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왜 이렇게 되었나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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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나날들이 왜 이처럼 비참해지고 있는가. 한 마디로 자업자득이다.
  그가 당선되었을 때 그를 찍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김대중씨가 4수 끝에 당선되었으니 본인도 한풀이를 한 것이고 호남사람들도 참 잘 되었다. 그동안 김대중씨와 호남 사람들이 소외되었던 면이 있었지만 김대중씨는 틀림없이 그런 지역차별에 대해서는 보복을 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과거에 자신들을 차별한 사람들을 미안하게 만들 거야. 다소 지역편중 인사를 하면 어때? 우리가 잘 나갈 때도 했잖아. 참아야지. 그의 색깔에 대해 의구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국민들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으니 그 문제는 끝난 것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라를 위해서.'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2월에 취임한 이후 처음 한 일은 무엇이었던가. 권영해 전 안기부장을 소위 북풍 사건으로 구속한 것이었다. 북풍사건이란 이회창 후보 측근들이 북한측과 접촉했다는 것, 권영해 부장이 안기부 정보원을 시켜서 김대중 후보측의 對北 비밀 접촉을 폭로하게 했다는 부분이 북풍 사건의 핵심이었다.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도 북한측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검찰은 한나라당과 안기부를 주표적으로 삼아 수사를 진행함으로써 보복수사란 비판을 일기 시작했다. 잇따라 벌어진 총풍 사건은 이회창 후보측에서 북한측과 접촉하여 휴전선에서 총격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그 후 재판 과정에서 안기부와 검찰의 이런 주장은 터무니 없이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에 대한 총격 요청은 없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이어서 세풍사건. 국세청 차장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위해 기업을 상대로 선거자금을 거두었다는 내용이다. 차장이 미국으로 도피하여 계류중이다.
  위의 세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자신의 경쟁자를 표적으로 삼은 수사라는 점, 수사가 공평하지 못했다는 점, 수사 착수 단계에서 언론과 수사 정보 기관이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사실보다 엄청 과장된 신기루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보복이란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 세 사건이 김대중 취임 첫 해에 벌어지는 바람에 여야 관계는 살벌해졌다. 이회창측은 자신의 존재를 말살하려고 한다고 판단하여 끈질기에 저항했다. 김대중 정부는 또 1997년의 외환위기 때 경제 정책 책임자였던 강경식 당시 부총리와 김인호 당시 경제수석을 구속하는 소위 환란 수사를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김영삼 전 대통령도 보복이라고 발끈했다.
  북풍, 총풍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의 對北 기능, 조직, 인력이 노출되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가장 핵심적인 비밀이 정치적 보복 수사로 해서 허무하게 드러나버렸다.
  김대중 대통령의 동교동 측근 및 호남 편중 인사는 과거 정권 때의 도를 웃도는 것이었다. 특시 수사, 정보 기관의 핵심에 배치된 호남 인맥은 그 뒤에 드러나지만 김대중 친인척 및 측근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면서 청탁과 정보 유출을 많이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처음부터 흡수통일 배제라는 反헌법적 내용을 담고 있어 의구심을 샀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이회창 총재보다는 김정일을 파트너로 삼은 듯한 좌경적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 요소 요소에 포진한 좌파 세력들은 평화, 민족, 통일이란 단어를 선점하여 김정일 편들기, 대한민국 주류층 때리기를 공공연하게 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들의 활동을 비호하였다.
  그리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기성세대, 주류층은 위축되었고 친북세력은 제 세상을 만난듯 설치기 시작했다.
  세상이 김대중 세력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일이 있었다. 2000년4월13일 총선이 그것이었다. 그 3일 전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전격적으로 발표되었는데도 국민들은 한나라당을 과반수에 육박하는 제1당으로 만들었다. 정상회담 발표는 국민들의 反김대중 정서를 강화시킨 것으로 분석되었다.
  6.15 선언이 발표된 날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과 거의 궤를 같이 해온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2000년 가을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평양으로 보내 김정일과 회담하도록 했다. 이때가 김대중 및 김정일의 가장 화려했던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그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전체 지지표에서는 앞섰던 민주당의 고어 후보가 플로리다 재개표 과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는 연방 대법원에서 한 표 차이로 부시에게 패배하여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김정일을 깡패로 보는 부시 행정부는 김정일과 김대중의 밀월관계를 사실상 차단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의 답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대중의 몰락, 그 결정적 계기는 2001년 초부터 국세청을 앞세워 진행되었던 조선, 동아일보를 표적으로 삼은 세무조사였다.
  조선, 동아일보는 김대중 대통령의 對北 정책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해온 주류 언론이었다. 이 세무조사는 김정일을 위해서 한국의 반공주류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침묵하는 다수 사이에서 퍼져나가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는 황장엽씨의 방미도 불허했다.
  김대중 정부가 주도한 언론사 세무조사에서 정권 편을 들어 조선, 동아일보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MBC 뉴스 시청률을 이 무렵 크게 떨어졌다. 반면, 동아 조선일보, 그리고 월간조선의 부수는 늘었다. 시장에서 이미 민심은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고 있었다. 이런 민심은 그 뒤의 국회의원 재보선과 2002년6월13일의 지방선거에서 김대중 세력 쓸어내기로 나타났다.
  2001년 여름부터 김대중 친인척들의 부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더니 2002년 들어서는 언론의 지면과 화면을 뒤덮는 취대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념문제에서는 좌우로 갈려 싸우지만 부패문제에 있어서는 김대중 정권을 편드는 세력이 없었다. 친인척과 측근들의 잇단 구속, 드디어 두 아들 구속으로 이어진 지리한 수사과 보도와 짜증을 월드컵 열정이 한달간 뒤덮어버렸다.
  월드컵 열정의 주인공은 소수가 아닌 국민 다수였다. 소수의 좌경화된 세력들이 국민들의 대변자인양 행세하면서 反대한민국적인 행패를 부리던 때와 달라진 것은 침묵하던 다수의 한국인들이 20대를 선봉으로 하여 거리로 나와 태극기, 대한민국, 애국가로써 한반도를 뒤덮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건강한 생동하는 모습이 한국의 본래 모습이었다. 언론과 국회에 비친 찌든 대한민국은 잘못 대표된 모습, 좌경 억지 세력에 의해 왜곡된 모습이었음이 실증된 것이다.
  그리고 서해 도발. 김정일은 한국인을 분노에 치떨게 함으로써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서해에 수장시키는 자살골을 선택했다.
  김대중 부패-地緣-좌파 정부는 이렇게 하여 말로에 접어들었다.
  
출처 :
[ 2002-07-17, 18:0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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