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너마저!
아사드 父子가 代를 이어 40년 이상 鐵拳통치를 하고 있는 시리아에서도 流血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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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드 父子가 代를 이어 40년 이상 鐵拳통치를 하고 있는 시리아에서도 流血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다라아市에선 지난 금요일(이슬람의 휴일)부터 反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保安軍은 이들에게 발포,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모스크가 시위의 거점이다. 중동에서 모스크가 민주화 시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변화이다. 본질적으로 민주나 자유와 맞지 않는다는 이슬람의 교회가 민주와 자유를 부르짖는 민중의 센터가 되었다는 것은 중동민주화운동이 이슬람 改革의 의미도 품고 있다는 암시이다.
  
  시위대에 대한 진압 방식은 튀니지나 이집트는 최루탄인데, 리비아나 시리아는 발포이다. 부족의 영향력이 강한 시리아도 리비아처럼 內戰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튀니지, 이집트, 터키 같은 나라는 국가정체성이 뚜렷하여 부족이나 宗派보다는 국민을 우선시키는데 리비아, 이라크 등은 내부 사정이 복잡하여 그러하지 못하다.
  
  시리아는 1963년부터 일종의 계엄령 통치하에 있어 이런 시위가 일어나기 어려운 곳으로 치부되었으나 中東을 휩쓰는 민주화 혁명의 바람이 비켜가지 않았다.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2000년에 죽은 아버지 아사드의 아들로서 안과의사 출신이다. 2007년에 혼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시리아는 여러 나라와 國境을 맞대고 여러 나라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레바논 內政에 노골적으로 간여하며, 헤즈블라 등 과격단체를 지원, 이스라엘과는 적대적이고, 이란 및 북한과는 친하다. 이런 시리아에서 內戰이 벌어지면 그 영향은 中東 전체에 미친다. 리비아는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지만 시리아는 중동의 가장 중요한 地政學的 위치에 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8000년 동안 여러 文明이 교차한 세계 最高의 도시이다. 8세기에 기독교 국가이던 시리아는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어 한때 수도가 되었다. 이때 지은 다마스쿠스의 大모스크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건축물이다. 이런 나라가 아직도 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는 걸 보면 민주주의는 역사의 길이가 아니란 생각이 든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는 북한과 친한 나라로서 특히 북한製 무기를 많이 사주었다. 김정일은 中東사태로 고립이 深化될 것이다.
  
  *시리아 개황
  
   시리아는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이다. 단일민족, 단일언어의 한국인들은 시리아에서 놀라는 점이 많다. 권위주의 정부하의 시리아가 의외로 활기 차고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것도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인종적 종교적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리아는 우선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라크. 공식언어는 아랍語이지만 아람語, 쿠르드語, 아르메니아語, 시르카시안語, 그리고 프랑스語가 쓰이고 있다.
   인종구성도 복잡하다. 아랍인이 90%이지만 쿠르드族, 아르메니안 등 他민족이 약10%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순니파 이슬람 신도가 74%, 시아파, 알라위파, 두르제파 등이 15%, 기독교인이 10%, 유태교인도 있다. 아사드는 소수파인 알라위 출신으로서 동족을 보안기관에 집중 배치, 다수파를 지배한다. 이런 체제는 종교분쟁으로 가면 다수파에 의하여 정권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시리아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18만5180평방킬로미터이다. 國土의 약25%는 경작이 가능하다. 인구는 북한보다 약간 적은 2250만 명. 여기엔 이라크 難民 60만, 팔레스타인 難民 30만 명이 포함된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73세, 여자는 77세이다. 문맹률은 23%.
  
   1인당 국민소득은 2410달러였다. 연간 2.9% 경제성장률을 보이지만 실업률이 12.5%이다. 시리아를 여행해보니 할 일 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55억 달러. 최근 外貨를 유로貨로 바꾸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하루 40만 배럴의 기름이 나온다. 23만 배럴을 국내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수출한다. 시리아의 기름 소비량은 한국의 약10분의 1이다.
  
   국가총생산의 분포를 보면 농업과 석유가 거의 절반이다. 노동인구의 분포는 농업 26%, 공업 14%, 서비스업 60%이다. 70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6억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군사비 지출은 국민소득의 약6%이고 복무기한은 30개월. 인터넷 사용자는 110만 명, 휴대전화기가 약313만 대이다(2007년 통계).
  
