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걸린 시부모를 10년간 수발한 金英蘭 대법관

이은영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스크랩하기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닥쳤으니까 했고, 이왕하려면 잘하자고 생각했죠. 효도는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이에요. 두 분이 하늘나라에서 도와주셔서 제가 대법관이 됐나 봐요』
  
  이 은 영 月刊朝鮮 객원기자
  
  

  
  『내 직업은 둘, 판사와 주부』
  
  지난 8월28일 오후 2시, 경기도 분당 양지마을에 있는 金英蘭(김영란·48) 대법관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녀가 대법관으로 업무를 시작한 지 꼭 3일째 되는 날이다. 중간에서 매니저 역할을 해준 夫君(부군) 姜智遠(강지원·55) 변호사는 아침 일찍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집사람이 판사생활하면서 언론을 상대한 적이 없어서 어쩔줄을 몰라한다』며 『제발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초인종을 한 번 눌렀다.
  
  『네, 나가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기다렸다는 듯 경쾌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하얀 원피스 차림의 金英蘭 대법관이 현관문을 열고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방송에서 봤던 것처럼 단아한 모습이다.
  
  거실에는 金英蘭·姜智遠 부부가 다정스럽게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여러 개 걸려 있었다.
  
  대법관 지명 직후에 사진기자들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어간 뒤 기념으로 하나씩 패널을 만들어 전해준 것이라고 한다. 가족사진 속의 딸들은 어렸다. 10년은 더 된 것처럼 보였다.
  
  거실의 사진을 둘러보는 사이 金대법관이 커피를 끓여 내왔다.
  
  아무리 집에서는 주부라고 하지만, 한국의 사법부를 대표하는 대법관이 아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金대법관은 『그냥 앉아 있어요. 늘 하던 일인데요, 뭘…』 하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金英蘭 대법관의 이력은 보통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명문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의 길을 걸어왔다. 여성이 사법시험에 붙었다는 사실이 뉴스가 되던 시절이었다. 판사생활을 하면서 시부모를 모셨고, 차례로 몸져 누운 시부모의 수발을 10년 가까이 했다.
  
  청소년위원장을 지낸 남편 姜智遠 변호사를 내조하고, 두 딸을 대안학교에 보내 개성을 살리게 했다. 새벽까지 판결문을 쓰면서 가사를 직접 챙겼다.
  
  능력 있는 판사, 孝婦(효부)에 현숙한 아내, 어머니, 주부….
  
  가냘픈 몸매의 이 여성은 「1인 4역」을 어떻게 감당해 왔을까?
  
  『제가 하나라도 못 해내면 어떻게 되겠어요. 해내야죠. 저는 내 직업이 둘이라고 생각했어요. 판사와 주부. 애들이 어릴 땐 너무 힘들었어요. 일주일에 서너 번은 보따리(재판 서류)를 싸들고 들어왔어요. 고등법원에서는 주말에 출근을 했어요. 애들 재워 놓고 식탁에 앉아서 판결문을 썼어요. 시어머니께서 새벽까지 판결문을 쓰는 저를 보고 「내가 대신 써 줄 수도 없고…」라며 안타까워 하셨죠』
  
  ―시어머니께서 일하는 며느리를 잘 이해했나 봐요.
  
  『경성사범을 나와서 일제시대에 교사를 하신 분이셔서, 똑똑한 며느리에 대한 편견이 없으셨어요. 제가 보따리를 싸서 들어오는 날은 「아범이 金판사를 도와야 한다」고 얘기를 하셨어요. 시어머님은 통이 큰 여장부셨어요』
  
  ―그렇더라도 남편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판사와 주부」 두 직업을 병행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제가 판결문을 쓰면 두 딸을 데리고 놀이터에 가서 밤늦게까지, 어떨 때는 자정 넘어까지 데리고 놀다가 들어왔어요. 아이들 보는 건 남편 몫이었어요. 남편은 제가 해주는 걸 아무거나 잘 먹어요. 반찬 투정을 한 적이 없어요. 시어머니께서 훈련을 잘 시켜 놓으신 거죠. 제가 설거지하면 집안 청소하고…』
  
  ―姜변호사께서 검사 출신인데다 線이 굵어 보이던데.
  
  『남편이 속옷과 옷을 혼자 챙겨서 입어요. 저는 남편 옷을 받아서 옷장에 건 적이 없어요. 남편이 옷장의 수납장 정리를 저보다 더 잘해요. 한번은 후배 판사가 「다른 아내들은 남편 넥타이를 직접 골라 준다」고 해서, 제가 「정말 아내들이 넥타이를 골라 줘요?」하고 물었어요. 그때까지 전 그런 사실을 몰랐거든요』
  
  
  『여자도 신문을 읽느냐』던 남편과의 鬪爭
  
  ―姜변호사가 처음부터 그렇게 아내를 잘 도왔나요.
  
