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1] 盧武鉉의 이념과 정책 논리

金演光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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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2년5월호 실렸던 것이다
  
  ─그의 역사관·국가관·對北觀·통일관은 남북 무장대치
  상황에서 국가원수·국군통수권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가?
  
  ●『국가보안법 폐지합시다. 억울하게 당하고도 가위눌려서 살아온 사람들이 가슴펴고 사는 세상을 만듭시다』
  ●『재벌을 해체하고 총수·일족의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들에게 분배합시다』
  
  盧武鉉의 純愛譜
  
  『판사는 못 되더라도 인간답게 살자, 그래서 혼인신고했습니다』
  지난 4월5일 오후 大邱(대구) 컨벤션센터 앞,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대구 대회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盧武鉉(노무현·56) 후보는 자신의 「팬 클럽」인 노사모 회원들 앞에 섰다. 그는 左翼囚(좌익수)로 1971년 獄死(옥사)한 장인의 이야기를 꺼내며, 아내와 결혼하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은 요지로 얘기했다.
  『어머니하고 형이 「혼인신고라도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시험에 합격하고 아내하고 자식이 있는데 결혼 안 했다고 말하게 되면 쪽팔리잖아요. 그래서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고시합격하고 나서 사실 변호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판사 못 될까 봐 변호사가 되려고 한다고 해서 판사 임용을 신청했어요. 그래서 하기 싫은 판사를 8개월 하게 된 겁니다』
  300여 명의 회원들은 『무현 짱』, 『멋있다』를 연호했다.
  盧후보의 호적에 따르면, 그는 1973년 5월6일 출생한 장남 盧信傑(노신걸)씨의 출생신고를, 1975년 1월9일 혼인신고를 하면서 함께 했다. 그는 부인 權良淑(권양숙)씨와의 혼인신고를 3년 정도 미룬 것이다. 장남의 이름은 1979년 부산지법 밀양지원의 허가에 의해 盧建昊(노건호)로 개명됐다.
  환호하는 노사모 회원 앞에서 그는 李仁濟 후보 측이 제기했던, 장인의 思想(사상)문제가 깨끗이 해소됐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노사모」인지 「안 노사모」인지 홈페이지에 (장인이 좌익수였다는 사실을 알고도 결혼한 사실이) 「멋있다」는 글을 띄워 놓았어요. 그래서 (장인이 좌익수로 복역 중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결혼했다는) 얘기를 했어요. 앞으로 이 얘기를 계속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꾸 하자면 쑥스럽잖아요. 盧武鉉이는 건드리면 표가 나옵니다. 건드리지 마세요』
  李仁濟 후보 측의 思想 검증 공세에도 불구하고, 大邱에서 압승했다는 사실에 盧후보는 고무된 표정이었다. 李仁濟 후보가 시도한 대통령 후보자의 가족 思想 관련 문제제기는, 盧후보의 「純愛譜(순애보)」 소재로 변해 가고 있었다. 노사모 회원들은 『사모님』을 연호하면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라는 주문으로 『뽀뽀해』를 외쳤다.
  盧후보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외쳤다.
  『국가보안법 폐지합시다. 억울하게 당하고도 가위눌려서 살아온 사람들이 가슴펴고 사는 세상을 만듭시다』
  전날 밤(4월4일) MBC 「100분 토론」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와 관련, 자신이 보였던 조심스런 자세를 盧후보는 이 「現場(현장)」에서 거두어 들였다.
  100분 토론에서 盧후보는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로 알려진 자신의 보안법 관련 입장이 오해의 결과이며, 『(나는) 李仁濟 고문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100분 토론에서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간 問答(문답)이다.
  
  盧武鉉의 세 언어: 선동, 소신, 政策
  
  <盧武鉉:李仁濟 고문은 과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한 적이 없습니까.
  李仁濟:통일민주당 시절 黨의 입장을 대변해 국회 공청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통일민주당은 필요한 조항을 형법에 반영하고 보안법을 폐지하는 것이 당론이었습니다. 평민당은 새로운 대체입법을 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는 입장이었죠. 黨의 입장을 가지고 나가 얘기한 겁니다.
  盧:그렇죠. 이 법을 시급히 폐지해야 된다는 전제로 얘기하고, 당론에서 더 나가서 세계 모든 사회주의 국가와 동반공조의 관계로 개선하려면 형법 조항에 반영하고, 정치 형법에서 일반 형사법으로 전환하자고 1989년 12월 국회에서 발언했죠.
  李:그때 盧후보도 통일민주당 안 했습니까. 그건 당론이었습니다.
  盧:李고문도 그때 그와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후 왜 바뀌었습니까. 남북대치 관계가 악화되고, 안보위협이 강화되고, 북한의 남한 체제공격 위험이 가중됐습니까.
  李:형법으로 보완하고 그리고 폐지한다는 것이 당론이었습니다. 지금도 형법으로 완벽하게 보완하고, 완벽하게 대체입법하고 폐지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盧후보는 완전 철폐 아닙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盧:그거 아닙니다. 요건 밝히고… 지금 내가 얘기한 것은 李고문이 1989년 진술한 내용과 똑같은 주장을 내가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주장을 李고문이 하면 괜찮고, 내가 하면 문제가 있나요.
  李:모든 매체에 나온 각 진영 정책에 盧후보는 「국가보안법 」 개정에 대해 전면 폐지입니다. 대체입법이나 형법 보완 얘기가 나왔으면 문제가 안 됐습니다.
  盧:아닙니다. 李고문과 같이 앉아서 토론하면서 「필요한 부분은 보완하면 된다」고 얘기한 걸 놔두고 뭘 적어 와서 얘기하는 겁니까.
  李:盧후보가 국가보안법 존폐에 대해 세상에 내놓은 정책은 전면 폐지고, 아무 단서가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얘기할 때는 단서를 달아야 할 것 아닙니까>
  토론이 길어지자 鄭東泳 후보는 『보안법 폐지를 시원스럽게 말하고 싶지만, 문제는 실현 가능성이다. 야당이 완강하게 반대하고, 반대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 엄연히 있는데, 국가 경영하는 입장에서 딱 부러지게 되나』며 盧후보의 「완전 폐지」입장이 「非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盧후보는 이렇게 응답했다.
  『보안법에 관한 의견은 본인의 철학과 가치관을 묻는 것입니다. 정책을 어떻게 추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국가보안법 개폐에 관한 盧후보의 공식 입장은 『단호하게 폐지하고, 대체입법을 하자』(「상식 혹은 희망 盧武鉉」 41쪽)는 것이다. 대체입법보다 폐지에 무게가 실려 있지만, 대체입법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정책 대안」을 얘기해야 할 자리에서 「소신과 철학」을 얘기했고, 논쟁이 끝난 후 지지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합시다』며 현장의 언어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이 1988년 7월8일 국회 사회문화 분야 對정부 질문에서 한 『재벌 총수와 일가의 주식을 「20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매입해 노동자들에게 분배하자』, 『토지개혁을 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국제그룹 해체에 대한) 야유와 비유』라고 해명했다.
  이런 점에서 盧후보는 세 가지 言語(언어)를 混用(혼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현장의 언어, 하나는 소신과 철학의 언어, 하나는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언어다. 그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에게서는 선동가, 사회개혁 운동가, 현실 정치인이라는 세 개의 얼굴이 나타난다.
  게다가 그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제가 말이 좀 많죠. 어떤 걸 물어도 대답을 잘 하고, 기자 입장에서는 (그런 타입이) 참 좋지요』 … 『아마 제가 늘 소수파여서 그랬을 겁니다. 열심히 소수파의 목소리를 항변하려 하다 보니 할 말이 많아졌다고 보아 주세요』>(「상식 혹은 희망 盧武鉉」 178쪽)
  수준이 다른 여러 개의 언어를, 상황에 따라, 가끔은 戰術的으로도 쏟아내는 그의 독특한 언어구사는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이걸 묶어 놓으면 혼란스럽다.
  100분 토론에서 李仁濟 후보는 盧후보의 이념성향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그가 그동안 제기해 온 이념공세의 「모둠」이었다.
  『盧후보가 어제 토론에서 競選(경선)이 시작된 이래 가장 위축되고, 밀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게 大邱 컨벤션센터에 모인 취재기자들의 얘기였다. 盧후보는 「100분 토론」에서 자신의 이념성향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들을 여럿 남겼다.
  
