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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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표주완 작성자ID : abcd4737 조회 : 237 추천 : 37 작성일 : 2004-04-24 22:24:40
  
   빨갱이에게 이기기위한 신무기
   학생들에게 읽힐 책이 없습니다.
   대개 친북사상에 대한 책이 참신 혹은 비꼬기라는
   미명하에 교과서처럼 읽히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사랄 수 없고
   인민혁명에 미련을 못버린 한홍구의
   칼럼식 대한민국사와 태백산맥이 대학생의 교양서가
   되어 있으니 허무한 일이죠.
   그러나 조정래씨도 박정희대통령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한 바 있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한 깃발을 꽃은 분으로 평가했죠.
   아래글은 사실 제가 조독마에서 긁어 놓았던 글입니다.
   빨갱이들은 읽을 필요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빨갱이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내용을 숙지하셔서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바른 가치관을
   심어주세요.
   아래 펌.
  
  
  
  
  
  
  1. 해방 후 우리에게 다섯 분의 민족지도자가 있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이 그들이다. 과연 이 다섯 분중에 누가 올바른 길을 인도한 훌륭한 지도자였을까?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붕괴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두다 서둘러 자본주의체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동안 키워 왔던 국영기업들은 개방체제하에서 경쟁력이 없었으므로 하루 아침에 문을 닫고 외국기업들에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실업률이 10%대인 지역은 상황이 너무 좋은 곳이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실업률이 70%를 넘는 곳도 있었다.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품을 팔아야만 했다. 그나마 월급을 변변이 주는 곳은 외국기업들 밖에 없었으므로 동구의 젊은이들은 필사적으로 영어, 독어, 불어를 배워야만 했다.
  
  지난 40여년간 배워 왔던 지식, 믿어 왔던 가치관들이 하루 아침에 틀린 것이 되고 거의 모든 것을 새로 고쳐 배워야만 했다. 지난 40여년간 편안하게 길들여져 있던 모든 제도와 관행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새로 생겨난 제도들은 무슨 소린지 언뜻 이해되지 않는 안갯속 같고 깝깝한 것이었다. ´온통 헛고생한 40년의 세월´이라는 쓰라린 낭패감을 안은 채 마치 하루 아침에 뭍에 나와 살라고 내팽개쳐진 물고기떼와 다름없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비규환의 몸부림을 쳐야만 했다.
  
  우리는 그동안 이승만이 민족분열을 획책했다느니 친일파를 온존시키고 독재를 했다느니하여 그를 물어뜯고 할퀴고 우리 스스로를 자학하는 사이에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승자의 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동구권 사람들이 깝깝하고 끔찍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 동안 우리는 승자의 언덕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전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해방 당시 쟁쟁했던 지식인들의 대부분은 이승만을 냉랭히 외면한 채 박헌영과 김일성의 진영으로 모여들었다. 이승만이 외로이 들었던 ´남한 민주기지론´의 깃발 아래에는 해방 당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했던 친일파들까지도 다수 끼어 들었다. 이승만은 이 친일파까지도 부여 앉은 채 초라하고 오욕으로 얼룩진 모습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온갖 반대와 욕설을 무릅쓰고 반공친미노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로 신생 대한민국의 방향을 힘껏 틀었다. 이는 우리가 승자의 언덕으로 향하는 첫 발걸음이 되었다.
  
  모든 정치지도자들에게 공과가 함께 하거니와, 아직도 이승만의 과를 천착하기에 바빠서 그가 우리 7000만 한민족에게 베풀었던 큰 공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다.
  
  2. 1980년대 중반 한국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어제까지 만성 국제수지 적자국가이던 한국이 년간 100억불내외의 국제수지흑자 행진을 계속하였다. 중화학공업위주의 고도산업구조와 수출상품구조가 정착되었다. 한국자본주의의 대성공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어디서부터 이런 경이적인 성공이 비롯된 것일까?
  
  요사이 논자중에는 이를 ´3저호황´때문이라고 쉽게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3저호황은 전세계 공통현상이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등은 국제수지 흑자의 증가가 대단치 않았으며 브라질은 오히려 100억불 적자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오직 한국만이 비약적인 상승을 기록하고 있었다.
  
  가깝게는 제5공화국 초기, 매섭고 세련된 솜씨로 새로운 성장체제로의 판짜기를 진두지휘했던 김재익 경제수석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최우선시했던 그의 정책들은 지금 음미해도 탁월한 바가 있고 확실히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에 큰 기여를 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불과 3년여의 재임기간에 불과했던 김재익이 중화학공업위주의 고도산업구조를 창출하고 정착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시 누구도 언급하기를 꺼려했지만 1973년부터 국가의 명운을 걸고 비장한 각오로 중화학공업투자를 감행했던 박정희가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을 만들어 낸 최대의 기여자였음을 솔직하게 인정했어야 했다.
  
  박정희가 주도했던 중화학공업투자는 1979년 제2차 오일쇼크의 강타를 맞아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고 그 와중에 박정희도 비운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던 것이지만, 5공 초기의 혹독한 구조조정과 경쟁력강화정책을 거친 후, ´3저호황´을 만나자 화려한 꽃을 피우며 정착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달성한 단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전세계적으로도 이러한 산업구조를 가진 나라는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정도 뿐이며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미 이 대열에서 탈락하였다. 중국이 이 대열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따라 오고 있지만 그들이 과연 한국 수준의 성공을 할 수 있을지는 최소한 10년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진국들은 대부분 바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혹독한 고난의 역사가 한국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6.25내전으로 지옥까지 다시 한번 굴러 떨어져야 했고 1960년대 초가 되서야 남들이 섰었던 출발점에 형편없는 지각생으로서 겨우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불과 20여년만에 우리는 다른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이루어 낸다. 박정희가, 박정희와 더불어 우리가 이루어 낸 놀라운 성취였다.
  
  왜 한국을 경제발전에 성공한 나라라 할 수 있었을까?
  
  우선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 전기, 전자, 반도체, 정보통신, 석유, 화학등 국가적 명운을 걸고 추진했던 모든 대규모 투자들이 단 하나도 실패한 것이 없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중요한 기업들의 소유권 내지는 경영권을 모두 한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한국은 강대국들만이 누리고 있는 훌륭한 밥벌이들을 우리 손으로 직접 영위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1997년 뼈저리는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여전히 이 기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의 위치에 올라 있다. 적어도 한국이 세계 5위권내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된다면 세계중심국가중의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남북으로 분단되고 세계 4강에 둘러싸인 이 기가 막히는 지정학적인 구도속에서도 한국은 자주성을 발휘할 수 있는 물적, 군사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6.25내전같은 전쟁들로 말미암아 이 땅이 또다시 짓밟히는 것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NO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한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세계 10위권이니까 ´고지는 바로 조기´라고 말하고 싶다.
  
  박정희로부터 비롯된 개발년대의 성취가 요즈음 온갖 우울한 기사들이 신문지를 얼룩지게 해도 한국에 대한 희망을 끝내 버릴 수 없는 이유이며, 향후 남북통일이 되어 먹여 살릴 식구가 갑자기 2000만명이 늘어난다 하여도 크게 걱정되지 않는 이유다.
  