  『아니오. 처음엔 전형적인 한국 남자였어요(웃음). 살면서 아주 많이 변했어요. 모습도 많이 변했고요. 처음 만났을 때는 검은색 뿔테 안경에 검은 양복, 흰 와이셔츠를 입은 전형적인 검사 스타일이었어요. 스스로 「그때 내가 조폭 같았다」고 농담을 해요. 여성에 대한 편견은 없었지만, 「여자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해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신혼 때 내가 신문을 열심히 읽으니까, 「여자도 신문을 읽느냐」고 하더라고요』
  
  ―남편을 변화시키느라 상당히 투쟁을 하셨겠군요.
  
  『그럼요. 서로 자기 스타일대로 상대를 만들려고 하고, 서로 그 스타일로는 안 변하겠다고 하고… 많이 싸웠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니까,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놓고 싸우고, 어떨 때는 아파트 놀이터에 가서 싸웠어요. 남편은 강점이 있어요. 편견이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남자예요. 스스로 생각해서 틀렸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생각과 행동을 바꿉니다. 제가 오히려 못 고치는 편이죠』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누가 먼저 「항복」을 하나요.
  
  『우리 부부는 서로 먼저「내가 졌다」고 말해요』
  
  ―姜변호사가 「이제 판사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의 아내처럼 內助(내조) 좀 하라」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 점에서는 그 또래 남자들하고 달랐어요. 시어머니께서 일제시대에 벌써 직장생활을 하셨잖아요. 남편이 자랄 때 시어머니가 집에 계시는 날이 별로 없었다고 해요. 시어머니께서 「여자도 배웠으면, 밖에 나가서 사회활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남편에게 확실하게 심어 주신 것 같아요』
  
  ―직장일과 가사를 동시에 잘 꾸려 가는 여성을 「슈퍼 우먼」이라고들 합니다. 金대법관은 「슈퍼 원더 우먼」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닥쳤으니까 한 거죠. 여성 전문인력은 쏟아져 나오는데 일하는 여성들의 육아를 도와줄 여건이 너무 부족해요. 사회제도적 보완이 시급합니다. 직장 일하는 여성의 일을 덜어 주지 않으면, 사회도 손해고, 남편들도 손해예요. 요즈음 TV 드라마를 보면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아서 화가 나요』
  
  金대법관은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서울지검에 검사 試補(시보)로 갔다가, 검사로 일하고 있던 남편 姜智遠을 만났다. 두 사람은 1년 정도 연애를 하고, 1982년 봄에 결혼했다. 「판사와 검사의 결혼」이라고 해서 TV 뉴스에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이 방송됐다고 한다.
  
  청소년보호위원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인 남편 姜智遠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옆방에 검사 시보로 온 아내가 너무 선하게 보여 살살 꼬셨다』고 얘기했다.
  
  ―남편 姜智遠 검사가 어떻게 살살 꼬셨습니까.
  
  『까마득한 선배가 밥을 사주겠다고 불러내서 나갔죠. 나만 불러낸 게 아니고, 검찰에서 일하는 다른 시보들을 포함해서 서너 명을 불러냈어요. 너무 자주 불러내서 「이 남자가 내게 관심이 있나」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는 혼자만 불러내더군요(웃음)』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프러포즈
  
  ―姜智遠 검사를 알고 있었습니까.
  
  『남편이 사법시험에 수석합격을 했잖아요. 考試 잡지에 남편의 합격기와 모범답안 풀이가 연재됐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 남편이 풀어 놓은 답안을 보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래서 처음 만났을 때 낯설지 않았어요』
  
  ―연애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셨나요.
  
  『제가 얘기할 틈을 안 줬어요. 개그맨처럼 저를 쉴 새 없이 웃겼어요. 어느 날 지나가듯이 「내가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해요. 알고 보니 그게 프러포즈였어요. 그냥 멍했어요』
  
  ―만나면서 서로 잘 통했습니까.
  
  『우리 시대 사람들은 연애가 별로 재미 없었어요. 그렇게 만나다가 결혼을 하게 됐어요. 양쪽 집안 어른들이 다 공직에 계셨었고, 셋째 아들과 셋째 딸이 만나서인지 마음이 잘 맞았어요』
  
  金대법관은 1남4녀 가운데 셋째딸이다. 부친 金應守(김응수)씨는 농촌에서 자라서 야간대학에 진학해서 말 그대로 晝耕夜讀(주경야독)을 했다. 경남도청 농수산부 등에서 공직생활을 했고, 수산청 국장을 마지막으로 퇴직했다. 최근까지 원양어업 회사의 회장으로 일했다. 어머니 金次連(김차연)씨는 주부다.
  
