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과 권진규
바보에겐 존경을, 凡人에겐 침을, 천재에겐 감사를!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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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6월호 月刊朝鮮 편집장의 편지
  
  
  
   저는 지난 4월23일부터 29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月刊朝鮮과 한진관광이 공동으로 주최한 역사 문화 紀行에 동행한 것입니다. 이번 관광단은 25명이었는데 愼鏞碩 한국 인권재단 이사장(前 朝鮮日報 駐佛 특파원 및 논설위원)이 단장이 되어 4월19일에 먼저 떠났고 저는 회사 사정으로 늦게 파리에서 도중 합류했습니다. 그동안 관광단은 파리-퐁텐블로(나폴레옹 궁전)-바르비종-도빌-노르망디-몽셸미셀 등 예술과 역사가 일상 생활 속에서 살아 숨쉬는 명소들을 구경하면서 愼鏞碩 단장의 실감 있는 현장 해설을 들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하룻밤을 잔 뒤 저는 일행과 함께 南佛의 아비뇽(1박)-칸느-니스(2박)-모나코-피렌체(1박)-로마(1박)를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문화 紀行의 發想者는 愼鏞碩 이사장이었습니다. 駐佛 특파원으로 7년간 일하면서 유럽의 구석구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세계 여행을 많이 한 愼이사장은 年初에 저와 식사를 함께 하던중 어떻게 하면 우리 관광의 수준을 높일 것인가 하는 主題를 놓고 좋은 생각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宿食의 품위를 높이고 외국의 역사·생활·문화를 느낄 수 있는 체험 관광을 하되 해당 지역의 전문가가 현장 해설자로서 同行하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시범적으로 愼鏞碩 이사장이 단장 겸 가이드로서 관광단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愼이사장은 한진관광 측과 여행 일정을 짤 때부터 긴밀하게 협의했을 뿐 아니라 여행지를 먼저 돌아보고 구경할 명소와 박물관·미술관, 그리고 유명한 음식점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11일 관광에 1인당 359만원을 내고 참여한 단원들은 50代 이상이 대부분이고 40代는 세 사람뿐이었습니다. 거의가 해외 여행을 많이 한 사람들이고 미술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안목을 가진 분들도 있었습니다.
  
   愼鏞碩 단장은 車中 맨 앞자리에 앉아 마이크를 들고 앞으로 구경하게 될 名所의 내력을 설명하기도 하고 방금 구경하고 나온 곳에 대해서 배경 해설도 해주었습니다. 니스 근교에서 우리는 샤갈의 미술관을 구경했습니다. 聖書를 주제로 한 그의 連作은 벽면을 꽉 채운 大作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이 유명한 미술관의 입구는 철문이었는데 꼭 서울 구로동의 중소기업체 정문처럼 허술하고 소박했습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난해한 그림을 의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무거운 마음을 갖기 쉬운데 정문을 편하게 만들어 보통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려는 뜻이라 합니다.
  
  
   마르크 샤갈의 그림에서는 「꿈 꾸는 사람의 낙관과 환상,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心象을 지닌 세계인, 이 우주의 경이 속에서 길을 잃은 방랑자가 보인다」고 합니다. 샤갈의 傳記를 쓴 프란츠 메이어라는 사람은 피카소를 「知性의 대변자」, 샤갈을 「감성의 대변자」라고 비유했습니다.
  
   샤갈의 그림을 보고 나서 머리 속에 남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분위기입니다. 화려한, 아련한, 따뜻한, 천진한 그런 분위기가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남는 것입니다. 샤갈의 原作을 구경하고 버스에 오르니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뿌듯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버스 속에서 愼鏞碩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제가 생전에 샤갈을 두 번 만났습니다. 우리 정부 기관에서 샤갈의 작품을 사겠다고 교섭하는 과정에서 제가 거든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문화부 관계자의 소개장을 들고 찾아갔는데 그 관계자가 이런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샤갈의 부인이 동석할 터인데 그녀가 당신의 등뒤로 돌아가면 곤란해질 거야」
  
   부인이 商談을 할 때 남편에게 손짓으로 코치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과연 그 부인이 자꾸만 제 등뒤로 돌아가려고 해서 피하느라고 애를 먹었습니다. 유태인인 그는 러시아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고향 마을에서 알았던 한국 사람(아마도 고려인이겠지요)의 부지런함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저는 헤어질 때 샤갈 선생한테 부탁을 했어요. 기념으로 그림 사인을 하나 그려달라고요. 그랬더니 샤갈이 웃으면서 「그건 돈인데」라고 해요. 그래도 하나 그려 주더군요』
  
