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최초 승전이 보도연맹원 학살로 둔갑

배진영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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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6일 점심 무렵. 회사로 배달돼 온 문화일보를 뒤적이던 기자는 <“25년간 美 문서보관소서 살았죠'- 근대사료 180상자 분량 발굴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라는 기사를 읽다가 아래 대목에 이르러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특히 “6·25 당일 부산 앞바다에서 800여명이 탄 1000t급 북한군 괴선박을 7시간30분동안 대치하다가 격침시켰다는 주한미해군사령부의 1일전투보고 비밀문서도 입수했다”며 “전쟁통에 오랜시간 대치한 것으로 봐서 북한군함이 아닌 보도연맹 관련자 처벌용이 아니었는지 침몰지점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선주 박사가 말하는 괴선박 격침 사건이란 1950년 6월25일 저녁에서 이튿날 새벽 사이에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이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킨 '대한해협 해전'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백두산함이 격침시킨 북한 수송선에는 북한 인민군 해군육전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만일 이들이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어찌되었을지는 不問可知이다. 이 때문에 노먼 존스는 그의 저서 '6-25 비사'에서 대한해협 해전을 가리켜 '6-25 전쟁의 분수령'이라고까지 말했다.
  
  대한해협 해전은 공지의 사실이었다. 1984년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사'에서는 5페이지에 걸쳐 대한해협 해전을 기록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대한해협 해전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던 권주혁 이건산업 부사장은 작년 6월 백두산함의 승전기록을 담은 '바다여, 그 말하라!'라는 책을 펴냈다.
  권부사장이 이 책을 쓴 경위,백두산함의 건조 및 도입과정, 백두산함의 전투기록과 퇴역, 대한해협 해전,참전자들의 후일담 등에 대해서는 월간조선 2003년8월호에 실려 있다.
  
  그런데 그 대한해협 해전이 졸지에 '미 해군 비밀문서를 통해 새로 발굴된 사실'로, 그것도 모자라 '보도연맹원들을 바다에 水葬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의 소재로 둔갑하고 있는 것이다.
  전경웅 디펜스 코리아 전문위원은 문제의 기사를 보고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대한해협 해전이 맞다'면서 '이는 새로운 사실도 아니거니와,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승전인 대한해협 해전은 한국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왜곡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그 황망 중에 정부가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내보내 水葬시킨 것 아니겠느냐는 식의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이나, 그 얘기를 그대로 받아쓰는 기자나....'라며 혀를 찼다.
  
  방선주 박사는 2001년 9월에는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가 美CIC요원이자, 反共 비밀결사였던 白衣社 요원이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이에 대해 백의사 요원이었던 이성열씨가 월간조선을 찾아와 방 박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인터뷰를 했었다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
  
  아래는 월간조선 2003년 8월호에 실렸던 <[秘 錄] 백두산함의 생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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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년기의 감동을 찾아서
  
  
  
  
  
  
  
   (주)이건산업 權主赫(권주혁·50) 부사장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대 초에 「자유의 벗」이라는 월간잡지를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공적을 알게 되었다. 1950년 6월25일, 부산을 공격하기 위해 북한군을 싣고 오던 괴선박을 백두산함이 용감하게 무찔렀다는 「대한해협 海戰」 승전보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그는 커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인인 權主赫씨는 육군사관학교 31기 시험에 응시하려고 했으나 일요일에도 시험이 있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서울大에 입학하여 학군단(ROTC) 13기에 들어가 직업군인이 되고자 했으나 일요일에 열린 교육사열을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육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3년간 전방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군인은 되지 못했지만 백두산함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權主赫씨가 평소 친분이 있는 해군 관계자들에게 백두산함 관련 서적이 나오지 않는 이유를 물었을 때 한결같이 자료가 부족해서 책으로 엮기가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대한해협 海戰이 가장 구체적으로 소개된 책은 1984년 합동참모본부에서 발간한 「韓國戰史」이다. 이 책에서 5페이지에 걸쳐 대한해협 海戰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나마 한 페이지는 전투가 벌어진 海域의 지도이다. 權主赫씨는 여러 자료를 찾았으나 대개 대한해협 海戰을 서너줄 정도 설명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는 책이 나올 가능성이 희박하자 자신이 쓰기로 결심했다.
  
   『승조원 가운데 생존한 분이 있는지 알아봤더니, 20여 분 살아 계시다고 하여 그분들을 만나면 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존 승조원들을 찾아서
  
   2001년 여름부터 해군본부를 비롯한 관련단체를 찾아가 자료수집을 하면서 틈만 나면 백두산함 생존 승조원들을 찾아 나섰다. 權主赫씨는 올해 현충일에 백두산함 승전기록을 담은 「바다여, 그 말하라!」는 책을 기어이 펴냈다.
  
   그는 이전에 이미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헨더슨 비행장」과 「여기가 남태평양이다」라는 두 권의 책을 낸 작가이다. 전쟁 전문가가 아닌 그가 독특한 내용의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이건산업 솔로몬 지사에서 20년간 근무하면서 태평양 일대를 답사하고 연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군인이 되려던 꿈을 戰史 연구로 달래고 있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과 관련된 책을 앞으로도 계속 펴낼 계획이라는데, 그에 앞서 한국전쟁 관련 「바다여, 그 말하라!」를 먼저 쓰게 된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앞에 낸 두 권의 책이 다 공군과 관련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해군에서 큰 관심을 보였어요. 해군 가운데 저에게 연락해오신 분도 많았고 책을 열 권씩 산 분도 있어요. 그에 보답하는 의미도 있고, 백두산함 영웅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업을 해야겠다는 조급증도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을 모르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책을 쓰게 한 동기였다고 말했다.
  