  金대법관의 시아버지 姜大爀(강대혁·1996년 사망)씨는 보성전문을 졸업했고, 나주군수를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퇴직했다. 시어머니 李孝任(이효임·2004년 사망)씨는 경성사범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金대법관 부부는 1993년 이 아파트로 이사했다. 1989년에 분양을 받았고, 3년을 기다려 입주했다. 60평 복층 아파트다. 1층은 시부모에게 내드리고, 2층을 金대법관 부부가 썼다. 새 집에 이사 온 설렘도 잠시, 시부모 병구완이 시작됐다.
  
  이사하고 나서 시아버지의 「노인성 치매」가 심해졌다.
  
  남편 姜智遠 변호사가 어머니를 도와서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 냈다. 밤에는 남편이 1층으로 내려가 시아버지와 함께 잤다. 그무렵 시어머니도 몸이 아팠기 때문이다.
  
  시아버지 병수발이 6년간 계속됐고, 시아버지가 돌아간 몇 년 후에 시어머니도 「노인성 치매」에 걸렸다. 심할 때는 아들과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어머니는 지난 3월에 돌아가셨다.
  
  金대법관 주위의 법조인들은 『金英蘭 판사가 10년 동안 시어른 병수발을 했다는 걸 이번에 언론보도를 보고 알았다』며 『金판사가 잠을 많이 못 자서인지 충혈된 눈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셋째 며느리가 시부모를 모시게 된 사연이 있나요.
  
  『제가 결혼할 무렵에 두 분 시아주버니가 외국에 나가 계셨어요. 1년 정도만 모시면 형님들이 들어와서 부모님을 모시려고 했죠. 그런데 두 분 다 못 들어오셨고, 함께 살면서 시부모님과 정이 들었고, 그게 20년이 됐어요』
  
  
  효도는 자기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죠. 10년 가까이 병수발하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어른이 집에 누워 계시니 일요일에도 한 사람은 꼭 집에 있어야 했어요. 지난 10년 동안 가족 나들이를 별로 못 했어요. 3년 전 큰딸이 미국에 가기 전에 동서에게 시어머니를 맡겨 놓고,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간 게 기억나요.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이젠 좀 자유로워져서 남편하고 애들하고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제가 대법관이 됐으니…』
  
  ―보통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요.
  
  『닥쳤으니까 했고, 이왕 하려면 잘하자는 생각이었죠. 그리고 제가 안 하면 어떡해요. 해야 되잖아요. 좀 힘들어도 하고 나면 마음이 좋잖아요. 효도라는 게 부모를 잘 모시는 일이지만, 결국 자기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아요』
  
  ―간병하는 사람을 두지 않았습니까.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청소하고, 아이들 밥 챙겨 주는 일을 도와줬어요. 주말에는 일하는 아주머니가 안 오셔서, 힘든 빨래는 모아 놓았다가 주말에 제가 했어요. 병수발에는 가족이 모두 동원됐어요. 1층 안방에 병원용 침대가 있었어요. 아버님이 6년 동안 사용하셨고, 어머님이 그 침대를 사용하셨어요. 어머님이 돌아셨지만 그 침대가 아직 있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두 분이 하늘에서 도와주셔서 제가 대법관이 됐다고 생각해요』
  
  남편 姜智遠 변호사는 『아내가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셔 준 게 너무나 고맙다』며 『아내가 무던한 성격이어서 어른들을 모실 수 있었다』고 했다. 姜변호사의 얘기다.
  
  『金판사는 아무리 빨래가 많아도, 「왜 이렇게 빨래가 많지」 하고 걱정을 하지 않아요. 아이들이 잠을 자지 않아 판결문을 못 써도, 신경질을 내지 않아요. 아이들 다 재우고 일을 해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군말 없이 묵묵히 일을 합니다』
  
  
  오누이 같은 부부
  
  金대법관과는 이날이 첫 대면이었지만,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남편 姜智遠 변호사와는 여러 번 만났다. 姜변호사는 자신이 대법관이 된 것보다 더 즐거워했다. 두 사람은 오누이 같은 부부였다.
  
  金대법관은 지난 8월29일에 여성 잡지사 기자들과 「그룹 인터뷰」를 했다. 이 자리에 남편 姜변호사가 참석을 했다.
  
  姜변호사는 거실 소파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자신이 대법관이 된 것처럼 싱글벙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金대법관은 부엌을 들락거리며 물과 주스, 과자를 내왔다. 기자들이 『제발 좀 앉으세요』라고 하자, 金대법관은 피아노 의자에 걸터 앉았다.
  
  姜변호사는 『아 참, 오늘은 당신이 주인공이지』하며, 아내에게 소파 중앙의 자리를 내줬다.
  