   다음날 우리는 니스 뒤편 알프스 산맥 자락에 있는 산중 마을 생폴을 찾았습니다. 샤갈은 말년에 이 마을에 畵室을 두고 명작들을 그렸습니다. 마을 공동 묘지에 98세에 죽은 그의 조촐한 무덤이 있었습니다. 샤갈의 돌 무덤 위에는 추모의 표시로 조약돌을 올려 놓았는데 한국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돌멩이도 있었습니다.
  
   칸느와 니스 사이 해안 마을 앙티브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피카소가 잠시 머물면서 그림을 그렸던 곳에 그의 기념 미술관이 서 있습니다. 피카소란 天才 덕분에 여러 사람들이 먹고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발자취가 닿은 적이 있는 곳은, 金日成이가 방문한 곳을 聖地로 기리는 狂氣와는 다른 의미에서 다 명소가 되는가 봅니다.
  
   샤갈과 피카소는 長壽했을 뿐 아니라 생전에 많은 돈을 번 행운아였습니다. 예술가로서는 아주 드문 경우이지요. 샤갈과 피카소 미술관을 찾기 전날 우리는 프로방스 지역의 古都 아비뇽(14세기 한때 교황이 여기서 70여 년을 근무했었다) 근처 생레미에 있는 한 정신병동을 구경했습니다.
  
   고흐가 입원했던 정신병원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는 파리에서 그림을 그렸으나 알아주는 사람도 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빈곤 속의 폭음으로 건강까지 망친 그가 南佛 프로방스 지방으로 내려간 것은 일종의 피난이었습니다. 이곳의 풍요로움, 지중해성 기후, 밝은 광선을 발견한 그는 잠시 마음을 다잡고 그림에 전념하면서 친구 고갱도 불러내립니다.
  
  
   저도 이번에 南佛 해안 지방을 여행하면서 처음 알게 된 것입니다만, 이곳은 화가·문학가·음악가들의 産室이자 창작실입니다. 알프스 산맥이 지중해로 떨어지는 곳으로서 바다와 산이 만나 아주 물질적 생산성이 높은 地理를 만들었고 이 생산성이 예술적 생산을 뒷받침한 것입니다.
  
   바닷가에는 칸느, 니스, 모나코 등 세계적인 관광지가 있지만 30분만 내륙으로 들어가도 깊은 계곡과 눈 덮인 산, 풍성한 들판과 高原이 전개됩니다. 이곳을 탐낸 종족과 국가들이 古代부터 침략과 전쟁을 되풀이하여 주인이 자주 바뀌었습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것도 바로 이 해안지대로 떨어지는 알프스의 끝자락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간 일을 가리킵니다(니스에서 피렌체까지 차로 달리는 동안 통과한 터널을 헤어보았더니 150개가 넘었습니다).
  
   고흐, 고갱 두 친구는 그러나 곧 성격 차이로 해서 심하게 다툽니다. 발작한 고흐는 면도칼로 고갱을 습격하려다가 고갱이 맞서자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 이를 봉투에 넣어 창녀한테 선물합니다.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산동네 생레미의 정신병동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지금도 정신병원인데 고흐의 病床을 관광하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곳 주변의 風光은 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것들이었습니다. 올리브 나무들, 삼나무들, 산과 구름, 農地 등등.
  
   뒤틀린 내면과 열정을 보여 주는 자화상, 농부 부부가 황금물결 밭에 나가 추수를 하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 그림, 나무들이 춤추는 것 같은 「생폴 병원」, 생동하는 하늘을 그린 「밤의 생레미」, 별들이 동심원을 그리며 搖動(요동)하는 밤 하늘 아래서 두 농부가 걸어가는 「삼나무가 있는 길」 등 그의 많은 명작들이 이 病棟에서 있었던 1년 사이에 그려졌습니다(1889~90년).
  