  
   軍人 가족이 모은 성금으로 군함 마련
  
   대한해협 海戰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백두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두산함은 그 태생부터가 대단히 감동적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태동은 1945년 8월21일 조직된 準군사단체 海事隊(해사대)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 8월15일 정부가 수립될 때 해군 병력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고 보유 함정수는 105척(총 1만3000t)이었다. 미군이 인도한 노후한 소형 보병 상륙용 함정, 일본군이 남기고 간 소해정, 민간용 소형 화물선을 그대로 전용한 경비정 등이었는데 대부분 장비가 노후해 작전 가능한 배는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무장을 갖춘 전투용 함정은 단 한 척도 없었다. 해군은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하면서 전투력을 갖기 위해 포를 장착한 함정의 필요성을 통감했다.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孫元一(손원일) 제독은 참모총장으로부터 말단 수병에 이르기까지 월급을 10%씩 공제하여 적립한 돈으로 전투용 함정을 구입하자는 애국운동을 벌였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소위로 백두산함 갑판사관이었던 崔英燮(최영섭·76·한국 해양소년단 서울연맹 고문) 예비역 대령은 당시 모금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장교 월급이 쌀 한 말 값도 안 되었어요. 대포 달린 군함을 사자며 월급의 10%를 공제했을 때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없었어요. 해군 장병들이 성금을 더 내기 위해 고철을 수집하여 고물상에 팔기도 했지요. 해군 장교와 부사관 부인들이 바느질과 빨래를 해주고 양복을 고쳐 주어서 번 돈도 보탰지요. 아마 이렇게 모은 돈으로 배를 구입한 예는 세계적으로 없을 겁니다』
  
   해군은 모금한 돈 1만5000달러를 李承晩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전투함 한 척을 구입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해군의 정성에 감격한 李대통령은 한국 해군 고문관으로 파견 나와 있던 미국 해안경비대 소속 로빈슨 대위에게 즉시 쓸 만한 퇴역 전투함정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로빈슨 대위는 미국 뉴욕州 롱아일랜드의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화이트헤드 소위號」라는 실습선을 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李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외환 사정이 극히 어려웠으나 李대통령은 국고에서 4만5000달러를 내주었다. 총 6만 달러로 함정과 포탄, 포, 연료, 수리비, 인건비를 다 충당해야 했다.
  
   함정 구입을 결정하기에 앞서 함정을 살펴보기 위해 孫元一 제독과 로빈슨 대위는 항공편으로 미국으로 출발했다. 1949년 10월, 함정을 수리하여 몰고 태평양을 건너올 인수단원 15명이 뉴욕에 도착했다.
  
   1949년 10월7일, 1만8000달러를 주고 450t짜리 화이트헤드 소위號를 구입했다. 이 배는 정원 73명, 만재 배수량 450t, 길이 52.9m, 폭 7.06m, 속력은 최고 18노트였다. 화이트헤드 소위號는 이미 오래 전에 뉴저지州 호보켄 부둣가에 있는 하버보트빌딩회사라는 조선소로 옮겨져 있었다. 배는 몹시 낡아 녹이 많이 슬었을 뿐만 아니라 기관을 움직여 본 지가 2∼3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인수요원들은 중위에서 중령까지 모두 장교였다. 인수요원들은 배에서 숙식을 하며 미국인 작업반장의 지시에 따라 낮에는 페인트칠, 기관수리 등 잡일을 하였다. 인건비가 비싼 미국인 노무자들에게 맡기면 경비 지출이 너무 크므로 인수요원들이 직접 잡일을 한 것이다.
  
   호보켄은 조선공업이 발달한 곳으로 1990년까지 몇 개의 조선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작은 조선소 하나만 남아 있다.
  
   權主赫씨가 백두산함의 역사를 찾기 위해 2003년 2월 호보켄을 찾았을 때 화이트헤드 소위號의 수리를 책임졌던 하버보트빌딩회사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한국 해군의 첫 전투함을 인수한 곳을 꼭 찾고 싶다고 하자 우체국장이 나왔어요. 마침 우체국장 토미 테식이 아버지가 킹스포인트 해양학교를 졸업했다면서 옛날 조선소 사정을 좀 알더군요. 테식이 지도를 갖고 와서 조선소 위치를 알려 주어 정확히 호보켄 어느 지역에서 배를 인수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한국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 탄생
  
   인수요원들이 호보켄에서 배 수리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갑판부의 이성호 중령(5代 해군참모총장)과 김동배 소령은 킹스포인트에 있는 해양대학교에서 3인치 포 운용 훈련을 받았다.
  
   호보켄 부두에서 함정 수리가 다 끝나자 마지막으로 인수요원들은 배의 앞부분에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서 흰색 페인트로 크게 「701」이라고 썼다. 12월24일 701호는 호보켄 부두에 정박된 밧줄을 풀고 맨해튼 섬의 남쪽을 돌아 롱아일랜드 서쪽 해안에 있는 미국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 정박하였다. 12월26일 오전 10시, 제8부두에서는 한국 해군의 최초 전투함정인 초계함 백두산함의 명명식이 뒷갑판에서 열렸다. 이 명명식에는 당시 駐美 한국대사관의 장면 대사, 孫元一 제독, 교민 여러 명, 美軍, 승조원 등 30여 명이 참석하였다. 마스트에 태극기를 게양한 뒤 한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던 일행은 모두 목이 메었다.
  
