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혁당은 김일성 동지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전위조직”
(公安사건 분석) 통혁당(2)

金成昱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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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당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았던 지하당 통혁당은 공산(共産)혁명조직이었다. 김질락의 수기 ‘주암산’ 中 65년 11월초 통혁당 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김종태의 제안 설명 중 일부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반제(反帝)·反봉건·反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우리의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어 “남반부를 불법강점하고 조국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이 낭독됐다.
  
  통혁당의 이 같은 성격은 68년 공판당시 언론에도 일부 보도됐다.
  
  김질락은 68년 11월 30일 공판정에서 “반미·反제국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이다. 나는 <청맥>의 지면을 통하여 광범한 인민대중의 반미·反괴뢰투쟁을 선동하였다”고 말했다.
  
  김질락은 그러나 68년 12월18일 공판정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큰가를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고 변호인신문을 거부한 뒤“그 동안 공산주의를 위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으며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고 후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질락의 이 같은 반성은 다른 주범들과 달리 북한으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통혁당 잔존세력, 주체사상 받아들여 당 재건 기도>
  
  통혁당은 68년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지만, 북한과 연계된 잔존세력은 이후에도 지하당 활동을 계속했다.
  
  통혁당 잔존세력의 당 재건은 69~79년간 9차례나 검거됐다. 69년 9월 경남 통혁당 재건 사건·69년 10월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71년 5월 호남 통혁당 재건 간첩사건·71년 통혁당 조직 사회혼란사건·71년 통혁당 재건 3개망 간첩사건·72년 지하 통혁당 조직 거물간첩사건·75년 학원간첩 침투사건·79년 삼척 고첩단 사건 등이 그것이다. 당시 공안당국은 이 사건들을 북한과 연계한 잔존세력의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규정했다.
  
  69년 이후 등장한 통혁당 재건 조직들은 김일성주의 내지 주체사상(主體思想)을 내걸기 시작했다. 69년 발표된 통혁당 선언·강령 역시 소위 “김일성 원수의 위대한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선언은 “통혁당의 지도이념은 맑스-레닌주의를 현시대와 우리 조국현실에 독창적으로 구현한 김일성 동지의 위대한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40여 년간의 험난한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완벽함을 과시한 우리 시대의 맑스-레닌주의이다”고 주장했다.
  
  선언은 또 “우리 당은 바로 이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기에 불패이다. 우리 당의 최고목적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류의 세기적 숙명이며 최고 이상이다”며 “미군침략군을 격퇴하고 괴뢰정권을 타도하여 자주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인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69년 이후 북한과 남한 내 운동권이 묘사하는 68년 통혁당 조직 역시 철저한 김일성주의 조직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반제민전’인터넷홈페이지에 올라있는 ‘한국전위조직운동사’는 “1968년 통혁당 김종태, 이문규 등 지도핵심들은 <김일성 선집><김일성 전기>와 평양방송의 방송강좌 등을 이용하여 지도사상을 교양학습하고 지도사상을 조직원 및 대중에게 선전, 유포하면서 생활의 전반에 걸쳐 실제투쟁과 조직생활을 통해 핵심으로의 단련을 거듭해 갔다”고 적고 있다.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에 소재한 도서출판 ‘대동’의 89년 출간서적 ‘통혁당’은 68년 김종태의 통혁당에 대해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남조선의 혁명적 당”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책은 통혁당이 67년 발간한 비합법기관지 <혁명전선>을 싣고 있는데 이 중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1964년 3월15일. 역사적인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약속장소에 와서 보니 이미 김질락, 이문규 동지가 와 있었다. 신영복 동지가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전보다도 훨씬 고조되었다. 金鍾泰 동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전원 모이셨습니다.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께서 교시하신 주체의 당 창건 방침을 받들고, 그 사이 동지들께서 필사의 노력으로 분투하신 결과 오늘로써 우리는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의 결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임시투쟁 강령과 행동목표에 대한 심의에 들어갔다.
  
  <<통일혁명당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 동지의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하는 한국근로민중의 전위조직이다>>...
  
