實錄연재/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1)
公訴時效가 끝난 부산 어린이 살해 사건의 내막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글자 작게 하기
  • 글자 크게 하기
*지은이 메모 - 이 사건은 1982년 10월17일에 공소시효(살인은 15년)가 끝남으로써 이제는 범인을 붙들어도 처벌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경찰과 검찰과 법원과 언론이 고문과 조작과 誤判(오판)과 誤報(오보)로써 무고한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틈을 타서 범인은 면죄부를 받고만 것이다. 힘없는 서민들이 경찰·검찰·법원·언론의 총공세에 직면할 때 얼마나 비참하게 되는가를 이 사건은 똑똑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도의 범죄는 처벌되지 않고 개인의 피해는 회복될 수 없음을 고문후유증으로 40대에 요절한 김기철씨는 廢人(폐인)이 된 그의 몸과 정신으로 입증하였다. 이 기사는 1981~1982년에 걸쳐 월간 〈마당〉에 쓴 것이다.
  
  
   1장 한을 품고 죽다
  
   神話가 된 사건의 발단

  
   하나의 神話(신화)가 있었다. 형사, 검사, 판사, 변호사, 그리고 사회부 기자들 세계에선 이미 傳說(전설)처럼 돼버린 사건이 있었다. 열네 해가 흐른 지금도 그 사건 이름만 대면 그들은 자기 아이들 이름을 외듯 스물도 넘는 사건 관계자들의 성명을 줄줄 기억해내곤 한다.
  
   아직도 그 사건을 악몽처럼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건을 떠올리면 잠 못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생각만 나면 속골이 쑤시고 뼛속이 저려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건을 누가 새삼 입에 올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슴속을 저며 오는 슬픔과 북받치는 분노와 남기고 싶지 않은 원한과 되살아나는 복수심을 홀로 억누르며 완강하게 삶을 버티고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 사건에 짓눌려 비참하게 일생을 끝막음한 사람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행로를 바꾸고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고통을 선물한 장본인의 生死(생사)는 알 길이 없다.
  
   살아 있다면 그는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열심히 헤고 있으리라. 1982년 10월17일이 어서 빨리 오라고 그는 빌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365일. 한 해만 지나면 그는 이 나라의 법이 보장하는 免罪符(면죄부)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신화는 化石(화석)으로 굳어지고 곧 망각 속에 파묻혀버릴 것이다. 1981년 10월, 나는 이 사건의 조각들을 찾아 끼워 맞춤으로써 한 사나이의 墓碑銘(묘비명)을 대신할 글을 남겨놓기 위해 취재의 길에 올랐다.
  
   1967년 10월17일 오후 9시30분쯤 金根夏(김근하)군은 박희철 선생 집을 나왔다. 부산 화랑초등학교 5학년인 열한 살 소년 근하는 두 시간 동안의 과외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아버지 김용선씨(당시 45세)와 어머니 최을남씨(36) 및 누나, 형, 그리고 두 동생이 기다리고 있는 집은 150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근하는 친구 네 명과 함께 화랑초등학교(서구 동대신동) 담벼락을 따라 찻길을 걸었다. 학교 정문 앞에서 근하는 친구들과 헤어졌다. 찻길을 뛰어 건너 컴컴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골목 속으로 소년은 사라졌다. 이것이 근하의 살아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약 20분 뒤 부산 영 880호 영업용 시발 택시 운전사 장용태씨(당시 40세)는 보수동 검정다리 근처에서 한 청년을 태웠다. 그는 “실을 물건이 있다”면서 택시를 화랑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몰게 했다. 1분도 안 돼 정문 앞에 택시가 닿자 청년은 정문 기둥 옆에 놓아둔 마분지 상자를 안고 뒷자리에 올랐다. “국제시장으로 가자”고 청년은 말했다. 장씨는 여위고 작은 몸집의 이 청년이 실은 상자가 매우 크고 무겁게 보였으므로 그를 유심히 살폈다. 짧게 깎은 머리, 희고 둥근 얼굴, 밤색 점퍼, 맘보바지, 검은 운동화, 경상도 사투리…운전사는 인상과 옷차림의 특징들을 머리에 새겼다.
  