  姜변호사는 『오늘 나한테 말 시키지 마세요.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고 했지만, 金대법관이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자신의 대답을 내놓았다. 金대법관은 代辯(대변)에 나선 남편의 모습을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까」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姜변호사가 『여보, 내 말이 맞지』하고 물으면, 金대법관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兩性平等(양성평등)」이라는 단순한 개념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반 협력자였다.
  
  1층 거실에는 10년이 넘어 보이는 낡은 피아노와 응접세트가 놓여 있었다.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蘭(난) 화분이 50여 개 있었다. 식탁과 텔레비전 옆에 꽃바구니들이 놓여 있었다.
  
  
  식탁에서 판결문 써
  
  ―蘭을 키우시나 보죠. 난을 키우는 게 무척 어렵다고 하던데. 직장 다니시면서 어떻게 난을 키우세요.
  
  『난초와 꽃나무 키우는 걸 제가 좋아해요. 난은 키우기 어려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물을 주면 돼요. 난초는 관심을 끊으면 안 돼요. 귀찮다고 생각하면 못 하죠』
  
  「주부 金英蘭」은 집을 어떻게 가꾸는지 궁금했다.
  
  『집 구경 좀 할 수 있을까요』하고 묻자, 金대법관은 『아유, 서재는 정리가 안 됐는데』라며, 2층 서재로 먼저 기자를 안내했다. 서재의 네 벽 면에는 온통 법률서적이었다. 서재에는 책상이 하나밖에 없었다. 金대법관은 『이 책상은 애들 아빠가 쓴다』고 했다.
  
  ―金대법관님 책상은 어디 있습니까.
  
  『저는 1층 식당에 있는 식탁을 써요』
  
  ―아니 식탁에서 판결문을 쓰신다는 말입니까.
  
  『네, 애들하고 놀면서 판결문을 쓰다 보니 식탁을 많이 이용하게 됐어요. 그리고 주부가 식당에 있어야 아이들이 뭐 해달라고 할 때 금방금방 해줄 수 있잖아요. 저는 식탁이 편하더라고요』
  
  ―金대법관께서 판결을 내린 재판의 원고·피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한 판결문이 식탁에서 쓰였다는 걸 알면 당황스럽지 않을까요.
  
  『판결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삶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더 많아요. 수많은 거짓 사이에서 실체적 진실을 꿰뚫어야 하는데, 여성의 감수성은 엄청난 힘이 돼요. 식탁에서 쓴 판결문이 더 실체적 진실에 접근했을 거라고 믿어요』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金대법관이 책상으로 쓰는 식탁은 대여섯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평범한 테이블이었다. 진한 고동색 식탁은 여기저기 흠집이 많이 나 있었다. 金대법관이 아이들과 놀면서 책을 읽고, 판결문을 썼기 때문일까?
  
  식탁 위에는 「老子(노자)」와 鄭玄宗의 시집 「견딜 수 없네」 등이 쌓여 있었다.
  
  ―책을 많이 읽으시나봐요.
  
  『남편이 「독서 중독」이라고 놀려요. 소파, 침실, 식탁에 책을 늘어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요. 책보다는 생활 속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 아닐까요?』
  
  ―책을 많이 읽는 게 재판에 도움이 되나요.
  
  『나를 위해서 읽는 거죠. 재판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鄭玄宗의 시집을 집어 들었다. 마음에 드는 詩를 표시한 듯 책갈피 사이에 노란색·파란색·초록색 색종이가 끼어 있었다.
  
  『가슴에 와 닿는 詩가 있는데 하나 보여드릴까요』
  
  詩의 제목은 「사람은 언제 아름다운가」, 딱 한 줄이다.
  
  <자기를 벗어날 때처럼 사람이 아름다운 때가 없다>
  
  金대법관은 『이 詩보다 더 내 마음에 딱 드는 詩가 있다』며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구월도 시월도/견딜 수 없네/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중략) 모든 흔적은 傷痕이니/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아프고 아픈 것들이여(「견딜 수 없네」 中에서)>
  
  ―어떤 점에서 이 詩들이 마음에 드세요.
  
  『아주 짧게 내 마음을 그대로 담아 놓았어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 닿아요』
  
  ―살아오면서 견딜 수 없는, 벗어나고 싶었던 일이 많으셨나 봐요.
  
  『벗어나고 싶죠. 하지만 그러기가 어렵죠. 그래서 이 詩를 좋아해요. 벗어난다는 것이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해요. 다시 태어나면 키도 크고 옷도 잘 입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퇴직하면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가서 조용하게 살고 싶어요. 자연 속에서 차를 마시면서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싶어요. 다시 官(관)에 오기는 싫어요. 전 정말 벼슬아치 체질이 아닌 것 같아요. 주위 사람들도 저더러 「참 용하다」고 해요』
  
  
  슈만과 브람스를 좋아해
  
  ―음악을 좋아하세요.
  