  △어디까지나 우리 당이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기 위한 한국혁명의 전위당인 만큼 당원과 각계의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으로 결속해야 할 것이라는 정치활동의 목표로부터 출발하여 우리 당 기관지를 <혁명전선>이라고 하면 어떤가 하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동지의 제안에 신영복 동지가 우선 찬동하였다.
  
  <<조국통일과 한국혁명이라는 우리 당의 과제도 함축되어 있고 통일혁명당이라는 우리 당의 이름도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전원이 찬성하였다...철필로 긁은 등사판으로 인쇄된 수십 부밖에 안 되는 신문이었지만 한국에서 발간된 최초의 김일성주의 출판물에 접했던 순간 편집위원 전원이 눈의 잠시 뜨겁게 빛났다. 흥분하여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로 김종태 동지가 입을 열었다.
  
  <<동지들, 기관지 창간으로 우리들도 바야흐로 진리의 불모지인 이 한국 땅에 영생불멸의 김일성주의 사상이론을 정력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통혁당의 이름과 함께 역사에 남을 하나의 거대한 사건입니다. 우리들은 이 힘 있는 정치선전수단으로 보다 많은 김일성주의자를 육성하고 각계각층 애국민중을 하나의 혁명전선, 통일혁명의 깃발 아래 강고하게 결집시키도록 합시다!>>”

  
  <평양에 金鍾泰 거리, 北 통혁당 연루자들 영웅화>
  
  68년 통혁당 사건으로 밀입북해 지령을 받았던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을 당했다. 신영복, 이재학, 오병철, 신광현, 정종소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종태의 아내 임영숙은 1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기타 인물들은 5년 이하의 형을 선고받았다.
  
  북한은 통혁당 사건 이후 연루자들에 대한 영웅(英雄)화에 나섰다. 69년 1월25일 김종태와 이문규에게 사형이 확정되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는 김종태와 이문규를 지지하는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다.
  
  김종태는 69년 7월10일 사형집행을 받은 후 김일성으로부터 영웅칭호가 내려졌다. 69년 7월12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는 김종태 추도 결의문을 채택했고, 같은 해 7월13일부터 19일까지 북한 전역에서 김종태 추도기간이 설정됐다. 평양대극장을 비롯해 각 시·도·직할시·공업기업소·협동농장·교육문화·보건기관에 이르기까지 대대적 추도식이 거행됐다.
  
  북한 내각은 김종태에게 영웅 칭호 외 북한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고 평양 전기기관차 공장을 김종태 전기기관차 공장으로, 해주사범대학을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명했다. 평양 시내에는 김종태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났다.
  
  69년 11월6일 이문규가 사형을 당하자 역시 영웅 칭호가 수여됐다. 그러나 죽기 직전 공산주의자였던 것을 뉘우친 김질락은 북한정권에게 변절(變節)을 이유로 외면당했다.
  
  살아남은 최고위급 통혁당 간부인 신영복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감옥에서 보낸 후 1988년 특사를 받아 출감했다. 그는 89년 이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1년 인터뷰기사, “사회주의서적 번역 옥살이”>
  
  한명숙씨가 노무현 정권 당시 국무총리에 지명된 후 남편 박성준씨의 사상편력이 화제가 되자, 朴씨는 과거 통혁당 가입사실을 부인해왔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조선노동당이나 통혁당 같은 조직에 가입한 적도 없고 포섭된 적도 없다(2006년 4월3일 동아)”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오마이뉴스)”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申榮福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다(2006년 3월27일 조선)” “신영복 선생으로부터 책을 빌려 받은 것이 전부인데 15년형을 받았다(2006년 3월25일 문화)”고 밝혔다.
  
  그러나 박성준씨의 통혁당 관련 사실은 언론보도에서도 상당부분 엇갈린다. 박성준씨와의 인터뷰를 다룬 2001년 계간 ‘새길이야기(3호)’는 68년 당시 통혁당 사건에 대해 “마르크스 경제학 책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 회원들에게 유포해서 옥살이를 했다”고 보도했다. 관련 부분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기자 : 박성준 선생님 이력을 보면,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릿쿄오(立敎)대학 신학박사..., 그런데요, 감옥엔 왜 이렇게 오래 계셨어요?
  
