500만 명도 되지 않던 이스라엘로선 큰 손실이었다.
   
    막강한 이스라엘도 기습을 당하면 이렇게 어려운 전투를 해야 하는 것이다. 權泰榮 박사는 “한국과 이스라엘은 안보 환경이 비슷하다. 특히 縱深(종심)이 얕아 기습을 받은 뒤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先制(선제)공격 개념을 배제하여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한국군은 기습당하는 것을 前提(전제)로 한 소극적인 防禦(방어)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한국 내에 막강한 從北(종북)세력을 구축해놓은 현시점에서 기습을 허용하는 것은 自滅(자멸)의 길이란 것이 權(권) 박사의 주장이다. 초장에 기습이 성공하여 서울이 대혼란에 빠지거나 북한군에 포위되면 從北(종북)세력은 폭동을 일으키고 연약한 정부라면 멸망의 길이 될 ‘현위치 休戰(휴전)’까지도 감수할지 모른다.  
    수세적 방어개념을 가진 군대는 士氣(사기)에도 문제가 생긴다. 반면 북한군은 ‘武力(무력)통일’의 꿈을 품고 항상 공격적이다. 한국군은 자유통일을 뒷받침하는 武力(무력)이라는 自覺(자각)과 先制(선제)공격도 감행할 수 있다는 각오를 가져야 북한군을 누를 수 있는 '위엄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김정일 참수작전
   
   
    한국군은 先制(선제)공격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敵(적)의 지휘부를 집중 타격하는 ‘참수작전’ 을 위한 신무기 개발에 돈을 쓰고, 첨단 NCW(Network-Centric Warfare) 戰力(전력)도 갖추어야 한다.
    NCW는, 敵陣(적진)에 대한 실시간 정보와 敵(적)의 지휘부와 신경계통을 同時(동시)병렬적으로 타격할 수 있는 신무기 체제의 결합을 의미한다. 敵의 戰略重心(전략중심)거점(Center of Gravity)을 수백, 수천 개 選定(선정)하여 놓았다가 開戰(개전) 즉시 미사일, 전투기, 유도폭탄 등으로 동시다발적 공격을 감행하면 순간적으로 敵(적)의 지휘체제가 마비된다. 이 효과는 핵무기를 쓴 것에 버금 간다고 한다. 지휘체제가 마비된 군대는, 머리가 잘려나간 뒤의 몸통으로 변한다.
    권태영 박사는 이런 공세적 방어체제를 구축하곤 이 사실을 김정일 정권에 대하여도 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재자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기는 자들이므로 전쟁을 企圖(기도)하다간 敗家亡身(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전쟁을 포기한다는 논리에서다.
   
    이런 공세적, 예방적 防禦戰略(방어전략)은 國家(국가)지도부의 意志(의지) 없이는 군인의 손만으로써 만들 수 없다. 文民優位(문민우위)의 군 통제가 시행되는 한국에선 민간인 대통령의 國防(국방)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先制(선제)공격 개념을 세우려면 북한노동당정권을 민족반역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헌법은 이미 그렇게 규정하고 있으니 국가 지도층이 이 헌법을 신념화할 수 있어야 과감한 戰略(전략)이 만들어질 수 있다.
   
    韓美(한미)연합사가 2012년에 해체된다면 북한군의 기습의도를 파악한 후 한국군 단독으로 선제공격을 결단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미군이 增援軍(증원군)을 보내줄 것이냐의 여부가 애매하다. 韓美연합사 체제하에선 自衛的(자위적) 선제공격을 韓美 수뇌부가 공동으로 결정하므로 미군의 증원은 자동적으로 보장된다.
   
    한국이 자유통일과 一流(일류)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보복력과 응징력을 갖춘 공세적 국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민족사에 축적된 노예근성을 정리하고, 어린 민주주의를 보호, 육성하고, 국가기강을 세우며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생존을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누리는 평화, 자유, 번영은 공짜심리와 결합되면 국민정신을 타락시키는 毒(독)이 된다. 아직도 북한정권을 상대로 전쟁 중인 나라인데도 30%가 從北세력화할 수 있는 요인들을 안고 있다. 북한이 核무기와 이 잠재적 반역세력을 결합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여, 決戰의지가 없는 국가 지도부를 압박하도록 방치하여선 안 된다. 敵의 지도부를 無力化시킬 수 있는 수단과 선제공격 개념의 작전계획을 세워놓아야 국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
   
   유엔개발기구가 발표한 2010년 ‘삶의 질’(Human Development Index) 랭킹에 따르면 한국은 169개국 중 12등, 이스라엘은 15등이었다. 常時的 안보위기 속에서 자유와 번영을 이룩한 한국과 이스라엘은 생존 자체가 기적적이다.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는 한국은 美軍의 도움으로 안보를 유지하고 이스라엘은 외국군의 도움 없이 안보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삶의 질’ 평가항목엔 안보가 없다. 이 항목을 넣으면 이스라엘과 한국의 순위는 逆轉될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나라와 外軍에 의지하여 자기를 지키는 나라는 國格이 다르고 정신이 다르고 국민들의 질이 다르다.
  
  
  
  2. 이스라엘 軍隊
  
  
  20세기 세계史의 2大 MVP
  
  나중에 역사학자들은 20세기의 세계사를 놓고 국가별 성적표를 매길 때 MVP(최우수 선수상)를 어느 나라에 줄 것이냐로 상당히 고민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인가, 이스라엘인가. 20세기 100년 사이에 국가건설-경제발전-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唯二한 국가. 그 3관왕을 이 두 나라는 전쟁과 테러의 나날들 속에서 성취했으니 국민들은 모두가 영웅이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원래 군사적인 전통에서 매우 취약한 민족이었다. 유태인은 나라를 잃고 2000년 동안 세계를 떠돌면서 별로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순한 양떼처럼 숱한 학살을 당했다. 한국도 文官중심의 문약한 정치문화에 안주하다가 통일신라 이후 1300여 년간 군대가 단 한 번도 外侵(외침)에 당면하여 국민들을 지켜내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 국민들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强軍을 가지고 국가를 지켜내고 있다. 머리 좋은 민족이 국가생존을 위해 死生결단으로 세계를 향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한국은 이스라엘에 20세기의 MVP를 넘겨주게 될지도 모른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경제력이 북한을 수십대 1로 압도하면서도 국방을 외국군대의 주둔에 의존하고 있는 국가지도부가 그것의 문제점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기자가 自主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을 찾기로 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12시간 직항로로 텔아비브에 도착
  
  
  이슬람 테러조직의 고정표적이 되고 있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은 김포공항에서부터 살벌했다. 1995년 5월23일 오전 대한항공은 처음으로 텔아비브행 직항 전세기 편을 띄우려 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체크 인 카운터로 접근하기 전에 벌써 짐 검사가 한 번 있었다. 짐과 기자의 양복엔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수용소행 유태인임을 알리는 다윗별의 표시가 연상되었다. 출국장으로 들어갈 때도 빨간 딱지 승객은 별도의 검색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엄격한 짐·몸수색을 했다. 탑승구에서도 한 번 더.
  “지금 들고 있는 짐은 본인 것입니까. 누가 맡긴 겁니까.”
  보안요원의 이런 질문은 앞으로도 여러 번 되풀이해 들어야 할 말이었다. 승객도 모르는 사이에 폭발물이 짐 속에 들어가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었다.
  
  이런 검색 끝에 점보기에 올라 창가 자리에 앉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오전 10시에 이륙한 점보기는 ‘몽골의 길’을 떠나 서쪽으로 날아갔다. 점보기는 서울-상해-고비사막-천산산맥-카자흐스탄-카스피海 횡단-터키 북부 횡단-지중해-텔아비브 코스로 날았다. 창가에 앉아 내려다 본 地上의 경치는 황토색과 적갈색, 그리고 白雪이 주류였다. 사막과 황무지, 그리고 엄청난 산맥으로 연결된 이 길은 한때 몽골 기마군단이 西進하면서 문명과 도시국가를 쓸어버린 진격로였다.
  
  옛 소련 붕괴 이후 힘의 공백지대가 되어 통행의 자유가 확대되고 있는 지역이다. 중국과 인도대륙을 북쪽에서 활처럼 싸고 있는 형태의 유목민의 길 주변엔 지금도 몽골 문화의 자취가 깔려 있다. 이 활대의 손잡이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 한반도이다.
  일본을 빼면 최대의 몽골인종 국가인 한국이 이 몽골의 길, 그 시발점에 서서 이 동서양의 교통로를 민족 에너지의 분출구, 또는 활동무대로 잘 이용한다면, 중국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정치·경제·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에 젖어 보았다. 지금도 계속되는 아시아 역사의 주요한 흐름은 이 몽골 길 주변의 북방 유목민족과 중국·인도 등 내륙 농경민족 사이에 썰물과 밀물처럼 되풀이되었던 투쟁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피 속을 흐르는 유목민족의 野性을 이 황무지의 대륙이 부르고 있는 것이다.
  12시간 만에 텔아비브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 바닷가의 단 파노라마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서울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했으나 텔아비브에 도착하니 현지시간이 오후 5시. 시차(時差)에 의한 피로를 별로 느끼지 않게 하는 대낮 비행이었다.
  
  
  ‘개판 5분 전’인 IDF
  
  
  기자가 취대대상으로 삼고 찾아온 막강 이스라엘 군대(IDF)는 그러나 ‘개판 5분 전’이었다. 텔아비브나 예루살렘 거리 등 이스라엘 어디를 가나 자주 눈에 띄는 사람들은 M-16소총을 거꾸로 메고 다니는 군인들이다. 인구 550만 명 중에 17만 명이 현역이고 1년에 한 달쯤 現役 복무를 하는 동원예비군까지 포함하면 60만 명이 군인인 나라이다. 가장 사회활동이 왕성한 연령층에 속하는 이들 60만 명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 전체가 군사文化의 색채를 띨 수밖에 없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군인들의 겉모양은 좀 과장하면 정규군이 아니라 산적떼 같다. 모자는 어깨에 꿰차고 다니고 바지는 줄이 안 서 있으며 여자 사병은 선글라스를 끼고 초소근무 중에도 담배를 피운다. 예루살렘 통곡의 벽 입구에서 순찰 중이던 사병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고 했더니 동료 병사들까지 다 불러모아 함께 찍는데 꼭 소풍 나온 유쾌한 청소년 같았다. 死海 입구의 도로 검문소를 지나는데 한 초병은 긴 벤치에다가 온갖 음식물을 늘어놓고 라면 비슷한 것을 끓여서 먹고 있다가 어서 가라고 손짓만 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근교의 탱크박물관에 찾아간 날 마침 그곳 연병장에선 기갑부대 소속 신병훈련 수료식의 예행연습이 이뤄지고 있었다. 남녀 혼성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돌아다니는 친구가 없나, 아무데서나 쉬하는 친구가 없나…. 나를 안내해 준 오프라 여사(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40세 여행가이드)는 소변 보는 군인을 가리키며“사진을 찍어라”고 부추겼다. 내가 셔터를 누르자 오프라 여사는 “앞에서 안 찍는 것만 해도 봐주는 거지 뭐”라고 중얼거렸다. 이스라엘 군대는 週末이면 외박을 많이 보내 준다. 군인들은 소총과 실탄을 갖고 집으로 간다.
  ‘개판 5분 전’으로 보이는 군대이니 총기사고가 당연히 많이 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발 사고나 총기에 의한 범죄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들은 휴가 중에라도 테리리스트들의 현장범행을 발견하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정당방위적인 사격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있다. 이런 권한 위임은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사격술과 판단력,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는 당치도 않은 일이다.
  
  
  형식주의 배격, 철저한 훈련
  
  
  駐이스라엘 한국대사관 朴東淳(박동순·60) 대사를 만났더니 첫 마디가 “이스라엘 군인들의 복장 보고 놀랐지요”였다. 朴대사는 “바로 그런 점이 이스라엘 군대의 강점이다”고 했다. 형식주의를 배격한 바탕 위에서 철저한 훈련을 시키니 전투력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훈련의 强度는 한국군보다도 더 세다는 견해였다. 기자의 이스라엘 체재 중에 취재 스케줄을 짜주고 안내를 맡아 주었던 알론 기보니氏(이스라엘 방위산업체 RAFAEL 한국지사장)는 공군 소령 출신으로서 1973년 10월 전쟁 때는 스카이호크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 주로 골란고원에서 시리아 탱크를 공격했다는 사람이다. 그는 “이스라엘 장교들은 전투개시 때 ‘돌격!’이라고 호령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지휘관들은 ‘알하라이!’라고 외칩니다.”
  ‘알하라이!’는 ‘나를 따르라’(Follow me!)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스라엘 장교들은 대대장까지도 전투에서 앞장을 서 死傷率이 유달리 높다고 한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에서 戰死者의 24%가 장교였다. 이스라엘 군대에는 사관학교가 없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선발된다. 實戰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상급자라도 부하통솔이 어렵다는 게 이들의 확신이다. 장교와 사병 사이의 인간적 차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먹는 것과 자는 곳의 시설은 똑 같도록 규정된다. 장교식당 같은 것은 없다.
  
  
  18~20세의 소년병 같은 군대
  
  
  기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너무 어리고 앳돼 보이는 데 놀랐다. 꼭 천진난만한 소년병 같았다.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경계심은 전혀 보이지 않고 구김살이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군대는 18세에 징집되기 때문이다. 高校 졸업 즉시 군대에 들어간다. 남자는 의무복무기간이 3년, 여자는 2년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軍 면제다. 여자군인의 근무부서는 非전투부서로 제한된다. 기자는 소아마비에 걸렸던 것 같은 여자士兵이 다리를 절며 가는 것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았더니 신체장애자라도 지원하면 행정부문에서 근무하도록 한다고 한다. 이런 지원자 중에는 가족 중에 戰死者가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이니 군대 기피는 사회적 자살행위다. 박동순 대사는 “사병으로 복무 중인 아들이 장교시험에서 탈락한 것을, 우리의 자녀들이 대학시험에서 떨어진 것처럼 낙담하는가 하면 징집 탈락자들이 왜 군대 가지 못하게 하느냐고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들이 가끔 있다”고 전했다.
  
  사람이 가장 순수한 용기에 불탈 때인 18~20세의 연령층을 군대에 집어넣어 2~3년간 조국이란 용광로에서 한 덩어리로 녹아들게 만드는 IDF(Israel Defense Forces)를 이스라엘 사람들은 ‘People’s Army’라고 즐겨 부른다. 직역하면 人民軍(인민군)이다. 용병도 직업군인도 아닌 국민 속에서 나와서 국민으로 돌아가는 군대란 의미의 인민군이다. 총리 라빈은 1967년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다(이스라엘은 육·해·공군은 있지만 통합군制여서 3軍을 통괄하는 참모총장은 한 명, 각 군엔 사령관이 있다). 그는 6일전쟁 뒤 이렇게 말했다.
  <우리 병사들은 무기가 우세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사명감, 임무에 대한 정당성의 확신, 조국을 향한 깊은 애정,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유태인들이 이 나라에서 자유롭게 독립하여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결의에 의해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 군대는 인민으로부터 왔고 늘 인민으로 돌아간다>
  
  IDF의 정예부대로 유명한 골라니(Golani) 보병여단의 기록에는 6일전쟁 때 규정위반을 한 사병에게 ‘전투참여 금지’란 벌을 내렸다고 적혀 있다. 이 사병은 대대장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여 겨우 그 치욕적인 벌을 면제받았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 이도 조셉 디센트쉭氏(56)는 유력 일간지 마리브(MAARIV)紙의 주필로 있다가 최근엔 언론상담회사를 설립한 사람이다. 그는 내년에 이스라엘에서 열리는 국제언론 단체 IPI연례총회의 조직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지난 5월 서울에서 열렸던 IPI총회에도 참석했던 이도氏는 50代의 나이에도 예비군으로서 매년 現業 부서에 소집돼 간다고 한다. 동원예비군으로서의 의무복무기한은 40代에 다 채웠으나 예비군으로 계속 남아 있기를 자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근무 부서는 국방부 홍보실이다. 이 고참 언론인은 아마도 새파란 젊은 장교의 지시를 받으며 일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적은 人口로써 自主국방을 담당하는 방법으로 거의 현역수준에 육박하는 43만 명의 동원예비군을 유지하고 있다. 1년에 30~45일간 동원되는데 우리나라처럼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현역과 똑같이 복무를 한다. 父子 사이처럼 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은 사병들이 함께 초소를 지키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1973년 10월 전쟁 때 골란고원을 기습한 시리아의 5개사단을 막아낸 主力은 1100명의 18세 초년병으로 구성된 골라니 보병여단과 2개 기갑여단, 그리고 하루 늦게 전선에 도착한 아버지뻘 되는 동원예비군이었다. 그야말로 父子군대였던 것이다.
  
  동원예비군은 평생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게 되므로 부대원들은 한 가족 같다고 한다. 이들은 사회생활에서도 서로 협조, 교류함으로써 기자가 느낀 이스라엘 사회의 독특한 분위기-격식이 없어 모두가 형님 동생 사이 같은-를 연출하며 계층 간의 융합에도 一助를 한다고 한다. 유태인들은 인종적으로는 아랍인과 비슷하여 유태인 여자들도 아랍 여인 못지 않게 미인들이다. 몸집은 크지 않고 날렵한데다가 거의가 군대 경험자들이라 걸음걸이와 자세는 활달하다. 그것이 거리풍경을 한결 활기차게 만들고 있었다. 물론 취업률도 높다.
  
  
  남자답고 여자다운 이스라엘 女軍
  
  
  이스라엘에서 갖게 된 두 가지 여성像은 女軍과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이다. 뭔가 줄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인 유태인 어머니들. 그들 중의 한 여성 오프라 여사는 이번 취재여행 중 기자가 만난 유태인 중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었다. 외국인 상대의 관광가이드 자격증을 가진 기갑사단 교관 출신의 오프라 여사는 네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이틀간 그녀가 모는 밴(Van)을 타고 예루살렘, 나사렛, 갈릴리 호수와 골란高原을 돌아다녔다. 운전을 하면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자연과 피비린내 나는 역사에 대해 웅변에 가까운 해설을 쉴새없이 쏟아내는데 그 고급영어의 교양과 재치뿐 아니라 그 해설에 담겨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국토와 역사에 대한 긍지와 사랑이 나에게까지 전염되어 오는 것이었다.
  “저 병원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제가 자란 키부츠가 있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창립하셨지요.”
  “저 언덕에선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 전투가 벌어졌지요.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가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을 격파함으로써 중동이 그 뒤 10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기에 아직 불타버린 채 버려져 있는 차량들은 독립전쟁 때 고립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活路(활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우리 부대가 아랍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되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둔 것이에요.”
  “저 水路는 요르단江 물을 남쪽으로 나르는 것인데 시리아 軍은 골란고원에 대포를 갖다 놓고 수시로 수도파이프를 때렸답니다.”
  
  그의 운전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예수의 성장도시 나사렛의 그 좁고 붐비는 뒷골목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데 감탄을 연발하자 오프라 여사는 즐거운 奇聲(기성)을 질렀다.
  “아이 필 마이 카!”(I feel my car!)
  ‘나는 내 차를 내 몸처럼 느낀답니다’란 뜻이겠는데 그녀의 악수하는 손은 억세고 성격은 급하며 행동은 빨랐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을 묘하게 조화시킨 이스라엘 여성, 오프라 자신이 바로 新生국가 이스라엘 역사의 한 具現者(구현자)란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 취재를 끝내고 김포공항에 돌아와 모범택시를 탔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고속도로를 시나이 사막 탱크戰場으로 착각한 듯 무섭게 달리고 빵빵거리며 추월하는 이스라엘의 군사문화적 교통문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도 운전을 하는 기보니氏는 “이스라엘에서 운전하기가 더 겁난다. 한국 운전자들은 양보심이 있는데 우리는 그게 없다. 그러나 운전기술은 우리가 좀 낫다”고 했다.
  
  이스라엘은 여섯 번의 전쟁을 치렀다. 독립전쟁, 1956년 수에즈 전쟁, 1967년 6일전쟁, 1967∼1970년의 지구전(War of Attrition), 1973년 10월전쟁, 1982년 레바논 전쟁. 이 전쟁 사이사이의 局地戰과 지금도 계속되는 테러로 사망한 사람까지 합쳐서 약 2만 명이 戰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이스라엘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약 150만 대, 1994년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528명·부상자는 3만5500여 명). 유태인들은 천성적으로 한국인들처럼 조급한 편인데 전쟁과 더불어 살면서 兵營化된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려다 보니 더욱 조급해져 난폭운전으로 흐른 게 아닐지 모르겠다.
  
  
  강한 空軍과 早期경보 능력이 핵심
  
  
  이스라엘의 육군·공군은 고도로 무장돼 있다. 主力 무기의 수는 현역군 규모에서 4배쯤 많은 한국군과 맞먹을 정도이다. 이는 기동성의 확보가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조직한 군대이기 때문이다.
  1994년 레바논 국경지대나 가자지역 등에서 작전 중 피살된 이스라엘 군인 수는 37명이었다. 일반시민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66명이다. 이스라엘 군대(경찰군 포함)가 죽인 팔레스타인 사람은 114명, 이스라엘 민간인 손에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은 38명이다. 한편 이스라엘 군대 내에서 사고로 죽은 군인은 1994년 한 해에 25명, 자살자는 43명이었다. 합계 68명. 약 네 배 규모의 현역군을 가진 한국군에서 매년 사고로 죽는 군인들이 300여 명, 세계 최고의 군대라는 이스라엘 군대의 사고율과 비슷한 수준이니 우리 군대사고에 대해서 너무 과민할 필요가 없겠다.
  
  지난 50년간 이러한 '전쟁의 생활화' 속에서 이스라엘을 지켜온 이스라엘 국방군, 즉 IDF는 앞에 잠깐 소개했듯이 그 구조나 전략개념, 무기체계가 독창적이다. 소련식도, 미국식도 아닌 이스라엘式이다. 압도적인 人力과 武器를 가진 사방의 敵과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군대를 만들 것인가 하고 머리 좋은 민족이 IQ를 총집결한 결과물이 IDF이므로 여기엔 분명 배울 점과 참고점이 있을 것이다.
  
  좁은 국토를 戰場으로 내주지 않기 위해서는 戰場을 敵國 영토 내에 펼쳐야 한다. 早期경보에 따른 先制공격이 필수적이다. 이스라엘의 國力으로 볼 때 장기전은 불리하다. 따라서 뛰어난 정보수집능력, 강력한 공군과 기갑부대 그리고 신속한 동원예비군이 등장하게 된다. 이란 물리학의 공식은 이스라엘 전략의 기본이다. 전투력(F)은 무장력(M)이 가진 속도(V)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속도가 전쟁승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얘기다. 군사조직에서 속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단·편대·함대의 이동 속도일 뿐 아니라 국가의 대응속도가 더 핵심이다. 敵의 전쟁企圖를 빨리 파악한 뒤 국가를 총동원 체제로 신속히 전환할 수 있도록 하는 정보수집·판단능력이 속도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은 군대로 갔고, 그들 중에서도 최고의 人材가 공군과 정보조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스라엘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2大조직이 있다면 공군과 모사드(해외담당 정보기관)일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空軍을 ‘또 다른 군대’라고 했다. 空軍에 대한 특별대우를 모두가 양해하고 있었다.
  
  공군과 정보능력의 강화는 人名손실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6일전쟁(1967년)과 걸프戰(1991년)은 본질적으로 空軍이 결정적 역할을 한 전쟁이었다. 勝者 쪽의 死傷率이 가장 낮은 전쟁이기도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거의 비슷한 전략 환경 하에 있다. 수도권이 군사분계선에서 가깝다는 점, 국토가 좁다는 점, 특히 소련식 무기체제와 군대(시리아와 북한)를 상대하고 있다는 점, 人名 손실의 최소화를 목표로 한 전쟁개념의 필요성, 조기 경보체제의 死活的 중요성이 그것들이다.
  최근 한국정부의 지도부에선 이스라엘과 한국이 처한 安保환경상의 이러한 유사성에 착안하여 이스라엘 자주국방의 노하우를 연구·참고·도입하려는 움직임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란-북한 커넥션’ 저지가 이스라엘의 제1國政목표
  
  
  1994년 12월 라빈 총리의 訪韓 이후 金泳三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무기 체제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올해 들어 安企部와 모사드의 최고 책임자가 상호방문하여 정보협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류 방안을 의논했음이 이스라엘에서 확인되었다. 한국군의 고위층 인사들이 이스라엘을 찾는 횟수도 늘고 있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이미 이스라엘의 기술지원을 받아 無人정찰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한국-이스라엘의 安保 협력을 촉진하고 있는 것은 북한-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 계획 때문이다. 북한은 노동1호와 대포동1호(이들 명칭은 韓·美 측에서 붙인 것이지 북한이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니다)를 이란의 자금지원에 의하여 개발하고 있다. 동해에서 발사실험을 한 적도 있는 노동1호는 설계 사정거리가 1400km. 대포동1호는 다단계 로켓과 고체 연료를 쓰는 대륙간 탄도미사일로서 사정거리가 4000k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 다 아직 實戰배치 단계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노동1호, 대포동1호의 개발에 대해서는 안기부와 모사드뿐 아니라 미국과 러시아 정보기관도 예의 주시하면서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1992년 러시아 정보기관은 북한에 들어가려던 러시아 미사일 과학자의 입국을 금지시키고 북한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다. 이들에 대한 조사에 의해 북한이 러시아 과학자들에게 4000km 사정거리의 미사일 개발을 의뢰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그 정보는 관련국에 의해 공유되었다. 이즈음 모사드는 安企部(現 국정원)에 노동1호의 설계도 정보를 제공했는데, 이 미사일이 核탄두 운반용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정보였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이집트, PLO, 요르단과 잇따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시리아와는 협상단계에 들어간 상태이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국가와는 급속히 화해 분위기로 가는 마당에 이란이 잠재적 敵國 제1호로 등장하고 있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이란이 추진하고 있는 핵무기 개발과 북한이 개발하여 이란에 팔기로 한 核폭탄 운반용 장거리 미사일이 결합되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판단이다. 이란은 인구 6000만 명, 면적이 한반도의 8배인데다가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정권을 장악, 對이스라엘 테러를 조종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스라엘 측의 시각이다. 국가 잠재력에 있어서 중동 제1인 이란, 그것도 과격한 원리주의자의 손에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이 들어가는 것을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라도 막겠다는 결의를, 기자는 이스라엘 安保관계자들과의 연속 인터뷰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한 정보관계자는 “현재로선 이스라엘이 우리에게 매달리는 형편이다. 對北정보를 아무래도 우리가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한국정부는 1994년 12월 텔아비브에 대사관을 개설했고, 이스라엘은 1992년 서울의 테헤란로에 그들의 대사관을 재개했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직후 한국정부가 아랍 산유국가들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사들이기 위해 부득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냉각시킨 이래(그 뒤 이스라엘은 駐韓대사관을 철수, 日本대사관이 한국 관련 업무를 代行해 왔다) 20년 만에 두 나라는 다시 밀월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現단계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은 對北정보 부문에선 이미 협력체제를 가동시키고 있다. 그 다음으로 협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히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창적인 무기체제의 수입 및 기술이전 부문이다.
  
