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과 여행/옐로우스톤 가는 길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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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生과 여행(1)
  태평양을 밤에 건너면서 조종실 창문을 통해서 별들을 바라보니 꼭 우주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해외 여행을 처음 한 것은 1975년 3월이었다.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 시절이었다. 그 전해 한국 기자협회에서 주는 한국 기자상 취재보도 부문의 수상자가 된 나는 해외 여행이란 副賞을 받아 일본을 22일간 여행할 수 있었다. 그때 1회용 여권을 내는 데 한 달 걸렸다. 특히 신원조회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김포에서 혼자서 점보를 타고 동해를 건너 도쿄의 하네다 공항에 내렸다. 예약해두었던 메구로에 있는 한 오래 된 호텔에 들었다. 밤에 시내로 나와 라면 집을 찾았다. 주방에서 일하는 두 아줌마끼리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한 아줌마가 '어제 모파상이 쓴 '여자의 일생'을 읽었다. 너무 재미 있더라. 다 읽은 뒤에 빌려주겠다'고 하니 다른 아줌마도 최근의 독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날 일본에 오기 전부터 별렀던 일을 했다. 바나나와 귤을 한 아름 사 가지고 호텔 방에 가서 실컷 먹고 다음날 아침까지 때운 것이다. 도쿄에서 시작하여 가마쿠라, 아타미, 오사카, 교토, 나라, 히로시마, 후쿠오카, 벳부, 미야자키를 돌고 시모노세키에서 釜關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 獨學으로 배웠고 공군에서 근무하면서 실습했던 일본어가 많이 도움이 되어 별 불편 없이 여행했다. 모든 점에서 한국보다 두 단계 정도 앞선 일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편하게 느껴졌다.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유일한 나라의 국민임을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여행중 나는 아타미에서 여관을 잊어버렸다. 밤에 아타미 역 부근에 있는 여관에 체크 인을 했다가 나와서 밤 거리를 몇 시간 돌아다닌 후 돌아가려는데 아뿔싸, 여관 이름을 잊어먹은 것을 깨달았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물어보니 아타미엔 여관이 400개나 된다는 것이었다. 친절한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한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찾았다. 정말 진땀이 났다.
  
   이 무렵 해외 여행을 하고 돌아가는 한국인들은 대체로 골치가 아팠다. 선배와 동료,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이 그러했고, 세관에서 까다로운 짐 검사를 받을 생각을 하면 귀국일이 다가올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1970년대 초까지 신문사에선 해외 취재를 떠나는 기자를 자랑하듯이 소개하는 기사를 실었고, 주요 인사의 출국이 기사거리가 되었다. 나도 일본을 겉만 훑어보고 돌아와선 신문에다가 10회에 걸쳐 일본 기행문을 썼다. 간도 컸던 시절이다.
  
   1977년 포항석유는 경제성이 없다는 글을 썼다가 정보부의 압력으로 신문사에서 쫓겨난 나는 세계 최대의 신발 공장인 국제상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해 여름 두번째로 해외여행에 나섰다. 일본에서 회사 일을 끝내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날았다. 열흘간 로스엔젤레스,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녔다. 한국과는 악연이 깊은 카터 대통령 시절이었다. 미국의 도심은 흑인들 차지가 되고 밤길을 걷는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뉴욕 타임 스퀘어에 있는 카터 호텔에 들었다가 밤 거리를 돌아다닌 것까지는 좋았는데 객실로 돌아오니 도둑이 들어 가방안에 넣어두었던 녹음기만 빼내가버렸다. 녹음기에 취재메모를 구술해두었는데 말이다. 파출소에 신고했더니 경찰관을 보내겠다고만 하고는 감감 무소식이었다.
  