  박정희는 개발독재자로서 오직 성장일변도의 정책만을 추구한 사람으로 인상지워져 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가난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에 대해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 행동과 실적으로 그들의 실생활 향상을 진지하게 의도했던 사람으로 판단된다. 1970년대에 박정희는 심혈을 기울여, 공업화우선정책으로 소외되고 희생되었던 농어민들을 대상으로 새마을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말로는 박정희를 존경하는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면서 실제 우리 공동체사회의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배려나 구체적인 행동에 인색한 자들이나, 말로는 분배, 분배를 외쳐대면서 실제로 어떤 뚜렷한 성과도 보여 주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들과 박정희는 뚜렷이 구분되어야 한다. 어쩌면 단군이래 박정희보다 이 나라를 단기간 내에 급속히 성장시키면서 동시에 분배문제에도 성공한 사람은 달리 없는 듯하다.
  
  새마을운동은 성공한 녹색혁명이었으며 당시 많은 후진국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때 분명히 우리의 농어촌은 활력이 넘쳤으며 희망을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새마을운동은 잊혀지고 추락해 갔지만 그것이 1970년대 한국농업의 한 이상형을 제시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 이후 한국농업은 1994년 우르과이 라운드의 대지진을 맞으며 격렬하게 흔들리게 된다. 그 여진은 칠레 FTA비준 반대시위, 금번 칸쿤회의까지 이어졌다.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타결이래 정부는 6조원을 농업에 지원하였다고 하며 칠레 FTA로 인한 농가피해보상을 위해 1조원을 추가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2002년말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의 자본금이 8891억원이니까 삼성전자 7개이상을 털어 넣겠다는 셈이다. 한국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인구기준 7.5%, GDP기준 3.4%인 점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 6개 이상 세울 돈을 털어 넣고도 10년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식량자급, 식량안보는 요원하고 국내 쌀값은 10년 전과 다름없이 국제시세의 서너배라고 한다. 어떤 시원한 비젼의 제시도 없이 한국의 농업정책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게임´을 하며 계속 표류하고 있다.
  
  3. 자주국방에 대한 박정희의 강렬한 의지와 실천은 거론하는 것 자체가 새삼스럽다. 차라리 경제발전의 성공을 위해 정치 민주화를 희생시켰다고 평가되는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한국의 정치 민주화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가에 대한 올바른 천착이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박정희와 그에게 종사했던 보수세력, 산업화세력이 성공시킨 경제발전이 한국에 광범위한 중산층을 창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전의 여론조사에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항상 70%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전투적이라 할만큼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고까지 매도하는 바로 그것이 한국의 대규모 중산층이 보여준 정치참여의 강렬한 모습이었다고 생각된다.
  
  지역적으로 표출된 중산층의식이 지역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추동해 간 사실은 한국정치 민주화의 전 과정을 통해 명료하게 드러나 보인다. 학생운동,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자잘한 사건들은 거의 다 잊혀졌지만 지역감정은 정치민주화의 중요한 고비마다 거대한 활화산과 같은 분출을 하면서 비약을 이뤄내곤 하였다.
  
  1979년 김영삼에 대해 신민당 총재직무금지 가처분결정이 내려지자 특히 부산•경남권의 중산층들은 폭동형태로 그들의 분노를 표출하였다. 부마사태가 터졌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위수령을 발령하는 등 초긴장상태로 빠지게 되고 그 진압방법을 둘러싼 강온파간 갈등은 10.26사건을 유발하게 된다. 결국 부마사태는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종식으로 연결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김대중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자 특히 광주•전남권의 중산층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그들의 절망감을 폭발시킨다. 전두환 정권은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무력진압에 성공하였지만 그 후유증은 전두환 집권 7년 내내 돌이킬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끝 모를 정치불안, 사회혼란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이 발발하게 된다.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관여했던 6월항쟁은 ´넥타이 부대´로 통칭되는 수백만 중산층 시민들이 서울과 부산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에 참여하면서 급기야 6.29선언으로 귀결되게 된다. 부마사태, 광주민주화운동, 6월항쟁을 통해 표출된 격렬한 지역감정은 마침내 총칼과 고문과 정보정치에 의존했던 군사정권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마는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간 우리는 이들 사건들을 모두 민주화운동으로 성스럽게 불러 왔다. 어쩌면 이들 사건의 근본적인 동력이 매도당해야 할 ´지역감정´이라는 사실에 대해 애써 눈감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영삼과 부마사태, 김대중과 광주민주화운동, 김영삼•김대중과 6월항쟁이 정확히 지역적으로 공명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역감정의 근본은 ´지역별로 표출된 중산층의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지역감정에 의해 이들 사건이 일어났다고 솔직하게 표현한다해서 이들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과 의미가 훼손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한국 정치민주화 역사의 의미가 더욱 명료해 질 뿐이다.
  
  또한 지역감정은 1980년대이래 한국의 정치구도를 지역별 중산층에 기반을 둔 지역정당구도로 구조화시키기에 이른다. 한국정당의 정강들간에는 차이가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지역별로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중산층에 기반을 둔 정당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차이가 없는 게 당연하지 비난을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비중산층적이거나 반중산층적인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주장도 의미있는 정치세력화하기에 불가능한 정치환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정권이 무력화된 이후 지역정당구도는 각종 선거에서 지역간 합종연횡을 통해 차례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탄생시키며 순조롭고 안정적인 정치민주화를 이루어 내게 된다. 한국의 정치민주화는 대규모 중산층 시민들이 ´지역감정´이라는 이름의 정치참여를 통해, 때로는 격렬한 폭동과 시위로, 때로는 지역구도하의 선거로 이루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란 드높은 악명속에 거론조차 되지 않았지만 ´지역감정이 한국정치의 민주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순기능´을 인정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선진국들의 정치민주화 경험에 따르면, 경제발전이 하루하루의 갈급한 생존문제에서 벗어난 광범위한 중산층을 성립시키고, 다수 중산층의 보다 질 높은 삶,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이 견고한 정치 민주화의 토양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동안 지역감정에 덧씌어진 악명때문에 우리는 그 말의 밑바닥에서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던 ´대규모 한국 중산층들의 보다 질 높은 삶, 보다 인간다운 삶에 대한 열망´을 간과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선진국 정치민주화의 일반적인 경험은 한국에서도 예외없이 타당했다고 보여진다.
  
  물론 한국의 지역감정에 ´국민소득 1만불 이하수준에서 형성된 아직 성숙치 못한 중산층의식´이 반영되고 있다는 비난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감정을 망국적이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캐나다등 더 극심한 다른 나라의 예들을 고려할 때 분명히 과장되었고 자학적이다.
  
