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25일의 카이로
안내자는 "오늘은 경찰의 날이고 공휴일이므로 공항으로 가는 길이 잘 뚫릴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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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가 폭발하다!
   -6000년만에 처음으로 백성이 들고 일어나 政權을 바꾸고 국민으로 昇格(승격)하였다.
  
  
  
  기자의 3大 피라미드는 카이로 시내와 사막 경계면에 있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평균 무게 2.5t인 석회암 230만 개를 쌓은 것이다. 총무게가 600만t이다.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모하메드 알리가 지은 모스크. 알리는 알바니아人이었다.
  
  이슬람 모스크와 현대식 건물의 공존은 오늘날 이집트 사회의 斷面이다.
  
  
  카이로 시내에서 보이는 피라미드
  
  
  카이로 시내에서 보이는 피라미드
  
   *1월24일: 카이로 시타델에서
  
   마호메드가 추종자들을 이끌고 메카에서 메디나로 옮긴 서기 622년이 이슬람의 출발점이다. '헤지라'라고 불리는데 우리 식으로 번역하면 '大長征'이다. 마호메드는 632년에 죽고, 이슬람 세력의 대팽창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군대는 634년에 아라비아 반도를 다 점령하고, 642년에 비잔틴(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로 침공, 정복에 성공하였다. 기독교 국가이던 이집트 사람들을 이슬람으로 改宗시켰다. 아직도 이집트 인구의 약10%는 '콥틱 크리스찬'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인들이다.
   지난 1월24일 나는 이집트 여행의 마지막 날을 카이로에서 보내면서 시타델에 올라갔다. 언덕 위 요새인데, 십자군을 무찌른 살라딘이 서기 1176~1183년에 지었다. 쿠르드족인 살라딘은 아유비드 왕조를 세워 이집트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요새는 그 뒤 약700년간 이집트 왕궁으로 쓰였다. 아유비드 왕조-맘루크 왕조-오스만 터키 지배-모하메드 알리 통치가 이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특히 맘루크 기마軍團(군단)은 1260년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인 아인 잘루트에서 西進(서진)하는 몽골의 騎兵(기병)과 결전, 섬멸시킴으로써 칭기즈칸 세력이 아프리카로 건너오는 것을 저지하였다.
   카이로의 시타델은 '모하메드 알리 요새'라고도 불린다. 이집트 근대화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알리가 1828~1848년 사이 지은 모스크가 서 있다. 이 터키식 모스크는 카이로에서 가장 돋 보이는 건물이다. 모스크 앞에서 서쪽을 보면 거대한 피라미드 두 개가 희미한 배경그림처럼 솟아 있다.
   모하메드 알리는 알바니아 출신으로 오스만 터키군에 복무한 장군인데, 1801년에 오스만 터키의 황제로부터 나폴레옹 군대가 물러난 이집트를 재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충성스러운 알바니아 군대를 이끌고 카이로에 와서 이집트의 총독이 되고 곧 왕조를 만들었다. 쇠퇴하는 오스만 터키의 황제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조건을 붙여 알리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리는 도전적인 토착 맘루크 세력 때문에 고전하였다. 맘루크는 투르크족 계통의 노예戰士 집단인데, 한때 권력을 찬탈,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와 인근 지방을 300년간 통치한 용맹한 세력이었다. 1811년 알리는 맘루크 지도자 수백 명을 시타델의 연회장으로 초청하였다. 이들이 골목을 지날 때 양쪽에 매복시켰던 군인들이 일제 사격, 달아난 1명만 빼고는 다 죽였다. 그날 밤 알리는 별동대를 지방으로 보내 맘루크 영주들을 제거했다. 맘루크 지도자들을 죽인 골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모스크 안엔 1849년에 79세의 나이로 죽은 알리의 무덤이 있다. 그는 토지를 국유화하고, 군대를 근대화, 해군을 건설했으며, 섬유업 등 산업을 발전시키고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그가 세운 왕조를 타도한 것은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으로서 1952년의 일이었다. 이집트人 국가지도부가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서기 전 525년 페르샤가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 2477년만에 처음이었다. 아랍 민족주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이 자유장교단이 배출한 네 명의 대통령이 나기브,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이다.
  
   *1월25일: 카이로는 경찰의 날
  
   다음날은 1월25일로 '경찰의 날'이었다. 안내자는 "오늘은 공휴일이므로 공항으로 가는 길이 잘 뚫릴 것이다"고 했다. 2000만 인구와 700만 대의 자동차가 붐비는 카이로의 거리는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곳으로 惡名(악명)이 높다. 이날은 30분만에 공항에 도착, 오전에 출발하는 대한항공기를 타고, 타슈켄트를 경유,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운명적인 25일 오후에 무바라크의 30년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시위가 카이로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구글 직원인 와엘 고님은 페이스북에 경찰에 맞아죽었다는 할레드 사이드를 추모하는 코너를 만들었다. 수많은 회원들이 생겼다. 몇 사람의 주모자가 1월25일을 시위날짜로 잡은 것은 '경찰의 날'에 경찰의 무자비성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시위를 꾸민 이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전단지를 통하여 홍보를 하긴 하였으나 많이 모여야 수천 명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날 타흐릴(해방) 광장에는 수만 명이 집결, 진압 경찰을 몰아붙였다. 이 현장을 취재한 CNN 카이로 지국장 벤 웨드만 기자는 직감적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보안경찰이 30만 명을 넘는 이집트에서 경찰이 몰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직전에 튀니지의 젊은들이 봉기, 23년간 독재를 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낸 사건이 이집트의 젊은이들에게 상상력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무바라크 정권은 1월27일 反정부 시위를 막기 위하여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진 시민들이 카이로 시내로 자연스럽게 몰려들도록 초대한 것이다. 이집트는 8500만 인구의 52.3%가 25세 이하의 젊은이들이고 실업자가 많다.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하는 이들이 40%이다. 그럼에도 全국민의 76%가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정권은, 현대의 정보기술로 무장한 이 불만층을 향하여 불씨를 던진 셈이다. 더구나 카이로는 인구밀집도가 세계최고이고, 일자리가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좋은 조건이다.
   나는 귀국한 직후부터 밤만 되면 CNN과 BBC 채널 앞에서 이집트 시위를 지켜보았다. 이집트 혁명처럼 생생하게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이 두 위성방송은 다른 프로를 거의 중단하고 이집트 시위 보도에 총력을 쏟아부었다. 경찰의 진압력은 젊은 시위대에 의하여, 이집트 국영방송과 신문의 편파보도는 국제언론의 집중적인 보도 앞에서 無力化되었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카이로에 사는 교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집트 시위와 비슷한 민주화 시위를 1980년대에 취재한 경험도 사태를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은 이 부문에선 이집트의 선배이다. 내가 이집트 혁명을 觀戰(관전)하면서 쓴 일기를 소개한다.
  
   *2011년 1월27일 아침 7시: 부패는 독재의 毒이다
  
  8 0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이집트는 매년 불어나는 130만 명의 인구를 감당해야 한다. 정부가 일자리를 만드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은 며칠간의 여행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인구가 2300만 명이나 되는 카이로의 도로엔 車線(차선)도, 신호등도, 횡단보도도 없다. 車, 사람, 당나귀, 오토바이, 자전거가 公有(공유)하는 도로이다. 세계에서 가장 혼잡스러운 도로일 것이다. 교통정리는 경찰관들이 수신호로 한다. 신호등을 만들면 이들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 이집트의 가장 큰 외화수입원은 관광이다. 정부는 관광경찰을 두어 외국 관광객을 보호한다. 23명의 한국인 여행객이 탄 버스엔 두 명의 이집트인 가이드가 배치되었다. 나일강 크루즈船(선)에도 관광경찰이 총을 들고 탄다. 관광버스가 아부 심멜 신전 등 유명 관광지로 갈 때는 무장한 경찰이 소형 트럭을 타고 앞장을 선다.
   지금 反정부 시위대는 무라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5選(선)의 무바라크는 출마하지 않고 아들을 출마시킬 것이란 예상이었는데, 이번 시위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이집트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6300달러이다. 정경유착으로 貧富(빈부)격차가 심하다. 특히 무바라크 측근들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이번 시위의 한 원인이었다.
  
   北아프리카 국가들의 政情불안을 몰고 온 튀니지의 경우도 벤 알리 대통령 一家(일가)의 부정 부패가 국민들을 거리로 불러낸 主(주)원인이었다. 벤 알리 대통령은 지난 20여년간 튀니지를 가장 성공적인 아프리카 국가로 만든 사람이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은 2009년에 튀니지를 아프리카에서 가장 경쟁력이 높은 나라로 뽑았다. 1인당 국민소득도 8000달러를 넘어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최상위급이었다. 벤 알리 대통령은 16세까지의 의무교육, 여성의 사회참여 장려 등 개혁조치도 성공시켰다.
   이 모든 업적에도 불구하고 一家의 부패, 청년층 실업의 증가, 분신자살, 위키리크스의 폭로가 알리 대통령을 國外(국외)탈주자로 만들었다. 권력자들의 부패는 毒藥(독약)이다. 가장 부패한 권력자인 김정일의 운명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1월28일 아침 8시: 흔들리는 中東의 지도국가
  
   카이로를 중심으로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反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오늘도 최대규모의 시위가 예고되어 있다. 30년간 독재를 하고 있는 무바라크 대통령은 1960년 李承晩 대통령이 직면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에 있다. 불만이 많은 失業상태의 청년층이 시위를 주도한다. 대통령은 80세를 넘어 결단력이 약해졌다. 권력층의 부정부패와 경제난이 결합되어 국민불만이 퍼지고 있다. 시위가 격화될 때 군인과 경찰이 발포명령을 들을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독재정부는 진압군이 발포를 거부하면 무너진다. 前 IAEA(국제원자력 기구) 사무총장으로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오스트리아에서 귀국, 시위에 참여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가 反정부 시위의 구심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부는 내심 親美노선을 충실히 걸어온 이집트의 안정을 원하지만, 무바라크 몰락 이후를 겨냥한 路線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 시위에 학생들이 가담할지 여부가 주목된다. 1908년에 開校한 카이로 대학은 학생수가 20만 명에, 교직원수가 1만2000여 명이다.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여러 나라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서 공부한다. 중동의 人材 양성소이다.
   카이로 대학의 유명한 졸업생으론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전 유엔 사무총장, 야셀 아라파트 PLO 의장(사망), 배우 오마 샤리프, 이라크의 독재자 후세인(사망), 엘바라데이, 알카에다의 2인자 알 자와이리 등이 있다.
   전략적 영향력면에서 가장 중요한 중동 국가인 이집트의 政情불안은 중동뿐 아니라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집트는 외교적으로,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중동의 지도국이라 할 만하다. 인구도 9000만 명에 육박, 중동 최대국가이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사다트, 무바라크를 거치면서 60년간 이집트를 이끌었다. 한때 제3세계 운동의 지도국이었고, 이스라엘을 상대로 네 번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도 선두였다. 중동이 극단적으로 기울지 않도록 중심을 잡은 나라이기도 하다.
   중동 여러 나라의 지도층을 양성한 親美국가이면서도 이집트 사회는 알카에다, 무슬림형제단 등 과격세력의 사상적 온상이 되었다. 거대한 역사, 문화, 인구,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이집트의 政變은 1979년 이란의 호메이니 혁명처럼 세계사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1973년 10월에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기습으로 시작된 제4차 중동전쟁이 석유파동을 불러 한국의 進路에도 결정적 작용을 했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동 과격세력의 모태인 무슬림 형제단이 이번 시위에 가세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세력이 정권을 잡는 사태가 발생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물론 오늘의 이집트는 개방적이고 다양하여 호메이니식 神政체제가 들어설 가능성은 낮다.
  