  「통일 한국」의 政體를 못 밝히는 이유
  
  그는 「통일 한국」의 政體(정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국가보안법 문제에서는 인권 변호사 출신다운 「원칙과 소신」을 강하게 피력하던 그가, 對北(대북) 문제로 주제가 옮겨지자 신중한 현실론자가 된다.
  李仁濟, 盧武鉉 두 사람 사이에 오간 공방이다.
  <李仁濟:盧후보는 「통일 협상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라든지 정통성 같은 소모적인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통일도 가능한 겁니까. 「해방 이후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은 분열주의자가 만들고, 남한은 미국을 등에 업은 자본주의 분열주의 세력이 만들었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같이 보는 겁니다. 대한민국을 유일 합법정부로 보는 헌법상의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盧武鉉:해방 이후 남북에 분열 지향의 세력들이 각기 정권을 잡았다고 말했다고 해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했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입니다. 11월 안동에서 했던 연설 내용입니다. 전체를 읽어 보고 평가해 주십시오. 李고문이 (연설문을) 전부 읽지 않고 비서들이 발췌한 것을 읽은 것 같습니다.
  통일 이후의 체제 문제는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7 4 남북공동성명, 91년 남북기본합의서 여기에서는 쌍방간에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기로 하고 상호 인정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합의는 지켜져야 합니다. 그(통일) 이후의 체제에 대해 자유민주주의를 분명히 하는 것은 흡수통일 의도가 있는 것처럼 오해가 있기 때문에 남북관계 진전에 상당한 방해가 됩니다.
  李:결론을 전부 피해갔어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느냐 않느냐, 통일 이후 자유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를 포기할 수 있느냐를 말해 주십시오.
  盧:첫번째 것은 유일 합법정부라고 인정하니까 판사, 국회의원, 장관을 한 것 아닙니까. 그런 질문 자체가 유치해요. 두 번째 것은 모호하게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자유민주주의로 통일하겠다면 흡수통합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인데,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북한과의 관계에서 남북관계를 풀 수 있겠습니까. 7 4 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이 부분을 모호하게 처리해 둔 적이 있습니다. 李고문도 그런 주장을 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습니다>
  
  『盧후보는 검증-견제 없이 성장했다』
  
  盧후보는 지난 4월3일에도 李후보 측의 똑같은 문제 제기에 대해 『기본적인 논리구조도 못 갖춘 것으로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 혹시 極右(극우)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때 답변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4월5일 오전, 大邱 대회장에서 만난 李致浩(이치호) 민주당 윤리위원장(대구 중구 위원장 변호사)은 『(盧후보가) 왜 통일 한국의 정체를 밝히지 않겠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作爲(작위·행동한다는 뜻)해야 할 시점에 不作爲(부작위·행동하지 않는다는 뜻)하는 것은 不作爲로 행동한 겁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통일의 지향점이라고 분명히 얘기하지 않은 것은,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그는 북한과의 협상을 고려해 통일국가의 政體(정체)에 대해 「모호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盧후보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대통령은 통치권적 차원에서 헌법상 不法團體(불법단체)인 북한에 특사를 보내고 협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을 기속하는 것은 헌법이다. 남북한의 대화를 위해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사람이 취할 언행은 분명 아니다』
  李위원장은 13代 국회에서 盧후보와 議政(의정)활동을 함께 했다. 李위원장은 법사위원회, 盧후보는 노동위원회 소속이었다.
  李위원장은 『盧후보가 한 번이라도 자신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재벌 주식을 「20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으로 몰수하겠다는 식의 험악한 얘기들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盧후보가) 제대로 검증받지 않고, 견제받지 않으면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13代 의정활동 당시 盧후보의 행적은 「갈등을 조정 해소하기보다는, 선동하고 갈등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많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또 다른 대구 지역 민주당 지구당 위원장은 『어제 저녁(4월4일) 「100분 토론」을 봤다』며 『(盧후보가) 大選에서 한 방에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렇게 불투명한 후보로 한나라당을 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憲法과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헌법 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憲法을 字句(자구)대로 고집한다면, 한국 정부의 통일방안은 하나뿐이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 구성된 「反국가단체(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를 공권력을 동원해 해산하고 그 首魁(수괴)를 사법처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 논리의 연장선에 서면 對北협상은 모두 反국가단체와의 불법적 접촉이 된다.
  남북한 간의 合意(합의)는 법 논리상 남북 두 체제를 규율하는 양쪽의 헌법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7·4 공동성명이나 남북기본합의서는 「모두스 비벤디(잠정 합의)」로 간주된다.
  잠정합의는 남북한 간의 통일을 향한 공감대를 최대한 묶어 놓은 것이다. 잠정합의가 양측 체제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잠정합의는 깨진다. 실천이 되지 않아 사실상 死文化(사문화)됐더라도, 양측은 미래의 협상을 위해 잠정합의를 폐기하지 않는다.
  盧후보는 『쌍방 간에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기로 하고, 상호 인정하기로 한 (남북한 사이의) 합의를 지켜야 한다』며 통일 한국의 정체를 밝힐 수 없다고 한다. 盧후보는 4월10일 충북 청주에서 열린 TV 토론에서는 主敵(주적)논란과 관련 「모호성」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우리의 主敵이 북한이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李仁濟 후보의 질문에 『(주적 논란은) 보는 견해에 따라 적절치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주적 개념을 폐지하자는 거냐』는 물음이 이어지자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적 개념은) 한국에서 없던 것이 94년인가 갑자기 튀어나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 얘기를 이런 자리에서 꼭 말하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적절치 않다』고 맞섰다.
  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盧후보가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북협상을 하러 올라가는 林東源 특사가 「통일 한국의 政體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다. 林특사를 北에 보내놓고 金大中 대통령이 「한국의 가장 큰 안보 위협은 북한」이라는 얘기를 할 필요도 없다. 그건 북한 쪽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盧후보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며 경선에 나서 국민의 검증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남북한 간의 협상을 위해 「통일 한국의 政體」를 모호한 상태로 놔두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모두스 비벤디(잠정합의)」 때문에 대통령의 헌법적 책무를 분명히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盧후보가 그런 시각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될 수는 없다. 金大中 대통령은 야당 총재시절 통일 한국의 政體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했다』
  
  金大中, 『통일 한국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두 축』
  
  金大中 대통령은 1993년 月刊朝鮮 10월호에 게재된 趙甲濟(조갑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통일 한국의 정체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말했다. 그는 통일한국의 政體를 묻는 기자의 질문을, 자신에 대한 사상검증 공세나 「붉은 색칠하기」라고 공격하지 않았다.
  <(趙甲濟)─金총재께서 말씀하시는 3단계 통일론에서 최종적인 연방제 이후 단계의 통일국가는 어떤 사회인지 그동안 의혹이 많았습니다. 최종적인 정치체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될까요.
  (金大中)『간단히 말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두 축이 되는 사회라고 하면 되겠지요. 연방제 이후가 아니라 연방제부터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軍과 외교를 통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金총재께서는 지금까지 「최종 정치체제의 결정은 다음 세대의 문제다」라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해 오셨잖습니까.
  『그렇게 들리게도 했지요. 사람의 생각은 자꾸 발전하는 것입니다. 소련 등 공산권의 종말과 동독의 붕괴를 보고 그런 생각이 더욱 정리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통일하는 것만 중심으로 생각하고 완전 통일에 가면 우리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해 크게 관심을 안 가졌습니다. 「국가연합 단계가 끝나면 양측이 모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갈 것이다. 연방제 下에서 각기 자기 측 내정의 운영 방법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최종 국가는 물론 연방제조차 그것이 어떤 성격이라는 데 합의가 있어야만 연방제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연방제 단계를 거치면서 북한이 민주화 시장경제의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완전한 통일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네. 연방제부터 그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연방제를 실시하려면 연방헌법을 정해야 하고, 그러려면 연방대표 간에 국시가 정해져야 합니다. 연방제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선출해야 하는데 두 개의 이질적인 이념체계간에 이게 가능하겠습니다. 미국이 두 개의 체제로 갈라져 있다면 어떻게 하나의 연방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연방국가의 예산도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바탕이 없어서는 편성이 불가능합니다』>
  