  
   그는 이 병동에서 정신병과 싸우면서 주체할 수 없는, 그러나 마지막 남은 그의 열정을 쏟아 부은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고흐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1989년 5월16일에 퇴원하여 변함없는 후원자였던 동생이 기다리는 파리로 돌아갑니다. 그는 이미 예술가로서의 에너지를 다 연소해 버린 상태였다고 합니다. 그해 6월27일 그는 가슴을 쏘아 자살했습니다. 서른 일곱이었습니다.
  
   가난과 失意, 정신 발작, 친구 고갱과의 우정과 오해, 자살로 이어진 고흐의 生涯는 예외적이라기보다는 당대에는 홀대받았다가 후대에 들어가서 제대로 평가를 받아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富者로 만든 천재들의 전형적인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가난했던 조각가 權鎭圭씨의 화실 벽면에는 이런 글이 쓰여져 있었다고 전합니다.
  
  
   「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天才엔 감사를」
  
   샤갈 미술관을 나오면서 저는 이 글귀를 생각했습니다. 權씨가 말한 凡人이란 누구일까. 天才의 위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평론가나 지식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부류의 인간형이 주로 天才를 깎아내리고 그들을 절망시킵니다.
  
   바보들은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천재를 알아 줍니다. 천재도 순수한 사람들이니까요. 천재들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凡人들을 경멸하지만 바보들에겐 존경을 보내는 모양입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불우했던 천재의 열정과 고뇌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작품을 후대에 공짜로 즐기고 있으니 늘 미안해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1973년 51세의 생애를 자살로 마감한 求道와 침묵의 조각가 權鎭圭의 작품은 그의 死後 재평가되어 지금은 最高價(최고가)로 팔린다고 합니다. 막상 그는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죽어갔는데도 말입니다.
  
   <서울 미아리 고개의 산마루턱에 자리잡은 10여 평짜리 허술한 작업장. 페치카 같은 가마가 있는 실내에는 흙덩어리와 더불어 몇 개의 물레들이 놓여 있었다. 높은 천장에서부터 내려뜨려진 선반 층층이에는 100여 점에 이르는 조각품들이 제멋대로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이 집의 주인인 50代 초반의 한 남자가 무거운 몸짓으로 실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난로가 있는 쪽에는 개인전 포스터가 붙어 있고 그 아래 흰벽에 「凡人엔 침을, 바보엔 존경을, 天才엔 감사를」이라는 낙서도 보였다. 창백한 남자는 이층 다락에 연결되어 있는 굵은 쇠줄을 매만졌다. 그리고 고리를 만든 후 목을 매달았다>(미술평론가 尹凡牟의 글. 한국일보 1983년 10월15일)
  
   미술평론가 朴容淑은 權鎭圭를 『자신이 만든 작품 앞에서는 어린애였고, 작품을 만드는 일엔 미치광이고, 세상 일에 대해서는 바보였다』고 평했습니다.
  
  
   미술평론가 李逸은 權鎭圭의 작품에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경건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했습니다. 權鎭圭의 작품 중에는 홍익대학 2학년이던 張志媛(서양화가)을 모델로 만든 「志媛의 얼굴」이란 조각이 있습니다. 張志媛은 『어느 날 선생님께서 어디엔가 작품이 팔렸는데 그곳을 보여주겠다 하여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和信 백화점 옆 어느 중국 음식점이었는데 2층 계단을 올라가는 모서리에 「馬頭像」이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지나 않을까 불안한 자리에 있었지만 權鎭圭는 자랑스럽고 신기한 듯 되돌아오는 발길을 자주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權鎭圭가 말한 존경을 받아야 할 바보는 바로 이 중국 음식점 주인 같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權鎭圭의 친구였던 朴惠一(前 서울공대 교수)은 「내가 아는 權鎭圭」란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생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소위 破滅型 작가들에게는 剝製된 천재로 둔갑되는 死後의 특전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일본에서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예술보다 조국이 중요하다」는 허세로 그는 그러한 호의를 외면했다. 그는 마치 신라인으로 귀화한 듯 조각가가 아닌 匠人으로 자칭하며 자기 자신의 입장을 역사와 전통 속에서 재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라 匠人의 아내가 없었다. 여자는 떠났고 그는 혼자뿐이었다. 마침내 빈곤과 과중한 노동으로 악화, 누적된 身病으로 작품제작은 중단되었다. 자기 파멸의 암시였다. 그가 작가로서 정당하게 해보일 수 있는 일은 오직 潔癖과 지조 같은 것밖에 없었다. 그는 외출할 때 점차 문단속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도둑도 들지 않았다>
  
   權鎭圭는 한국의 조각예술을 이렇게 평했다고 전합니다.
  