   *1월29일 새벽 2시: 불타는 여당 당사
  
   CNN은 카이로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夜間 시위를 생중계하고 있다. 전국에 통행금지가 선포되고 군대가 배치되었는데도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軍 장갑차를 에워싼 군중이 함성을 지르고 장갑차 위에 올라가도 군인들이 속수무책이다. 1960년 4.19 학생혁명 때 보았던 장면과 흡사하다. 그때 출동한 군대와 戰車를 시민들이 에워싸고 환영하면서 한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군인들은 발포를 하지 못하였고 李承晩 대통령은 하야했다. 이집트 사람들은 경찰은 싫어하지만 군인들에겐 우호적이다. 시위대는, "국민과 군대는 하나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카이로 시내에 있는 여당 국민 민주당의 본부 빌딩이 불타고 경찰서가 공격을 받고 있는 가운데 총성도 들린다. 4.19 때도 어용신문사가 불타고 경찰서가 공격을 받았으며 자유당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집이 습격을 당하였다. 힐러리 클린턴 美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이집트 보안군과 경찰이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는 것을 우려한다"면서 이집트 정부에 대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개혁으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촉구하였다. 1979년의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후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을 많이 지원하였던 미국이 한 발 빼는 모습이다.
   CNN, BBC는 카이로 사태만 다루고 있다. 이집트 당국은 反정부 시위를 막기 위하여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켜버렸다. 이집트에 사는 한국인 知人에게 국제전화를 해도 연결되지 않았다. 30년간 鐵拳통치로 이집트를 이끌었던 82세의 무바라크 대통령이 곧 對국민연설을 할 것이라고 한다. 이 연설이 그의 정치적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이집트에서 군대는 가장 잘 조직된 세력이며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면 군대가 前面에 나서서 무바라크 대통령을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 사태를 수습할 가능성이 있다. 바햐흐로 카이로에서 혁명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中東 최대국가가 요동치고 있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이슬람권 혁명이 어디까지 번져갈지 주목된다. 김정일도 떨고 있을 것이다.
  
   *1월29일 오전 9시
  
   1961년 4.19 혁명 때처럼 이집트도 군대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軍 수뇌부는 고민할 것이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시위대 편에 설 것인가? 그리하여 무바라크를 몰아내고 사태를 수습할 것인가? 계속 무바라크에 충성을 다하여 시위를 武力으로 진압할 것인가?
   약47만 명의 병력을 가진 이집트 군대는 歷戰의 용사들이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조직이다. 장교단은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를 국가지도자로 배출하고 그들을 지지하였다. 장교들에 대한 특혜도 많다. 군은, 1952년 이후 60년간 이집트를 주도한 세력이다.
   1978년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화해한 이후 미국은 이집트 군대에 약350억 달러의 원조를 해주었다.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도 이는 사태수습을 위한 것이지 집권은 어려울 것이다. 82세의 무바라크는 부정부패, 老齡, 경제난, 특히 젊은층의 실업사태로 생긴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것 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집트 사태는 호메이니 혁명을 부른 1979년의 이란사태와는 성격이 다르다. 이란사태는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는 팔레비 정부를 뒤엎은 종교혁명이었다. 이집트 사태는 국민들이 나은 생활과 자유의 확대를 주장하는 민주화 운동의 성격이 강하다. 이집트는 이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방되고, 다양한 사회이다. 무바라크 정부, 군대, 시위대도 이란처럼 폭력적이지 않다.
   미국은 무바라크 정권을 이을 새로운 세력이 反美, 親이란 노선으로 기우는 것을 가장 경계할 것이다. 中東의 最大 最古 국가인 이집트가 이란이나 알카에다 편에 서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미국뿐 아니라 세계의 재앙이 된다.
   카이로는 인구가 2000만 명을 넘는다. 인구밀도가 세계최고이다. 평소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할 일 없이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 많다. 이런 密集인구가 시위대로 변하고 있다. 튀니지도 그랬지만 이집트 시위대도 이슬람적 가치의 관철을 내세우지 않고 있다. 장기집권과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뿐이다. '무바라크 물러나라'는 구호뿐이다. 요구가 간단한 만큼 강력한 메시지이다.
   무바라크가 과감한 민주화조치를 취할 것인가,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 아니면 사태의 장기화로 혼란이 계속될 것인가? 세계가 숨을 죽이면서 지켜보고 있다.
  
  
   *1월30일 새벽: 카이로 교민의 전화-"집 바깥에서 총성이..."
  
  
   카이로에서 10여 년 간 여행업에 종사하는 40代 한국 교포 李모씨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 30일 새벽 두 시, 카이로 시간으론 저녁 7시였다. 그는 通禁 조치 때문에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카이로 교외의 주택가인데, 한국인들과 외교관들 및 상류층이 많이 사는 곳이다.
   “조금 전에 집 바깥에서 총성이 10여 발 들렸습니다. 감옥에서 죄수들이 탈출하였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주민들이 일종의 自警團을 조직, 칼과 쇠파이프 같은 걸 들고 순찰을 돌더니 보이지 않는군요. 저도 두렵습니다. 경찰이 숨어버리니 약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알자지라 방송에 이집트 박물관 약탈 장면이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폭도들이 이 세계적 박물관에 들어가 유물이 들어 있는 유리상자를 깨고 보물들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박물관으로 군의 특공대가 투입되었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 앞 해방광장은 시위대가 모이는 중심이다. 지금은 이집트 여행철이다. 李씨는 자신이 안내하기로 하였던 여행단의 한국 출발을 중지시켰다고 했다. CNN의 보도에 따르면 외국 여행객들은 카이로 공항에 묶여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는 것이다. 많은 항공사들이 카이로행을 취소시키고 있다.
   李씨는 이번 시위로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심이 사라진 것이 가장 놀라운 사태전개라고 했다.
  “경찰은 권력층의 앞잡이로서 국민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이들에 대한 분노가 이번 시위의 한 요인인데, 시위대가 與黨 당사를 불지르고, 경찰서를 습격을 하면서 국민들이 용기를 얻은 것 같습니다. 내무부 청사를 공격하다가 총을 맞고 죽은 시민의 屍身을 국기로 덮어 이고 다니는 장면이 알자지라 방송에 보도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우리는 두렵지 않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과 공포심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사태는 아무래도 오래 갈 것 같습니다.”
   그는 시위를 촉발시킨 것은 빈곤이라고 진단했다.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도 청년층과 함께 빈곤층이 많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충분히 먹지 못하여 배고픈 국민들이 10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실업률은 9%라고 발표되지만 실제론 30% 정도 될 것입니다. 월급을 가지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나라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데 이들이 들고 일어나 무바라크를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든 셈입니다.”
   요컨대 이집트 국민들이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부르짖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하나 다행인 것은 시위대가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이슬람 극단세력의 선동에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李씨는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 100명 이상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면서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에 이어 유명한 유적 도시 룩소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고 했다.
   “정부가 오늘 아침부터, 어제 불통시켰던 휴대 전화를 다시 열었지만 인터넷은 열리지 않습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불통시킨 게 오히려 국민들을 자극한 것 같습니다.”
   시위 사태가 장기화되고 경찰이 無力化되면 약탈사태가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지금은 公共건물만 공격을 받지만 은행이나 부자촌이 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회질서가 무너지면 군대가 사태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다.
   李씨와 통화해보니 카이로 사태가 CNN과 BBC를 통해서 본 것보다 훨씬 심각하고 광범위한 소요라는 느낌이 들었다. 82세의 老독재자가 극복하기엔 너무 큰 사태가 아닐까? 불똥이 중국이나 북한까지 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세계의 독재자들이 떨고 있다. 독재자들의 치명적 약점은 물러나면 죽거나 감옥行, 또는 망명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1월30일 오후: 30년만에 처음으로 부통령 임명
  
   어제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反정부 시위 속에서 부통령에 국가 정보기관장인 오마르 술레이만을 임명하였다. 그는 또 내각이 총사직한 直後 새 수상에 前 공군장성 아하메드 샤피크를 임명하였다. 술레이만도 장성 출신이고 군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통령, 부통령, 수상이 모두 장군 출신이다. 무바라크는 군대를 앞세워 사태를 수습할 생각인 모양이다. 이집트는 지난 30년간 계엄령체제이고, 별도의 계엄령 선포 없이 군대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수에즈 등 全國의 주요도시에 진주하였다.
   부통령이 된 술레이만은 무바라크가 이디오피아를 방문할 때 장갑차에 타도록 강권, 암살자들이 쏜 총탄을 막도록 한 적도 있다. 그는 親美派이고, 무슬림 형제단 등 이슬람 과격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이며,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협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무바라크는 올해 대통령 선거에 아들을 내세울 생각을 한 듯하나 이번 시위로 세습의
   꿈을 접지 않을 수 없었다고 판단된다. 그는 사다트 대통령이 1981년10월에 암살되었을 때 부통령이었기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데, 그 뒤론 부통령 자리를 비워두었다가 이번에 되살린 것이다. 술레이만 부통령을 후계자로 선택, '명예로운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영국-프랑스-독일의 국가 지도부가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민주적 개혁을 촉구하고 있으나 이들 나라는 무바라크 정권이 무너지고 이슬람 과격파가 집권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무바라크를 향하여 물러나라는 식의 노골적인 압력은 넣을 수 없다.
   중동의 평화가 그래도 이 정도로 유지되는 것은 宿敵관계이던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총리가 카터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1978년에 평화협정에 합의한 덕분이다. 미국과 유럽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으로 이 평화체제가 깨지는 사태가 오지 않을까 걱정한다.
   징병제를 채택한 이집트 군대는 경찰처럼 권력층의 하수인이 아니라 국민의 군대라는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시위대도 군대에 정면도전하는 일을 삼간다. 하지만 시위가 계속되고 무바라크에 대한 군부 지도층의 신뢰가 약화될 때 군대가 무바라크에 계속 충성을 바칠지, 시위대 편에 설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이번 이집트 사태는 젊은층의 높은 실업률, 식품 등 생필품 값의 폭등, 권력층의 부패, 貧富격차, 인근 튀니지 사태의 영향,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한 동원, 무바라크의 장기집권에 대한 싫증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일어난 것이다. 불만에 꽉찬 젊은층과 빈곤층에게 무바라크 一家의 부정부패는 특히 좋은 표적을 제공하였다.
   후진국에선 경제가 발전할 때는 집권층의 부정부패를 문제시하지 않지만 경제난으로 빈곤층이 타격을 입으면 이 문제가 부각된다. 한편 경찰이 일단 물러나 부분적으로 무정부상태가 조성되자 일부 시위대가 폭도화하여 약탈을 일삼고 있다. 이것이 제어되지 않으면 중산층 이상은 反정부에서 反시위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이집트는 이란이나 이라크와 달리 사회가 다양하고 개방적이며 무지막지한 학살의 전통이 약해 온건한 방법으로 위기를 극복할 것이란 낙관론도 강하다.
  