  특히 군사 대치상황이 한국과 비슷한 이스라엘의 군사정보수집체계에 대해 한국 측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의 국영 放産업체 라파엘社도 이스라엘 정보시스템을 한국에 수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담당부서를 조직하는 등 의욕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태도이다. 武器체제에서 한국과 이스라엘이 협력하는 것을 한국군이 미국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하여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하여 견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연간 30억 달러의 미국원조(그중 18억 달러는 군사원조)를 받으면서도 군사부문에선 自主노선을 걷는 데 성공한 나라다. 이스라엘이 그런 노하우를 한국에 전하여 바람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경계심을 미국이 갖게 된다면 복잡하게 될 것이다. 그 반대로 이스라엘의 협력을 발판으로 삼아 미국內 유태인 세력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한국정부가 하기 나름일 것이다.
  
  
  유태인 학살 박물관에서
  
  
  이집트 외무장관 암리 무사가 1994년 8월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유태인 학살 박물관(야드 바셈) 참배를 일정에서 빼달라고 요구하여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주요 방문객들은 한국에서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과 같은 격으로 야드 바셈을 방문, 조의를 표하는 것이 관례다. 무사 외무장관은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이스라엘 의회에 진출한 아랍계(이스라엘 국적) 국회의원의 간청을 받아들여 결국 참배를 하긴 했으나 추모의 방에 꽃다발을 바치는 의식은 따르지 않아 이스라엘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기자는 일부러 그 방에 들어가 보았다. ‘추모의 방’ 입구에서는 경비원이 半圓球型(반원구형)의 종이 모자를 나눠준다. 머리 뒤꼭지에 눌러 쓰고 앞을 보니 ‘영원의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바닥에는 22개 나치수용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영원의 불’ 앞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모아서 가져온 학살자 유골들의 재가 들어 있는 곽이 놓여 있었다.
  
  
  넥타이 안 맨 국회 국방위원장
  
  
  대학살 박물관은 유태인 예술혼의 최고 수준을 집중시킨 장소이기도 하다. 단순과 절제가 박물관의 설계와 여러 조각품의 공통점이다. 깔끔한 美的(미적) 감수성이 만들어낸 공간과 여유는 관람자들의 몫이다. 강요되거나 선동되는 감정이 아니라 깊은 자기성찰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어린이 추모관에 들어가면 캄캄하다. 유리벽과 촛불, 그리고 수용소에서 죽어간 150만 어린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呼名(호명)해가는 소리….
  이 추모관은 아우슈비츠에서 아들을 잃은 미국계 유태인 에디타 슈피겔의 獻金에 의해 지어졌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500만 점 이상의 자료를 가진 문서보관소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하여 쓰인 세계의 모든 간행물을 모은 도서관, 그리고 이스라엘 학교에서 이 대학살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 교사들을 교육하는 홀로코스트 세계 교육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이 센터는 매일 세미나와 강연회를 가지는 常時운영 기관인데 매년 3만 명이 참여한다. 야드 바셈 박물관은 또 ‘세계 각국의 정의로운 사람들을 발굴하는 課’를 운영하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처럼 유태인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외국인들에 대해서 조사하여 ‘정의로운 사람’이란 증서와 메달을 주는데 지금까지 8600여 명이 지명되었다. 이분들이 기념식수한 나무가 야드 바셈을 둘러싸고 있다. 야드 바셈은 국민교육장이다.
  기자가 들른 날에도 여러 그룹의 국민학생들이 박물관內 여기저기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야드 바셈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가 나라를 잃는 순간 대학살은 되풀이되게 마련이다’라는 강박관념의 注入이다. 1995년 6월9일 콜 독일 총리는 야드 바셈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죄했다.
  “독일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 惡行에 대해서 오직 부끄러워할 뿐이다.”
  콜 총리는 이스라엘 국민에게 충고도 했다.
  “과거만 기억하고 미래를 잊어버리는 것도 나쁜 일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독일 사람들에 대하여는 특별히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유태인 대학살은 나치 집단의 소행이지 일반 독일인에게 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용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 정부가 철저하게 과거를 반성하는 자세를 취하고 희생된 유태인 가족들에게 많은 물질적 보상을 하는 등 행동으로써 반성의 뜻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戰後(전후)에 똑같은 태도를 취했더라면 지금쯤 한국인들은 “식민통치는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소행이었지 대다수 일본인들에게까지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식으로 너그럽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야드 바셈 바로 옆에 있는 언덕 꼭대기엔 국립묘지가 있다. 시온주의의 창설자 시어도어 헬젤의 무덤을 비롯하여 에쉬콜 총리, 골다 메이어 총리, 슈프린차크 초대 국회의장 등 역대 국가지도자들의 아주 조촐한 무덤들이 있었다. 봉분은 없고 석판 한 장이 무덤 하나인데 크기는 싱글 베드 정도였다. 비석도 없고 다른 장식물도 없다. 오히려 軍人묘역의 戰死者 무덤이 총리 무덤보다 더 크고(그래도 별것 아니지만) 꾸밈이 있었다.
  기자가 이스라엘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 국회(The KNESSET)의 외교·국방위원장 오리 올氏(56)였다. 역대 외교·국방위원장 출신 중에는 라빈 現 총리 등 다섯 명의 총리가 배출되었다. 집권 노동당 소속인 오리 올氏는 육군 소장 출신. 골란 전선 사령관, 중부전선·북부전선 사령관 등 요직을 거친 유명한 장군이다(이스라엘 군대의 최고계급은 중장).
  
  그는 넥타이도 매지 않고 외투도 벗은 채 기자를 맞았다. 이스라엘에서는 여간한 공식행사가 아니면 넥타이를 매지 않는다. 격식과 형식에는 최소한의 신경을 쓰고 문제의 본질과 핵심에 정력을 집중한다는 것이 유태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인 듯했다. 오리 올 위원장은 기자가 앉자마자 그대로 본론으로 들어가 직설적인 語法으로 대답해 나갔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對話法(대화법)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귀하가 위원장으로 있는 외교국방위원회는 지난해 아그라나트(Agranat: 당시 대법원장) 위원회의 보고서를 공개하도록 결의한 바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왜 적절하게 대비하지 못했는가를 조사한 것이었습니다. 이 보고서는 이스라엘군의 정보부대가 전쟁발발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하고 당시 참모총장 엘라자르 장군과 육군 정보부대장 등의 해임을 건의하기도 했었지요.
  “우리는 그 전쟁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고 정보 수집능력을 그 뒤에 크게 개선시켰습니다. 당시 우리의 오판은 주로 분석과 판단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아주 신뢰할 만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했지만 고위층에서 무시했습니다. 나도 그 전쟁에서 골란고원 전선의 기갑부대장으로 고생했습니다만 이스라엘 軍의 정보능력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가 우리와 평화협정을 맺게 된 것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에즈 운하를 渡河하여 기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스라엘을 방문한 우리 정보기관 간부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우리 정보기관과 貴國(귀국)의 정보기관은 서로 협조를 잘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스라엘과 한국의 공동 敵이 되고 있는 북한에 대한 정보의 교환 말씀입니까.
  “북한뿐이 아니지요.”
  ―전투에서 부상당한 적이 있습니까.
  “이집트와의 소모전(War of Attrition) 때 시나이 반도에서 당했지요.”
  
  
  "존경받는 게 군인의 즐거움"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안보위기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상당히 교훈적입니다. 위기 때는 강한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는데 그런 유혹을 어떻게 뿌리쳤습니까.
  “우리는 군사혁명을 할 필요가 없어요(웃음). 대통령 에즈라 와이즈만, 총리 라빈, 그리고 나도 다 장군 출신이니 우리는 이미 권력을 잡고 있는 겁니다(웃음). 이스라엘 군대는 市民軍입니다. 공군과 정보부대만은 주로 장기복무 직업군인으로 조직돼 있지요.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군대는 人民으로부터 나왔고 人民으로 돌아갑니다. 군인이 市民이고 시민이 軍人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항상 리버럴하고 개방적이지요.”
  ―최근에 총리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은 강한 지도자를 바라서 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에는 정당이 몇 개 있지요. 세 개? 우리는 열 개나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총리에게 더 강한 권력을 주어야겠다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우리의 국가건설 역사는 47∼48년밖에 안 됩니다. 아직도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고쳐야지요.”
  ―이스라엘은 GNP의 10%를 군사비로 쓰고 있는데 경제가 이런 지출을 계속적으로 지탱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지난 20년간 군사비의 비중은 계속 줄어들고 있어요.”
  ―예방공격(Pre-emptive strike)과 보복,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쟁수행 원칙입니까.
  “우리같이 작은 나라에서는 신속하게 戰場을 敵國 영토로 전개해야만 승리합니다. 그래서 강력한 공군을 발전시킨 것이지요.”
  ―작년에 이스라엘 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된 암논 샤하크 장군은 만 50세에 頂上(정상)에 올랐습니다. 굉장히 젊은데요… 한국군에 비교하면.
  “젊다니요. 샤하크 장군은 우리 역사상 50세에 참모총장이 된 최초의 인물입니다. 나는 41세에 소장이 됐어요. 47세 때 은퇴했어요. 몇 년 전보다는 장성들의 평균연령이 4∼5세나 많아졌어요.”
  ―한국에서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이 많은 진통을 겪고 있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에선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국민이 군대와 지휘관을 믿고 아이들을 軍에 보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개방적인 사회와 개방적인 군대에 적응할 수 있는 개방적인 지휘관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어떻게 부하를 통솔합니까.
  “오픈 마인드(open mind)! 상하관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無知와 무관심입니다. 개방적인 자세 없이는 無知, 무관심이 없어질 수 없지요. 지휘관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해가야 합니다. 오픈 마인드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어요. 또 하나 덧붙인다면 리더는 他人(타인)들을 리드하는 사람입니다. 모범을 보여야만 리드할 수 있지요.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지휘관이 되어도 전투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리드를 합니까. 우리는 웨스트포인트가 없습니다. 모든 장교들은 사병에서 출발하여 올라갑니다. 그러니 모범을 보일 수 있지요.”
  ―군인된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이 뭡니까.
  “남으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일 때 습관처럼 ‘당신은 군대에서 무엇을 했었느냐’고 물어요. 군인생활, 그리고 군대가 사회로부터 평가받고 감사를 받고 있다는 것, 그게 이스라엘 군인의 즐거움이지요.”
  
  
  국민적 合意가 軍 士氣의 기초
  
  
  지브 시프氏는 텔 아비브市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하레츠(HAARETZ)의 국방부장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제일 가는 安保분야의 전문기자이다. 61세의 老기자인 그는 이스라엘이 치른 여섯 번의 전쟁과 캄보디아 월남전쟁 등 지금까지 여덟 번 전장을 누볐다고 한다. 이스라엘 상류층에서는 “라빈 총리도 시프 기자에게 보고한다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그는 고급정보를 많이 접하면서도 신뢰받고 있는 大記者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그는 텔 아비브의 한 카페에서 한 시간 반쯤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요사이 젊은 기자들이 國益을 해치는 국방 관련 기사도 마구 쓰고 지나친 상업주의가 또한 부작용이 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의 敵을 도와주는 군사상의 기밀은 보도하지 않는 것이 언론계의 자율적인 관례이다”고 했다. 그는 “국방당국자와 언론인들이 비공식적인 접촉을 항상적으로 유지하면서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쉬프氏는 “自主국방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방위산업의 기초이다”고 했다. 그는 “美製 무기를 사더라도 그것을 한국식으로 개조,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방위산업의 독자적 운용이 있어야 武器수입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기 때문에 그 국가는 외교적으로 여유를 갖게 된다”고 충고했다.
  
  시프氏는 “국가의 전략과 관계된 주요 이슈에 대해서는 全국민적 合意가 있어야 국가의 단결이 유지될 수 있고 젊은 세대에게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를 설명하기가 쉽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경우 지난 1년간 시리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과의 평화협상을 둘러싸고 어떤 점령지를 어떻게 포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國論이 분열됨으로써 ‘국민적 합의’가 다소 약화돼가고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스라엘의 國論이 영토문제라는 매우 민감한 주제를 선택하여 갑론을박하도록 만든 것이 실수였다면서 ‘국민적 합의’라는 목표를 너무 깊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국민적 합의가 약화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태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군사적 天才性(천재성)은 발견되지 않는데 어떻게 이처럼 독창적인 군사조직과 전술을 개발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습니까.
  “유태인은 군사 면에선 아주 형편없는 전통밖에 가지고 있지를 못했지요. 우리는 군대를 조직할 때(영국식민지시대) 다른 나라와 아주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비밀전투요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전통 속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는 IDF(Israel Defense Force)를 인민군(People’s Army)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建國 주역들은 농업을 일으키는 데 注力했고 그 뒤에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엔 무역이나 산업처럼 人力수요 면에서 다른 경쟁부문이 없어서 가장 뛰어난 人材가 군대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태인들 중에서도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그 기초를 놓은 조직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하나 이스라엘 군대를 强軍(강군)으로 만든 요인은 싸우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냐 멸망이냐, 여기서 살 것인가 다시 쫓겨날 것인가, 예속이냐 독립이냐의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노 아더 초이스’(No other choice)-이 말을 기자는 이스라엘 취재 중에 수십 번은 더 들어야 했다. 용감하게 싸우는 수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벼랑에 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강박관념이 맹렬한 투지로 전환된 곳에 이스라엘 군대가 있다는 얘기다. 시프 기자는 “이스라엘이 주변 아랍 국가와 평화를 이룬 다음에는 이스라엘 군대나 안보의식도 달라질 것이다”면서 “그때는 국민적 합의를 도모하기가 더 어렵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평화협정이 완결된 이후에도 이스라엘이 강한 군대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아랍국가들끼리의 수많은 충돌과 전쟁의 역사를 보면 自明(자명)해집니다. 중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만도 두 개의 나라가 지도상에서 지워져버린 경험을 가진 지구상의 유일한 지역입니다. 쿠웨이트는 국제연합군의 도움으로 국가를 회복했으나 南예멘은 멸망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이란 커넥션’은 폭발의 임계량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란·북한이 협력하여 각각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란을 잠재적인 敵國 제1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공동의 敵國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란은 한국의 敵이 아니고 북한은 이스라엘의 敵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 누구의 적이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란과 북한은 국제적인 위협이란 점이 중요합니다. 이란과 북한은 예측 불가능한 정권으로서 그들이 손에 들어가는 미사일과 핵은 통제불가능한 파괴력(Uncontrolled destructive power)이 됩니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의 파괴를 국가목표로 公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개의 통제불가능한 파괴력이 하나로 합친다면 폭발의 임계량(Critical mass)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인 것입니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사정권 안에 일본이 들어가고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이란의 위협에 직면한다면 이것은 局地的인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시프 기자는 이란과 북한이란 공통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 국제적인 압력.
  둘째, 한국과 미국, 이스라엘과 미국의 전통적인 협력관계를 활용하여 이 세 나라가 긴밀하게 협조하는 방안.
  셋째, 북한과 이란의 위협이 노골화될 경우 북한과 이란에 대해서 이 세 나라를 주축으로 한 국제적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것.
  시프 기자는 “며칠 전에 美國의 군축국장이 처음으로 북한의 또 다른(노동1호 이외의 다른 미사일, 아마도 대포동 1호를 지칭하는 듯) 장거리 미사일의 사정거리가 수천 마일이라고 지적한 자료를 보았다”면서 “북한은 일본을 사정권 안에 넣음으로써 일본과 미국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목적과 지역강국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미사일을 팔아 먹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외국군대 장기 주둔하면 국민의 정신무장이 둔해진다”
  
  
  시프 기자는 “이란은 현재 核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반시설과 人力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분석한 뒤 “러시아로부터의 核 물자 밀수 가능성을 배제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이란과 북한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밀수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시프 기자는 “舊(구)소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은 북한에 비해서 엄청난 경제력을 갖고 있는데 왜 그것을 對러시아, 對北관계에서 잘 활용하지 못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1993년에 이스라엘이 북한과의 비밀교섭을 통해서 北에 경제원조를 해주는 조건으로 그들의 對 中東 미사일 수출을 중단시키려고 했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좌절된 사건에 이야기가 미치자 시프 기자는 “타이밍이 아주 나빴다”고 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연장을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그런 시도는 핵무장을 기도하는 나라에 대해 나쁜 암시를 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공갈에 대해서 뇌물로 대응해서는 안 됩니다.”
  
  시프 기자는 한국이 북한에 대한 압도적인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어 自主국방을 감당할 힘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거기에 국방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데 대해 이렇게 충고했다.
  
  “우리는 수십 배의 國力과 兵力을 가진 아랍의 敵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지만 우리의 영토에 외국군이 장기 주둔한다는 것은 국가의 단합성과 정신무장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일찍부터 깨달았습니다. 걸프 전쟁 때 미군 패트리어트 미사일 대대가 잠시 주둔했지만 임무가 끝나자 즉각 철수했으며 1956년 수에즈 전쟁 때 프랑스의 2개 비행대대가 잠시 주둔했다가 즉시 철수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병력을 줄여야 한국인의 自主국방 의지가 살아납니다. 그래도 미군의 우산, 특히 공군의 지원은 계속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미국과 한국의 관계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프 기자는 여기서 특종이 될 만한 정보를 하나 흘렸다.
  “제가 두 달 전 미국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美 측이 러시아와 비밀협상을 하면서 제의를 하나 했답니다. 러시아가 굳이 이란에 경수로를 팔아야 하겠다는 것이 돈 때문이라면 좋다, 우리가 그 경수로를 북한에 팔도록 해주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답니다.”
  
  한반도 주변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도 대한민국 국회는 北核문제나 安保문제를 정치의 제1주제는커녕 해외토픽 기사를 읽듯이 구경만 한다고 하자 시프氏는 “그것이 바로 외국 군대에 국방을 의탁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아주 나쁜 심리현상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스라엘에 전쟁을 기념하는 박물관·기념관·기념탑·기념물들이 전국 도처에 깔려 있는 데 대해 쉬프 기자는 “젊은 세대를 위한 교육장이다”라고 했다.
  그는 “요사이 젊은이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안정과 풍요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자는 “한국에서도 전쟁기념관이 세워졌는데 왜 하필 전쟁을 기념하느냐 해서 명칭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고 했더니 그는 “전쟁이란 단어를 빼버리자는 것은 역사를 생략하자는 것과 같다. 전쟁 없는 역사가 언제 있었느냐”고 반문했다.
  
  
  歷戰의 용사 토니
  
  
  시프 기자를 만난 직후 기자는 텔아비브 대학內에 있는 재피 전략연구소(The Jaffee Center For Strategic Studies)로 에프라임 캄 부소장을 찾아갔다. 약속한 시각이 오후 2시. 시프 기자와의 대화가 길어져 점심을 생략하기로 했다. 어제에 이어 두 번째의 점심 생략.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일이 바쁘면 점심을 거르는 일이 보통이라고 한다. 사무실 근무자에게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고 샌드위치로 적당히 때우는 식이라고 한다.
  기자를 안내한 사람은 토니 리트만氏였다. 그는 군수산업체 라파엘에서 퇴직하여 일종의 프리랜서 신분으로서 외국인 방문객을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1950년대 말에 영국에서 이스라엘로 이민을 왔다는 그는 아주 모범적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50대 후반인 그(별명이 ‘앤토니’였다)는 대학구내에 들어와서 재피 전략연구소의 위치를 학생에게 물으면서 농담처럼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좋은 아이디어란 질문이다.”(The best idea is to ask.)
  
  리트만氏도 역전의 용사였다. 6일전쟁 때는 시나이 전선에서, 1973년 10월전쟁 때는 골란고원에서 하사관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의 장남은 해군의 수중 폭파 부대원 출신으로 미국의 해양 석유 시추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리트만氏는 자신의 지프차에 나를 태워서 3일간 함께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오고가며 취재원을 소개해 주는 안내자 노릇을 했다. 차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니 리트만氏가 오히려 더 좋은 취재원이 되어주었다.
  
  신생국가 이스라엘을 세우고 지켜 나가면서 국민들이 함께 고생한 이야기를 그는 대단히 자랑스럽게 했다. 말과 행동도 군인처럼 끊고 맺는 게 분명하고 정확했으며 유머감각이 뛰어나 對話 자체가 큰 즐거움이었다. 리트만氏는 뷔페 식당에서 음식진열대로 나갈 때도 늘 작은 까만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나중에 물어보니 가방 안을 보여주었다. 38구경 권총이었다. 실탄을 여섯 발 장전한 채였다. 외국손님 경호용으로 정부의 허가를 받아 지니고 다닌다고 했다.
  
  예루살렘의 국립박물관에 간 날 중학생들이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다니는 뚱뚱한 어른은 탄창을 꽂은 카빈을 메고 있었다. 그날 뽑혀 나온 학부모로서 1일 호위병이었다. 스쿨버스가 아랍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돼 수십 명이 죽은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어 학생들이 소풍을 갈 때도 學父母 호위병이 꼭 따라간다고 한다. 한 번은 히브류대학에 유학 중인 李호일 목사의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데 李목사가 1일 호위병으로 선정돼 호출되었다. 학교에서는 외국인에게 총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로 의논을 한 끝에 총 없이 근무하도록 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대한 反感
  
  
  리트만氏는 자신을 세속인(Secular Israelis)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의 총수는 1995년 현재 전체 인구 546만 명의 약82%이다. 나머지 14%는 이슬람 교도(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람), 2.8%가 기독교, 1% 남짓이 드루제(Druze) 교도 등 군소종교의 신도들이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무종교인이 없다. 그러나 저명한 유태인 중엔 “나는 무신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텔아비브 근교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료원을 운영하고 있는 요피(Joffe) 박사는 기자에게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내버려두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과학자입니다. 과학을 믿으면 神을 믿기가 어렵지요.”
  
  요피 박사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는 더 이상 유태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유태인에 대한 가장 중요한 定義는 유태교를 믿느냐의 여부이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간단하다. 기독교는 舊約성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예수라는 주장이고, 유태교는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채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태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反感은 이슬람에 대해서보다도 더 강하다. 이슬람 교도들은 적어도 종교의 자유는 허용했다는 것이다. 특히 이슬람帝國이기도 한 오스만 투르크는 15세기말 스페인에서 종교재판 선풍에 걸려 핍박 당하던 유태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터키 사람들에 대해선 거의 우방국 같은 친근감과 고마움을 지니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있었던 유태인들에 대한 탄압과 히틀러에 의한 대학살,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암묵적인 방관, 그 뒤에는 기독교의 反유태주의 전통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반감이 더 센 것 같았다. 유태인들에게 “당신들도 예수를 처형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예수는 로마人에 의하여 처형된 것이다. 유태교는 他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스라엘에 사는 약 450만 명의 유태인은 全세계 유태인 인구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미국에 가장 많은 유태인이 사는데 약 600만 명이다.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 중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61%, 유럽-아메리카 대륙 출생자는 25%, 아시아-아프리카 대륙 출생자는 약 14%이다.
  
  유태교의 사회통제
  
  이스라엘 거주 유태인들 중 리트만氏처럼 세속인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50%쯤 된다. 이들은 정치·교육 등 일상생활에 대한 유태교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거의가 이스라엘 建國 이념인 시온주의자들이다. 나머지 35% 정도는 종교적 시온주의자(Religious Zionists), 15% 정도는 극단적인 유태교도(Ultra-Orthodox )이다. 흔히 종교인(Religious People)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유태교도들은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수염을 기르고 다니며 종교적인 이유를 근거로 軍 입대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은 이란처럼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는 형태의 종교국가는 아니지만 유태교에 사회통제의 일정부분을 맡겨놓고 있다. 결혼허가는 유태교 법정에서만 받을 수 있다. 여기서 허가를 받을 수 없는 이스라엘人들은 외국, 특히 키프러스로 가서 결혼한 뒤 돌아온다. 누가 유태인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최종 결정권도 유태교 법정에서 행사한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정하여 철저하게 지키도록 감독하는 일도 유태교 법정의 권한이다. 안식일에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 이외의 상업행위, 자동차 타기, 오락을 금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유태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리트만氏 같은 세속인들(그들도 유태교 신도)은 반감을 감추지 않았다. 1986년엔 종교인들이 여자 수영복 광고가 붙어 있는 버스 車庫를 불태웠는데 세속인들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태교 교당인 시나고그에 불을 질렀다. 텔아비브 대학內의 재피전략문제연구소는 이스라엘 군대의 정보국장이었던 아론 야리브 장군이 주로 미국내 유태인의 헌금으로 1983년에 창립, 운영해왔다. 야리브 장군은 1994년에 사망했다.
  
  그는 1967년 6일전쟁 때 정보국장으로서 이집트 비행장의 전투기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들을 수집하여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승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야리브 장군은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와 임원 11명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검은 9월단’)의 습격을 받아 죽은 뒤 이 테러조직원들을 암살하라는 특명을 골다 메이어 총리로부터 받고 집행했던 이였다. 이스라엘 암살부대원들은 뮌헨 테러에 관련된 9명의 테러리스트들을 유럽 등지에서 차례로 찾아내 암살했다. 그러다가 노르웨이 릴리함메르에서 ‘검은 9월단’의 테러지휘자 알리 하산 살라메로 오인된 웨이터를 사살,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암살단은 살라메를 1979년 베이루트에서 발견, 자동차 폭파로써 끝장내 버렸다.
  
  이스라엘 보안기관에선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의 평화협정 이후에 테러사건이 더욱 빈발하자 최근에 다시 암살단을 동원하고 있다고 한다. 1994년 11월, 12월에 이미 이란이 조종하는 테러조직의 핵심간부 2명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중동지역의 안보문제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재피연구소의 부소장 에프라임 캄 박사는 뒷머리꼭지에 빵모자를 얹고 있었다. 이는 그가 종교인(Religious People)이란 표시이다. 그의 명함엔 ‘대령(예비역) 에프라임 캄 박사’라고 쓰여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장교 출신일 경우 계급을 명함에 써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이란은 북한 무기에 의존
  
  
  정보장교 출신인 캄 박사는 2년 전 轉役했는데 이란 문제 전문가로 유명하다. 그는 이란이 核개발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첫째, 이란은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한 나라인데 왜 원자로를 짓습니까. 그것은 핵무기 원료를 얻으려는 의도이지 어떤 경제적 논리도 발견할 수 없어요. 둘째, 러시아·중국·아르헨티나에서 핵무기 개발에 쓰일 수 있는 기구를 사들이고 있습니다. 셋째, 1979년의 호메이니 집권 무렵에 외국으로 빠져 나갔던 核 관련 과학자들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캄 박사는 이란은 6∼7군데로 분산된 연구시설에서 核무기 관련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1981년에 건설 중이던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를 공습하여 파괴시켰던 이스라엘이지만 이란에 대해선 그런 공격목표를 정하기가 어렵게 돼 있다고 했다.
  ―이란·북한의 공동 프로젝트, 즉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이란은 북한에 대해서 미사일 발사시험을 이란 영토 내에서 하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초기 단계에선 북한제 노동 미사일을 구입한 뒤 자체적인 조립·생산공장을 지으려 할 것입니다.”
  ―이란이 북한에 대해서 장거리 미사일 개발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는데 현금으로 합니까, 기름으로 합니까.
  “모르겠습니다. 기름도 돈 아닙니까.”
  ―이란이 원자폭탄을 갖는 데 몇 년 걸린다고 봅니까.
  “전문가들은 8∼10년 사이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정확히는 알 수 없지요.”
  ―북한제 미사일은 핵탄두 운반용이라고 믿습니까.
  “그렇습니다.”
  