  한국 민주화과정에 1980년대 학생운동,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기여를 부각시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운동권 사람들은 전체국민 5000만 중에서 항상 소수 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용기있게 목소리를 높이 외친 자, 앞장 섰던 자로서는 평가될 수 있겠지만 그들이 항상 소수로 남은 채 광범위한 중산층의 전투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 군사독재정권의 지속적인 탄압의 대상은 되었을 망정 군사독재정권을 패퇴시키지는 못할 일이었다.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듯이, 그들은 후보단일화론•비판적 지지론•독자후보론으로 분열되면서 김영삼, 김대중의 제도권 민주화세력으로 흡수합병된 후 소멸되어 갔다. 그들의 정치적인 정체성과 뿌리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래로 한국 중산층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은 그들이 때로 지역감정을 악용하여 국가분열적인 대립양상까지 초래하기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에 대한 공로를 일정하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집권이후까지의 실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그들의 국가에 대한 총체적인 기여는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김영삼은 한국의 외환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는 대규모의 과잉투자들을 방임, 조장하였으며 특히 1994년이래 중국과 일본의 평가절하정책에 대해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1994년 중국은 30%의 평가절하를 일시에 단행하였다. 한편 일본은 1994년부터 아시아 외환위기때까지 점진적으로 30%이상의 평가절하를 해나간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에 11%의 평가절하를 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한국도 최소한 일본수준의 평가절하를 했어야 했다. 그래서 수출을 빨리 늘리고 과도했던 외채를 상환하도록 압박했어야만 했다.
  
  외환위기 초년도인 1998년에 한국경제는, 30-40%의 원화 평가절하만으로 485억불이라는 경이적인 무역수지 개선효과를 거둔다. (97년 -81.6억불, 98년 403.6억불 : 한국은행통계 기준) 이제까지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중에서 초년도에 이런 정도의 경이적인 무역수지 개선효과를 보인 나라가 있었는가? 도대체 이런 능력을 가진 한국이 왜 외환위기를 당해야 했다는 말인가? 높은 부채비율, 비효율적인 금융시스템등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고 해도 한국경제전체의 펀더멘탈은 올바로 관리되기만 했더라도 절대로 외환위기를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1994년이래의 환율정책실수에 대한 안타까움은 계속 남는다.
  
  후임 김대중은 ´우리는 2년반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며 국민의 정부의 치적인양 자랑했지만, 이는 우리가 영국, 남미국가들과 같은 ´통상적인 외환위기´가 아니라 ´환율정책실수로 인한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또 다른 방증이 된다. 환율이 적정하게 조정되자 경제는 2년반만에 곧바로 회복되었던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외환위기의 원흉은 김영삼과 1994년이래로 재경원장관을 지낸 홍재형, 한승수다. 그들이 뭉기적거리는 동안, 무역수지적자는 1994년 39억불, 1995년 85억불, 1996년 230억불로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한국은행통계기준)
  
  강경식과 김인호는 이미 아시아 외환위기가 현재화된 상태에서 침몰하는 배의 마지막 선장단을 수락한 어리석음의 죄가 있다. 취임 후 바닥난 외환보유고를 인지한 즉시, 환율자율화조치를 취했어야 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강경식은 그 대신 금융구조개혁입법을 들고 국회를 쫓아 다녔지만 이회창, 김대중의 외면으로 헛탕을 쳤고, 바닥난 외환보유고와 시시각각 다가오는 외환위기앞에서 금융구조개혁입법이 통과되었다 한들 그것이 외환위기를 막는데 무슨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외환위기같은 참변을 당하고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규명하지 않고, 그 원흉을 정확히 찾아내어 징벌하지 않고, 침몰하는 배의 선장단으로서 허둥된 죄 밖에 없는 강경식-김인호만 희생양으로 때려잡은 한국인들의 불철저성과 몰역사성은 歷史의 神의 분노를 자아낼 만 하다.
  
  흐리멍텅한 역사의식수준을 가진 한국인은 노무현의 대통령당선과 그의 조속한 몰락을 통해 또 한번 神의 懲罰을 받고 있다.)
  
  김대중이 상당한 액수의 달러로 대북비밀송금을 한 것은 이미 입증되었다. 그 돈이 북한의 핵개발, 미사일개발에 전용되었으리라는 강력한 의혹도 이미 제기되었다. 만약 이것이 구체적 물증에 의해 뒷받침된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한국의 안보상황은 어찌 되는가? 그는 북핵위기를 조장한 장본인이란 말인가?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핵지뢰를 깔아 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대가로 그는 노벨평화상을 챙겼단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의혹들이 엄존하는 한 그에 대한 평가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모두 무의미할 뿐이다.
  
  ´지역감정이 한국 중산층들의 강렬한 정치참여´였고 한국의 정치민주화도 구미나 일본등의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주도하는 민주화과정을 걸어 왔음을 인정한다면 그간 한국 정치민주화에 대한 논공행상도 기존의 통념과는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우선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한국의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에 가장 큰 공훈자였으면서도 ´말없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아무런 공훈도 받지 못하고 잊혀져 있었던 한국의 중산층은 최고의 공훈자로서 복권되어야 한다.
  
  둘째로 박정희와 그에게 종사했던 보수세력, 산업화세력은 반민주적이라는 온갖 비난과 모욕으로 얼룩지고 일그러진 모습이다. 하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자´며 경제발전에 처절할 정도로 매달렸던 그들은 한국의 대규모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가장 기여한 사람들이었다. 이들도 정치 민주화의 실질적인 1등공신으로서 당연히 복권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심정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진실만이 최대의 스승이다. 김영삼, 김대중등의 제도권 민주화세력이나 학생운동, 사회운동, 노동운동의 운동권세력이 대규모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기여한 사람들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른 나라의 예와 비교해 보면 박정희등의 기여는 더욱 분명해 보인다. 압축적이었던 한국의 정치 민주화과정에는 레닌, 모택동, 호지명같은 세계적인 혁명영웅들이나 간디, 네루, 만델라같은 세계적인 반체제 민주화 영웅들의 활약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그들의 나라보다도 더욱 민주화된 사회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더불어 최고의 수준이며(일본에도 근대화에 기여한 보수세력, 산업화세력이 많지만 이런 류의 세계적인 영웅들은 없다) 세계적으로도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다.
  
  어찌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 주된 이유는 그들의 나라는 광범위한 중산층을 창출하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하였고 한국은 성공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의 나라에는 없는 ´박정희와 보수세력, 산업화세력´을 한국은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성공한 경제발전 노력은 광범위한 한국의 중산층을 창출하고 그들의 전투적이기까지 한 정치참여를 유발시켜 오히려 그의 군사정권과 후임 군사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아이러니를 야기한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박정희의 말에는 큰 공을 이루고도 끝내 배척받고 오해받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비장한 운명에 대한 예감이 서려 있는 듯하다. 이제 그에 대한 배척과 오해를 벗겨 내야 한다. 경제발전과 대규모 중산층 창출을 통해 정치민주화를 위한 견고한 토양마저 일구어 냈던 그의 공을 정확하게 평가해야만 한다.
  
  앞장서서 피 흘리며 고문 받고 감옥 가고 죽어 갔던 사람들의 공을 과소평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재벌들이 경제발전의 과실을 지나치게 많이 누렸던 세력이었듯이 소위 민주화세력으로 통칭되는 사람들은 정치 민주화가 지나치게 자신들만의 공인양 독점함으로써 과도한 권위와 보상을 받았던 것은 아닌지 이제 냉정하게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친일파가 독립투사로 둔갑한 경우가 있듯이 혹시 반국가행위를 한 자가 민주화인사로 둔갑한 경우는 없었는가? 아직도 스스로 한국정치 민주화의 일등공신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혹시 내가 호랑이의 권위를 훔쳐내어 요사를 떠는 여우가 아닌지 독하게 회의해 볼 일이다.
  
  4. 한국 외환위기의 원흉이었던 ´관치금융체제´와 ´재벌중심의 산업구조´의 창시자가 박정희라는 비난은 그에게는 좀 억울한 것일지도 모른다.
  
