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匡胤 쿠데타의 眞相
제4장 北宋의 네이션 빌딩: 天子가 입는 黃袍는 陳橋驛에서 구할 수 없다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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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史上 처음으로 ‘近代’를 호흡했던 나라. 敵에게 돈을 바치고 平和를 사려다가 결국 비참하게 패망한 나라. ‘남’의 힘을 빌려 敵을 죽이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와 遠交近攻(원교근공)을 좋아하다가 輕蔑(경멸)당한 나라. 富國强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득권층의 代案 없는 반대에 부딪쳐 不毛의 당파싸움만 일삼았던 나라. 끝내는 風流天子가 등장해, 든든한 인프라는 깔지 않고 國都와 궁궐의 디자인에만 골몰했다가 野性에 불타는 北方의 騎馬民族 국가들의 ‘밥’이 되었던 나라. 그것이 오늘의 韓國에 던지는 敎訓
鄭淳台의 北宋 기행-開封/‘경제·문화大國’ 北宋 - 그들은 왜 ‘야만’이라 경멸했던 騎馬民族에게 능욕을 당했던가

술에 취해 잠자다가(?)…

宋의 太祖 趙匡胤(조광윤)은 洛陽(낙양)의 甲馬營(갑마영)이라고 하는 兵營(병영) 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弘銀(홍은)은 낙양의 近衛(근위) 장교였다. 그의 아들 광윤은 後周의 世宗 밑에서 6년간 軍政을 담당하며 後周의 군부 내에서 풍부한 인맥을 갖게 되었다. 豪酒家(호주가)인데다 성격이 대범해 부하들이 잘 따랐고, 반란군 토벌 등 여러 차례에 걸쳐 戰功(전공)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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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外城의 陳橋門 자리



이 시대의 군대는 황제가 임명한 節度使(절도사)를 보이콧한다든지, 절도사를 아예 자기들이 옹립한다든지 했다. 절도사는 軍事와 民政을 함께 관장했기 때문에 小황제로 불렸다. 五代 시대의 황제는 거의 절도사 출신이었다.

後周의 世宗 施榮(시영)은 폭군이 난무한 五代에선 보기 드문 名君이었다. 그는 절도사의 힘을 깎는 한편 近衛軍(근위군: 중앙군)을 강화했다. 이처럼 황제 직속의 중앙군을 강화하고 절도사 휘하의 지방군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强幹弱枝(강간약지)라고 불렀다. 

後周의 世宗은 남부 중국의 최강인 南唐을 굴복시켜 淮南江北(양자강 이북―회하 이남)의 땅을 할양받는 등 통일대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불과 39세로 急死(급사)하고, 그의 아들 崇訓(숭훈)이 겨우 7세의 나이로 후계자가 되었다. 北周의 軍心은 어린 황제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960년 정초, 거란과 北漢(북한)의 연합군이 국경을 침범했다. 後周의 近衛軍(근위군)에 동원령이 발령되었다. 국경을 향하는 近衛軍은 국도 開封을 차례로 출발했다. 조광윤은 殿前都點檢(전전도점검)이었다. 殿前都點檢이란 皇帝 앞에 포진하는 近衛軍(근위군)의 총사령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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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卓(동탁)이 洛陽(낙양)에 방화하고 있다
1월3일 조광윤은 開封을 출발, 하루 行程(행정)인 陳橋(진교)라는 캠프에 도착해 야영했다. 수만의 병력이 그 주위에 分宿(분숙)하고 있었다. 조광윤은 그날 밤도 술을 마시고 잠들었다. 史書에 의하면 장병들이 조광윤 옹립을 謀議(모의)하고, 그것을 요청하려고 몰려오자 그의 동생 趙匡義(조광의)와 참모 趙普(조보)가 外征(외정)으로부터 개선한 후에 거행하면 좋겠다고 일단 제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병들은 듣지 않았다. 장병들의 재촉을 받고 조광의가 兄의 침실에 가서 옹립의 건을 보고하면 조광윤은 苦辭(고사)했다. 

군의 간부들은 칼을 빼어들고 마당에 정렬하여 “諸軍(제군)에 주인이 없습니다. 원컨대 太尉(태위: 국방장관)께서 天子가 되어 주시오”라고 강청했다. 당시 조광윤은 태위도 겸직하고 있었다. 五代 시대엔 흔히 있었던 광경이었다.

조광윤이 미처 대답하기 전에 누군가가 黃袍(황포)를 그의 어깨에 척 걸쳐버렸다. 黃袍(황포)라는 것은 황제의 옷이다. 장병들은 ‘萬歲’를 외쳤다. 이쯤 되면 제 아무리 異心이 없다고 해도 叛旗(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떠밀렸다. 이상이 조광윤이 황제로 추대되는 시나리오의 줄거리이다.

그러나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누군가에 의해 黃袍가 입혀지고,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은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을지 모르나 설득력이 전혀 없다. 天子만 입는 黃袍는 진교역과 같은 시골구석에서 갑자기 구할 수 있는 옷이 절대 아니다. 따라서 조광윤의 황제 추대 운동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또한 군부와 밀착하고 있었던 조광윤이 그런 동향을 몰랐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조광윤은 그가 제시한 3개조의 조건을 장교들이 誓約(서약)하자 비로소 回軍에 동의했다. 조광윤의 품성이 잘 나타난 3개조의 서약은 다음과 같다.
 