  박성준 : 함석헌의 표현을 빌면, 하나님의 발꿈치에 채여서랄까...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한편으론 우리의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운명이 감옥에 쉽게 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까지 쓸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의 분량이 어느 정도 되나요?
  
  그는 한국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두 살 아래인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됐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책을 살 돈이 없어, 친구들 교과서를 빌려 헌 종이 묶음에 베껴 쓰면서, 그에겐 무슨 책이든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그는 성서를 읽기 시작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경제학도로서 여러 경제학 책을 섭렵했다. 미국 경제학은 사회의 모순을 설명해내지 못했다. ‘함께 잘 사는 세상’, 복음과 사회과학을 결합시키는 대안을 모색하던 그는,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경제학을 읽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했고, (어릴 때부터 익힌, ‘빌린 책을 단숨에 베끼는’ 재주를 발휘해) 일어로 된 책들을 번역, 그가 조직한 ‘경제복지회’회원들에게 유포했다. 이는 당시, 국가보안법 1조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그는, 같은 서클 후배였던 한명숙과 결혼한 지 7개월 만에 투옥, 13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박성준은 黨 소조 조직책>
  
  당시 중앙정보부(中央情報部) 수사발표에 따르면, 박성준씨(당시 서울대경제학과 4년. 25세)는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된 ‘당 소조책(小組責)’으로서 아내 한명숙 및 朴OO, 金OO 등을 소조(小組)로 포섭했다. 그는 “서울 상대를 위시한 각 대학 출신 및 재학 중인 기독교계 학생을 모체로 결성된 ‘기독청년 경제복지회’를 주도하여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비판하고 소위 사회주의적 복지경제를 주장하면서 북괴의 경제제도를 찬양, 이를 연구 보급했다”고 한다.
  
  공안전문가 A씨는 黨소조책(小組責)과 소조(小組)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의 지하당에서 입당한 당원 중 최소 조직을 세포(細胞)라 칭한다. 일반적으로 3명의 당원이 1개 세포를 이루며, 3개 세포가 1개 소조를 이룬다. 소조와 세포는 지하당활동의 최소 조직을 가리킨다. 지하당의 소조와 세포,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간부인 黨 소조책(小組責)이었다는 것은 당연히 지하당에 입당한 당원(黨員)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박성준씨를 서클 회원들을 소조와 같은 ‘통혁당 당원’으로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한 黨 소조책(小組責)으로 판단했고, 법원 역시 이를 받아들여 1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재판에서 박성준씨가 포섭 또는 포섭을 시도했다는 朴OO씨는 2심에서 3년 형을, 金OO씨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2년을, 한명숙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 박성준씨 판결문 中>
  당시 검찰은 박성준씨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 반공법 위반죄를 적용했다. 검찰 공소장에는 ‘박성준이 사회주의·공산주의·유물론 등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북한이 발행한 불온서적도 열심히 학습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朴聖焌씨는 이 같은 책을 읽은 후 주변 인물에게 사상을 전파한 걸로 돼 있다. 그가 공부했던 책은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 자본론’, ‘사회사상전집’, ‘불란서 유물론’, ‘레닌의 성과적 유물론’,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너는 누구의 아들이냐’, ‘청년의 노래’(北傀 발행),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공상에서 과학으로’,‘ 새벽길’(北傀 발행)>
  
  판결문에 나타난 朴聖焌씨의 발언이다.
  
  <우리가 現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없고 후배들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 합법을 가장해 동지규합단체를 확대, 現 정부에 대항하고 외세에 항거, 現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민족적, 사회민주적, 사회대중적 사회’라는 구호 밑에 외견상 합법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지를 규합하자.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이러한 조직은 민족해방전선(엔,이,엘)이라고 호칭하자. 現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외세의 지배 하에 있고, 경제적으로 불평등하여 대단히 모순이 많은 사회다. 자본주의 체제의 악순환을 제거하기 위하여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개혁하여야 한다>
  
  1심 판결에 불복한 박성준씨는 항소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민족해방전선’을 구성한 바 없으며, 4·19 묘지에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사실도 없고, 그 밖에 이 사건 책자를 구입하거나 빌려 보거나, 빌려 주고, 필기시키고 한 모든 행위가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 아니며, 신영복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경솔한 소행을 하기에 이른 것이니 기독교인으로서 깊이 반성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박성준씨의 항소이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심을 확정했다.
  