  캄 박사는 이란의 핵 개발 시설에 대한 폭격의 어려움을 거듭 지적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압력을 먼저 사용해야 한다. 이스라엘 혼자의 힘으로는 이란의 기도를 좌절시킬 수 없다”고 했다. 캄 박사는 또 “이란과 같은 과격파 이슬람 정부가 핵무기를 갖는다는 점에 위협의 본질적 의미가 있다”면서 터키와 같은 온건한 이슬람 국가와 이란은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의 정도가 다르다”고 했다.
  캄 박사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중동에서 활동 중인 북한 기술자·상인들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다고도 했다. 중동內 북한인들의 활동이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한 캄 박사는 “특히 이란의 경우 미사일 등 중요무기 체계에서는 러시아나 중국보다 북한에 대한 의존도가 더 크다”고 지적했다. 캄 박사가 제시한 자료(1993∼1994년도 중동군사연감, 재피센터 발간)에 따르면 북한은 이란,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이집트와 군사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로 미사일 판매 및 미사일 개발기술 수출이다. 북한은 이란에 기술자문관들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이란의 군사훈련생들을 받아 북한에서 훈련시켜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對北 접근, 美國의 견제로 좌절
  
  
  이란이 스커드 미사일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1985년이었다. 리비아로부터 얻은 선물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이란은 북한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수입하여 이라크를 향해 발사했다. 이란은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 북한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북한의 지원 하에 스커드 미사일 공장을 만들었다. 개량된 스커드 B, C형을 북한으로부터 계속 구입했다.
  
  1992년에 이란은 북한에 150基의 노동1호를 주문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산업, 연구, 기술 번역 및 자료 주식회사'(IBRT)에서 펴낸 1995년도 연감의 국방분야에서도 제1주제는 이란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거래였다. 이 연감은 半정부 출판물로 알려져 신뢰성이 높은데 재미있는 내용이 기술돼 있었다.
  
  <이란정부가 중국 및 북한과 공모하여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은 이젠 경보로 바뀌었다. 1993년 8월 이스라엘은 미국과의 약속에 따라 북한과의 비밀교섭(편집자 註: 이란에 대한 미사일 수출을 중단하는 대가로 북한에 경제지원을 하겠다는 내용의 거래)을 중단시켰다. 미국 측은 영변 핵시설 사찰문제와 관련하여 평양과 회담을 할 때 이스라엘의 이익을 대변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1994년 9월1일, 워싱턴 당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판단한 이스라엘 외무부의 아이탄 벤 추르 차관보는 워싱턴에서 미국의 對北 협상팀과 만나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여 이란·시리아에 대한 무기금수를 관철시키도록 요구하였다>
  
  이스라엘 측은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미국과의 약속은 사라진 것으로 해석하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평양 측은 북한이 이스라엘의 이웃나라들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으나 이란에 대한 무기판매 및 시리아·이란·북한·중국의 협력 하에 이뤄지고 있는 地對地(지대지) 미사일 공장건설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측은 미국에 의해 북한과의 직접 비밀교섭을 차단당하고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데 대해서 불만이 있는 듯했다(이스라엘은 외무부와 해외담당 정보기관 모사드의 간부 2명을 북한에 보내 북한의 의도를 타진한 적도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봐서도 이스라엘에 신세를 한 번 진 셈이 되었다. 재피센터의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 초 스커드 C 발사대를 싣고 시리아 항구로 들어가려던 북한 선박은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감시와 위협에 의해) 강제로 귀환조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1993년 8월에야 러시아 수송기 편으로 시리아에 그 발사대를 실어다주었다는 것이다.
  
  
  “정보를 외국에 의존하는 건 머리를 맡기는 일”
  
  
  캄 박사는 어떤 국가나 군대가 진정한 독립을 유지하려면 ‘군사정보체제의 독립적 운영’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스라엘은 자금·무기원조를 외국으로부터 받은 적은 있지만 정보수집·분석체계만은 결코 외국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점을 일찍 깨닫고 1950년대에 이미 독자적인 정보체제를 발전시켰습니다. 어느 나라의 정보체제이든 그 나라의 필요나 이해관계에 맞춰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를 위해서 일반적인 정보를 줄 수는 있지만 정작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없습니다. 수집된 정보를 정직하게 외국에 주는 정보기관은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여과되고 가감되어 때로는 왜곡된 정보를 전달받게 되는데 문제는 그 외국정보의 신뢰성을 검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이 미국에 정보를 의존하고 있다면 미국이 잘못 판단했을 경우 한국도 그것을 카피하게 돼 있지요. 외국에 정보를 의존한다는 것은 자신의 머리를 남에게 맡기는 일이 됩니다.”
  
  며칠 뒤에 이스라엘 외무부 사무실에서 만난 재피센터의 미국-이스라엘 관계 전문가 도리 골드 박사도 정보기능의 對美의존이 결과한 재앙을 소개하면서 정보독립이 자주국방의 요체임을 거듭 강조했다.
  
  “6일전쟁 후의 이른바 소모전(War of Attrition) 시절에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양쪽의 군사력 증강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고 휴전을 했습니다. 미국정찰기가 협정준수 여부를 감시하기로 했지요. 이집트는 협정을 무시하고 地對空 미사일 수십 基(기)를 수에즈 운하 연안에 전진배치시켰습니다. 미국은 그 정보를 수집하고도 우리에게 알리지 않은 채 침묵했습니다.
  우리 정보책임자가 워싱턴으로 날아가 국방부 정보책임자에게 항공사진을 앞에 놓고 따졌어요. 미국 측은 이집트의 협정 위반은 시인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1973년 중동전쟁이 터지자 이집트 군은 문제의 그 地對空 미사일의 엄호하에 수에즈를 건너와 시나이 반도로 밀려들어갔습니다. 우리 공군기는 그 미사일에 맞아 많이 떨어졌어요. 정보의 對美의존에 대해 우리는 피로써 대가를 치렀습니다.”
  
  두 사람의 말은 그대로 한국군에 대한 경고로 들렸다. 북한 핵 문제의 처리과정에 있어서 한국정부와 언론, 그리고 국민들은 미국 CIA나 DIA(국방부 정보본부) 측에서 흘리거나 흘러나온 북한 핵개발 관련 정보에 일비일희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강경노선 쪽으로 선회하면 ‘북한이 한두 개의 핵폭탄을 가진 것으로 판단된다’는 정보가 춤추고 對北 유화론으로 가닥을 잡으면 ‘한두 개의 핵을 가져 봤자 큰 위협이 안된다’는 정보가 등장한다. 1994년 가을의 美-北 제네바 합의 이후, 즉 미국이 북한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사실상 묵인하기로 결정한 이후엔 북한의 핵개발 위협에 대한 정보가 거의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北核정보를 미국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그 정보를 먹이처럼 이용하여 사육동물의 심리를 조종하는 식으로 한국의 정책과 여론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 기자로서는 이스라엘 要人(요인)들의 확고한 정보마인드-‘한 국가의 독립은 정보체계의 독자적 운용에서 출발한다’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미국의 원조도 떳떳하게 받는다
  
  
  
  캄 박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스라엘은 매년 30억 달러(18억 달러는 군사원조, 12억 달러는 민간 부문 원조)의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이집트와의 평화협정 체결에 의해 시나이 반도를 반환한 대가로 이스라엘의 국방력을 강화한다는 명목 하에서 1970년대 말부터).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을 어떻게 설득했길래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그처럼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켰나요.
  “정부 對 정부 관계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여론을 움직였습니다. 의사결정 관계자뿐 아니라 言論 등 중요부문에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확보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미국은 冷戰시대에 소련의 영향력 확대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이스라엘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주적이고 親서방적이면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유일한 中東 국가입니다. 종교적·문화적으로도 미국은 아랍국가들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친밀감을 느끼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겉으로 봐서는 아주 질서가 없는 것 같은데 實戰에선 굉장한 효율성을 발휘해 왔습니다. 독창적인 조직 편성과 전략, 그리고 왕성한 士氣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첫째, 動機부여가 잘 돼 있습니다. 왜 싸워야 하느냐, 싸우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정신무장이 확고합니다. 둘째, 이스라엘 군인들은 교육수준이 높습니다. 셋째, 유태인 대학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전쟁에 지면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는 경고가 있습니다. 넷째, 군수산업이 튼튼합니다. 1967년 6일전쟁까지 우리는 프랑스에 武器구매를 의존했습니다. 드골은 6일전쟁 직후 이스라엘에 대한 武器판매를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은 또 다시 우리 이외에는 그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우리는 방위산업을 발전시켜 나갔고 결과적으로는 드골의 武器禁輸 조치가 이스라엘을 도왔습니다.”
  
  캄 박사는 IDF의 또 다른 강점으로 ‘작전 계획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 신축성’을 들었다. “작전계획은 實戰에서 절대로 그대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변화된 상황 속에서 현장지휘관이 자발적으로 유연하게 작전계획을 적용하도록 재량권을 갖고 있는 것이 우리 장교들의 특징입니다.”
  
  
  武器체제의 독립이 自主국방의 요체
  
  
  이스라엘은 국내총생산(GNP)의 4.5%를 연구개발에 쓰고 있다(미국은 2.7%, 일본은 2.6%).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연구개발비의 50%가 방위산업에 투입된다는 점에서도 세계 최고이다. 하이테크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한 이스라엘 과학기술의 母台가 방위산업이란 얘기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무기禁輸조치 이후 미국에 매달려 무기공급을 받으면서도 주요무기의 자체 개발을 통해 對美 의존도를 줄이려 애썼다.
  
  미국이 제공하기를 거부한 관성유도장치, 대용량컴퓨터, 우주로켓, 인공위성 부문의 기술은 자체 개발에 성공했다. 이스라엘이 자체 제작한 전투기, 미사일, 인공위성의 성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스라엘은 1960년대에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여 수백 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이스라엘軍 소요무기의 40%를 국내에서 생산하며 무기 수출액은 연간 16억 달러나 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요무기 체제의 생산을 외국에 의존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은 무기개발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미국과는 이제 상호의존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은 소련의 무기체제와 군사고문단의 직접 주둔을 허용했지만 이스라엘은 한 번도 그런 직접적인 武器지원을 어느 나라로부터도 받은 적이 없다. 自主국방의 비결은 ‘나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다짐에서 우러나오는 국민들의 투지와, 정보 및 武器체제의 독자성 확보에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1967년 6월5일은 이스라엘 공군 역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7시10분 이스라엘 공군은 전투기 12대만 지상에 대기시켜 놓고 나머지 전투기 전부를 출동시켰다. 지중해 상공으로 날아간 뒤 저공비행으로 이집트를 향해 접근해 갔다. 이집트 공군 기지의 교대시간을 틈탄 기습이었다. 대부분의 이집트 공군 장교들은 출근 도중에 있었다. 이집트 전투기들은 활주로와 격납고에서 기습을 당했다. 이날 오전 두 차례의 기습으로 이집트 전투기 309대가 파괴되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19대가 격추되었다. 이집트 空軍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사막전에서 空軍의 엄호 없는 기갑·보병 부대는 무용지물이다. 6일전쟁은 開戰(개전) 30분 만에 사실상 그 승부가 끝나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6년 뒤 4차 중동전쟁 때는 상황이 달랐다. 1973년 10월6일 오전 5시 이스라엘 군대는 開戰 9시간 전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을 결심했다는 판단을 하고 공군에 선제공격 준비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메이어 총리는 선제공격명령을 취소시켰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가하면 침략자로 몰릴 것이고 미국이 對이스라엘 무기禁輸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무기 공급을 외국에 의존할 경우 결정적 시기에 심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좋은 사례이다.
  
  4차 중동전쟁 18일간 이스라엘 공군은 적기 450대를 격추시킨 반면 104대를 격추당했다. 4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 軍은 약 2500명의 사망자와 7500명의 부상자 등 1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가 300만 명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
  
  
  이스라엘의 일선 골란高原
  
  
  뻔히 알면서 기습당한 이스라엘 전선에서 가장 급박했던 곳은 縱深(국경에서 이스라엘인 거주지까지의 거리)이 20∼30km에 불과한 골란高原이었다. 종심이 깊어 방어하는 데 여유가 있는 시나이 사막의 對이집트 전선보다도 골란고원의 對시리아 戰線방어에 이스라엘이 注力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신문 국제면에 그 이름이 너무나 자주 등장하는 골란고원을 향해 떠난 것은 이스라엘 도착 4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프라 여사가 모는 밴에는 정보장교(대령) 출신으로서 라파엘社의 정보 시스템 동부 영업담당 이사인 헤지 나훔氏가 동행했다. 예수가 세례 받은 요르단江과 예수가 베드로를 제자로 포섭하고 물 위를 걸었다는 갈릴리 호수 주변은 풍요로운 옥토였다. 들판은 밀밭, 해바라기, 올리브, 포도나무로 덮였고 하늘은 光明(광명)했다. 갈릴리 호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바라본 골란고원은 거대한 장벽처럼 솟아올라 갈릴리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일전쟁 전 골란高原이 시리아 손에 있을 때는 수시로 포탄이 갈릴리 주변의 키부츠로 날아왔다고 한다. 골란高原으로 오르는 급경사 길 주변은 요르단과 국경선으로서 우리나라의 DMZ를 닮은 분위기를 풍겼으나 일단 高原에 도달하면 확 트인 평야가 視野를 메우는 것이었다. 남북 약 50km, 동서의 폭이 20∼30km인 골란高原은 서울의 두 배쯤 되는 면적이다(1176km2). 북단엔 백두산과 거의 같은 높이를 가진 헤르몬山. 그 봉우리를 한라산으로 잡는다면 제주도 山間마을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이스라엘이 점령한 1967년 이후 골란高原에 22개 마을이 생겼고 1만1000명이 살고 있다. 도로 바로 옆에 철조망이 쳐 있고 노란 표지판에 ‘지뢰 위험’이라고 쓰인 것을 자주 보게 되었다. 시리아軍이 두고 간 기관총좌를 잡고 바로 눈 아래로 보이는 갈릴리 주변 마을을 겨냥해 보니 방아쇠를 당기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나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이 골란高原을 시리아에 반환하되 비무장지대로 만드는 방안을 가지고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이 高原을 옥토로 가꾼 이스라엘 농민들을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 國論 분열의 양상마저 보였었다. 골란고원을 달려보니 이스라엘 측이나 시리아 측이나 이 전략 요충지를 상대방한테 주고서는 잠이 오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고원에 서면 서쪽으로 이스라엘의 갈릴리, 동쪽으로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가 내려다보인다.
  
  전략적으로 가히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 지역인 것이다. 이스라엘軍의 布陣 방식은 우리와 달랐다. 우리는 DMZ를 따라 병력을 골고루 배치시켜 놓고 있지만 이스라엘 軍은 국경지대 후방 20km쯤 지점에 기갑 부대를 여러 거점에 집중시켜 놓고 있었다. 전방경계는 소수의 병력과 ‘정찰기+전자정보기지’로 구성된 조기경보시스팀에 주로 맡겨 놓고 있었다. 좋은 정보시스템은 軍 병력의 감축과 효율적 배치를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省力化(성력화) 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스라엘은 인구의 10%가 現役 아니면 예비군이다. 40여만 명의 예비군이 경제활동에 종사하도록 해야지 수시로 비상이 걸리고 동원령이 내려서는 경제가 제대로 가동될 수 없다.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조기 경보시스템이 불침번 역할을 맡아야 人力이 생산부문에 제대로 투입될 수 있다는 얘기다.
  
  
  위대한 스파이 엘리 코헨의 유해 송환이 외교 현안
  
  
  1973년 10월 골란高原에서 예비군으로 싸웠던 나의 안내자 토니 리트만氏는 “그때 死傷者를 철수시키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요사이도 그 참혹한 장면들을 애써 잊으려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는 부상자가 땅바닥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도록 돼 있다”고 했다. 戰死者·부상자·실종자·포로들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와 군대의 끈질긴 관심은 유별나다.
  
  지난 5월21일은 이스라엘의 첩보기관 모사드의 전설적인 스파이 엘리 코헨이 시리아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지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의 추모식에 참석한 이자크 라빈 총리는 코헨의 유골을 이스라엘로 송환해줄 것을 시리아 측에 요구했다. 라빈 총리는 앞으로 열릴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에서도 유골송환이 가장 중요한 요구사항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헨은 이집트에서 출생한 유태인인데 시리아系(계) 아르헨티나 실업인으로 위장하여 시리아 권력층 깊숙이 침투, 고급정보를 모사드로 打電(타전)하였다. 특히 골란高原의 시리아 측 병력 배치 상황에 대한 정보는 1967년 6월의 6일전쟁 때 이스라엘 軍이 골란高原을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던 라빈 총리는 30주년 추도식에서 코헨이 보낸 정보가 이스라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얼마나 유용했는가에 대해서 강조하기도 했다. 코헨은 1965년에 신분이 탄로나 공개처형되었다. 그의 유언은 이스라엘에 묻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기자가 만난 사람들마다 코헨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듯했다. 토니 리트만氏는 “코헨은 죽을 때도 이스라엘을 향해 눈을 뜬 채 죽겠다고 해서 머리에 용수를 쓰지 않고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했다. 조국을 위해 희생된 간첩을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고 기념하는 곳이 이 세계에서 또 한 군데가 있는데 바로 북한이다. 귀국하여 전직 안기부 간부에게 코헨 이야기를 전했더니 그는 “솔직히 말씀드려서 한국에는 임무수행 도중 죽은 간첩도 없고 기릴 만한 위대한 공작원도 없다”고 말했다. 없는 게 아니라 국가가 제대로 찾아 보지 않은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정신력을 탓하기에 앞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할 일을 다했는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국민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다한다
  
  
  이스라엘의 경우, 포로가 된 조종사 1명과 5명의 실종자에 대해서 정부와 언론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95년에 나온 이스라엘의 한 年鑑에는 이들을 구출, 또는 발견하기 위해 취했던 노력들이 2페이지에 걸쳐 언급되고 있었다. 테러에 自國民이 희생되면 꼭 보복을 감행하고, 승객이 납치되면 엔테베 작전을 벌여 찾아오고, 죽은 포로나 간첩의 유골까지도 반드시 조국으로 가져오겠다는 이스라엘 정부의 집념은 용감한 국민들에 대한 국가의 당연한 보호책임일 뿐이다.
  
  1·21 청와대 습격, 陸英修(육영수) 암살, 아웅산 테러, KAL858편 폭파 같은 선전포고의 사유에 준하는 공격을 당하고도 북한에 대해서 총 한 방 쏴보지 못한 대한민국은 1987년에 납북된 동진호 선원이나 1994년 5월에 납북된 우성호 선원에 대해서도 마지못한 관심 정도만 보이고 있다.
  
  한국의 품에 안기려고 목숨 걸고 탈출한 북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꼭 장사꾼이 주판알 튕기듯 정보 가치에 따라 선별 귀순시키고 있다. 국가 지도층부터가 국가의 본질이 무엇인지, 국민에 대한 국가의 의무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政權 담당자부터가 국가를 사회단체시하니 종교계에선 성당과 사찰에 대한 합법적 경찰 투입까지도 규탄하고 나온다.
  
  이스라엘은 순전히 자신들의 피로써 國家를 건설하고 황무지를 沃土로 바꿨다. 그들에게 ‘국가’란 관념이 아니라 實體이다. 상당수 한국인에게 대한민국은 공짜로 주어진 것이었고 美軍이 지켜준 것이었다. 국가를 세우고 지키는 데 주인의식이 부족하였기에 국가의 기본 행태가 어찌 되어야 하는지를 대통령부터가 모르는 것이다. 외국에 대하여 자존과 주권을 지킬 수 있는 국가만이 자기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해 줄 원칙과 힘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
  
  
  모세는 왜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나
  
  
  갈릴리와 골란고원을 여행한 다음 날 기자는 알론 기보니氏의 승용차(日製 스바루)를 타고 死海 쪽으로 달렸다. 텔아비브-예루살렘-제리코-死海-마사다-텔아비브 코스를 택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m쯤 되는 고지대인데 여기서 해면 아래 396m로 곤두박질 치는 형국이었다. 군데군데 베두윈族(족)의 천막과 양떼가 보일 뿐 미국 애리조나주의 풍경과 흡사한 돌산, 모래산, 물이 마른 와디(Wadi) 그리고 사막의 연속이었다. 전날에 본 갈릴리-골란高原 지역의 녹색지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성경에서 여리고로 표기되는 제리코市 남쪽에서 좌회전하여 달리면서 건너다 본 死海의 東岸(동안)은 해면을 시커멓게 그늘지게 할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그 절벽 위가 요르단 땅이고 그 너머로는 삭막한 돌산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데리고 나와 시나이 사막을 헤맨 뒤 바로 저 요르단 쪽 네보山 근처에 당도했다. 그는 네보山에 올라 제리코의 오아시스와 가나안땅의 풍요로움을 구경한 뒤 그 ‘약속의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기보니氏는 유태교의 하느님이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모세는 노예의 아들이었습니다. 새 땅에서 새 역사를 시작하려는 마당에 노예의식에 물들었던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신 것이죠.”
  
  모세는 舊約시대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이집트 인들의 노예로 태어난 이의 의식은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새 술은 새 부대에’란 지침에 의해 용도폐기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말하자면 시대가 이미 모세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이리라.
  死海의 西岸 길을 따라 남쪽으로 약 30분간 달려 도착한 곳이 마사다(MASADA)였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2분의 1로 줄여놓은 것 같은 주변 풍경 속에서 마사다는 제주도의 일출봉처럼 솟아 있었다. 地上에서 높이가 약 300m 되는 천연의 요새. 그 북쪽 절벽을 깎아 신약 성경에도 나오는 헤롯王이 별장용 궁전을 지었다. 서기 66년 신앙의 자유를 위협당한 유태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던 마사다를 탈취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반란은 이스라엘 全域으로 확산되었다.
  
  
  "마사다는 다시 함락되지 않는다”
  
  
  서기 70년 로마장군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聖殿을 파괴함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마사다 요새에서는 967명의 유태인들이 끝까지 버티었다. 서기 72년에 로마군은 실바 장군의 지휘 하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던 제10군단 1만5000여 명의 병력을 동원, 마사다를 포위했다. 기자 일행은 케이블 카를 타고 마사다 요새로 올라갔다. 실바의 로마 攻城軍(공성군)이 흙으로 댐을 쌓아올려 서쪽으로 기어올라왔다는 그 흙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사다 요새는 500×300m 모양의 타원형이다. 1960년대 초에 이스라엘 군 참모총장 출신인 야딘 장군(그는 死海文書 발굴도 지휘했다)의 지휘 하에 발굴작업이 벌어졌다. 성벽, 수영장, 창고, 교회당, 貯水槽(저수조) 같은 시설이 드러났다.
  
  마사다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반란군 960명(7명은 생존)이 집단자살로써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기 때문이다. 유태인 반란군의 한 지휘자였던 조세푸스 플라비우스는 로마軍에 투항, 공격자의 입장에서 ‘유태인의 전쟁’이라는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는 마사다의 최후를 극적으로 묘사했다. 반란군 지휘자 엘라자르는 로마軍의 공격을 막을 수 없게 되자 반란군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연설했다는 것이다.
  
  “이제 새벽이 오면 우리의 저항은 끝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금 갖고 있다… 우리의 손이 자유롭고 아직도 칼을 잡을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우리의 敵에 의해 노예가 되기 전에, 우리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을 떠나자.”
  
  이들의 자살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960명의 유골은 1960년대의 발굴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나 유태인들은 마사다를 대학살 박물관과 함께 하나의 聖地(성지)로 여기고 있었다. 기갑부대 新兵훈련생은 수료식을 여기에서 한다. 절벽길을 걸어서 올라 와서 이들은 저 멀리 요르단 땅과 死海를 내려다보면서 구호를 외친다.
  “마사다는 두 번 다시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마사다에서 내려온 우리는 기보니氏를 따라 死海연안의 한 호텔로 갔다. 기보니氏는 “내 장인이 휴가차 이 호텔에 투숙하고 계신다”면서 객실로 전화를 걸었다. 장인은 큰 버스회사의 경리책임자로 일한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이 있는데…
  
  
  조금 있으니 기보니氏와 장인이 다가오더니 인사를 청하는데 두 팔이 모두 잘려나간 老人이었다. 그는 쇠손을 내밀었고 나는 차가운 금속을 잡고 악수를 했다. 6일전쟁 때 기보니氏의 장인은 예비군으로 소집돼 소령으로 복귀, 대대를 지휘했는데 요르단 戰線에서 포격을 당해 부상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수술을 수십 번 받으면서 온몸에 박힌 파편을 뽑아내느라 死境을 헤맸다고 한다. 그는 “전쟁에서는 모든 게 運이지. 내 직속 부하는 한 방에 날아가 버렸으니 그래도 나는 행운이었소”라고 쾌활하게 말했다. 기보니氏의 장모는 전형적인 ‘주이시 마더’(Jewish Mother)로서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나 해서 안달이었다.
  
  이 할머니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 유명한 여성 戰士로서 그때 총을 잡았던 그 손으로 커피를 타서 주는데 남편은 두 쇠손으로 그 커피 잔을 부둥켜안듯이 받았다. 폭격기 조종사 출신 사위, 상이용사가 된 장인, 독립군이었던 장모 그 세 사람의 정답고 밝은 모습에서 기자는 이스라엘의 전쟁은 한국의 전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전쟁은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며 견뎌낸 적극적인 전쟁이었던 데 비해 한국의 전쟁은 강요된, 그래서 피하고 싶은 비극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쟁엔 히로이즘과 영광이 있는데 한국의 전쟁엔 슬픔과 후회뿐이다. 1995년 국방부에서 만든 6·25전쟁 포스터의 문구는 ‘형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아픈 기억’이었다. 중학생 수준의 作文을 연상시키는 이 글에는 최소한의 국가관·역사관은커녕 鬪地도 의욕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세력의 확장을 최초로 저지시킨 6·25의 의미를, 영광과 승리의 전쟁으로 해석하지는 못할망정 마치 국군이 피붙이도 무시하는 가해자의 입장에 선 것 같은 죄의식으로써 전쟁기피 풍조나 부채질하는 표현을 쓰고 앉아 있으니 우리 國軍은 과연 어느 쪽의 군대인지. 내일이 있는 군대인지, 조국이 있는 군대인지….
  
  
  애조 띤 유행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류 大學으로 가는 車中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스라엘 유행가를 듣고 기자는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의 흘러간 옛 노래와 흡사한 멜로디와 唱法(창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사만 한국말로 바꾸면 누가 들어도 한이 서리고 애조 띤 뽕짝이었다.
  1950년대 우리 유행가에 6·25의 비극을 담은 것이 많았듯이 이스라엘 유행가엔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을 소재로 한 가사가 많다. ‘재와 먼지’(Ashes and Dust)란 제목의 앨범엔 ‘트레브린카 작은 역’이란 노래가 있는데 트레브린카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을 상징화한 이런 가사가 있었다.
  
  ‘때로는 인생여정이 5시간45분 만에 끝나고, 때로는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계속된다.’
  우리의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연상시키는 곡이었다.
  천성적으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한국인은 닮았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天才들을 꼽으라면 紙面(지면)이 모자라지 이름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에서 살던 유태인 약50만 명이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위해서 이민 왔다. 텔 아비브의 벤 구리온 공항에 내리는 러시아系 유태인들 중엔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이올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피아니스트로 봐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히브류 대학 트루먼 연구소에서 만난 벤 아미 실로니(Ben Ami Shillony) 교수는 日本역사 전문가이다. 60代의 나이에 체구는 일본 사람같이 작고 웃는 표정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학자였다. 네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실로니 교수는 日本에서 교환교수로 일하는 사이 한국을 처음 찾았던 1982년의 감동을 이야기했다. 한국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한국인은 日本人보다 훨씬 마음 편한 상대였으며 유태인과 한국인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많은 데 놀랐다고 한다(기자가 이스라엘에 와서 그런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 것과 똑같은 체험을 한 셈이다).
  