   야구광인 나는 미국에 갈 때마다 메이저 리그 구경을 간다. 로스엔젤레스의 다저스 스태디움의 최상단에 앉았다. 내 옆은 흑인 장님이었다. 가만 보니 큰 라디오를 가슴에 끌어안고 중계를 들으면서 현장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1977년의 미국은 히피로 상징되는 反戰문화가 끝물이었다. 여행중 '1965년 졸업생'이란 책을 사 읽었는데, 촉망 받던 한 고등학교의 한 반원들이 그 뒤 10년간 어떤 궤적의 삶을 살았는지를 추적한 이야기였다. 이 젊은이들은 월남전을 배경으로 한 질풍노도와 같은 10년을 헤쳐가면서 상처받고 성숙했다. 그 20년 뒤 한국의 대학생들이 비슷한 경험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1977년 나는 신문사에 복직했다가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와서 다시 해직되어 1년간 잡지 기고로 먹고 살아야 했다. 1981년부터는 서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는 轉禍爲福(전화위복)이었다. 1981년에 창간된 월간 마당에서 나는 심층취재를 맡았다. 두 달 간 오일로드, 즉 중동-울산간 석유수송로 취재를 한 적도 있다.
   먼저 홍콩-싱가포르-말레이시아-타일랜드를 거쳐 쿠웨이트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세아 상선(현대상선의 전신)의 20만t 탱커 동해 2호에 올랐다. 동해 2호는 기름을 가득 싣고는, 걸프-호르무즈 해협-인도양-벵골만-말래카 해협-동지나해를 지나 울산으로 돌아왔다. 항해에 한 달 걸렸다. 동해2호는 동지나해에서 초속 40m의 강풍을 만났으나 그 속을 뚫고 지나갔다. 높이 6~10m의 파도를 헤쳐가는데도 끄떡 없었다. 기름을 실어 船體의 5분의 4는 물속으로 들어간 상태의 동해 2호는 흔들리지 않았다.
  
   갑판위로는 파도가 쓸고 다녔다. 뱃전을 친 파도가 거대한 물덩어리가 되더 한 100m 상공으로 뛰어오르더니 반대 편으로 떨어졌다. 한밤중에 선장이 船橋(조타실)로 올라오더니 '이런 구경은 돈 주고도 못한다'면서 갑판위에 있는 전등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나는 1983년 10월 조선일보 월간조선부로 옮겼다. 당시의 全斗煥 정권下 정보부는 反정부 해직기자들의 복직을 금하고 있었지만 잡지 부서에는 예외를 인정했다. 좋은 간판 아래서 넓은 지면 위에서 마음껏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1984년 1월 나는 6년만에 처음으로 일본에 취재차 건너갔다. 필로폰 문제를 취재하기 위함이었다. 후코오카 공항에서 대한항공기를 타고 김포로 돌아왔는데 폭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한 30분간 구름속에서 불안한 선회비행을 하는 동안 나는 마감시간이 지난 기사를 쓰느라고 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착륙바퀴가 활주로에 닿는가싶더니 다시 이륙하여 김해 공항으로 갔다. 김해 공항 상공에서도 몇 바퀴 돌더니 착륙했다. 비행기는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다시 김포로 돌아왔다.
  
   그 석달 뒤 나는 대한항공의 안전문제를 취재하다가 바로 내가 탔던 여객기의 그때 機長을 만났다. 대기 선회를 너무 오래 하는 바람에 연료가 거의 바닥 나 혼이 났고, 회사에서 징계를 당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생각났다.
  
   그해 7월엔 조선총독부 시절의 고위 관료들이 해방 뒤 귀국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다시 일본에 갔다. 이때 흥미로운 두 사람을 만났다. 伊藤博文의 손자와 李容九의 아들. 伊藤博文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한국을 강제합병하는 데는 반대했었다는 점을 강조했고, 매국노로 알려진 李容九의 아들은 病床에서 내리 사흘간 나에게 한 맺힌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1985년 나는 대한항공의 협조를 받아 점보의 조종실에서 지구를 일주했다. 태평양을 밤에 건너면서 조종실 창문을 통해서 별들을 바라보니 꼭 우주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2. 옐로우스톤 가는 길
  인생과 여행(2)/밤이 되니 여기저기서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데 꼭 포격전이 오가는 戰線 한가운데를 달리는 것 같았다.
  