   구경하는 군대
  
   어제 카이로에선 출동한 군인들이 시위대를 편드는 상황이 여러 군데서 목격되었다. 네 대의 장갑차가 시위대 앞에 서서 내무부로 진격하기도 하였다. 시위대는 장갑차를 모는 군인들에게 내무부 청사를 지키는 경찰에 발포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향하여 고무탄과 최루탄을 쏘았고, 군인들은 구경만 하였다.
   군인들과 시위대가 어울려 사진을 같이 찍고 戰車와 장갑차 위에 시민들이 올라가는 모습도 보였다. 시위대가 군인들의 양해를 받고 여러 대의 戰車에다가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혁명이다" "무바라크는 안 돼"와 같은 구호를 썼다. 한 군인은 마이크를 들고 "나는 무슨 일이 생기든 관심이 없지만, 여러분들이야말로 변화를 일으키는 주인공들이다"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카이로에 진주한 군인들은 시민들이 通禁시간을 무시하고 시위를 해도 이를 방관하였다.
   이집트는 지난 30년간 경찰의 통제下에서 움직인 사회였는데, 그 경찰이 갑자기 사라지니 일종의 진공상태가 생겼다. 이 진공속으로 폭도들이 들어가 약탈을 일삼고 있다. 무바라크는 경찰력을 철수시킴으로써 이런 혼란상태를 조장,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강경진압의 명분을 쌓으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무바라크와 이집트의 운명이 군대에 달렸다.
  
   *1월31일 오전: "무바라크는 데드 맨 워킹"
  
   카이로에서 10년 이상 여행업에 종사해온 李鍾熙씨에게 어제 밤 두시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카이로 교외 마디 주택가의 아파트에 머물고 있었다. 요즘이 카이로 관광 絶頂期(절정기)인데 시위 사태로 여행단의 한국 출국이 중단되어 걱정이라고 했다. 이집트 관광 명소인 피라미드 및 이집트 박물관 관광도 중단되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는 주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쳐서 외부인들의 침입을 막고 있다. 군인들도 배치되어 안전하다”고 했다.
   적어도 네 곳의 감옥에서 죄수들이 탈출하였다고 한다.
   “정부 측에서 고의로 탈출시켰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찰이 주민들을 겁주기 위하여 組暴을 이용해왔는데, 이들을 시켜 감옥 문을 열게 하고 죄수들을 도망 가게 했다는 겁니다. 혼란을 조성하여 무정부 상태로 만든 뒤 다시 경찰과 군을 투입, 진압하겠다는 음모라는 거예요.”
   李씨는 “이집트는 중동에서 휴대전화가 가장 많이 보급된 나라인데, 이게 이번 사태를 확산시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했다. “몇 년 전 통계에 따르면 휴대전화가 6000만 대나 있답니다. 당나귀를 타고 가면서 휴대전화를 거는 이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李씨는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데 이들이 귀국편 비행기를 잡을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어제 카이로 공항에 갔다 온 사람이 말하더군요. 사람들로 붐벼서 10 미터 움직이는 데 30분 걸렸다고. 도저히 수속을 밟을 수 없어 돌아왔다더군요. 한국의 商社(상사) 주재원과 가족들은 두바이, 런던 등지로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일요일이지만 이곳에선 일하는 날입니다. 시내에 나가 봤더니 한산해요. 그 붐비던 거리에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은행과 상점은 문을 닫았고, 남자들은 가족을 남겨놓고 출근하기가 불안한 상태입니다.”
   튀니지와 이집트는 중동 국가 중에선 경제 개방정책을 잘 쓴 나라로 꼽힌다. 개방정책으로 주민들의 기대가 높아졌고, 이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게 이번 사태의 한 원인이란 분석도 있다. 李씨는 경제개방이 주민들의 불만을 增幅(증폭)시켰다고 했다.
   "개방으로 생긴 利權을 무바라크의 가족이나 권력층에서 독점해버렸습니다. 貧富격차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는 이번 사태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을 훨씬 넘을 것이라고 했다. “어제 내무부 청사로 들어가려던 시민들이 많이 죽었습니다. 경찰이 철수하였다고 하지만 私服을 하고 숨어서 사격을 한 것 같습니다.”
   지중해변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특히 시위가 극렬한 데 대하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곳은 원래 반골기질이 강합니다. 反정부적 성향의 지식인이 많고 인구밀집 지역입니다. 어제는 죽은 이들의 장례식이 있어 더욱 격앙되었습니다.”
   어제 밤 CNN 좌담에 출연한 한 중동 전문가(미국인)는 “무바라크는 끝났다”면서 그를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이라고 표현하였다. 다른 전문가는 “군대가 과도정부를 구성, 공정한 선거를 통하여 민주화의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문제는 그 군대 지휘부가 지금과 같은 괴물체제를 만든 장본인이고 무바라크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 점이다”고 했다. 좌담회 사회를 본 시사논평가는 "미국이 비공개적으로 무바라크에게 명예롭게 물러나라고 압박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독재자에겐 '명예로운 은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죽어서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1979년의 이란 사태 악몽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카터 대통령은 人權을 앞세우면서 親美 독재자 팔레비를 몰아내는 데 협조를 했는데, 등장한 것은 팔레비보다 더 지독한 反美 전체주의자 호메이니였다. 호메이니 정권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카터를 모욕주어 그가 再選되지 못하도록 했다. 무바라크가 물러난 뒤에 등장할 정권이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과격세력이라면 이집트-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평화협정이 깨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스라엘 정부가 숨을 죽이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이유이다.
  
   *1월31일 오후: 무바라크와 북한
  
   이집트 최대의 통신회사 오라스콤 회장 사위리스는 지난 23일 訪北(방북), 김정일을 만났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바 있다.
   오라스콤은 2008년 12월, 75%의 지분 투자로 '고려링크'를 설립, 평양에서 휴대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서비스 지역이 북한 내 12개 주요 도시와 42개 소도시로 넓어졌고 가입자수도 작년 3분기 말 현재 30만1천199명으로 전년 同期보다 400% 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이집트를 뒤흔들고 있는 시위사태의 여러 요인중 하나가 오라스콤의 활발한 휴대전화 사업이다. 오라스콤이 지금 북한에 보급하고 있는 휴대전화가 북한 청년들에 의하여 反김정일-反김정은 시위의 도구로 이용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집트와 북한정권의 관계는 특이하다. 1973년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북한 조종사가 미그기를 몰고 이스라엘 공군과 싸웠다. 그때 이집트 공군사령관이 무바라크였다. 카이로에 있는 10월전쟁 기념관을 지어준 이도 김일성이었다. 무바라크는 북한을 네 차례 방문, 김일성을 만났다. 이집트-북한은 거의 동맹국 수준으로 가까워졌다. 이집트는 4차 중동 전쟁 직후 북한에 소련제 스커드 미사일을 주었는데, 북한은 이를 분해, 북한식 스커드를 개발, 중동에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다. 무바라크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사람이 많이 달라졌다는 평을 듣는다. 그는 수년 전부터 아들 가말(48세)을 후계자로 세우는 준비를 해왔다. 가말은 이집트 집권당(국민민주당)의 정책위 의장인데, 시위 사태 이전엔 올해 있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란 추측도 불렀다. 무바라크가 김일성이 김정일을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을 연구한 것 같기도 하다. 김일성을 만나고 와서 그를 본뜨려다가 나라를 망친 독재자로는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와 짐바브웨의 무가베가 있다. 무바라크도 이 科에 속하는 듯하다.
   무바라크와 북한정권은 공동운명체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다면 무바라크가 가면 김정일도 갈 것인가? 이집트 사태가 휴대전화라는 고속도로를 타고 중국을 거쳐 북한정권까지 뒤흔들 것인가? 중동이 흔들리면 한반도도 요동치는 경우가 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과 석유파동, 그리고 1979년의 이란 혁명과 제2차 석유파동은 한국의 경제와 정치를 뒤흔들었다. 朴正熙 정권을 종식시킨 10.26 사건은, 이란 사태로 인한 석유파동과 物價高가 한 원인이었다.
  
   *2월1일 오전: 결정적인 날-"축제 분위기입니다"
  
   나는 요사이 세계사적 사건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흥분을 느낀다. 오늘로 8일째 접어든 이집트의 민중봉기는 1979년의 이란혁명, 1989년의 東歐 공산권 붕괴처럼 세계 전체, 그리고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칠 사건이다. 한국인의 삶도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슬람과 石油로 상징되는 중동 지역의 戰略的 중요성은 중국의 팽창과 北核으로 상징되는 東北亞의 전략적 중요성과 함께 21세기 人類가 直視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중동 最古, 最大 국가인 이집트는 중동의 정치적, 외교적, 사상적, 문화적 지도 국가였다. 이 나라가 불타고 있다. 나는 시위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9일간 이집트를 여행하였다. 내가 카이로를 떠나오는 날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다. 이집트 체험에서 얻은 현장감각을 바탕으로, CNN과 BBC의 현장중계를 지켜 보고, 카이로에 사는 교민과 전화 인터뷰를 하면서 진행중인 대사건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釜馬사태, 10.26 사건, 12.12 사건, 광주사태, 6.29 선언 등을 취재한 경험이 이집트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스라엘을 취재한 경험도 쓸모가 있다. 나는 1995년 11월 라빈 총리가 암살되기 하루 전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고 20여 일 간 이스라엘의 군대와 정치를 취재하였다.
   오늘 최대규모의 평화적 시위가 카이로 해방광장에서 있었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질서 있게, 즐겁게 “무바라크 물러나라”를 외쳤다. 취재기자들은 이 광장의 분위기를 ‘카니발’이라고 표현하였다. 현지에서 여행업을 하고 있는 李鍾熙씨는 “30년간 억눌렸던 언론자유를 행사하는 이들의 표정이 밝고 축제 분위기이다”고 했다. 이집트는 철도, 은행, 학교, 인터넷이 기능정지되고, 主수입원인 관광이 거의 중단된 상태이다. 경제적으론 기절한 형편인데, 사람들은 열정과 희망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어제 이집트 군대는 평화적 시위는 국민들의 권리이므로 군대가 발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집트 군대는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무바라크와 시민 사이에서 심판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군대가 시민들의 무바라크 퇴진 요구를 합법적인 권리라고 선언한 것은, 시민들을 사실상 勝者로 만든 셈이다.
   오늘을 이집트 역사의 ‘결정적인 날’이라면서 ‘백만 시위’를 보도하는 언론과 논평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무바라크는 끝났다”는 것이었다. 이종희씨는 “시민들이 무바라크의 인형을 만들어 교수형을 시키는 퍼포먼스를 했다”면서 “열흘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장면이 현실이 되었다”고 감탄하였다. 이슬람이나 아랍사람들에게 교수형은 가장 치욕적인 사형법이다. 독재자는 국민들 마음속에 공포심을 심을 수 없으면 끝장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지난 8일간의 시위를 통하여 머리와 가슴속의 독재자를 죽인 것이다.
  