   택시가 보수파출소 앞 신호대에 이르렀을 때 마침 直進(직진)신호가 켜졌다. 장씨는 곧장 부평동쪽으로 나갔다. 청년은 대청동쪽에서 국제시장으로 들어가길 원했던 듯 ‘국제시장으로 가야 할 텐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청년은 중구청 앞에 올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씨는 교차로에서 국제시장의 남쪽 입구로 좌회전을 할까 하다가 다시 방향을 물었다.
   “자갈치시장으로 갑시다.”
   “거긴 들어갈 수가 없는데요…”
   “그러면 남포동 멸치 도가로 갑시다.”
  
   운전사는 천사당 양과점까지 와서 남포동 해안 쪽으로 우회전을 하려고 했으나 버스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청년은 다시 시청 뒤 해안통으로 가자고 했다. 장씨는 바다 쪽만 찾는 청년에게 버럭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택시를 시청 뒤, 대동여인숙 앞에 세웠다. 요금 140원을 건네준 청년은 상자를 안고 내리더니 영도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밀수품이다!”
   장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를 돌려 나오면서 시청 정문 옆에 붙은 광복파출소에 신고했다. 근무하고 있던 백일채 순경(당시 30세)은 파출소 급사 주병규군을 먼저 그곳으로 보냈다.
  
   “어떻게 나왔나?”
   경남제빙 앞 해안통에 상자를 내려두고 서 있던 청년이 다가오는 주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바람 쐬러 나왔습니다.”
   “재미 보러 왔어? 연애하나?”
   괴청년은 거듭 농을 걸었다. 마음을 놓은 주군은 쪼그리고 앉으며 상자에 손을 댔다.
   “저리 비켜!”
   갑자기 청년은 화를 벌컥 냈다.
   백순경이 현장에 나타난 것은 이때였다.
   “이게 뭐요?”
   “책입니다.”
  
   청년은 정복 경관 앞에서 한풀 꺾인 듯 공손하게, 그러나 불안하게 대답했다. 백일채 순경은 상자를 풀려고 허리를 굽혔다. 이것이 실수였다. 청년이 후닥닥 뛰어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을 먼저 붙들어두고 상자를 조사했어야 했는데 백 순경은 물건에 먼저 손대었다가 청년을 놓친 것이었다.
  
   백 순경은 청년을 뒤쫓았다. 청년은 진주식당 앞을 지나 찻길을 뛰어넘어 천사당 양과점 앞으로 해서 남포동 해안통의 어둠 속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이것이 범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때가 오후 10시10분. 백 순경은 허탕을 치고 돌아와 상자를 풀어보았다. 책 대신 구겨진 어린이의 시체가 나타났다. 입은 손수건으로 틀어 막혀 있었고 오른쪽 가슴엔 길이 25센티미터쯤의 과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상자를 묶은 것은 파란색 나일론 끈. 칼은 오른쪽 제 3늑골의 연골부를 끊고 胸壁(흉벽)을 지나 왼쪽 心房(심방) 벽을 꿰뚫고 있었다.
  
   칼을 뽑지 않았으므로 출혈은 많지 않았다. 부산대학교 병리학교실 이선경 교수의 剖檢(부검)에 의해 직접 死因(사인)은 ‘흉강 내 출혈’로 밝혀졌다. 범인은 단 한 번 칼질로 그 소년의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경찰은 이날 밤 소년의 신원을 김근하군으로 밝혀내고 수사본부를 사건 발생지 관할서인 서부경찰서 동대신동파출소에 설치했다.
  
   ‘진범 검거!’
  
  〈국제신보〉 변수갑 기자는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수사가 시작된 지 열닷새, 수많은 ‘유력 용의자들’이 나타났다간 사라져갔다. 그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경찰과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을 상대로 밤 새워 취재전쟁을 벌였으나 용의자들은 모두 무혐의로 밝혀졌었다. 수사는 이제 迷宮(미궁)으로 빠져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건 발생 뒤 〈국제신보〉 사회부는 수사본부 근처 여관에 취재본부를 두고 경찰 출입 기자 7, 8명을 이 사건 취재에 투입했다.
  