  박정희란 사람이 관치금융-재벌구조가 국민소득 1만불 달성에는 도움이 되지만 국민소득 2만불, 3만불로 나아 가는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이들 구조를 부숴 버리고 새로운 방향전환을 시도했을 사람이라는 데에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까지도 지금쯤은 쉽게 동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박정희가 죽고 5공 초기에 김재익이 민간주도의 경제운용, 국가경쟁력 강화, 물가오름세 심리의 억제, ´경제학교과서에 씌어진 대로 실행한´ 소득정책(이는 전두환의 철권통치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되었다) 은행민영화, 자본자유화, 외환자유화, 무역자유화등을 추진하였다. 김재익의 매섭고 세련된 손끝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김재익이 더 오래 살고 그의 경제정책들이 박정희 사후의 역대 정권에서도 새로운 성장체제로서 확고히 자리 잡아 갔다면, 관치금융-재벌구조는 점진적으로 고통을 최소화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되고, 한국경제는 새로운 성장가도를 달리며 1997년의 외환위기마저도 저만치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안타깝게도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사건으로 곧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5공이 끝나가면서 불어 온 노동운동의 열풍속에 한국경제의 운용기조는 혼미를 거듭하게 된다. 이에 편승하여 박정희가 감행했던 중화학공업투자가 ´단군이래 최대 호황´으로 성공을 거두자 재벌들은 제2차 중화학공업투자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물론 곧 열릴 것이라 예상되는 중국시장을 재계 모두가 큰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에 1980년대 후반부터 불황에 빠지기 시작한 세계금융시장이 신흥시장으로 돈을 풀기 시작하면서 재벌들의 투자열풍은 질풍노도처럼 질주하게 된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을 치고 들어오니까 현대는 LG와 더불어 반도체사업 진출로 맞받아 치며 쳐들어간다. 기존의 자동차 3사 현대, 기아, 대우는 각각 200만대 몸집불리기로 삼성의 자동차 진출에 맞대응한다. 삼성이 자동차사업에 들어가는데 나는 왜 안 되냐며 쌍용도 끼어든다.
  
  삼성중공업이 조선도크 확장공사를 하니까 현대중공업, 한진중공업도 뒤를 따르고 삼호조선소의 신규건설도 추진된다. 한보와 현대가 종합제철소 계획을 추진하고 삼성과 현대는 각각 세계적인 규모의 종합화학공장의 준공을 서두른다.
  
  SK는 노태우 말기에 약삭빠르게 통신업에 진출하는데 성공하고 '통신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근거없는 낙관속에 너도나도 뛰어들게 된다.
  
  삼성의 자동차사업 진출을 못마땅해 했던 상공부장관이 곧 목이 날아가 버리고, 신규조선소를 건설하던 모 재벌회장은 '大馬이어야만 不死'이니까 '대규모로 건설하기'와 '막대한 돈꿔오기'를 독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금리-고임금구조속에서 관치금융-재벌구조는 공포스러운 과잉투자로 ´비정상적으로 높은 부채비율´이라는 아킬레스 건을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지만 역대 정권들과 우리들은 ´고비용-저효율 구조´니 뭐니 말만 늘어놓을 뿐 의미있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 모두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7년의 외환위기를 두들겨 맞고 아시아에서도 2류국가로 굴러 떨어진 후에야 우리는 엄청난 고통속에서 구조조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일본과 중국인들의 나라 -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어느 나라도 IMF관리체제에 들어가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박정희와 관치금융-재벌구조에서 찾으려는 노력은 비겁한 책임전가로 보인다. 박정희는 그의 출발점이었던 국민소득 78불 수준에 맞는 성장체제를 만들어 내어 매진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때 관치금융-재벌구조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박정희가 죽은 이후 훌륭한 모범을 보였던 김재익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새로운 성장체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치열하게 실천한 자를 찾기 어렵다. 우리 모두 박정희가 만들어 놓은 관치금융-재벌구조에 오히려 안주하면서 10여년의 세월을 비틀거리다 꿈결속에 두들겨 맞은 외환위기 아닌가?
  
  (관치금융은 경제개발시기에 부족한 투자재원을 특정 전략산업에 집중시키기 위해 박정희가 창출해 내고 훌륭한 성과를 보였지만, 정말 정신 똑바로 박힌 지도자가 엄정하게 통제하지 않는 한 망국으로 갈 수 있는 함정이기도 하다.
  
  사실 박정희 사후 ´타락한 관치금융체제=너도나도 은행돈 뜯어먹기(한국에서 은행돈 먹을 줄 모르는 놈은 병신)´가 1997년 외환위기의 遠因이 되었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관치금융체제에 있고 공산당 고위간부의 태자당들, 친인척들의 준동이 만만치 않으며 금융관련 부패 얘기, 심각한 은행부실화 얘기가 끊이지 않는 중국이지만, 외환위기를 당하지는 않았다)
  
  5. 이승만이 하야한 지 40년이 넘었고 박정희가 죽은 지 20년이 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수 많은 독재자들이 사망하거나 실각한 후 반드시 뒤따라 다니던 천문학적인 숫자의 부정축재환수문제와 해외비밀계좌 시비가 그들의 하야와 죽음뒤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부정축재, 친인척비리, 가신비리, 대북비밀송금등으로 오물바가지를 뒤집어 쓰며 퇴장했고 그들중 일부는 지금도 구질구질한 악취를 풍기고 있지만 이승만의 하야와 박정희의 죽음뒤에는 이런 것도 없었다.
  
  20세기는 5000년 역사의 한국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중의 하나였다. 이 땅을 유린했던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끝나자 곧 40년간 일본제국주의의 지배를 받았고 당대의 첨단 무기로 무장한 다국적군들이 뒤엉켜 싸운 6.25 내전이 있었으며 공포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50년이 넘는 민족분단이 있었다. 100년이 넘도록 민족의 고난은 계속 되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한민족이 이 100년의 고난을 극복하고 승자의 언덕으로 나아가게 한 두 위대한 지도자였다. 이승만은 승자의 언덕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박정희는 우리를 승자의 언덕으로 인도하였다. 아직도 이것을 선뜻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면 우리는 정말 역사를 모르는 민족이다.
  
  심경섭
  
  2004-01-02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3개의 차원
  
  1.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첫 번째 차원은 한국사회를 내부적으로 어떻게 보는가하는 점이다. 이에 관해 가장 친숙한 시각은 ´民主 對 反民主´이다. 이 시각에 따르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모두 ´죽일 놈´들이고, 노태우는 ´물태우´로서 그런대로 봐 줄만 하며, 김영삼, 김대중등은 ´민주화의 영웅´들이 되고,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민주주의가 활짝 꽃을 피운 형국이 된다.
  
  나는 이 ´민주 대 반민주´의 시각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려 하였다.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민주화마저도 박정희와 보수세력•산업화세력이 성공한 경제발전을 통해 ´대규모 중산층 창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이 ´정치민주화를 위한 견고한 토양´위에서 김영삼, 김대중등이 ´군사독재정치의 청산, 대통령 직선제의 쟁취, 수평적인 정권교체의 실현´등 후속적인 정치민주화과정을 이루어 나갔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이 부분 '다시 이승만과 박정희를 생각한다' 참조 요망)
  
  이를 입증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망국적인 지역감정´이라 불리며 ´한국정치의 어찌해 볼 도리 없는 애물단지´취급을 받았던 바로 그 ´지역감정´이 ´대규모 한국 중산층들의 격렬하며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비록 지역감정이 만족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한국의 정치민주화에 기여한 절대적인 순기능´을 우리 모두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제안도 하였다.
  