1. 太后(태후)와 어린 황제를 놀라게 하거나 犯(범)해서는 안 된다.
2. 大臣들은 모두 동료들이므로 이들도 犯해서는 안 된다.
3. 府庫(부고)는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에 이것을 약탈해서는 안 된다.

太祖 조광윤은 荊南(형남: 湖北)·楚(초: 湖南)·南漢을 멸망시켜 宋의 영토가 南海에 이르게 하고, 이어 서쪽 蜀(촉)을 멸하여 長江 상류를 병합했다. 福建(복건)지방은 자진 항복해왔다. 고립에 빠진 南唐(남당)도 평정되었다. 마지막으로 長江 하구 兩岸(양안)을 차지하고 있던 吳越(오월)과 거란의 후원에 의해 山西 지방에 버티고 있던 北漢은 太祖의 동생 太宗 때 宋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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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시대의 步兵과 騎兵(출처:中國전통병기圖鑑)>



태조는 문관 優位(우위)의 체제 확립에 진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唐末(당말)로부터 五代에 걸쳐서 節度使(절도사: 藩鎭)가 각 지방에 할거하여 독립왕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태조가 즉위했던 그 해(960년)에도 昭義(소의)의 절도사 李筠(이균)과 淮南(회남)의 절도사 李重鎭(이중진)가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태조는 이를 토벌하고 정권 안정화에 착수, 절도사로부터 民政·軍事·財政(재정)의 3權을 빼앗아 그것을 有名無實(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었다. 태조·태종 兩代에 걸친 노력으로 중앙집권적 군주독재제가 확립되었다. 

宋 태조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文官들을 그가 직접 主宰(주재)하는 과거의 최종관문인 殿試(전시)를 통해 배출된 進士들로 충원했다. 宋代의 士大夫는 고급관료(정치가)와 知的 엘리트,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유했다. 그들은 天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왕성한 의기와 理想을 가지고 정치에 임했다.

그러나 宋은 문관 優位의 체제를 취한 것이 하나의 주요 原因이 되어 군사력의 약체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후일 거란·西夏·金(금) 등 북방세력의 침공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太宗 즉위의 미스터리
 
이제 太祖 조광윤의 죽음과 그의 동생 趙匡義(조광의)의 황제 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太祖의 병이 깊어지자 황후 宋씨는 환관 王繼恩(왕계은)에게 太祖의 차남 德芳(덕방)을 불러오도록 했다. 그런데 王繼恩은 德芳을 불러오지 않고, 곧바로 晋王을 불러왔다. 晋王은 太祖의 바로 아래 동생인 趙匡義이며, 그는 일찍이 陳橋의 回軍(회군)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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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 초기의 전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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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의 태조(上)와 태종(下)
晋王이 病床(병상)으로 달려오자 太祖는 주위 사람을 물러나라고 명했다.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교환되었는지, 일체 알려진 바 없다. 다만 등불에 비치는 그림자로는 晋王이 앉은자리로부터 떠나는 모습이 인식되었을 따름이다. 이윽고 太祖가 작은 도끼를 치켜들고 침대를 치면서 “확실하게 하라”고 외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러고는 곧 太祖가 사망했다. 그의 나이 50이었다. 곧 황후가 달려왔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자기 둘째아들이 아니라 晋王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우리들 母子의 목숨은 모두 당신께 맡깁니다.”
晋王이 답했다.
“함께 富貴를 누리도록 노력합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광의가 즉위하니(976년), 그가 제2대 太宗이다. 太宗은 그해 12월에 元號(원호)를 太平興國(태평흥국)으로 고쳤다.  그래서 太宗의 태평흥국 元年은 太祖의 開宝 9년과 같은 976년이다. 이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前 황제를 존중하여 후계 황제는 원칙적으로는 즉위 다음 해를 원년으로 삼기 때문이다.   

太宗의 동생인 廷美(정미)는 수도 開封의 長官에 임명되고, 齊王에 봉해졌다. 太祖의 장남 趙德昭(조덕소)는 永興軍 절도사, 太祖의 차남 趙德芳은 西山南路 절도사가 되었다. 

太宗이 형을 독살했다는 說이 나돌았다. 당연히 太宗의 인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太宗은 士大夫 계급의 마음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수법을 구사했다.  첫째, 科擧(과거)의 합격자를 대량으로 늘리고, 新人을 발탁하여 과거 합격 후 불과 11년 만인 관료를 宰相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新人의 발탁은  太祖 시대의 관료들을 물리치고 관료층을 새로 육성하려는 노림수였다.  둘째, 역사서 등의 편찬사업을 일으켜 지식계급의 일자리를 늘림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무마하려 했다. 그 결과 백과사전인 《太平御覽》 1000권, 《文苑英華》 1000권, 《太平廣記》 500권 등이 편찬되었다.