   명명식이 끝나자 드디어 백두산함은 태극기를 펄럭이며 후일 제2대 해군참모총장이 된 함장 박옥규 중령의 지휘에 따라 뉴욕 항구를 빠져 나왔다. 파도가 몹시 거세 대원들은 모두 멀미를 하며 힘든 항해를 했다. 12월31일 마이애미에 도착해 급유를 받은 후 1950년 1월1일 아침 7시 다시 출발했다. 거친 항해 끝에 1950년 1월24일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하와이 교민들은 한국 군함이 들어온다고 하여 큰 기대를 하고 있다가 막상 들어온 백두산함이 조그만 경비정 같은 함정이어서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독립군과 上海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낼 정도로 애국심이 높았던 하와이 교포들은 조국이 군함을 갖게 된 것에 긍지를 가졌다.
  
   백두산함은 이틀 후 진주만의 해군 수리창으로 이동하여 앞 갑판에 3인치 대포 한 문을 장착하기를 기다렸다. 3월 중순이 되어서야 백두산함에 3인치 포가 장착되었다. 3인치 포를 앞갑판에 설치한 후 오하우 섬 앞바다에 나가 몇 발을 쏘아 보며 포의 성능을 시험하였다. 3월20일 하와이를 출발한 백두산함은 괌 섬 아프라 항구에 들러 美 해군으로부터 3인치 포탄 100발과 기름을 구입한 뒤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비밀병기라고 접근 못 하게 해
  
   4월9일, 태평양을 가로질러 온 백두산함이 우리나라 남해안 근해에 나타나자 조업하고 있던 어부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우리나라에 군함이 없는 줄 알고 있던 어부들이 태극기를 달고 나타난 백두산함을 보고 감격한 것이다. 4월10일, 뉴욕을 떠나 석 달 반 동안 대서양과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백두산함이 드디어 진해 기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3인치(76mm)포 1문만 장착한 백두산함에 해군은 50mm 중기관총 2정을 설치하였다.
  
   백두산함은 초계정급이다. 초계정은 연안감시 임무를 가진 작은 함정으로 배수량은 300~500t, 수용할 수 있는 승조원은 40~80명 정도이다. 해군에서 승급시켜 백두산함은 초계함급이 되었고, 함정 책임자의 직책도 정장에서 함장으로 승급하였다. 백두산함이 진해에 입항한 이후 제2대 함장으로 崔龍男(최용남) 중령이 임명되었다.
  
   백두산함 생존 승조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예비역 대령 崔英燮씨는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해군에서도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었다고 증언했다.
  
   『내가 해사 3기인데 갑판과에서 수석으로 졸업했어요. 기관과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김종식 소위도 백두산함에 배치되었어요. 부사관들도 성적순으로 백두산함에 배치되었죠.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데 그때는 백두산함이 비밀병기라며 100m 밖에다 새끼줄을 치고 헌병을 배치해서 접근을 막았어요. 그때만 해도 3인치 포를 장착한 군함이 없었으니 비밀병기라고 할 수 있었지요. 우리나라 첫 군함이어서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몰라요』
  
  
   사격 경험 없이 출동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초 첫 출항을 하여 부산, 제주, 묵호, 여수, 목포, 군산, 인천 항구를 방문했다. 성금을 낸 해군들에게 대포 달린 군함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는데 입항할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백두산함은 항구 순례를 마치고 6월24일 밤 11시30분에 진해 기지로 귀항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몇 시간 전이었다.
  
   6월24일은 토요일이었으므로 영외 거주자인 장교들과 부사관들은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고 당직 장교인 崔英燮 소위만 함에 남아 있었다. 崔소위는 밤늦게 귀환한 수병들에게 충분히 잠을 자도록 한 뒤 6월25일 오전 8시에 모두 기상시켰다. 崔소위는 수병들에게 각자의 세탁물을 세탁하게 한 뒤 함께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진해 통제부 사령관 金省三(김성삼) 대령이 지프차를 타고 급히 와서 출동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崔소위가 영외 거주자들 집에 전화가 없어 연락할 방법이 없다고 하자, 金省三 대령은 헌병들을 시켜 영외 거주자들을 모두 불러오게 했다. 오후 3시에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동해안 묵호항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에 따라 식량과 기름, 물 등을 싣고 진해항을 출발했다.
  
   해군본부에서는 이날 아침 동해안 묵호항 근처인 삼척, 옥계 지역에 북한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급히 백두산함과 AMS-512, AMS-518를 출동시킨 것이다. AMS는 美 해군이 사용하던 오래된 木造(목조) 소해정으로 배수 톤수가 150t, 승무원 48명, 속력이 10노트로 느린 함정이다. 게다가 무장도 되어 있지 않아 육군이 사용하는 미제 37mm포 1문을 AMS 앞갑판에 설치하였다. 백두산호는 속도가 느린 AMS와 발맞추어 천천히 동해로 항진했다.
  