  현실정치의 세계에서, 박정희와 김영삼•김대중등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政敵의 관계에 있는 듯 보였지만, 한국 정치민주화의 역사 전과정에서 기실 그들은 각각 일정한 역할분담을 맡고 있었고, 대국적으로는 정치민주화를 위한 선후배로서의 협력관계에 있었다고 보여진다.
  
  한국의 정치민주화가 박정희등과 김영삼•김대중등이 모두 협력하여 이루어 낸 것이라면, 과연 누구의 기여가 더 큰 것이었는가하는 논공행상의 문제가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 있어서도 나는 기존의 통념과 다르게, 박정희와 보수세력•산업화세력등의 기여가 훨씬 더 크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한국의 민주화를 내 손으로, 우리 손으로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한국의 민주화세력들에게 확실히 묻고 싶은 질문 한가지는, 어찌해서 레닌, 마오쩌뚱, 호지명, 간디, 네루, 만델라들도 아직 이루지 못한 그들 나라의 민주화를, 한국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들만의 손으로 이루었다고 주장하는가 하는 점이다.
  
  명백히 한국의 민주화세력들중에는 투쟁의 격렬함•장구함, 국민 절대다수의 압도적인 지지, 세계적인 지명도, 세계사적인 중요성등에 있어서 레닌, 마오쩌뚱, 호지명, 간디, 네루, 만델라의 근처까지 갔다고 평가될 만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어째서 세계적인 ´獅子´들도 이루지 못한 정치민주화를 한국의 ´여우´수준에 불과한 인물들이 이루었다고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그동안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한국에 세계적인 ´호랑이´들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국의 세계적인 호랑이들이 일궈 놓은 견고한 정치민주화의 토양위에서, 한국의 여우들이 마치 자신들만이 이뤄 낸 공인양 정치민주화의 공로를 독점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의 민주화세력중에서 아직 이런 회의를 진지하게 해 본듯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는 바로 그들의 오만, 독선, 과도한 권위와 보상등에 대한 당연시, 그들에 대한 비판에 '우리가 민주화를 위해 고생할 동안, 뭐하고 있던 네가 감히 이따위 비판을 하는가?'라는 건방짐으로 나타난다. 실제로 노무현은 ´젊은 검사들과의 TV토론´중에 노골적으로 이와 유사한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과연 노무현의 정치민주화에 대한 공로는 그런 소리를 공공연히 해도 될 만큼 대단한 것이 있었던 것인가?
  
  2.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두 번째 차원은, 우리는 우리의 목숨과 행복을 걸고 북조선과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이 차원은 이승만의 ´남한민주기지론´과 김일성의 ´북조선혁명기지론´의 대결로 집약되며, 이 대결에서 이승만의 ´남한민주기지론´은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승만은 한반도 전체가 완전 독립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김구처럼 ´삼팔선을 베고 누워 죽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다´가 아니라면 ´반만´이라도 온전한 나라를 만들어 ´나머지 반´을 해방시키겠다는 ´남한 민주기지론´을 생각하게 된다. 최선이 불가능하니까 현실적인 차선을 선택한다. 물론 이는 민족분열책동이라고 당시에 엄청난 반대에 부닥치게 된다.
  
  북조선과의 체제경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확인하고 있는 2003년의 오늘, 그 승리가 너무 당연하고 큰 부담이나 고통을 수반하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북조선혁명기지론´으로 대응했던 김일성과의 대결, 전쟁, 경쟁은 지금 생각하듯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해방당시 남한과 북조선의 출발점은 결코 같지 않았다.
  
  잘 알려졌듯이 일제는 南農北工政策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남한에는 농업과 일부 경공업들만이 있었지만 북조선에는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군수시설, 중화학공업시설들이 건설되어 일제의 중국침략을 위한 거대한 병참기지가 만들어 졌었다.
  
  일본의 노구찌, 미쓰이, 미쓰비시 재벌들이 주도했던 북조선지역의 중화학공업화는, 당시 아시아 최대였던 압록강 수풍발전소를 위시하여 장진강, 허천강, 부전강 발전소등 수많은 발전소들이 건설되었고 한반도에서 만주까지 완비된 철로망을 깔았다. 이를 바탕으로 무슨 비료공장, 무슨 제철소, 무슨 공작소등 엄청난 중화학공업 설비가 건설되었다. 규모에 있어 세계적인 것도 많았고 설비수준 또한 당시로서는 세계 최첨단이었다.
  
  오죽했으면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들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공장 설비를 뜯어 가기에 바빴다고 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중화학공업설비들은 오늘날 우리가 망언이라 매도하여 마지 않는 일본 우익들의 발언 - 일본의 식민지 조선지배는 진정으로 조선의 발전에 기여한 것이었다 - 의 중요한 물질적 증거가 되고 있다.
  
  김일성은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였다. 젊은 나이에 소련군 정치군관들에게 발탁되어 하루 아침에 북조선의 행정수반이 되었으며, 그 북조선은 넘쳐 나는 전기, 잘 깔린 철로망을 보유한 최첨단의 중화학공업국가였다. 그는 이 엄청난 일제의 유산을 아무런 전쟁의 피해도 없이 고스란히 물려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온 유럽이 황폐화되었고, 일본은 미군의 공습과 원폭투하로 잿더미가 되었음을 상기한다면, 당시 북조선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달리 예를 찾기 힘든 최첨단 중화학공업국가였고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1949년 미국이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여 한국과 대만을 아시아의 반공전선에서 제외시켰을 때, 김일성이 곧바로 전쟁계획을 세운 것은 결코 무모한 결정이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더우기 1949년 소련도 핵무기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는 끝나게 된다. 누구라도 해 볼만한 결정이었다.
  
  해방당시 남한 지식인들의 월북러시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북조선의 지도부는 모두 항일투사출신들이었고 당시 조선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더우기 그들은 친일파반동과 악질반동지주들을 신속하고도 깨끗하게 숙청해버리는 혁명적인 모습을 과시하였고 토지개혁도 멋드러지게 해 치웠다. 일제의 엄청난 유산들은 미래의 경제적인 번영도 보장하는 듯 했다. 누가 봐도 민족사적 정통성은 북조선에 있는 듯 했고 ´우리의 조국은 북조선일뿐´이라는 외침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에 대비하면 남한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남아 있느니 친일파요, 월북하기에는 뭔지 모자라고 웬지 흠많아 보이는 쭉정이같은 인간들뿐이라는 인상이 짙었다. 짱짱해 보이는 북조선이 내뿜는 압력에다가, 월북하지 않고 남아서 암약하는 남로당 잔당들의 끊임없는 도발은 항상 남한정권에게 버겁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오랜 해외생활속에서 ´공산주의는 절대 안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이승만의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보여지는 옹고집만이, 남한을 지탱하는 유일한 버팀목으로 여겨졌다.
  
