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설문 정밀 분석: 김대중의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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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보이지 않는다
  -金大中 대통령의 5년간 광복절 경축사 분석-
  
  趙甲濟/月刊朝鮮 편집장
  
  8월15일을 광복절 겸 정부수립기념일이라 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1948년8월15일은 정부가 수립된 날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국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여 국가운영자를 뽑는 이른바 국민국가가 수립된 날이다. 국가 아래에 정부가 있다. 8월15일을 정부수립기념일이라고 한다면 張勉 정부 수립기념일, 朴正熙 정부 수립기념일, 金大中 정부 수립기념일도 있어야 한다. 8월15일은 광복절인 동시에 건국절이다.
  8월15일의 가장 큰 의미는 건국이다. 광복은 우리 힘으로 해낸 것이라기보다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했기 때문에 이뤄졌다. 대한민국 건국만은 이승만이란 위대한 지도자가 애국세력의 힘을 모으고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지원과 공인을 받아내 선거를 통해서 이룩한, 우리의 의지가 담긴 우리의 작품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2002년8월15일 57주년 광복절(54주년 건국절)을 맞아 경축사를 했다(張大煥 총리 서리가 대신 읽음). 연설 내용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한 마디 이야기가 없었다. 독립운동과 광복의 의미만 이야기했다. 金대통령은 다섯 차례의 8·15 경축사중에서 건국 50주년인 1998년 경축사에서만 건국에 대해서 짧게 언급했을 뿐(그것도 제2의 건국 운동을 길게 언급함으로써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서 한번도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지 않았다.
  독립운동과 광복은 결국 대한민국 건국으로 결실이 된 것이다. 李哲承씨 말대로 건국절을 무시하고 광복절만 모시는 것은 아버지 제사는 모시지 않고 할아버지 제사만 모시는 격이다.
  1945년8월15일의 광복으로 우리가 자동적으로 주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 3년 뒤 대한민국이 건국됨으로써 국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국민국가를 갖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으로 그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공인받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라 없는 민족에서 비로소 국민자격을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국민은 민족보다도 한 단계 더 성숙한 존재인 것이다.
  한국의 좌파세력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인정하지 않거나 그 의미를 가볍게 본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은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법통을 계승해야 할 의무를 진 사람이므로 건국을 부정할 수 없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번 경축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국민은 수없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뒤에는 다시 국토가 분단되고, 전쟁의 참화를 겪고, 권위주의 정부 치하에 억눌려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굴하지 않았습니다. 선열들의 기백과 정신으로, 우리 국민의 땀과 눈물 위에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발전한 것입니다.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로 이제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자부심으로 우뚝 섰습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권위주의 정부의 압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전쟁의 참화가 金日成의 남침에 의한 것임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는 월드컵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도 월드컵을 유치한 金泳三 정부의 치적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다만 金泳三 정부 시절의 외환위기를 거듭해서 강조했다.
  요약하면 前 정권에 대한 가혹하고 냉담한 평가, 金日成의 전쟁범죄에 대한 언급회피, 前 정권의 치적에 대한 묵살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우리 국민은) 권위주의 정부 치하에 억눌려 살았다'고 했지만 이는 일면적인 관찰이다. 朴正熙 권위주의 정부시절 '억눌려' 살았다는 국민들이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全斗煥 권위주의 정부 시절 '억눌려' 살았다는 국민들이 서울올림픽을 성공시키기 위해 뜻을 모아 땀흘렸던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그 시절 정치적으로 억눌려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지만 동시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 보람을 느꼈던 사람들이 더 많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자들의 일면적 체험을 역사의 흐름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민족사의 정통적 흐름을 계승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의 資産과 負債를 동시에 지고 가야 하는 존재이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의 실정을 비판하되 불멸의 치적인 건국과 護國의 의미를 균형 있게 언급할 수 있는 中庸의 德이 소위 문민 대통령 가운데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지난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 역사로부터 보복을 당한다.
  지난 역사를 긍정함으로써 그 역사의 축적으로부터 용기, 암시, 상상력을 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는 위기에 처했을 때도 외롭지 않다. 영욕의 역사를 만든 우리 선조들의 땀과 눈물과 피야말로 위기 속 대통령의 가장 든든한 위안과 후원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2002년 8월15일 대통령 경축사에서만 건국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인지, 그 전 金大中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있었던 것인지를 확인하고싶었다.
  연설문 조사 결과 金大中 대통령이 8·15를 대한민국 건국과 연결시켜서 설명한 것은 1998년8월15일 한번뿐이었다. 이날 연설도 대한민국의 건국에 대한 언급은 「오늘은 광복53주년 기념일이자 대한민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라는 문장 하나였다. 민족사에서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이념으로 하고 유엔의 공인하에 국민의 뜻을 모아 탄생했고, 이 점에서 민족사의 정통성은 소련의 조종하에 만들어진 북한정권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뿌리내리게 되었다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도 다짐도 想起도 없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 연설 서두에서부터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定立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며, 민족의 재도약을 이룩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제2의 건국」을 제창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건국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 건국을 낮게 평가함을 근거로 하고 있는「제2의 건국」운동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가 가진 한국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視覺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렇게 요약했다.
  『대한민국 건국 50년사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波瀾의 시기였습니다. 국토분단과 동족상잔 그리고 수십년간의 군사독재로 인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우리는 세계11위의 경제대국을 이 땅에 건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50년만에 이룩한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하여「국민의 정부」를 세웠습니다』
   50여년의 현대사 흐름에서 金大中 대통령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준 1997년 大選과 국민들이 독재와 전쟁을 이겨내고 이룩한 경제대국 건설뿐이다. 경제대국 건설의 주인공은 李承晩·朴正熙 세력이 아니라 전쟁과 독재를 이겨낸 국민들이다. 군사독재는 오히려 경제건설의 장애물이었는데 국민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苦鬪를 통해서 경제대국을 건설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선배 대통령들의 업적에 대한 전면적 묵살(또는 부정)이 깔린 말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역사를 지도층과 국민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만들어간 것으로 보지 않고 나쁜 지도자와 좋은 국민들로 대립시키는 視覺을 보여주었다.
  