  
   1986년 2월호 月刊朝鮮에 나는 '한국내 美CIA'라는 기사를 썼다. 미국 대사관 안에 있는 CIA 서울지부의 내막을 추적한 글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막후에서 비밀스러운 역할을 했던 역대 지부장과 조직에 대해서 쓴 최초의 보고서였다. 미국 대사관이 조선일보가 아니라 張世東 안기부장에게 항의를 했고 나는 안기부 수사국에 연행되어 이틀간 조사를 받은 뒤 회사에 사표를 내야 했다. 4개월 놀다가 다시 복직했다. 이로써 나는 朴, 全 정권 때 세 번 목이 잘렸다가 살아난 기자가 되었다.
   1987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한 해였다. 6월 사태, 6.29 선언, 개헌, 노사분규,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12월 大選으로 이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두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釜馬사태와 10.26 사건을 다룬 '有故'(한길사)와 '12.12 사건-鄭昇和는 말한다'(까치)였다. '有故'가 일본에서 '한국을 震感시킨 11일간'(JICC)이란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다. 1988년 초, 출판사의 초청으로 일본에 간 김에 필리핀까지 여행했다. 필리핀은 그 2년 전 마르코스를 '피플 파워'로써 몰아낸 다음 아키노 여사가 대통령으로 재직중이었다. 마르코스의 집무실과 부인 이멜다 여사의 신발장은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호사와 빈곤이 공존하는 필리핀이 파키스탄과 함께 1960년대 초반엔 우리가 따라잡고자 한 모범국이었다.
  
   1989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다른 회사 기자들과 함께 40일간 미국을 여행했다. 10여개 주에 스물 몇 개의 도시를 돌아다녔다. 나이아가라 폭포, 그랜드 캐년, 옐로우스톤 파크, 요세미티, 캘리포니아 서해안인 빅 서 등 미국을 대표하는 경관들을 다 구경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를 위한 한국어 방송국 '라디오 코리아'를 설립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가수 이장희 씨는 극성 여행가였다. 이장희 씨와 그의 친구 두 사람,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서 캠핑 카를 몰고 북쪽으로 약 1500km 떨어진 옐로우스톤 파크를 향해 출발한 것은 9월 하순이었다. 이장희씨와 그의 친구 둘이서 번갈아 운전을 맡았다. 나는 운전석 옆자리에서 道路 지도책을 펴놓고 여행에 따른 이런저런 정보를 브리핑해주는 역할이었다. 폭스바겐사에서 만든 이 캠핑카에는 주방시설과 4인용 2층 침상까지 마련돼 있었다. 운전대를 넘겨준 사람은 침대로도 사용하는 뒷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자곤 하였다.
  
   우리 일행은 네바다 남부 사막을 가로 질러 한 다섯 시간만에 라스베이거스에 도착,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리조나→유타주로 접어들었다. 사막과 황무지를 달리는데 천둥번개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밤이 되니 여기저기서 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데 꼭 포격전이 오가는 戰線 한가운데를 달리는 것 같았다. 암흑을 가르며 하늘에다가 하얀 선을 쭈빗쭈빗 그리는 번갯불은 우리 캠핑카에겐 길을 밝히는 조명탄이기도 하였다. 직선으로 쭉 뻗은 國道에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바다속의 孤島(고도)와 같은 작은 마을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운전의 명수이기도 한 이장희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일종의 야간비행을 즐겼다. 고향 이야기, 연애 이야기, 정치 이야기, 노래 이야기 등등 번갯불 피워놓고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유타주의 솔트 레이크 시티를 약 100km 앞둔 작은 마을에서 우리는 모텔에 들었다. 그때가 밤 12시쯤, 캠핑카를 마당에 세워놓고 차속에서 하얀 밥과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누가 한국사람 아니라고 할까봐?!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 또 줄기차게 달려 오전 9시쯤, 라스베이거스를 떠난 이후 최대의 도시인 솔트 레이크 시티에 도착하였다. 힐튼호텔 카페에서 우아한 아침을 먹고 몰몬교 총본산 교회를 구경한 뒤 다시 출발했다. 유타주-아이다호-와이오밍주로 北上하여 우리는 마침내 저기압대를 따라내고 청명한 하늘 아래로 빠져나왔다. 옐로우스톤 파크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쯤이었다. 강가 숲속에 차를 세우고 저녁을 해먹는데 송아지만한 산양떼가 강물을 따라 첨벙첨벙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옐로우스톤 파크는 미국의 국립공원 제 1호이다. 미국에 도착하니 '옐로우스톤 파크를 맨 나중에 구경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옐로우스톤 파크를 먼저 보면 나이아가라 폭포나 그랜드 캐년이 시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말이 공원이지 그 면적이 경상남도보다 더 넓은 옐로우스톤 파크는 미국 自然美의 종합판이다.
   나이아가라만큼 크지는 않지만 엄청난 폭포가 있고, 그랜드 캐년만큼 크지는 않지만 더 정교한 계곡이 있으며, 해발 3000m를 웃도는 山頂에 드넓은 호수가 있고, 여러 군데서 온천수가 솟아나고 화산 분화구 비슷한 곳 여기 저기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게 꼭 外界에 온 것 같은 기분을 자아낸다. 몇 년 전에 큰불이 나 숲의 45%를 태웠다. 숯덩어리가 된 새까만 숲이 수십km를 뻗어 있었다.
  