  잘 무장된 북조선 인민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6.25내전은 이렇다 할 것이 없었던 남한에게 어찌해 볼 수 없는 막막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UN군의 참전 결정이 없었다면 한국의 역사는 그때 막을 내렸을 것이고, 오늘날 북조선의 참상은 바로 우리의 것이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때 자기네 나라 대통령 트루먼을 경멸하고 오만불손하게 대하기를 서슴치 않았던 ´아시아의 카에사르´ 맥아더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국의 대통령-이승만의 식견에 탄복하여 이승만에게는 진심어린 존경과 깍뜻한 예의를 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승만 개인의 외교적인 역량이 그나마 국제전이 되어 버린 한국전쟁을 한국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 있는 유일한 우리의 역량으로 비쳐졌다.
  
  아시아의 반공전선 강화를 위해 미국은 한국에게 일본과의 조속한 국교정상화를 강요하게 되고, 이에 편승하여 일본이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던 1952년, 이승만은 돌연 ´이승만 라인´을 발표하여 관련국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 펄펄 뛰던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자유중국등 우방국들마저도 부당한 처사라고 비난하였다. 다른 나라들 같았으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폭거였다. 더우기 당시 일본의 수상은 ´전후 일본 최고의 수상´이라고 평가되는 요시다 시게루였고, 고집과 소신과 걸출함에 있어서 이승만과 쌍벽을 이룰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상황을 교묘히 이용한 이승만이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데 성공함으로써, 일본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외교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승만 라인으로 한껏 확보된 해양상의 이익은, 경제개발을 앞두고 일본의 경제적 지원이 아쉬웠던 박정희가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때 반 정도를 돌려주게 되며,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마찬가지로 일본의 지원이 아쉬웠던 김대중이 남은 부분을 돌려주게 됨으로써 국제법상의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1952년 한국전쟁의 조기 종결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아이젠하워는, 하루빨리 한국전쟁과 한국에서 발을 빼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승만은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하여 조속한 휴전협정체결에 매달리던 미국, 영국등 참전국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였고, 휴전협정 참여를 거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미국을 당혹하게 한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그리도 꺼려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되며 ´경제원조´도 약속하게 된다. 물론 이는 강경일변도의 고집불통으로 일관하던 이승만이 내심 간절하게 바라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때 이루어진 한미동맹은 단기간내에는 결코 따라 잡을 수 없었던 북조선과의 경제력격차, 군사력격차로부터 한국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초석이 되었고, 훗날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한•미동맹이 강화되는 동안, 미•일동맹의 강화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는 속도조절이 불가피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한번 이승만 외교의 중요한 승리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아시아 반공전선에서 거지들의 나라-한국을 일본보다도 더 중요한, 또는 일본 못지 않게 중요한 국가로 자리매김시키려는 참으로 지난한 싸움을 외롭게 계속하고 있었다. 국제냉전기에 세계유일의 부강국이었던 미국의 중요한 반공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경제발전, 자주국방, 그리고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까지 얻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 결과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은 일본 못지 않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머금은 것이었다.
  
  1954년 이승만의 종신대통령제 개헌에 대해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이승만의 독선, 끝없는 권력에 대한 노욕때문이었다는 비판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일본과의 굴욕적인 국교정상화´와 ´일본중심의 아시아 반공구도´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던 이승만에 대하여 미국과 한국 야당의 공조압박이 계속되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승만은 미국의 ´일본중심의 아시아 반공구도´를 저지시키기 위해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을 받았던 아•태지역국가들을 중심으로 반일동맹을 결성하는 외교적인 수완까지 보였다. 결국 미국이 의도했던 ´서유럽의 NATO´와 같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집단군사동맹체제´는 성립되지 않았고, 미국은 개별국가, 특정지역과의 개별동맹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을 하야시킨 4.19의거가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와 일본중심의 아시아 반공구도´를 끈질기게 거부하던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짜증과 피로에 지친 미국이 조종, 촉발시킨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로 기록되는 4.19의거가, 미국의 조종을 받은 하수인들이 이승만의 장기독재를 빌미삼아 위대한 민족주의자 이승만을 찍어내 버린 더러운 매국의 역사일수도 있다는 것도 사실이 된다.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보다 진지한 천착이 있어야 할 부분이다.
  
  또한 이승만의 장기독재가 갖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그의 하야이후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났는지,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게 되는 1960년 혁신진보계의 활동을 보면서 보다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이 때에도 북조선의 경제력, 군사력은 남한의 그것을 여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내각제의 제2공화국은 방임때문인지, 무능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혁신진보계가 날뛰는 것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는 날뛰던 혁신진보계를 단번에 쓸어 내 버리고 제3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박정희는 반공, 경제발전, 자주국방의 기치를 뚜렷이 하고 북조선과의 체제경쟁을 본격화하게 된다.
  
  한국 경제개발의 전략과 목표로서 대만방식의 ´중소기업중심의 발전전략-일본의 하청생산국가화´를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방식이 고통이나 위험부담도 훨씬 적고 손쉬운 것이었다.
  
  대만이나 우리나 가진 돈도 없었고, 중화학공업구조를 창출하고 유지할 고급기술인력도 없었다. 더우기 대만은 51년간 일본의 식민지였고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과거 식민모국과의 연계하에서 경제개발을 한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후 식민지에서 해방된 대부분의 후진국들이 선택했던 아주 당연하고 속편한 발전전략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 경제개발 초기에 스위스•네덜란드같은 ´작지만 빛나는 나라´가 되자는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다. 일본이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갖고 있다면 한국도 갖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일본이 그것을 해냈다면 한국도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남에게서 엄청난 빚을 꾸는 위험부담을 안고서라도, 이러한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건설하는 것만이 여전히 경제력, 군사력에서 남한을 현저히 앞서 가고 있는 북조선과의 체제경쟁에서 완벽하고 확실한 승리를 기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박정희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세계 4강에 둘러싸인 우리가 ´작지만 빛나는 나라´정도에 머물러서는 결코 ´구한말이래의 비극´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국은 ´주변 4강과 어깨를 겨룰만한 강대국´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거지가 하루 아침에 용왕이 되겠다고 덤비는 이런 류의 결정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결정이었다. 실패한다면 온 나라가 빚더미에 올라 앉아 두고두고 더 끔찍한 거지상태에서 신음하게 되는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처럼 무모한 결정과 그 추진에, 임기가 최대 8년으로 제한되어 있는 미국식 대통령제는 그 지속적인 추진과 성공을 담보하기 어려운 것으로 박정희는 판단했던 것 같다.
  
  1, 2차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에서 박정희는 강한 자신감을 얻은 듯 보였다. 1969년 삼선개헌을 하고 1971년 삼선 대통령에 당선된 후, ´계속 밀어 부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물러날까´ 망설이는 듯했던 박정희는, 1972년 ´10월유신´을 단행하여 ´종신총통제´를 확립하고, 그 다음 해인 1973년부터 본격적인 중화학공업투자를 감행한다. 관치금융체제-재벌•대기업중심의 산업구조가 뿌리 내리게 된다.
  
