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憂後樂(中國版 노블레스 오블리주)은 진실인가
제1장 北宋의 얼굴-北宋의 文官 優位의 중앙집권체제는 이후 王朝에도 답습되어 中國의 정치·관료제도의 특징을 이루었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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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史上 처음으로 ‘近代’를 호흡했던 나라. 敵에게 돈을 바치고 平和를 사려다가 결국 비참하게 패망한 나라. ‘남’의 힘을 빌려 敵을 죽이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와 遠交近攻(원교근공)을 좋아하다가 輕蔑(경멸)당한 나라. 富國强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득권층의 代案 없는 반대에 부딪쳐 不毛의 당파싸움만 일삼았던 나라. 끝내는 風流天子가 등장해, 든든한 인프라는 깔지 않고 國都와 궁궐의 디자인에만 골몰했다가 野性에 불타는 北方의 騎馬民族 국가들의 ‘밥’이 되었던 나라. 그것이 오늘의 韓國에 던지는 敎訓.
鄭淳台의 北宋 기행-開封/‘경제·문화大國’ 北宋 - 그들은 왜 ‘야만’이라 경멸했던 騎馬民族에게 능욕을 당했던가

宋시대에 현대 中國의 原形質 형성돼 
 
요즘 중국요리점의 메뉴에 나열된 요리는 宋代에 쓰인《東京夢華錄·동경몽화록》이란 책에 거의 다 적혀 있다. 지금의 중국요리를 北宋 사람들이 처음 만든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宋代 요리가 現代 중국요리의 原形에 가깝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은근한 香(향)을 넣고 푹 삶은 돼지고기 요리 東坡肉(동파육)은 北宋의 蘇軾(소식)  이 杭州(항주)의 지사로 재임할 때 西湖(서호)에 제방을 쌓으면서 동원한 백성들을 먹이기 위해 개발한 요리로 전해진다. 宋代를 대표하는 시인 蘇軾의 號(호)가 바로 東坡(동파)이다. 그 제방은 아직도 西湖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들은 소동파가 쌓은 제방이라 하여 이를 蘇堤(소제)라고 부른다.

‘唐은 술(酒), 宋은 茶(차)’라고 한다. 唐을 대표하는 시인 李白의 폭음은 酒神 바카스의 경지였다. 그는 시인의 예민한 근심을 술로 달래었고, 때로는 술의 힘을 빌려 詩作(시작)의 인스피레이션(靈感·영감)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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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代 공예의 정수인 陶器(도기)-
曜變天目茶碗(요변천목다완)
반면 宋代의 시인이라고 하면, 赤壁賦(적벽부)의 蘇軾이든 悲愴(비창)의 戀情詩(연정시)를 남긴 陸游(육유)이든 政爭(정쟁)에 패해 官界에서는 불우했더라도 은퇴 후 뜻이 맞는 친구들과 마주앉아 茶를 마시며 이것저것 비판하는 여유를 누렸다. 宋代의 喫茶法(끽다법)을 전하는 문헌으로서는 慶曆(경력: 4代 仁宗 시대)의 사대부 蔡襄(채양)의 《茶錄· 차록》과 徽宗(휘종)의 《大觀茶論·대관차론》이 유명하다. 

차를 마시기 위한 그릇이 宋代 공예의 精髓(정수)인 陶磁器(도자기)이다. 고온으로 열처리를 하여 만드는 세라믹스(ceramics)는 당시의 최첨단 산업이었다. 그 절묘한 조형과 색상은 淸朝(청조)의 工房(공방)이 模倣作(모방작)을 만들기도 했지만, 非전문가의 눈으로도 그 수준 차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宋은 과학기술의 분야에서도 當代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이것은 英國의 科學史 연구자 조세프 니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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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적인 唐三彩(左)와 생활에 뿌리박은 宋의 磁器(右)
唐三彩(당삼채)가 무덤의 副葬品(부장품)으로서 제작된 것이 많은 데 비해 宋代의 白磁(백자)· 靑磁(청자)· 黑磁(흑자)는 일상 생활용품이었다. 祭器(제기)가 아닌 實用品으로 구워져, 東아시아 뿐만 아니라 全 세계를 향해 수출되었다. 생활에 뿌리박은 예술—이런 면에서 磁器(자기)는 宋代 문화의 특질을 대표하고 있다.

