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개정 논의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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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0만의 인권이 걸린 문제 - 국가보안법 제7조(고무·선동죄), 제10조(불고지죄)를 삭제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대한민국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선동·모략의 自由를 철저하게 보장하라는 것
  
  
  林炚圭 변호사·자유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우리나라에서 전개되는 문화투쟁(Kulturkampf)
  
   언어전술
  
   1870년대 맹렬하게 진행된 독일(프러시아)과 독일內 천주교회 사이의 문화정신과 충성심을 둘러싼 투쟁에서 유래한 「문화투쟁」은 이질적인 사상이 만나는 곳에서는 세계 어디서든지 일어나는 것이다.
  
   2200여 년 전의 진시황제가 여러 사상의 서책을 불사르고 학자들을 땅에 파묻어 죽이는 문화투쟁을 벌였는데 1966년 중국에서는 모택동이 철없는 청년들에게 아이디어를 偏食(편식)시켜서 동료 공산주의자들조차 자본주의 走資派(노선자)라고 타도하는 「문화혁명」이라는 이름의 문화투쟁을 벌였다.
  
   1945년 8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이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준비에 병행하여 작가와 신문기자를 프롤레타리아 동맹에 묶은 것은 남한에서 같은 해 9월 조선프롤레타리아 문학동맹,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을 결성한 것과 함께 한국인을 상대로 한 「문화투쟁」의 시발이었다.
  
   북한의 지도부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보위무력인 70만 정규군과 2000대의 탱크와 8000문의 대포 등 全전투력의 70% 가량을 휴전선으로부터 100km 이내 남쪽에 배치해 놓고 이 무기들을 옮기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시간당 50만 발로 대한민국의 수도권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무력의 배치와 그 묵시적·명시적 위협만으로 남반부를 타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을 「민주기지」로 삼은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세력의 「문화투쟁」이야말로 무력과 함께 북한 지도부의 兩大支柱(양대지주)이다.
  
   이 세력의 「문화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구가 言語戰術(언어전술)이다.
  
   「언어」란 먼저 자주 쓰는 사람과 동일화 현상이 난다. 그래서 저들은 인간의 「행복추구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재산소유의 자유」 「기업인의 창의」를 탄압하는 데 가담한 자들을, 반복하여 「進步的知識人(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우기면서 자유경제를 옹호하는 자들을 「수구 기득권 세력」「혁명반대의 반동분자」로 되풀이하여 同語連續(동어연속)을 습관화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에 확고히 서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바다」에서든 「꽃파는 처녀」에서든 地主의 자식은 나쁜 놈이어야 하고 자본주의를 효율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친일파이어야 한다.
  
   남한의 자유로운 토양에서도 「사회주의 리얼리즘類」가 「문화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6·25의 처절한 고난을 겪어 「냉전의 고통」을 누구보다 심하게 느끼면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을 잘 갖추자는 사람에게 「냉전세력」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준다.
  
   조심 없이 북한체제와 섞어서 자유와 번영의 기초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해서 안 된다고 우려하는 사람을 그들은 「反통일」이라고 되풀이 매도한다.
  
   한 맺힌 분단의 아픔을 안은 시민들의 感度(감도·Sensitivity)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대한민국의 경찰관은 타락한 부정뇌물범일 뿐 아니라 여자를 농락하는 癡漢(치한)이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남로당 빨치산은 정의감에 불타며 가난한 소작농을 위한 묵묵한 희생자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혁명정신」을 좋아하는 청소년에게는 처절하게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는 존재하지 않으며 20만 수용소 군도의 처참한 인권유린도 관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대한민국 안의 용공분자들이 수행하여 온 反국가적 학생운동, MT(Membership Training), 비뚤어진 농촌활동, 노사분쟁을 격화시킨 위장취업의 일관된 「사회주의 리얼리즘的」 사고방식이다.
  