   백두산함에 기관총탄은 충분히 있었으나 포탄은 100발뿐이었다. 백두산함은 몇 차례 해상훈련을 실시했으나, 포탄이 아까워 실제 사격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6월25일 오전 4시, 38도선 全전선에 걸쳐 북한군이 남쪽으로 침공을 개시했다. 북한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기 한 시간 전에 이미 북한 제766 특수부대와 제549 육전대(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 병력이 동해안 옥계 지역에 상륙하였다. 당시 백두산함 승조원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우리 해군 병력은 육상병력 5879명(해병대 1241명 포함)과 해상병력 1077명을 합쳐 총 6956명이었으며, 보유 함정은 경비 함정 28척과 보조선 43척으로 합계 71척이었다. 3인치 이상의 포를 장착한 전투함정은 백두산함이 유일했다. 나머지 함정들은 육군 37mm 對전차포를 1문 설치했거나 기관총만을 장착한 열악한 상태의 무장을 하고 있었다.
  
   북한 해군의 병력은 총사령부에 약 1000명, 원산 기지에 4750명, 청진기지에 3920명, 진남포 기지에 5000명, 해군군관학교에 500명, 기술훈련소에 200명 등 약 1만5000명에 달했다. 여기에 1950년 5월부터 원산과 진남포에 각각 1개 대대 규모의 육전대를 증설함으로써 6·25 전쟁이 일어나기 전 총병력은 1만62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전쟁발발 당시 북한 해군은 소련으로부터 도입한 함정을 포함하여 함정 30여 척(약 5000t), 보조선 80여 척, 합계 110척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함선들은 주로 舊 일본 해군의 경비정, 기뢰부설함과 발동선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는 남포호와 같은 1780t급의 큰 수송선도 있었으나 250t급의 함선 10여 척을 제외하면 대부분 35t 내지 45t급의 소형선이었다. 보조선도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던 발동선과 목선을 동원한 것이었다.
  
  
   육군포를 함정에 싣고…
  
   오진우가 이끄는 인민군 766 특수부대는 1000t급 무장수송선과 4척의 어뢰정 엄호 아래 발동선 30여 척으로 구성된 상륙선단을 이끌고 6월25일 새벽 3시30분에 이미 강원도 옥계 방면으로 상륙을 개시하고 있었다.
  
   새벽 5시 AMS-509(가평정)號는 긴급 전문을 받고 즉각 출동했다. 오전 7시20분 가평정은 묵호와 옥계 중간 해상에서 적함으로 보이는 함정 한 척을 발견하였고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20여 분간의 교전 끝에 가평정이 쏜 37mm 포탄이 敵船에 명중되기 시작하자 敵船은 함수를 북쪽으로 돌리고 전투현장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교전 중에 敵船의 포탄 한 방이 명중되어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가평정은 수리한 뒤 다시 옥계로 출동하였다. 가평정은 오후 3시, 옥계 북방 5km 지점에 상륙 중인 북한군을 발견하고 사격을 개시하자 적군은 산으로 도주하였다. 가평정은 해안에 있던 상륙선 한 척을 격파하고 해안에 방치해 둔 발동선 한 척을 나포하였다.
  
   이런 전투상황은 사실을 모른 채 백두산함은 계속 동해 쪽으로 항진했다. 백두산함은 이날 오후 6시38분, 부산 앞바다의 오륙도 등대 오른쪽으로 3.4km 떨어진 해상을 지났다.
  
   오른쪽 해상을 유심히 살피던 조병호 일등 수병의 눈에 갑자기 검은 연기가 보였다. 이때 시각이 오후 8시12분이었다. 1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긴 하지가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아 밤바다에 이제 막 어둠이 깔리려고 하던 참이었다. 연기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 선박은 부산 북동방 약 50km에서 침로 190도, 속력 10노트로 南下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동해안을 따라서 부산에 오는 큰 화물선이 없었으므로 보고를 받는 순간 백두산함의 2代 함장 崔龍男 중령은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백두산함은 힘겹게 따라오던 AMS-512정에 그대로 北上할 것을 지시하고 수상한 선박을 향해 달렸다.
  
  
   신호 보내도 묵묵부답
  
   20여 분 달린 끝에 백두산함은 수상한 선박의 선체를 완전하게 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수상한 선박은 해군수송선(FS급)의 형태였는데 선체는 모두 검은색으로 칠해졌고, 선체 앞부분에 써 있어야 할 배 명칭이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국기가 달려 있지 않았다. 金世鉉(김세현) 삼조(현재 계급 하사)와 최도기 삼조가 수기 신호를 보냈으나 응답이 없었다. 어두워서 국제신호용 깃발을 못 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라이트를 이용하여 朴順緖(박순서) 삼조가 국제신호 규정에 의거해 30분 동안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되풀이하여 물어 보았으나 역시 응답이 없었다.
  
   더욱 수상한 생각이 든 崔함장은 괴선박이 나타난 사실을 해군본부에 보고했다. 해군본부는 괴선박의 정체를 알아보라는 지시만 할 뿐 추가 지시는 없었다. 백두산함은 「계속 정지하라(K)」,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OL)」는 경고를 두 시간 동안 수십 차례에 걸쳐서 계속 보냈다. 崔함장은 괴선박이 敵船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였다.
  