  DJ, 북한은 변하지 않으면 비참하게 파멸한다
  
  金大中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북한은 변하지 않으면 비참한 파멸을 맞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했고, 북한의 안보위협을 얘기하면서 「핵 개발 포기」를 요구했다.
  『북한은 변하지 않으면 비참한 파멸을 맞을 것이고, 잘 변화하면 남한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갈 것입니다』
  『(북한) 핵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하면 우리도 할 가능성이 있고, 아시아와 세계에 걸쳐 도미노 현상이 일어납니다. 특히 일본은 북한이 어린아이 수준의 「핵 장난」을 하는 순간 핵 초강대국으로 등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운명이 어디서 덜미를 잡힐지 모를 겁니다』
  국가보안법, 북한 인권에 대한 金大中 대통령의 언급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金大中 후보는 『이념과 사상이 불투명하다』는 공격을 받았다.
  『자민련과의 합당과정에서 상당한 진통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현 단계에서 國保法의 명칭은 그대로 두되, 독소조항을 폐지하는 데 합의했다. 앞으로 남북관계와 국민정서의 변화에 따라 조정의 여지가 있다』(1997년 11월18일 우리민족서로돕기 운동과 시사저널 주최 대통령 후보 초청 토론회)
  <북한 인권문제는 계속 공개적으로 주장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인권개선을 주장해 국제협력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고, 외국세력의 영향이 미치면 인권상황에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1997년 11월17일 대통령 후보 합동토론회)
  
  역사적 방향성 결여한 「나의 통일론」
  
  盧후보는 「나의 통일론」(2000년 8월28일)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통일 이후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해야 한다거나, 남북회담의 과정에서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거나 하는 소모적인 체제논쟁은 그만두어야 한다. 상호간에 정권과 체제를 인정하고, 합의 통일로 가자는 데는 모두 동의하면서 이런 논쟁을 벌이는 것은 모순일 뿐 아니라 남북 간에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국가보안법이 안고 있는 모순도 해소되어야 한다>
  「나의 통일론」은 A4 용지 한 장 분량의 小品(소품)이다. 그는 이 글에서 『金大中 대통령의 「평화통일 3원칙, 3단계 통일론」을 지지한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더 보태거나 덜어낼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100% 신뢰하고 지지한다는 그 통일론의 主唱者(주창자)는 이미 10년 전에 「통일 한국의 政體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이며, 북한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몰아가야 한다」고 갈파하고 있다.
  그는 2000년 8월28일 한 인터뷰에서 『金大中 통일정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이 있게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며 자신의 통일론을 네 가지로 요약하면서 두 번째로 이런 주장을 했다.
  <둘째,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상호간에 정권과 체제를 인정하고, 합의통일로 가자는 데 동의하면서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盧후보는 경선과정에서도 『7 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 그가 「(남북한) 상호간의 정권과 체제를 인정한다」는 남북한 간의 合意(합의)를 字句 그대로 자신의 신념 또는 정책으로 유지하고 있다면, 盧후보의 「통일론」은 세계사적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盧후보는 경북 안동 시민학교 특강(2001년 11월8일)에서 西獨(서독)의 아데나워, 빌리 브란트, 헬무트 콜 수상의 통일정책을 소개하면서, 『역사의 무대를 크게 잡아서, 세계사의 조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멀리 내다보면서 독일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이 사람들이 역사의 지도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북한을 세계사의 마지막 스탈린주의 국가로 고립시키고 있는 「한반도에서의 세계사적 조류」보다는 「북한 달래기」에 기울어져 있다. 강연 중 「한반도의 평화」라는 부분의 끝 부분이다.
  『물론 북한이 강짜를 많이 부립니다. 참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습니다. 풀 수 있으면 풀어야 합니다. 달래서 풀 수 있으면 달래야 하고 돈을 줘서 풀 수 있으면 돈을 줘서 풀어야 합니다. 풀지 않으면 민족의 미래가 없습니다. 너그럽게 봐야 합니다. 지원해 주십시오. 북한에 주는 돈은 하나도 공짜가 없다, 엄청난 이익이 남는 투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인권 변호사 출신인 盧후보의 인권은 휴전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이 운영하고 있는 신문·잡지 데이터 베이스 「카인즈(Kinds)」는 주요 신문 잡지에 실린 기사를 모두 담고 있다.
  카인즈의 종합 일간지 검색에 들어가 「盧武鉉」을 입력하자 1000여 건의 기사가 떠올랐다. 「盧武鉉, 북한인권」을 입력하자 검색되는 기사가 없었다. 「盧武鉉, 북한식량난」을 입력해도 마찬가지였다. 盧武鉉씨는 1990년 1월부터 지금까지 12년 동안 공인으로서 중앙 일간지에 게재될 만한 북한 인권과 식량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검색결과다.
  1990년 1월1일부터 최근까지의 종합일간지 검색에서 「노무현, 동서화합」 항목을 입력하자 1000건, 「노무현, 민주화」 항목을 입력하자 609건, 「노무현, 노동자」를 입력하자 423건의 관련기사가 떠올랐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盧武鉉의 차가운 시선
  