   시리아의 가장 높은 산은 헤르몬山으로서 2814m이다. 겨울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눈발이 날릴 때도 있다. 인구는 거의가 지중해 연안에 몰려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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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리아式 진압방식: 한 도시를 멸망시켜버렸다!
   하마의 대학살 현장에서 느낀 점.
   趙甲濟
  
   우리 尙美會 여행단이 아침에 알레포를 떠나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세 시간 달려가는 목표지는 하마市이다. 인구가 약40만 명인 이 도시는 1982년에 있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무장봉기와 유혈진압으로 유명하다. 舊約성경에서 ‘가난 왕국의 수도’라고 쓰여진 이 도시는 기원 전 10세기 무렵인 다윗과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과 교류했다. 이 도시는 저항의 도시이다. 아시리아에 의하여 점령을 당하자 하마 사람들은 다마스커스 사람들과 손 잡고 봉기하여 그들을 몰아냈다가 130년 뒤 아시리아 군대의 보복을 당해 도시가 파괴되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하마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많았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릴 만한 토양이 있는 도시이다.
   1982년 시리아는 곤경에 처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과 대결하고 있었다.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일어난 공중전에선 이스라엘 전투기를 한 대 격추시키고 시리아 전투기는 80대가 격추되었다. 터키는 시리아가 터키내 쿠르드족의 반란을 사주한다고 군 동원령을 내려 위협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이런 시기에 시리아내에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테러가 격화되었다. 그들은 공무원과 아사드를 배출한 알라위파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아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때 처음으로 목베기 숫법이 나왔다. 1979년 6월 형제단은 알레포에서 사관생도들을 공격하여 83명을 죽였다. 19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다마스커스에선 자동차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들의 목표는 아사드 대통령이었다. 1980년 6월26일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환영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이 잠입하여 아사드를 향해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아사드는 발밑으로 굴러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냈다. 경호원 한 사람이 다른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대통령을 보호하고 爆死했다.
   아사드의 보복은 빨랐다. 감옥에 있던 수백명의 형제단원들을 불러내 처형했다.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는 법을 공포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은 원리주의적인 순니파가 많이 사는 古都 하마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선동했다. 하마를 해방구로 선포했다. 아사드는 군부대를 투입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 형제단에 대해서 최후통첩을 하고 일반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2월2일 진압군은 전투기와 탱크까지 동원하여 하마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심부의 골목이 좁아 탱크가 진입하지 못하자 폭격하여 길을 텄다. 2주간 계속된 시가전으로 쌍방에서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형제단 여자들은 진압군 병사들 속에서 자폭하는 숫법을 썼다. 그 뒤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유행이 된 自爆테러가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도 사라졌다. 진압군은 하마 시내를 뒤지고 다니면서 부상자들까지 찾아내 확인사살했다.
   이 무자비한 봉기와 진압은 그러나 시리아에서 원리주의자들의 반란을 근절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아사드의 진압은 많은 시리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형제단은 테러숫법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내가 만난 한 시리아 여성은 “서방세계는 아사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사건 뒤 ‘하마의 교훈’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사드가 하마에서 했던 식으로 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하마 도심부로 들어서니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업률이 12%라는 증거이다. 시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안쓰러웠던 것이 할 일 없이, 유령처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키가 날씬하게 크고 얼굴이 길다. 중동에서 가장 잘 생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사람들이 無爲徒食하고 있다. 인간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기막힌 일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부럽지 않은 유적으로 가지고도 시리아는 관광을 통해서 연간 10억 달러도 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하마에 들린 것은 노리아스라는 水車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마를 지나는 오론테스 강물을 끌어올리는 이 장치는 지름이 20~30m나 된다. 서기 5세기부터 가동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거리이다. 움직이지 않는 水車 너머 언덕 위엔 호텔이 서 있다. 시가전에서 죽은 반란군을 집단 매장한 땅 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 축적으로써 중동의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던 시리아는 한때 중동을 풍미했던 汎아랍주의 바트당을 만들어냈다. 1947년에 창당한 바트당은 汎아랍주의-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면서 공산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반대했다. 시리아의 바트당은 중동의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었다. 집권에 성공한 것은 시리아와 이라크이다. 후세인도 물론 바트당 출신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이라크 군대와 함께 바트당을 해산해버렸다. 이것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이라크의 시아파-순니파 내전을 통제불능사태로 몰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바트당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무자비한 탄압과 反美정책으로 미국을 괴롭혔지만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했다. 이라크가 종교내전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후세인을 그냥 두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랍사람들과 이슬람 문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해본 경험이 日淺하다. 이슬람은 교리상 종교공동체를 강조하므로 종교와 계급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국민국가와는 맞지 않는 면이 너무나 많다. 그 점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공산당식 계급투쟁을 다 같이 거부하는 바트당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바트당이나 아사드와 후세인의 그런 역할을 看過하는 경향이 강했다. 중동을 지배해본 경험이 있는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세계를 움직일 힘이 없다.
  
  
  
[ 2011-03-24, 10: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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