  
   굶어죽는 人民 외면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공산주의나 민족사회주의(나치)는 지휘부가 선동선전으로 인민을 휘어잡는 체제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우월한 민족발현」을 위하여는 진실을 조명하고 인간애를 승화시키는 문학작품을 제일 미워한다. 진실과 인간애의 문학작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우월한 민족의 정복투쟁」의 선동성을 약화 파탄시키기 때문이다. 소련정권으로부터 탄압받던 솔제니친의 「암병동」 「수용소 군도」와 나치에 의해 불태워지던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의 바로 그 진실과 인간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나 「우월한 민족의 정복투쟁」의 敵인 것이다.
  
   최근의 6·15 평양 선언 이후 남북의 「통일기운」을 떠드는 사람들의 말과 얼굴과 태도를 보면, 굶어 죽어가는 북한 인민과 수용소 군도의 갇힌 인권을 전혀 무시하는 냉혹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얼굴을 느낄 수가 있다.
  
   조선일보가 휴전선 100km 이내에 전진배치된 인민군 무력과 훈련강도를 지적하고, 굶어 죽어가는 동포와 처참한 수용소의 인권을 조명하는 것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게는 敵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화투쟁」이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보장하는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1991년 5월31일 우리 국가보안법의 개정으로 이러한 「문화투쟁」을 처벌하기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우리 국가보안법은 독일에 비해 그 처벌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선동하여도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경우」가 아니면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운동은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별첨 「한국 국가보안법과 독일 등 외국법의 비교표」에서 보듯이 독일에서 처벌하는 행위를 처벌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危殆(위태)롭게 하는 구체적인 선동, 허위모략(법규정 제목은 찬양고무라고 하였으나 실제로 선동, 모략임)의 경우에 한하여 처벌하고 있다
  
  
   反국가 선동·모략의 자유를 보장하라?
  
  
   각국의 법조인·학자들은 국가안보에 위해를 가하는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처벌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홈즈(O.W. Holmes) 前 미국 대법관이 판결에서 「극장에서 불이 났다고 외치는 행위」를 언급한 것을 예로 든다.
  
   함부로 한 「말 한마디」의 非물질적 의사전달이 연극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이라는 공동체에게 「심리적 변동」을 일으킨다. 이것은 비록 「생각을 언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공공의 안전에 害惡을 끼치는 행위이므로 형사처벌을 해야 한다는 것이 홈즈의 주장이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이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Clear and Present Danger Doctrine)」이다.
  
   우리 국가보안법 제7조는 1991년 5월31일 인권의 최대 보호 한도인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을 수용하였다.
  
   북한의 이른바 「민주기지」로부터 국가보안법을 없애자는 선동선전이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남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화투쟁은 이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대한민국에 가하는 사람에 대한 처벌조항도 폐지하자고 투쟁하는 단계에 있다.
  
   그들은 4500만의 인권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을 초래하는 「선동 모략」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 선동 모략자의 인권을 철저히 보장하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법 일반 논리의 보편적인 均衡較量(균형교량)이나 선량한 시민의 사회 防衛機制(방위기제)를 타파하자는 주장을 거세게 밀고 나오고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가 우리 민족의 자유체제에 필요한가, 필요하지 않은가 따져보자.
  
   서해 연평도, 백령도를 잇는 북방한계선에서 전투위기가 매우 높아지고 적군이 대한민국 공동체에게 비정상적인 위협을 계속하는 경우를 가상해 보자.
  
   해군, 해병대 장병이 일선으로 몰려가는 부둣가에서, 우리의 북방한계선은 국제법 위반이며 동포인 인민군 병사에게 사격하는 것은 민족범죄라는 등 호소의 데모를 반복하는 지식인들이 있다고 하면, 이는 대한민국의 命運(명운)과 안전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인데, 이를 언론자유라고 제재를 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가.
  
