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전 장관의 이야기: 과거가 있어 오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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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8일 심야의 축제: 神이 쓴 逆轉勝의 시나리오
  
  이탈리아에 한국 팀이 2-1로 逆轉勝. 사실은 항상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란
  말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은 전반전 초장에 페날티 킥을 실축한
  안정환 선수를 빼지 않고 끝까지 기회를 주었다. 안정환은 골든 골로써 報
  恩(보은)했다. 회사에서 동료들과 구경했는데, 『왜 안정환과 설기현을 빼
  지 않는가』라는 불평이 우리 관중석에서 많이 나왔다. 인간은(아마도 개
  같은 고등 동물도) 逆境에 처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위하여 순정을 바
  치는 경향이 있다. 義理라고 불리는 것이다.
  히딩크가 안정환을 빼지 않은 것은 그에게는 도박이고 오기였을 것이다.
  만약 설기현이 타임 아웃 직전에 동점골을 넣지 않았고 안정환이 골든골을
  선물하지 않았으면 히딩크는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집중난타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런 위험을 각오하되 자신의 육감을 믿고 도박을 한 것이다.
  잘하는 선수의 불가피한 실수는 덮어준다는 것이 히딩크의 理念이 된 것이
  리라. 理念이란 이론의 신념화란 뜻이다.
  이론 없는 신념은 배짱에 불과하다. 과학적인 신념, 여기에 모든 것을 건
  히딩크의 도박은 아름답게 적중했다.
  나는 광화문에서 한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심야의 거리는 젊은
  이들의 차지였다. 차창 밖으로 몸을 내놓고 태극기를 휘날리고, 빼백 빼백
  박자를 경적을 울리면서 질주하는 자동차, 오토바이, 여기 저기 뭉쳐 있고
  엉켜 있는 젊은이들, 몰려나온 손님들을 맞아 철야 영업체제로 들어간 음식
  점들. 집안에서 2-1의 逆轉勝을 구경한 사람들도 복바치는 환희를 가누지
  못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확인하면서 나눠갖기 위해 바깥으로 몰
  려나오고 있었다. 북아현동 주택가의 골목길로 들어서니 비로소 함성이 잦
  아들었다.
  
  
  6월22일 한국 - 스페인 승부차기: 과거가 있어야 오늘이 있다
  
  나는 6월22일엔 무역협회에서 주최하는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국가 프로젝트] 토론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용평 리조트에서 열렸다. 월드컵에서 우리 팀이 스페인과 대전하는 이날 토론회에서도 히딩크 성공사례가 자주 거론되었다. 이때 서정욱 전 과기부 장관이 한 마디 했다.
  '히딩크의 성공을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선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란 점입니다. 그런 국력을 만들어낸 우리 기성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善戰이 가능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찡했다. 만약 우리 선수들이 1950년대의 영양실조 시대에 활동했다면 히딩크가 아무리 독려해도 그런 체력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성장으로 전반적인 영양상태가 좋아지니까 체력 좋은 선수들을 뽑을 수 있었을 것이다. 히딩크 한 사람에게 성공의 모든 영광을 돌려버리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상한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다. 누구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하여 수많은 패배자와 역적을 만드는 버릇이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균을 역적으로 모는 식이다. 히딩크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를, 과거를 전면 부정하는 논리에 대해서 서정욱 전 장관의 일침은 참으로 멋이 있었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온 사람에게 누구나 묻는 질문이 있다.
  '가서 보니 어떻던가. 설악산보다 근사하던가.'
  금강산과 설악산을 비교하여 꼭 순위를 매기려는 버릇. 이것은 유교적 서열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금강산은 금강산대로 멋지고 설악산은 설악산대로 아름다운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독재와 통한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을 볼 때도 꼭 서열을 매기려고 한다. 권력에 따라서.
  히딩크도 훌륭하지만 그동안 역경에 처했어도, 언론의 몰매를 맞아가면서도 한국축구의 명맥을 이어온 한국 축구인들의 노고를 잊으면 우리는 義理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나는 용평 리조트의 직원들과 함께 한국-스페인 대전을 구경하다가 후반전은 호텔방으로 올라가서 혼자서 보았다. 그야말고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승부차기를 시작하기 전 SBS의 아나운서가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기독교인은 하느님에게, 불교를 믿으시는 분은 부처님에게, 종교가 없는 분은 조상님에게 기도합시다'라고 말했을 때 많은 국민들은 손을 모았을 것이다. 그 기도의 힘이 모여져서 우리 선수들을 침착하게 만든 한 요인이 된 것이라고 믿고싶었다. 월드컵의 모든 경기중 이 승부차기의 승리 순간이 가장 감동적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6월4일, 6월14일, 6월18일에 많은 국민들은 '이날이야말로 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 황홀감의 절정이 계속해서 높아지면서 국민 전체의 심리적 부담감도 더해졌다. 한껏 흥분하고 그 흥분이 기적 같은 승리로써 해소된 뒤 다소 허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다음날 일요일 전국은 조용했고 늦잠을 자는 사람들도 많았다. 1승만 해도 좋을텐데, 16강에 들기만 하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8강까지 갈 수도 있겠는데..., 4강에 갔으니 준결승을 넘보자, 스페인을 이겼는데 독일을 못이길 이유가 있나...
  이런 식으로 욕심의 끝없는 질주와 확장이 한달간 계속되면서 우리는 '이게 정말인가. 이게 현실인가'하고 자신마저 못믿어워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빈국이 전쟁의 광풍과 폐허속에서 다시 일어나 달리면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의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을 이룩해온 과정의 환희를 우리는 한달 사이에 압축적으로 경험한 셈이다.
  
출처 :
[ 2002-06-25, 17:5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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