   취재진의 중심은 서부서를 출입하는 변수갑 기자와 부산시경을 맡은 하윤락 기자였다. 변기자는 그때 서른일곱 살, 부산의 일선 경찰서만 14년째 출입하고 있었다. 형사들은 물론이고 시내버스의 안내양들까지 키가 나지막한 그를 알아볼 정도로 변 기자는 ‘발로 쓰는’ 맹렬 사회부 기자였다 하 기자는 市警(시경)의 간부들과 특히 인간관계가 좋아 핵심 수사정보를 곧잘 물고 왔으며 그래서 변 기자가 밑바닥에서 긁어모은 잡다한 정보를 보완하기도 했다. 사회부장은 법조 출입 기자로 명성을 떨치고 특히 ‘장경근 일본 밀항 사건’의 수사 때 장경근을 일본까지 태워다 준 선원을 부산 지검이 구속한 사실을 특종하여 이름을 날린 장철씨.
  
   〈국제신보〉는 사건 발생 때부터 잘 나가기 시작했다. 친한 형사로부터 深夜(심야)에 연락 전화를 받은 하 기자는 마분지 상자가 버려진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기자가 됐다. 덕택에 그날 새벽 〈국제신보〉는 호외를 내어 상대지보다 한발 앞서 이 사건을 알릴 수 있었다.
  
   사건 발생 뒤 한 번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변 기자는 11월2일 아침 이제는 맥이 풀린 것 같은 수사본부에 들렀다가 화끈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수사본부에서 內勤(내근)을 하며 수사 기록들을 챙기는 서무 요원들과 친했다. 이들로부터 그는 동부경찰서 한일민 주임이 ‘거의 틀림없는’ 용의자를 뒤쫓고 있다는 귀띔을 들었다. 변 기자는 용의자의 이름을 얻어냈다. 동대신동 2가에 사는 전경렬(가명·당시 20세). 변 기자는 전씨의 집을 찾아갔다. 수사본부에서 왔다고 속임수를 쓴 뒤 전씨의 부모에게 사진을 내놓으라고 했다. “사진과 책, 공책, 옷가지까지 당신네들이 몽땅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그들은 되물었다. 변 기자는 그제야 한 주임 班(반)이 전씨를 연행해갔고 가택 수색까지 끝냈음을 알았다. 변 기자는 전씨가 졸업한 경남상고의 앨범이 남아 있는 것을 겨우 발견, 그의 얼굴 사진을 오려 내 왔다.
  
   변 기자는 수사본부에 돌아와서 한일민 주임 班(반)뿐 아니라 그와 함께 차출된 동부서 천현준 주임 반 요원들까지 모두 증발해버렸음을 알아냈다. 한, 천 두 주임이 새벽에 만나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서로 축하하는 악수를 교환하고 황급히 나가더란 얘기도 들어왔다. 변 기자는 취재진을 풀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한일민 주임을 뒤쫓기 시작했다. 집요한 기자들의 추적은 이날 밤 늦게까지 계속됐다. 그들은 경찰서, 파출소, 여관, 호텔 등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한편 한주임 반의 형사 일곱 명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전씨를 데리고 여덟 군데의 파출소와 여관을 옮겨 다니며 그를 신문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용케 수사반이 머물렀던 여관이나 파출소에 들이닥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몇 시간 전에 나갔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남부서 대연파출소 2층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갔을 때도 형사들은 불과 몇 시간 전에 어디론가로 ‘떴다’는 것이었다. 기자들은 대연파출소 근처의 파출소와 여관을 이 잡듯 뒤져갔으나 형사들의 꼬리를 잡을 수 없었다.
  