  
   "일몰 기도소리 들으면 전율이 온다"
  
  
   오늘의 대시위와 때를 맞추어 소규모 시위가 계속되던 요르단의 國王도 총리를 해임하고 정치개혁을 약속하였다. 튀니지에서 출발한 中東의 激變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前後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작금에 中東을 뒤흔드는 시위의 성격은 상투적인, 反美나 反이스라엘 성향이 아니라 反독재-反부패-反빈곤, 즉 민주화 운동이란 점에서 中東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이젠 무바라크가 물러날 것이냐가 쟁점이 아니라 무바라크가 물러나는 것으로 사태가 해결되겠는가이다. 무바라크가 임명한 부통령과 총리, 장관이 무바라크 없이 사태수습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견해가 강하다.
   독재자의 치명적 한계는 권력을 놓는 즉시, 도망 가거나, 감옥에 가거나, 피살된다는 점이다. 그 현명한 李光耀(이광요)도 권력을 아들에게 물러주었다. 모든 독재자의 고민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도 전, 현직 대통령들이 客死, 피살, 투옥, 자살을 기록하였다. 모든 권력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毒이 묻어 있다. 민주국가에선 그 毒이 치명적이진 않다.
   이번 카이로 시위는 지도자나 主動조직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자연발생적이란 점에서 순수하게 보인다.
   그러나 밤이 되면 추악한 모습이 드러난다. 경찰이 숨어버린 카이로에선 폭도들과 범죄자들이 밤을 틈타 살인, 강도, 약탈을 일삼는다. 이종희씨는 “일몰을 알리는 기도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진다”고 했다. 주택가에선 이때부터 주민들이 조직한 自警團이 활동한다. 애완견을 데리고 나와 수상한 자동차를 수색하고, 죽창이나 부엌칼을 들고 순찰을 하면서 재산과 가족을 보호하려는 활동이 시작된다. 밤만 되면 총성이 울린다. 이종희씨는 “어제밤 우리 집 부근에서 두 명이 죽었다”고 했다. 밤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 언론은 어제, 오늘 이집트 사람들의 시위 방식을 칭찬한다. 파괴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시위를 하다가도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쓰레기까지 치운다는 것이다. 勝者의 여유인가? 뉴욕타임스의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기자는 해방광장에서 만난 이집트 사람들이 "이번 민주화 시위는 튀니지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왜 미국은 우리의 민주화 요구를 지지하지 않는가"라고 따졌다면서 "이집트가 미국에 민주주의를 가르쳐주고 있다"고 했다.
   한 이스라엘 외교관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이집트 사태는 군중이 주도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과 알자지라 방송이 선동한다. 무바라크를 대신할 지도력이 만들어질지 의심스럽다. 이집트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고 경고하였다. 지금 이집트 사람들이 느끼는 희열은 언젠가는 실망이나 배신감으로 바뀔 것이다. 그것조차도 역사를 진전시키는 실망과 배신감이 될 것이다.
   카이로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다. 2300만 인구에 수백 만 대의 자동차가 車線도 신호등도 없는 도로를 메운다. 그럼에도 범죄율이 매우 낮다.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에서 소매치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이슬람이 강한 나라의 공통점이지만 이집트처럼 가난한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오늘 해방광장에서 있었던 시위에 이런 좋은 점이 부각된 모양이다.
   요사이 이집트의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같다. 데모 하기 매우 좋은 날씨이다. 섭씨 50도까지 오르는 여름이었다면 이런 시위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카이로의 연평균 강우량은 40밀리에 불과하다. 이런 기후가 피라미드를 거의 原型대로 보존시켰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는 이집트의 겨울날씨가 시위대를 돕고 있다. 이집트는 나일강이 준 선물이라고 한다. 이번 시위는 하늘이 준 선물인가?
   일본에 이런 속담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이들은 젊은이, 바보, 외부에서 온 사람이다>
   1961년 4.19 학생혁명은 10대, 20대가, 그 1년 뒤 5.16 군사혁명은 30, 40대가 주도하였다.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릴 세력도 이 연령층에서 나올 것이다.
  
  
   *2월1일 오전: 이집트는 이란과 다르다!
  
   이집트 사태가 무바라크 퇴진으로 이어지면 이 나라가 제2의 이란으로 변하여 反美-테러路線(노선)이 중동을 장악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두 나라는 인구가 많고 찬란한 古代 문화와 전통을 共有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지만 다른 점도 많다.
  
   1. 이집트의 군대가 親美的이고, 이슬람원리주의의 영향이 약하며, 국민들의 신뢰를 받는다. 세속적인 터키의 군대를 닮았다. 팔레비 왕 시절의 이란 군부는 독재의 도구라고 국민들의 경멸을 받았고 호메이니 세력에 의하여 간단하게 無力化되었다. 어제 이집트 軍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표현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된 것이므로 정당한 요구에 대한 발포는 없을 것이다"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며칠 전 부통령으로 임명된 슐레이만의 친구인 예비역 장성 마흐무드 쇼크리는 "이집트 군대는 무바라크를 포함한 어느 누구의 꼭두각시도 아니다"고 했다. 이는 이집트 군대의 성격을 잘 표현한 말이다.
   2. 이집트 사회가 개방적이고 다양하다. 이슬람이 90%이지만 기독교도 10%나 된다. 언론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된 나라이다.
   3. 과격 이슬람 세력으로 알려진 무슬림 형제단이 이집트에서 생긴 단체이나 영향력은 약하다. 이번 시위에도 수동적으로 참여하였다. 무슬림 형제단도 시위 초기엔 과격한 이미지를 걱정하여 前面(전면)에 나서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4. 시위의 성격이 종교적이지 않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식이다. 경제난, 취직난, 권력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가 먼저이고,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것은 두 번째이며, 이슬람 원리주의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5. 이집트의 향후 진로는 한국식(全斗煥-盧泰愚式)이거나 터키식이 아닐까 예상한다. 1987년 6월 대시위에 직면한 全斗煥 정권이 6.29 선언을 통하여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 상황의 주도권을 잡고 민주적 방법으로 盧泰愚 정권을 만들어낸 예가 있다. 터키의 名將(명장)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는 이슬람과 정치를 분리하는 근대화 개혁을 하고 이 개혁 노선의 유지를 군대에 맡겼다. 그 후 터키 군부는 사회혼란기나 이슬람 원리주의 득세기에 개입, 상황을 정리한 적이 있다. 터키 사회와 이슬람 정당도 세속화되어 극단적 원리주의 세력이 정권을 專橫(전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6.한국, 터키, 이집트의 공통점은 '신뢰 받는 군대'가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헌법도 軍의 신성한 의무로 外敵에 대한 국방뿐 아니라 內敵에 대한 국가안보를 명시하였다. 군대는 북한군의 침략을 막을 의무뿐 아니라 從北세력의 준동을 제거할 의무를 갖고 있다. 빨갱이들이 집요하게 反軍선동을 하는 것도 국가의 초석이요 간성인 軍의 신뢰도를 약화시켜 赤化공작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음모이다.
  
  
   *2월2일 오전: 너무 늦은 불출마 선언
  
  
   수십만 명이 참여한 사상最大 규모의 시위가 밤늦게까지 카이로 한복판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國營(국영)방송을 통하여 “(오는 9월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는 이집트를 즉시 떠나라는 시위대의 요구를 거절하고 “평화적 정권 이양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했다.
   이 발표를 들은 시위대는 “즉시 떠나라”고 외치며 야유를 하였다. 신발을 벗어 던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바라크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는 구호도 나왔다. 미국 정부는 “올바른 방향의 결정이다”고 논평했지만 카이로의 民心은 “너무 늦었다”는 반응이다.
   이번 시위는 젊은이들이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지도자 없이 조직하였고 무슬림 형제단이나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바라데이는 나중에 합류하였다. 따라서 야당이나 反정부 인사들의 영향력이 매우 약하다. 야당연합은 어제 무바라크 대통령이 즉시 사임하고, 과도정부를 구성, 헌법을 개정한 뒤 새로운 정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무바라크가 시위 사태 초기에 불출마 발표를 하였더라면 民心을 진정시키고 사태수습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단의 타이밍을 놓치니 시위대가 주도권을 잡고 무바라크는 따라가는 형국이 되었다. 국민들은 무바라크가 그동안 여러 가지 詐術(사술)로써 정권을 유지해온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의 약속을 믿지 않는다. 꼭두각시 여당과 허수아비 국회가 주도하는 정치개혁과 개헌을 따라갈 리도 없다. 反정부 세력이 참여하지 않는 정치개혁은 무의미하다. 오바마 대통령도 불출마 선언 직후 성명을 통하여 "권력이양 작업은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압박하였다. 무바라크는 결국 早期(조기)사임, 해외도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어제 시민들은 ‘백만 명의 대행진’이란 구호 아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십 만 명이 참여하는 대시위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였다. 군대도 하루 전에 “평화적인 시위는 국민의 권리이다. 우리는 발포하지 않겠다”고 선언, 시민들 손을 들어주었다.
   시위에 참여한 한 이집트 여성은 CNN에 나와 "나는 비로소 이집트人이란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기자가 "전에는 자랑스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여성은 "그렇다"고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민주화란 결국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는 일이다.
  