  
  허약한 尙武전통, 그러나 建國 과정에서 군사력 배양
  
  
  1989년 11월 실로니 교수는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국민국가와 세계평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건네준 논문 복사본의 제목은 ‘유태인과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타난 국가와 평화의 중심적 역할’이었다. 그는 ‘두 민족은 늘 戰士(전사)보다 학자를 더 존중하였고 물리적 허약성을 도덕성으로써 극복하는 능력을 가진 점에서도 닮았다’고 지적했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유럽이나 日本 등 대부분의 근대 국가와는 달리 ‘武士(무사)계급의 지배집단化’라는 전통을 갖지 않은 아주 특이한 민족이란 것이다.
  
  군사적 전통이 취약한 두 민족은 그 때문에 나라를 잃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똑같은 시기에 국가를 건설하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세계가 놀랄 만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이 완강한 병사로 바뀐 것’은 물론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결의의 결과였다. 실로니 교수는 ‘유태인과 한국인은 국가의 목표를 평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단 평화를 달성한 다음엔 군사조직이 약화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실로니 교수는 ‘한국인의 위대한 성취가 戰線(전선)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록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人의 위대한 성취도 하이테크산업, 대학, 그리고 음악당에서 이루어졌다’고 썼다.
  
  “유태인의 첫 인사말은 히브류語(어)로서 ‘샬롬!’인데 ‘평화’를 의미합니다. 한국인의 ‘안녕하십니까’도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희망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 두 민족이 그 염원을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군대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냈다
  
  
  실로니 교수의 관찰은 형식면에선 맞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한국과 이스라엘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두 나라가 尙武정신이 부족했던 점에서는 같지만 建國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과 자세는 달랐다. 이스라엘人은 건국 前 영국의 통치下에서 이미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아랍人들과 對敵하면서 키부츠(집단농장)를 지키고 建國을 준비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뒤 全아랍국가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당시 인구의 1%가 戰死하는 代價를 치른 다음 나라를 세웠다. 국가가 생기고 군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군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의 독립은 태평양 전쟁에 이긴 미국의 선물이었고 군대조직도 美軍(미군)이 만들어주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국민 속에서 솟아났고 한국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도 국토방위의 주도권을 美軍에게 내주었고 휴전 뒤 지금까지도 駐韓美軍의 지도하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인구比(비)에서 아랍에 대하여 1대 3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의 전쟁에서 한 번도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군은 또 두 번의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는 경험에 의해 한때는 지휘부가 國土방위보다는 國內정치에 더 신경을 쓰는 체질로 변모하였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나약성에 대한 처절한 반성 위에서 主體的 결단에 의하여 군대를 만들었다면 한국은 피동적이고 의존적인 심리기반을 가진 군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군대를 대하는 兩국민의 자세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軍의 대령 이상은 총리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군인의 퇴직 후 年金(연금)은 일반 공무원의 두 배이다. 군인이 戰死했을 때 친척들을 인터뷰하여 그 사진을 보도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戰死한 군인의 시체도 보도 금지다. 군인이 戰死한 그 작전의 타당성을 정치인이 비판하는 것도 금기 중의 하나다. 戰死者의 가족에게 그 죽음이 헛된 것이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다.
  
  모든 전사자가 戰場에서 남긴 수필, 시, 편지는 유고집으로 편집돼 끊임없이 출판되고 있다. 1991년 4월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建國 이후 1만7150명이 戰死하고 5만6272명이 戰傷(전상)했다. 이들 가족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聖骨(성골)대우를 받는다. 戰場에서 부상자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후송해야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열 명을 희생하는 것도 감수하려는 자세이다.
  
  
  조국은 포로를 잊지 못한다
  
  
  이스라엘에서 출판되는 연감은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포로가 된 공군항법사 론 아라드와 네 명의 실종자에 대한 구출 노력의 진행상황을 반드시 언급한다. 1994년 5월21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시리아가 통제하고 있는 베카 계곡의 한 가옥을 급습하여 시아派(파) 테러조직의 간부인 무스타파 디라니를 납치, 헬리콥터로 싣고 와서 감옥에 집어넣었다. 디라니는 아라드를 데리고 있다가 30만 달러를 받고 이란 혁명수비대에 넘겨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포로나 실종자가 조국에 의해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6·25 휴전 후 북한이 납치해간 어부 400여 명에 대한 한국정부·언론·국민들의 무관심과 한 번 비교해 보라.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려는 의지력을 보일 때만이 협회나 기업과는 다른 특별한 공동체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국가는 국민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장군들의 이름을 외고 있었다. 1982년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벌어진 시리아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87대(격추된 시리아 공군기) 대 0(격추된 이스라엘 공군기 없음)의 스코어를 기록했던 공군사령관은 누구이며 1976년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은 누구이고 나치독일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납치해온 모사드의 간부는 누구라는 식으로 줄줄 외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군에선 한때 조종사들을 상대로 ‘홀로코스트 퀴즈’문답을 실시하여 상을 주곤 했다. 어느 조종사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하여 가장 정확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행사였다. 질문은 이런 식이다. ‘트레브린카 수용소에서 몇 명이 학살되었지요?’, ‘부켄발드 수용소에선?’, ‘리비아에 만들어진 수용소엔 몇 명이 수용돼 있었나요?’
  
  
  特攻작전의 철학
  
  
  학살과 전쟁은 이스라엘人들에겐 악몽과 추억뿐만이 아니라 문화이고 생활 그 자체이며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게 하는 각성제이다.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은 현장(우간다 엔테베 공항)에서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다가 戰死했다. 이 작전의 유일한 전사자가 지휘관이었다는 것은 장교들이 앞장을 서 장교 사망률이 유달리 높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동생 베냐민 네탄야후는 야당인 리쿠드黨(당)의 당수로 있다(그 뒤 두 번 수상을 역임하였다). 그는 야당 당수로서가 아니라 ‘특공대장 요니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다. 엔테베 작전을 감행한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원칙 때문이었다. 그 원칙이란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행동의 대담성에 있어서 ‘다이하드’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들 특공작전은 이스라엘式(식)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태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新生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버리는 모진 자기 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애국심이 살아 있는 나라
  
  
  기자는 10일간의 이스라엘 취재가 재미있고 마음 편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선 아무런 감흥도 유발하지 못하는 단어가 돼버린 ‘애국심’이 이스라엘에선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란 말도 한국에선 일부 정치인과 위선자의 선동가들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퇴색돼 버렸지만 이스라엘에선 입술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總口를 통해서, 자기 희생을 통해서 生動하는 가치로 구현되고 있었다. 국가 보위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지도자·국민·군대가 똘똘 뭉쳐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많은 동조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자는 대한민국이 아직도 정신적으론 독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협회에 가까운 조직이라는 의혹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수십분의 1에 불과한 북한과 상대하면서 외국 주둔군에 자신의 국방을 의존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한국의 지도층. 그들과 만날 때마다 기자는 싸우다시피 해왔다.
  “自主국방을 못 하는 나라는 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이며 국민은 노예근성을 갖게 된다.”
  이런 말에 동조자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스라엘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동조자를 발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本 기자의 주장은 국수주의적인 주장도 탁견도 아닌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주한미군이 철수할까봐 전전긍긍하면서도 駐韓美軍의 범죄에는 과장과 선동으로써 대하는 분위기, 남의 희생을 이용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미군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콤플렉스를 폭발시키는 우리 사회 일각의 병적인 분위기. 우리가 건강한 정신으로, 책임 있는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우리가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기자는 이스라엘에 와서 비로소 그런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국을 잊은 지 오래인 국회
  
  
  이스라엘의 제일 가는 국방전문 大記者(대기자) 지브 시프氏의 충고-“외국군이 장기주둔하면 나라의 단합이 깨지고 국민의 정신력이 해이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외국군 주둔의 정신적 폐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계층은 서민대중이 아니라 사회의 지도층이다. 생활에 바쁜 서민들은 관념과 위선에 잘 유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회는 조국을 잊은 지 오래이다. 북한 核문제 같은 민족의 死活(사활)이 걸린 사건을 해외토픽 보듯이 한다. 北核(북핵)문제에 대한 청문회도, 그 어떤 對北(대북)결의도 없었다. 국민세금이 40억 달러나 들어가게 돼 있는 對北경수로 지원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도 없었다. 對北쌀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회의 기원은 납세자의 권익보호에서 출발했다는 정치학의 원론도 모르고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 그들에게 安保(안보)문제는 인기가 없는 曲目(곡목)이다. 한국, 이스라엘과 같은 전쟁下의 국가에서 정치의 제1주제는 안보문제여야 하며 정치행위는 그것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게 상식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안보란 본질적 國政(국정)문제를 美軍에게 맡겨버린 뒤 정권·당권·당선 같은 원초적 권력게임에 집착하고 있다. 그 결과는 정치의 低차원화, 저질화이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이스라엘의 정치게임과 지역감정, 당파, 인맥, 권력에 눈치보기, 모함, 약점잡기 같은 키워드로 상징되는 한국의 정치는 그 수준과 성실성에서 이미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서 접하는 신문·방송·잡지·책들도 온통 안보를 제1주제로 삼고 있었다. 이스라엘-시리아 평화협상의 조건을 둘러싼 격론,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병사가 戰死한 사건, 요르단 西岸(서안·West Bank)의 점령지에서 발생한 소요, 예루살렘의 아랍인 땅을 이스라엘 정부가 수용한 사건…. 텔 아비브의 서점에 갔더니 이자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의 자서전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노벨 평화상도 공동으로 받고 집권 여당(노동당)의 2大 지주이기도 한 두 사람은 30여 년간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지금은 콤비가 되어 이스라엘과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요르단,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두 사람의 회고록은 이스라엘 정치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읽혔다. 우선 두 회고록의 내용이 전쟁, 建國, 외교, 테러, 核개발, 비밀工作(공작)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숨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라빈, 페레스 모두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쓰고 있다. 정치인이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특히 시몬 페레스는 자신이 그 책임자로 일했던 核무기 비밀 개발에 대해서 한 章(장)을 떼내어 자세하게 쓰고 있다.
  
  이스라엘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사건 때 프랑스·영국과 합세하여 對이집트 작전에 가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와 비밀核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 기술의 도움으로 네게브 사막에 재처리시설, 원자로 등 핵무기 개발 단지를 만든다. 이스라엘 建國의 아버지인 벤 구리온 총리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골다 메이어(뒤에 총리 역임) 등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배짱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이 核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번도 ‘核무기 개발’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 대신 ‘核무장 선택권’이란 의미이지만 사실상 핵개발을 뜻하는 ‘뉴클리어 옵션’(Nuclear Option)이란 용어를 썼다. 페레스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이 비밀核개발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돌파해야 했던 여러 난관들을 설명했다. 그중의 하나. 페레스 당시 국방차관이 1959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방문하고 있는데 벤 구리온 총리로부터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돌아오니 벤 구리온 총리, 골다 메이어 장관,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 책임자 하렐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총리의 설명인즉, 소련의 첩보위성이 네게브 사막의 核시설 건설공사 현장을 촬영했고 이 사진을 갖고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지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포스터 덜레스 美 국무장관에게 그 사진을 들이대고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에 대해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 간청을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페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리 이실직고하면 약점을 잡히게 된다. 그냥 가만히 있자. 도대체 소련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에 뭐가 나오나. 땅을 판 구멍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런 취지의 설득이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核개발을 계속 추진해 지금은 核강대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1960년대에 核폭탄 제조에 성공했고 지금은 약 400개의 탄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 제리코 1, 제리코 2호도 實戰用으로 배치된 지 오래이다. 小國이 강대국의 감시망 속에서 비밀리에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核무기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경제난에 봉착, 결국 核무기 제조는 보류하고 있는 인도를 비롯, 박정희의 좌절과 북한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독 核무장에 성공한 것은 벤 구리온과 페레스 같은 배짱 있는 정치인의 리더십과 自主국방에 대한 정치권의 全面的(전면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美軍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다면 核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安保를 정치의 제1주제로 삼아야 정치수준 향상
  
  
  1970년대 韓美국방장관 회담 때 럼즈펠드 美 국방장관은 徐鐘喆(서종철)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약 한국이 핵개발을 시도한다면 미국은 韓美 상호 방위조약의 폐기를 포함한 외교·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양국관계를 전면 재검토할 것이다”고 통보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核개발 등 자주국방 의지에 대하여 미국 편에 서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가 바로 金載圭(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이었음은, 그의 항소이유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카터 행정부가, 自主국방 노선을 추진,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朴正熙에 대해서 한국內의 일부 在野 및 정치 세력을 조종하고 人權외교라는 위선적 명분론을 들고 나와 코너로 몰았던 것도 이스라엘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시프 記者가 지적했듯이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 한국처럼 식민지 근성이 남아 있는 나라에선 外勢에 조종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국 배신과 國論분열이 빈발하여 먼저 내부적으로 국가의지가 꺾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페레스가 보인 배짱은 국내적으로 단합된 主權국가만이 부릴 수 있는 오기이다.
  페레스와 라빈의 회고록에는 서로를 비판하는 대목이 수십 군데나 된다. 엔테베 작전을 설명할 때 페레스는 라빈 총리가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했다고 꼬집었다. 라빈 총리는 국방장관이던 페레스는 자신이 지시를 하기 전에는 군사적 해결방안에 대해서 검토도 하고 있지 않더라고 폭로했다. 亂中日記(난중일기)에서 李舜臣(이순신)이 元均(원균)을 여러 번 비난하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페레스와 라빈이 이런 글을 써놓고 어떻게 서로 얼굴을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두 라이벌은 지금 환상의 콤비가 되어 평화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이스라엘 의회에서의 격렬한 토론은 우리 국회를 무색케 할 정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安保라는 큰 테두리에 대해서는 이견과 감정을 접어두고 대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이스라엘 정치 풍토이기도 하다. 安保라는 큰 주제에 대한 합의만 있으면 아무리 정쟁이 치열해도 國基(국기)를 흔들지는 않는다.
  
  
  
  國軍엔 장군이 없다?
  
  
  한국 정치의 저질화는 정치의 본질인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안을 멀리한 당연한 귀결이다. 정치인의 크기는 그가 다루는 사안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볼 때 安保를 정치의 주제로 끌어안지 않는 한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선 ‘정치가’(Statesman)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한국의 安保문제를 남의 나라 문제 보듯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安保를 미국이 책임져 주겠지’ 하는 요행심과 의타심 때문이다. 한국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이다. 戰時(전시) 작전통제권과 對北전략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한미연합사 사령관(駐韓미군 사령관)에게 전쟁수행의 임무를 맡겨놓고 그들은 자신의 직위를 즐기고 있다. 한국군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한국군 중에서 장군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장군이 뭡니까. 전쟁에 관한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서 깊은 군사 지식과 리더십을 배양해야 하고 눈만 뜨면 전쟁에 관해서 공부·훈련·대비하는 사람이 장군인데 그런 사람 없어요. 반면에 주한미군의 지휘관들은 전문 직업인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특히 駐韓미군 사령관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한국을 방어하라는 것이므로 과연 그 임무를 수행할 만한 무기체제가 돼 있는지, 군의 士氣는 충분한지 그야말로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니 한국과 미군 장성들끼리 만나 이야기하면 10분 이상 대화가 안 돼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좌 같다니까요.”
  
  기자도 직업상 韓美 양국군의 간부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한국군 장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豪氣 또는 으스댐이다. 북한 인민군에 대한 과잉자신감까지도 감지된다. 그런 자신감에 걸맞은 전문지식과 군인의 자세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金泳三(김영삼) 정부의 출범 이후엔 그런 호기도 ‘주눅’으로 바뀐 것 같다. 언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군인만큼 추한 모습은 달리 없다. 우리 군의 主敵(주적)은 분명 북한 인민군이다. 한국군은 불행히도 1 對 1의 단독 결전으로써 인민군을 굴복시킨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국방목표를 ‘적의 침략’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金泳三 정부의 脫냉전 주장에 영합하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인민군에 대한 필승전략을 짜기도 힘이 부치는 판인데 통일 이후의 군사전략을 구상한다면서 日本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문서가 공개되고, 全方位 방어 작전에 필요하다면서 사치스러운 무기체계를 도입하려는가 하면, 급기야는 좌파 수정주의적 史觀(사관)을 그대로 반영한 6·25 포스터까지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에 나타난 한국군 지휘부의 이런 타락상은 대한민국이 또 다시 李氏朝鮮(이씨조선)의 文官(문관) 우위文化(문화) 속의 문약한 국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조국을 저주하는 사람들
  
  
  김영삼 정부는 출범 이후 文民이란 왜색용어를 내세우면서 지난 50년간 한국인들이 피·땀·눈물로써 쌓아올렸던 역사·국가·군사전통을 약화시키는 행태를 보여 왔다. 金泳三 정부는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내부의 敵’이니 守舊세력으로까지 표현하여 국가의 단합을 약화시키는가 하면(文民이란 말이 벌써 서민과 군인을 배제함으로써 분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文民정부’는 마땅히 ‘국민정부’로 바뀌어야 한다) ‘내부의 敵’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외부의 敵’에 대해서는 비굴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인의 정의감을 망가뜨렸다.
  
  1995년 6·27선거에서 보수·중산층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것은 金대통령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우리 현대사회의 성취와 국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金대통령은 1994년 부친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5000년 썩은 나라를 바로잡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국가와 역사의 大統(대통)을 이어가는 대통령이 자기 조상의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비방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金대통령의 정치적 代父(대부)인 故(고) 張澤相(장택상)씨의 회고록에 따르면 李承晩은 한 번도 “조선사람이니까 안 돼”식의 자학적인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헌신·충성·애정의 대상이었다는 의미이다. 金대통령의 말대로 5000년 동안 썩은 나라였다면 오늘날 GNP 세계 12위의 대한민국은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 된다.
  
  
  5000년 동안 썩었던 것은 위선적인 명분론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국가의 야성을 거세함으로써 자주·자위·자립의지를 말살했던 지배층-양반, 즉 文民들이었다.
  
  
   國旗를 포기한 국가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 직후 李仁模(이인모) 노인을 보내주었다. 곧 북한으로부터 좋은 답장이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지만 납북어부가 아니라 核공갈이 날아왔다. 김영삼 정부는 그 核공갈에 대해 40억 달러짜리 경수로 지원으로 대응했다. 40억 달러를 바치고도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보장도 확실하지 않는 가운데 이번엔 서둘러 쌀 15만t을 무조건 주기로 결정했다. 아무 대가도 없이 북한에 사람·쌀·돈을 주기만 하고 있다. 金대통령이 자선단체의 長이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으로 수백만의 국민을 잃은 적이 있고 지금도 再(재)남침 위협에 노출돼 있는 국가의 지도자가 공갈과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섬이 없이 금품을 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朝貢이 된다.
  쌀을 주면서 金대통령은 국가이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을 포기하였다. 國歌(국가)·國旗·國號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이 상징의 사용을 둘러싸고 전쟁과 외교관계 단절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北으로 보내는 쌀에 국호표시를 하지 않고 싣고 가는 배(배는 영토이다)에 國旗(국기)를 안 달기로 합의해 준 것은 金대통령이 스스로 국가 지도자임을 포기한 것과 같다(1984년 수해 때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공개적으로 원산지 표시가 된 물자를 당당하게 보냈지 않았던가).
  
  이로써 북한은, 남한이 국가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의 미수복 남반부 지역이라는 그들의 일관된 주장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金泳三 대통령이 對內的(대내적)으로는 한국 現代史(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對外的(대외적)으로 국가의 권위를 양보하고 있는 이 2중적 상황은 상호연관성 아래에 있다. 국가는 역사의 産物(산물)이다. 그릇된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국가관을 파생시킨다. 자기 역사를 저주하는 사람은 조국도 가볍게 보게 돼 있다.
  
  
  주석궁을 조준한 뒤 對北 협상에 임한다면…
  
  
  이스라엘은 核강국이면서도 국방정책은 철저하게 재래식 무기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비증강 태세를 보면 核무기는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어떤 전쟁에서도 재래식 무기로써 결판을 낸다는 자세를 굳게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核을 믿고 부리는 태만 같은 게 없다. 安保란 2중, 3중의 안전장치라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리라. 기자는 이스라엘 북부지역 山頂(산정)에 있는 라파엘社의 미사일 개발 본부를 방문했다. 라파엘社가 개발한 空對空(공대공)미사일 파이턴(Python)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서 미국 공군에 수출하고 있다. 이날 브리핑에서 기자의 흥미를 돋운 것은 空對地(공대지)미사일 포파이(Popeye)였다. 1985년부터 實戰用으로 미국 공군에만 수출하고 있다.
  
  이 미사일은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팬텀(F-4)이나 F-16에도 장착할 수 있다. 사정거리는 100km나 된다. 이것을 발사한 전투기는 뒤로 물러나 안전한 상공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로 포파이를 목표물로 정확히 유도한다. 초속 300∼400m로 날아가는 이 미사일은 입력된 좌표와 사진을 쫓아간다. 예컨대 평양 주석궁의 사진을 입력시키고 2층 오른쪽 두 번째 창문을 표적으로 선정해 놓으면 정확히 그 창문을 때릴 수 있다고 하여 ‘창문의 정확도’(Accuracy of window)로 불리고 있었다.
  
  “한국에도 팔 수 있는가”하고 물어 보았더니 “미국內 합작회사를 통해서 살 수도, 우리로부터 직접 살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다. 가격은 1개당 50만∼100만 달러라고 했다. 對北 쌀 지원 15만t의 時價가 약 2000억 원이라니 그 돈이면 수백 개의 포파이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포파이 미사일은 고급 표적(High valued strategic target)에 대해서 사용하는 전략 무기이다. 인민군사령부, 영변核시설, 주석궁, 金正日의 별장이나 숙소 같은 전략적 표적물에 이런 미사일을 조준시켜 놓는다면 對北협상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적 무기를 살 수 있을 만한 의지력을 한국의 국가지도부가 갖고 있느냐일 것이다.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패트리어트를 駐韓미군이 들여오는 것조차 북한을 자극한다는 궤변으로써(그것도 우리 외무장관까지 맞장구를 치고) 지지한 적이 있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남북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책임을 남측에 전가시키는 ‘블레임 코리아 퍼스트’(Blame Korea first), 즉 조국을 먼저 비난하고 보는 위선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對北관계에서 한국이 깡패에게 멱살 잡힌 사람처럼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근본적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의지력 싸움에서 북한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40억 달러어치의 경수로 지원이나 2000억 원어치의 對北 쌀 지원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굴복에 따른 조공품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돈으로 차라리 군비증강을 한 뒤에 북한에 대해서 “답답한 쪽은 너희들이니…”하고 덤덤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북한을 위해서도 더 나은 정책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절박한 요구에 의해서, 그들이 고마운 심정으로 우리의 지원을 받아들일 때 북한 내부에 변화가 오는 것이지 戰利品처럼 가져갈 때 체제강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예의 話法
  
  
  남북대결에선 남한이 GNP 기준 세계 12위의 그 거대한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변화시킬 때 북한의 굴복은 必至의 사실이 된다. ‘경제력→군사력’으로의 전환에는 국가 지도부의 의지와 국민의 희생정신이란 변환 스위치의 작동이 필요하다. 군비증강과 自主국방을 위한 부담을 국민된 당연한 도리로서 끌어안고 가려는 국민들은 많지만 북한의 억지와 국내의 좌익세력과 미국의 압력을 막아낼 수 있는 페레스-라빈과 같은 국가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제발 받아주세요”라는 자세로써 수십억 달러의 국민세금을 북한에게 갖다 바치는 신세가 된 것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페레스와 라빈, 그리고 기자가 만난 이스라엘 정치인과 군인들의 話法과 文法은 한국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金泳三 대통령이 자주 쓰는 “우리는 북한을 흡수통일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말이나 金日成 사망 때의 토로인 “정상회담이 무산되어 아쉽다”는 식의 語法(어법)은 그들의 사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북한이 核개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대응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면 한국에선 철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데 이스라엘에선 상식이 되는 말이다. 한국 국방장관은 “북한의 핵시설에 대해서 엔테베 작전 같은 것도 연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가 정치·언론계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이스라엘에선 행동으로써 보여주었다(1981년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
  
  한국 식자층에선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주 고매한 도덕성과 신중함의 표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레이건 美 대통령이 현직일 때 공개석상에서 소련에 대해서 “악의 제국(Evil Empire)”이란 표현을 사용한 뒤 군비증강으로 나가 결국 소련체제의 자체붕괴를 유도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安保문제와 관련한 한국 지도층의 話法은 독립국가 아닌 식민지 근성의 주눅 든 눈치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북한에 대한 엄정한 자세도, 치열한 대결자적 자세도, 미국에 대한 主權국가로서의 自主的 태도도 발견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話法을 구사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정부를 불신하다가는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오히려 북한이 이스라엘 지도부와 비슷한 수준의 話法으로써 남한을 갖고 놀려고 하고 있다. 1994년의 불바다 발언과 “경제봉쇄를 하면 전쟁하겠다”는 취지의 공갈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조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적 발상과 언어를 버리고 主人(주인)의 언어감각을 배워야 할 것이다.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朴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 이제 19년이나 된다. 민족중흥의 기수가 쓰러졌을 땐 침묵하던 이들이 민족의 원수가 죽자 애도하자고 나서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것은 1994년이고 조문론을 주장한 정치인들이 야당의 지도층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1995년 한국의 오늘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조국을 저주하는 발언은 자유롭고 조국을 옹호하는 발언은 不自由(부자유)하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는 냉소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런 분위기는 언어를 통해서 확산된다. 北核문제로 북한의 위협이 고조된 바로 그 시기에 한국 언론은 美-北회담을 北-美회담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남북대결에 中立은 없다
  
  
  朝鮮日報-月刊朝鮮 정도가 ‘美北’을 견지하고 있다. 北核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대표는 동정의 대상인 人民이 아니라 노동당 지배층이다. 우리 헌법 체계가 규정하고 있는 反국가단체의 간부들이다. 그들을 우리의 혈맹인 美國보다 앞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다.
  金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어떤 이념이나 우방보다도 민족이 더 중요하다’는 취지엔 맞는 표기법이다. 최근 일부 기자들은 ‘한국-조선’으로 표기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기자가 중립적 입장에 서서 남북한 양쪽을 등거리로 보겠다는 뜻이라면 그는 휴전선상에 집을 짓고 無국적을 먼저 선언해야 한다. 남북한 문제에서, 더구나 악마적 집단이자 민족의 원수인 북한노동당 지배체제를 상대하고 있는 남한에서 中立이란 있을 수 없다. 惡과 善 사이에서 중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국가 지도부의 정보 오판은 재앙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우수한 정보기관들이 왜 1973년 10월전쟁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開戰(개전) 직전에 여러 번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비상을 걸었으나 훈련으로 밝혀졌다. 비상이 걸리면 예비군이 동원되고 산업 활동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誤判은 정보수집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해석의 잘못 때문이었다. 군정보기관은 여러 징조를 접하고서도 전쟁은 아니란 판단을 했으나 모사드는 전쟁임박이란 판단을 내렸다. 골다 메이어 총리와 엘라자르 참모총장 등 지휘부는 軍정보기관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開戰 이틀 전인 10월4일 軍정보기관은 거의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다. 이집트 최고사령부가 예하부대에 대해 라마단 금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통신문을 가로챘던 것이다. 이슬람 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라마단 기간의 禁食을 중단시키는 것은 비상사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4일 밤엔 소련 수송기가 날아와서 시리아와 이집트에 있는 군사고문단 가족들을 철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래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것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전쟁 前夜인 10월5일 오후 5시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非아랍 어느 나라의 통신을 감청, 이집트·시리아 兩 전선에서 곧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국가지도부로 보고되지 않았다. 10월6일 새벽 비로소 유럽에 급파된 모사드 部長(부장)은 고급 정보요원으로부터 전쟁이 6일 오후 6시에 개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開戰은 6일 오후 1시55분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부의 오판은 戰死 2500명, 부상 7500명의 인명손실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군사적 승리는 거두었으나 외교戰線에선 守勢에 몰려 결국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게 된다. 6·25 때도 일선에 있던 국군정보부대는 전쟁을 정확히 예측했으나 육군본부와 경무대는 판단기능이 마비돼 있었다.
  