   변 기자는 자정을 넘기고는 추적을 포기했다. 비록 한주임을 붙들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거의 틀림없는 범인을 쫓고 있다’는 心證(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더구나 이 ‘극비 수사 진전’을 다른 기자들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변 기자는 이 특종거리를 부장에게 보고했다. 그동안의 추적 과정에서 주워 모은 정보의 조각들을 끼워 맞춰 “전씨가 자백을 했고 그는 근하군의 전 과외가정교사였으며 증거물도 이미 압수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장철부장은 이 特種(특종)을 號外(호외)로 빛내기로 결단했다. 변 기자는 기사를 썼다. 200자 원고지 석 장분의 짤막한 기사였다. 이때 장철 부장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사진에 직접 확인한 정보가 아니란 점이 노련한 사건기자를 불안케 했다. 그는 변 기자에게 다시 한 번 확인해보라고 지시했다. 변 기자는 새벽에 수사본부로 달렸다. 수사본부장 이수태 부산시경 수사과장과 단독 면담에 들어갔다. 단도직입으로 변 기자는 다그쳤다. 본부장은 말했다.
   “범인이란 심증은 간다. 그러나 증거물을 확보하지 못했다, 하루만 더 기다려주면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내겠다.”
  
   변 기자는 장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범인이 틀림없습니다. 윤전기를 돌리십시오!”
   변 기자는 眞犯(진범)이란 보증은 받지 못했지만 자신의 肉感(육감)을 믿고 도박을 건 것이었다. 본부장의 ‘심증이 간다’는 말은 ‘범인인 것 같다’는 느낌과 같은 뜻이다. 증거물이 없는 상황에서 이 ‘느낌’은 아무런 有罪(유죄) 입증 자료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기자와 경찰의 길이 갈라진다. 경찰은 공소유지를 할 수 있는 증거를 갖춰야 용의자를 구속할 수 있지만 언론계의 구조와 생리는 ‘확신’만 갖고도 기사를 쓸 수 있게 하고 있다. 경찰은 ‘자백’ 이외에 증거물이란 객관적 자료를 가져야 범인으로 단정하지만 기자들은 心證(심증), 곧 확신이란 주관적 자료만 갖고도 곧잘 단정을 내린다.
  
   〈국제신보〉는 호외를 인쇄했다. 3일 새벽 街販(가판) 소년들은 호외를 뿌리고 다녔다. 〈국제신보〉의 맞수인 부산일보사 앞에, 수사본부 앞에, 시경 앞에 한 뭉텅이씩의 호외가 뿌려졌다.
  
   ‘근하군 살해 有力(유력) 용의자 체포’라고 기사를 썼더라면 그것은 당시 수사상황의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사로는 여러 번 有力 용의자들이 사회면을 화끈하게 장식했다가는 무혐의로 풀려나가곤 하던 그 즘의 신문 분위기에선 호외감이 될 수 없었다. 호외는 용의자 아닌 범인 체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호외의 새까만 커트 제목은 ‘근하군 살해 진범 체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전씨의 이름은 물론, 앨범 사진도 박혀 있었다. 범인을 더 강조한 ‘진짜 범인’, 이 ‘眞犯(진범)’이란 신문 용어는 ‘가짜 범인’도 있다는 것을 은연중 反證(반증)하는 낱말이기도 했다.
  
  친구들과 이웃의 항의 데모
  
   한일민 주임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통틀어 부산 경찰의 가장 유능한 형사로 꼽혀왔다, 집념과 끈기, 냉혹한 승부의식과 깨끗한 처신은 그를 수사 경찰관들의 귀감으로 만들었다. 그가 전경렬씨를 용의자로 떠올린 것은 근하군의 집 주변 탐문수사에서였다. 그는 범인이 根夏(근하)군이나 근하군 집과 연고를 가진 사람이란 전제 아래에서 戶口(호구)조사를 통하여 후보자를 찾고 있었다. 범행 현장과의 거리, 근하와의 親面(친면), 가정환경, 목격자들이 말한 범인의 인상착의 등등 열 몇 가지의 조사 항목을 만들어 수사 대상자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이 전씨였다.
  
   한편 한주임의 동료인 천현준 주임은 근하 친구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근하 주변에 나타난 적이 있는 수상한 어른들을 조사해갔다. 여기서 가장 유력한 수사 대상자로 나타난 것이 또 전씨였다. 두 주임이 우연하게도 같은 인물을 찍고 있다는 것을 서로 알게 된 것은 11월1일. 두 주임은 부하 형사들을 合班하여 전씨를 공동 신문하기로 약속했다. 성공만 하면 1계급 특진은 따 놓은 堂上(당상)이었다.
  