  『네, 무척 좋아하죠.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음악을 틀어 놓고 일을 해요. 판사 사무실에도 클래식 CD가 많아요』
  
  金대법관의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무얼까?
  
  거실의 CD꽂이에는 클래식 CD가 200여 장 있었다. CD 플레이어는 50만원 정도의 國産(국산)이었다.
  
  ―누구 곡을 좋아하세요.
  
  『요즘은 슈만과 브람스곡이 참 좋아요. 전에는 바흐와 베토벤을 좋아했어요』
  
  ―예전에는 질서 있는 고전파 음악을 좋아하셨네요. 브람스의 음악은 바흐보다 자유로운 반면, 슈만의 작품은 명상적이라는 평을 듣죠.
  
  『전 재즈는 못 듣겠어요. 너무 즉흥적이어서요. 제 머리는 질서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일 좋아하는 곡은 어떤 거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다 좋아해요. 비 오는 날 혼자 들어요. 브람스 곡은 참 깊죠. 검은 숲이 연상되고,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듯하죠. 저는 기악곡을 좋아하는데 남편은 성악곡을 좋아해요. 남편 덕에 오페라를 종종 보러 갔어요. 바그너도 호기심에 들어봤는데, 영 아니에요. 「히틀러가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고, 모차르트를 좋아했다면 달랐을 것이다」는 말이 있는데 공감해요』
  
  ―바그너의 곡은 調(조)를 탈피하고 半音階(반음계)를 사용해서 다른 음악가들의 노래에 비교하면 「헤비 메탈적」이라는 얘기를 듣죠.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은 아주 우울하죠. 비 오는 날 그 노래를 들으면 더 우울해지지 않나요.
  
  『바흐의 우울한 노래를 들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저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던데요』
  
  
  딸들의 반응, 『이제 엄마도 아빠처럼 됐군』
  
  ―노래를 잘 부르세요.
  
  『모임에 가서 노래를 하라고 하면 저는 詩를 한 수 낭송해요. 제가 노래 안 하는 걸 다들 이해해요. 정태춘, 박은옥, 양희은의 노래를 콧노래로 따라 부를 정도예요』
  
  그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金대법관은 잰걸음으로 가서 전화를 받아 들었다.
  
  전화기를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20년쯤 돼 보이는 버튼식 유선 전화기였다. 金대법관은 『이 집에 이사 오기 훨씬 전부터 쓰던 것』이라고 했다. 金대법관이 부엌을 보여 줬다.
  
  냉장고는 문이 하나 달린 구형이었다. 전기밥솥은 20년 이상 사용한 듯 보였다. 다른 식기와 가구, 家電제품들은 연륜이 더 깊어 보였다. 복층 60평이라는 아파트가 좁아 보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가구며 家電제품이 색이 바래 칙칙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제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들이에요. 너무 잘 해놓고 살려고 하면 끝이 없어요. 아픈 어른을 두 분이나 모시면서, 애들 키우고 정말 정신이 없어서 최소한도로 기본만 해놓고 살았어요. 家電제품은 고장 나서 더 이상 쓰지 못할 때까지 써야 되지 않아요? 요즘은 버리는 것도 큰 일이잖아요. 얼마 전에 20년 넘게 쓴 다리미가 고장이 나서 새것으로 바꿨어요』
  
  金英蘭·姜智遠 부부의 두 딸은 대안학교를 나왔다.
  
  큰딸 민형(21)은 전남 담양의 대안학교인 한빛고등학교를 나와서 미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고, 둘째 딸 선형(17)은 경기 성남 분당의 대안학교 「이우학교」에 다닌다. 姜智遠 변호사는 「이우학교」 설립에 관여하기도 했다.
  
  ―「경기-서울」 나온 부모들이 딸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텐데.
  
  『큰딸이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안 가겠다」고 선언을 했어요. 저로서는 정말 당황하고 불안했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매일 똑같은 영어·수학만 공부하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모르겠다. 학교 다니기 싫다」고 해요. 저도 대안학교가 뭔지 잘 몰랐어요. 학교공부를 따라가지 못하는 탈선학생들이 가는 곳으로 생각했어요. 가보니 아이들의 개성을 살리고, 창의성을 살리는 교육을 하고 있더라구요. 전학을 시켰더니 딸이 무척 행복해했어요』
  
  ―姜智遠 변호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상의를 했죠. 남편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당신과 나는 정리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우린 달달 외워서 찍기를 잘했다. 그래서 고시에 합격했다. 우리가 뭐 대단하냐. 우리 애들을 믿자」고』
  
  ―그래서 둘째도 대안학교에 보냈나요.
  