  국가 지도부가 국가적 大事(대사)에서 오판을 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 국가 지도부의 정보능력은 그 지도부의 총체적 직무능력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다. 金泳三 정부의 정보능력은 北核위기 때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1993년 초 기자가 만났던 안보·외교팀의 핵심인물들은 모두 북한이 미국의 압력에 年內(연내)로 굴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서울 포위 하의 決死항전은 가능한가?
  
  
  이스라엘은 10년 뒤에나 현실로 나타날까 말까 한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核개발 징조를 벌써 제1의 위협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외교·군사·정보 등 다방면의 대책을 수립,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1980년대 초에 이미 북한의 核개발 의도를 감지했으나,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그 위협을 과장하기는커녕 ‘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 하는 자세로 침묵해 버렸었다. 그때 일찍 손을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對北 저자세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40억 달러의 지출도 필요 없게 되었을 것이다. 40억 달러는 安保의식 태만의 代價이기도 하다.
  
  1994년 우리 군이 실시한 워 게임(War Game) 결과에 의하면 인민군이 철원방면에 主攻(주공)을 놓고 기습 남침할 때 우리 軍은 의정부까지 밀린다고 돼 있다. 開戰 한 달 뒤에 미군의 증파로 반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開戰 한 달 안에 한국군은 전사 약 10만 명, 부상 약 50만 명의 피해를 입을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고 한다. 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소련군 사이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병력과 火器의 밀집도에 비추어 동부전선보다 더 심한 파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만난 한국-미군 군사전문가들은 대부분 북한이 또 전쟁을 걸어올 때는 화학무기까지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학무기를 쓸 배짱이 없으면 전쟁을 애초에 결심할 수 없을 것이다”는 분석이었다. 對北군사정보 전문가인 P씨(예비역 장성)는 “군사적인 계산만으로는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이길 수 없다”면서“다만 정치적인 변수가 하나 있다”고 했다.
  
  “북한이 기습 남침할 경우 서울을 포위할 수는 있습니다. 한강 이남으로 진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군이 미군의 증파와 함께 반격을 개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포위한 다음 휴전을 제의했을 때 남한 정부가 決死抗戰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인민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럴 경우에 미군이 우리를 도울 명분도 상실됩니다.”
  
  장군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남한의 유권자들은 그런 정부를 선출하지 않도록 눈을 비벼둘 필요가 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은 “지금의 나라 분위기라면 북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나 가족이 무사한 쪽으로 선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기습남침으로 戰勢가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가장 먼저 백기를 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권력기생적인 기득권층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많은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아니라 權力의 향방을 자신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좌익세력보다 더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金正日 치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기회주의 때문에 한국의 보수층은 소수의 좌익세력에 의하여 휘둘리고 있으며 위선자들과 선동가들의 공세에 주눅이 들어 있는 것이다.
  
  
  中東의 脫냉전이 이스라엘 평화공세의 배경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이 있다. 모두가 소신에 차 있어 語法이 단순명쾌하다. ‘그런 면도 있지만…’식의 兩是論·兩非論的 話法은 없다. 그들은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30초 질문에 답변은 30분이다. 그들의 대화에는 많은 교양이 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기자가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홀리데이 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외무부 정보센터의 분석관 엘리 아비단氏도 그러했다. 그는 한 시간 반가량 기자를 앞에 놓고 설명이 아닌 웅변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PLO, 요르단,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감행할 수 있던 근본 이유를 中東지역의 脫냉전에서 찾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시리아와 PLO는 가장 중요한 배후세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리아는 소련식 무기체제를 채택하여 소련의 부품공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리아의 무기체제는 지금의 북한처럼 고철화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확실한 對시리아 군사력 우위를 확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공격적인 평화공세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 때 쟁취한 골란高原(고원)을 시리아에게 돌려주되 이곳을 비무장지대화하고, 더 나아가서 현재의 시리아 국경 너머에서도 비무장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깔고서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다. 이처럼 공격적인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다. 이스라엘이 1977년에 숙적인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6일전쟁에서 빼앗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했기 때문이다. 즉 병사들의 피로써 확보한 땅을 평화와 맞바꾼 것이다.
  
  
  역사의 감동적 逆轉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江의 西岸(서안)지역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지금 총리 라빈이었다. 라빈 총리는 지금 자신이 빼앗은 땅을 팔아 평화를 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감동적인 逆轉이다. 평화협상의 실무책임자인 페레스는 核무기 개발의 책임자이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이 보유한 그 核무기가 또 과감한 평화공세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對아랍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라빈과 페레스가 평화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對중국 접근 등 과감한 데탕트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강경론자·현실주의자·보수주의자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金泳三 대통령도 통일문제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려면 먼저 확실한 反共(반공)과 보수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북한당국의 환상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제2차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북한의 기습에 의해서 비롯될 것이다. 기습은 항상 성공한다. 문제는 한국이 최초의 강타를 당하고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삼풍백화점처럼 그 길로 붕괴해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이 북한 방사포의 일제사격과 스커드 미사일의 화학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과연 死生결단의 의지로써 결사抗戰(항전)을 결의할 수 있을까. 그만한 자기희생 정신이 과연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이 지켜주겠지’, ‘安保는 공기처럼 공짜이다’, ‘나와 가족만 무사하면 만사 OK이다’ 하는 식으로 대처할 때 한국군의 초기 패퇴는 후방의 붕괴-대한민국의 종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삼풍백화점 소유주의 형편없는 안전의식을 비난하지만, 수도권을 북한의 장거리포와 스커드미사일 사정권 안에 인질처럼 노출시켜 놓고도 그 방어망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국가 지도부의 안보의식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북한에 대해 장거리포의 後進(후진)을 요구하고 듣지 않을 경우엔 예방폭격으로써 위협을 제거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부자를 암살했을 것이고, 對北경수로·對北 쌀 지원 대신에 F-16편대를 보냈을 것이다.
  
  
  極東과 極西의 악수
  
  
  아쉘 나임 駐韓 이스라엘 대사에게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과 평화를 약속한 이후 오히려 진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이 늘 긴장 상태 하에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天才(천재)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지요. 우리는 오늘이 항상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나임 대사의 이 말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란 도전이 있었기에 남한 사람들은 태만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면서 자신의 정열을 불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래 사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맹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자가 이스라엘에 가서 느낀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電流처럼 통하는, 같은 주파수대의 감응이 있었다. 비슷한 과거뿐 아니라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極東과 極西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이스라엘엔 入國하기도 어렵지만 出國하기란 더욱 어렵다. 벤구리온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전에 실시하는 보안 검사를 시간 내에 마치려면 세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보안검사를 하루 전에 받는 제도가 있을 정도이다. 보안요원이 승객과 일일이 일문일답을 하는 데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짐을 다 풀어야 한다. 기자는 귀국行을 텔 아비브-프랑크푸르트(이스라엘 국영 엘 알 항공사 편)-서울(대한항공 편)로 잡았다. 엘 알 여객기의 機內紙(기내지) 첫 장엔 ‘여행자의 기도문’이 실려 있었다.
  
  ‘…하늘을, 바다를, 육상을 여행하는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강하게 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소서.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만이 우리의 안식처이나이다. 아멘.’
  
  지중해를 종단하는 네 시간 반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安着(안착)하자 승객들은 조종사를 위해 박수를 쳤다. 엘 알 항공기는 공항 탑승구에 바로 붙지 않고 외딴 곳에 정지했다. 기관총을 탑재한 세 대의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국경 수비대였다. 장갑차의 엄호 아래 기자는 버스에 타고 공항 건물로 향했다. 600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독일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그들에게 속죄하고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특공작전 略史(약사)
  
  아이히만 납치에서 엔테베 작전까지
  ●1960년 5월 이스라엘 해외담당 첩보기관 모사드는 하렐 부장의 현지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 국영항공회사 엘 알(EL AL)편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인 학살의 한 主役(주역)인 前 나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은 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형법은 다른 범죄에 대해선 사형을 금지하고 있으나 유태인 학살 범죄만은 예외이다. 아이히만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사형된 유일한 인간이다.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우호·협력관계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알제리아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核무기의 비밀개발에도 두 나라는 협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에 대한 공동전선도 형성했다. 그러나 드골의 재집권 이후 알제리아가 독립해 버린 뒤 협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1967년 6월전쟁 전야 드골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으로 대승하자 드골은 對이스라엘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합동공작을 벌여 스위스가 만들고 있던 프랑스의 미라지 전투기 설계도를 훔쳤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가 케피어(Kfir)이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이스라엘군의 무기조달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쉘부르그 항구에 있던 미사일 발사함 5척을 공해상으로 빼돌려 1970년 새해 첫날에 이스라엘 하이파 항으로 몰고 왔다. 이 배들은 對이스라엘 금수조치에 의하여 주문국인 이스라엘로의 인도가 거부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르웨이 석유회사가 구입하는 식으로 위장한 다음 특공대를 선원으로 변장시켜 승선시킨 뒤 배 5척을 소매치기한 것이다.
  ●1969년 12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특공대 66명은 세 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 내로 약 60km쯤 진입했다. 사막에 착륙한 그들은 소련제 P-12 레이더 기지를 습격, 2.5t 레이더를 해체하여 헬기에 싣고 돌아왔다. 소련정부는 최신무기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간 데 화가 나서 이집트에 대한 최신 고급무기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는 네 대의 허큐리스 수송기에 나눠 타고 아프리카 깊숙이 날아갔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납치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엔 24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중 77명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6일째 억류돼 있던 이들 인질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기발한 착상(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변장한 이스라엘 군인이 수송기에서 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공항경비병들은 외국 순방 중이던 아민이 귀국한 것으로 착각했다)과 대담한 공격, 그리고 최소의 인명손실로 하여 그 뒤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용으로 건설 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다. F-16, F-15 편대는 사우디아라비아 상공으로 우회하여 이란 쪽으로부터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라크 측에선 한동안 이란 공군기의 공습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1985년 10월1일 이스라엘 공군 F-15 편대는 튜니시아에 있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 건물을 폭격, 75명이 죽었다. 공중급유를 받아 가면서 1900km를 날아와 폭격한 이스라엘 편대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이 폭격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키프러스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人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1986년 10월 영국의 선데이 타임스는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증언을 게재하여 이스라엘이 이미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모사드는 미인계를 써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한 뒤 선박 편으로 데리고 왔다. 바누누는 반역혐의로 재판에 넘어가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지금도 복역 중이다. 변호인들은 바누누의 폭로를 反核양심선언으로 몰고 가려 했으나 이스라엘 언론이 납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의 칼럼은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그런 폭로를 한 인물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바누누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 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느냐고 추궁해야 한다’고 했다.
  ●1988년 4월16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튜니시아의 해안에 상륙,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주요인물인 아부지하드를 그의 집에서 암살한 뒤 철수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전자전 통제기를 지중해 상공에 띄웠다.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에후드바락(뒤에 총장)이 이 비행기에 타고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자 정보기는 특공대가 침투한 지역의 전화 및 무전시설을 마비시켜 특공대의 탈출을 도왔다.
  
  
  
  3. 인물연구/이츠하크 라빈: 軍人, 정치인, 희생양
  역사의 짐을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사나이, 피살 하루 전 필자와 최후 인터뷰
  
   ● 시거와 초콜릿만 있으면 自足한 사람, 넥타이를 맬 줄 몰랐던 군인,
   노래도 춤도 출 줄 몰랐던 대사, 책임을 전가할 줄 몰랐던 정치인,
   ● 전쟁 영웅에서 평화를 위한 순교자로, 위대한 전환을 한 라빈이
   생애 마지막으로 만난 한국기자에게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엇을까.
   ● 자주국방 의지는 청렴한 엘리트집단과 깨끗한 정치라는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 정치에서 「돈에의 관심」을 제거해야 정치인이 國政에 몰두하게 된다.
   머리 좋은 유태인들은 그런 제도를 창안했다.
   ●「아무리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떼어놓지 못할 겁니다」
   - 페레스와의 관계에 대한 라빈의 답변
   ● 50년간의 宿敵관계를 평화를 위한 위대한 협력으로 정리한 라빈 - 페레스를 보면서
   YS - DJ를 생각했다.
   ● 그는 朴正熙를 변호했고 金泳三대통령과는 사랑(?)에 빠졌다.
  
  
   라빈 참모총장과 공군 신병의 인연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기자가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67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4차 중동전, 흔히 6일전쟁으로 불리는 그 전쟁이 불붙고 있을 때 기자는 大田 공군 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받고 있었다. 훈련소에도 비상이 걸렸고 당시 이스라엘 3군 참모총장 라빈氏 때문에 趙甲濟 공군 이병은, 늑막염에 걸려 한 달 반 입원했다가 퇴원한 몸으로서 밤중에 보초를 곱으로 서야 했다.
  
   그의 이름과 처음으로 접한 것은 1967년 겨울, 기자가 동해안의 레이더 기지에 근무할 때였다. 미군으로부터 철 지난 잡지를 얻어서 보다가 타임誌에 나온 라빈 참모총장의 프로필 기사를 읽게 되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 기사 내용 중에 「모세 다얀 국방장관이 언론의 각광을 받고 있으나 파죽지세(破竹之勢)의 승리를 이끈 진짜 공로자는 라빈 총장이었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 같다.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가 「엔테베 작전」이란 기상천외한 인질 구출작전을 폈을 때 라빈 총리 이하 이스라엘 국민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는 기사가 들어오더니 부인의 은행계좌 문제로 총리직을 사임했다는 뉴스를 끝으로 관심권에서 사라졌다. 그러다가 걸프전쟁 이후 라빈이 15년만에 다시 총리가 되었을 때 『아직도 살아있구나 언제적 라빈인데』 하는 생각이 났다. 극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평화협정 이후 그는 비록 인구 500만 小國의 지도자이지만 클린턴 美대통령 다음으로 세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뉴스 메이커가 되었다.
  
   기자가 1995년 5월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여행했을 때 라빈을 좀더 실감있게 느낄 수 있었다. 기자는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책을 한 권 샀다. 퓰리처 상을 두 번 받은 뉴욕 타임스의 토마스 L 프리더먼 記者(현재는 논설위원)가 쓴 이 책에 라빈이 등장하는 한 장면이 실려 있다.
  
   〈1984년 총선이 끝나고 노동당과 리쿠드당이 제휴하여 함께 擧國 내각을 구성한 지 수개월 후, 나는 이스라엘의 유명한 자선사업가인 기타 세로버의 예루살렘에 있는 우아한 집에서 열린 만찬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것은 토요일 밤이었고 노동당의 이츠하크 라빈 국방장관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들어와서 라빈 장관에게 급한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그는 잠시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살며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호기심 많은 기타 세로버가 결국 그에게 무슨 전화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라빈은 낮은 소리로 『와이즈만의 전화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에제르 와이즈만 전 국방장관의 이야기를 했다.
  
   『파드 콰와스메의 屍身을 그 가족들이 헤브론에다 매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부탁이오. 와이즈만은 그를 쫓아낸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소』
  
   파드 콰와스메는 1980년 5월 헤브론에서 한 유태인 정착자가 살해된 후 와이즈만이 쫓아낸 요르단강 西岸 헤브론시의 前 시장이었다.
  
   콰와스메는 1984년 12월29일 암만에서 암살되었는데, 범인은 시리아 요원들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의 암살은 어찌 생각하면 예견된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협상에 대한 그의 온건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가 살해된 이튿날 그의 가족들이 와이즈만에게 부탁한 모양이었다. 라빈에게 잘 말해서 그가 제발 자기 고향 땅에만 묻힐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이다.
  
   기타가 『그래 뭐라고 대답했나요』라고 라빈에게 물었다. 라빈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안된다고 했소. 무슨 시위든 시위는 질색이니까』
   그의 이 대답 이후 食卓 주위에는 잠실 불편한 침묵이 뒤따랐다. 모두들 라빈의 목소리에 묻어 있는 그 냉랭함에 기가 질린 형색이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안이 벙벙했다. 죽은 사람을 그저 고향 땅에만 묻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애원인데 그것도 노동당 소속이란 사람이…. 모두의 심사를 읽고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기타였다. 『그가 고향 땅에 묻히는 것을 허락해 준다고 해서 무어 그리 나쁜 일이 일어나겠어요』〉
  
   라빈은 무뚝뚝하고 냉혈적인 정치인의 이미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실 이스라엘의 언론이나 책에 등장하는 라빈의 얼굴 사진 가운데 웃는 모습은 거의 없었다. 너무나 진지해 보여서 긴장된 느낌, 딱딱한 인상의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그 라빈 총리를 인터뷰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떠난 것은 1995년 10월29일. 기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盧泰愚 비자금 사건으로 기자들이 정신없이 뛰고 있는데 한가한 해외취재를 간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무역센터에서 김포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의 차창 밖으로 한강 고수부지는 가을의 풍요를 구가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 놀러 나온 시민들과 맑은 하늘이 어우러져 신문紙面의 분위기와는 다른 태평성대가 거기에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火力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휴전선을 지척에 둔 도시의 이런 안전과 풍요를 대부분의 행락객들은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국방비를 더 부담하자든지 아들을 군대에 보내라고 했을 때 선뜻 그런 국가의 요구를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는 이가 저 군중 속에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저 풍요는 사상누각인가, 기적인가…. 이런 저런 데 생각이 미치다가 문득 기자는 이번 취재의 방향을 궁리했다. 이스라엘의 자주국방 의지를 가능케 한 정치의 비결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정치는 돈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라빈 총리를 통해서 이런 주제를 풀어간다.
  
   점보 조종실과 대한민국의 조종실
  
   金浦공항에 나와서도 盧泰愚 비자금 사건에서 해방될 수가 없었다. 군데군데 설치된 텔레비전뿐 아니라 인터내셔널 헤랄드 트리뷴紙를 샀더니 1면 머리 기사로 盧 전 대통령의 일그러진 얼굴이 실려 있었다. 프랑크푸르트行 대한항공 보잉 747-400은 이륙했다. 약 3시간 뒤 조종석에 들어가 보았다. 기장과 부기장 두 사람만 있었다. 항공기관사를 省力化시킨 최신 조종실의 계기배치는 舊型에 비해서 단순화되면서도 조작이 간편하고 실수의 확률을 줄인 것이었다. 충돌방지 시스팀(TCAS)이 기상레이더에 들어 있어 반경 40항공마일·고도차 2천 피트 이내에 다른 비행기가 들어오면 레이더에 잡히게 돼 있었다.
  
   1억2000만 달러짜리 점보기. 丁成鎭기장은 『盧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두 대는 살 수 있다』고 농담했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상공 3만1500 피트에서도 화제가 「그것」이었다. 조종사 세 명이 할 일을 두 명이 하니까 일은 더 바쁘다. 新機種이 들어올 때마다 조종사들은 시뮬레이션 교육을 받아 적응을 해야 한다. 이밖에도 매년 두 번씩 교통부 시험, 그리고 신체검사를 받아야 조종간을 잡을 수 있다. 月 90시간 年間 1천 시간 이상 조종을 못하게 돼 있고 55세에 정년퇴직한 뒤엔 촉탁으로 61세까지만 비행기를 몰 수 있다.
  
   실수를 허용할 수 없는 비행의 특성상 조종사에 대한 관리는 어떤 직업인에 대한 것보다도 엄격하게 규정화돼 있다. 비행기를 나라에 비교한다면 조종실은 정치부문, 조종사는 정치가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이 조종사들 만큼만 공부하고 훈련받고 자신을 통제한다면 승객실의 손님들처럼 국민들은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조종사들은 추락 돌풍 폭파 같은 비상사태를 가상한 훈련을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필요한 계기작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 職務의 감각을 발전시킨다. 우리 국회의원들 가운데 입법부 본연의 職務인 법률제정과 예산 검토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지식을 갖춘 의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넥타이 맬 줄 모르고 춤도 못 춰
  
   다시 승객실로 돌아온 기자는 잠도 오지 않고 해서 라빈 총리 인터뷰에 대비한 연습문제 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상공의 저녁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그 구름바다의 끝을 따라 선홍색 테가 환상적인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기자는 라빈의 회고록을 두 번째로 읽고 있었다. 회고록의 제목은 달리 없고 그냥 「라빈 회고록」이다.
  
   그의 宿敵인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의 회고록은 제목이 「평화를 위한 전투」(Battling for Peace)이고 내용도 경쾌 발랄하다. 반면 라빈 회고록은 형용사·부사를 많이 쓰지 않고 명사·동사가 主流인 딱딱한 표현으로 이어진다. 다소 무미건조하고 무거운 인상이다. 페레스가 시인 같다면 라빈은 산문가이다. 페레스는 스스로를 「꿈꾸는 이」(Dreamer)라고 표현했는데 라빈은 현실주의자요, 실천가라는데 회고록에서부터 그런 냄새가 났다.
  
   라빈 회고록을 읽으면서 기자가 속으로 웃은 대목이 두 번 있었다. 이스라엘 독립 전쟁(1948년) 때 이집트측과 정전협상을 할 때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라빈의 실토이다
   〈나는 한번도 넥타이를 맨 적이 없었다. 내 운전사가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운전사는 할 수 없이 나에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여 머리 위로 빼내 걸어놓았다가 다시 졸라매도록 가르쳐 주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매듭이 풀어져 버릴까 불안했다〉
   기자도 공군신병훈련소에서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1974년 9월 총리 시절) 그날 밤 포드 대통령은 우리를 위하여 공식 국빈만찬을 베풀었다. 자신만만한 대통령은 아내 레아 앞에서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그녀를 낚아채듯 무도장으로 인도하여 멋지게 돌아갔다. 나는 엉터리 춤이라도 배워두지 못한 것이 원망스러웠다. 구세주 같은 이가 나타나 포드 대통령 부인에게 먼저 춤을 신청해 주었으면 하고 빌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은 백악관에선 일어나지 않는 법. 할 수 없이 나는 부인한테 다가갔다. 부인은 내가 춤을 신청하는 줄 알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침을 한번 삼킨 뒤 『포드여사 죄송합니다만 저는 정말 춤을 출 줄 모릅니다. 여사의 발만 밟을 것 같습니다』라고 자백했다. 이제 최악의 순간을 지났구나 하고 안도하는데 포드 여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걱정마세요. 총리님. 저는 젊었을 때 춤을 가르쳐주곤 했는데 총리님보다 훨씬 못 추는 사람으로부터 제 발을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했답니다』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어느새 나는 포드 여사에 이끌려 춤이란 걸 추고 있었고 그녀의 발을 밟지 않으려고 버둥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키신저가 와서 나를 무도장에서 빼내줄 때 어찌나 고맙던지. 키신저가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한 일이 없다손 치더라도 그 날 밤 나를 위해 베풀어준 자비에 대해선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16세에 총을 잡다
  
   라빈 회고록을 두 번째 읽으면서 기자는 라빈의 숨결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몇 가지 상징적 단어가 떠올랐다. 정직, 무정(無情), 무미건조, 잡기모름, 검소, 과묵, 부끄럼 타는 사람, 성실, 헌신, 고집, 의무, 책임. 지도자로서 라빈의 장점은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며 장기적 안목으로 미래를 예측한 뒤 철저하게 대비하는 大戰略家的 특성이란 느낌이 왔다. 왠지 朴正熙와 비슷한 체취가 있었다.
  
   라빈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총리가 된 유일한 사람이다.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총리는 모두가 이민자이다. 라빈의 부모도 러시아에서 이민 온 사람이었다. 1922년에 출생한 라빈은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水理기술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라빈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성격을 「어머니를 닮아 내성적」이라 표현하고 있다. 15세에 어머니를 잃은 라빈은 「그때부터 나는 成人이 되었다. 나에게 가정은 없어졌고 스스로 進路를 개척해야만 했다. 나는 사람들과는 별로 사귀지 않고 오직 일과 공부에만 열주하였다」고 쓰고 있다.
  
   라빈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외로움의 그림자 같은 것은 이런 소년기의 체험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라빈은 다른 유태인 청소년들과 함께 16세에 카두리 농업학교 선배 이갈 알론(뒤에 외무장관)으로부터 무기 조작법을 배우게 된다. 1941년 19세 때 라빈은 유태인 비밀군사조직 「하가나」 산하 특공부대인 팔마하(Palmach)에 들어간다. 이때 라빈을 심사, 입대시켜준 사람이 모세 다얀(뒤에 국방장관)이었다.
  
   텔 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뻗은 도로가 협곡을 지날 때가 있다. 양쪽비탈에는 지금도 불타고 부서진 지프, 장갑차가 벌겋게 녹슨 채 뒹굴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에선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野外 전쟁기념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전쟁의 흔적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때 아랍군에게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그곳까지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투를 증언하고 있다. 이 전투의 지휘자가 바로 26세의 라빈이었다. 그는 팔마하 산하 하렐 여단의 여단장으로서 독립전쟁 중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전투를 지휘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난 뒤 벌써 우리 여단은 100여 명 戰死, 400 명 부상의 피해를 입었다. 손실이 너무 커 소년병들까지 투입해야 했다. 15∼16세 소년들의 생명을 소모시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도리가 없었다. 우리 지도부는 전쟁에 대비한 훈련과 武器구입에 실패했다. 이처럼 부족한 무장으로 이처럼 소수의 병력이 국가의 독립을 쟁취한 예도 없을 것이다〉
  
   살아남은 者로서의 죄책감과 의무감
  
   라빈은 독립전쟁의 쓰라린 교훈이 그 자신에게 이런 다짐을 하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부하들에게 부족한 탄약과 저질의 무기를 들려 죽음을 향해 내보내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戰友의 도덕적 의무로서 우리는 생명을 바쳐서라도 우리 조국이 두번 다시는 이렇게 무방비로 당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라빈의 일생은 죽어간 부하들에 대한 이런 약속의 실천과정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전쟁준비와 군수물자 및 武器체제 도입선의 확보에 대한 그의 철두철미한 자세와, 그의 연설문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戰死者들에 대한 언급은 살아남은 자로서의 죄책감과 의무감이 公人으로서의 행동지침으로 되어 그를 몰아갔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1994년 12월10일 노벨 평화상수상 연설에서 라빈은 이렇게 말했다.
  