중국인이 椅子(의자) 생활을 본격화한 것도 宋代이다. 都城 開封(개봉)의 번화한 모습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 ‘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를 보면 여성 둘이 약국의 현관에서 ‘쩍벌’ 자세로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이런 모습에서 필자는 중국의 ‘近代’를 느낀다. 이렇게 서민의 생활이 그림의 소재로 된 것은 北宋 이후였다. 이것은 서민도 繪畵(회화)의 수요층이 될 만큼 성장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北宋에서 확립된 文官 優位(우위)의 중앙집권 체제는 이후 王朝에도 답습되어 중국의 정치·관료제도의 큰 특징이 되었다. 바로 이 文官 우위 체제는 우리에게 그대로 도입되어 조선왕조의 군사력 弱體化(약체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했고, 이 惡習(악습)은 심지어 오늘의 대한민국에도 미치고 있다. 分斷(분단) 상황에서 아들 둘을 군대에 보내지 않은 자가 장관이 되겠다고 나서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北宋·南宋, 합쳐 300년간은 좋든 싫든 현대 中國의 原形質(원형질)이 형성된 시기이다. 唐代의 무덤벽화나 唐三彩(당삼채)를 보면 異國的(이국적) 냄새가 물씬하여 漢族(한족)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중국 역사가들이 흔히 ‘唐宋’이라고 짝짓고 있지만, 宋은 漢族, 唐은 鮮卑族(선비족)이 창업했던 나라였다.


天子門下生들에 의한 ‘先憂後樂’의 宋代 士風

宋代의 文治는 科擧(과거) 제도의 개혁에 의해 이룩되었다. 高等文官 시험이라고 해야 할 과거제도는 宋 太祖 때 殿試(전시)라고 하는 최종시험이 추가되면서 그 기본적인 뼈대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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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榜圖(臺北·타이베이 고궁박물원 소장). 과거시험 합격자의 발표 현장



科擧는 본래 천하의 人材를 선발한다는 목적 하에 隋(수)의 文帝 때 시작된 것이었지만, 唐代(당대)에는 오히려 귀족의 세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惡用(악용)되었다. 즉, 최종시험의 시험관으로 名門貴族(명문귀족)이 임명되어 그 者와 합격자의 사이에 師弟關係(사제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黨派 내의 上下 관계로 변질되어 갔다.   

宋의 太祖는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禮部(예부) 시험의 합격자에 한해 天子 自身(자신)이 직접 임석하여 최종시험을 課(과)했다. 이것이 바로 殿試(전시)이다. 殿試는 天子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불합격자를 내지 않았지만, 그 성적 순위의 결정에는 天子의 意志가 강하게 관여했다. 특히 수석 합격자를 壯元(장원), 2번을 榜眼(방안), 3번을 探花(탐화)라고 하여 크게 우대했다.

이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科擧(과거)의 성적 순위는 합격자[進士] 일생에 붙어 다니고, 그 후 官界의 승진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天子는 친히 殿試를 課하는 것에 의해 합격자, 즉 고급관료의 향후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科擧 합격자는 ‘天子門生’ 으로서 정치에 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范仲암(범중암)으로 대표되는 ‘宋代의 士風’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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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軾(1037~1101)
宋代엔 경제활동이 성행, 상공업에 의해 여유가 생긴 서민 계층이 생기고, 그들의 子弟(자제)가 과거에 도전하는 것이 흔한 일로 되었다. 赤壁賦(적벽부)의 시인 蘇軾(소식)과 그의 동생 蘇轍(소철)은 각료 클래스의 장관이 되었지만, 그의 집안은 四川의 포목상으로서 그의 조부는 文盲(문맹)이었다. 唐代처럼 門閥(문벌)의 배경은 필요 없었고, 수험 자격의 제한도 거의 없었다. 進士 至上主義(지상주의)였다. 蘇軾은 21세, 동생 蕭轍은 18세에 진사가 된 수재들이었다.

범중암은 仁宗代의 文臣이다. 그는 평소 “선비는 天下의 어려움을 남보다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남보다 뒤에 즐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 유명한 先憂後樂(선우후락)의 정신으로, 서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권력이나 富(부)를 누리는 사람의 사회적 의무는 매우 무겁다.

그러나 不毛의 黨派(당파) 싸움으로 北宋을 위기에 몰아넣은 舊法派(구법파)의 司馬光(사마광)·蘇軾(소식), 新法派의 呂惠卿(여혜경) 등도 모두 進士 출신이다. 또한 徽宗代(휘종대)의 재상으로서 宋의 奸臣(간신) 넘버원으로 꼽히는 蔡京(채경) 역시 진사 출신이다. 이것은 高試로만 국가경영의 인재를 충원할 수 없다는 뜻이다. 宋나라의 科擧제도는 한국사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에 과거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고려 光宗 때이지만,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조선왕조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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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軾의 <赤壁賦>을 주제로 그린 武元直(무원직)의 赤壁賦圖(적벽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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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憙
宋學, 즉 性理學(성리학)은 南宋의 朱憙(주희)에 의해 集大成(집대성)되어 朱子學(주자학)이라고도 하지만, 그 이론적 기초를 세운 것은 北宋의 周敦頤(주돈이)와 程頤(정이)‧ 程顥(정호) 형제였다. 性理學은 朱憙의 死後에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베트남의 官學이 되어갔다. 