  한편 한명숙씨의 통혁당 사건과 관련 판결문은 이렇게 적고 있다.
  
  <피고인 한명숙 등은 북괴는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조직된 反국가단체로서, 북괴가 간행하는 표현물이나 기타 사회주의 서적을 반포하는 행위는 북괴가 시도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행위로서 북괴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피고인은 박성준으로부터 북괴 간행 ‘청춘의 노래’를 빌려 받고, 박성준의 부탁으로 엥겔스가 쓴 ‘사회사상총설’ 1권을 받아 그 책에 있는 ‘공산당 선언’을 노트에 필기하고, 박성준의 지시로 이○○, 최○○와 같이 읽고 反국가단체의 활동에 동조하는 한편 찬양고무하는 표현물을 취득 복사, 보관, 반포하여 북괴를 이롭게 했다>
  
  한명숙씨는 1979년 이른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또다시 처벌받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는 1970년대 초반 한국 사회구조의 병폐를 없애기 위해 강원룡 목사가 만든 단체이다. 韓明淑씨는 당시 여성 교육을 담당하는 여성부분 간사로 일했다.
  
  한명숙씨는 이우재, 장상환, 황한식, 신인령, 김세균과 만나 모스크바방송·북경방송·평양방송·통혁당 목소리 방송 등을 들었던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써클회원 6명이 모인 자리에서 회의를 속개하기에 앞서 그 집에 있던 라디오를 조작하여 ‘어버이 수령 김일성…’하는 북괴의 어린이가 김일성을 찬양하는 북괴방송을 함께 들은 후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스웨덴의 탁아소 등 어린이 복지시설이 잘 돼 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곳은 이북이라고 하더라’는 요지의 말을 하여 反국가단체인 북괴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에 동조 또는 찬양하여 이를 이롭게 했다>
  
  판결문은 한명숙의 여성사회에 관한 활동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피고인 한명숙은 다른 피고인들에게 ‘여성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 것이니 읽어 보라’면서 ‘조선여성독본’ 복사판을 제공하였다>
  
  한명숙 대표는 ‘크리스챤 아카데미’과 관련해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아 명예를 회복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1973년 통혁당 사건과는 무관하다.
  
  기자는 2006년 3월 성공회대 NGO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박성준씨와 인터뷰를 시도했었다. 통혁 사건과 관련,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필자의 요청에 대해 박성준 교수는 “언론에서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 보도돼 예기치 못했던 오해가 생기고 있다. 인터뷰는 사절한다”고 말했다. 朴교수의 거듭된 고사(固辭)로 인터뷰가 어려워지자, 필자는 “팩스로 질문지를 보낼 테니 가능한 범위 내에서 답변해줄 것”을 부탁했다. “보내 주십시오. 그러나 답변여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양해해주십시오”라는 朴교수의 멘트로 통화를 마친 후 필자는 통혁당 입당여부, 맑스 서적 번역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 팩스, 메일, 전화 등 가능한 수단으로 회신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질문서를 보낸 후 朴교수의 답변은 오지 않았었다.
  
  <“9·11? 내가 만난 사람들은 통쾌하다는 반응”주장>
  
  한명숙 대표의 남편 박성준氏는 출소 후 소위 반전평화운동에 정력을 기울여 왔다. 그는 심지어 이슬람 지하드(소 ‘성전(聖戰)’)는 “미국이 아랍세계에 가해온 폭력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통제된 폭력”이라고 정당화했다. 또 9·11테러에 대해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미국이 당해 싸다, 통쾌하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편이었다(以上 ‘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논문 中)”고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한반도는 위험을 안고 있는 불안한 지역입니다. 그 중심에 언제나 미국이 있지요. 우리가 이번의 사태(9·11사태)를 보면서 ‘오만한 미국의 콧대를 꺾었다!’ ‘미국도 당해봐야 한다」는 정서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미국이 무슨 짓을 했기에 테러리스트들이 그토록 처참한 보복을 생각해내게 되었는지, 그들의 사무친 한과 절망과 증오의 뿌리가 무엇인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알게 합시다”
  
  박성준氏는 미국의 이라크전은 “군수산업의 이익을 도모하고, 석유이권과 중동패권을 노려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는 전쟁이 아닌 침략(2003년 3월25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으로, 아프가니스탄전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고 그 나라의 자연을 마구 짓밟고 완전초토화하는 것(2002년 3월21일 著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등)”으로 비난했다.
  