   전경렬씨는 11월1일 오후 2시쯤 동대신동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형사들은 전씨가 화랑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근하군과 같이 논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전씨는 근하의 얼굴도 모른다고 답했다. 전씨는 네 시간 뒤 풀려나왔다. 그가 두 번째로 연행된 것은 2일 오전 2시였다.
  
   <서부산경찰서에 들어가자마자 서너 명의 경찰관이 다짜고짜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근하군을 죽이지 않았느냐?’, ‘박스를 들고 서 있지 않았느냐?’고 고함을 치면서. 오전 9시까지 자백 강요를 받았으나 나는 버티었다. 9시30분쯤 나는 보수동 모 여관의 골방으로 끌려갔다.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주먹과 발이 날아왔다. 그래도 억지 자백을 하지 않았다. 이날 오후 7시쯤 나는 대연파출소 2층으로 옮겨졌다. 발가벗겨진 뒤 저녁 12시까지 물을 먹었다. 경찰이 쓰라는 대로 자백서를 썼다.
  
   ‘근하군을 죽였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손을 다쳐 있고 어머니는 발에 무좀이다. 근하와는 농구를 같이 하며 논 적이 있다. 17일 오후 6시께 화랑초등학교 근처 문방구점 앞에서 범행을 구상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가르쳤다. 오후 9시30분에 다시 현장에 나타나 근하를 기다렸다, 범행은 혼자서 했다.’ 이 자백서는 ‘비행기를 태운다’는 따위의 협박을 받아가며 쓴 것이다>(〈조선일보〉 1967년 11월7일 사회면)
  
   〈국제신보〉의 호외가 뿌려진 것은 이 자백 뒤 일곱 시간이 흐른 3일 오전이었다. 이 호외에 가장 크게 당황한 것은 다른 언론기관의 기자들이었다.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그들은 號外기사를 바탕으로 갈팡질팡하며 혼란 속의 취재를 벌이기 시작했다.
   수사본부는 아직도 ‘범인’이란 말은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씨가 자백을 했으며 증거품과 傍證(방증)을 수집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범행자백’을 ‘범인 검거’로 받아들였다. 경찰이 워낙 큰 사건이므로 신중을 기하기 위해 공식 발표를 미루고 있다고 그들은 판단했다.
  
   이날 정오에 나온 부산의 兩大(양대) 신문은 모두 ‘진범 검거’ 기사를 1면과 사회면에 크게 실었다. 사회면의 약 4분의 3이 검거 기사였다. 〈국제신보〉 기자들에게 있어서 이날은 ‘승리의 날’이었다. 맞수인 〈부산일보〉가 3일자 석간에서 그들의 특종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들을 도취케 하였다.
  
   ‘18일 만에 풀린 원혼’이라고 〈부산일보〉의 사회면 머리기사는 소리치고 있었다. ‘써놓은 유서 발견이 단서’ ‘잡히면 자살한다고 미리 유서 써두어’, ‘과외수업 옮긴 데 앙심’, ‘수사관들에게 감사―근하군 가족’, ‘손뼉 치며 환호성―화랑교 어린이들’.
  
   두 신문은 온통 잔치 기분을 내고 있었다. 〈부산일보〉는 “범인은 대학시험에 떨어진 태권도를 닦은 놈팡이”라고 보도했다. 〈국제신보〉는 공범 손모씨도 함께 붙들었다고 했다. 범인 검거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근하군의 부모 사진이 〈부산일보〉에 실렸다. 〈부산일보〉는 “범인은 너무나 태연하여 형사들이 어리둥절했었다”고 전하고 수훈을 세운 한 주임의 약력도 실었다.
  
   이 잔치 기분을 깨고 나온 것은 다음날 〈조선일보〉(11월4일자)였다. 〈조선일보〉는 부산의 두 신문과는 달리 범인이란 말 대신 용의자로 표기하고 전씨에게 가명을 씌웠고 그의 사진도 싣지 않았다. 이 신문은 “전경렬이 자백을 번복했다”고 쓴 뒤 핵심을 찔렀다. “근하군이 살해된 시간에 전씨는 자기 집 다락방에서 네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고 국민학생들이 증언했다.”
   이들 어린이는 오후 7시부터 오후 10시가 넘도록 과외수업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전씨의 알리바이가 드러나면서 분위기는 급전했다. 이날 석간에서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는 서둘러 방향 전환을 했다.
  
