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地名 이야기①/筆洞(필동)
‘붓골’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筆洞이라고 와전한 데서 유래되었다. 地名에 ‘筆’이 있어서인지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많은 문장가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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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 한옥마을
南酒北餠(남주북병)이라는 말이 있다. 옛 서울의 남쪽 지역에서는 술을 잘 빚고 북쪽 지역에서는 떡을 잘 만들었음을 이르는 말이다. 옛 서울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남·북을 나눴었는데, 筆洞이 옛 서울의 남쪽이다. 필동은 서울특별시 중구의 중남부에 위치한 동이다. 동명은 이 마을에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획을 동·서·남·북·중의 방위로 구분하여 설치한 관아 중 하나인 南部의 부청이 있어 部洞·붓골이라고 했는데, ‘붓골’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筆洞이라고 와전한 데서 유래되었다.
  
  地名에 ‘筆’이 있어서인지 조선시대에 이곳에서 많은 문장가가 나왔다.
  필동1가에는 인조 때 척화신(斥和臣)이며 牛溪(우계)의 문인인 八松(팔송) 尹煌(윤황)이 살았다. 그의 집안 마당에 있었던 우물 ‘八松亭(팔송정)’이 유명했었다. 이조참판까지 지낸 문인인 그는 붓글씨를 잘 쓰기로 이름이 났었다. 인조 때 학자 美村(미촌) 尹宣擧(윤선거) 또한 필동1가에 살았었다.
  
  필동2가에는 영조 때 문신 좌의정 趙文命(조문명)이 집 근처에 짓고 즐겨 찾던 歸鹿亭(귀록정) 터가 있다. 또 남산 기슭 필동2가에는 순조때 趙萬永(조만영)이 文友(문우)들과 교유하기 위해 세운 老人亭(노인정)이 있다.
  
  필동3가의 동국대학교 내에 東岳詩壇(동악시단)이라는 시단이 있다. 시인 李安訥(이안눌)의 호가 東岳이었다. 이곳은 선조·인조 때 당대의 문장가들이 모이는 명소였다. 이석의 《東江遺稿:동강유고》 東園記(동원기)에 “동악선생은 날마다 당대 명류인 이호민·권필·홍서봉 등과 어울려 단에 모였다가 누에 오르기도 하니 사람들이 신선 같다며 부러워하였다. 글 외우고 시 읊는 소리가 마냥 따뜻하고 부드럽게 어울렸기에 그 다락을 가리켜 時樓(시루)라 하고 그 단을 일컬어 시단이라 하였다”고 나온다. 동국대학교 안에는 숭정전(崇政殿서울유형문화재 20)도 있다.
  
  필동은 남학동, 주자동, 예장동과 거리가 가깝다. 필동의 서쪽에 있는 南學洞(남학동)은 조선 초기에 四部學堂(사부학당)의 하나인 남부학당, 즉 남학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조금 더 서쪽에 위치한 鑄字洞(주자동)은 조선 시대에 활자를 만들던 관아인 주자소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필동의 남서쪽에 있는 藝場洞(예장동)은 조선 시대 5군영의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던 훈련장인 예장이 이곳에 있던 데서 유래한다. 武藝場(무예장)을 줄여서 예장이라고 한 것이다.
  
  흔히 먹골이라고 알고 있는 먹절골은 중구 묵정동·충무로4가·충무로5가·필동2가·필동3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필동2가 3번지 일대에 승려들이 먹을 만들어 시전에 내다 팔아 먹절 혹은 墨寺라 부르던 절이 있던데 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먹적골·먹제골·묵절골이라고도 하였으며, 한자명으로 묵사동 줄여서 묵동이라고 하였다.
  
  필동에는 남산골한옥마을, 서울남산국악당 등 한국의 전통생활·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
  
  
  金玧珽(조갑제닷컴 인턴기자)
  
  
[ 2012-05-14, 09:3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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