   장난기와 호기심과 모험심이 남다른 이장희 씨는 옐로우스톤 파크에 온 것이 두번째라고 했다. 그는 아주 으시대면서 별들만 반짝이는 캄캄한 밤중에 우리 일행을 모처로 안내하였다. 타월을 하나씩 들고 냇가의 샛길을 따라 걸어서 도착한 곳은 노천 온천이었다. 우리는 어둠에 감사하면서 옷을 홀랑 벗고, 섭씨 40도는 될 것 같은 냇물로 들어갔다. 찬물과 온천물이 뒤섞여 이쪽으로 옮기면 온탕, 저기로 움직이면 냉탕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주먹만한 별들이 툭 치면 와르르 떨어질 것처럼 박혀 있었다. 우리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고향을 생각하며 불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근사한 목욕을 하고 나오는데 캠핑 차 앞에서 공원 경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설명했다. 몇 달 전에 이 부근에서 살인 사건이 났다고. 야간 入浴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경고 푯말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더니 외국인인 두 사람을 빼고 즉석에서 벌금을 물리고 돈을 받아갔다.
  
  
  
  3. 몽골벨트를 가다
  人生과 여행(3)/한국인의 인종적, 역사적, 정신적 인연도 유라시아 草原의 바람과 하늘에 닿아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간단했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 나를 포함한 한국인의 외국 여행 횟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중국과 소련, 東歐가 열리고, 아시아나 항공이 생겼다. 일본의 지방 도시와 한국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일본 동북지방의 센다이, 북해도의 삿포로도 가까워졌다.
   나는 1994년엔 싱가포르, 프랑스, 스위스, 독일, 리비아, 베니스, 로마를 다녀왔다. 프랑스 샤모니를 찾은 날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몽블랑에 오르기는커녕 산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9년 뒤에 다시 샤모니를 찾았을 때는 날씨가 좋아 몽블랑 3800m까지 케이블 카로 오를 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궁전으로 사용했던 파리 근교의 퐁텡블루 궁전에 있는 그의 침대는 정말 작았다. 그의 키는 167cm 정도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나폴레옹 숭배자였다. 朴正熙 전기를 쓰다가 보니 이 가난한 소년이 나폴레옹 傳記를 읽으면서 군인의 꿈을 키운 것이 그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꾸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많다.
  
   두 사람 다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다 포병장교 출신이었다. 두 사람 다 이혼경력이 있다. 두 사람 다 쿠데타를 두 번 했다. 두 사람 다 죽은 지 한참 뒤에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다 프랑스와 한국의 제도적, 물질적 토대를 놓았다. 두 사람 다 “영웅에게는 하인이 없다”는 말이 통용되지 않는다. 나폴레옹과 박정희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은 그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좋은 점, 나쁜 점을 다 보았던 이들이었다. 두 사람 다 자신들의 後光을 업고 정치적으로 출세한 親族이 있었다. 나폴레옹의 조카는 나폴레옹 3세가 되었고, 朴槿惠씨는 아버지의 蔭德(음덕)으로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다.
  