  그는 91년 걸프전에 대해서도 “수십만의 젊은 이라크 병사들이 미국의 융단폭격으로 사막에서 살육되고, 미국이 이라크 사회의 인프라 구조를 파고해버렸고 생필품의 수입마저 막는 경제제재를 지금도 풀지 않아서 백만 이상의 이라크 어린아이들이 영양실조 등 병으로 죽어갔다(‘폭력의 골짜기를 넘어 평화의 너른 들녘으로’ 등)”고 주장해왔다.
  
  박성준氏는 특히 미국의 對北제재가 한반도에 전쟁을 부른다며 북한정권의 不法행위를 제재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펴왔다. 2002년 경 쓴 ‘연두빛 평화의 물결로 한반도를 감싸자’ 는 글을 일부 인용해보자.
  
  “설마 하다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남북한 민중이 떼죽음을 당하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부시대통령과 미국정부에게 화해와 평화를 향한 우리 겨레의 역사적 행보를 방해하지 말라고 단호히 경고하자.(···)만에 하나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이 덮쳐온다면 우리는 휴전선 일대에 평화의 천막을 치고 평화를 호소하는 갖가지 이벤트를 벌인다”
  
  그는 같은 글에서 “우리의 평화와 우리의 안전을 남의 손, 外勢(외세)·강대국 미국에 맡겨놓고 안전을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미국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에 맞서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며 미국의 한반도 전쟁책동을 막고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전론 또는 평화론의 외양을 띄고 있는 박성준의 ‘反美’는 정작 평화를 부수는 북한의 테러나 도발에 대한 비판은 없다. 북한의 핵폭탄 비판도 없다. 김일성·김정일의 700만 민족학살이나 정치범수용소·공개처형, 탈북자 강제송환과 영아살해·강제낙태 등 끔찍한 만행에 대해도 침묵한다.
  
  관대한 잣대는 후세인에게도 적용된다. 후세인은 중동의 도살자(屠殺者)로 불렸다. ▲1987년 18만의 쿠르드족 독가스학살 등 수십만의 자국민을 처형해왔고 ▲2000년 대통령 및 친인척 비방 시 ‘혀 절단刑’ 등과 전기고문·눈알 뽑기·강간 등을 자행해왔다. ▲후세인의 폭압을 피해 이라크 인구 23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다. ▲1980~1988년 이란과 전쟁, 1990년 쿠웨이트 침공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동원한 전쟁과 失政(실정)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 2위인 이라크는 1천억 달러 빚더미에 올라섰다.
  
  박성준氏는 기독교 한 지파인 퀘이커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학”을 공부했다. 퀘이커에 대한 정의는 쉽지 않다. 朴씨는 퀘이커에 대해 “각 사람 속에 빛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님의 그것을 지니고 있다(There is that of God in everyone). 이것이 퀘이커 신앙의 정수다”고 정의했다( ‘새길이야기’ 인터뷰).
  
  박성준氏는 퀘이커적 ‘깨달음’을 위해 호흡수련을 강조한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베트남출신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 수련”을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틱 낫한 스님의 숨쉬기를 수련하라고 권합니다.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숨 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숨쉬기는 마음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숨쉬기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그리고 삶과 깨어있는 의식 사이를 다리 놓아 줍니다.(···)처음에는 정상적인 숨을 쉬다가 차츰 숨을 길고 느리게 하여 숨결이 곱고 잔잔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숨의 길이는 꽤 길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숨을 의식하고 있는 상태가 ‘깨어있는 가득한 마음(mindfulness)’의 상태라 하겠습니다.”
  
  <끝>
[ 2012-02-29, 00:0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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