   〈노벨상을 두 번 받은 선례는 없는 것 같으니, 이 귀한 상을 받는 자리를 빌어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대다수 젊은이들이 수학의 비밀과 성경의 신비를 풀려고 애를 쓰는 나이에, 첫 사랑이 꽃피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나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수리(水里)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농업학교에서 공부하며 목마른 中東에서는 수리 기사야말로 중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나의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총을 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나는 수십 년 동안을 군대에서 생활했습니다. 살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싶어한 젊은 남녀들이 나의 책임하에 오히려 죽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려다 죽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中東에는 우리의 조국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에도 수백 곳의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수천 피트 상공에서 비행기 창문으로 보면 그 헤아릴 수 없는 무덤들이 고요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는 中東으로부터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야 했습니다. 지휘관으로서, 사령관으로서, 국방장관으로서 나는 수많은 군사 작전을 명령했습니다. 승리의 기쁨, 死別의 슬픔과 함께 나는 언제나 그런 결정을 내린 직후의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고위 장교들이나 내각의 각료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날 때의 그 정적, 문 밖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 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홀로 남은 나를 감싸는 적막. 그 때가 바로 방금 내린 결정으로 우리 국민들이나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죽음의 길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그들은 여전히 웃고 울고 있으며, 여전히 이러저러한 계획을 짜고 사랑을 꿈꾸며, 여전히 정원에 나무를 심거나 집을 지을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것이 地上에서의 마지막 시간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한채 말입니다. 그들 중 누가 죽을 운명일까요? 누구의 사진이 내일 신문에 검은 테를 두르고 나타날까요? 누구의 어머니가 곧 슬픔에 잠기게 될까요? 어느 진영이 패배로 신음하게 될까요?
  
   군인이었던 사람으로서, 또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 그 순간의 적막함 역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시계 바늘들이 마구 돌아가고 있는 듯이 느껴질 때의 그 정적. 시간이 이 시각에서 저 시각으로 줄달음치고, 정말이지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의, 심지가 타들어가기 직전의 그 팽팽한 긴장의 순간에는 그 순간의 적막함 속에서 그래도 그때는 아직도 홀로 懷疑(회의)할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결정은 진정 불가피한 것인가?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가? 다른 방안은 없는가?〉
  
   총리가 안 통하는 보안요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현지 시간으로 저녁 6시에 도착한 기자는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잔 뒤 10월30일 오전에 공항으로 나갔다. 이 공항에선 출국수속을 거친 뒤 짐을 갖고 탑승 게이트를 찾아가게 돼 있다. 이스라엘 국영 항공회사 엘 알 여객기에 타려는 사람만은 출발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나오도록 돼 있다. 엘 알 탑승객을 위한 특별검색구역은 이 공항 한 구석의 창고 같은 건물에서 별도로 실시한다.
  
   먼저 보안요원(여자)이 기자에게 일문일답을 걸어 왔다.
   『당신네 총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20代 초반의 이 이스라엘 아가씨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꼬치꼬치 물었다.
   ―이스라엘 취재는 언제 계획했나요.
   『10월초입니다』
   ―그런데 왜 비행기 표는 3일 전에 구입했지요.
   『…』
   이런 식의 질의응답이 끝나면 짐을 길다란 책상 위에 다 올려 놓게 하고 샅샅이 뒤진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 보게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커튼이 쳐진 密室에서 다시 몸수색을 받는다. 엘 알(보잉 757)이 이륙할 때는 독일국경수비대의 장갑차가 활주로까지 따라와 환송해 주었다.
  
   공항에서 사본 영자 신문에 테러조직인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가 지중해의 말타에서 이스라엘 정보요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저격당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지하드가 보복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텔 아비브行 엘 알 보잉 757機內의 분위기는 꼭 예비군 훈련받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탄 버스 안 같았다.
  
   넥타이를 맨 승객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자는 화장기가 거의 없었다. 거의가 작업복 차림. 네 시간 동안의 비행인데 잠자는 승객은 드물고 소곤소곤대는 말소리들이 機內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 주었다. 準戰時下 국민들의 긴장된 분위기가 집단적으로 전해져 왔다. 텔 아비브 공항 활주로에 덜컹 내리니 승객들의 박수―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습관이다.
  
   「라빈을 죽여주십시오」
  
   텔 아비브 해변가 단 파노라마 호텔을 숙소로 정한 기자는 다음날 아침 英字 주간지인 예루살렘 리포트(11월16일자)를 한 권 샀다. 17쪽에 「이제 라빈은 초자연적 반대파와 대결하게 되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금식절 날 예루살렘의 유태교 신비주의파 라비(유태교 성직자)가 라빈 총리 관저 앞에서 저주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파괴의 천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천사들이여 칼을 뽑아 이 사악한 인간, 이츠하크 라빈을 죽여주옵소서. 그자는 이스라엘의 땅을 우리의 敵 이스마엘의 아들들에게 넘겨준 자입니다』
   이 라비는 극우단체에 속하는데 『이 저주는 30일 이내에 효력을 발생한다』고 말했다. 라빈 총리의 경우 그 時限은 11월 초가 된다〉
  
   기자는 이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했다. 金日成 사망 시기를 적중시킨 沈震頌(심진송) 같은 예언자가 이스라엘에도 있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이 기사보다도 더 기자의 흥미를 돋운 것은 英字 일간지 「예루살렘 포스트」의 맨 뒷면에 난 1단 기사였다. 10월30일에 있었던 閣議에서 교육부 장관 암논 루빈스타인氏가 『시위현장에 총기를 휴대하고 나오는 것을 금지시키자』고 말했고 라빈 총리와 검찰총장은 『실현불가능』이라고 묵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있었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오슬로 합의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주택부 장관의 차를 부순 것이 계기가 돼 그런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른 장관들은 『총기 휴대자들은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요르단 西岸에 사는 유태인 정착민들로서 自衛를 위해 총을 메고 다니므로 단속할 수가 없다』는 의견이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시민들은 정부의 허가만 받으면(이것은 까다롭지 않다) 총기·총탄을 갖고 다닐 수 있게 돼 있다.
  
   라빈 총리는 이날 각의에서 UN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결과보고를 했다. 그는 『미국 내 유태인들이 美의회를 상대로 로비를 해서 우리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도록 선동하고 있다』고 지적,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반대하는 이런 로비는 묵과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이 기사 바로 옆에는 운명적인 의미를 가진 1단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는 토요일(4일) 저녁에 텔 아비브 시내에서 前 시장 라하트氏가 주동이 되어 「평화, 그리고 폭력에 반대」라는 집회가 열린다는 예고기사였다. 라하트氏는 『이제는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들려줄 때가 되었다』면서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도 참석해 연설할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이다.
  
   총기 휴대가 금지되지 않는 대중집회에 총리가 참석한다는 것을 예고한 기사가 미리 실린다는 것이 한국기자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빈 살해범은 살해 계획을 면밀하게 세우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위의 세 가지 분리된 기사가 그 운명의 토요일 밤 하나의 의미로 이어지면서 위대한 지도자의 생명을 앗아갈 줄은 차마 짐작도 예감도 할 수 없었지만, 기자에게 일단 「경호문제」가 話頭가 되었고, 그 뒤 만나는 이스라엘人에겐 이와 관련한 질문을 꼭하게 되었다.
  
   라빈의 戰友 호레브 장군
  
   한국도 사건이 많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도 그에 못지않음을 텔 아비브 도착 둘째 날에 알 수 있었다.
   ●남부 레바논에서 헤즈불라 무장조직과 이스라엘군-남부 레바논군(親이스라엘)이 충돌, 헤즈불라측 3명이 죽고 레바논 군인 7명이 부상
   ●이슬라믹 지하드 지도자 샤카키의 시체, 다마스쿠스에서 매장
   ●암만에서 中東정상회담 개최(라빈 참석)
   ●예루살렘 국제 경제회의 개최(라빈 참석).
   그러나 텔 아비브 시내에선 별다른 긴장을 느낄 수 없었다. 비상사태도 면역이 되면 평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라빈 총리는 참으로 바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기자는 國營 防産업체인 라파엘社의 텔 아비브 사무실에서 예비역 육군소장 아모스 호레브氏(71)를 인터뷰했다. 호레브氏는 1941년 17세의 소년으로 두 살 위인 라빈과 함께 유태인 지하조직의 특공대 팔마하에 가입하여 그 뒤 라빈의 밑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戰友이다. 군수사령관, 참모차장을 역임했다가 퇴역 후에는 세계적인 工大인 테크니온大學 이사장·정부원자력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移民정책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펴낸 「호레브 보고서」는 유명하다.
  
   軍 초급장교 시절에 MIT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한 경력도 가진 호레브씨는 이스라엘軍의 武器현대화에 큰 기여를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호레브氏는 가벼운 작업복,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났는데 군인이라기 보다는 老교수 같아 보였다.
  
   ―예루살렘 공방전 때 라빈의 여단에서 戰死者가 어느 정도 났습니까.
  
   『450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3000명이 다쳤죠. 제6대대를 해체하고 재조직해야 했어요 전투는 논스톱으로 밤낮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는 기관총과 수류탄만 갖고 있었고 소총이 없었습니다. 밤에도 重火技의 엄호 없이 小火器로써만 싸워야 했습니다』
  
   ―다치지 않았죠.
  
   『그래요 운이 좋았습니다』
  
   ―라빈의 지휘 스타일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특이한 인물입니다. 분석력이 대단합니다. 그는 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분입니다. 그는 문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타고난 힘인 것 같습니다.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이기보다는 부끄럼까지 타는 내성적 성격을 갖고 있어요. 젊었을 때는 당황하면 얼굴이 벌개지곤 했어요』
  
   6일전쟁 직전에 심약해진 라빈 총리
  
   호레브氏는 지난날의 추억에 젖는듯 감미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계속해 갔다.
  
   『저는 라빈을 지난 53년 동안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는 함께 웃고 울며 싸우고 화해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원병이었습니다. 지원병은 행동의 자유가 있지요. 그래서 우리 세대는 늘 공개적인 토론의 전통을 지켜갔습니다. 어떤 결정에 이르기 전에 모두가 숨김없이 의견을 털어놓고 충분히 토론하되 일단 결정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그것을 존중하는 전통이 군대에서부터 확립되었습니다』
  
   라빈의 회고록에서 가장 재미있는 章은 1967년 6일전쟁 직전의 상황에 대한 3軍 참모총장으로서의 관찰이다. 한 국가가 외부의 위협에 맞서 國內의 異見들을 통합해가면서 어떻게 전쟁을 결심하게 되는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1급 문서이다. 적어도 우리의 국가지도부를 구성한 사람은 이 부분을 꼭 읽어보도록 권하고 싶다. 특히 신라의 통일전쟁 이후 한번도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결단으로써 전쟁을 결의한 전통이 없는 한국의 정치 엘리트에게는 이 책이 有用할 것이다.
  
   1967년 5월23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의 紅海 출구인 티란해협을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병력을 시나이 반도로 前進배치시키고 시리아, 요르단과는 연합전선 체제를 구축했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말살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이때 이스라엘 총리는 레비 애쉬콜. 그는 전쟁이 박두한 상황에서 야당과 政敵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벤 구리온 계열의 인물-다얀, 페레스 같은 이는 라피黨을 만들어 딴 살림을 차리고 있었다.
  
   집권노동당은 국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해 소수당과 연립하고 있었는데 이 소수당이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다. 벤 구리온측에서도 애쉬콜은 전쟁지도 능력이 없는 인물이라고 해서 총리가 겸직하고 있던 국방장관직을 내놓으라고 정치 공세를 폈다. 정치인들은 외교적 수단으로 티란해협의 봉쇄를 풀어보려고 했으나 이스라엘군에서 「즉각 開戰」을 주장했다.
  
   호레브氏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제는 우리의 敵이 양적으로 엄청난 우위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흔히 質 對 量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는 이들이 있는데 전쟁에선 量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면 저절로 質로 전환되는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예루살렘 전투에서 우리는 20명의 정예 군인들을 데리고 200여 명의 敵兵을 향해 돌격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질이 좋지 않은 군인이라 해도 200명이란 질량 그 자체가 질을 높이는 수가 있습디다.
  
   우리 군은 6일전쟁 때 3주 동안 기다렸습니다. 전투명령 하달을 기다렸어요. 우리는 開戰의 시간을 끌 수록 敵의 대비는 더욱 강화되고 반대로 우리의 희생은 더 커질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와 정치인들 사이에 끼여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이가 라빈 참모총장이었습니다』
  
   5월28일 각의에서는 開戰 여부를 놓고 투표를 했는데 9 대 9였다. 총리는 이럴 경우 결정권이 없으므로 開戰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敵前 분열상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라빈도 흔들린다.
  
   〈담배연기 자욱한 회의실에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나는 심신이 탈진하여 집에 돌아왔다. 지난 며칠간은 정말 끝없는 미로였다. 車中에서 식사를 하고 거의 자지 못했으며 증기기관차처럼 줄담배를 태웠다. 나는 작전참모부장 에제르 와이즈만을 불렀다. 『내가 사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는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고 두 번 세번 설득한 뒤 돌아갔다. 아내 레아는 주치의를 불렀다. 그는 나에게 진정제를 주었고 나는 다음날 정오까지 자버렸다. 5월24일 저녁 나는 직책에 복귀했다>
  
   1974년에 라빈과 페레스가 집권노동당의 총리후보직을 놓고 경선에 들어갔을 때 와이즈만은 6일전쟁 직전의 라빈이 보였던 이런 약한 모습을 기록하여 폭로한 적이 있다. 그 와이즈만은 지금 이스라엘 대통령이다. 이스라엘이 開戰을 미룬 중요한 이유는 미국이 티란해협 봉쇄를 풀어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 정부가 이를 거절하자 이스라엘 내각은 전쟁을 결의할 수밖에 없었다. 6일전쟁은 이스라엘 空軍이 아침 교대시간에 맞춰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 대부분의 전투기들을 활주로상에서 파괴함으로써 開戰 30분 만에 사실상 戰勢를 결정지었다.
  
  
  6일전쟁의 大勝 속에 비극의 씨앗이…
  
  
   이스라엘軍은 공군의 엄호를 받지 못한 이집트 地上軍을 기갑부대로 돌파하고 시나이 반도를 석권했다. 그들은 또 시리아군을 골란고원에서, 요르단군을 東예루살렘과 요르단江 西岸에서 몰아냈다. 라빈 총장이 1등 功臣이 된 6일 전쟁의 결과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눈부신 성공이었으니 그 속에는 라빈의 생명을 앗아갈 싹이 배태되고 있었다.
  
   영토를 넓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東예루살렘·요르단江 西岸과 가자지역에 사는 100만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治下에 들어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통치하가 위해 민주국가인 이스라엘은 「탄압」을 해야 했다. 「민주적 유태인 국가」가 國是인 이스라엘로서는 모순에 빠졌다.
  
   라빈 총장이 다얀 국방장관과 함께 舊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사진은 유명한데 이때의 기분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수년 간 나는 이스라엘의 建國뿐 아니라 예루살렘 서쪽 벽의 수복에 있어서 一役을 담당하게 되기를 몰래 꿈꾸었다.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이 왜 이런 특권을 누리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평생 그토록 감정이 고양된 절정의 순간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舊예루살렘에 있는 서쪽 벽은 「통곡의 벽」이라 불려진다. 로마시대 때 파괴된 예루살렘城의 남은 흔적이다. 이 성벽은 유태인이 언젠가는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염원을 일깨워주는 상징 역할을 해왔다. 라빈은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만은 어떤 경우에도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존속될 것이라고 선언했었다. 페레스 외무장관은 최근 『예루살렘은 정치적으로는 폐쇄될 것이며 종교적으로는 개방될 것이다』는 발언을 했다.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정치적 위치는 변함이 없지만, 유태교·회교·기독교의 3大 종교 聖地로서 종교적으로는 어떤 종교인에게도 개방될 것이란 의미이다. 미국 의회가 최근 텔 아비브에 있는 駐美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을 결의한 것도 이런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각국 대사관에 대해서도 예루살렘으로의 이전을 권유중이다.
  
  
   라빈은 영웅型이 아니다
  
  
   호레브氏와의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1967년 6일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모세 다얀 국방장관이 가장 큰 공로자로 알려져 있는데 귀하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전쟁은 주도면밀한 대비와 계획의 결과이지 어느 한 개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전쟁 직전에 다얀이 국방장관이 되지 않고 애쉬콜 총리가 그대로 국방장관직을 겸직하고 있었더라도 우리는 이겼을 것이고 이갈 알론이 다얀 대신에 국방장관이 되었더라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사람들은 심볼을 원합니다. 다얀은 매력적 인물입니다. 그런 심볼이 되기에 적당해요. 그 애꾸눈을 보세요. 그러나 라빈은 내성적이고 과묵하고… 두 사람은 매우 대조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지요』
  
   ―라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얀과 페레스는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국가적인 大事에서는 항상 그들과 협력하였더군요.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귀하의 세대가 같은 戰場에서 서로 뒤엉켜 살아오면서 동지애로 뭉쳤기 때문인가요.
  
   『우리 세대는 거의가 벌써 70세 前後입니다. 우리는 일찍 군인생활을 시작했어요. 우리는 가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군사훈련을 하려니까 돈이 모자랐지요. 그래서 한 달에 2週는 키부츠에서 일해서 훈련자금을 마련한 다음 그 돈으로 2주간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팀워크(Teamwork)가 우리 세대의 관습이 되었어요. 팔마하는 재미있는 조직입니다. 젊은 세대에게 우리의 역사를 전해 주려고 갈릴리 호수 근처의 키부츠에다가 팔마하 교육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그 키부츠는 이갈 알론이 팔마하를 창립한 곳이지요. 우리는 아직도 나라를 만들고 있는 중이지 아직 완성하지 않았어요』
  
   호레브氏는 또 『우리는 젊었을 때 죽은 친구가 늙어서 죽은 친구보다 더 많은 세대입니다. 나는 팔마하의 중대장으로 있다가 대대장이 되어 예루살렘 전투를 치렀습니다만 같은 중대원 중에서 12명만이 살아남아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정치인이 돈 버는 거 못봤다』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이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최근 몇 년 동안은 협력을 잘 하고 있는 것이 아주 이상합니다.
  
   『라빈과 페레스는 감정적인 화해를 한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화해를 한 것이지요. 그들이 서로 싸우면 리쿠드黨이 집권할 것이 명백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致富(치부)하지 않습니까.
  
   『우리 세대는 어릴 때부터 검소하게 살도록 훈련되고 단련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치인들 중 그 직업으로 해서 돈을 번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정치와 관련된 금전 스캔들이 있었지만 그것은 정당과 관계된 것이었지 개인이 치부하려고 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호레스氏는 정치엘리트가 청렴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으로서
   ①검소한 생활철학
   ②투명한 사회제도
   ③엄격한 견제장치를 들었다.
   나중에 기자가 발견한 네 번째 이유는 돈이 안 들도록 한 선거제도였다.
  
  
   50년 宿敵 라빈-페레스
  
  
   라빈과 페레스의 인간관계는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늘 화제가 된다. 金泳三-金大中과 비교될 만한 50년간의 정치적 宿敵임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상에선 절묘한 협력체제를 구성하여 노벨상까지도 공동수상했다. 최근엔 인간적으로도 가까워져 「두 老人의 로맨스」로 불려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신이나 성격, 경력이 대조적이다. 페레스는 軍복무 경험이 없는 직업 정치인 출신이다.
  
   그러나 국방부 차관까지 지내며 비밀 核개발을 주도했고 프랑스로부터의 武器공급을 보장받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엔테베 작전 때는 국방장관으로서 과감한 작전의 추진자였다. 페레스와 라빈은 각각의 회고록을 통해서 서로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런 대목만 양쪽에서 뽑아보니 20군데가 넘었다. 亂中日記에서 李舜臣장군이 元均을 수십 군데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을 연상시켰다.
  
   페레스와 라빈이 그렇게 서로 욕하면서도 항상 얼굴을 맞대고 국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지만 부럽기도 했다.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라빈을 이렇게 인물평하고 있다.
   〈그는 아주 확고한 知的 능력을 갖고 있으나 의심이 너무 많고 조심스럽다. 정치적, 군사적 분석력이 뛰어나지만 과거의 기억 때문에 스스로 인간관계의 폭을 제한하고 있다〉
  
   1974년 골다 메이어 총리가 사임한 뒤 페레스와 라빈이 노동당 총리후보 경선에서 대결했을 때 페레스는 라빈을 찾아와 『페어플레이를 하고 敗者는 勝者에게 승복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라빈은 회고록에서 「나는 그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믿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총리로 뽑히면 내각에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제의를 거절할 이유도 없어 동의한다고만 말해주었다」고 썼다.
  
   페레스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라빈은 내가 6일전쟁 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이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고 회고록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다얀 국방장관에게 내가 제출했던 모종의 제안대로 했더라면 그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고 썼다.
  
   페레스는 엔테베 작전에 대하여 라빈이 미온적이었다고 썼고 라빈은 국방장관인 者가 초장에 아무런 작전계획도 세워놓지 않았고 비난했다. 그러나 라빈 총리는 1977년에 은행계좌 스캔들로 사임한 뒤 페레스를 당수로 추천했다. 1984∼90년 리쿠드-노동당 연합 정권 때는 노동당 대표로 함께 참여하였다. 1992년 노동당內 총리후보 경선에서 라빈은 40.5% 대 35% 득표의 차이로 페레스를 누르고 이겼고 총선에서도 다수당이 되어 총리가 되었다.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라빈이 외무장관직을 제의했을 때 나는 말했다. 새로운 라이벌 관계를 또 만들기 위해서라면 내각에 참여하지 않겠다. 분열된 정부는 여론의 지지를 상실하고 외교적으로도 상처를 입는다. 나는 친구들에게도 선언했다. 나의 유일한 행동기준은 평화협상의 진척도가 될 것이다. 그것이 만족스러우면 나는 라빈에게 가장 충직한 장관이 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나는 반란의 깃발을 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때마침 라빈도 이것이 나의 진정한 本心임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밀접하고 내실 있는 사무적 관계가 우리 사이에서 이뤄지게 되었다. 우리는 PLO와 비밀협상을 진행하는 동안에 단 둘이서 자주 만나 신중하면서도 내밀하게 토론하고 충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충돌도 감정적으로 악화되지 않았고 언론에 누설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人生 정리기에 中東의 운명을 좌우할 大事를 놓고 비로소 50년간의 宿敵관계를, 國益을 위한 하나의 주제로 통합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라빈·페레스의 로맨스는 역사적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부하가 본 라빈: 『성능 좋은 컴퓨터』
  
  
   이스라엘 도착 3일째인 11월 1일 기자는 텔 아비브 시내에 있는 국방부 건물로 들어섰다. 10층짜리 본관과 1층짜리 병영 같은 건물이 여러 개 있었다. 假건물의 느낌이 들 정도로 위엄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았고 더구나 삼엄하지도 않았다. 땅값이 가장 비싼 시내 한복판에 국방부 건물이 있는 것은 좋지 않으니 교외로 이전하라는 여론도 강하다고 한다. 軍에서는 그러나 移轉 경비를 국방예산으로 지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건물에 돈을 쓸 바에야 무기 사는 데 쓰겠다는 것이 이스라엘 군대의 철학이다.
  
   최근 이스라엘 군대를 시찰한 우리 국방부의 고위층 인사도 건물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는 이스라엘 방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우리 육군의 경우, 사단·군단 사령부 건물을 크게 꾸미는 경향이 있다. 전쟁이 터지면 어차피 사단 사령부가 전선을 따라 이동하게 되는데….
  
   이날 기자는 국방부 과학연구 담당국장 우지 에일람氏를 만났다. 그는 공수여단장 출신의 예비역 준장이다. 경력을 보니 美스탠포드大와 이스라엘의 테크니온大學에서 경영학과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공수부대 중대장 시절에 테크니온 대학에 다녔다는 것인데, 인상이 공수여단장과는 거리가 먼 학자풍이었다. 에일람 국장(61)은 1967년 예루살렘 공방전 때는 제71공수대대의 대대장으로 참전, 舊예루살렘을 요르단 군으로부터 빼앗는 데 기여했다.
  
   그의 대대에선 11명 전사·50명 부상, 여단 전체에선 97명 전사·450명 부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6일 전쟁 전체 戰死傷者數의 16%가 예루살렘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에일람 대대장은 다리 관통상을 입었으나 입원하지 않고 곧바로 골란高原으로 공수돼 시리아軍을 격퇴하는 전투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라빈 총리가 겸하고 있는 국방장관의 직속참모로서 살펴본 라빈의 집무 스타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잡한 기술적 문제까지도 확실하게 파악합니다. 세부적인 데서부터 전체적인 것까지 폭넓게 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아주 성능 좋은 컴퓨터 같은데, 그 컴퓨터엔 수많은 방이 따로 따로 있어 여러 분야의 정보가 잘 저장돼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놀라서 그 비상한 능력의 비결을 물어보면 그분은 상식을 적용할 뿐이라고 하더군요. 그분이 정치를 하면서 배운 것은 군인 시절과는 달리 정치엔 黑과 白뿐만 아니라 黑도 白도 아닌 회색지대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분은 소수의 믿을 만한 참모에 의존하는 형입니다. 테니스도 꼭 부인하고만 치잖아요』
  
  
   닉슨이 별 볼일 없을 때 친해둔 게 큰 득이 되다
  
  
   에일람 국장은 넥타이 맬 줄도 모르고 춤 출 줄도 모르는 라빈氏가 참모총장을 그만둔 뒤 駐美대사가 되어 이스라엘에 대한 武器 공급선으로서 미국을 묶어두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 때는 체코슬로바키아 한 나라한테서만 무기를 살 수 있었다. 그 뒤에는 프랑스를 무기 공급선으로 삼았다. 드골은 6일전쟁 직전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先制공격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가 묵살되자 무기禁輸 조치를 취했다. 이런 시기에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미국에 대사로 간 라빈의 중요한 임무는 미국製 무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1968년은 대통령선거의 해였다. 닉슨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라빈은 닉슨과 좋은 인연을 맺어 두었었다. 1966년 닉슨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그는 대통령선거와 주지사선거에서도 진 「별 볼일 없는 정치인」이었다. 라빈 참모총장이 만찬장에 가보니 초청받은 이스라엘 장관들은 안보이고 그가 최고 선임자였다. 라빈은 외롭게 된 닉슨을 다음날 군대로 초청, 극진한 예우를 베풀었다. 라빈이 대사가 돼 닉슨을 만나니 그는 『당시의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1960년대에 닉슨은 한국도 방문했는데 여기서도 냉대를 받았고 이것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에게 별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고 전한다. 라빈-닉슨의 인간적 교분이 국가 간 외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라빈 회고록의 駐美대사 시절 章이다 이 부분은 우리 외교관들에게 권하고 싶다. 비록 小國의 대사이지만 미국의 최고위층 인사들을 맞상대하면서 國益을 지켜내는 당당하고 끈질긴 자세가 끈끈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스라엘이 武力시위로써 미국의 權府를 두 번 감동시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이집트와의 소모전(War of Attrition)때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領內(영내) 깊숙이 날아가 폭격을 거듭하여 이집트를 지원하던 소련으로 하여금 미국에 대해 저자세로 나오게 한 적이 있었다. 親美的인 요르단의 후세인王이 「국가 안의 국가」가 돼버린 PLO를 추방하는 과정에서 시리아가 기갑부대를 보내 개입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부탁을 받아 골란高原 전선에 병력을 증강시켜 시리아를 견제, 요르단을 돕고 미국의 체면을 세워준다. 이처럼 미국을 도울 때는 적극적으로 돕되 불리하게 돌아가면 미국 내 유태인 세력과 의회內 親이스라엘 의원들을 동원하여 미국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라빈은 회고록에서 「미국의 국내정치관계를 잘 이용할 줄 모르는 대사는 본국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 좋다」고 까지 쓰고 있다.
  