  『큰애가 성격이 무척 밝아지고 좋아하니까, 동생도 「엄마, 나도 대안학교에 갈래」라고 해요. 목공예, 옷 만들기 시간이 있는데, 그렇게 재미있대요. 제가 대통령께 임명장을 받으러 간다니까 「내가 만든 옷을 입고 가면 안 될까」 하더군요』
  
  ―딸들은 엄마가 대법관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드디어 이제 엄마도 아빠처럼 되겠군」이라고 해요(웃음). 둘째가 오늘, 제가 月刊朝鮮하고 인터뷰한다는 걸 알고 아침부터 나가 버렸어요. 「절대 우리들 얘기하지 마」라고 못을 박았어요. 약속을 지켜야 되겠죠』
  
  
  수도원 절간 같은 대법원 생활
  
  대한민국의 대법관은 崔鐘泳(최종영) 대법원장을 포함해 14명이다. 임기는 6년으로 연임이 가능하다. 金英蘭 판사는 현직 대법관 중에서 司試 기수가 가장 낮은 金龍潭 대법관보다 司試 기수에서 9년 차이가 난다.
  
  한 해에 대법원에 올라오는 사건은 2만여 건. 14명의 대법관이 한 달에 120건씩의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 신참 대법관의 대법원 생활은 어떨까?
  
  『대법관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보다 더 단조로운 생활을 해요. 수도원이나 절간과 비슷하죠. 출근하자마자 재판연구관들의 연구보고서를 읽어야 합니다. 낮 12시30분쯤에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기록을 읽어요. 퇴근할 때 기록을 싸들고 집에 갑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시절보다 일이 더 많습니까.
  
  『高法 부장판사의 업무를 다들 「살인적인 격무」라고 해요. 대법관 일은 살인적인 격무의 두 배쯤 되는 것 같아요. 아직 본격적인 업무 사이클이 형성되지 않아 하루에 5~6건의 기록을 처리합니다』
  
  金대법관은 지난 8월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임명동의안이 통과돼 사법사상 첫 여성대법관이 됐다. 金대법관은 청문회에서 중요 현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했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金대법관이 지나치게 진보적이지 않느냐는 우려를 표명했죠.
  
  『법관을 보수다, 진보다 규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에요. 지난 20년간 판사로, 주부로 살아오면서 그때그때 닥치는 문제를 해결하고 살았어요. 보수냐, 진보냐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어요』
  
  ―좌우명이랄까, 소신이랄까, 그런 건 있을 것 아닙니까.
  
  『제 좌우명은 「생긴 대로 살자」예요. 농담처럼 들리시겠지만, 생기지 않은 대로 살려니까 힘이 들더라고요』
  
  
  『보안법 논쟁은 무얼 「처벌할 것이냐」가 核心』
  
  ―헌법재판소가 국가보안법의 合憲性(합헌성), 存置(존치)의 필요성을 인정했습니다. 집권여당은 힘으로라도 보안법을 폐지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대법관님의 견해는 어떤 겁니까.
  
  『제 생각은 이래요. 먼저 우리가 처벌하려는 행위가 무엇이고, 처벌하지 않으려는 행위가 무엇인가를 먼저 봐야 합니다. 핵심은 A라는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 처벌을 할 거냐 말 거냐예요. 그게 형법으로 처벌하든, 국보법으로 처벌하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이죠. 어디까지 처벌할 것이냐의 문제죠. 정치권이 형식을 가지고 싸우느라, 내용은 시작도 못 하고 있잖아요』
  
  ―한반도 전역의 金日成주의화를 규정한 북한 헌법과 형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북한은 사회주의에서 완전히 이탈했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데 반해 북한은 주체사상을 통해 개인숭배를 하고 있잖아요』
  
  ―대법관에 취임하시면서 「여성의 감수성으로 소수자를 보호하겠다」고 했는데, 여성의 감수성과 소수자적 감성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나요.
  
  『제 친구 중에 왼손잡이가 있었어요. 시험을 보는데 왼손잡이니까 답안지를 왼쪽에 두게 되는데 마치 커닝하는 것처럼 보여요. 오해를 받아서 엄청나게 야단 맞았어요. 부모는 아이가 왼손잡이라고 해서 강압적으로 고치려고 들 수 없어요. 애가 비뚤어질 수도 있거든요. 이런 것을 이해하는 것이 소수자적 감성 중 하나죠』
  
  ―法 해석에 인간의 감수성이 작용할 여지가 많이 있나요.
  
  『그럼요. 지금까지 남성주의적 감수성에 따라 법이 해석되고 결정된 사례가 많아요. 최근 부부 간에도 「강제 추행 치상죄」를 인정하는 추세입니다. 전에는 인정할 수 없었잖아요.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性추행하나. 부부 간의 일인데…」라는 것이 남성주의적 시각이죠. 「부부 사이의 性관계에서도 아내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게 여성주의적 시각이죠』
  
  金대법관은 『우리 사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加害도 많다』며 자신의 경험을 얘기했다.
  