   「국가의 존립, 안전, 기본질서를 명백하고도 현존하게 해하는 발언이나 동조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우리 국가보안법 제7조가 처음이 아니다. 어느 나라 민주제도의 역사에서도 있는 형사제도이다.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서 링컨 대통령은 병사들을 향하여 북군(Union)에 참전하지 말라고 박진하게 글 쓴 언론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유언론의 침해라는 비판에 대하여, 『나이 어린 병사가 전투공포로 敵前逃亡(적전도망)하다 잡혀 사형판결을 받는데, 적전도망토록 動機注入(동기주입)한 사람은 아무런 제재를 받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하였다.
  
   우리의 국가보안법 제7조는 대한민국 영토(헌법 제3조)의 수호와 안전, 그리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헌법 前文)를 끊임없이 공격, 전복, 와해하려는 세력에 대처하는 방위체제이다.
  
   대한민국에 대한 타도공격, 전복활동, 와해공작을 막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설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 자유민주 체제는 이미 승리한 거나 마찬가지이고, 우리에 대한 타도공격, 전복활동, 와해공작은 되지도 않을 일이므로 안심해도 좋다는 지식인에게 알려주고 싶은 역사가 있다.
  
   武力(무력)만이 나라를 전복할 수 있고 와해시킬 수 있다는 판단은 수많은 인종과 나라가 생존경쟁을 벌여가면서 흥하고 사라져 간 인류의 역사를 읽어보면 아주 어리석은 발상이다.
  
   오히려 情報謀略戰(정보모략전)에서 전쟁이 결판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패배하여 무너진 나라들의 지도자와 백성들을 살펴보면, 나라 공동체가 적의 顚覆工作(전복공작), 瓦解活動(와해활동)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하고도 무심했던 어리석음이 반드시 숨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공동체에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으로서 헌법체제의 파괴에 조력하는 행위에는 교사(Instigation), 선동(Excite or Agitation), 선전(Propaganda), 세뇌(Brainwashing)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마음속의 사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안전한 美國에서도 처벌하는데…
  
  
   1919년 「셍크 對 미국」 판례를 보면 미국의 1차대전 참전에 반대하여 군입대를 하지 말자고 전단을 뿌린 셍크에 대하여 적용된 「간첩법(Espionage Act)」에 관하여 홈즈 판사는 『자유로운 언론의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자유언론은 나지 않은 불이 났다고 극장에서 소리내는 사람을 보호하지 않는다』 『나라가 전쟁중인 때 셍크와 같은 표현은 국가의 전쟁 노력에 방해가 되며 병사가 싸우고 있는 동안 용납될 수 없다』고 유죄확정 판결을 쓰고 있다.
  
   역시 1919년의 「에이브람 對 미국」 판결을 보면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 파병하는 것을 반대하여 총파업을 호소하는 팸플릿을 뿌린 에이브람에 대하여 다수 의견을 쓴 클라크 판사는 「소요법(Sedition Act)」을 적용하면서 「전쟁, 소요, 폭동, 혁명의 선동」을 행하는 것의 처벌은 정당하다고 확정판결을 쓰고 있다.
  
   1927년 「휘트니 對 미국」 판례에서도『언론의 행사는 국가를 파괴로부터 보호하는 제약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들 판례의 기본틀은 지금까지 번복된 일이 없다. 당시 미국이 오늘의 대한민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였는데도 이런 판례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문화투쟁이 국가보안법 제7조에 여간해서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투사들은 이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은 방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당당히 주장하면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에 대한 社會防衛機制(사회방위기제)인 국가보안법 제7조마저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제10조는 헌법 제39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국가는 국민에게 충성을 강제
  
  
   마을에 강도가 들었다면 동네 사람들이 불침번에 나서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자유체제를 향유하는 시민이 자기와 4500만 공동체를 허무는 간첩을 눈으로 보고도 팔짱 끼는 자유를 구가하겠다는 것은, 강도가 들어와도 나는 불침번의 의무를 이행할 생각이 없다는 태도보다 더 심한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다.
  