  盧후보는 1990년 재야단체인 全民聯(전민련)의 미군철수 주장에 동의하는 서명을 한 데 대해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된 뒤 金大中 당시 총재와의 토론을 통해 주한미군 철수는 외교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공당으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 조율을 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駐韓美軍 철수에 관한 문제에서 盧후보는 자신의 정책을 자신의 언어로 명확하게 밝히는 대신, 「金大中」이라는 권위에 의탁해 버렸다.
  盧후보는 4월11일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주한미군 철수는 안 된다. 주한미군은 韓美 동맹조약에 의해 주둔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주한미군이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을 그가 자신의 입으로 명확하게 정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黨과 盧후보 측이 정책문제를 놓고 조율을 시작했다. 盧후보가 黨의 정강정책과 당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黨의 대표주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해, 盧후보 측과 주한미군 문제 등 예민한 현안에 대해 「정책조율」이 진행 중임을 시사했다.
  盧후보는 「통일 한국의 政體」, 북한이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주된 요소인가라는 「주적 논란」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호성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을 고집스럽게 견지하고 있다.
  한국전략문제연구소 洪晟太(홍성태 예비역 육군 준장) 소장은 『「북한은 선택의 여지가 더 이상 없다」, 「북한 崩壞(붕괴)가 가시권 안에 들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북한에 대한 경계의식이 느슨해지고 있다』며 『그러나 한반도의 현재 정세는 낙관도 비관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는 「북한 非敵論(비적론)」이 확산되고, 한민족의 문제는 남북이 합의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통일 정서가 고양되고 있다. 대량화된 親북한 옹호세력은 미국과 주한미군을 통일 방해세력으로 고립시키는 데 상당 부분 성공했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스님까지 「정부가 일방적으로 미국을 추종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했다.
  북한의 참모부가 쾌재를 부를 일이다. 주한미군은 한국 안보의 가장 중요한 軸線(축선)이다.안보 축인 韓美동맹관계가 약화될 때 한국의 안보는 취약해 질 수밖에 없다. 중국의 국부군과 월남군은 군사적으로 패배한 것이 아니라, 정치 심리전에 패배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盧후보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盧후보는 安東 시민학교 특강(2001년 11월18일)에서 한, 남북한 두 체제에 대한 자신의 발언을 李仁濟 후보가 문제삼자, 『전부 다 읽어 보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관련된 부분이다.
  <그 당시 소련을 등에 업고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과 미국을 등에 업고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려는 세력이 극한적 대립하는 사이에서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과 자주독립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중도통합 세력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습니다. 김구, 여운형, 김규식… 통합세력은 모조리 패배해 버리고 분열세력들이 각기 득세를 했습니다.
  그뒤 미국을 등에 업은 남한의 정부는 반공을 자기 존립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빨갱이 대충 잡고 나서는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반공이념을 사용했습니다. 그 틈에 가장 솜씨가 좋은 사람들이 일제 때 독립운동가 잡던 친일파들이었지요. 직접 칼들고 잡으러 다녔던 순사 출신들뿐 아니라 일제관료로서 식민지에 복무했던 사람들이 나라의 주도권을 쥐고 역사를 왜곡해 나간 것이 한국의 현대사였습니다>
  그의 역사관 속에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대한민국 建國(건국)의 역사적 의미, 공산주의의 침략에 결연히 맞서 나라를 지켜낸 국가형성(Nation Building), 산업화와 근대화를 위해 흘린 피와 땀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 보인다.
  지난 3월10일 열린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울산대회에서 민주당 후보들은 朴正熙(박정희)와 산업화, 개발연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놓았다. 울산은 1961년 공업센터가 착공돼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곳이다.
  『朴正熙 대통령을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반독재투쟁과 구속 강제징집으로 이어진 저의 20代는 지옥 같았습니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정치는 한 마디로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독재로 인권을 탄압했지만 「밥」의 문제를 해결한 朴正熙의 열정을 높이 삽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4000년 빈곤의 역사를 몰아내고 신공업도시를 건설하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鄭東泳 후보)
  『울산에 자동차공장, 조선소를 지으면서 우리의 조선산업이 세계를 석권하고, 우리 차가 세계를 달릴 걸로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용기 있는 지도자, 결단력 있는 지도자가 30년 후 한국의 번영을 가져왔습니다』(李仁濟 후보)
  李仁濟 후보는 『지식경제를 토대로 우리 경제를 불꽃처럼 살려내야 한다』, 『일자리를 만드는 대통령』, 『근면·자립·개척 정신이 울산 시민의 정신이다』는 이야기도 했다.
  盧武鉉 후보는 자신의 個人史(개인사)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만을 울산 연설에 포함시켰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울산 한국비료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다쳐 2주간 입원을 했습니다. 産災(산재)환자인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노동자였습니다』
  『출세하면 과거를 잊고 과거의 동지를 배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고시에 합격하면 자기출세에 몰두합니다. 저는 과거를 잊지 않고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핍박받는 노동자를 위해 뛰었고, 민주화를 위해 울산에서 부산에서 뛰었습니다』
  盧후보 蔚山 연설의 키워드는 「노동자」, 「의리」, 「배반」, 「민주화」, 「영호남 단결」, 「동서화합」이었다. 그후 계속된 다른 지역의 경선대회에서도 盧후보 연설의 주제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의 視野(시야)는 사회갈등과 민주화 투쟁이라는 좁은 영역에 맞춰져 있다.
  
  신경제 호황을 가져온 「政策 中毒者」 클린턴
  
  『우리는 稀代(희대)의 사기꾼을 만났거나, 아니면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정책 마인드를 가진 대통령을 만났다』
  앨런 그린스펀 美 연방준비은행(중앙은행) 이사장은 아칸소州 리틀록의 州지사 관저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 당선자를 첫 대면하고 친구들에게 이런 요지의 인상을 전했다고 한다. 보브 우드워드 기자는 1993년 12월3일에 있었던 클린턴과 그린스펀의 첫 만남을 자신의 저서 「마에스트로(Maestro·巨匠)」에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린스펀은 「클린턴은 정책 중독자(Policy junkie)」라는 관측이 정확한 것임을 알게 됐다. 金利(금리) 通貨量(통화량)이 주제가 된 대화에 클린턴은 완전히 몰두했다. 마치 이 세상에 그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두 시간 반으로 길어졌다. 클린턴은 진지했고, 대단한 집중력을 보였다. 그린스펀은 이 젊은이가 자신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네 명의 공화당 대통령, 닉슨 포드 레이건 부시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클린턴은 질문과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클린턴에게 매혹된 그린스펀은 7%에 이르고 있는 장기금리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재정적자를 축소해야만 한다는 경제 강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경제를 회복시킬 청사진을 제시했다.
  장기금리를 낮추면 주택과 부동산 구입이 늘어나고, 소비자 금융이 활성화돼 경제가 살아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장기금리를 떨어뜨리려면 인플레 심리를 가라앉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 재정적자 감축이 최우선 과제다』 그린스펀은 부자들에 대한 세금을 늘려야 한다는 클린턴의 제안이 자신의 공화당 강령과는 맞지 않지만, 재정적자 감소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점에 호감을 표시했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린스펀은 클린턴을 「지적인 실용주의자(Intellectual Pragmatist)」라고 규정했다. 그린스펀은 1994년 1월28일 취임 8일째인 클린턴 대통령에게 재정적자 축소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이라고 재차 촉구했고, 클린턴은 그린스펀이 마련해 둔 야심찬 정부 재정 적자 축소안을 자신의 정책으로 밀어붙여 10년 경제호황의 토대를 마련했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economy, stupid)」라는 클린턴 진영의 재치 있는 캐치프레이즈가 아니라, 클린턴 대통령의 경제에 관한 탁월한 식견과 정책 마인드가 미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미국 경제를 살려냈다는 게 우드워드 기자의 결론이다.
  