   밤 11시40분, 崔함장은 8명의 장교를 사관실에 모으고 괴선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그 자리에서 장교들은 괴선박을 북한 선박으로 결론 내렸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평화로운 시기에 일본이나 중국의 괴선박이 우리 영해에 들어올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崔英燮씨는 당시 군대 안에도 공산당이 많았다며 1949년에 해군이 배를 몰고 월북한 일도 있다고 전한다. 백두산함에 승선한 장교들 가운데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나도 월남한 사람이에요. 북한에서 월남한 장교들이 공산치하에서 겪은 경험을 승조원들에게 자주 교육했어요. 승조원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마음속에 불타고 있어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을 갖고 끈끈한 전우애로 뭉쳐 있었습니다. 북한 선박이 틀림없다고 판단되었으니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생각뿐이었죠』
  
   일단 주포 1발을 위협사격으로 발사하여 괴선박의 반응을 보기로 했다. 崔함장은 참석자들에게 『金日成 공산당은 우리의 적이다.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훈화했다.
  
  
   쏘라!
  
   함장은 승조원 전원에게 전투배치를 명령했다. 3인치 포탄을 채우고 전투준비를 완료한 백두산함은 사격에 앞서 마지막으로 「K, OL」 발광 신호를 연속적으로 보내면서 최고 속력인 18노트로 괴선박의 오른쪽 90m까지 접근하였다. 발광신호의 조명을 이용하여 확인했을 때 배머리 쪽 갑판에 85mm포로 추정되는 포 1문과 함교 뒤에 重기관총 2정이 설치되어 있는 게 확인됐다. 당시 갑판사관이었던 崔英燮 씨는 북한 선박 갑판에 북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꽉 차 있었다고 전한다.
  
   『완전무장한 북한 해군과 상륙특공대 600여 명 정도가 타고 있더군요. 함께 본 동료는 1000명이 넘는 것 같다고 했는데 갑판 크기로 계산해 봤을 때 600명 정도가 맞다고 생각됐어요. 서치라이트로 여러 차례 살펴보면서 확인한 겁니다』
  
   북한 선박은 소련 해군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약 1000t급의 수송선으로 속력은 10∼12노트, 길이 70m, 폭 10m 였으며 배의 앞부분과 가운데에 마스트 2개가 있었다.
  
   북한 수송선은 백두산함이 근접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崔英燮씨는 당시 북한군의 목적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으므로, 조용히 지나치기 위해 먼저 사격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백두산함에선 38선상의 충돌이 당시 흔히 있던 전투가 아니라 전면전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崔龍男 중령은 해군본부에 무전을 치고 북한 선박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해군본부는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백두산함의 무전내용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25일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백두산함이 접촉 중인 선박이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초계함을 구입하기 위해 미국에 간 孫元一 참모총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은 26일 0시10분 백두산함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사관실을 나온 崔함장은 함교로 올라가고, 백두산함의 갑판 사관 崔英燮 소위는 갑판분대로 가서 분대원 25명을 불러 모았다. 崔英燮씨는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때 우리는 아직 전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고, 전쟁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시 우리 백두산함의 승조원들은 신념에 가득 차 있었어요. 대한민국 최초의 군함 백두산함에 대한 신념, 3인치 포를 장착했다는 무장에 대한 신념, 국가에 대한 신념 등으로 자신감이 넘쳤죠. 한마디로 무서운 게 없는 상황이었죠. 분대원들에게 모두 속옷을 갈아입으라고 명령했어요. 죽을지도 모르는데, 깨끗한 옷을 입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모두들 내의를 갈아입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는데 두려운 표정을 짓는 전우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주포인 3인치 포탄을 장전하고 마지막 사격명령을 기다리는 포술요원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였으나 사실은 걱정이 많았다. 지금까지 포탄이 아까워 포탄 없는 사격훈련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다섯 발 명중
  
   26일 0시30분, 백두산함은 南下하는 敵船의 왼편 5km쯤을 항해하며 敵船이 外海(외해)로 도망갈 길을 막았다. 백두산함이 다가가자 敵船이 급히 소등했으나 舷燈(현등) 하나가 꺼지지 않았다. 이 조그만 舷燈을 사격목표로 삼았다. 당시 위치는 한쪽으로는 오륙도 등대가, 다른 한쪽으로는 대마도 등대가 보이는 곳이었다. 괴선박을 발견할 당시는 부산항에서 세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 계속 감시하면서 함께 南下하다 보니 어느새 부산항과 한 시간 거리에 와 있었던 것이다.
  
   사격개시 명령에 포술요원들은 방아쇠를 힘차게 잡아 당겼다. 위협사격으로 쏜 첫 발은 敵船 옆 바다 위에 떨어지며 물기둥을 만들었다. 敵船은 기관총과 85mm 주포로 백두산함을 향해 불을 뿜었다.
  
   백두산함은 적의 조준사격을 피하기 위해 최고속력을 내면서 함교 바로 뒤에 장치한 구경 50mm 기관총으로 적선을 향해 쏘아 댔다.
  
   계속된 연발사격으로 약협(탄두가 붙어있는 상태에서의 탄피)이 총신에 붙어 고장이 났다. 사수와 탄약수는 비 오듯 날아오는 적탄 아래서 약협을 뜯어내고 찬물로 뜨거운 총신을 식히면서 계속 쏘아 댔다.
  
