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구려땅의 주인이다
제5장 ①耶律阿保機의 帝國 건설: 고려·거란의 歷史 논쟁

鄭淳台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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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史上 처음으로 ‘近代’를 호흡했던 나라. 敵에게 돈을 바치고 平和를 사려다가 결국 비참하게 패망한 나라. ‘남’의 힘을 빌려 敵을 죽이려는 以夷制夷(이이제이)와 遠交近攻(원교근공)을 좋아하다가 輕蔑(경멸)당한 나라. 富國强兵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득권층의 代案 없는 반대에 부딪쳐 不毛의 당파싸움만 일삼았던 나라. 끝내는 風流天子가 등장해, 든든한 인프라는 깔지 않고 國都와 궁궐의 디자인에만 골몰했다가 野性에 불타는 北方의 騎馬民族 국가들의 ‘밥’이 되었던 나라. 그것이 오늘의 韓國에 던지는 敎訓.
鄭淳台의 北宋 기행-開封/‘경제·문화大國’ 北宋 - 그들은 왜 ‘야만’이라 경멸했던 騎馬民族에게 능욕을 당했던가

高麗·宋·遼의 三角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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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 시라무렌강 유역에 위치한
慶州의 白塔(백탑). 遼 제국은 屈指의
불교문화국이었다
10세기 東北亞의 형세는 크게 요동쳤다. 먼저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가 907년 거란을 세우고, 916년 황제국이자 아시아 최강국을 자임했다. 王建은 918년 고려를 세우고, 936년 後三國을 통일한 뒤 北進(북진)의 꿈을 불태우고 있었다. 趙匡胤(조광윤)은 960년 宋을 창업하고, 거란이 잠식하고 있는 燕雲 16州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다.

고려 태조 王建(왕건)은 高句麗(고구려)의 옛 땅인 遼東(요동) 쪽을 주목했다. 遼東은 얼마 전만 해도 渤海(발해)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926년, 발해는 開國(개국) 214년 만에 거란의 태조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발해가 망하자 많은 발해 遺民(유민)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고려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高麗 태조 25년(942) 거란의 太宗은 고려에 환심을 사려고 낙타 50필을 사신 편에 보내 왔다. 태조는 거란을 ‘無道한 나라’ 라고 규정하면서, 사신 30명을 먼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開京의 萬夫橋(만부교) 아래에 매어 두고 꼴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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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太祖 야율아보기의 騎馬像(內몽골 赤峰市 紅山
공원)>
태조 26년(943), 王建은 후대 왕들이 방종하여 기강을 어그러뜨릴까 크게 근심하여 訓要十條(훈요십조)를 남겨 아침저녁으로 펴보아 거울로 삼도록 했다. 훈요십조 제4항에는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며 풍속도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반드시 그들의 衣冠(의관)과 제도를 본받지 말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매우 온화한 品性인 태조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란 使臣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었다.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을 언젠가는 싸워야 할 假想敵國(가상적국)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찌감치 기세를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太祖 자기를 믿고 고려로 歸附(귀부)해 온 10여 만의 발해 유민에 대한 義理(의리)이기도 했다. 

사실, 태조는 기회 있을 때마다  平壤(평양)에 가서 北進의 꿈을 달래었다. 나라를 세운 다음 해인 919년에는 평양에 성을 쌓고 아예 서쪽 國都라는 뜻에서 西京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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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京臨潢府(내몽골 赤峰市 巴林左旗·파림좌기)의 祖陵(조릉). 上京臨潢府는 야율아보기의 거란 건국
당시 수도였다



거란의 군세가 날로 날카로워지자 定宗 때에는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光軍司(광군사)를 설치하고, 병력 30만을 뽑아 光軍이라고 불렀다.    

高麗 成宗 4년(985), 宋의 太宗은 거란(遼·요)을 치기 위해 韓國華(한국화)라는 이름의 사신을 高麗에 보내 원병을 청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어전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다. 
“太祖(王建)께서 못 이루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면 지금 宋나라에서 요청한 응원군을 보내야 합니다.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徐熙(서희)가 반대 의견을 말했다.
“아닙니다. 거란은 지금 막 불같이 일어나는 신흥국입니다. 宋나라는 싸움에 이길 수 없습니다. 공연히 군사를 보냈다가 거란과 틈이 벌어지면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986년, 成宗은 宋나라 사신의 간청에 못 이겨 약간의 군사를 동원함으로써 거란을 견제했다. 이때, 거란 영내로 진공한 것은 아니지만, 거란은 고려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그러나 거란의 太宗·世宗·穆宗·景宗 시대에는 거란의 내홍으로 고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에 고려와 여진·발해유민 등이 그 故地에서 다시 왕성해지자 거란에 새로운 위협세력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란 聖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帝位에 오르고, 母后인 蕭태후의 섭정으로 국정을 장악해 국내가 안정되었다.  