   「不告知罪」는 국가보안법 제10조에서 정한 것인데, 대한민국을 타도하려는 무장조직, 무장폭파, 군사기밀 간첩, 암살, 납치 등 행위나 계획을 보고 들은 국민은 당국에 신고할 충성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모든 국민은 헌법 제39조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다. 국가는 시민들의 충성심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리이다. 병역 적령기에 도달한 대한민국 남성은 병역법 제3조 제86조 제87조 제88조에 따라 「신체검사를 받지 않거나」 「소집을 받고도 나오지 않거나」 등의 부작위에 대하여 「충성의무 불이행」으로 처벌받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전쟁터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라고 국가공동체가 충성의무를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령 25세의 여성이나 56세의 남성인 대한민국 국민이 내일 밤 군지휘관들이 회의중인 군용시설을 고성능 폭탄으로 폭파할 임무를 띠고 이웃집에 잠입한 간첩의 계획을 알면서 경찰에 이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자. 다음날 밤에 이 군용시설이 폭파되고 주요 지휘관이 살상되었다고 하자. 부작위로 그냥 보고만 있으면서 신고를 하지 않은 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쟁터에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라는 충성의 의무와 가까운 경찰관서에 가거나 전화 한마디로 신고하는 수고를 하라는 충성의무를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시민의 희생을 더 요구하는 것인가.
  
   헌법 제39조에 터잡아서 그런 신고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바로 「불고지죄」이다.
  
   다른 사람 개인에 대한 「危害의 臨迫(임박)」을 보고도 팔짱 끼고 구경해도 괜찮은 자유, 이를 구출할 수고를 아끼는 「不作爲의 自由」에 관하여는 일찍부터 법철학자들 사이에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국가공동체에 대한 「위해의 임박」에 처하여서까지 어렵지 않은 수고를 아낄 「부작위의 자유」는 어느 나라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역사상 매우 위험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反국가 단체로부터 대량 살상무기의 위협을 받고 있다.
  
   대한민국 시민들을 향하여 反국가단체가 꾸준히 요구한다고 해서, 나라의 적대세력과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통일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불고지죄」를 없애자는 주장은 우리의 헌법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려도 좋다는 주장에 불과하다.
  
  
   자유체제 수호 포기를 권장
  
  
   월남의 좌익운동가들은 제일 먼저 정부편도 아니고 베트콩 편도 아닌 중립적인 사람들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고 옹호하는 데서부터 反국가 운동을 시작했다. 제 나라의 안전에 팔짱 끼는 시민들을 대거 만들어 놓으니 월남이 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내일 대한민국의 군지휘관들을 폭파할 간첩이 옆집에 있는 것을 알고서 전화 한 마디의 신고도 않는 그런 시민이 그 간첩이 노리는 전체주의 체제를 막아주는 대한민국의 자유체제 속에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겠는가.
  
   대한민국에 대한 전체주의의 전복공세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자유체제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 전체주의측에서 볼 때에는 자유체제의 수호자들이 줄어들고 팔짱 끼고 입 다문 중립주의자들이 늘어나야만 전복공세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전체주의 지도부에서는 기를 쓰고 국가보안법 제10조를 「反민족적」 「反통일적」 규정이라고 욕하고 남한의 문화투쟁가들은 「인권유린」 규정이라고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독일의 불고지죄는 별첨 「비교표」에 쓴 바와 같이 통일 후에도 물론 존속하고 있는데, 간첩이나 폭동, 간첩지원뿐 아니라 마약, 위폐, 인신매매에 대해서까지 고지 의무를 규정하고 이를 고지하지 아니하면 처벌받게 되어 있다.
  
   국가보안법 제10조의 불고지죄는 그 부모 자식 사이 형제 사이의 밀고를 권장하는 인륜에 反하는 규정이라는 주장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제10조 단서에 친족관계가 있으면 그 刑을 감경 면제한다고 규정하고 있거니와 실제로 대한민국 검찰은 부모 자식 사이는 거의 처벌하지 않아왔다.
  
   이 점에 관한 미국의 판례를 참고로 보자.
  
   미국의 하우프트(Hans Haupt)라는 사람은 2차대전 당시 사보타주의 임무를 띤 아들을 집에 재워주고 직장을 얻어주고 자동차를 사도록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죄명은 「범인은닉죄」가 아닌 「반역죄」였다.
  