  
   <신라는 위대했고, 고려는 停止했으며, 朝鮮은 장식화되었다. 지금은 외국의 모방이며 事實은 망각되어 있어 학생들이 불쌍하다>
  
   權鎭圭는 조각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이지만 이 짧은 말은 신라, 고려, 조선의 민족국가로서의 본질을 잡아낸 말입니다. 신라 佛像에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그리스 로마 조각상과 비슷합니다. 아름다움 뒤에 있는 자주성과 자신감,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풍요로움, 개방성, 관용, 단호함 같은 것이지요. 이것은 徐廷柱 선생을 매료시켰던 신라의 시대정신이기도 합니다. 신라의 야성과 지성과 예술혼은 그 뒤 우리가 中華 문화권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잊혀져 갔습니다. 우리의 정신이 민족혼과 주체성을 잃고 停滯하면서 형식 모방으로 전락해 간 과정을 權鎭圭는 어떤 역사학자보다도 핵심적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위대한 조각 천재는 사물의 본질을 최소한의 人工으로 잡아내는 것이며 이 부문에서 대성한 사람은 역사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는 모양이구나 하는 감탄을 저는 했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로마에서 점심 식사를 할 때 포도주 잔을 앞에 놓고 이런 乾杯辭를 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공짜로 즐기고 있는 미켈란젤로, 고흐, 李仲燮, 尹龍河, 朴壽根, 그리고 權鎭圭, 이런 불우했던 천재들에게 감사하면서 건배합시다』
  
   로마의 다 빈치 공항으로 가는 歸路의 車中에서 저는 이런 요지의 강연을 했습니다.
  
  
  
   『천재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온 생애를 투척하는 일대 모험가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全力 투구로써 집중하는 그런 사람에게 問喪이나 결혼식에 빠지지 말라고 충고하고, 인사성이 없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우리나라입니다. 한국을, 예술가를 알아주는 나라, 천재를 알아주는 나라, 즉 바보들이 많은 나라로 만듭시다. 이번 여행에서 수많은 천재들의 숨결을 느낀 그 감동을 조국에 전하여 보다 너그럽고 열린 분위기가 될 수 있도록 합시다』
  
  
   천재를 알아주는 사회에는 독특한 것, 다른 것, 튀는 것, 변태적인 것까지도 관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산다. 그런 사람들은 영화 「길」의 여자 주인공이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하나 집어들면서 이야기했듯이, 「돌 하나도 의미 없이 만들지 않았을 하느님인데 하물며 인간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런 눈으로 인간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선한 것, 위대한 것, 남다른 것을 찾아내려고 애쓰며 그 다른 것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미친 사람도 가끔은 위대한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믿고 기다린다. 천재를 알아주는 바보들이 많이 사는 나라에서는 천재들도 많이 생긴다. 그런 바보들이 없는 사회에서는 천재가 한 사람뿐이다. 金日成, 金正日, 金大中만을 천재라고 믿고 추종하는 凡人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보들의 팔로십(followship)은 천재들의 리더십만큼 소중하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한항공 여객기에 올라 한국 신문을 받아드니(이럴 때는 항상 가슴이 두근거린다. 또 무슨 사고가 터져 있을까…) 온 紙面이 「홍삼(弘三)」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거기엔 귀향길의 비행기 안에서 내내 나의 머리를 아프게 만든 기사도 있었습니다.
  
   金大中 정부하의 한 위원회가 부산 동의大 사건 때 기름을 뿌리고 화염병을 던져 경찰관 7명을 죽게 만든 사람들과 全敎組의 불법교사들을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해 주었다는 기사. 문득 이런 말들이 머리 속에서 그려졌습니다.
  
   ▲민주화면 답니까. 진정한 민주화 운동가는 지금 직장에서 가정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세금 많이 내고 兵役과 준법의 의무를 지키는 90% 이상의, 민주화란 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 시민들이랍니다. 민주화를 모욕하고, 민주화를 권력·돈과 팔아먹은 鬪士·운동가 여러분, 魂까지 부패한 당신들은 가짜요 凡人입니다. 凡人엔 침을!●
[ 2011-10-15, 21:5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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