   *2월2일 저녁: 예멘 대통령도 불출마 선언
  
   지난 한 달 여 사이 北아프리카와 中東의 이슬람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가 독재자 퇴출의 도미노 현상을 보이면서 확산되고 있다. 튀니지의 23년 독재자 벤 알리가 해외로 도망 가고, 오늘 아침 이집트의 30년 독재자 무바라크가 오는 9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오늘 오후엔 예멘의 32년 집권자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도 2013년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으며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지도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어제 요르단 국왕은 총리를 교체하였다.
   1989년 가을의 동구권 붕괴 사태를 방불케 하는 이런 연쇄반응은 젊은층이 일으킨 것이다. 이 젊은 층은 실업률이 높고 그 불만을 조직할 수 있는 무기를 가졌다. 휴대전화이다. 中東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국민의 70~80%에 이른다.
   민중봉기가 일어난 이집트의 휴대전화 보급률은 全국민의 76.8%이다. 요르단은 101%이다. 알제리 85.7%, 모로코 81.9%, 이란 69.3%, 터키 92.2%. 세계 평균 보급률은 72.6%이다. 중국은 8억4100만 대로서 보급률은 62.8%이다. 2009년에 이란에서 일어난 反정부 시위에서도 휴대전화의 역할이 컸다. 휴대전화 세계 最多 보유국인 중국에서도 휴대전화로 무장한 젊은층의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2월3일 새벽: 親무바라크 시위대의 반격
  
   카이로 현지 시간으로 어제 오후 해방광장에선 稀罕(희한)한 광경이 벌어졌다. 親무바라크 시위대가 수십 마리의 말과 낙타를 타고 광장 안에 모여 있던 反政府(반정부) 시위대 속으로 돌진한 것이다. 騎馬軍團(기마군단)처럼 채찍과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군중 속을 휩쓸고 다니는 모습은 CNN과 BBC를 통하여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이 '기마군단'은 피라미드 관광객을 태워서 돈을 버는 이들이라고 한다. 반정부 시위 이후 피라미드 관광이 중단되어 돈벌이가 어려워진 데 화가 났다는 것이다.
   기마부대의 돌진을 신호탄으로 하여 여러 개의 친정부 시위대가 광장으로 몰려들어 에워싸기 시작하였다. 親정부 시위대는 자발적인 조직이 아니라 무바라크 정권, 특히 비밀경찰이 지원, 조직, 지휘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 이집트 교민은 “경찰이 30만 명이나 됩니다. 이들이 부리는 정보원도 많습니다. 감옥에서 탈출시킨 죄수들도 동원하였다고 합니다. 말과 낙타를 타고 시내까지 들어오려면 며칠 전부터 조직적인 계획을 했다는 뜻입니다. 무바라크가 반격을 시작한 겁니다”라고 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친정부 시위대원들을 잡아 신분증을 압수해보니 사복경찰관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포위당한 시위대는 보도블록과 시멘트 바닥을 깨어 투석용 돌조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해가 있을 동안은 양쪽이 投石戰(투석전)을 했다. 어두워지자 화염병이 등장하였다. 방송은 친정부 시위대가 주로 화염병을 던진다고 보도하였다. 총성도 들린다. 이집트 反정부 시위대는 대체로 평화적 시위를 해왔다. 평화적 시위는 국민의 권리이므로 보장하겠다는 군대는 이 평화적 시위를 폭력으로 막으려는 親政府(친정부) 시위대의 공격을 방치하였다.
   양쪽이 投石戰, 화염병 싸움을 벌이고 사람들이 죽고 다쳐 나가는데도 군인들은 탱크 위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군인들은 친정부 시위대가 광장으로 접근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화염병이 오고간 곳은 이집트 박물관 앞이었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古代 이집트의 보물들이 가득 들어 찬 이 세계적 박물관은 소방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며칠 전엔 폭도들이 들어와 전시함의 유리를 깨고 물건을 가져갔다. 미라를 훼손하기도 하였다. 어제 시위 장면을 분석하면 친정부 시위대가 훨씬 많이 준비하고 잘 조직된 것 같았다. 이들은 반정부 시위를 우호적으로 보도해온 CNN 등 방송기자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집트 국영방송은 친정부 시위대를 ‘親安定(친안정) 세력’이라고 표현하였다.
  
  
   運命은 거리에서 결판 날 것
  
  
   무바라크는 불출마 선언을 하여 일보 후퇴하였으나 2보 전진을 위한 반격을 오늘 시작한 듯하다. 경찰을 동원, 친정부 어용세력을 조직, 반정부 세력과 일종의 市街戰(시가전)을 벌임으로써 “우리 편도 있다. 안정을 원하는 시민들도 많다”는 사실을 과시, 미국 등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즉각 퇴진 압력을 막고, 반정부 시위대를 국내에서 고립시키려는 의도인 듯하다.
   반정부 세력이 시위 8일만에 무바라크 대통령으로부터 불출마 선언을 얻어낸 것은, 세계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에 힘입은 바 크다. 시위대 자체는 무장한 것도 아니고, 조직적이지도 못하다. 야당세력이 健在(건재)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국제여론이 워낙 시위대에 유리하게 돌아가니 미국, 영국, 유엔까지도 무바라크에 퇴진을 압박하게 된 것이다.
   무바라크는 이런 압박을 일단 불출마 선언으로 받아준 다음 반격에 나선 것이다. 무바라크가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나세르의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6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세력이 고분고분 정권을 넘겨줄 리가 없다. 무바라크와 공동운명체가 되어 있는 軍 지휘부, 정보기관, 그리고 체제유지의 일선을 맡았던 수십 만의 경찰, 그리고 안정을 원하는 상류층이 있다. 이번 친정부 시위는 정권적 차원의 그러한 동원력을 과시하였다.
   해방광장에서 새벽까지 이어진 돌과 화염병을 사용한 '市街戰'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일단 승리하였다. 광장을 점령하려는 친정부 세력을 저지하였다. 친정부 세력은 자정무렵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집트 보건부는 이날 충돌로 세 명이 죽고 600명 이상이 다쳤다고 했다. 정권의 뒷받침을 받은 어용세력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위대의 의지를 꺾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집트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다.
   反政府 시위대는, 오는 금요일에 대규모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한다. 화요일 시위 때보다 더 많은 참가가 있어야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날 정권이 또 친정부 시위대를 동원하면 이집트는 內戰 양상을 보일 것이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관장한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무바라크 정권을 압박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무바라크는 정권의 힘을 동원, 국내의 反政府 세력을 물리력으로 억제하기만 하면 반격이 가능하다고 계산할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 반정부 세력과 협상에 나서면 유리한 조건에서 改憲을 하고 선거를 통하여 기득권 세력이 재집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집트의 운명은 카이로의 市街戰에서 결판날 것이다. 반정부 세력은 무바라크의 불출마 선언을 일축하고 “당장 떠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가 먹히려면 매일 수십 만 명의 시위대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시위가 장기화될 때 경제가 마비된다는 점이다. 경제와 생활이 불안해지면 民心이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反政府 세력에 불리하다. 분노와 熱情(열정)이 식기 시작하면 인간은 이기주의로 돌아간다. 이집트 반정부 세력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이집트 사태는 제2막으로 이행하고 있다.
  
   *2월3일 오전: 한국 정부와 애국세력의 태도
  
   CNN은 카이로에서 어제 친정부 시위대를 공격한 反정부 시위대의 정체는 무바라크 정권에 충성하는 경찰이 조직한 ‘국가 지원 시위’였다고 보도하였다. 뉴욕 타임스도 ‘무바라크의 집권당이 돈을 대는 私服 경찰 집단’이 親정부 시위를 주도하였다고 했다.
   해방광장을 장악한 反정부 시위대는 안으로 들어온 수상한 사람들을 잡아 수색해 보니 집권당인 국가민주당 당원증과 경찰관 신분증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고 주장, 압수한 신분증과 당원증을 기자들에게 보여주었다.
   반정부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고 집권당의 黨舍를 불태우자 軍이 출동하면서 경찰은 자취를 감추었다. 숨어버린 경찰은 그 동안 친정부 시위를 준비한 듯하다. CNN에 나온 한 중동 전문가는 “정권유지의 도구였던 경찰을 이용, 친정부 시위인 것처럼 조작하는 건 무바라크의 전형적인 수법이고 무바라크는 그런 방식밖에 모른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의 언론 및 정부는 일제히 친정부 시위대에 의한 폭력을 규탄하였다. 친정부 시위대를 순수한 국민 시위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뉴욕타임스는 친정부 시위대의 反정부 시위대 공격을 무바라크 정권의 탄압이라고 표현하였다.
   무바라크 정권의 大罪는 30년 독재가 아니다. 그렇게 장기집권을 하였으면 경제개발로 失業難(실업난)을 해소하였어야 했다. 인권을 탄압하고, 장기집권을 하고도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젊은층에 희망을 주지 못하였으며, 튼튼한 중산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려 하였고 그 一家와 측근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동정의 여지가 없다.
   한국의 일부 보수층이, 親이스라엘-親美的 관점에서 親北的인 무바라크의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이집트 국민들의 기본적 권리 주장과 민주적 요구를 비판하거나 위험시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다. 더구나 이집트 시위는 공산주의자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주도한 것도 아니다. 애국과 보수는 자유민주적인 원칙과 가치를 떠나선 생존할 수 없다. 한국 정부와 애국세력은 미국 및 유럽 국가의 예를 따라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여야 한다.
  
   *2월3일 오후: 潘基文 총장의 논평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은 그의 지지자들을 몽둥이, 돌멩이, 칼, 화염병으로 무장시켜, 타흐릴 광장에서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끝장내자고 외치는 反정부 시위대를 덮치게 하는 방식으로 반격에 나섰다>
   이는 오늘 뉴욕타임스 기사의 첫 문장이다. 이 신문은 '親정부 시위대와 反정부 시위대가 충돌했다'는 식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친정부 시위대'가 시민 조직이 아니라 무바라크 정권이 조종하는 하수인들임을 분명히 한 文法(문법)이다. 기자가 객관적 사실만 보도하는 직업이 아니라 진실에 육박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기사이다.
   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은 어제 런던에서 영국 총리 데이비드 카메론과 함께 기자들 앞에 서서 이집트 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그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평화적 시위에 대한 어떤 공격도 인정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했다.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反정부 시민들을 공격한 무바라크 정권측의 시위대를 겨냥한 말이었다. 카메론 총리도 "정치적 개혁에 대하여 이집트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도록 명확한 로드맵을 제시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것'을 촉구하였다.
   영국의 BBC 방송은 이집트 사태를 보도하면서 무바라크 대통령의 한 상담역과 인터뷰하였다. 기자는 "무바라크가 순순히 퇴진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이 사람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50代로 보이는 보트로스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바라크는 군인이고 최고사령관입니다. 사령관이 군대를 버린다면 군대는 그를 쏴 버릴 것입니다. 이건 전쟁입니다."
   무바라크가 군부 등 기득권층을 버리고 혼자 살 길을 찾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란 뜻으로 들렸다.
  
