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을 도운 건 프랑스
프랑스의 국가 지도부는 2차 대전중 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建國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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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10월 말 프랑스 수상과 국방장관, 이스라엘의 수상(벤 구리온)과 국방장관(모세 다얀)이 파리 근교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두 국가 지도부는 수에즈 운하를 점거한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을 상대로 3國(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공동작전을 벌이기로 합의하였다. 이스라엘이 먼저 이집트를 공격,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또 다른 역사적 합의가 이뤄졌다. 프랑스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에 원자로를 지어주고 우라늄을 공급해주기로 한 것이다. 디모나는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기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가능하게 한 이 합의는 이스라엘이 영국과 프랑스에 협조한 代價이기도 하였다.
  
  英佛과 이스라엘의 이집트 공격은 미국과 소련이 공동으로 개입하는 바람에 전투에선 이기고 외교에선 지는 결과를 빚었다. 이스라엘은 핵무장한 소련이 위협을 해오는 데 대하여 핵무기를 갖지 못한 이스라엘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을 잊지 않았다.
  
  어느 나라이든 핵무기 개발은 국가 지도부의 장기간에 걸친 계획과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은 1948년 建國 직후부터 핵개발을 추진한다. 建國의 아버지 벤 구리온이 직접 이 사업을 지도하였다. 서른 살에 국방부의 국장으로 임명된 시몬 페레스(현재 대통령)가 핵개발을 실무적으로 주도하였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핵개발을 지원해줄 나라는 프랑스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 소련 영국은 이스라엘에 무기 판매를 금지한 상태였다. 建國 직후 무기를 팔던 체코는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親蘇 정책을 쓰자 이스라엘의 宿敵인 이집트에 무기를 팔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국가 지도부는 2차 대전중 反나치 저항운동, 즉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나치의 대학살을 딛고 建國한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더구나 프랑스도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의 핵시설로 기술자를 파견하였다. 수십 명의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프랑스 사람들과 같이 핵개발, 특히 핵폭탄 설계와 실험에 참여하였다.
  
  1960년 2월13일 프랑스령인 알제리의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프랑스 최초의 지하 핵실험이 있었다. TNT 환산 6만5000t의 폭발력을 보였다. 대성공이었다. 핵전문가들은 이날의 핵실험으로 두 나라, 즉 프랑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사실상 核무장국이 되었다고 말한다. 프랑스의 核 기술을 이스라엘이 공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核실험 없이 核폭탄을 만든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 2011-01-08, 16: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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