   南독일의 바덴바덴에 자주 가게 된 것은 조선일보 파리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린 愼鏞碩씨(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유치위원장) 덕분이었다. 1994년 유럽 여행 때부터 愼 위원장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유럽의 사정에 정통한 그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 독서와 見聞이 많은 분이라 여행중의 대화가 즐거웠다. 愼 위원장은 바덴바덴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1981년 9월 IOC 총회가 바덴바덴에서 열렸을 때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득표 활동에 참여한 적도 있다. 바덴바덴은 독일의 黑林 지대 속에 있는 휴양지이고 로마시절부터 온천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이곳 온천은 크고 남녀 혼탕이다.
   바덴바덴을 벗어나 한 30분쯤 산속으로 근사한 드라이브를 하면 옛성을 호텔로 개조한 뷜러회어 슐로스 호텔이 나온다. 그곳 커피 숍에 혼자 앉아 아래로 내려뻗은 樹林을 내려다보며, 노인이 치는 피아노를 들으면서 언젠가는 꼭 여기서 하룻밤을 자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94년 5월엔 리비아, 베니스, 로마를 취재 여행했다. 동아건설이 맡아 하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장을 둘러보고는 “왜 한국인은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지는가”라는 話頭를 품게 되었다. 19세기말 한국을 여행하고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란 名著를 남긴 영국의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가졌던 생각이기도 했다. 비숍 여사는 시들어가는 조선의 조선사람들만 만나보다가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근방에 이민 가서 집단거주지를 만들어 살고 있던 조선인들을 만나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깨끗했고 근면했으며 自治를 잘 하고 있었다. 비숍은 예언했다. 원래 좋은 자질을 가진 한국인들이 조선조적인 정치제도를 벗어나기만 하면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여 크게 될 것이라고. 1945년 이후 남한이 섬이 되면서 해외진출은 생존의 수단이 되었다. 해외여행, 해외진출로 대표되는 한국인의 진취성은 조선조적인 명분론과 위선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것이다.
   1996년 여름에 나는 대우 金宇中 회장의 도움으로 몽골벨트와 동구권을 두 달 동안 취재 여행했다. 대우가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던 곳이었다. 소년기 때 나의 영웅은 칭기즈칸이었다. 소년 테무진이 아버지를 일찍 잃고 홀어머니를 모시면서 고생하는 이야기를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유럽의 기사단을 짓밟던 몽골 기마군단의 말발굽소리는 1950년대 한국의 가난했지만 야망이 컸던 소년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었다.
  
   중국 신강성의 우루무치에서 시작한 몽골벨트 여행은 西安-몽골-카자크스탄-우즈베키스탄-파키스탄-인도-터키-불가리아-헝가리-폴란드-체코-루마니아-러시아-월남으로 이어졌다. 몽골-투르크族은 16세기에 소총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는 말과 활로써 세계사의 주먹 역할을 했다. 제국을 부수고 만들고 하면서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했던 이 기마민족의 활동무대가 그대로 한국 기업의 무대로 변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인종적, 역사적, 정신적 인연도 유라시아 草原의 바람과 하늘에 닿아 있음을 알아차리는 일은 간단했다. 몽골-투르크族이 세운 나라에 가면 뭔가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이었다. 엉덩이에 몽골반점이 찍혔던 이들끼리는 말은 통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뜻이 통했다.
  
   몽골인들의 공통점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속에서 편안해하고, 그러다가보니까 인공적인 것에 대해선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속박을 싫어하고 자존심이 대단하다. 머리가 좋고 강건하며 무엇보다도 간편한 삶을 추구한다. 이들이 중국, 이란, 로마 문명과 접속해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간 근원에 있는 것은 자존심이다. 삼국통일이 동북아에서 가장 非중국적이고, 북방초원적이었던 신라에 의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강성 우루무치 박물관에 가니 唐 나라 때 아시아 지도가 있었다. 당과 陸續(육속)된 곳은 전부가 청색이었는데 한반도만 예외적으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그것이 자랑스런 신라였다.
   나는 1994년에 비로소 三國史記를 읽었다. 列傳의 주인공 金庾信을 알고선 “아, 이 분이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對唐決戰을 통해서 독립을 지켜내었고 내가 지금 중국말을 쓰지 않고 한국인으로 존재하는구나”하는 감동이 왔다. 외국을 여행하면서도 新羅를 항상 머리 속에 넣고 다니기 시작했다.
  
[ 2011-10-03, 23: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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