  또한 1969년 ´닉슨독트린´, 1972년 상해코뮈니케에서 발표된 ´대만으로부터 미군의 단계적인 철수´, 1974년 미군철수에 곧바로 뒤이은 ´월남의 공산화´등 일련의 사건들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의지에 대한 불안감을 크게 증폭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정황은 강박관념처럼 자주국방에 집착하게 되고, 방위산업을 포함한 중화학공업화를 이루려는 또다른 강력한 동인이 된다. 미사일 개발이 시작되고, 인권외교를 내세웠던 미국대통령 카터와의 불화가 커지자 박정희는 정권의 생명을 걸고 핵무기개발도 추진하게 된다.
  
  물론 이에 대해 박정희의 끝없는 권력욕을 비난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종언을 한탄하는 민주화세력들의 강력한 저항이 따르게 되고, 박정희는 이들에 대해 혹독한 탄압으로 대응한다.
  
  국민소득 78불 수준에서 시작한 박정희의 경제개발은 1977년 국민소득 1000불을 돌파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렵을 전후하여 쌀생산량, 에너지소비량, 각종 산업지표에서 남한은 북조선을 능가하기 시작한다. 5공, 6공을 거치는 동안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의 정착이 완연해지면서, 북조선과의 경제력격차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현저하게 된다. 마침내 1990년대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마저 붕괴되면서 오랜 동안 남한정권을 괴롭히고 있었던 민족사적 정통성마저도 남한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1980년대에 날뛰었던 주사파들은 초췌한 패잔병처럼 흩어져 갔다. 운동권학생들이 대거 사법고시에 매달린다는 신문보도가 계속 되었다. 일부는 시민운동가로 변신하기도 하고, 집안이 괜찮은 사람들은 유학을 떠나기도 하였다. 또 이 정당, 저 정당을 기웃거리고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면서 부초같은 생활을 계속하는 룸펜 주사파도 많았다. 한국 친북좌파세력의 정신적인 대부라 할 한양대 교수 리영희의 ´반성문´이 발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편 김영삼, 김대중밑으로 들어가, 남조선혁명운동경력을 밑천삼아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는 벼락출세의 꿈을 키운 맹랑한 주사파들도 있었다. 어쨋든 1980년대 후반을 휩쓸며 날뛰었던 주사파들이 실패한 인생을 만회하기 위해 급급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이념간 갈등은 영원히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해방당시 현저한 불리를 안고 출발했던 남한은, 남한내의 친북좌파세력들이 날뛰는 것을 효과적으로 억제함은 물론, 북조선과의 체제우위경쟁, 경제발전경쟁, 군사력경쟁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또한 40년 넘는 체제경쟁속에서 민족사적 정통성이 남한에 있음을 입증하게 된다.
  
  결국 이승만이 제창했던 남한민주기지론은 박정희시대의 피눈물겨운 노력으로 끝내 성공한 것이다. 우리는 친미반공노선, 시장경제체제하에서 급속한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에 매진하였고, 순서는 뒤쳐졌지만 그 넘기 어려워 보이던 자유민주주의의 문턱마저도 두터운 중산층들의 추진동력을 받아 끝내 넘어서게 된다. 결국 한국도 세계적으로 크게 부끄럽지 않은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내는데 성공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는 이승만의 ´종신대통령제´나 박정희의 ´종신총통제´, 전두환의 ´대통령간선제´로의 ´일탈´을 통탄하기도 했지만, 그 반대급부로서 ´경제발전, 자주국방, 정치민주화´나 ´망국적인 친북좌파세력의 억제와 북조선과의 체제경쟁에서 완벽한 승리´는 물론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가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이라는 민족사적 ´성취´도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得과 失을 동시에 보아야지, 得만을 보거나 失만을 보는 것은 知的인 不具, 自閉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태도만이 균형잡힌 역사적 평가이며 올바른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하면 해방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중화학공업국가요, 한반도의 쟁쟁한 지식인들을 모두 끌어 모으며 출발했던 북조선이 300만의 주민을 굶어 죽이는 대참변을 초래한 금일의 모습은 뭐라 변명할 수 없는 범죄적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 집권 32년동안 800만명을 킬링필드식으로 학살했다는 사담 후세인 수준에 버금가는 범죄로 보여진다. 도대체 김일성과 김정일의 세습왕조독재체제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세월을 보낸 것인가?
  
  3.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세 번째 차원은 동아시아속에서 또는 세계속에서 한국을 보는 관점이다. 이 차원에서 볼 때, 한국현대사는 100년이 넘는 고난과 이를 극복해 간, 자랑스럽고 빛나는 역사로 파악된다.
  
  구한말에 펼쳐진 일본-중국-러시아의 3강구도하에서 우리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40년간의 일본군국주의의 지배를 받는다. 또 제2차 세계대전후 형성된 미국-일본 대 중공-소련의 4강구도하에서 우리는 국제냉전기에 가장 치열한 열전이었던 6.25내전을 겪었고 50년이 넘는 민족분단이 계속되고 있다.
  
  이 세 번째 차원에서 이승만의 친미반공노선은 특히 주목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민주주의를 착실히 이뤄나간 나라들은 모두 친미반공국가들뿐이었다. 서유럽국가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폴등이 바로 그들이다. 소련, 중공과 친했던 사회주의 국가들, 비동맹 국가들중에 경제발전, 정치민주화를 이룬 예가 있었는가? 친소-친중-반미의 3박자로 철저히 망하는 길만 찾아갔던 북조선의 참상은 또 어떠한가? 한국은 기가 막히게 줄을 잘 섰던 것이다.
  
  더우기 한국의 경우는 국제냉전기에 미국진영에 속해 있으면서 후진국으로서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이뤄낸 단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열심히 노력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반공전선의 최일선 보루에 서 있는 우리에게 기술제공, 자본공여, 시장개방등에 관대했던 것도 무시할 수 없는 큰 이유였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광범위하고 뿌리깊은´ 친미성향의 중요한 근거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단순히 ´이제는 진리가 되어버린 냉전적 사고방식, 반공도덕교육´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에 기반을 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부상했으며, 이제 5대양 6대주를 우리의 일터로 삼아 세계를 누비고 있다. 구한말에는 만주족 청나라의 종속국가였지만 중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각은 분명히 구한말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고, 우리를 식민지로 지배했던 일본은 언젠가 우리가 넘을 수 있고, 넘어야 할 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미 1980년대말부터 한국은 산업구조, 인력배치구조가 일본과 너무 유사해진 결과로 전 산업분야에서, 전 세계시장에서 일본과 치열한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세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일본을 넘어서거나 필적하는 분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철강, D램반도체, 휴대전화가 그것들이다. 자동차, 디스플레이, 2차전지, 디지털가전도 계속 주목해야 할 분야로 보여진다. 앞으로 이런 분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일본이 여전히 우리를 저만치 앞서 있다고 기죽을 이유는 전혀 없다. 중국이 무섭게 추격해 온다고 겁먹을 이유도 전혀 없다. 오직 두려운 것은 우리가 계속 전진하지 못하고 10년 넘게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1990년대이래 노태우때부터 조짐이 시작되어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답답한 혼미를 계속하고 있다.
  
