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를 여섯 번째 보고

조갑제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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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 sbs에서 방영한 심야영화 닥터 지바고를 새벽 3시 넘어까지 보았습니다. 아마도 여섯번째로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도 끝까지 보게 하는 이 영화의 마력이 무엇인지?
  닥터 지바고는 구 소련 소설가 파스테라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기초로 한 영화입니다. 파스테라나크는 소련정부의 압력으로 수상현장에 가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자전적 내용이라고 합니다. 여주인공 줄리 크리스티가 맡은 연인 라라의 모델이 된 사람도 실존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 혁명에 비판적인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1950년대 흐루시초프 시절 스탈린 격하 운동이 시작되면서 암흑기에 대한 어느 정도의 언론자유가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인 1960년대 초에 번역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69년으로서 공군 졸병 시절에 휴가나와서입니다. 그 뒤 텔레비전에서 재방영을 여러 차례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1년 있을 때도 재방영을 끝까지 봤습니다. 이 영화처럼 재방영을 여러 번 한 영화도 달리 없을 것입니다. 재방영을 볼 때마다 새로운 각도에서 더욱 깊은 감동을 느끼게 하는 신비한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羅寬中의 三國志를 소년 때 읽은 감동과 어른 때 읽은 감동이 다른 것처럼 닥터 지바고는 결혼 전에 보았을 때, 연애 시절 보았을 때, 결혼한 뒤 보았을 때, 아이를 결혼시키고 보았을 때, 외손자를 본 뒤 보았을 때(어제밤의 저처럼) 느낌이 다 다를 것입니다.
  이 영화는 非戀의 이야기를 러시아 혁명이란 역사의 무대에 올려놓은 大作이지요. 데이비드 린 감독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인도의 길] 같은 역사물을 장대한 배경에 담아내는 巨匠인데 닥터 지바고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공산혁명을 雪原에 깔고 시인이자 의사인 지바고(오마 샤리프)와 라라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 위에 그린 서사시이자 서정시로 영상화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라라가 탄 마차가 눈덮인 들판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끝까지 보기 위하여 지바고가 2층의 창문을 깨고 머리를 내미는 장면일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장면은 너무 처절합니다. 그 이별 8년 뒤 지바고는 모스크바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가 걸어가는 라라를 봅니다. 심장병을 갖고 있던 그는 전차에서 내려서 라라를 부르지만 라라는 못알아 듣고 걸어갑니다. 그녀를 비틀비틀 따라가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면서 쓰러지는 장면, 그것도 모르고 계속 걸어가면서 사라지는 라라의 뒷모습. 저는 감독이 여기서 라라 비슷한 여자를 내세워 지바고가 다른 여자를 라라로 오인한 것처럼 처리했더라면 덜 잔인하였을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여러번 보면서 저는 이 영화가 워낙 완벽하게 꾸며지고 촬영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현장을 자연스럽게 살려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부자연한 장면이나 연결이 없이, 그때는 그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혁명기가 만들어내는 여러 형의 인간군상-무자비한 혁명가, 따뜻한 혁명가, 도태되는 구질서의 인간들, 현모양처, 요령 좋은 인간, 차가운 정치장교, 인간적 체취를 가진 빨치산 대장 등-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옷, 장비, 배경 등 관중들이 러시아 혁명의 현장 속에 있는 것 같은 실감, 그래서 여러번 보아도 지겹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007 위기일발, 벤허 같은 영화를 요사이 보면 전개가 너무 느려서 도저히 끝까지 보고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장면들이 어색하고 대화가 너무 산만해서 그럴 것입니다. 반면에 카사브랑카(잉그리드 버그만, 험프리 보가트) 같은 영화는 요사이 보아도 전개가 빠르고 어색한 점이 없어 끝끼지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역시 名畵는 세월의 도전을 극복하고 생동감과 감동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닥터 지바고'가 세월이 갈수록 더욱 빛나는 이유는, 혁명가와 시인, 학살과 사랑, 雪原과 戰場의 대조가 서사시적인 영상으로 우리 뇌리에 오래 남는 때문이겠지요. 특히 전편을 흐르는 배경음악인 [라라의 테마]의 哀調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적시기도 하고 쥐어뜯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성공에는 알렉 기네스(지바고의 형), 제럴딘 체프린(지바고의 처), 로드 스타이거(라라의 의붓아버지) 같은 세계적인 배우의 공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라라로 나온 줄리 클리스티의 연기일 것입니다.
  열정과 욕정을 담은 불타는 눈과 입술, 성깔 있는 단호한 목소리, 육체적 욕망과 따로 노는 정신적 지조, 이런 것들을 한 여성상 안에 담고 있는 그녀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처럼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인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지바고와 라라 사이에 여러 번의 이별과 만남이 있습니다. 간호사와 의사로서 전장을 누비다가 헤어지고, 혁명의 한복판에서 도서관에서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만 임신한 아내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지바고가 라라에게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돌아오다가 빨치산에 잡혀 헤어집니다. 빨치산에서 탈출하여 다시 라라와 만나고, 그 라라를 다시 떠나보내고,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에서 걸어가는 라라를 뒤쫒다가 쓰러집니다.
  이 영화에는 잊을 수 없는,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이 참 많습니다.
  비밀경찰이 언제 두 사람을 붙들어 처형장으로 보낼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나날들 속에서 그 마지막의 생을 의미있게 살자면서, 오직 사랑의 열기로써 서로를 데우면서, 겨울밤의 늑대 울음을 들으면서 시를 쓰는, 라라를 쓰는 지바고. 운명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순간을 예감한 절박한 삶속의 詩作, 그 작업도 포기하고 운명을 기다릴 때 찾아온 한 사나이의 제안...
   여러 차례의 이별과 만남이 이 영화의 주된 흐름입니다. 혁명이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격동기에 펼쳐진 哀戀이랄까 非戀이랄까. 인간을 역사적 존재로 설정한 영화이기 때문에 닥터 지바고는 그런 사랑 이야기에도 무게가 더해집니다. 다음 재방영 때도 저는 아마도 또 밤을 새울 것 같습니다.
  
출처 :
[ 2002-08-17, 18: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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