   한 번도 실제 사격을 못 해본 백두산함의 포술요원들이 쏜 포는 계속 빗나갔다. 드디어 한 발이 적선의 앞갑판 아래에 불꽃을 튀기며 명중하였다. 당시 3인치 포는 포수 세 명이 완전히 수동으로 조작했다. 가랑비가 약간씩 뿌려대는 캄캄한 새벽 바다에서 정확한 거리를 측정하기 힘들었으나 20발 가운데 다섯 발이 敵船에 명중하였다. 포탄이 敵船에 명중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이 다섯 발로 敵船의 옆구리 밑에 큰 구멍이 생겼고 바닷물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나 敵船은 이상이 없다는 듯 계속 항해하며 응전하였다
  
   계속 포탄이 빗나가자 崔함장은 포탄을 아끼기 위해 근접 사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백두산함의 속력이 더 빨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레이더가 없어 야간 海戰에서는 거리를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敵船의 왼편 1.7km에 접근할 때까지 10여 발을 더 발사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3인치 직사포를 발사하니 포탄은 마치 단도로 찌르듯이 敵船에 명중되어 불꽃을 일으켰다.
  
   마침내 敵船에서 검은 연기가 나오면서 敵船을 감싸기 시작했다. 백두산함은 적선 왼편 900m까지 접근하여 3인치 포와 중기관총을 다시 발사했다. 이때 발사한 3인치 포탄 한 발이 敵船의 중간 부분에 있는 마스트 꼭대기에 명중했다. 마스트 끝 부분이 허공으로 터져 날아가면서 불꽃이 튀었다. 崔英燮씨는 당시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고 전한다.
  
   『포탄이 머리 위로 핑핑 날아다니니, 얼마나 긴장됐겠어요. 그때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생각밖에 안 나죠. 모두 악에 받쳐 있었죠. 그런 와중에 마스트에 명중하자 모두들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죠』
  
   연이어 다른 3인치 포탄 한 발이 기관실에 명중하자 敵船에서는 검은 연기에 불길이 섞여 나왔고, 곧 화염이 가운데 브릿지를 감싸기 시작했다. 敵船이 왼쪽으로 기우뚱하더니, 새벽 1시10분경에 약 20도 정도로 기울어지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敵船은 85mm포와 중기관총으로 백두산함을 향해 막바지 사격을 퍼부었으나 이미 선체가 심하게 기울어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통신사 徐順億(서순억) 병조장은 모든 상황을 진해의 통제부로 중계방송했다.
  
  
   피격: 죽어 가면서 『적함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때까지 백두산함은 약 50발의 3인치 포탄을 발사하였는데, 다음 포탄을 장전하고 발사하려고 했으나 발사가 되지 않았다. 포탄이 나가면서 발생된 열이 포탄 발사용 격발장치의 고무 스프링을 녹여 윤활유와 함께 고착되어 버린 것이다.
  
   그간 실탄이 아까워 실제 쏘는 연습을 하지 않고 계속 기름 주고 조이기만 되풀이하는 바람에 윤활유가 많이 엉겨 있었던 것이다. 쉽게 고칠 수 있는 고장인데다 백두산함에 예비 고무 스프링이 많이 있었으나 경험이 없는 포술요원들은 고장 원인을 몰라 당황하며 포 사격을 중지했다.
  
   대신 50mm 중기관총 2문을 사용하여 마지막으로 敵船에 사격을 하려고 함체를 敵船에 더욱 가까이 댔다. 이때 적의 85mm 포탄 한 발이 백두산함의 조타실을 관통하면서 터져 우리 승조원 4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때 백두산함과 敵船의 거리는 불과 360m밖에 되지 않았다.
  
   새벽 1시20분 崔함장은 백두산함을 일단 전속력으로 敵船의 사격권 밖으로 이탈시키고 침로를 300도로 잡아 北上했다. 부상 장병을 응급치료하고 포술요원들과 함께 포의 고장 부위를 발견하여 응급조치했다.
  
   적의 85mm 포탄이 조타실에 명중하였을 때 큰 파편이 자이로컴퍼스(나침반)에 맞으면서 조타수 金昌學(김창학) 삼조는 배가 터져 내장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조타실의 조타간을 끝까지 잡고 있다가 피를 너무 흘려 의식을 잃고 말았다. 교전 중에 포탄 장전수인 전병익 이등병조는 흉부를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다. 갑판부의 주포 전화수 金春培(김춘배) 삼조는 적탄이 다리를 관통하였지만 전화기를 놓지 않았다. 기관실의 김종식 소위(해사 3기)도 파편이 날아와 오른발 뒤축에 박혔다.
  
   백두산함에는 원래 軍醫가 배치되지 않으나 비상사태를 맞아 출동하게 되자 마침 군의관도 함께 타고 있었다. 군의관 김중위는 심한 배멀미에 시달린데다 부상병의 창자가 튀어나온 것을 보고 먹은 것을 토해 냈다.
  
   주위에 있던 승조원들이 빈 깡통을 목에 걸어 주었다. 중상자들을 후갑판 식당으로 옮겼다. 군의관은 수술 도중에 앞가슴에 찬 깡통에다 구역질을 하면서 창자를 뱃속에 다시 집어넣는 수술을 하였다. 하지만 중상자 두 명은 가망이 없었다.
  
   피를 많이 흘려 갈증이 심했던 金昌學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물을 달라고 간청했다. 崔英燮씨는 두 사람이 물을 마신 뒤 눈을 간신히 뜨며 『갑판 사관님 적함은 어찌 되었습니까?』라고 묻던 일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아직 격침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격침되었다」고 말했죠. 죽어 가면서도 적함이 격침되었다니까 두 사람이 만족한 표정을 짓더군요. 金昌學 삼조는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한 뒤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모아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습니다. 가슴에 적탄이 박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힘들게 거친 숨을 내쉬던 전병익 이등병조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더니 눈을 뜬 상태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때 시각이 1950년 6월26일 새벽 1시30분경이었다.
  