   ‘심증으로만 굳힌 범인’ ‘볼 박스 등 物證(물증) 수집에 총력’… 경찰과 법원을 앞질러 바로 하루 전에 ‘진범 확정 판결’을 내렸던 두 신문은 “경찰이 증거품을 확보했다”고 스스로 보도한 사실은 까맣게 잊어먹고 “아직 노끈, 果刀(과도), 박스 등의 출처를 캐내지 못했으며 경찰이 압수한 바지, 잠바도 범행에 사용했다는 확증이 없다”고 썼다. 더구나 전날 두 신문이 보도한 ‘공범 체포’나 ‘자살 예고 유서’는 밑도 끝도 없는 허위였음이 밝혀졌다. 전씨가 근하의 가정교사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두 신문의 전날 보도내용 가운데 사실은 전씨의 이름과 주소, 그리고 ‘자백했다’는 내용 정도였다. ‘자백했다’는 부분도 ‘강압 아래서’란 상황 설명을 생략했었기 때문에 결코 진실을 전한 것은 아니었다.
  
   방송과 신문들의 誤報(오보)에 들고 일어난 것은 전씨의 모교인 경남상고 학생들이었다. “엉터리 수사와 신문 오보로부터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하자”고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에 들어간 것이었다. 이들은 4일 오전 국제신보,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을 차례로 돌며 “특호 활자로 오보를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전씨의 이웃 사람들 약 서른 명도 수사본부에 몰려가 집단항의를 했다. 그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사흘간이나 가두어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대들었다. 전씨의 가르침을 받던 어린이 네 명도 수사본부를 찾아와 “억울한 우리 형님을 내놓아주셔요”라고 울먹였다.
  
   전씨가 경찰에서 풀려나온 것은 연행 92시간만인 5일 오후 10시였다. 부산지검 김용제 검사장이 이날 오전 “물증을 못 찾으면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경찰도 근하군이 살해된 시간에 전씨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결정적인 알리바이를 깰 수 없었던 것이다. 한일민 주임은 뒤에 말했다.
   “신문의 앞지른 보도가 수사를 망쳤다. 우리는 전씨를 진범으로 단정한 적이 없었고 다만 수사 대상으로 선정했을 뿐이었다. 수사가 익기도 전에 신문이 오보를 함으로써 모든 상황이 흐트러졌고 경찰은 제대로 수사도 못하고 중간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씨는 풀려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고 나흘간 굶으며 당한 고문을 낱낱이 〈조선일보〉기자에게 털어놓았다.
   ‘살아있는 고문 수사, 나는 이렇게 짓밟혔다’―〈조선일보〉는 11월7일 이런 사회면 머리 기사로 경찰을 공격했다. 그 뒤 형식적인 ‘고문 경찰관 조사’가 있긴 했으나 처벌받은 형사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미쳐버리지 않을까 겁이 났다”
  
   내가 1981년 6월, 열네 해 만의 첫 기자로서 전씨 집을 찾았을 때 사진을 통해 낯이 익은 전씨는 반갑게 기자를 맞았다. 남동생과 노부모 및 아내와 딸 등 다섯 식구를 부양하는 의젓한 30대의 家長(가장)으로 변한 그의 모습에서 기자는 지난날의 고통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흔 평의 垈地(대지) 위에 두 해 전 새로 지었다는 스물두 평짜리 아담한 양옥은 부산 동래 금정산 기슭의 숲을 배경으로 하여 깔끔하게 그들 가족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언젠가는 한번 밝혀야 할 얘기지만….”
   전씨는 부엌일에 바쁜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아직도 그의 마음과 몸속에 살아 있는 ‘악몽’을 되씹기 시작했다.
  