특히 조선왕조는 중국의 明·淸 왕조보다 훨씬 혹심한 성리학 敎條主義(교조주의)로 흘러 끝내 나라를 그르쳤다. 성리학이 唯一的 학문이 되어, 같은 儒學의 一派인 陽明學(양명학)에 관한 책 한 권만 서가에 꽂아놓아도 斯文亂賊(사문난적)으로 몰려야 했던 곳이 바로 조선왕조였다. 宋學에 물든 조선의 士大夫들에게는 학문적 똘레랑스(寬容)가 없었다. 성리학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은 용납지 않는 根本主義(근본주의)가 문제인 것이다.


水滸傳의 무대
       
東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는 元代에 소설로 완성되었지만, 그것은 宋代의 講談(강담)에서 비롯되었다. 講談에서 ‘奸雄(간웅)’ 曹操(조조)가 敗하는 장면에 이르면 관객들은 박수를 쳤고, ‘정통성의 化身’ 劉備(유비)가 패하면 한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것은 司馬光이 편찬한 편년체 사서 <資治通鑑·자치통감>의 史觀(사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래 陳壽(진수)가 지은 正史 《三國志》에서 정통성은 조조가 창업한 魏(위)에 있었다. 曹操는 전란에 허덕이는 백성을 위해 屯田制(둔전제)를 처음 시행하여 떠돌이 民草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했다. 이로 인해 魏의 國勢(국세)는 蜀漢(촉한) 6배 이상이었다. 따라서 유비의 촉한에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자치통감》이나 이에 근거한 《三國志演義》는 사실상 역사왜곡이다. 그것은 주위의 騎馬民族(기마민족) 정복국가에 의해 끊임없이 侵奪(침탈)을 받은 宋代의 피해의식에 연유한 小兒病的(소아병적)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宋代는 정사 《三國志》를 꾸며서 소설 《삼국지연의》가 성립해 가는 그 중도의 단계였다.  그래서 陳壽가 “軍略(군략)의 재능은 없다”고 평가한 諸葛公明(제갈공명)은 백전백승의 軍師將帥(군사장수)로, “士大夫에게 오만했다”는 關羽(관우)는 信義의 인물이 되어 간다. 역사적 사실이야 어떻든 《삼국지연의》식의 史觀이 서민들 사이에  깊게 각인되어 이것이 바로 중국의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蕭瑜(소유)가 지은 《모택동의 청년시절》을 보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毛澤東(모택동)도 소년시절부터 《三國志演義》와 《水滸傳·수호전》의 마니아였다. 이런 아이들은 대체로 野心이 크고 엉뚱하다. 그래서 書堂 훈장들은 이런 책을 읽지 말라고 學童(학동)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蕭瑜는 모택동의 長沙(장사) 제1사범학교 동창으로서 모택동과 10여 년간 사귀면서 그의 유소년시절의 얘기를 직접 들었던 사람이다. 이 책에 따르면 호남성 湘潭縣(상담현)의 中農 가정 출신인 모택동은 향학열에 불타 고향을 뒤로 할 때 中國 전통의 장대지게 한쪽 바구니에 “三國志演義와 水滸傳(수호전)을 소중하게 매달았다”고 적혀 있다. 또 다른 한쪽 바구니에는 “아무리 가난한 농민이라도 빼놓을 수 없는 모기장, 낡은 셔츠, 빛바랜 윗저고리 등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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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松이 경양강에서 맨손으로 호랑이와 격투하고
있는 장면 (《水滸傳》 중에서)

《삼국지연의》와 더불어 東아시아의 베스트셀러 반열을 지켜온 《水滸傳》의 프롤로그(사건의 발단)는 北宋의 仁宗이 道敎(도교)의 聖地(성지)에 파견한 관료가, 太古에 封印(봉인)된 伏魔殿(복마전)의 門을 억지로 改封(개봉)함으로써 108 마귀가 밖으로 도망쳐 나오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마귀는 그로부터 60년 후 세상에 횡행하는데, 이때가 北宋을 망국으로 이끈 플레이보이 황제 徽宗(휘종)의 시대이다. 《수호전》에는 北宋 말기의 부패한 社會相(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계속)

[ 2011-08-31, 11:1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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