  서민을 위한 대통령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大選 후보로 올라선 盧武鉉씨는 어떤 경제정책을 가지고 있을까. 그는 확고한 「정책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가? 그는 민주당 경선에서 자신의 경제정책으로 국민들을 매혹시키고 있는가. 「盧風(노풍)」을 떠받치는 것은 정책인가, 感性(감성)인가.
  盧후보는 이번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經濟(경제)는 민주당 경선의 주제가 아니다.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 선언문(2002년 2월24일)에 나타난 盧후보의 國家戰略(국가전략)은 「사회통합」을 유난히 강조한다.
  연세대 柳相榮(국제학대학원) 교수는 「국가전략의 대전환」(삼성경제연구소 출간)에서 국가전략의 세 가지 軸으로 안보전략(security strategy), 번영전략(prosperity strategy), 사회통합을 위한 조화전략(harmony strategy)을 제시했다<그림 1>.
  안보전략은 국가의 영토 및 주권,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전략이다. 번영전략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국가의 경쟁력을 提高(제고)하기 위하여 추진해야 할 경제전략이다. 조화전략은 사회통합을 강화하기 위한 복지전략 조세정책 등이다.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변해 가지만, 세 가지 전략은 얽혀 있다.
  盧후보의 경선출마 선언문에는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조화전략」이 가득한 반면, 안보전략과 성장전략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기업을 어떻게 키워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게 할 것인지, 脫冷戰(탈냉전) 이후의 국제질서 속에서 한국의 안보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그는 얘기하지 않았다.
  원고지 30쪽 분량의 연설문에서 경제에 관한 부분은 원고지 두 장 정도의 분량이다. 그나마 주안점과 문제 해결책은 사회통합과 복지에 치우쳐 있다.
  <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하는 아시아의 중심 국가, 이것이 21세기 한국의 비전입니다.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개혁, 국민통합, 원칙과 신뢰입니다>
  <우리 중산층과 서민들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일자리는 불안해지고, 빈부격차는 더욱 커졌습니다. 다음 정부는 무엇보다도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우리 중산층과 서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할 것입니다. 다음 대통령은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일자리 만들기, 일자리 찾아주기,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실업문제를 해결하고, 농업대책, 조세개혁과 복지제도로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盧후보는 한국의 도약을 위한 비전을 얘기하면서 「원칙이 바로 선 사회」, 「지역주의 철폐, 동서화합」, 「노사화합」을 그 방법론으로 제시했다(2002년 2월3일 제주시 盧武鉉 후보 제주본부 발대식에서).
  그에 비해 李仁濟 후보의 경선출마 기자 회견문은 다소 균형 있는 국가전략을 담고 있다.
  <중소기업을 육성하겠습니다. 우리 경제가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기업하기 좋은 나라, 기업인이 사랑을 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일자리를 만드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교육의 내실화, 인재양성, 과학진흥, 창의개발 등을 앞세워 맹렬한 「지식 드라이브」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쟁이 당장 벌어지지 않는 제한적 평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도려내어 진정한 평화체제를 만들고, 나아가 남북통일의 초석을 놓는 일이 시대의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盧武鉉 후보가 여러 언론의 조사에서 밝힌 경제정책은 李仁濟 후보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그는 세 후보 중 大企業(대기업) 규제와 獨寡占(독과점) 방지에 가장 적극적이다<그림 2>.
  중앙일보가 지난 2월 국회의원 238명과 대선주자 여덟 명을 대상으로 한 「국회의원 정책 이념 조사」에서 盧후보는 지수 1.5로 246명의 정치인 가운데 다섯 번째로 「진보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盧후보보다 진보적인 것으로 조사된 국회의원은 金敬天(김경천·민주), 金洪信(김홍신·한나라당), 金希宣(김희선·민주), 鄭範九(정범구·민주) 네 명뿐이다. 국민전체의 이념성향은 4.5로, 민주당(3.7)과 한나라당(5.3) 사이였다.
  盧후보는 자신의 정책성향이 한국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가장 「진보적」인 것으로 나타난 결과에 대해 『진보·보수 개념이 적절치 않다. 굳이 숫자로 표시하면 (나의 이념성향은) 4에서 6』이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당의 지난번 大選공약과 각종 현안에 대한 당론을 거기다 넣으면 얼마쯤 나올까요. 저하고 비슷하게 나올 겁니다』며 「민주당 당론」을 들고 나왔다.
  
  후보의 정책성향 공개는 代議制의 기본
  
  그렇지만 盧후보는 중앙일보가 실시한 2차 정책·이념·노선 조사(4월11일자 보도)를 거부했다. 『중앙일보의 조사취지와 달리 계량화된 수치가 색깔공세 자료로 악용돼 설문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민주당의 당론 수준이라는 자신의 정책성향이 왜 색깔공세의 자료로 악용된다는 것인지, 중앙일보의 평가방법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는 것인지,「盧武鉉의 말」은 쉽게 맞추기 어려운 퍼즐이다.
  서울대 朴孝鍾(박효종) 교수는 『大選을 앞둔 상황에서 좌파로 자리매김되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정치권에 몸을 담았다면 중요한 정책에 대한 소신을 진솔하고 일관되게 주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朴교수는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밝히고, 공개하는 것은 代議制(대의제) 정치의 정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했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말을 천착해 봐야 한다. 정치성향에 따라 左右(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후보를 나누는 것은, 후보자가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 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후보가 명확하게 위치를 잡을 때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 선거에 불리하다고 색깔을 감추거나 위장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물론 상대방의 사상과 이념에 대해 터무니없는 올가미를 씌워 공격하는 「저급한 색깔론」은 금물이다. 大選 후보들은 「당신의 이념적 정체성이 뭐냐」에 대답해야 한다. 본인의 확신과 가치관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걸 공개해야 한다』
  盧후보의 1988년 對정부 질문은 그의 말에 대한 신뢰와 함께, 「경제 마인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쟁점으로 등장했다.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으로 돌아가자』
  
  盧武鉉 후보는 1988년 7월9일 국회 본회의 사회·문화 분야 對정부 질문에서 「재벌 주식의 몰수와 노동자 분배」를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야유와 비유」라고 해명했지만, 연설문에는 당시 그가 생각한 「재벌해체와 토지개혁」의 大綱(대강)이 담겨 있다.
  그는 재벌과 일가의 주식을 「20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으로 사들여, 노동자들에게 같은 조건으로 판매하고, 토지개혁도 같은 방법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토지개혁에 필요한 자금은 부정축재 재산 환수금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내가 하는 얘기는 그냥 해보는 얘기가 아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책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벌개혁과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벌 총수와 일가족의 주식 强制(강제) 매수, 토지개혁과 관련된 盧후보의 발언을 原文(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국무총리,
  지금 우리 경제는 근본적 개혁 없이는 경제민주화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재벌을 해체할 의향은 없습니까.
  어제 경제분야 질문에서도 나타났듯이 우리나라 경제 각 분야에서 재벌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재벌은 해체돼야 합니다. 재벌 총수와 그 일족이 독점하고 있는 주식을 정부가 매수해서 노동자들에게 분배합시다. 이 말은 대기업을 해체한다는 뜻과는 다른 뜻입니다. 매수와 분배 모두 20년 거치 20년 분할상환 정도이면 노동자들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 없는 서민들, 중소 상공인 농민들을 위해서 부채 탕감과 아울러 토지도 모두 같은 방법으로 분배를 합시다.
  법무부 장관에게 한번 묻습니다. 방금 제가 한 제안이 우리 헌법下에서 불가능한 제안입니까. 자본주의 제도下에서는 불가능한 제안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저는 이렇게 물어 보겠습니다. 제5공화국 부실기업 정리와 관련해서 탕감해 주거나 15년 거치 15년 상환 등으로 유예해 준 돈이 6조원이라는데 국민의 부담으로 특정인에게 이 엄청난 이익을 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下에서 허용되고, 특정인의 재산을 연불로 매수해서 국민들에게 연불로 분배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근거는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입니까.
  85년 국제그룹을 해체할 당시 인수자를 선정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청와대에서 인수자를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재산평가도 인수자가 일방적으로 하게 해서 평가과정에서 연합철강 한 기업에서만 부정실사로 270억원의 부당이익을 주었다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 자본주의입니까. …지금 제가 하는 주장은 공연히 한번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 정부는 기를 쓰고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지금까지 경제정책을 보면 임시정부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 한 건도 없습니다.
  제가 바로 재벌해체와 토지분배 등 경제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이 임시정부의 정강정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자립 경제의 기반을 확고히 세우고, 경제적 正義를 구현하자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절대빈곤 계층을 없애고, 상대적 빈곤의 폭을 줄임으로써 앞으로 북한에 대한 개방에 대비하자는 뜻도 있습니다.
  다음은 권력형 부정의 수사와 재산 환수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습니다. 처음 저는 이 부정축재 재산을 환수해서 토지개혁에 필요한 자금으로 쓰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제 농촌 사정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런 욕심은 차마 못 부리겠습니다. 농촌 좀 보태 주시기 바랍니다>
  丁海昌 법무부 장관은 盧武鉉 의원의 질의에 대해 『재벌들의 재산을 강제 매수하는 것은 憲法상의 재산권 보장규정에 위배된다』는 요지로 답변했다.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 어떤 것을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우리 헌법상 재산권 보장규정에 비추어서 재벌들의 재산을 일방적으로 강제 매수해서 노동자들에게 분배하는 조치들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盧후보는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당시 권력이 국제상사를 해체해 한일그룹에 특혜로 넘겨준 상황에서 (차라리 주식을) 부자들에게 나눠주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비유적 야유발언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설명도 있었다.
  