   미국 대법원은 1947년 「아버지가 아들을 보살피는 자연스러운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8대 1의 다수로 유죄를 선고했다.
  
   우리는 여기서 「사회 전체」 「국가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을 무겁게 여기는 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미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판례는 그후 번복된 일이 없다.
  
   미국 대법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 시민으로서 자기 조상의 나라 일본에 머물던 중에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으로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부득이 일본 국법에 순종했다는 주장을 하는 카와키타(Kawakita)에 대하여 『미국 시민은 그가 어디 거주하든지 2중국적자라 하더라도 미국에 대한 충성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판결하여 유죄를 확정시킨 바 있다.
  
  
  
  
  
   국가보안법의 불고지죄(제10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선동죄(제7조)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 가운데 근본적으로 헌법정신에 어긋나는 논리들이 섞여 있다
  
  
   외국의 무책임한 修辭를 한국 법조인의 고뇌보다도 더 존중하자는 건 사대주의
  
  
  
  
  
   첫째, 북한 당국이 대한민국과 남북기본합의서를 서명하였고 유엔에 동시가입하였으며 대한민국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을 시행하고 금강산 관광까지 가고 있으니 북한을 주권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그러나 일정 지역을 군사력으로 장악하고 그 주민에게 권력을 행사할 정도의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을 국제전쟁법규상 교전단체로 취급하여 상호간에 협상·교류를 할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이 곧 대한민국이 북한집단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유엔이 평화정착의 차원에서 북한을 유엔에 가입시켰다 하여도 마찬가지이다. 이 점에 관하여 헌법재판소의 1997년 1월16일자 판례(92헌바6, 26, 93헌바34, 35, 36)가, 『북한이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소위 남북합의서의 채택·발효 및 「남북 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등의 시행 후에도 적화통일의 목표를 버리지 않고 각종 도발을 자행하고 있으며 남·북한의 정치, 군사적 대결이나 긴장관계가 조금도 해소되고 있지 않음이 현실인 이상, 국가의 존립·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新·舊 국가보안법의 해석·적용상 북한을 反국가 단체로 보고 이에 동조하는 反국가 활동을 규제하는 것 자체가 헌법이 규정하는 국제평화주의나 평화통일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고 설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둘째, 우리 헌법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하여 북한이 「파괴적 적대자」이냐 아니냐에 대하여 따지지 말자는 논리가 있다. 북한은 포용해야 할 동포이며 같은 민족이므로 적대세력으로 보아서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헌법체제 즉 인권과 행복추구, 언론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유가 보장되고 재산권이 보호되며 생활과 경제활동에 자유와 창의가 기본인 그러한 우리의 헌법체제를 선전, 간첩침투, 무력위협, 지하조직으로 타도하려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불바다의 전쟁도 할 수 있다는 세력이 우리 헌법의 파괴적 적대자가 아니란 말인가?
  
   셋째, 외국의 국제기구나 외국의 인권단체가 한국의 국가보안법을 비판하고 있으니 마땅히 고쳐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가 있다.
  
   북아일랜드 사태, 미국의 사형제도, 소수 민족에 대한 배려 없는 폭동진압 방법이라든가 법규적용 등에 대해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이 계속 인권 유린이라고 비판을 하는데도 영국이나 미국은 자기 사회에 필요한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유엔 인권기구가 가끔 발표하는 국가보안법 비판은 판례가 아니고 일종의 「修辭(수사)」이다. 외국의 예를 가지고 이랬으면 좋겠다, 고쳐라 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우리 국익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비판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논하는 것은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다.
  
   판사가 3심에 이르도록 쌍방을 심리하고 苦惱(고뇌)한 끝에 내린 그 사회의 判例(판례)와 나라 밖에서 일방의 진정서를 읽고서 고민 없이 발표하는 修辭를 구별하지 못할 때에, 우리 사회는 행인의 말을 쫓아 당나귀를 메고 가는 줏대 없는 사회가 될 것이다.
  