  『저는 경기여고를 나왔는데, 당시 한 반에서 절반 이상이 이화여대를 갔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가 「경기여고 출신들이 보기 싫다」고 해요.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몰려다닌다」는 거예요. 다수가 합의한 것이 法이지만, 한 번쯤 「혹시 다수가 합의한 법이 누구를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게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이에요』
  
  
  非논리적인 진실, 논리적인 거짓
  
  ―여성이기 때문에 판결을 내릴 때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까.
  
  『많죠. 특히 이혼 소송을 맡았을 때 여자들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살아온 역정을 짐작할 수 있죠. 범죄는 생활 속에서 생겨요. 생활을 이해하는 여성 법관들이 남성 법관들보다 사건의 본질을 더 쉽게 꿰뚫어 볼 수 있죠. 남자 판사들이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경우에도, 저는 이해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아요. 세상에는 「非논리적인 진실」, 「논리적인 거짓」이 분명 있습니다』
  
  金대법관은 1999년 1월, 집중호우 때 침수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市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市가 고지대에 택지조성 공사를 하면서 적절한 배수처리시설을 하지 아니한 잘못이 있다」고 하여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2002년 9월에는, 「민족민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들이 국가정보원의 접견교통권 침해를 이유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변호사가 국가정보원 직원에게 피고인에 대한 접견을 요구할 경우 정당한 이유 없이 이를 거부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2003년 5월에는 학교內 집단 따돌림 사건과 관련한 손해배상청구 사건에서 「對人기피증과 같은 성격적 요인을 이유로 피해 학생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판시해 학교內 「왕따」 처벌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金대법관은 재판을 진행하면서,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저는 재판기록을 꼼꼼히 읽어요. 그래야 재판정에서 심층적인 질문을 할 수 있거든요. 재판관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해요. 서류를 읽고,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흑백을 가리는 게 재판관이잖아요. 한번은 법정에서 너무 화가 나서 「나는 神이 아닙니다. 점쟁이도 아닙니다. 두 사람은 진실을 알 것 아닙니까」라고 한 적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논리적인 거짓」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있어요』
  
  ―「논리적인 거짓」이라니요.
  
  『진실이 非합리적이고 非논리적일 수 있어요. 반면에 가짜가 논리적일 때도 있고요. 재판을 해보면 진실을 가장한 거짓이 많아요. 소송에 능한 사람이 증거를 들이밀면 진실이 가려질 수도 있어요. 재판에서는 증거가 가장 중요하니까요』
  
  ―「형사재판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80% 이상이라는 조사가 최근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有錢無罪(유전무죄)에 이어 요즈음은 有權無罪(유권무죄)라는 조어가 등장했습니다.
  『형사사건 피고인들의 상당수가 변호사 선임료가 없어서, 변호사 없이 재판을 하는 경우가 있어요』
  
  ―국선 변호사가 있지 않습니까.
  
  『선임하는 방법을 몰라서, 혼자 법정에서 자기 변호를 하기도 해요. 그런 사람들은 「좋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해서, 내가 이렇게 당했나」 의심할 수 있겠죠. 모든 형사 피의자들이 국선 변호사를 쉽게 선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민사소송도 국선 변호사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재판에서 억울하게 당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죠. 변호사들이 지방 개업을 기피하는 것도 문제예요』
  
  
  강간과 윤간을 엄벌
  
  ―특별히 엄하게 처벌하는 범죄가 있었나요.
  
  『청소년들이 저지른 輪姦(윤간)은 엄벌했습니다. 대개 합의가 안 되면 실형입니다. 합의가 되면 소년원에 보내고, 간혹 석방하기도 합니다. 저는 합의를 하더라도, 예외 없이 소년원으로 송치했어요. 변호사 측에서 「여자가 세상물정을 너무 모른다」고 막말을 하기도 해요. 저는 「인륜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른 아이를 풀어주면, 이 아이들이 앞으로도 세상을 우습게 보게 된다」고 말했어요. 중한 범죄는 반드시 죄값을 치르도록 해야 합니다』
  
  ―국회 청문회에서 사형제도 폐지 입장을 밝히셨죠.
  
  『사형의 목적이 뭘까요? 흉악한 범죄자로부터 우리 사회를 보호하자는 거예요. 「사회 방위」라고도 해요. 사형을 안 시키고도 사회방위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되잖아요. 사형을 시키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 두는 게 범죄자에게 더 괴로울 거예요. 한국에서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지 6년이 넘었어요. 절대로 감형할 수 없는 刑에 처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흉악범이 될 때까지 우리 사회는 무얼 했느냐, 그 사람을 사형시킴으로써 우리의 책임이 면제되느냐, 그런 점도 생각해 봐야죠』
  
  ―호주제에 대해서는 폐지 입장을 분명하게 하셨죠.
  