   “그들이 나를 내보내주기 전에 고별 대접을 해주더군요. 해운대 여관에서 나흘 만에 처음으로 밥도 먹이고 목욕도 시키고…그런데 목욕탕에서 몸을 씻는데 말입니다, 천정에서 물방울이 뚝뚝 내 몸에 떨어지는데 그것이 깜짝깜짝 놀랄 만큼 아픈 거예요. 내가 이거 신경이 좀 이상해졌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전씨는 풀려나온 뒤 동부경찰서 바로 옆에 있는 봉생신경외과에 입원했다. 이틀 뒤 그는 다시 부산대학병원 신경외과로 옮겼다. 2주 뒤 그는 퇴원했다. 전씨는 그때 진단서를 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떼어주겠다는 의사가 없더란 것이다. 진단서가 없으니 고문을 받았다는 증거도 세울 수 없었다.
  
   퇴원 뒤 通院(통원) 치료를 받다가 곧 돈이 떨어졌다. 그때 전씨의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1급 상이용사였다. 전씨의 첫돌 날에 징집된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부대에서 이탈, 고립됐다. 그는 어깨에 총상을 입은 채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 1950년 겨울부터 1953년 4월까지 신의주 포로수용소에서 고생하다가 포로 교환으로 살아 돌아왔다. 凍傷(동상)으로 오른쪽 세 손가락을 잃고서. 이 불구 아버지의 연금 6000원과 어머니의 구멍가게 수입금 월 7000원으로 전씨네 여섯 식구가 생계를 잇고 있었다. 전씨가 再修(재수)하면서 가정교사를 하여 월 7000원쯤을 보탰는데 이것을 그 소동 뒤 집어치웠다.
  
   퇴원 뒤 치료비가 모자라 전씨는 집에 누워 있기만 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몽롱한 정신상태가 계속됐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전씨를 손수레에 싣고 거적으로 덮은 뒤 시경 마당으로 밀고 들어가 “내 아들 살려내라”고 대들기도 했다. 그제야 형사들이 찾아와 합의를 하자고 했다. 합의금으로 5만 원을 제시했다.
   결국 전씨는 25만 원에 경찰과 합의, 민․형사 간에 앞으로는 더 문제를 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로도 전씨의 정신 상태는 악화될 뿐이었다. 우선 속골이 아파 미칠 지경이었다.
   “마취를 하지 않고 생다리를 절단하는 그런 아픔보다 더한 것 같았어요. 그 고통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곤 했어요.”
   길을 걸으면 땅이 45도쯤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전봇대를 붙들고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도 했다.
  
   이웃의 동정은 극진했다. 그러나 전씨를 꺼림칙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경찰에서 전씨를 내놓았을 때 몇몇 신문들은 “경찰은 傍證(방증) 수집을 계속하겠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드러나면 언제든지 구속할 수 있다”고 꼬리를 달았다. 마치 증거가 없어 못 잡아넣는 것처럼 보도했다. 이 때문에 전씨를 속으로는 의심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는 것이다.
  
   전씨 부모는 아들의 환경을 바꿔주려고 그를 양산 통도사의 취운암에 보내 靜養(정양)을 시켰다.
   “이 암자에 한 친구가 위문 차 놀러왔더군요. 그 친구는 사흘 동안 같이 자면서 나의 손목시계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겠어요. 뒤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경찰의 부탁을 받아 뭘 캐내려고 날 찾아왔을 것이란 거예요.”
   이 암자의 방세가 너무 비싸 1968년 봄 전씨는 양산군 기장면 백두사로 옮겼다. 혼자 산속에서 조용하게 있어도 그의 病勢(병세)는 좋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빠개질 듯 아프고 신경통 환자처럼 뼈마디가 쑤시면 자살 생각이 문득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부모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내가 잘된 뒤 보자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순전히 오기로 버틴 것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이러다간 미쳐버리는 게 아닌가 겁이 솟아나기도 했어요.”
   “근하군 살해범 일단 네 명이 일망타진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씨가 들은 것은 바로 이 암자에서였다.
  