991년, 거란이 고려와 여진·宋 사이의 통로를 끊으려고 압록강 요충에 세 성을 쌓았다. 실은 침략의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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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문자
고려 成宗 12년(993), 徐熙의 예견대로 거란의 蕭遜寧(소손녕)이 거느린 號曰(호왈) 80만 대군이 고려 北部에 침략했다. 80만 명이라면 전투병 이외에 부녀자·아이 등 먹고 입을 것을 구하는 집단도 섞여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成宗은 朴良柔(박양유)·徐熙 등에게 군사를 주어 거란군을 막게 하는 한편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平壤으로 향했다. 

거란에서 蕭(소) 씨는 皇室의 外戚(외척)이다. 원래 위구르族 국가로서 9세기 중엽 唐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은 回鶻(회골)의 遺民(유민)이다. 蕭 씨 등의 위구르족의 歸附(귀부)에 의해 거란은 비로서 西域의 先進 문화와 제도를 도입하고 거란문자를 만드는 등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에 성공했다.

거란 침략군의 總지휘관인 소손녕의 본명은 蕭恒德(소항덕)으로서 거란 황후의 친정 아버지였다. 따라서 그는 협상 때 상당한 재량권을 구사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徐熙와 蕭遜寧의 역사논쟁

거란군은 破竹之勢(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成宗은 徐熙(서희)를 거란 진영에 보내 그들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徐熙를 보자 소손녕은 대뜸 소리를 쳤다.
“우리 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산 지가 이미 오래이다. 너희 나라가 무엇 때문에 제 땅이라고 하며 국경을 자주 침범하느냐.”

徐熙는 소손녕의 속뜻을 살피기 위해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왜, 아무 말도 못하느냐? 우리 80만 대군과 싸우든지, 아니면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어서 나와 항복해라. 내일까지 회답이 없으면 전멸시키고 말겠다.”

徐熙는 소손녕이 겉으로 큰 소리는 치지만, 和親(화친)할 기미가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사실, 人口 많고 物資(물자) 풍부한 宋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거란으로서는, 고려가 宋나라와의 同盟(동맹)만 파기해 준다면 굳이 침략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다시 고려의 陣中(진중)에서 어전 회의가 열렸다.

“西京 북쪽의 땅을 거란에 떼어 주고 그들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太祖께서 그토록 애써 얻은 땅을 어찌 오랑캐에 떼어 주겠습니까. 최후까지 싸워야 합니다.”

듣고 있던 成宗은 땅을 할양하더라도 빨리 적을 물러가게 하고 싶었다.
“저들의 강한 군대를 대항하기 어렵다면 평양 以北의 땅을 떼어 주고 和親하는 게 마땅하오. 그러다가 후에 힘을 길러 다시 수복해도 될 것이오. 어서 창고에 있는 곡식을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大同江의 물 속에 던져 넣도록 하오.”

徐熙가 이에 반대했다.
“식량이 많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싸움이란 군사가 강하고 약한 것에 달린 것이 아니라 기회를 잘 이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식량은 백성들의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왕은 徐熙의 말에 따랐다. 이때, 소손녕의 진영에서 使者가 와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거란 측의 요구를 들어주고 화친할 것인지를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했다. 바로 이때 安戎鎭(안융진)에서 그곳의 중랑장 大道秀(대도수)가 거란군과 싸워 대승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대도수는 그의 姓氏로 보아 발해 출신으로 보인다. 용기를 얻은 成宗은 소손녕 진영에 徐熙를 보내 담판을 짓도록 했다.

거란 진영에서 徐熙와 소손녕의 담판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유명한 역사논쟁이 벌어졌다. 東北工程(동북공정)이란 역사 왜곡 작업에 골몰하고 있는 오늘의 中國이 교훈을 얻어야 할 역사의 名장면이다. 소손녕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고려는 新羅(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나, 우리 거란은 고구려의 옛 땅에 살아온 지가 이미 오래 되었소. 그런데도 고려가 우리 땅을 자주  침범하는 이유가 뭐요? 또 고려는 우리와 국경이 닿아 있는 데도 朝貢(조공)을 하지 않고 굳이 바다를 건너 宋나라에 朝貢(조공)하는 것은 우리를 무시한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오?”

“장군의 말씀은 잘못이오. 우리 高麗는 高句麗를 잇는 나라라는 뜻에서 국호를 高麗라 한 것이오. 貴國의 국경을 침범한다고 말씀하지만, 고구려의 영토는 貴國의 국도인 東京(동경: 지금의 遼陽)도 포함되어 있었소.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회복하려고 했을 뿐, 귀국의 영토를 침범한 일이 없었소. 압록강 이북의 땅도 우리의 옛 영토이던 것을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는 형편이오. 그래서 귀국과 우리나라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 않소. 이제 만약 장군께서 군사를 돌려 여진족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강토를 돌려주신다면 어찌 달게 거란에 朝貢(조공)을 바치지 않겠소.”

徐熙의 말을 들은 소손녕은 더 이상 요구하지 않고 거란 임금에게 和親(화친)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거란으로서는 고려·宋의 동맹을 깨는 成果(성과)를 얻은 셈이다. 이렇게 되어 거란군은 물러갔다. 거란이 고려에 江東 6州의 땅을 주는 대신에 거란의 正朔(정삭)을 받들었던 것이다.  


(계속)

[ 2011-09-07, 14:0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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