   *2월4일 오후: 역효과 부른 정치깡패 동원
  
   불출마를 선언하였으나 ‘즉각 퇴진’ 압박을 받고 있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어제 미국 방송 ABC와 한 인터뷰에서 “나는 대통령직에 질렸지만 당장 물러나면 혼란이 생긴다”고 말하였다. 군중이 또 다른 요구를 할 것이므로 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건전한 야당의 육성을 방해한 독재자의 뒤늦은 한탄이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전제로, 이집트의 권력층에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을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하고, 군부와 관료가 그를 지지하는 방식의 해결책을 제시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군부의 지지를 받는 이 과도정부가 改憲 등 민주화 조치를 한 뒤 선거를 통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다는 시나리오이다. 이에 대하여 술레이만 등 이집트 권력 엘리트층이 난색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무바라크는 부통령직에 있다가 1981년 10월에 사다트가 암살되자 대통령직을 승계하였다.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엔 부통령 자리를 비워놓았다. 대통령이 有故時 부통령이 아니라 국회의장이 승계하도록 헌법을 개정하였다. 부통령에게 힘이 쏠려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계산이었다.
   이집트 군부는 아직 무바라크를 버릴 마음이 없다고 한다. 이틀 전 무바라크가 경찰과 정치깡패들을 동원, 친위 시위대를 조직, 반정부 시위대를 공격한 것은 세계여론을 악화시켜 즉각 퇴진 압력을 증폭시켰다. 특히 무바라크의 졸개들이 CNN 등 취재기자들을 폭행하고 방해하는 행동이 역효과를 부르고 있다.
   이런 가운데 國營(국영)방송 나일 텔레비전의 여기자 아민이 “나는 양심을 팔 수 없다”면서 辭職(사직)하였다. 방송이 정권의 앵무새가 되어 親무바라크 시위를 옹호하는 기사만 쓰게 하는 데 반발한 것이다.
   한편 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매케인 상원의원도 오바마의 對이집트 정책을 지지하면서 무바라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였다. 그는 무바라크 퇴진 후 이슬람 과격세력의 온상인 무슬림 형제단이 정권을 잡을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매케인 의원은 무슬림 형제단이 과격노선을 버렸다는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였다.
   미국과 유럽, 그리고 이스라엘은 무바라크 정권이 총체적으로 붕괴되면 무슬림 형제단이 선거를 통하여 집권, 제2의 이란이 되는 사태를 가장 두려워한다. 무바라크가 계속 버티면 이집트 여론이 과격해지고 反美化될 가능성이 있고 이는 무슬림 형제단의 등장을 위한 조건을 만들 것이라고 본다.
   미국과 유럽이 무바라크 퇴진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가장 큰 목적도 온건한 정부가 등장, 무슬림 형제단을 견제하도록 하기 위한 상황 조성인 것으로 보인다.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가 무슬림 형제단이다. 빈 라덴 등 수많은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 지하드(聖戰) 교리를 교육받았다.
   오늘 反정부 시위대는 또 다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군중이 동원되는가가 중요하다. 反정부 시위대가 무바라크에 충성하는 경찰과 깡패들로부터 해방광장을 지켜내지 못했더라면 상황의 주도권을 빼앗겼을 것이다. 외교가 戰場에서 결정되듯이 정치는 광장과 거리에서 결정되는 수가 있다.
  
   *2월5일 새벽: 20만 명 해방광장을 메우다!
  
   이집트 카이로에선 휴일인 어제 금요일 오후 反政府(반정부) 시위대 약20만 명이 해방광장을 꽉 메웠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 군인들이 광장 주위를 에워싸 친정부 시위대의 접근을 막았다. 경찰이 조직한 친정부 시위대가 규모나 열정 면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눌리는 모습이었다.
   이날 다수가 이슬람 교도들인 시위대는 모스크에서 설교를 듣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음식을 가져와서 나눠먹고 시위 중에 일제히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미국 ABC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시위대가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군대를 동원, 해산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했다.
   한편 경찰이 알자지라 방송 사무실과 무슬림 형제단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무슬림형제단은 불법화되어 있었는데 최근 이집트 정부는 정치적 타결을 위하여 형제단과도 대화하겠다고 했다.
   지난 11일간 약300명이 죽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고 하나, 이집트 사태는 아직 극한상황은 아니다. 시위대나 정부가 극단적인 방법은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우리는 이집트 사람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이집트 사람이 이집트 사람을 향하여 총을 쏠 순 없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민중봉기가 애국심을 고양시켜 백성 수준이던 그들을 주권자인 국민 수준으로 格上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집트의 이슬람 신도들은 90% 이상이 순니파이다. 이란, 이라크는 시아파인데, 순니파가 온건한 편이다. 카이로에 가 보면 여성들이 머리와 몸을 검은 옷으로 감싸는 ‘히잡’을 한 경우가 드물다. 무슬림 형제단도 ‘이슬람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이집트 사회가 상당히 世俗化, 개방화, 다양화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사회는 정치적 격변을 온건하게 수습할 수 있다.
   무바라크가 오늘 물러난다고 해서 군사정권이 무너지는 것도, 이집트가 당장 민주화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意識수준, 생활수준, 교육수준, 자율성, 사회적 제도 등 여러 면에서 성숙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한 이집트 교민은 “누가 집권을 해도 국민들을 啓導(계도)하는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선거인데, 공정한 선거를 한다고 해도 유권자들이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무바라크가 물러나고 개헌을 한 뒤 공정한 선거를 치렀는데, 무슬림형제단이 집권, 反美-反이스라엘-親이란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면? 미국의 對이집트 정책의 최우선적인 고려사항은 무슬림형제단의 집권을 막는 데 있을 것이다.
   무슬림 형제단의 지도자 모하메드 엘벨타귀는 "우리는 무바라크를 대신할 대통령 후보를 선거에 내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우리의 목표는 민주국가를 만드는 것이지 종교국가를 만들려는 게 아니다"고 덧붙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성공시킬 확률은 매우 낮다. 이슬람 국가에선 그 확률이 더욱 낮아진다. 오늘 BBC에 나온 무바라크 지지자는 “무바라크가 물러나면 머지 않아 그를 다시 불러내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고 예언하였다.
   아랍 연맹의 사무총장인 암르 무사씨는 이집트의 가장 유명인사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날 타흐릴(해방) 광장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방송인터뷰에서 무사씨는 "이집트는 절대로 이슬람化되지 않는다. 흐름과 문화로 봐서 리버럴한 방향으로 변모할 것이다"고 했다. 민주화의 길인가, 이슬람화의 길인가? 나도 前者라고 믿는다.
   민주주의는 조용하게, 질서 있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제퍼슨조차도 "자유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다"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집트의 혼란과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빚어내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그것도 시작에 불과하다.
   전쟁이 없으면 국민국가가 만들어지지 않고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고 한다.
   <"No war, no nation state. No revolution, no democracy!">
  
   *2월5일 오전: 새삼 돋보이는 1987년 한국의 선택
  
   이란의 최고 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는 어제 테헤란에서 설교를 한 뒤 이집트의 시위사태가 1979년 이란 혁명의 연장선상이라고 자랑했다. 그는 무바라크 대통령을 이스라엘을 위하여 복무하는 '반역적 독재자'라고 비난, 타도를 선동하였다.
   이집트 시위를 관통하는 국민들의 욕구는 민주적인 것이다. 따라서 호메이니 神政체제를 출범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말살한 1979년 이란 혁명보다는 2009년 이란의 反정부 시위를 더 닮았다.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나선 수백 만의 이란 국민들은 혁명수비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침묵하고 말았다. 이집트 시위가 테헤란에서 일어났다면 하메네이는 발포를 명령하였을 것이다. 이집트 군대는 어제 평화적 시위를 보호하였다. 이란의 군대와 이집트의 군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란과 이집트의 차이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차이이다. 독재는 시민의 私생활에 대하여는 간섭을 하지 않지만 전체주의는 시민들의 양심과 사상과 일상생활까지 통제한다. 이집트의 시위는 1987년 6월 한국에서 벌어졌던 대시위와 닮은 면도 있고 차이점도 있다.
   강력한 군대의 존재, 다양하고 개방적인 사회라는 점에선 닮았지만, 이집트엔 한국에서 있었던 두꺼운 중산층과 강력한 야당이 없다. 6월사태는 6.29 선언을 계기로 改憲과 선거를 통한 평화적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집트 사태를 보면서 새삼 1987년의 한국인이 지혜로운 길을 선택하였음을 확인한다.
   집권세력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인 6.29 선언은 말의 힘으로 역사를 바꾼 좋은 사례이다. 6.29 선언이 민주투쟁 시대를 민주실천 시대로 바꿀 수 있었던 힘은 高潮(고조)된 국민여론을 업었기 때문이다. 유도의 업어치기처럼 자세를 낮추어 밀려오는 여론의 힘을 받아내면서 그 고삐를 잡아챙겨 자신의 승리로 만든 셈이다. 6.29 선언 3일 전에 있었던 대시위엔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참여했으나 全斗煥 정권의 공권력 또한 강력했다. 무교동 거리로 나서던 金泳三씨가 간단하게 경찰에 들려 닭장차에 태워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전 6월18일의 대시위에선 부산시청이 밤중에 몰려든 군중에 의해서 함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全斗煥 대통령은 그 다음날 오전 군부대 출동준비 명령을 내렸고 오후엔 "오늘 저녁에 비상계엄령이 내린다"는 소문이 언론계에 돌았다. 그러다가 릴리 미국대사가 레이건 대통령의 親書를 전달하러 들어간다고 하더니 밤에 "비상조치는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의 민주화 열망과 권위주의 정권의 물리력이 거의 대등한 힘으로 팽팽하게 맞서 있을 때였다. 터지기 직전의 풍선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발표된 것이 월요일의 6.29 선언이었다.
   그 내용이 우선 야당과 국민들이 원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全面的 민주화였다. 직선제 개헌, 언론자유 보장, 金大中씨 사면복권 등 거침 없는 약속이 국민들을 사로잡았다. 순식간에 가장 미움 받던 사람이 가장 사랑 받는 정치인으로 변했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盧泰愚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6.29 선언과 兩金 분열 덕분이었다.
   24년 전 새 시대를 연 6.29 선언, 그 주인공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지금 世人의 관심권 밖에 있지만 역사에서 두 사람이 차지할 자리는 지금보다 훨씬 클 것이다.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전두환의 역할을, 부통령 술레이만이 노태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이집트도 민주화의 길로 들어갈 것이다.
  