   검찰의 일망타진 발표
  
   1968년 5월29일 전국 신문들은 또다시 기뻐 날뛰었다. ‘근하군 살해범 일망타진’이란 제목이 1면 머리(<국제신보>와 <부산일보>)와 사회면 머리를 장식했다. 주범 최형욱(가명․당시 40세), 하수인 정대범(당시 21세), 살해 교사범 김기철(당시 29세), 김금식(당시 33세)씨의 사진이 큼직하게 실린 것은 물론이었다. 사건을 해결한 부산지검 김태현 부장검사의 흡족해하는 표정 사진과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 수사의 명검사’란 프로필 기사가 또한 빠질 수 없었다. 그것은 근하군 살해 사건의 ‘제2代 진범’ 대관식에 걸맞은 신문의 대접이었다. 이 대관식에 ‘초대 眞犯(진범)’이 빠질 수는 없었다. 기자들은 전경렬씨의 부모를 찾아가 소감을 받아갔다. 전씨의 아버지는 ‘멀쩡한 자식을 병신 만들어놓은’ 경찰을 원망하면서 이제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으니 개운하다고 말했으나 어머니는 ‘아들 물어내라’고 통곡을 터뜨렸다.
  
   전국의 신문들이 신들린 것처럼 이 검거 기사를 크게 취급한 것은 결코 호들갑이 아니었다. 검찰의 발표 내용은 강력사건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극적 요소를 망라하고 있었다. 主犯(주범)이란 최형욱씨는 근하의 친 외삼촌이었다. 외삼촌이 조카의 살해를 원격조종하고 협박장이 오면 매부의 돈 백만 원을 직접 들고 나가 하수인들에게 건네주기로 계획했었다는 발표 내용은 독자들을 분노케 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외삼촌은 비정했다’는 사회면 머리기사, ‘나는 오빠를 저주한다’는 근하 어머니의 手記(수기. 기자가 재구성한 듯)는 이런 분노에 부채질을 했으나 과하다는 느낌은 별로 주지 않았다.
  
  이들은 점조직과 가명을 써가며 범행을 저질렀고 潮水(조수)의 流動(유동)을 계산, 시체를 대마도 쪽으로 실어 보내 버리려 했다는 대목도 이 사건을 흥미롭게 윤색했다. 이들이 ‘국가가 보장하는 알리바이’를 얻기 위해 대구교도소 교도관들을 매수, 복역 중이던 김금식을 범행 당일 하루만 빼내어 사용한 뒤 다음날 다시 감방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완전범죄를 노렸다는 줄거리는 어떤 추리소설의 경지도 앞서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검찰 엘리트가 역시 경찰과는 다른 점이 있다면서 이 어려운 사건을 풀어간 김태현 검사의 쾌거를 칭송해 마지않았다.
  
   6월20일 검찰은 네 명의 교도관을 포함한 일곱 명(정대범씨는 현역병으로 軍裁에 돌림)을 가중 뇌물 약속, 허위 공문서 작성, 동 행사, 간수자 도주 원조, 강도 살인, 사체 유기, 도주, 직무유기 등 여덟 가지 罪名(죄명)으로 기소했다.
  
   부산지법에서 열린 공판에서 여섯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범행을 부인했다. 검찰 수사에서 자백을 한 피고인들도 그것이 자신들을 공산당으로 모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임의성 없는 자백이었다고 말했다. 다만 김금식씨만은 범행 사실을 적극 시인했다. 그마저 10월21일의 9회 공판 때부터는 심경 변화를 일으켰다. 지금까지의 자백은 경찰과 검찰의 수사능력을 시험, 우롱해보기 위한 창작이었다고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찰이 발표한 범인이란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각본에 속은 검사가 配役(배역)에 맞춰 잡아들인 무고한 양민들이며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라고 폭로하고 자신에게 베푼 검사의 야릇한 대접까지 까발렸다.
  
  그러나 1심 판사는 1968년 11월22일 전원의 有罪(유죄)를 인정, 최형욱, 김기철, 김금식씨에게는 사형을 선고했다. 항소심 선고 공판은 그 이듬해 3월21일 대구고법에서 열렸는데 이번엔 전원에게 無罪(무죄)가 선고됐다. 6월25일에는 대법원이 전원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2대 진범들’도 가시관을 쓴 무고한 사람들로 밝혀진 것이었다.
  
  
  
[ 2011-04-12, 10: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천영우TV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자유민주연구원  |  이승만TV  |  이기자통신  |  최보식의 언론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