  사회통합만 추구하면 成長의 動力이 꺼진다
  
  『나는 기업에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 재벌 간 상호 출자, 상호 지급 보증, 내부 거래 등을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갖고 대기업 해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내가 李후보와 다른 점은 나는 재벌에 대한 출자총액 제한 제도가 필요하고,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지배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週 5일 근무에 적극 찬성한다는 점이다』(3월29일 방송 인터뷰)
  盧후보는 후보경선 대회 연설에서 사회통합을 위해 정부가 농민에게 특단의 지원으로 소득보전할 것을 주장했다. 1988년 발언한 「서민, 중소상공인, 농민을 위한 부채 탕감」과 맥락을 같이하는 발언들이다.
  <농민들은 국가의 공로자들입니다. 산업발전에 희생된 공로자들입니다. 농민들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적어도 산업으로서의 농업은 경제원리에 맡길 수밖에 없지만, 농민정책은 사회정책으로 접근해서 농민들이 노후를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국가에서 책임져야 합니다>(3월30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경남대회에서)
  <(농업문제는) 우리의 생명산업, 안보산업이기 때문에 특단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농촌은 국민의 삶의 터전, 우리 공동체의 뿌리이기 때문에 각별한 사회정책으로 보호해야 합니다>(3월31일 전북대회)
  閔丙均(민병균) 자유기업원 원장은 『盧후보의 연설이나 글들을 보면 논리적이거나 깊이가 있지는 않다』며 『사회통합 주장이 서민과 노동자들의 큰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만큼 선동적이고 힘이 있지만, 국가정책으로 반영될 때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했다.
  『盧후보의 재벌과 기업에 대한 생각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1988년의 對정부 질문의 「재벌 주식 강제 매수」 주장은 「재벌기업의 소유구조가 잘못됐으니, 소유주의 경영권을 뺏고, 기업은 그대로 두겠다」는 얘기다. 競選(경선) 연설에는 「재정을 투입해서라도 저소득층의 소득을 보전해 주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골간은 사유재산, 작은 정부, 시장의 경쟁력, 개인의 자유 네 가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사유재산이다.
  盧후보는 10여년 전 발언이기는 하지만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다. 대한민국은 해방 이후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토지개혁」을 하자고 한 건 무슨 주장인지 모르겠다. 사람의 세계관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지는 만큼, 盧후보가 집권한다면 이런 「反시장적」 정책이 수시로 나타날 것이다』
  盧후보가 내세우고 있는 국가전략이 「사회통합」에 지나치게 경도돼 있다며, 그는 이런 설명을 했다.
  『유럽의 사회주의 정권들은 「사회통합」을 해결책으로 추진할 때 시장과 기업은 그대로 갈 것이라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회통합과 복지를 최우선적으로 밀고 가는데도 과연 시장과 기업은 그대로 있을 것인가? 그동안 쌓아 놓은 것을 다 파먹으면, 성장의 동력이 꺼진다. 그순간 국유화를 풀고, 시장경제에 문을 열고, 시장의 준칙에 따라 경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순환이 반복됐다. 국민들이 성장의 동력이 꺼지더라도, 사회통합의 길을 가겠다면 그 길로 갈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포퓰리즘과 낡은 사회주의의 溫床』
  
  그는 『「재벌 해체」, 「재정을 통한 서민과 농민 지원」 같은 盧후보의 주장은 가벼이 볼 것도 아니고, 욕만 할 것도 아니다』며 『盧후보가 지향하는 큰 방향과 그 근저의 흐름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벌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파트너이면서, 동시에 부정부패의 파트너였다. 국가 자본주의의 또 다른 축인 정부는 金泳三 정권 이후 재벌 공격에 나섰다. 재벌은 부패의 파트너였던 정부에 두들겨 맞고, 左派(좌파)의 공격에 뜯어 먹힌 꼴이 됐다. 지금 「악덕 재벌」을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지배계층인 정치 엘리트와 지식인들은 지난 50년 동안 부정부패 구조를 깨기는커녕 거기에 끼어들어 도둑질을 했다. OECD 국가 중에 우리처럼 부패가 심한 나라는 없다. 이 사회의 상류층, 의사와 교수, 기업가, 記者(기자)가 다 혐오의 대상이다. 국민들은 IMF 이후 구조조정으로 대량실직을 맛봤고, 노숙자로 地獄(지옥)의 밑바닥까지 갔다왔다. 젊은이들은 대학졸업하고 군대에 갔다왔는데, 직업이 없다. 청년 실업률 수치를 한번 봐라. 한 마디로 지금은 우리 체제의 위기다』
  閔원장은 『우리 사회는 지금 포퓰리즘과 낡은 사회주의의 온상이 됐고, 盧武鉉을 공격한다고 이게 없어지지는 않는다』며 『기성체제에 대한 실망과 혐오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앞으로 5년 동안 분배와 사회통합을 우선하는 「사회주의 트랙」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시절 金大中 정부의 사회·복지 정책을 「사회주의적」이라고 공격했던 金滿堤(김만제) 의원(前 경제부총리)은 盧후보의 정책성향을 「Pro Labor(프로 레이버·親노동)」로 정리했다.
  金의원은 『盧후보의 對정부질문 연설은 영국 勞動黨(노동당)의 산업 국유화 정책을 연상시킨다』며 『DJ정책보다 한 술 더 뜬다』고 했다.
  『金大中 대통령은 좌파적 색채가 강한 정치인이었지만, IMF 구제금융을 받으면서 IMF의 구조조정 권고, 즉 「워싱턴 콘센서스(Washing Consensus)」를 받아들여야 했다. 金大中 정부가 그렇게 자랑하는 4大부문 개혁은 자신이 선택한 게 아니라 밖에서 강요된 것이다. 4大 개혁은 어쩔 수 없는 대안이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도 IMF의 요구였다. 정치적으로 金대통령은 단독 집권할 힘이 안 돼 자민련이라는 보수색채의 정당과 공동으로 집권을 했다. 국가보안법 개정, 획기적인 對北지원 등은 자민련에 의해 봉쇄됐다. 盧武鉉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한국에서는 단독 左派정권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 셈이다』
  ―盧후보가 左派라고 생각하는가.
  『盧후보가 對정부 연설에서 주장한 기업 주식의 노동자 분배는,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협동 사회주의(Corporate Socialism)를 연상시킨다. 유고가 어떻게 됐나? 경영성과를 종업원들이 다 나눠먹고 투자를 안 해, 경영혁신이나 새로운 상품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계에 봉착했다. 盧후보의 당시 주장을 보면, 資本의 역할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모든 가치는 노동으로 창출되고, 자본은 축적된 노동에 불과하다는 것이 칼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의 축이다. 그래서 그의 정책이 이미 폐기된, 낡은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는 좌파라는 것이다』
  ―盧후보가 1988년 주장한 토지개혁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토지는 非생산적인 자산이다, 땅은 하늘에서 준 것이지, 소유주를 인정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 칼 마르크스, 베블런 등의 주장이다. 토지 소득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고, 땅을 모두 국유화하자는 것이 그 논리적 귀결이다. 盧후보의 토지개혁 주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 서 있다고 본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더 중요해졌다』
  