   *2월8일 오후: 무너지는 중동의 세습독재
  
   2005년 이집트는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제한하였다. 지방의회 의원 140명 및 국회의원 90명의 추천을 받아야 출마할 수 있게 했다. 사실상 여당 후보, 즉 무바라크 대통령이나 그의 아들 가말만 출마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改憲은 올해 가을 대통령 선거에 아들을 내세우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고 한다.
   아들 가말은 카이로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을 졸업하고, 아메리카 은행 런던 지점에서 6년간 근무한 뒤 사업을 하다가 2000년부터 정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무바라크는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왔다. 아들은 집권당인 국가민주당의 사무副총장, 정책위 의장을 지내면서 내각에 자기 사람들을 많이 심었다.
   1950~60년 中東에선 왕들을 쫓아내는 쿠데타와 봉기가 잇따랐다. 그 뒤에 등장한 독재자들도 새로운 王朝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집권한 지 40년이 넘는 리비아의 카다피는 아들 사이프에게 권력을 넘기고 있다. 시리아의 아사드가 죽고 나서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었다. 이라크의 후세인도 아들 우데이를 후계자로 생각하였다.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아들을 후계자로 삼아 군부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中東 혁명의 바람은 적어도 이집트와 예멘의 세습통치를 무너뜨릴 것임이 확실하다.
   6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가 2011년에 보여주는 정치 및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 경험이 10년도 되지 않았던 1950년대 李承晩(이승만) 정부 시절 한국의 야당과 언론이 누렸던 자유에 훨씬 못미친다. 李承晩 정부 때는 선거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부정선거가 있었지만 이를 폭로하는 언론과 수사하는 검찰이 있었다.
   이집트엔 야당 등 反정부 세력을 감시, 탄압, 침묵시키는 일을 주로 하는 保安경찰이 35만 명에 이른다. 反정부 활동가인 사드 에딘 이브라함씨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이집트 감옥엔 약8만 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어 있으며, 정부를 비판하였다가 수시로 실종되거나 의문의 事故死(사고사)를 당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브라함씨는 해외에서 가말 무바라크를 비판하였다고 고발을 당하여 귀국하지 못한 이다. 선거 등 정치행사 직전엔 수천 명의 反정부 인사들이 예비검속되거나 연금되곤 한다.
   무바라크의 탄압으로 건전한 야당세력이 육성되지 못한 것은 이제 집권세력의 고민이 되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로 이집트의 서민층에 뿌리를 내린 무슬림 형제단과 집권세력의 보루인 군대 사이에 완충지대가 없다. 중산층이 약하고 건전한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않아 민주화의 길은 험난할 것이다.
  
   *2월8일 오전: 무슬림 형제단과 테러
  
   9.11 테러작전을 지휘한 알케에다의 빈 라덴은 한때 무슬림 형제단(Muslim Brotherhood)의 동조자였다. 2인자 자와히리도 이집트 사람이고 단원이었다. 9.11테러작전의 작전참모 역할을 한 할리드 세이크 모하메드는 쿠웨이트 태생이지만 형제단원이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11편을 납치, 뉴욕의 무역센터 북쪽 타워로 돌진한 실행범 아타는 이집트 출생으로 카이로 대학을 졸업한 직후 무슬림 형제단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빈 라덴을 만났다. 9.11 테러의 4大 핵심인물은 다 무슬림 형제단 출신이다. 나중에 빈 라덴과 자와히리는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이 무바라크 정권에 너무 미온적으로 저항한다고 비판, 관계를 끊었다. 9.11 테러의 작전사령관격인 모하메드는 16세 때 무슬림 형제단에 들어가 사막에서 열린 연수회에 참석, 이슬람의 적들을 처단하라는 지하드(聖戰)의 교리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는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출발하였다. 아라파트도 카이로 대학을 다닐 때 무슬림 형제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조직을 창설하였다. 이집트인 하산 알 바나가 1928년에 창립한 무슬림 형제단은 아랍세계 전체로 퍼져, 中東의 과격세력과 테러 조직의 母胎로 일컬어진다.
   알 바나의 구호는 "알라는 우리의 목적이고, 코란은 우리의 헌법이다. 예언자는 우리의 지도자이고, 지하드(聖戰)은 우리의 방식이다. 알라를 위하여 죽는 게 우리의 가장 뜨거운 갈망이다"였다.
   알 바나는 이슬람의 原型(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슬람 세계가 서구 문명으로 오염되었다고 판단한 그는 코란에 근거한 이슬람 법(샤리아)이 통치하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정부의 조직과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알라가 준 샤리아法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6년 무슬림 형제단은 당시 이집트 수상을 암살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창설자 알바나도 암살되었다. 1954년 나세르는 무슬림 형제단이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 이 조직을 불법화시켰다. 그럼에도 이 조직은 이집트 사람들의 생활속으로 들어가 의료, 교육기관을 운영,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2005년 국회의원 선거에선 단원들이 무소속으로 출마, 全의석의 20%를 차지하였다.
   이집트 정부는 이번 反정부 시위에 직면, 정치를 개혁하겠다면서 무슬림 형제단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였다. 무슬림 형제단의 공개된 문서에 나타난 이 세력의 목표는 단계적이다.
  
   1. 개인을 이슬람화한다.
   2. 가족을 이슬람화한다.
   3. 사회를 이슬람화한다.
   4. 국가를 이슬람화한다.
   5. 이슬람 연방국을 만든다.
   6. 세계를 이슬람으로 정복한다.
  
   부통령 오마르 술레이만은 정보기관장 시절인 2006년에 미국의 FBI 국장 로버트 S. 뮐러에게 "무슬림 형제단은 심각한 위협이다. 주된 위험성은 종교를 이용, 대중을 동원한다는 점이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은 무슬림 형제단이 선거를 통하여 집권한다든지, 제1 야당이 된다면 이집트-이스라엘의 평화체제가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2월8일 저녁: "지금이 가장 위험한 순간"
  
   오늘로서 이집트 시위는 15일째이다. 카이로 한복판 이집트 박물관 앞 타흐릴(해방) 광장에선 수천 명이 천막을 치고 평화적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날 때까지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反정부 세력 대표들과 협상을 하고 있다. 정부는, 1981년 이후 계속되는 비상계엄령을 해제할 것과 改憲, 언론자유의 보장 등을 약속하였다. 그는 國營방송에 나와 무바라크 대통령이 젊은이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면서 체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미국과 유럽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오는 가을의 大選까지 권좌를 유지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초점은 시민들이 시위를 언제까지 이어갈 것인가, 정권유지의 파수꾼 역할을 하였던 保安경찰이 다시 등장하여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 고문, 투옥을 일삼지 않을 것인가이다. 특히 이름과 얼굴이 다 드러난 타흐릴 광장 시위의 주동자들에 대한 경찰의 보복이 없을지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중동학과 포우드 아자미 교수는 "만약 이 정권이 유지된다면 시위 지도자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 정권에 맞선 이들에겐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고 했다.
   35만 명에 달하는 이집트의 보안경찰은 무바라크 정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계엄령 통치하에서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였다. 시위대가 이들을 지휘하는 내무부 청사를 불태운 것은 시민들의 가슴에 쌓였던 울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내부부 청사가 불타오르자 많은 카이로 시민들은 가슴을 옥죄었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경찰이 해산된 것도, 정권이 물러난 것도 아니다. 정권이 무너지면 가장 처절한 응징을 당할 경찰이다. 다수는 무바라크 정권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 수십 만 명이 모이는 시위가 연일 계속될 때는 경찰도 몸을 숨겼지만 혁명적 열정이 식고, 세계언론의 관심도 약해지고, 시위군중이 줄어들면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이 활동이 탄압의 再開(재개)로 나타날 때 시민들이 다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할 수 있을지, 국제사회가 효과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월9일 밤: 노동자, 기자, 지식인들 加勢
  
   이집트 카이로 타흐릴 광장에서 이어지는 시위가 어제 새로운 轉機(어제)를 맞았다. 페이스북을 통하여 시위를 맨 첨 조직하였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12일간 구금되었던 구글 간부 와엘 고님이 풀려난 뒤 위성방송 채널에 나와 감동적인 인터뷰를 하였다. 이 텔레비전을 본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광장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고님도 광장에 나타나 연설을 하였다.
   “사상, 분파,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자. 이집트가 모든 것 위에 있다.”
   고님은 反政府 시위대의 우상이 되고 고님을 인터뷰한 여성 방송 진행자 샤즐리는 시위대의 챔피언이 되었다. 시위군중이 줄어드는 듯하다가 이 방송 프로로 해서 다시 늘어나고 있다. 일부 시위대는 국회 의사당을 에워싸고 있다.
   고님은 페이스북에 경찰에 맞아죽은 할리드 사이드라는 알렉산드리아 청년 활동가를 추모하는 페이지를 개설하여 지난 1월25일의 시위를 불렀다.
   이집트 사회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 언론인, 공무원들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 지식인들도 가세한다. 집권당원이 사표를 내고 광장으로 달려간다. 國營(국영) 신문 알 아흐람 소속 언론인들도 경영진에 반기를 들고 공정보도를 요구하였다. 보건부에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시위를 한다. 수에즈 운하 회사에 근무하는 6000명의 노동자들도 연좌 농성을 하였다. 나일강 上流 아스완의 실업 상태 젊은이들 수천 명은 도청 건물에 난입, 지사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한국 사회에 불어 닥쳤던 노동운동, 언론자유 운동 등 총체적 변혁을 연상시킨다. 이렇게 확산된 시위가 무바라크의 퇴진을 요구할 때 군대가 누구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마스 L. 프리드먼이 썼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사임을 요구하는 것은 예의 없는 짓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시위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정치적 시위가 노사문제 등 사회적 이슈로 번진다면 무바라크 정권이 감당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가을 大選 때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 점진적 개혁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 사우디 아라비아 등 인근 국가들도 미국 정부에 무바라크를 몰아내선 안 된다는 압력을 넣고 있다고 한다.
   무바라크의 운명은 그러나 카이로의 거리와 광장에서 결정될 것이다.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확산된다면, 군부가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집트 사태는 여전히 流動的이다.
  