   별첨 「비교표」에서처럼 독일이 자유체제의 적대자에 대한 처벌을 우리보다 더 엄하게 하는 법제를 유지하는 데도 그보다 훨씬 관대한 한국에 대하여 일부 국제기구나 일부 외국 인권단체가 비판하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 독일의 헌법학자들·형법학자들은, 국제기구나 인권단체들의 주도적 인사들이 가진 문화적 배경과 학문적 실력을 손바닥에 놓고 잘 알고 있으면서 토론장에서 그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여 그들의 잘못된 논리를 교정하고 논박한다고 한다. 한국의 법률제도를 옹호하는 법률관료들이나 법학자들의 헌법식견과 법철학 지식 그리고 유창한 외국어 구사능력이 이 점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실상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넷째, 그동안 국가보안법이 악용되어 무고한 시민이 억울하게 처벌받은 일이 있으니 국가보안법은 개정 또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다.
  
   이는 검사가 잘못 기소하거나 판사가 오판을 하는 것과, 법 자체가 국가와 국민에게 해롭다는 것을 혼동시키는 「논리의 비약」이다. 오판의 역사는 인류의 법제도만큼 오래되었으나 오판 때문에, 법 자체를 없애자는 논리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나 듣는 신중하지 못한 발상이다.
  
   국가보안법뿐 아니라 모든 형벌법규의 적용에서 법률인들은 인권옹호를 더 철저히 하고 신중한 사실인정을 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우리의 현대 司法史(사법사)도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
  
  
   『전체주의의 내부 顚覆鬪爭(전복투쟁)과 武力蹂躪(무력유린)을 겪고 300여만의 아까운 인명을 빼앗긴 한국이 전체주의 전복활동, 찬양활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와 『전체주의의 스파이활동 외에 뚜렷한 내부 전복투쟁이나 무력침략을 겪지 않은 서독이 전체주의 전복활동, 찬양활동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대비하여 보면 그 示唆(시사)하는 바가 더욱 뚜렷해진다
  
  
   미국이나 일본이 전체주의의 활동을 찬양하거나 전체주의 외국을 위하여 선전하는 경우에 어떻게 대처하는 법제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도 역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서독이 1987년 4월1일에 개정한 법제를 통일 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想到(상도)해 볼 필요가 있다.
  
   별첨 「비교표」를 보면 우리 한국 시민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1991년 5월31일에 대폭 개정한 한국 국가보안법은 1987년 4월1일에 개정한 독일 형법 해당 조항보다 전복투쟁을 위한 찬양활동과 무력유린에 대한 방관 배신행동에 대하여 훨씬 관대한 것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예컨대 독일은 「舊동독의 선전물이나 서독內 자생적 전체주의 옹호단체의 선전물을 돌리거나(반포) 가지고(보관소지)만 있어도 즉시 처벌받는데」, 한국의 경우에는 「북한이나 한총련의 선전물을 돌려보거나 보관하는 것도 국가존립을 危殆(위태)케 하는 등 조건이 있어야만 비로소 처벌할 수 있고」, 한국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자유선거 아닌 무력과 테러로 강점하여 온 세력의 국기나 휘장을 공중 앞에 휘날려도 국가존립을 危殆(위태)케 하는 등 조건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으나」, 독일은 「舊동독의 국기나 휘장을 공중 앞에 계양하거나 그런 사용목적으로 보관하는 자체를 즉시 처벌할 수 있는」 법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를 이와 같이 무방비로 만들자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것이다
  
  
   첫째 순수하고 선량한 시민들 중에는 이제 대한민국 남한에는 내부 전복활동이나 외부로부터의 무력침공 가능성이 없으니까 시민의 건전한 판단에 맡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시민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알게 모르게『자유체제 유지에는 自制(자제)와 犧牲(희생)이 필요없다』는 달콤한 테제에 속고 있다는 점을 體制災殃(체제재앙)이 오기 전에 스스로 인식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는 체제재앙에 대비하지 않는 불행한 전통이 있어 왔다.
  