  ―盧후보는 「생각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10여 년 前에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표를 얻기 위해 분명히 중도 보수적 정책노선으로 포장을 할 것이다. 하지만 집권하고 나면 분명한 자기 색을 드러낼 것이다. 親노조정책을 강력하게 펼 경우,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임금이 상승되면, 인플레가 오고 생산성이 떨어진다. 아르헨티나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제붕괴를 여러 차례 겪었다.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서는 포퓰리즘이 하도 굳어져 與野를 막론하고 포퓰리스트 정책을 내놓지 않으면 표를 못 얻는다』
  ―세계화(Globalization)가 진행되면서 계층 간의 소득불균형이 심화되고, 사회통합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盧후보의 정책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일 수 있나.
  『사회통합, 복지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 위한 경제의 효율화는 더욱 중요해졌다. 거론되는 與野의 중요 大選후보 가운데 盧후보는 기업규제에 가장 적극적이고, 민영화에 앞장 서 반대하고 있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도 민영화로 돌아섰다. 사회통합을 위해 「정부 규제」를 남발하고, 「정부 보조」를 남용하면 경제가 견뎌낼 수 없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 자본이 빛의 움직으로 움직이는 세계 경제 체계 속에서 개별 국가, 개별 경제의 자율성이 얼마나 있겠느냐」고 주장한 적이 있다. 盧후보가 집권하더라도 金의원이 얘기해 온 「낡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밀어붙일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 같은데.
  『국가 지도자가 21세기의 글로벌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이념을 갖고 있다면,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 비용이 얼마나 엄청날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盧후보는 막연한 낡은 사회주의적 주장을 얘기했을 뿐,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색채를 분명히 하려고 나선다면, 경제정책의 혼선은 엄청날 것이다』
  金의원은 선거판에서 盧후보의 좌파적 성향을 공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左派로 강하게 몰아붙이면, 상대는 「그래, 우리는 서민과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다」 하고 나올 것이다. 保革(보혁)구도로 몰아가면서 차별화를 시도하게 되면, 우리는 노동자와 서민의 표를 잃게 된다. 선거전략상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국민의 기초생활에 필수적인 것은 정부가 財政(재정)을 통해서라도 다 책임을 져야 한다. 민간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앤소니 기든스類의 주장이, IMF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서 팍팍 먹혀 들고 있다』
  
  盧風은 情緖的 지지인가, 정치적 지지인가
  
  盧武鉉 후보는 불투명한 안보 통일정책, 급진적인 이념성향을 안고 이번 大選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金大中 대통령의 大選전략을 자문해 온 李英作(이영작) 박사는 『盧후보는 정책의 실체가 없다』며 그의 급진 개혁 성향이 大選에서 족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金대통령의 처조카인 李박사는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통계전문가이다. 그는 美 국립 암연구소, 국립 신경성질환 및 뇌졸중 연구소 통계학자, 美 국립 모자건강연구소 통계학실장을 지냈다. 2000년 3월 국내에 의료통계 전문업체인 「웨스테트-코리아」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盧武鉉씨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정되면 大選에서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여론조사들이 나오고 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치인에 대한 情緖的(정서적) 지지와 정치적 지지는 다르다. 盧武鉉씨는 「밥을 같이 먹고 싶은 사람」, 「영화를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을 묻는 여론조사에서 늘 지지도가 높았다. 이건 정서적 지지다. 이게 정치적 지지로 연결될지는 불확실하다. 盧후보가 지금과 같은 스탠스를 유지해서는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뭔가.
  『盧후보가 그렇게 엄청난 얘기들을 과거에 쏟아 놓고도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 놀랐다. 「생각이 바뀌었다」식의 임기응변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게 돼 있다. 처칠은 보수당으로 당적을 바꾸면서 고해성사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다. (盧후보가) 노선을 현실적으로 선회하게 된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거나, 분명한 정책노선을 내놓았어야 했다』
  ―盧武鉉씨에 대한 지지가 「盧風(노풍)」으로 불릴 만큼 폭발적인데, 이게 거품이라는 건가.
  『지난번 인터뷰(月刊朝鮮 3월호) 때 나는 「李會昌과 李仁濟는 네거티브 캠페인에 취약하다」고 했다. 李會昌씨는 「빌라 게이트」로 추락했고, 李仁濟씨는 경선불복과 민주당의 정체성을 들고나온 盧武鉉씨의 공격에 추락했다. 盧武鉉씨의 부각은 대세론을 타고 있던 두 李씨가 네거티브 캠페인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 것에 불과하다. 기성정치에 대한 혐오와 정치불신이 盧후보 지지를 띄워 올렸다. 그렇더라도 李會昌씨 아들의 병역기피, 李仁濟씨의 경선불복이라는 취약점에 비하면, 盧武鉉씨가 해 온 급진개혁 성향의 발언들이 더 큰 악재가 될 수 있다』
  
  『大選은 도덕성 아닌 정책으로 승부난다』
  
  ―盧武鉉씨의 급진 개혁 발언과 정치 성향이 大選에서 중요한 쟁점이 될 걸로 보나.
  『1988년 미국 大選 때 민주당의 듀커키스 후보는 부시 진영의 네거티브 캠페인 하나로 무너졌다. 듀커키스의 전임 공화당 주지사가 도입한 장기수에 대한 일시 휴가(Parole) 제도에 따라 잠시 감옥을 나섰던 흉악범이 백인 여성을 강도 강간한 일이 벌어졌다. 부시 진영의 공세에 듀커키스는 「그 일이 도대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자세를 견지했다. 듀커키스는 사형제도 폐지론자였다. TV 토론에서 듀커키스는 「당신 아내가 살해되는 경우에도 살인범에 대한 사형에 반대하겠느냐」는 물음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너졌다. 盧후보의 발언과 정책성향은 한나라당의 「네거티브 캠페인」 전문가들에게 엄청나게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한국 유권자들의 성향이 그렇게 保守(보수)적인가.
  『여론조사를 해 보면 자신을 進步(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을 保守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다. 그건 감성적인 자기 평가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 정책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가를 이슈가 對北政策(대북정책) 하나밖에 없다. 한국에는 미국처럼 보수와 진보를 가를 이슈들이 많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保守라고 보면 적합할 것이다』
  ―盧후보 측은 자신의 이념성향에 대한 공격을 「냉전시대의 색깔론」이라고 맞받아 치고 있는데.
  『한국의 대통령 선거전이 선진적인 정책대결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본다』
  ―盧후보는 중앙일보 조사에서 현역 정치인 가운데 다섯 번째로 「진보적」인 정책과 노선을 가진 것으로 평가됐다. 盧후보는 『민주당의 지난번 大選공약과 각종 현안에 대한 당론을 거기에 代入하면 나와 비슷하게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바로 임기응변식 대응이다. 정말 그런 정책과 노선으로 국민들에게 표를 얻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대통령 중심제인 미국의 경우 대통령 후보가 선출되고 나서 黨의 정강정책이 확정된다. 대통령 후보자의 정치적 색채와 정책에 따라 정당의 정강 정책이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다. 盧후보가 내각제下의 정당 당수라면 「우리 黨의 정강 정책」을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사람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적절치 않다』
  ―李박사는 金大中 대통령에게 「大選에서 승리하려면 大選 공약이 中道(중도)로 가야 한다」고 자문한 것으로 안다. 盧후보도 大選에서 승리하려면 그런 전술을 택해야 하나.
  『물론이다. 나는 金대통령에게 「中道 정도가 아니라, 中道 右派로까지 가야 한다」고 했다. 大選은 후보의 도덕성으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결국은 정책이다. 盧후보는 (정책상의) 實體(실체)가 없는 후보다. 그가 어떤 사회·경제·안보 정책을 갖고 있는지 불투명하다. 유권자들이 후보의 정책과 이념성향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하면, 盧후보는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 부분이 민주당의 큰 부담이다』
  ―光州에서 「盧風」이 시작된 이유는 뭔가.
  『지난해 광주·목포·함평 등 호남 5개 지역에서 포커스 그룹 인터뷰(Focus Group Interview)를 한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의 정치적 성향, 정당지지 등을 심층 조사하는 방식이다. 호남 사람들은 민주당이 정권을 잃지 않을까 엄청나게 불안해 하고 있었다. 게다가 권력비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이제 끝났구나」 하는 체념이 퍼졌다. 광주 대회 직전에 盧武鉉이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를 앞서 있다는 여론조사(sbs·문화일보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자 광주 사람들은 「再집권할 수 있다」는 曙光(서광)을 보았다. 그래서 盧武鉉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李仁濟 후보 측은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는데.
  『온 국민을 상대로 이렇게 정교한 시나리오를 짤 수 있는 사람이 청와대에 앉아 있다면, 金대통령이 총재직에서 물러나는 곤경에 빠졌겠나』●
  
  창원군 진전면(現 마산시 진전면) 치안대 사건의 진실
  
  보도연맹원 처리에 대한 보복으로
  左翼은 양민 9명을 학살했다
  
  盧武鉉 후보의 장인 權五晳씨는 창원군 노동당 부위원장, 반동분자 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이 양민 학살에 참여했다고 大檢자료에 기록돼 있다
  