  
   *2월11일 새벽: "오늘중 무바라크 대통령 물러날 것"
  
   이집트의 집권당 사무총장(호삼 바르다위), 아하메드 샤피크 총리, 미국 CIA 국장 파네타, 그리고 이집트의 軍 고위 당국자는 모두 오늘중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이 對국민 성명을 통하여 물러날 것임을 강하게 시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타흐릴 광장에 모인 反정부 시위대는 환호하고 있다.
   지난 수일간 反정부 시위는 카이로를 벗어나 全國으로 확산되고 특히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 파업과 농성을 시작하였다. 반정부 시위와 파업엔, 공무원, 전문직업인, 기자들까지 가세,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방금 이집트 국영방송은 무바라크가 곧 對국민 방송을 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에게 권한代行을 맡길 것으로 보인다. 술레이만은 헌법을 개정,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과도적 책임을 맡게 된다. 오늘은 反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 17일째이다.
   한편 카이로 시내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고 교민 李鍾熙씨가 전했다. 은행은 지역에 따라 하루 세 시간 정도 문을 여는데, 미화 5000 달러가 인출 한도액이라고 한다. 은행이 문을 열면 긴 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경찰도 복귀하고 있다고 한다. 피라미드와 이집트 박물관은 계속 관광객을 받지 않고 있다. 타흐릴 광장에는 외국인도 여권만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2월11일 아침: 사임거부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방금 끝난 연설에서 "나는 외국의 압력을 무시한다"면서 차기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가 사임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카이로 해방광장의 反정부 시위대는 연설중에 "물러나라, 물러나라"를 외쳤다. 해방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대통령이 현실을 모른다"면서 "내일 대규모 시위를 벌여 몰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미국 CIA 부장이나 언론의 예측이 모두 빗나갔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오늘 연설은 활활 타오르는 이집트 民心에 기름을 부은 듯하다. 화가 난 군중은 해방광장에서 나일강변 도로를 따라 국영방송 건물로 몰려가 에워쌌다. 수천 명은 대통령 집무실로 가고 있다.
   CNN에 등장한 한 논평가는 "무바라크가 시위대를 화나게 한 뒤 그들이 폭력적으로 나오면 군대를 투입할 생각인 듯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평화적 시위를 해온 사람들이 과격해질까 걱정이다"고 덧붙였다. 한 교민은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前 국제원자력 기구 사무총장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엘바라데이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집트는 폭발할 것이다. 군대가 조국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2월11일 저녁: 시위대가 군부 쿠데타 촉구
  
   오늘 금요일은 카이로에선 이슬람 휴일이다. 오전에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드린 신도들은 해방광장으로 모여들고 있다. 反정부 시위대는 오늘을 결정적인 날로 만들려 한다. 오늘 새벽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 성명이 아니라 사임 거부 성명을 발표한 데 화가 난 시위대는 사상最多의 군중을 모아 사퇴를 압박하려는 것이다.
   문제는 군대이다. 지금까지 군대는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바라크를 몰아내지도 않았다. 어제부터 反정부 시위대 사이에서 "군대가 무바라크를 쫓아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군사 최고회의는 오늘 國營방송을 통하여 성명서 제2호를 발표하였다. 군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어제 연설 내용(부통령에게 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양 등)을 지지하면서도, 시위대에는 30년간 계엄령 체제를 가능하게 하였던 비상조치법을 혼란상태가 끝나면 해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軍은 동시에 일상적인 생활로 돌아가 줄 것을 촉구하면서 시위자들에 대한 보복이 없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많은 시위대원들은 공공연하게 군대가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켜 무바라크를 몰아내줄 것을 요구한다. 총을 갖지 못한 시위대는 평화적 시위에 한계를 느낀 것이다. 무바라크의 사임이 임박, 軍이 정권을 인수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을 때는 다수 시위대가 "우리는 군대가 아니라 민간정부를 원한다"고 외쳤는데, 출구가 막히니 생각이 달라진 듯하다.
   이집트의 군대는 병력수에선 세계 10위권이고 對이스라엘 전쟁을 통해 잘 단련된 군대이다. 1979년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많다. 전투기 등 주요 장비도 美製(미제)이다. 지난 30여년간 수백 억 달러의 미국 원조가 군대에 들어갔다. 그만큼 親美化(친미화)되었을 것이다. 1952년 나세르가 영도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로 왕을 축출한 이후 등장한 네 사람의 대통령은 다 장교 출신이다. 무바라크 정권의 본질은 군사정권이다. 각료와 주지사의 과반수가 군인 출신이다. 군대가 무바라크를 퇴진시킨다는 것은 군대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수명이 다한 지도자를 희생물로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미국의 합참의장은 요사이 수시로 이집트 참모총장과 통화를 하면서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집트 장교들은 特權 및 特惠까지 누린다. 그럼에도 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으며 世俗的이라 무슬림 형제단과 같은 이슬람 극단세력을 견제할 수 있다. 시위대, 미국, 이스라엘이 모두 軍의 개입을 원하는 듯하다.
   軍도 금명간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국가가 흔들릴 때 신뢰 받는 군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우리 헌법도 제5조에서 軍의 신성한 의무로 국토방위뿐 아니라 국가의 안전보장을 규정, 이집트 시위 사태 같은 것이 일어나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면 국가를 구하기 위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合憲的(합헌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무바라크가 카이로를 떠났다"
  
   방금 CNN의 인터뷰에 응한 미국의 前 이집트 주재 대사는 "권위 있는 소식통에 의하면 무바라크 대통령이 카이로를 떠나 (紅海의 휴양지) 샤름 엘 세이크의 호텔에 갔다고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렇게 되면 무바라크는 國政에서 손을 떼게 되는 것이다"면서 "사실상 군부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고 했다. 군부가 '軍 최고회의'라는 이름으로 두 차례 성명서를 발표, 비상조치법의 해제, 공정한 선거, 국민들의 요구 수용 등을 약속한 점을 들었다.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軍 최고회의가 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무바라크의 어제 연설은 권한을 부통령과 군부에 넘긴다는 선언이었다고 해석하는 외교관들도 많다고 한다. AP 통신도 무바라크가 샤름 엘 세이크로 날아갔다면서 그곳에 별장이 있다고 보도하였다.
   한편 이슬람 휴일을 맞아 카이로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위대는 해방광장뿐 아니라 국회, 공보부, 國營방송, 그리고 대통령 관저 앞으로 몰려가 평화적 시위를 벌이고 있다. 軍은 탱크 등을 배치, 亂入을 막고 있다.
  
   *2월12일 새벽: 무바라크 물러나다. 군부가 정권 인수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방금 國營(국영) 텔레비전에 나와 "무바라크 대통령은 물러나고, 軍 최고위원회에 國政을 인계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군부가 과도 정권을 맡아 改憲(개헌)과 선거 등 민주화 과정을 관리하기로 한 것이다. 이 발표를 들은 시위대는 "이집트는 자유를 찾았다!"면서 환호하고 있다. 30년 무바라크 통치는 18일간의 시민 혁명으로 무너졌다.
   6000년 역사를 가진 이집트는 有史이래 처음으로 국민들이 평화적 시위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혁명에 성공한 것이다. 18일 걸린 이 시위로 3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주로 경찰이 쏜 총에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CNN 기자들은 "기념비적인 사건' '역사적인 순간'이란 말을 써 가면서 시위대만큼 흥분한 목소리로 해방광장에서 기뻐 날뛰는 시민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이번 시위를 지속시킨 것은 시민들의 끈기와 이를 하루 24시간씩 보도한 CNN, BBC, 알 자지라 등 위성방송이었다.
   독재자들이 다스리는 中東에 크나큰 지진이 몰아 닥쳤다. 中東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오랜 文明과 가장 깊은 예술과 사상을 지닌 국가가 민주혁명을 성공시켰으니 그 파장은 넓고 깊게 퍼질 것이다. 이란은 이집트의 시위를 지지하였으나 그 이란의 神政체제가 위대롭게 될지 모른다. 휴대전화, 트위터, 인터넷, 페이스북으로 무장한 중국의 젊은이들이 따라할지도 모른다. 북한정권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1989년 東歐(동구) 공산체제 붕괴를 방불케 하는 지각 변동이 석유 위에 앉아 있는 중동을 뒤흔들고 있으니 어떤 형태로이든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거리는 祝祭中"
  
   이집트의 30년 독재자 무바라크 사임이 발표된 직후 카이로 교민 李鍾熙씨(여행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집에서 한국 교민들 몇 사람을 초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금 바깥이 축제 분위기입니다. 자동차가 경적을 울리고, 폭죽도 터뜨리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거리 풍경과 너무 다릅니다. 오후엔 카이로 거리가 유령도시 같았습니다. 인적이 끊기고 자동차도 교통순경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10년 이상 살면서 처음 보는 풍경이었습니다. 태풍 前夜의 고요함 같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걱정입니다."
   그는 앞으로 10년 정도는 복잡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이집트 사람들이 이번에 평화적 시위를 하고 군대가 신뢰를 받고 있는 게 다행이라면서 "역사적 순간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앞으로 기복이 있겠지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갈 겁니다. 머지 않아 관광도 재개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위로했다.
   이번 시위의 단초를 만든 와엘 고님(구글 직원)은 CNN과 인터뷰하면서 "나는 8000만 이집트인을 믿는다. CNN 등 국제언론과 페이스북에 감사한다. 드디어 범죄자가 궁전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경찰이 아직도 건재한 점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젠 더 강하다. 우리는 민주국가를 만들 것이다"고 했다. 그는 "이집트인이 목숨을 걸었기에 독재를 타도할 수 있었다"는 취지의 이야기도 했다. 고님은 "우리는 군대를 믿는다"라고도 했다. 정치를 할 생각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저는 그런 자격이 없습니다. 제 직장으로 돌아갈 겁니다."
   한편 스위스 외무장관은 무바라크 前 대통령 및 가족과 소유 재산이 스위스에 있다면 동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무바라크 一家의 재산은 400억에서 700억 달러로 추정된다. 주로 軍에서 근무할 때 번 돈이라고 한다. 스위스는 튀니지 혁명으로 쫓겨난 벤 알리 전 대통령의 재산도 동결하였다.
  
   시위대가 혁명가, 백성이 국민으로 變身
  
   6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30년 독재정권을 타도한 이집트 혁명은 정당성이 강한 게 특징이다. 평화적 시위였고, 자발적이었으며, 국민들을 골고루 대표하는 남녀노소가 다 참여하였고, 外勢의 영향이 없었으며, 특히 종교적 편향이 보이지 않았다. 이집트 혁명의 현장에선 다음 네 가지가 보이지 않았다.
  
   1. 反美 구호
   2. 反이스라엘 구호
   3. 이슬람 원리주의 구호
   4. 폭력
  
   가장 많이 들린 건 "우리는 이집트인이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이집트인이니 폭력을 써선 안된다" "우리는 이집트인이니 종교적 차별을 해선 안된다" "우리는 이집트인이니 軍人과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우리는 이집트인이다"는 말로써 종교적, 이념적, 정책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자세였다. 權力에 눌려 사는 걸 天性으로 여기던, 즉 백성이었던 이집트인이 主權者, 즉 국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세계最古의 文明을 자랑하는 이집트인들의 숨은 DNA, 숨은 교양이 '가장 아름다운 혁명'을 만들어낸 底力(저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50년간 민주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는 서로 전쟁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집트가 민주화된다면 民主국가인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진다는 이야기이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激變(격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유리하다는 평가를 해야 할 것이다.
   CNN은 이집트 시위대가 무바라크 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이후엔 '시위대'(Protester) 대신 '혁명가'(Revolutionary)라고 부른다. 이집트 사람들은 6000년만에 처음으로 백성에서 국민으로 變身(변신)한 것이다. 이런 의식변화가 혁명이다.
[ 2011-02-12, 12: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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