태평흥국 2년(977) 8월, 太祖의 장남 趙德昭는 궁지에 몰려 비수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거란과의 전투에서 태종이 전사했다는 誤報(오보)를 들은 병사들에 의해 조덕소 옹립운동이 벌어졌다. 바로 이 헤프닝에 태종은 몹시 기분을 잡쳤다고 한다. 태평흥국 6년(981) 3월에는 太祖의 차남 조덕방도 죽었다. 그의 죽음에도 의문이 뒤따랐다.   

太祖의 아들 둘이 잇달아 죽은 일 때문에 太宗의 동생 廷美는 자기도 살해당하지 않을까 뷸안해 했다. 그런 齊王 廷美는 죄를 얻어 배릉縣公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廷美는 회개하지 않고 거꾸로 폐하를 원망하고 있다”는 讒訴(참소)가 올라와 그는 남쪽 房州로 귀양을 갔다. 거기서 그는 울분 속에 세상을 떠났다.

太祖에 비하면 太宗에겐 어두운 그림자가 잔뜩 끼어 있다 <宋史>에는 “太祖가 죽은 해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改元한 것, 德昭의 자살  등을 들어 太宗에 대한 後世의 의논이 없을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太宗의 治世를 대외적인 면에서 보면 지금의 浙江省(절강성)에 있던 吳越이라는 小독립국을 入朝시켜 영토를 병합하고, 太原(태원: 지금의 山西省 省都)을 국도로 삼던 北漢을 공격해 멸망시켜 太祖가 시작한 中國 통일사업을 완성했다(979년).  그러나 北漢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짐에 따라 宋과 거란의 관계는 긴장의 度가 높아졌다.

979년 5월, 宋軍은 北漢을 병합한 餘勢를 몰아 燕雲 16州로 진군했지만,  遼(요)의 장수 耶律休哥(야율휴가)에게 高梁河(고량하)에서 무참하게 패배하고 허둥지둥 회군했다. 당시 遼에서는 내분이 한창이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宋은 遼에 완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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燕雲(연운) 16州의 지도



연운 16주 내에는 雁門(안문)·居庸(거용)·松亭(송정)·古北(고북)·紫荊(자형) 등 5關이 있어서 北方 방어의 요충을 이룬다. 따라서 연운 16주의 수복은 五代 이래 中原에 건국한 나라들의 숙원이었다.  

宋의 태종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軍伍(군오)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는 고려·安定國 등과 연합하여 掎角之勢(기각지세)를 이루려 했다. 드디어 986년 3월, 宋 태종은 제2차 거란 정벌을 감행했다. 고려는 이에 응해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군이 비록 거란 領內에까지 진공하지는 않았지만, 국경에 진격하여 거란에 대한 심리적 타격을 가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송군은 岐溝關(기구관)에서 야율휴가에게 대패했다. 이 두 번의 패전 이후 宋은 사기가 저하되어 그 후 거란과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다.


步兵 위주의 宋은 騎馬民族국가 거란에 足脫不及

이것은 건국 이후 文官을 중시하고 무관을 천시하며 禁軍 이외의 지방군의 약화시키는 바람에 宋軍의 전투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군은 步兵(보병) 위주였는데, 거란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騎兵(기병)이 主力이었다.   

宋의 문제는 戰馬(전마)의 확보였다. 말(馬)이 근대 이전의 국가경영에 얼마나 중요했던지 ‘國之强弱在馬(국지강약재마)’라고 할 정도였다. 馬匹(마필)은 생산·교통·교역·전쟁에 사용되어 국가간에는 그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宋의 영토엔 草原지대가 거의 없어 말의 생산에 절대 불리했다. 

태종은 즉위년(976년)에 諸軍(제군)의 戰備(전비)를 검열한 결과 戰馬가 태부족이었다. 이 부족한 마필을 보충하기 위해 有敢藏匿者殺(유감장익자살), 즉 “감히 보유한 말을 숨기는 자는 죽인다”는 강압적 방식으로 吏民(이민)의 말 17만 필을 강제 매입했다. 그러나 量은 물론 質도 만족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이런 말에 騎乘(기승)한 宋의 기병이 유아 때부터 말을 탄 유목기마민족의 戰士(전사)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거란의 본거지 內몽골 초원지역과 더불어 東아시아의 名馬산지로 유명한 곳은 여진이었다. 여진의 땅은 부여·고구려·발해의 옛 땅으로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의 果下馬(과하마)와 발해의 率濱馬(솔빈마)가 유명했다.    

사료의 결핍으로 단언할 수 없지만, 고려는 건국 초부터 여진과 馬 무역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태조 19년(936),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인 一利川(일리천: 경북 김천) 전투 때 고려군에는 黑水靺鞨(흑수말갈)의 勁騎(경기) 9500騎가 참여했다. 9500騎라면 고려군의 全기병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고려는 後三國 통일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수량의 戰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진의 말을 대량으로 수입한 것 같다. 定宗 때에도 거란 침입을 대비하여 光軍(광군)을 조직하면서 여진의 말을 수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계속)

 

[ 2011-09-06, 13:5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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