  1999년 8월15일 경축사에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과 李承晩 초대 대통령의 手苦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도 감사도 하지 않았다. 그는 「반세기에 걸친 독재체제 아래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한 국민의 희생과 헌신은 계속되었습니다. 그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997년12월18일, 아시아에서는 드물게 국민의 투표로 여야간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습니다」라고 말했다. 金泳三정부뿐 아니라 민주화를 시작한 盧泰愚 직선 정부까지 「반세기에 걸친 독재체제」에 포함시키는 듯한 唯我獨尊의 자랑이었다.
  6·15 남북 頂上 회담 직후인 2000년8월15일 경축사에서 金大中 대통령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을 추모하고 명복을 빌었지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낸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또「반세기 동안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적대와 반목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고 말했다.
  남북간 무장대치 상황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중립지대에 선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도록 만든 것은 金日成의 6·25남침이었다는 사실을 왜 분명히 적시하지 않는가. 적대와 반목은 대한민국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金日成·金正日의 남침과 도발과 테러와 암살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金日成 父子를 敵對할 수밖에 없었다. 일방적 피해자인 대한민국의 자위조치를 설명하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적대와 반목의 세월을 보냈다」는 중립적인 언어를 동원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을 불리하게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은 남북한 적대와 반목의 공범자도 從犯(종범)도 아니다. 북한정권이 반목과 적대의 유일한 주범인데 왜 피해자측의 대표가 피해자에게 책임의 일단을 지게 만드는 語法을 쓰고 있는가.
  
  金日成·金正日의 反인류, 反민족적 범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摘示(적시)하지 않으면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또「독재체제의 삼엄한 탄압과 횡포 아래서」란 말을 썼다.
  그의 다섯 번에 걸친 8·15 경축사에서는 독재체제(또는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빠짐없이 등장한 반면, 金日成·金正日에 대해서는 그 같은 직설적 공격을 한반도 한 적이 없다. 後代 학자들이 金大中 경축사를 분석하면 『아, 이 사람은 主敵인 북한정권보다도 대한민국의 前 정권들을 더 미워했구나. 彼我 구분이 뒤집어진 사람이구나』하는 결론을 내릴지도 모른다.
  2000년 6월25일은 金日成 남침전쟁 50주년이었다. 이 뜻깊은 기념사에서도 金大中 대통령은 놀랍게도 6·25 전쟁이 金日成의 남침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한만 공산화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의 목적은 당시 취약했던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공산지배에 대한 음모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金大中 대통령은 6·25남침의 주범으로 스탈린을 등장시켰다. 스탈린이 남침을 사주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범 金日成을 직접 책임자라고 언급한 뒤에 스탈린을 비판해야 하는데 金日成을 빼버리니까 스탈린이 주범처럼 된 것이다.
  金대통령은 또「도대체 왜 이런 전쟁이 일어나야만 했습니까」라고 自問한 뒤 이런 답을 내린다.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서로 총칼로 대립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원인은 일제 지배에 있었습니다. 왜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19세기말 서구의 물결이 도도히 동쪽으로 흘러들어올 때 (하략)」
  그는 6·25전쟁의 原因이 아니라 遠因을 찾고 있다. 6·25 전쟁의 원인은 金日成의 남침이다. 이 原因을 이야기한 다음에 遠因으로 넘어가야 설명이 되는데 原因을 빼버리니까 遠因이 原因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내 아들을 죽인 살인이 왜 일어났습니까」라고 自問한 피살자의 아버지가 「그것은 우리 집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꼴이다.
  집의 문이 열려 있었던 것은 살인의 原因이 아니라 여러 遠因 중의 하나일 뿐이다.
  2001년8월15일 경축사에서도 金大中 정부는 이날이 건국기념일이란 사실을 전혀 연설에 반영하지 않았다. 그는 北美회담이니 北美관계란 말을 썼다. 우리의 主敵이자 우리가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권력실체로서는 인정하지만) 북한정권을 우리의 血盟인 미국보다도 우대하는 비뚤어진 민족주의 성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상의 다섯 차례 8·15 경축사에 나타난 金大中 대통령의 역사관은 대강 이러하다.
  첫째, 그는 8·15기념일이 대한민국의 건국 기념일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다.
  둘째,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 자체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다.
  셋째,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전쟁을 일으킨 金日成 부자에 대한 엄정한 평가와 公墳心을 보여주지 않았다.
  넷째, 그는 歷代 정부와 대통령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했다. 그는 현대사의 업적을, 그런 잘못된 정부들의 압제 등을 극복한 국민들에게만 돌렸다.
  결론적으로 金大中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 합법국가이며 민족사의 정통국가라는 확신을 그의 연설에서 누락시켰다. 이는 그 자신이 그런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역사관은 대한민국 국가원수(국군통수권자)의 역사관이라기보다는 좌파적 역사관에 더 가깝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출처 :
[ 2002-08-17, 18:0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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