  
   국방부 간부엔 現役이 없다―「군인이 돈을 만지면 안된다」는 원칙 세워
  
  
  
   에일람 국장은 세계 頂上급인 이스라엘 武器개발의 실무책임자이다. 그의 경력에서 특이하게 느껴진 것은 36세에 육군 준장으로 전역한 뒤 바로 국방부 간부로 옮겨 제2의 인생을 출발했다는 점이다. 月 약4000 달러에 해당하는 年金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스라엘군은 제2의 人生을 설계할 수 있는 30∼40代에 장교들을 轉役시키면서 年金 보장도 충분히 해주고 있다. 50代에 전역한 장교가 고개를 숙이고 사회를 원망하면서 살아가는 한국과는 크게 다르다.
  
   이스라엘 군대는 군인들이 일찍 복무를 시작, 일찍 轉役시키는 방법으로써 군대를 항상 젊게 유지하고 있다. 전투기 조종사도 主力은 감각이 좋은 20代이며 전투병은 물불을 안가리는 10代 후반에서 나온다. 50세 이상의 군인은 IDF(Israel Defence Forces)에서 찾아볼 수 없다. 계급도 중장(참모총장)이 단 한 명이다. 大將은 건국 이래 한 사람도 없었다. 계급의 인플레도 막고 있다.
  
   에일람 국장처럼 국방부 간부들은 전부가 예비역 장군이다. 현역이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建國의 아버지 벤 구리온 초대총리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현역군인은 절대로 돈과 관련된 직책에서 근무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산을 다루는 국방부엔 現役장성을 배치하지 않게 됐고 군인의 부패 가능성을 원치적으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도는 반짝하는 아이디어의 産物이 아니다. 전쟁과 군인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통찰에 기초한 가치판단의 결과물인 것이다. 유태인들이 머리가 좋다는 것은, 이런 제도를 만들 때도 모방을 거부하고 본질을 꿰뚫어 본 뒤에 자신들에게 적합한 방식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날 만났던 호레브氏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군사敎理는 어느 나라의 복제품도 아니고 아주 독창적이란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어떻게 만들어 낸 겁니까?
  
   『우리는 建國 이전에 비밀군사조직을 구성할 때 탈무드의 가르침대로 했습니다. 먼저 전쟁의 원칙을 알자. 기습, 집중… 이런 것이지요. 그 다음에 이 원리를 소대, 중대, 대대, 여단, 군단 작전으로 확대적용하는 방법을 택했지요. 建國 이후엔 장교들을 프랑스, 영국, 미국의 참모대학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한 各國의 군사 독트린과 우리 고유의 것을 합쳐서 IDF 참모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을 시작한 사람이 바로 6일전쟁 때 IDF 정보책임자였던 아론 야리브였습니다』
  
   공수여단장 출신인 에일람氏의 이력서를 받아보니까 화려한 교육연구, 논문발표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연구의 분야도 工學에서 정치까지 광범위했다. 교육예산이 국방예산과 거의 맞먹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정예 IDF의 전투력은 정신력뿐 아니라 그 정신력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력의 뒷받침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유태인에 의한 테러」에 대한 경계심은 아예 없어
  
  
   이날 오후엔 해외·군비통제·지역 안보담당 국방부 차장인 구티 몰 예비역 준장을 장관실 바로 옆방에서 만났다. 출입할 때 보안점검이 너무 부드러운 것이 신통하여 『지금까지 이스라엘 정부요인들은 한번도 아랍 테러의 희생이 되지 않았는데 무슨 비결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구티 몰氏는 『그들은 특정인을 겨냥하는 테러를 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유태인에 의한 유태인에 대한 테러」는 아예 생각밖의 일로 돼 있었던 것이다. 몰氏는 한때 실종자 및 포로 문제를 취급한 경력이 있어 그 문제 처리의 원칙을 물어 보았다.
  
   『그들을 戰場으로 가도록 명령한 것은 정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고향으로, 가정으로 데려오는 것은 그 명령을 내린 정부의 의무입니다. 죽었다는 증거가 확인되지 않는 한 우리는 사건을 절대로 종결시키지 않습니다. 1968년 아카바 만에서 침몰한 잠수함의 선원들을 27년째 수색하고 있습니다』
  
   라빈 사위는 起亞자동차 수입 판매회사의 고문변호사
  
   구티 몰氏는 중동이 긴장완화로 가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럴수록 군대의 역할이 중요하므로 군비축소 논의는 시기상조이고 국방예산을 줄이라는 여론의 압력도 없다고 했다. 라빈 총리의 사위 아비 페로소프氏는 기아자동차 수입회사의 고문변호사로서 한국을 자주 오가는 사람이다. 1996년 11월2일 起亞 金善弘 회장의 소개로 그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것은 라빈 총리를 만나기 전 그의 인간적 측면을 더욱 가깝게 파악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는 거구의 소유자였고 변호사답게 청산유수의 언변을 과시했다. 라빈은 여동생뿐이고 딸, 아들을 두었다. 50세인 펠로소프氏는 1986년에 라빈 총리의 딸(달리아 라빈)과 재혼했다. 달리아 라빈도 재혼인데 첫 남편은 장교로서 4차 중동전쟁 때 크게 다쳤다고 한다.
  
   ―라빈 총리의 사위가 되기 전에는 그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저의 처를 만나기 전에도 저는 정치적으로 라빈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974∼77년의 총리 재임 기간 중에 저는 열렬한 지원자였어요. 1985년까지 저는 초콜릿 회사인 엘리트社의 사장이었죠』
  
   ―라빈은 어떤 사람입니까.
  
   『라빈의 두 가지 얼굴에 대해 말들이 많지요. 정치인으로서의 라빈에 대해선 모든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알고 있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제가 더 자세히 알고 있는 면은 인간 그 자체로서의 라빈입니다. 인간 라빈은 우리와 똑같은 世俗人, 보통사람입니다. 그는 귀족도 아니고 페레스도 아니고 그냥 보통사람입니다. 텔레비전과 영화 구경을 즐기고 탐정소설을 좋아합니다. 아주 정상적인 인간이지요』
  
   ―라빈 총리는 테니스를 좋아하신다는데 그 이외의 취미생활은 어떠합니까.
  
   『아침에 6시에 일어나 밤 12시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인데 테니스와 담배 피우는 것 이외엔 달리 즐길 취미가 있을 수 없어요』
  
   ―목소리가 바리톤이어서 노래를 잘 하실 것 같은데….
  
   『노래 못 불러요. 목소리가 굵어서 학생 때 옆자리의 학생과 속삭인다는 게 선생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매번 혼이 났다는 겁니다』
  
   ―입원한 적이 없지요.
  
   『1947년쯤 자전거를 타다가 다쳐서 입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건강하시죠.
   『그러길 바라고 그럴 줄 믿지만 신경을 많이 써야죠』
  
   『한국에 감탄한 장인』
  
   ―라빈 총리께서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시고 나서 한국에 대해 무슨 말씀하시는 걸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기아자동차와의 협상 때문에 그 전에 몇 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장인은 한국에서 돌아오신 다음에 한국에 대해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일에 대한 의욕과 능력에 대해서 아주 감명했다고요. 어떤 작업장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노동자들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 집중도에 놀랐답니다. 라빈 총리가 가장 싫어하는 게 일을 안하고 커피집에서 노닥거리는 것입니다. 작년에 장인께선 일본도 함께 방문했는데 일본보다는 한국에 더 흥미를 느끼신 것 같았습니다. 한국의 대통령과도 정말 사이가 좋아지신 것 같았습니다』
  
   펠로소프 변호사가 고문으로 있는 KMI(Kia Motors in Israel)는 올해 들어 기아 자동차를 약 2500 대 팔았다고 한다. 선발회사인 현대·대우의 판매량까지 합치면 이스라엘 내수 시장의 약 16%를 한국 자동차가 점하고 있다고 한다.
  
   ―페레스와 라빈은 최근에 인간적으로 친해졌다면서요.
  
   『두 사람은 이미 70세를 넘겼고 세상을 알 만큼 아는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라이벌 관계보다는 나라가 더 중요하고, 지금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평화협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협력할 수밖에 없지요. 일종의 정치적 리얼리즘이라고 할까요. 정치가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을 화해시킨 셈이죠』
  
   정치 후진국에선 정치가 좋은 인간관계도 파괴하는데 선진국의 정치는 나쁜 인간관계도 협력체제로 승화시킨다는 얘기다. 펠로소프氏는 두 사람에 대해 이런 비교를 했다.
   『페레스는 비전이 있는 정치가입니다. 그가 중동평화의 설계자인 것만은 부인할 수 없어요. 한편 라빈 총리가 아니었다면 이 미묘한 시기에 이 나라를 아무도 끌고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페레스도 그런 리더십은 갖고 있지 못해요』
  
   펠로소프氏는 또 『평균적인 이스라엘人의 감각으로 본다면 중요한 군사적인 결정을 장군 출신이 내릴 때는 수긍할 수 있지만 법률가 출신이 내릴 때는 불안해지는 법이다』라고 했다.
  
  
  돈 쓸 필요가 없는 선거제도
  
  
   ―왜 내년부터는 총리를 국민들이 직접투표로 뽑도록 법률을 고쳤습니까.
  
   『우리 의회에는 120개 의석이 있는데 정당은 14개입니다. 왼쪽엔 노동당, 오른쪽엔 리크드당, 그 사이에 2∼3석을 가진 군소정당이 존재합니다.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은 없게 마련이므로 연립정권이 서게 됩니다. 이때는 사실상 군소정당이 캐스팅 보트를 쥐고 총리와 집권당을 결정하게 됩니다. 저를 포함한 학자들이 이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총리를 국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하자는 법률개정안(이스라엘에는 헌법이 없다)을 건의하여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내년 선거에서 처음으로 실시되는데 직선총리가 組閣의 권한을 갖게 됩니다. 총리가 구성한 내각이 국회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재선거를 치러야 합니다』
  
   총리 후보는 미국처럼 당내 경선으로 결정된다. 각당의 국회의원 후보도 黨內에서 결정하면 그 명단을 서열에 따라 발표한다. 全국회의원이 전국구인 셈이다. 유권자들은 특정한 후보에게 찍는 게 아니라 黨을 선택하여 투표한다. 黨별 득표율에 따라서 당선권에 드는 국회의원수가 결정된다. 따라서 국회의원 후보가 선거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선거자금을 모을 필요도 적어진다.
  
   이스라엘은 좁은 나라이지만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 있다. 지역행정은 지방자치 기구에 맡기고 국회의원은 외교·국방·경제정책 등 전국적인 문제에만 신경을 쓰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이 제도의 장점은 정치부패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국회의원들이 國政 같은 큰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이곳 정치인은 몽땅 가난뱅이』
  
  
   ―한국에선 비자금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금전과 관련된 스캔들은 없나요.
  
   『한국 사정은 잘 모르겠고요,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몽땅 가난뱅이들입니다. 서구나 동양의 정치인들에 비교하면 생활이 비참할 정도입니다. 정치자금으로 차 사고 집 사고 하는 일은 없어요. 라빈 총리는 시거와 초콜릿만 있으면 족한 사람입니다. 정당과 관계된 금전문제는 있었지만 지난 50년간 정치인이 부패케이스로 문제가 된 경우는 없어요. 세계의 어느 정치판에서도 일어나는 일들이 여기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인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다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국민과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安保의식이 투철한 이유는 국방체계를 뒷받침하는 정치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하기 때문이란 논리가 성립한다. 이것은 이번의 취재여행에서 기자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이스라엘의 지독한 自主국방 의지는 깨끗한 정치 엘리트의 리더십에서 피어난 장미꽃이다. 정치가 쓰레기통 같으면 아무리 국민들이 성실해도 국방은 위태로워진다.
  
   ―라빈 총리의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텔 아비브에 아파트 한 채, 그리고 자동차 한 대, 그것이 전부입니다. 예루살렘에 총리官舍(관사)가 있는데 총리를 그만두면 비워주어야 하니까 재산이 아니지요』
  
   駐이스라엘 朴東淳(박동순) 한국대사의 부인 李恩珠(이은주) 여사에 따르면 텔 아비브에 있는 라빈의 아파트에 초대돼 가보았는데 50평쯤 크기에 식당과 거실을 같이 쓰는 수수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림 이외에 장식물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라빈 부인 레아 여사는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지만 그 이외의 면에서는 워낙 검소한 사람이란 점을 잘 알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라빈의 총리 사임과 검찰총장의 독립성
  
  
   ―1977년에 라빈 총리는 은행계좌 문제로 사임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에 라빈 총리는 駐美대사를 지낸 뒤 귀국하여 총리로서 4년째 접어들고 있었어요. 그때의 法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무원들은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귀국하면 해외 은행계좌를 30일 이내에 폐쇄하게 돼 있었는데 장모 레아 여사가 깜빡 잊고 그냥 내버려두었어요. 2000 달러의 잔고가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 정보를 듣고 그 은행에 가서 자신의 돈을 그 계좌에 입금시켜서 증거를 잡았습니다.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 농구팀이 유럽 챔피언戰에 진출하여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끝낸 직후 텔레비전에 나와서 총리직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국민들은 아쉬워했습니다. 그 뒤 장모님은 벌금을 물었고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하라키리(切腹)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임 때문에 15년 뒤(92년)장인은 다시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가 이 사건을 처리한 과정을 보면 권력의 분산이 어느 정도로 이뤄져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스라엘 法에는 외국에 은행계좌를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처벌 규정이 명확히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재무장관이 위원회를 조직, 이 처리문제를 다루게 했다. 그 결론은 재판 없이 벌금을 물리는 것으로 나왔다. 이에 대해 검찰총장이 반발했다. 법무장관은 검찰총장 편을 들었다.
  
   검찰의 방침은 라빈 총리는 벌금, 레아 여사는 기소하여 법정에 세운다는 것이었다. 검찰총장은 은행계좌와 관련된 어떤 부정도 없었고 다만 규정 위반 정도의 과실이란 점을 인정했지만 총리에게는 유별난 엄격성을 보였다. 라빈 총리는 그때 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①노동당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②아내와 함께 책임을 共有하기 위해서 사임하기로 했었다고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재판장도 레아 여사에게 통상적인 판례를 뛰어넘는 액수의 벌금형(25만 이스라엘 파운드)을 선고했다. 기자가 이스라엘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 에피소드를 물어보았더니 거의가 『그 사건은 오히려 라빈의 정직성과 성실성을 돋보이게 했다』고 답했다.
  
  
   공수부대 지원, 위험지대 근무한 라빈 손자
  
  
   ―왜 이스라엘에는 아직 페레스, 라빈 같은 建國 세대가 정치를 이끌고 있습니까.
  
   『아마도 평화협상(Peace Process)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큰 일에는 뉴 리더가 낄 수 없어요. 만약 라빈 총리가 내일이라도 시리아와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면 그 다음날 이스라엘 국민들은 「라빈氏 수고했어요. 이제는 집에 가서 쉬세요」라고 이야기 할 겁니다』
  
   펠로소프氏는 『골란高原을 시리아에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라빈 총리뿐이다』라고 말했다. 라빈 총리의 오랜 軍 경력과 6일 전쟁의 승리, 그리고 강경파로서의 명성 때문에 그러한 양보를 해도 국민들이 안심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테러리스트 출신의 유명한 우익 지도자 베긴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돌려주고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치라는 설명이었다.
  
   펠로소프氏는 『만약 페레스가 그런 일을 한다면 다음날에 당장 암살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변가인 펠로소프氏는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는 제스처를 써 가면서 변호사답게 청산유수로 설명해 나갔다.
  
   『30년 전 제가 아직 어릴 때 우리의 우상은 장군이었습니다. 지금 세대는 달라요. 대기업인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어요. 自主국방 의지는 아직 살아 있지만 군인을 더 이상 우상화하지는 않습니다. 젊은 세대는 변하고 있어요』
  
   펠로소프 변호사는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더라고 했다.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북한 주민은 동포이니까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통일해야 한다, 내 차는 두 대이니 한 대를 나눠주더라도 통일을 해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펠로소프氏는 또 『이스라엘 사람들도 한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흡수하는) 大이스라엘 정책을 추구했는데 점차 왜 우리가 팔레스타인(요르단江 西岸 및 가자지역)을 먹여살려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실용적 생각이 확산되면 평화협상은 성공할 것이다』라고 했다.
  
   펠로소프氏는 『라빈 총리의 맏손자 요나단 라빈君이 공수부대에 지원하여 사병으로서 위험한 레바논 남부전선에 근무하다가 제대하여 내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0여분 뒤 예쁘게 생긴 한 작업복 차림의 청년이 문을 반쯤 열고서 펠로소프氏와 짧은 대화를 나누다가 사라졌다.
   『저 아이가 요나단이예요』
  
   기자가 라빈 총리의 손자 요나단을 두 번째로 본 것은 故 라빈 총리 장례식 중계방송을 통해서였다.
  
  
   『유태 원리주의자도 큰 문제』
  
  
   펠로소프氏는 이날 상당히 예언적인 발언을 했다.
   『평화협상이 이 지역에 경제 붐을 몰고 올 것 같아요. 평화협상 이전에는 제가 한국에 가서 장사를 하자고 아무리 졸라도 성사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한국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고 1년에 한국 자동차가 1만5000대씩이나 팔리곤 합니다. 관심이 이제 군사와 대결에서 경제와 협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원리주의자들입니다. 회교 원리주의자만 지적하는데 유태인 원리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점령지역에 사는 정착민 같은 사람들인데 이들은 무조건 자신들의 행동이 성스러운 것이라고 믿고 과격한 행동을 합니다』
  
   펠로소프氏는 군대복무 경험이 없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받는 예비군 훈련기간 중 암벽을 타다가 떨어져 척추를 다쳤고 2년 동안 병원에서 누워지냈다고 한다. 그의 걸음걸이도 약간 저는 형편이었다. 그는 예비군으로부터도 면제를 받았다고 했다. 펠로소프氏는 『지난 5년 동안 처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래도 평화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 정도의 국가건설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고생 많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족 중에 최소한 한 명 이상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여섯 번에 걸친 중동 전쟁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그는 또 『이상하게도 한국인과 유태인은 습관과 전통이 정반대인데도 잘 통한다』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일본, 이스라엘-중국, 이스라엘-타이 사람들 사이에선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을 한국인에 대해 느끼고 있어요. 일단 가슴을 열고 나면 쉽게 친해지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요. 눈을 마주 보면서 말할 수 있는 사이라고 할까요. 한국을 상대로 한 사업도 잘 되고 있고 여기와 있는 한국 대사(朴東淳)나 직원들은 1년밖에 안되었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맹렬하게 활동하고 있어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북한 수용소 문제 고발은 유태인의 도덕적 의무』
  
  
   펠로소프氏를 만나기 전 준비한 자료가 있었다. 月刊朝鮮 1995년 3월호에 실린 「인간멸종의 현장」 북한 정치수용소 경비원 安明哲씨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영어로 번역한 자료였다. 이 자료를 펠로소프氏에게 건네주면서 기자는 당부했다. 『아우슈비츠는 지금도 북한에 살아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피해자인 유태인은 이 문제를 세계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자료를 꼭 장인 어른께도 드려주십시오』
  
   펠로소프氏는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이런 학살 만행을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을 고발하는 일은 유태인의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맡겨두십시오』
   펠로소프氏는 기자가 『내일 라빈 총리를 인터뷰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충고를 해 줄 것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를 그분이 끌고 가도록 하면 안됩니다. 질문 하나에 대해서 20분간 강연을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귀하는 너무 예절 바르게 하는데 여기선 무례가 필요합니다. 대답을 중단시키고 질문공세를 펴도 됩니다.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해요. 가만있으면 강연만 듣다가 끝입니다』
  
  
   기갑부대 추모의 밤 행사장에서
  
  
   1996년 11월2일 밤에 기자는 텔 아비브 교외에 잇는 기갑부대 기념관으로 구경을 갔다. 이날은 기갑부대 전몰자 추모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全기갑부대 출신 제대장병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관광버스 수십 대를 타고 全國에서 고참들이 모여들었다. 아내, 아들, 딸을 데리고 온 사람들이 많아 거대한 가족모임이었다. 야외극장에서 열린 추모의 행사는 예술적인 조명 아래 경건하고도 환상적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기자는 주로 장군 출신들이 앉아 있는 스탠드에서 지켜보았다.
  
   기갑부대 합창단과 기갑부대 출신가족의 어린이 합창단이 무대 양쪽에서 「우리가 역사를 만들었다」같은 軍歌를 부르고 戰死者의 자녀들이 횃불을 붙이는 동안 전시된 탱크는 빨간 조명을 받아 밤하늘을 배경으로 불타고 있었다. 전쟁과 군대를 소재로 한 예술공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품에 안긴 꼬마의 천진한 표정이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에제르 와이즈만 대통령과 라빈 총리도 기자와 같은 구획 안에 앉아서 구경했다. 두 사람이 입장하고 퇴장을 해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특별한 경호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날 기자는 中東戰史에 나오는 영웅들을 여러 명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눴다. 기자는 전쟁기록물을 많이 읽어 그들의 이름은 익은 터였다. 4차 중동전쟁 때의 공군사령관 베니펠레드 장군, 4차 중동전 때 수에즈 운하를 渡河하여 이집트 군의 배후를 차단한 탱크부대 지휘관 데이비드 쇼발 장군도 만났다. 쇼발 장군은 『對戰車 미사일은 초속 100 m 로 날아오기 때문에 육안으로 포착하면 피할 수 있는데 세 발이 동시에 날아와 피격당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자는 지난 5월의 첫 이스라엘 방문 때 「戰士의 일기-이스라엘에서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탱크 지휘관의 전투記」란 책을 한 권 샀었다. 그 주인공 아비돌 카할라니 장군(51세)도 만났다. 준장으로 예편한 그는 노동당 국회의원이 돼 있었다. 다부지게 생긴 그는 라빈 총리와 사이가 나빠져 있었다.
  
   자신의 책 서문을 쓴 사람이 라빈이었는데도. 그 이유는 이스라엘-PLO 간의 오슬로(Ⅱ)합의가 국회에 회부되었을 때 라빈 총리의 직접 설득도 뿌리치고 否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카할라니는 4차 중동전쟁 때 골란高原 전투에서 탱크부대 대대장으로 참전, 결정적 전투에서 10여 대의 탱크로 수십 대의 시리아 戰車부대를 격퇴,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기자를 안내했던 샌디氏는 『내일 라빈 총리에게 카할라니와 만났다는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기자는 民軍 일체의 이날 행사를 보면서 왜 한국에서는 전쟁영웅들이 많은데도 잊혀지고 먼 나라 이스라엘의 전쟁 영웅은 본 기자까지도 알 정도로 기억되는지, 또 軍과 民을 역사속에서 융합시키는 이런 행사 대신에 軍과 民 사이에 담을 쌓으려는 움직임만 득세하는지를 곰곰 생각했다.
  
  
   [라빈의 최후 인터뷰]
  
   『1966년에 한국 첫 방문… 그때 벌써 무언가가 이뤄지고 있었다』
  
  
   1995년 11월3일은 금요일이었다. 토요일은 유태교에선 휴일이니 우리의 토요일에 해당하는 금요일에는 대부분의 사무실이 휴무였다. 기자는 이날 오후 1시10분쯤 국방부로 들어갔다. 선물과 취재 노트, 카메라, 녹음기가 든 작은 가방 세 개를 들고 들어갔다. 국방장관실에 갖고 들어갈 때까지 가방에 대한 검색은 한번도 없었다. 믿는 사람에 대한 편의제공은 좋지만 만약 내가 테러리스트라면 라빈 총리의 목숨은 내 것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이 드는 것이었다.
  
   장관실 입구엔 전화받는 비서가 한 사람 있을 뿐 손님이 앉아 기다릴 만한 공간도 의자도 없었다. 복도 한쪽을 파서 만든 곳이 대기실인데 문도 없고 소파만 양쪽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하루 전에 만났던 해외담당 부국장 요시 드라즈닌氏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선물이 포장돼 있는 것을 보고는 검색은 생략하고 『총리 앞에서 풀라』는 것이었다.
  
   오후 1시30분쯤 페레스 외무장관이 서류철을 들고 혼자서 장관실에서 나왔다.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기분 좋은 대화를 나눈 듯한 느낌을 주었다. 페레스는 라빈 장례식 弔辭 때 이날 나누었던 대화를 소개했다.
   『(그 사건) 하루 전날 우리는 단둘이서 만났었지요. 처음으로 당신은 일이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실토하면서 평화에 대한 의무감이 우리를 혹사하고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수행비서의 안내를 받으면서 집무실에 들어선 것은 오후 1시35분쯤이었다. 키가 기자와 비숫한(176cm쯤) 라빈 총리는 청색 양복 차림이었다. 맞은편 벽 쪽에 놓인 책상 뒤에 서서 기자를 맞았다. 기자는 목례를 하고 다가가서 악수를 한 뒤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담판하듯 맞 對面하는 형국이 되었다. 명함을 꺼내놓고 朝鮮日報와 月刊朝鮮에 대한 설명을 해갔다.
  
   『여기 다 적혀 있군요』
  
   라빈 총리는 책상 위에 놓인 한 페이지짜리 타이프 메모를 보면서 다소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本論으로 들어가자는 뜻인 것 같았다. 기자는 준비해간 질문지를 꺼내 놓고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라빈 총리측에서는 한번도 사전에 질문 요지를 미리 보여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두 손 모으고 단정한 자세
  
  
   ―귀하가 지난해 12월에 한국을 방문한 이래 양국 사이엔 눈부신 교류·협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을 말씀해 주시지요.
  
   『1966년에 저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당시 저는 참모총장이었고, 한국은 朴대통령의 영도 아래서 1950년대의 戰亂을 딛고 막 국가再建을 시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작년, 28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본 한국은, 그 변화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위대한 경제 발전에 의해 貴國은 이제 선진 공업大國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三星그룹 부회장을 비롯한 대기업들의 경영자들을 만났습니다만, 金泳三 대통령에 의해서 시작된 개방정책에 따라, 또 우리가 추진하는 평화정책(Peace Process)의 덕분이기도 합니다만 한국과 이스라엘은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난 2년 사이에 이스라엘 시장에는 자동차, 전자제품 등 수천 가지의 한국 상품들이 등장했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통점이 많습니다. 군사력과 테러의 위협 속에서 국가생존을 유지해야 하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 中東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는 극단적인 세력을 돕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아주 부정적인(Very negative)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북한과의 오랜 대결 관계를 평화적으로 해소하려고 경제협력을 제의하는 등 노력을 해 왔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 책임은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공산전체국가(extreme Communist totalitarian)인 북한에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에서 우리 두 나라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이지만 위협 속에서도 평화 공존을 이룩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을 위한 계기를 마련한 우리에게 이제는 아랍국가들도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카사블랑카 회의에 이어 며칠 전 열린 암만 中東정상회담은 이 지역에 새로운 경제 협력의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한국과 이스라엘의 협력에도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2주전 UN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본인은 金泳三 대통령을 1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기쁨과 영광을 가졌습니다. 거기서도 兩國이 달성한 협력적 성과를 확인하고 그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라빈 총리는 남보라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예상대로 수수한 차림이었다. 얼굴은 붉었고 안경 뒤의 눈은 푸르고 깊었다. 응시하는 눈매이지만 위협적인 눈매는 아니었다. 正坐(정좌)하여 책상 위에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단정한 자세로 제스처 없이 천천히 말했다. 바리톤의 굵직한 목소리였다. 30초에 한 번씩 입술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가 서둘러 거둬들이는데 그 웃음이 그렇게 천진난만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장례식에서 손녀가 나와 추도사를 하면서 『이제는 할아버지의 그 반쪽 미소(half smile)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자는 바로 그 웃음을 떠올렸다. 라빈 총리는 한국의 경제성장, 특히 공업력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을 「Great Industrial Power」라고 부를 때는 기자도 기분이 좋았다.
  