  
  
  
   死守한 부산항으로 UN군 상륙
  
   포의 고장 부위를 발견하여 응급조치한 후 백두산함은 새벽 1시35분경 敵船의 침몰여부를 확인하려고 다시 南下했다. 네 시간에 걸쳐 전투지역을 수색하였으나 敵船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해상에는 기름이 흥건했고, 옷과 여러 부유물들이 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함정이 침몰하게 되면 침몰 직전 승조원들이 구명 보트나 라이프 재킷을 이용하여 배가 침몰한 주변에 떠 있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백두산함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바다 위에 생존자가 보이지 않았다. 崔英燮씨는 고도로 훈련된 군인들이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두산함은 敵船이 새벽 1시38분경에 완전히 침몰한 것으로 보고 해군본부의 명령에 의하여 새벽 5시45분에 동해안의 묵호 방면으로 北上했다. 포항 기지에 기착했을 때 부상자와 전사자를 내려 놓았다. 백두산함은 적함의 포탄을 맞았으나 큰 문제가 없었다. 묵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평정된 상황이어서 백두산함은 6월27일 진해로 귀환하였다.
  
   우리 국군은 북한의 도발에 초기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지역에 특공대 600명이 상륙했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남한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부두시설을 가진 곳은 부산밖에 없었다.
  
   서울이 함락된 6월28일, 미국 서젠 키스레이號와 카디날 오코넬號가 105mm 박격포 10만5000발, 81mm 박격포 26만 5000발, 60mm 포 8만9000발, 총탄 248만 발을 싣고 부산에 왔다.
  
   7월1일에는 미국 스미스 부대가 미군 440명을 싣고 왔고, 7월2일에는 미군 34연대, 7월3일에는 미군 21포병 부대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다. 한국전쟁 중에 자유우방 16개국으로부터 연병력 100만 명과 수많은 군수물자가 부산항을 통해서 한국에 왔다.
  
   박명림씨가 쓴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출판사. 1996)이라는 책에 1950년 6월25일 부산 앞바다에 나타난 배가 북한 선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명림씨는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한국전쟁에 관한 미국 자료와 러시아 자료를 뒤지는 가운데 1950년 6월24일 북한 인민군 문화부 사령관 金一(김일)이 인민군 해군 육전대(해병대) 빨치산 특수부대 600명에게 「인민군 南進에 호응하여 부산에 돌입하라」고 명령한 사실을 밝혀 냈다. 노만 존슨은 그의 저서 「6·25 秘史」에서 대한해협 海戰을 「6·25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표현했다.
  
  
   戰後 조용한 퇴역
  
   대한해협 海戰 이후 백두산함은 동해, 남해, 서해에서 수많은 작전에 참여하였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유엔군 함정 300여 척이 들어올 때 백두산함은 영흥도와 덕적도 주변의 적을 소탕해 길목을 텄다. 대한해협 海戰에 참가한 해군 병사는 70여 명이며, 대한해협 海戰이 끝난 후 인사 이동이 있어 애초의 승조원들이 계속 백두산함을 탄 것은 아니다.
  
   1951년 2월3일 개시된 제2차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오산과 평택까지 내려와 있을 때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특공대로서 육지에 상륙하여 북한군의 전차를 노획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1952년 7월엔 연평도 근해에서 적의 해상을 봉쇄하던 중 좌초되어 침몰할 뻔했으나 다행히 美 해군 구축함에 의해 구조되었다.
  
   백두산함은 휴전 이후에도 해상 경계 임무에 투입되어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가 새로 도입된 신형 함정에게 그 임무를 인계하고 1959년 7월1일 진해 기지에서 조용히 퇴역하였다. 백두산함의 마스트와 53년 전 대한해협의 새벽을 울리던 주포는 현재 해군사관학교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해협 海戰을 승리로 이끈 백두산함 2代 함장 崔龍男 중령은 1951년 5월에 우리 정부로부터 최고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미국 정부도 1951년 7월 崔중령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崔함장은 1952년 해병대로 전과하여 1965년 소장으로 예편했다가 1998년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대한해협에서 전사한 두 명의 해군은 진해에 묻혔다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대한해협 海戰에서 전사한 金昌學 삼조는 2003년 「5월의 호국인물」에 선정되었다. 백두산함 생존 승조원들은 함께 전사한 전병익 이등병조가 선임자인데 왜 함께 선정되지 않았는지 의문을 표시했다.
  
   崔英燮씨는 1965년까지만 해도 6월25일이면 KBS에 출연해 대한해협 海戰 얘기와 공산당의 만행에 관해 증언했지만 그 후부터 초청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全斗煥 대통령 때까지만 해도 6·25에 관해 기념식도 하고 얘기도 자주 나왔는데, 盧泰愚 대통령 때부터 한국전쟁이 잊혀지기 시작해서 요즘은 아예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매년 다시 모이는 영웅들
  
   崔英燮씨는 매년 6월이면 도시락을 싸갖고 국립묘지에 가서 먼저 간 전우들을 만난다고 말했다. 그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해군에서는 대한해협 海戰을 대단히 중요한 승전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별 다른 기념행사를 하지 않다가, 1988년에서야 부산에 위치한 해군 제3함대 사령부가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구봉산 중앙공원에 대한해협 전승비를 세웠다.
  