  『생물학적으로 봐도 유전을 결정하는 DNA 미토콘드리아는 母系(모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자만이 家系를 이어가는 호주제는 폐지하는 게 옳아요. 호주제는 껍데기밖에 안 남았어요. 그 호주제 때문에 피해를 입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물론 국민의 法감정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요즘은 딸만 낳아 키우는 아버지가 참 많아요. 딸만 둔 아버지들은 호주제 폐지에 대해 거부감이 없더라고요』
  
  ―「아들이 죽고 며느리가 호주가 됐다. 만일 이 여성이 개가를 하면 재산분배는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분이 있어요.
  
  『호주제와 재산분배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이혼했을 때 재산분할은 각자의 기여도에 따라 이뤄집니다』
  
  ―가장 관심이 있는 분야는 어느 쪽입니까.
  
  『노인 문제예요. 자녀문제는 많이 이야기하는데 노인문제는 말하지 않더라고요. 노인문제는 참 딜레마에요. 가족들이 어떻게 집안의 노인을 감당해 나갈 것인지… 제도적으로 어떻게 뒷받침할 건지. 언젠가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나 봐요.
  
  『가족노인을 모셔보니까 「가족의 사랑」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게 됐어요. 「실버 타운」 얘기도 하지만, 노인 분들에게는 가족과 함께 사는 환경이 제일 좋아요. 우리 아이들이 불편해할 때도 있었지만 대가족으로 자라니까 다른 집 애들과는 달라요』
  
  金대법관은 康錦實(강금실) 前 법무장관과 경기여고, 서울법대 동기다. 사법시험에는 金대법관이 2년 먼저 합격했다. 1983년의 경우 법조인 1670명 가운데 여성 법관은 12명뿐이었다. 20년 뒤인 2004년의 경우 전체 법관 2094명 가운데 여성 법관이 274명(14.6%)이다.
  
  ―康錦實 장관과 잘 아시겠네요.
  
  『그럼요. 정말 친했죠. 학교 다닐 때 책읽은 것, 성격이 전부 비슷했어요. 안 믿어지시죠. 康장관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전교 1, 2등을 한 수재였어요. 지금은 성격도 틀리고, 기질도 틀리고, 분야도 틀려졌어요. 살아온 삶이 달랐기 때문일 거예요.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비슷해요』
  
  
  대한민국이 배출할 수 있는 최선의 여성
  
  ―신문을 하루에 몇 가지 읽으시나요.
  
  『조선·동아·중앙일보를 다 봐요. 조선일보와 한겨레 신문을 읽고, 그 가운데 선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언론들이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요』
  
  지난 8월28일, 29일 이틀간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金대법관이 사는 양지마을 아파트 단지의 상가를 찾아봤다.
  
  『金英蘭 대법관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 혹시 아냐』고 물어봤더니. 대부분 『모른다』는 반응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미용실 원장은 이렇게 얘기했다.
  
  『새벽에 머리를 손질해야 한다고 찾아오셨는데, 너무 일러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날 텔레비전 청문회를 보고서, 그 분이 대법관님인 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 집에 단골로 오시기는 하는데 서너 달에 한 번씩 오세요. 저는 판사님인 줄도 몰랐어요』
  
  金대법관은 딸들과 상가에 장을 보러가고, 서점과 찜질방에 자주 가는 편이라고 했다. 金대법관은 『이웃 주민들한테 「학교 선생님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 만난 金英蘭은 조그마한 체구의 부드러운 여자였다. 이틀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기자 눈에 金英蘭은 큰 산처럼 비쳤다. 「대한민국이 배출할 수 있는 최고의 여성을, 우리가 대법관으로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金英蘭 대법관은 이런 얘기를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詩를 낭송하듯 나지막한 톤으로….
  
  『남들은 저에게 「1인 4역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느냐」고 해요. 하지만 저는 열심히 일하고 돌아갈 수 있는 가정이 있어서 행복했어요. 남편과 아이들, 시부모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 좋았어요. 운명처럼 만난 법조인의 길을 다하고 남편과 자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거기서 詩를 쓰고 싶어요. 어른들이 죽음을 「돌아가신다」라고 하잖아요.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인간은 결국 돌아가는 것 같아요. 가정으로 돌아가고, 흙으로 돌아가고…』
  
  그녀가 인생에 달관한 도인처럼 보였다.●
[ 2004-09-26, 14:4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 기사목록
  • 이메일보내기
  • 프린트하기
  •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맨위로

댓글 글쓰기 주의사항


맨위로월간조선  |  조선일보  |  통일일보  |  미래한국  |  올인코리아  |  뉴데일리  |  리버티헤럴드  |  뉴스파인더  |  이승만TV  |  장군의 소리  |  천영우TV
  개인정보취급방침
이메일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