   특히 金泳三대통령에 대한 인간적 호감이 두 나라 급속접근의 바탕이 돼 있다는 느낌이 왔다. 두 사람은 첫눈에 반했던 것 같다. 金泳三 대통령은 작년 訪韓한 라빈 총리와의 만찬 때 예정시간을 훨씬 넘기면서 대화를 계속했고, 다음날 아침에 DMZ 시찰을 떠나게 돼 있던 라빈 총리를 다시 아침식사에 초대, 대화를 계속했었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이란 등 中東지역에 수출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 건 이외에 북한이 이란의 금전적 도움을 받아가면서 核개발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북한 핵개발의 이해 당사자가 아니므로 그 문제에 대해서 판단할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선 북한은 中東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一役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이란과 시리아에 스커드 C 地對地미사일을 팔고 있는데 사정거리가 500 km나 됩니다. 북한은 이 두 나라에 대해서 미사일 생산기술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란은 더 긴 사정거리를 가진 「노동」 미사일을 매입하려고 하는데, 그 사정거리는 1300 km나 됩니다. 이것은 이란에서 이스라엘에 이르는 거리입니다. 북한은 이란을 도우려고 작정한 세계 유일의 국가입니다. 사정거리 300km 이상의 미사일과 그 개발기술을 외국에 파는 것은 국제조약 위반입니다. 북한은 이스라엘의 敵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이란과 북한이 과연 核개발에도 협력하고 있느냐 하는 데 대해선 이스라엘에서도 이견이 있는 듯했다. 전날 구티 몰 해외담당 차장에게 물었더니 그는 『북한의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이 국내용으로만 보기에는 너무 크다』면서 『이란에 플루토늄을 팔 목적을 갖고 있을 개연성이 있다』고 했다. 한국과 이스라엘이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양국이 북한의 核개발 및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공동의 위협으로 의식하고 있어 대응책에서 협조할 수 있는 소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이스라엘은 북한과 직접 교섭하여 그들의 미사일 판매를 저지하려고 했습니다. 장래에도 북한과 직접적인 교섭을 시도할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습니까.
  
   『그런 접촉이 여기저기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일이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제시한 조건은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것이었고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그 문제를 취급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좋지 않을 때는 다시 직접 교섭을 시도할 수도 있겠네요.
  
   『미국과 한국 등 여러 국가들이 협력하여 만들어낸 對 북한 정책과 배치되는 정책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독립된 정보시스팀 운영해야 독립국가 자격』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셨을 때 총리께서는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기술과 한국의 공업 능력을 결합하여 세계로 진출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 뒤로 많은 발전이 있었습니다. 코트라(KOTRA)도 이스라엘에 사무실을 열었고 이스라엘-한국 경제 협력위원회를 만들기로 했으며 삼성그룹도 참가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한국 상품은 여기서 잘 팔리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족한다면 그것도 좋은 거지요』
  
   駐이스라엘 朴東淳 대사에 따르면 그해 들어 8월 말까지의 한국-이스라엘 교역액은 4억5000만 달러. 전 해 전체의 4억3000만 달러를 벌써 넘어섰다고 한다. 對 이스라엘 수출이 2억7000만 달러. 이스라엘로부터의 수입은 1억7600만 달러. 다음 해엔 양국 무역액이 1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다.
  
   ―귀하는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무기의 해외판매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고 믿습니다. 貴國의 라파엘社(Rafael)는 지금 한국군에 정보수집 분석 시스팀을 팔기 위해 미국 회사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정보분야는 매우 민감한 부문으로서 미국 정부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이스라엘은 다 같이 미국과 친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방위산업 분야에서 서로 경쟁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미국에는 없거나, 있더라도 우리가 더 값싸게 (한국에)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결정은 한국이 하는 거지요. 결국은…. 미국도 우리 같은 작은 나라가 도전해 오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독립되고 큰 나라이니까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귀하께서는 독립된 정보 수집 분석기능은 주체적인 국가안보 정책의 수립 집행에서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십니까.
  
   『독립국가의 독자적인 安保전략을 위해서는 독립된 정보수집 체계는 필수입니다. 나라마다 필요한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외국에 (정보판단을) 의존할 수도, 해서도 안 됩니다』
  
   故人이 돼 버렸지만 라빈 총리의 이 발언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군은 美國에 의존해 오던 전략정보 수집을 독자적으로 하기 위해서 독립 시스템 구축을 시도하고 있었다. 미국은 외국회사가 정보시스팀을 한국에 팔려는 데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1995년 11월 초에 서울에 왔던 페리 美국방장관도 우리측에 대해서 미국제를 사도록 부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은 정보만은 어느 나라에 의존해서도 안되며 특히 해석된 정보를 외국에서 받는 것은 아예 받지 않는 것보다 못할 때가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해석된 정보는 제공자에 의해 왜곡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1973년 10월 中東전쟁을 왜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미리 감지하지 못했었던가를 반성한 결과 이스라엘 정부는 주요정보는 장관이 가공되지 않는 1차자료 상태에서 직접 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6월에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 충돌사고로 침몰, 실종된 이스라엘 선원들에 대한 구조 및 수색작업을 사고 뒤 4개월이 지나도록 계속 하고 있는 이스라엘 정부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실종, 납치, 인질로 된 국민들의 송환에 대해서 그토록 끈질깁니까.
  
   『우리는 작은 나라입니다. 한국은 인구가 4500만이지만 우리는 500만 남짓 합니다. 따라서 생명의 존엄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체라도 모셔와서 가족들이 애도할 수 있는 무덤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입니다』
  
   ―그렇다면 유명한 이스라엘 간첩 코헨(기자注―시리아 고위층 속에 침투해 활약하다가 사형당한 전설적인 이스라엘 간첩)의 유해송환을 시리아와의 평화협상 때 조건으로 제시할 생각입니까?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에 우리는 조건을 붙이지 않습니다. 시리아는 남부 레바논에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헤즈불라 같은 테러조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일단 대화를 하면서 시리아에 테러조직에의 지원 중단을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이것이 참기 어려운 일이지만 평화를 위해선 인내가 필요합니다』
  
  
   『테러에는 「눈에는 눈」式으로 대응한다』
  
  
   ―며칠 전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가 말타에서 암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모사드의 관련설에 대해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총리께서는 올해 초 지하드를 지칭하여 『우리는 당신들을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다. 어떤 국경도 당신들의 보호막이 되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접 국가의 主權도 침범할 각오가 돼 있다는 뜻입니까.
  
   『1993년 이후, 이스라엘-PLO 사이의 평화 협상이 진전되어 갈수록 지하드와 하마스 조직에 의한 테러는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동차 폭탄으로, 수류탄으로, 자살공격법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모든 테러 희생자의 70%가 이스라엘人들입니다. 그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평화협상에 반대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해온 방식 그대로 그들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지하드 두목을 누가 죽였는가는 먼 장래에 역사가 알려 주겠지요. 우리는 그 가증할 테러 조직의 두목이 제거된 데 대해서 애도할 입장은 아닙니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아시아 국가로 보지 않고 서양문화권의 나라로 보고 있습니다. 東아시아의 유교문화권 나라들과 앞으로 더 가까워지려면 유교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지구촌化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나라도 고립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종교, 문화, 역사가 다른 나라들은 그 다른 뿌리(Roots)에 따라 각각의 개성을 살려가면 되는 것이지 그것이 교류와 협력의 장애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이란은 국제테러리즘의 인프라스트럭처』
  
  
   ―중동에선 지금 평화협정과 회교 원리주의라는 2大 흐름이 상호 충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협상이 결국 회교 원리주의를 압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호메이니 없는 호메이니주의」가 지금 中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원리주의자들은 곳곳에서 온건한 이슬람 국가의 정권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죽이려 한 자가 누구입니까.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유태인들을 爆死시키고, 뉴욕의 세계무역회관 빌딩을 폭파한 자가 누구입니까. 한편으로는 지하드와 하마스 조직을 지원하면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이 세력의 원천은 바로 이란입니다. 이란은 국제 테러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를 깔아놓고 있습니다.
  
   수단은 이미 「호메이니 없는 호메이니주의」에 넘어가 테러의 기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제리가 원리주의자의 손에 넘어가면 이란型의 국가가 될 것으로 봅니다. 이란은 이 모든 테러의 배후세력일 뿐 아니라 재래식, 非재래식 무기를 다 갖춘 군사강국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인 협력과 대처에 의해서만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누구도 페레스와 나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
  
  
  
   ―여기 들어오기 전에 페레스 외무장관을 보았습니다만 두 분이 서로 그렇게 비난하면서도 요사이는 또 그렇게 협력을 잘 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거의 50년 동안 서로를 잘 알고 지내오면서 기복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평화협상에 있어서 같이 협력하고 있습니다. 왜냐? 그것이 바로 평소에 우리가 이룩하려고 꿈꾸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파트너입니다. 우리는 이제 과거의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정책을 위해서 이렇게 만나고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손잡고 이 지역에 새로운 시대, 즉 평화와 경제적 번영이 전쟁과 정치적 갈등을 덮어버리는 그런 새 장을 열고 말 것입니다』
  
   라빈은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할 것』이란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그 다음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으리란 것을 알 턱이 없는 그로서는 최상급의 표현으로써 페레스와의 우정을 설명한 셈이다. 라빈 총리가 앉은 뒷벽엔 이갈 알론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알론은 라빈의 직속선배로서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팔마하 특공대의 창설자였다. 라빈과 알론은 형제처럼 친밀했다고 한다.
  
   라빈과 페레스는 자신들을「뜻을 같이 하는 사이」, 즉 同志라고 정의했다. 라빈은 생애에 있어서 친구로서의 알론과 동지로서의 페레스가 있었던 것이다. 국방장관실엔 소파가 없었다. 예루살렘의 총리 집무실엔 최근에 소파가 들어왔다고 한다. 방의 크기는 서울의 구청장 방보다도 작았다.
  
   ―1966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朴正熙대통령을 만났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죠.
  
   『저는 당시 이스라엘軍의 참모총장으로서 군인의 입장에서 한국을 보았습니다. 판문점과 DMZ를 방문했어요. 그런 가운데서도 위대한 경제발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감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경제발전이야말로 한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지난번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金泳三 대통령께서는 우리 내외를 위해 만찬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자리에서 그분이 말씀하기를, 민간인으로 대통령이 된 것은 30 몇 년 만에 자신이 처음이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모총장 출신으로서 수상이 된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제가 처음」이라고요』
  
   이때 처음으로 라빈 총리가 소리내 웃었다.
  
   朴대통령에 대한 그의 평가는 경제발전이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定說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서 라빈 총리는 경제를 이야기할 때 특히 즐거운 듯했다. 그가 주도한 중동평화협상의 목적은 평화정착 이후에 중동국가 간의 경제교류·협력을 진전시켜 이 지역에 경제 붐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집트 같은 나라는 이스라엘이 군사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경제적 覇權을 지향하고 있다고 의심할 정도이다.
  
  
  
   『아예 정당이 돈을 거두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돈에 대한 귀하의 철학을 듣고 싶습니다.
  
   『정치활동에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난 2년간 더욱 엄격한 법을 제정하여 돈을 아예 쓰지 못하게 해버렸습니다. 새로운 법에 따라서 내년 선거에서는 정당이 정치헌금을 받는 행위가 일체 금지되는 대신에 정부가 선거자금을 각 정당에 배분할 것입니다. 이제는 어떤 정치인도 기업인에게 「여보게, 우리 정당을 위해 돈을 좀 보태주게」란 이야기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유슈비츠는 50년 전에 없어졌지만 지금 북한에는 살아 있습니다. 金日成 부자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는 3代가 다 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곳에서 살아나올 가능성은 없습니다. 임신하면 죽입니다. 아유슈비츠와 꼭 같은…(이때 라빈 총리가 질문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약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분명히 해둘 게 있습니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과 人權문제를 같은 수준에서 비교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유태인 학살은 나치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人種멸종 정책입니다. 人權문제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中東평화협상에서 人權문제를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팔레스타인 당국에 민주주의를 하라, 人權을 개선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선거를 하도록 했습니다. 선거를 통해서 민주화가 진행되면 人權문제도 개선되겠지요. 이집트에는 적어도 선거가 있고 의회가 있으며 야당이 있습니다. 시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야당도, 선거도 없어요. 이런 형편에서 人權문제를 일률적으로 거론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 유태인들이 당했던 살육을 일반적 人權문제의 하나로 본다든지 같은 수준으로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된 겁니다』
  
   ―북한 수용소도 人權문제가 아니라 生과 死의 문제입니다. 더구나 북한은 아유슈비츠의 관리 방식을 모방해서 그대로 써먹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태인 학살에는 비교하지 마세요. 절대로…』
  
   기자의 작전은 실패였다. 기자는 북한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와 비교하여 설명하면 라빈 총리가 흥미를 더욱 느낄 것이고, 그때 준비해간 북한수용소 관련 英文 자료를 건네주면서 『유태인이 앞장서서 국제사회에서 여론을 일으켜 달라』고 부탁할 셈이었던 것이다. 인터뷰는 이것으로 끝났다.
  
   기자는 『준비한 질문 중에서 남은 것을 두고 갈 테니 서면으로 답변해달라』고 부탁했다. 라빈 총리는 선뜻 승낙했다. 기자는 분청사기(접시)를 선물로 내놓았다. 라빈 총리는 네 겹으로 된 포장지를 일일이 다 뜯어 책상 위에 벌여 놓는 것이었다. 라빈 총리가 답례로 준 것은 「예루살렘의 스카이라인」이란 사진집이었다. 첫장에 명함이 붙어 있었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는 『한 번 더 한 번 더』라고 했다. 아마도 실수로 사진이 안 나왔을 때를 대비해서 몇 번 더 셔터를 눌러놓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기자는 『다음은 서울에서 다시 뵈었으면 한다』고 인사했다.
   라빈 총리는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선물로 받은 사진첩에는 1992년 6월에 라빈 총리가 예루살렘 해방 25주년 기념식에서 한 연설의 일부가 실려 있었다.
  
   〈예루살렘을 삶의 중심적 요소로 여겨온 한 사람으로서, 이 도시를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던 戰友들의 한 동반자로서, 저 벽에다가 이스라엘의 깃발을 꽂기 위해 돌격한 IDF 병사들의 참모총장이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기원합니다. 수천년에 걸친 念願과 고통을 지켜보았던 이 도시에서, 우리와 敵들 간의 분쟁이 종식되기를, 그리고 황금의 도시 예루살렘에서 평화의 조약이 서명되기를〉
  
  
   라빈과 朴正熙
  
  
   라빈총리의 인터뷰를 마친 기자의 느낌은 잘 늙은 할아버지와 만난 기분이었다. 라빈의 경력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과 권력게임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총성과 함성 속에서 평생을 보낸 인물답지 않게 조용하고 무뚝뚝하면서도 자상했다. 멀리서 보면 라빈은 카리스마의 化身일 수밖에 없는 생애이다. 가까이서 느낀 라빈은 그냥 따뜻했다.
  
   인터뷰를 할 때 그는 視線을 기자에게 고정시킨 채 한번도 정좌한 자세를 풀지 않았다. 먼 나라에서 온 기자에게 정성을 다하려는 자세였다. 그때 기자는 故 朴正熙 대통령과 비슷한 인간형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정한 몸가짐, 과묵함, 내성적 성격, 부끄럼, 멀리서는 무섭고 가까이서는 따뜻한 이미지.
  
   朴대통령은 1960년대 말에 이스라엘의 농업기술과 키부츠 운동, 그리고 自主국방 의지를 배워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특히 1968년 1·21 청와대습격기도사건 이후엔 연설 때마다 이스라엘의 鬪魂(투혼)이 언급되고 있다. 1973년 석유파동 이후 한국은 아랍국가들로부터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외교관계를 냉각시켜야 했다. 朴대통령은 내심 이런 입장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1966년 라빈과 朴대통령의 만남이 어떠했는지는 상세한 정보가 없지만 라빈 총리도 朴대통령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이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쉘 나임 前 駐韓 이스라엘 대사에 따르면 라빈 총리는 작년 12월 訪韓 때 누군가가 朴正熙 대통령을 비판하는 견해를 전하니까 이렇게 변호하더라고 한다.
   『국가 지도자는 그 사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남긴 결과물에 의해 평가받아야 한다』
  
   최근의 이스라엘-한국 접근은 한때 헤어졌던 옛 애인의 재회와 비슷하다. 그 재회의 章에서 金泳三 대통령과 라빈 총리도 서로 인간적인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흐름 속에서 기자도 흐뭇한 마음으로 국방부 건물을 떠날 수 있었다.
  
  
   택시기사로부터 들은 悲報
  
  
   기자는 라빈 총리와 인터뷰를 끝낸 그 길로 텔 아비브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하루를 보낸 뒤 4일 밤 9시에 대한항공편으로 이륙, 5일 오후 5시에 김포에 도착했다. 오후 6시쯤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車中에서 기사로부터 라빈 피살 소식을 들었다. 1주일 전에 예고된 그 대중집회에서 그것도 동족에게 당했다! 가족의 죽음 이외에 그만한 충격은 나에겐 10·26 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기자는 비행기 안에서 인터뷰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對話를 정리했었다. 아직도 귓전에 울림이 큰 그 영감의 목소리가 남아 있는데 죽었다니! 시간을 계산해보니 기자가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이륙해서 솟아오르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라빈 총리는 피격되었던 것이다. 기자와의 인터뷰가 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肉聲토로가 되었다는데 생각이 미치니 기자는 이 만남의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하여 좋은 기사로 승화시켜야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죽음까지도 朴正熙와 라빈은 비슷했다. 동포에 의한 저격. 라빈 저격범도 한때는 라빈을 영웅으로 숭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빈은 총구와 流血로써는 항구적 평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요르단江 西岸과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人, 그것도 원수 중의 원수였던 PLO에게 돌려주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建國정신을 대표해온 시온주의자들은 ①유태국가 ②민주국가 ③유태인의 역사적 고향땅(유데아-사마리아로 불린 구약 성경시대의 땅 지금의 요르단江 西岸)을 완전히 차지한 국가, 이런 국가를 창건하기를 원했다.
  
   1948년에서 1967년까지 시오니즘은 본래 목표의 두 가지만 달성된 상태였지만 그렇게 살았고 그 속에서 번영을 계속했다. 이스라엘은 유태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유태국가였고 또 민주 국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유태인 고향땅의 일부만 차지한 국가였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으로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그 결과 시오니즘이 본래부터 추구했던 유태인의 역사적 땅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후 이스라엘인들은 또 다시 근본적인 질문에 마주쳐야 했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하나의 선택 방안은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를 포함하여 모든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고 유태 국가로 남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人 거주자들을 영구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리적 탄압을 통해 그들이 결코 정치적 권리를 얻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선택은 요르단강 西岸과 가자 지구를 포기하고 민주국가로 남는 것이었다. 이것이 라빈의 선택이 됐다. 요르단江의 西岸을 구약 성경시대의 유데아-사마리아 지역으로 부르며 신성시하는 보수적 유태교인들과 이 지역에 이주해 살고 있는 13만명의 정착민들에겐 라빈이 저주의 대상이 돼 버렸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대전환에서 라빈은 제물로 바쳐졌다.
  
   그의 사위 펠로소프氏가 말했듯이 유태인들(다른 나라의 대중도 마찬가지이지만)은 라빈을 하나의 도구로 쓴 셈이다. 나라를 세우고 지킬 때는 戰士로서,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는 祭物로서 쓰여졌던 사람이 라빈이었다. 아낌없이 준 나무, 四肢가 다 잘려나가고 남은 밑동까지도 지친 행인에게 빈 자리로 내 놓는 그런 나무였던 것이다.
  
   아쉘 나임 前 駐韓 이스라엘 대사는 라빈의 죽음이 중동평화에 기여한 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 70여개 나라에서 頂上들이 조문을 왔습니다. 미국에선 前 현직 대통령 4명, 전·현직 국방부장관들, 상하원의 의장·총무,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국가들의 지도자까지 왔습니다. 이 자체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中東평화에 대한 세계 여론의 일치된 지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젊은층이 특히 라빈의 죽음을 애도했고 침묵하던 다수는 침묵을 깨고 나왔으며 우익과격세력은 守勢에 몰려 변명에 급급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라빈 만큼 신뢰를 받는 지도자를 다시 찾아볼 수 없게 된 점은 크나큰 손실입니다. 어차피 그의 죽음은 建國세대의 퇴장을 의미합니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이스라엘과 한국의 협력관계가 외교·군사·경제·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발전되고 있으므로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이 없을 것입니다』
  
  
   『난 괜찮아』
  
  
   기자는 라빈 총리의 장례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얼굴 세 사람이 보였다. 페레스, 펠로소프, 요나단…. 기자는 라빈 총리의 피살에 대해 총리 대리로 페레스만큼 진정으로 통탄한 이도 없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로 싸우고 화해한 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시기에 평화협상의 후원자를 잃은 페레스의 침통한 얼굴을 보니 라빈과 비슷한 인상이었다. 부부처럼 라이벌도 오래 싸우다가 보면 얼굴이 닮아가는 모양이다.
  
   라빈으로선 페레스가 죽음의 곁에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으리라. 그가 들고 뛰다가 쓰러진 평화의 횃불을 확실하게 이어받아 달릴 同志가 지키고 있었으니까. 朴正熙의 죽음 뒤엔 혼란이 왔으나 라빈의 죽음 뒤에도 이스라엘은 질서 정연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힘일 것이다. 비상사태가 닥쳤을 때는 한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 다수에 바탕을 둔 민주체제가 더 강한 것이다.
  
   라빈의 장례식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연설문 담당 보좌관 에이탄 하버氏의 연설이었다. 라빈은 토요일 밤의 집회때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불렀다. 그는 가사를 적은 쪽지를 갖고 있다가 정사각형으로 정확히 접어 와이셔츠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쪽지는 피가 뭍은 채 발견되었다. 하버는 라빈 총리를 아버지처럼 모셨다고 말하면서 그 쪽지를 들고 나와 낭독했다.
  
   아침해를 맞으며/
   평화의 노래를 부릅시다/
   기도의 속삭임이 아닌/
   평화의 노래를 부릅시다/
   우렁찬 목소리로/
   평화의 날을 기다리지만 말고/
   그날을 향해 나아갑시다
  
   라빈 총리 승용차의 운전기사 다마치氏에 따르면 라빈은 병원으로 옮겨지는 車中에서 의식을 잃기 전에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한다.
   『아프긴 한데 그렇게 심하진 않아』
   가슴을 관통 당한 朴正熙의 마지막 말 『난 괜찮아』를 연상시키는 라빈의 마지막 肉聲.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국가를 위해 소진시켜버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었을까?
  
  
  
   이츠하크 라빈(1922∼1995)의 생애
  
   ▲이츠라크 라빈은 1922년 3월1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학교를 졸업했다. 모세 다얀이 이끄는 하가나에 들어간 그는 1941년 팔마하 특공대의 시리아 침투 작전에 참가했다. 소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1945년 아틀리트 수용소에서 200명의 불법 이주자들을 구조해 낼 때 副책임자로 작전에 참가했다. 이듬해 6월 그는 이른바 「검은 토요일」 사건에서 영국 당국에 의해 수백명의 유태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6개월 동안 라파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47년 10월 라빈은 팔마하의 副사령관이 되어 알론 바로 밑에서 일했다. 1948년 봄 그는 하렐 여단의 사령관이 되어 포위된 예루살렘에 길을 뚫는 나손 작전을 지휘하여 그 이웃 도시인 카타몬과 세이크야라를 해방시켰다. 알론의 지휘하에서 라빈은 로드 전투와 라믈레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남부전선 작전사령관으로서 네게브 사막과 에일라트市에 대한 반격 작전인 호레브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1946년 로도스 섬에서 아랍 국가들과의 휴전 협정에 조인하는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라빈은 1953년 영국의 참모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54∼1956년 훈련소장을 지냈으며 준장으로 승진되었고, 1956∼1959년에는 북부지구 사령관으로, 1959∼1960년에는 작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그는 1961년 참모차장에 임명되었고, 1964년 1월1일 제7대 이스라엘 국방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6일전쟁」 때 라빈은 참모총장으로서 이스라엘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1968년 1월1일 轉役과 동시에 駐美대사에 임명되어 미국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73년 봄 라빈은 이스라엘로 귀국하여 노동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1973년 크네세트(이스라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74년 4월 골다 메이어 내각 때 노동장관에 임명되었다.
  
   ▲1974년 6월2일 골다 메이어의 사임 이후 이스라엘 국회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이끄는 신정부를 승인했다. 라빈이 총리직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정부는 경제력 강화, 사회문제 해결, 이스라엘 軍 증강에 역점을 두었다. 1974년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 시리아와의 철수 협정이 조인되었으며, 이어 1975년에는 이집트와의 잠정 협정이 맺어졌다. 1976년 6월 라빈 정부는 엔테베 작전을 통해 공중 납치된 에어 프랑스기의 승객들을 구조했다.
  
   ▲1977년 4월 라빈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977년 5월 총선 이후 1984년 9월 거국내각의 성립 때까지 라빈은 크네세트에서 야당인 노동당 소속으로 외교국방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84∼1990년의 擧國내각에서 이츠하크 라빈은 국방장관을 지냈다. 1985년 1월 그는 이스라엘 軍 병력의 레바논 철수를 제안했으며 이스라엘의 북부 국경선 지대에 있는 정착촌들에 평화를 보장하는 안전지대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1992년 2월 노동당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전국 예비 선거에서 이스라엘 노동당 당수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총선에서 노동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2년 7월 라빈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서 제 25代 이스라엘 내각을 구성했다. 그는 총리로서 평화협상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업적을 올렸다.
  
   ▲1993년 9월13일 백악관 정원에서 열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기본원칙 선언 서명식에서 라빈 총리는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화해의 악수를 나누었다.
  
   ▲1994년 10월26일 이스라엘-요르단 국경에서 그는 이스라엘-요르단-팔레스타인 잠정협정의 서명자였다.
  
   ▲라빈은 1994년 12월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1995년 11월4일 (한국 시간 11월5일 오전) 텔 아비브의 말체이 이스라엘 광장에서 열린 평화지지 집회에서 연설 직후 암살되었다. 그의 유족으로는 누이 라헬, 부인 레아, 자녀인 달리아와 유발, 그리고 손주 세 명이 있다. 라빈의 자서전 「서비스 노트북」은 1979년에 출간되어 영어와 불어로 번역되었으며, 에이탄 하버가 정리한 「이츠하크 라빈의 각국 지도자들과의 대담집」은 1984년에 출간되었다.
  
  
  
  
  
[ 2010-12-03, 16: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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