  ´정치민주화를 위한 불가피한 비용´이라느니, ´성장과 분배의 상충관계´라느니 더 나아가 ´반미와 민족공조와 민족자주´니 ´수렴론´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그럴 듯하게 난무하고, 이런 말같지도 않은 소리에 우리 스스로 속아 넘어가는 바보같은 짓을 계속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국민소득 1만불 수준에 상응하는 ´문제가 많은 민주사회´가 있을 뿐이요, 국민소득 3만불 수준에 상응하는 ´비교적 문제가 적은 민주사회´가 있을 뿐이며, 국민소득 5만불 수준에 상응하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새로운 세상´이 있을 뿐이다. 바보같은 자들의 바보같은 소리에 눈멀고 귀가 멀어 우리는 우리가 가야할 올바른 목표를 잃고 있고 새로운 비젼 제시를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루 속히 세계 5위권내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도약하도록 힘을 집중시켜야 할 시기에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방황과 실수를 계속하고 있다. 국민소득도 1만불수준에서 10년 넘게 헤매온 세월이었으며, 이러다가 남미국가들처럼 추락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마저 생긴다. 이제 이 10년 넘는 혼미와 방황과 실수를 빨리 종식시켜고 다시 전진해야만 한다.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이후 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4강구도는 국제냉전기에 비해 현저히 완화되기는 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미래에도 지속되거나 다시 강화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이승만-박정희노선이 꿈꾸었듯이, 우리가 하루빨리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체제에 기반한 남북통일을 이루고 세계 5위권내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나가야 할 절실한 이유다. 그리하여 21세기에는 4강구도의 종속변수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며 동북아 5강구도의 한 축을 형성하도록 하여야 한다.
  
  21세기에도 우리가 ´구한말과 20세기의 비극´을 다시 재현할 지, 아니면 지금처럼 ´약간 주눅든 상태로 이 눈치 저 눈치 봐 가며 꾸역꾸역 살아갈 지´, 아니면 ´고구려 전성기´와 같은 판도를 만들어 낼 지 결국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핵으로 무장된 4강에 둘러싸인 현 상황에서 ´정치•군사적인 차원의 고구려 전성기´를 상상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경제•문화적인 차원의 고구려 전성기와 大朝鮮主義´는 여전히 꿈꾸어 볼 만하다.
  
  4. 한국현대사에 나타난 어떤 사건, 어떤 인물에 대한 어떤 평가도 나는 위에서 얘기한 3개의 차원에서 동시적이고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같은 3개의 차원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바라볼 때, 우리 사회 내부적으로는 경제발전, 자주국방, 정치민주화를 끈질기게 이루어 간 역사였으며, 북조선과의 치열한 체제경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둔 역사였으며, 구한말이래 100년이 넘는 고난의 민족사를 극복하고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에 기반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군사대국´을 이루어 낸 역사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승만-박정희노선이 이 전과정에서 보여준 지향과 실천과 공로는 혼미를 거듭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가 다시 떠올려야 할 올바른 지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정치민주화마저도 상당한 수준까지 이뤄 낸 우리가 ´장기독재´나 ´군사독재´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이름앞에 붙어 있는 ´독재자´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 채, 그들이 온몸을 던져 이루고자 했던 지향과 실천과 공로마저도 온전히 보지 않으려는 자세는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사회 내부만 바라보는 가장 협애한 차원에서, 그것도 잘못된 ´민주 대 반민주´ 시각에서 ´민주는 살릴 놈, 반민주는 죽일 놈´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과 오해와 편견에 빠져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일부에 만연된 그릇된 지적 풍토라고 생각된다. 특히 하층민문제•도시서민문제의 해결이라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미 설땅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서구식 사회주의 정당의 건설이나 북조선과 연계하여 뭘 해 보자고 날쳐대는 친북좌파세력의 합법화등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인류 역사를 통털어서라도 그 예를 찾기 힘든 ´단기간내의 경제발전과 자주국방과 정치민주화´의 혁혁한 공을 세웠던 한국의 보수세력, 산업화세력은 박정희의 죽음이후 우리 사회의 지도세력으로서의 사명감을 상실한 채, 오히려 범죄집단같이 비난을 받는 상황까지 타락해 버린 모습이다.
  
  거기다 김영삼, 김대중등의 민주화세력출신의 대통령들마저도 아들비리, 가신비리등으로 추악한 퇴장을 하자, 젊은 2030세대들을 물론 40대-50대의 중산층들까지도 부패한 기성정치 전반에 대한 거부감, 혐오감을 유달리 표출하였다.
  
  그들은 200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현재와 같이 정경유착에 쩌들은 정치권 질서전반에 대한 거부감을 보였고, 이것을 단호히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들은 이회창은 분명히 아니었기에 반사적으로, 일부는 적극적으로 노무현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판단된다.
  
  이회창에 대한 병역비리, 수뢰비리등 각종 의혹들이 지금은 모두 사기극이었음이 입증되어 버렸지만, 어찌해서 이토록 간단한 사기극들이 국민들에게 먹힐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한나라당을 위시한 한국의 보수세력, 산업화세력들은 뼈저린 반성과 뼈를 깍는 자기혁신을 해야 한다.
  
  5. 제왕적인 대통령제니 지역감정 악화니 한국의 대통령제를 비판하는 말은 많고, 내각제니 분권형 대통령제니 개헌론도 심심치 않게 떠오르지만, 무엇보다도 한국 대통령제의 가장 큰 위기는, 이승만과 박정희이후 역량이나 역사의식에서 시원찮은 인물들이 한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즉 한국대통령들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과 조속한 몰락은 그 극치를 보여준다. 많은 국민들이 잘못된 역사인식, 현실인식으로 말미암아 노무현에게서 허상을 보고 있었음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취임초기 90%를 웃돌던 노무현의 지지도는 불과 8개월만에 10-30%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아시아의 카에사르´라 불리던 맥아더의 진심어린 존경을 받았었고, ´전후 일본 최고의 수상´이라 평가되는 요시다 시게루마저도 두려움을 느끼던 존재였다.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기까지 그는 아이젠하워를 손바닥 안에서 갖고 논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박정희는, 세계적인 철인정치가의 면모를 보인 싱가폴의 수상 리콴유가 마오쩌뚱, 덩샤오핑, 요시다 시게루등과 함께 ´아시아의 5대 지도자´의 반열에 올렸으며, 중국을 개혁개방의 길로 인도한 덩샤오핑이 ´박정희의 경제개발방식´을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었다. 심지어 한국인 알기를 개똥같이 아는 일본의 우익들마저도 박정희가 죽었을 때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군인이 죽었다´며 일본의 우익들이 받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를 표한 바 있다.
  
  일본의 우익들에게는, 일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없는 거지들의 나라-한국에서, ´당장 민주주의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한국의 ´민주화세력´들과 근본적인 지향이 틀려쳐 먹은 ´김일성집단•친북좌파세력´들이 저질러 대는 간단치 않은 도전과 말썽을 이겨내 가면서, ´강대국형 고도산업구조´를 기필코 이루겠다며 고군분투했던 박정희의 모습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심없이 자기 한몸을 희생하는 위대한 애국자´로 비쳤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물어뜯고 할켜야만 지식인으로 행세하며, 리콴유와 싱가폴의 훌륭한 성공담이나 덩샤오핑과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얘기만 대단한 것인양 글로, 책으로 써내는 이 한국의 지적 풍토를 어떻게 봐야 할까? 적어도 나에게는 ´정신분열적´이라고 보여진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이후 이런 정도의 무게와 역량과 역사의식을 지닌 대통령들을 한국인들은 만나 보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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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4-25, 10:2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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