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윌리엄즈와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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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타자 테드 윌리엄즈와 한국전쟁
  
  미국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강타자 테드 윌리엄즈가 지난 7월4일 향년 83세에 플로리다에서 타계했다. 뉴욕 타임즈는 그에 대한 추모 기사를 썼는데 분량이 단편 소설 정도였다. 전현직 대통령이 사망한 경우를 제외하곤 가장 긴 추모기사가 아닐까.
  테드 윌리엄즈는 일부 평자들 사이에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를 능가하는 미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강타자로 꼽힌다. 1939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보스턴 레드 삭스에서만 외야수로 뛰었다. 1960년9월28일 그는 은퇴 게임의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렸다. 통산 521개째. 환호하는 관중에게 인사도 없이 그는 더그 아웃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관중들이 앵콜을 요청하듯 환호를 보내고 동료들과 심판까지도 나와서 인사하라고 했지만 윌리엄즈는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명한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이 광경을 지켜본 뒤 쓴 글에서 하느님은 편지에 답장을 안하신다라고 했다.
  테드 윌리엄즈는 자존심이 대단히 강했다. 그는 팬들과 기자들의 비판에 마음이 상해 신인 시절부터 하나의 행동원칙을 세웠다. 홈런을 쳤을 때 아무리 팬들이 박수를 보내도 모자를 벗어 인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 지켰다.
  메이저 리그 야구사에서 그는 마지막 4할 타자로 남아 있다. 1941년 마지막 더블헤더에 들어가기 전 그의 타율은 0.39955였다. 반올림하여 4할 타자로 인정해주기로 되어 있었다. 감독은 윌리엄즈에게 출전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이 두 게임에서 그는 8타석 6안타를 기록하여 그의 타율을 4할6리로 끌어올렸다. 그의 앞에 마지막으로 4할을 친 타자는 뉴욕 자이언트의 빌 테리였다. 1930년 시즌.
  그의 통산 타율은 3할4분4리로서 역대 6위이지만 1941년 이후의 선수중에서는 최고이다. 그는 나이가 먹어가면서도 고타율을 유지했다. 은퇴 전해인 1959년에 딱 한번 3할을 밑돌았다. 그는 베이브 루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말년에는 내가 아마도 역대 최고의 타자였을 것이다]고 우회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아메리컨 리그에서 장타율에서 여덟번, 타율에서 여섯 번, 타점과 홈런 부문에서 각 네번, 득점에서 여섯 번, 그리고 四球에서 여덟 번 1등을 차지했다. 두번이나 그는 타점, 홈런, 타율에서 모두 1위를 차지(삼관왕)하였다.
  테드 윌리엄스의 경이적인 타격, 그 비결은 그의 시력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투수가 던진 공의 실밥을 볼 줄 알았다는 말도 있다. 홈 플레이트가 몇 밀리 잘못 놓인 것을 지적했는데 정밀 측량을 했더니 지적 대로였다는 것이다. 그 자신은 좋은 視力에다가 집중력을 꼽았다.
  그는 오른손잡이였는데 맨 처음 배터를 쥐었을 때 왼쪽으로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타격만 왼손으로 했다고 한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타격을 하면 장타력에서 손해를 본다.
  테드 윌리엄즈는 2차 세계대전이 났을 때 3년간 군대에 복무했다. 해군에 들어가 미국 본토에서 조종사 교관으로 근무했던 것이다. 6.25 남침으로 한국전선에 미군이 파병되자 그는 다시 소집되어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로 2년간 싸웠다. 그는 한국 전선에 39회의 출격을 감행했다. 초창기에 그의 전투기가 피격당해 구사일생의 비상착륙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조종석 옆에서 근무했던 사람이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존 그렌(뒤에 상원의원)이었다. 전성기 약 5년간의 이 공백이 없었더라면 그는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포함한 거의 모든 타격 기록을 다 깨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테드 윌리엄즈는 올스타전에서는 드라마틱한 타격을 보였으나 단 한번의 월드 시리즈 출전에선 홈런 없이 2할5분의 타율에 그쳤고 우승도 하지 못했다. 은퇴 후 그는 낚시에 탐닉했다. 낚시의 大家가 되어 책을 쓰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 말에 지금의 아메리컨 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의 전신인 워싱턴 세네터즈 팀의 감독이 되어 4할2분9리의 승률을 남겼다.
  보스턴에는 [테드 윌리엄즈 터널]로 이름붙여진 해저 터널이 있다. 1995년12월에 있었던 봉정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디를 가나 환호를 해주고 편지를 보내주는데 이런 일은 죽을 때가 된 사람들에게 하는 일이 아닌가. 오늘 여기서 분명히 밝혀두지만 나는 아직 살 날이 많이 남은 사람이다.
  그는 그 뒤 심장 발작으로 여러 번 수술을 받고 인공심장까지 달아야 했다. 1999년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서 있었던 올스타 게임에 부축을 받고 나온 그는 始球를 던졌다. 이때 처음으로 그는 환호하는 보스턴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고 한다. 은퇴한 이후 39년만의 화해였다.
  
출처 :
[ 2002-07-07, 17:5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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