   일본으로부터의 침략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안심한 우리 민족은 1592년 임진년부터 7년간 대량 살육을 당하고 그로 인하여 민족의 進運(진운)이 쇠퇴하게 되었다. 7년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외부 침략에 대한 대비에 인색한 우리 민족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겨우 29년밖에 안 된 1627년 정묘년에 북방 여진족에게 황해도 황주까지 유린되었다. 그래도 우리 체제 수호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던 우리 민족은 9년 뒤인 1636년(병자년)에 민족의 존엄성을 또 유린당하였다.
  
   1945년 이후 우리의 선배들은 민족분단의 불행 속에서도 다행스럽게 이러한 실패의 前轍(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으며 그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르고도 오늘의 번영(취약하지만)을 가져왔다.
  
   1998년 이후 우리는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여 국가보안법부터 허물자는 이상한 논리를 소리 높이 외치는 사람을 목격하고 있다.
  
   둘째 대한민국의 국가보안법을 허물어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북한 전체주의 집권자와 남한에서 은밀히 그들에 동조하는 사람들이다. 남한에서 은밀히 反국가 단체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에서 선거 때가 되면 투표하고 선거운동도 열심히 한다. 이 사람들의 선거운동 덕을 본 정치인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우리의 자유체제를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문화투쟁세력」이 상당히 언론자유를 누리는 자유민주체제 속에 살고 있다.
  
   자유민주체제는 그러한 언론자유가 있는 동안에, 스스로를 지키는 비용(cost)을 부담할 때에만 비로소 생존능력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의 「다수 조용한 시민들(Silent Majority)」이 이해하고 협조하여 온 점이기도 하다.
  
   셋째 1998년 이후 우리 국가보안법부터 허물자는 시끄러운 발언들 중에는 스스로 시민들을 대변하겠다고 자임하면서 이름을 그럴 듯하게(민주라든가 연대라든가 정의라든가 하는 용어는 특허나 상표등록할 필요가 없으므로) 만들어 헛소리를 증폭(Amplifing)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거품을 예리하게 투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조용한 다수 시민들」은 시간이 가면서 이들의 「허위의 증폭」을 간파하게 될것이며, 이들에게 아첨하여 온 정치인들을 알아내게 될 것이고, 끝내 가까운 역사에서 평가하게 될 것이다.
  
   넷째 대한민국의 자유체제를 타도하겠다고 맹렬히 노력하던 사람들의 인권을 드높여, 사면권을 남용하여 오다 보니 이제는 자유체제를 건드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는 경향이 생겼다. 이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튼튼하게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법의 지배가 확실하지 않으면 국방은 물론 번영도 없게 된다.
  
   모든 재판의 역사는 誤判의 歷史이기도 하다. 미국의 誤判史(오판사)를 읽는 법학도들은 마음의 두려움으로 옷깃을 새로 여미게 된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필요한 법」이 오판으로 잘못 적용되었다고 하여 그 「필요한 법」을「악법」이라고 보는 논리의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얼마나 오판을 줄이고 수사와 판결에 임하는 공직자가 심혈을 기울여 인권을 지켜주며 참을성 있게 피고인의 변명을 들어주는 데 인권옹호의 요체가 있는 것이지, 자동차 사고로 사람이 죽고 다치니 자동차가 「원수」이고 없애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한국과 같이 2000만명이 밀집되어 좁은 공간에서 사는 수도권을 향하여, 가까운 거리에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의 적대자」가 엄청난 대량살상 무기를 조준하고 있는 곳에서, 자유체제를 지키는 것은 자유민의 체제수호의지와 체제수호에 반드시 필요한 비용 부담이다.
  
   이런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서 멋대로 자유를 확대하라고 요구하다가, 노예상태와 빈곤 속에 떨어져 버린 민족들은 역사상 그 예가 너무나 많다. 우리 民族이 그런 事例를 또 남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 2004-04-30, 22:3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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