   그해 12월23일,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서 살고 있던 백두산함 승조원들이 중앙공원에 모였다. 당시 생존해 있던 崔龍男 함장도 참석하였는데, 모두들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백두산 승조원들은 대한해협 海戰에서 전사한 전우를 추모하고자 1951년에 한 번 모였다가 37년 만에 만난 것이다.
  
   해군은 전승비 비문에 「북괴가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남파한 무장선을 우리 해군 백두산함이 부산 외해에서 26일 새벽 격침시킨 해군 초유의 단독 해상전투였다. 이 海戰의 승리를 계기로 우리 해군은 남한의 전·후방을 동시에 전장화하려는 북괴의 기도를 사전에 분쇄하고 동·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한국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승비를 세운 이후 매년 6월25일이면 해군 3함대는 생존한 백두산함 승조원들을 초청한다. 올해도 생존 승조원 19명이 초청되었는데 올해는 특히 당시 전사한 金昌學 삼조의 여동생 김임순씨도 초청되었다. 생존 승조원 가운데 두 분은 몸이 불편해서 못 왔다고 한다. 매년 한두 명씩 사망하여 점점 참석자가 줄어든다고 하는데, 생존 승조원들의 나이는 75세부터 80세까지이다. 생존 승조원들에게 매년 초청될 때 어떤 기분이냐고 묻자 한결같이 『고마운 일이다. 누가 몰라줘도 승리했을 때의 기쁨이 늘 가슴속에 있었다. 살면서 그때를 떠올리면 언제나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6·25 전쟁 참전용사들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있지만 해군은 백두산함 승조원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깍듯이 예우했다. 지난 6월24일 저녁에 부산시청에서 만찬을 열어 주었고 6월25일에는 UN 묘지 참배가 있었다. 이어서 해군 3함대로 옮겨가서 생존 승조원 가운데 당시 계급이 가장 높았던 崔英燮 예비역 대령(백두산함 12대 함장)이 현역 해군들에게 안보관련 강연을 했다.
  
  
   대한해협 海戰 영웅들을 기억하자
  
   그들은 군함 광명號를 타고 부산 앞바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나가 헌화를 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 선박이 부산항이 빤히 보이는 위치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에 새삼 전율이 일었다.
  
   현역 해군들에게 대한해협 海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한결같이 『정말 자랑스럽다. 선배님들이 그때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과연 여기 있을 수 있겠나』라며 고마워했다. 그러면서 대한해협 海戰의 승전기록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해군 6명이 전사한 지난해 서해교전에 국민들의 관심이 적은 것에 대해 섭섭함을 표명했다.
  
   오후 2시30분, 해군 군악대의 연주를 시작으로 전승비가 세워진 중앙공원에서 대한해협 海戰 전승 기념식이 엄숙하게 열렸다. 기념식이 끝난 후 만난 3함대 사령관은 『대한해협 海戰에 대해 부산 사람들도 잘 모르는 실정』이라며 『해군과 일부 단체에서만 기억하는 대한해협 海戰이 全국민에게 알려져서 우리의 선배들이 얼마나 위급한 상황에서 나라를 지켜냈는지, 그분들이 얼마나 귀한 일을 해냈는지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한해협 海戰 기념행사에서 백두산함 승조원들 못지않게 환영받은 인물은 「바다여, 그 말하라!」를 집필한 權主赫씨이다. 부산시청에서 베푼 만찬에서 權主赫씨가 건배 제의를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대한해협 海戰에서 승리하지 않았다면 부산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고, 부산을 사수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백두산함의 영웅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들이 지금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백두산함의 영웅들께 감사드립니다』
  
   회사 업무와 관련하여 해외 나들이가 잦은 權主赫씨는 외국에 나갈 때마다 부러운 게 딱 하나 있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조그만 산골마을에도, 캐나다 조그만 해안마을 뉴욕 허드슨 강가 러시아 사할린 섬의 시골마을, 심지어 우리보다 경제력이 훨씬 못 미치는 월남의 시골마을에도 기념비가 다 있습니다. 자기 고장 출신이 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이 있는 마을에는 어김없이 기념비가 있어요. 사실 미국이나 영국, 일본에서 백두산함이 활약한 대한해협 海戰 정도라면 벌써 그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이나 역사학자들이 여러 각도에서 쓴 책자들을 발간했을 겁니다. 선진국의 기록문화가 참 부럽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고 물질을 중시하다 보니, 선배들의 희생과 애국정신을 너무 도외시해 왔습니다』
  
  
   權主赫씨 父子의 「끝나지 않은 海戰」
  
   權主赫씨는 두 자녀를 어릴 때 안중근 기념관에 데리고 가서 현장학습을 시키고 해외에 살 때도 조국을 잊지 않도록 늘 교육했다. 權主赫씨는 아들 순도씨를 호주에서 대학을 마치자마자 귀국시켜 2001년 3월에 입대하게 했다.
  
   아들 순도씨는 東티모르 파병을 자원하여 179일을 보낸 뒤 지난 5월 전역하자마자 「남태평양을 건넌 상록수의 혼」이라는 책을 펴냈다. 영화를 전공한 순도씨는 대한해협 海戰을 영화로 제작하기 위해 현재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權主赫씨의 책 「바다여, 그 말하라!」는 앞으로 딸 순혜씨가 英譯하여 해외에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영웅이 없는 시대, 대한해협 海戰의 영웅들이 5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부각되고 있다. ●
  
  
[ 2004-07-08, 00:5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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