  
  10여 명 불법 감금 9명 학살
  
  盧武鉉 후보의 장인 權五晳(권오석· 1950년 당시 29세)씨는 「경남 창원군 진전면 치안대 활동사건」에 연루됐다. 대검찰청 수사국이 펴낸 「좌익사건실록」에 따르면, 權씨는 노동당 창원군당 부위원장, 反動分子(반동분자) 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그에게는 국가보안법 제1조·3조 위반 및 살인죄, 살인예비죄 등이 적용됐다.
  權씨 등 이 사건 연루자 67명은 卞百燮(변백섭)외 100명을 불법체포 감금하고, 이 가운데 13명을 左翼(좌익)에 대한 반동분자로 규정하여 경남 고성군 회화면 옥산골 산골짜기에서 卞百燮, 權五乾(권오건) 등 9명을 학살하고, 金玉甲(김옥갑) 등을 학살할 목적으로 빨치산 부대에 인도하고, 소위 반동의 재산을 약탈했다고 실록은 밝히고 있다. 관련자 67명 가운데 40여 명은 죄상이 경미해 불기소 처분됐다.
  이 사건을 주모한 玉哲柱(옥철주·노동당 창원군당 위원장, 반동조사위원회 위원장, 창원군 치안대장) 등 7명은 북한군을 따라 월북했다. 權씨는 체포된 관련자 가운데 당 서열이 인민위원회 창원당 위원장인 權五先(권오선) 등과 함께 높은 이였다.
  
  「양민 9명을 학살하는 현장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하고」
  
  다음은 「좌익사건실록」에 나타난 權씨의 범죄 혐의다.
  <제8 피의자 權五晳은
  ①1949년 6월1일 오전 7시경 자택에서 남로당 진전면책 金行乭(김행돌)의 권유로서 지정가입하여, 1950년 1월10일경까지 盲人(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기화로 부락당원에서 郡黨(군당) 선전부장의 중요직에 임명되어, 「토지개혁」, 「남녀 평등권」, 「정세보고」 등을 남로당이 목적하는 바의 실행을 宣傳(선전)하고
  ②1949년 12월14일 오전 9시 및 동일 오전 12시 2회에 걸쳐 창원군 진전면 오서리 거주 權景純(권경순) 및 權五尙(권오상)으로부터 현금 5000원씩 계 1만원의 군자금을 조달하여 黨에 제공 간부의 임무를 완수하고
  ③1950년 8월11일 오후 9시경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에서 창원군 노동당위원장 玉哲柱로부터 동당 부위원장인 간부의 부서에 편입하고
  ④1950년 8월19일 오후 7시경부터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허경순 자택 사랑에서 제1(玉哲柱), 제2(孫鍾吉), 제6(金仁鉉) 등과 회합하여 인민공화국 기관을 설치하며 공산군 점령지구 내에서 후방 보급사업을 목적으로 창원군 치안대 진전면 치안대를 조직하고
  ⑤1950년 8월20일 오전 9시부터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에서 제1,2,6 피의자 등과 회합하여 반동분자로 지명된 자를 숙청하기 위하여 반동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동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을 피임하고.
  ⑥1950년 8월20일 오전 10시부터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소재 군당 조직본부에서 제2피의자와 공모하여, 「노동당 진전면당」, 「임시 인민위원회 진전면 위원회」, 「진전면 임시 농민위원회」, 「진전면 임시 여성동맹」, 「진전면 임시 민주청년동맹」의 각 기관을 설치하여 인민공화국 형태의 하부조직을 감행하고
  ⑦1950년 8월23일 오전 10시부터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에서 제1,2,6,7 피의자와 공모하여 인민공화국 형태로 확립할 목적으로 「창원군 임시 인민위원회」, 「창원군 임시 민주청년동맹」, 「창원군 임시 여성동맹」, 「창원군 임시 농민위원회」 등의 각 기관을 조직 설치하고
  ⑧동일 오후 8시경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에서 제1,2,6,7 피의자 등과 공모하여 노동당 창원군당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동당을 개편하고
  ⑨1950년 9월3일 오전 9시경부터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소재 黨 조직본부에서 반동분자 조사를 강력히 추진시키기 위하여 반동분자 조사위원회를 개편하고
  ⑩1950년 8월9일부터 20일까지의 사이에 걸쳐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소재 許景九(허경구)의 자택 창고를 假(가) 감금소 및 반동분자 조사위원회 본부로 하여, 면 치안대에서 제1, 2, 6, 7, 10 피의자 등과 공모하여 창원군 진전면 양촌리 거주 전 면장 卞百燮 외 50여 명을 좌익에 대한 반동분자로 지명하여 불법체포 감금하고, 그 죄상을 조사한 사실이 있고
  ⑪1950년 8월 말 일시불상 야간에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許花村宅(허화촌댁) 마당에서 제1, 2, 5, 6, 7, 14, 20, 27 및 權景元(권경원) 등과 공모하여 반동분자 취급 토의회를 개최하고, 반동분자로 지정하여 불법체포 감금 중인 卞百燮 외 7명에 대하여 조사경과 보고 등과 학살에 대한 음모계획을 감행하고
  ⑫1950년 9월5일 오전 3시경 고성군 회화면 옥산골 「번듯대 고개」에서 제1 피의자 외 수명이 공모하여 반동분자로 지명하고, 음모계획 중이던 양민 卞百燮 외 9명을 학살하는 현장부근에서 학살을 용이하게 감시하고
  ⑬1950년 9월10일 오후 6시경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대방부락 면 치안대 본부에서 제1, 2, 4, 7, 10 피의자 및 李東洙(이동수), 許南洪(허남홍) 등과 공모하여 불법체포 감금조사한 반동분자 金玉甲 외 수명에 대하여 A급(처형자), B급(강제 노무), C급(석방자) 등으로 구분하여 학살할 음모계획을 감행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죽였다』
  
  학살당한 卞百燮(前 진전面長 학살 당시 41세)씨의 동생 卞萬燮(변만섭 87)씨는 마산市 진전면 양촌리에서 살고 있다. 진전면은 한국전쟁 당시 창원군에 속해 있었다. 양촌리에서는 卞씨의 8촌 동생인 卞曾燮(변증섭), 친구 鄭奉柱(정봉주)씨가 그의 형 卞百燮씨와 함께 살해됐다.
  그는 좌익들이 학살하고 묻어 놓은 형의 시체를 발굴해 와 묘지에 모셨다. 사건기록과 관련자들을 증언을 종합하면, 진전면 학살은 인민군 점령 후 토착 좌익세력들이 치안대를 조직하고 지역의 유지들을 인민재판에서 반동분자로 몰아 살해한 사건이었다.
  卞萬燮씨는 한국전쟁 발발 때 35세였다.
  ―盧武鉉씨의 장인 權五晳씨는 맹인으로 기록에 나와 있는데, 학살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權五晳씨는 어려서 맹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해방 무렵에 어른이 되어서 술을 잘 못 마시고 눈이 멀었다. (진전면 치안대 사건에) 權五晳이 연루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權五晳씨를 잘 아나.
  『형님이 면장을 할 때 그 아래서 면서기를 했기 때문에 가끔 어울렸다. 부친 권영철씨도 잘 안다』
  ―權씨는 어떤 사람이었나.
  『체구가 크고, 성격이 剛健(강건)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지기를 싫어했고. 전쟁이 났을 때는 면에서 일하지 않고, 농사 일을 했다』
  ―그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 양반이 서적을 읽고 좌익사상을 가질 그럴 사람은 아니었다. 6·25가 나서 인민군이 점령하고 나서야 그렇다는 걸 알았다』
  ―형님은 왜 살해됐나.
  『형님은 초대 民選(민선) 진전면 면장이었다.(재임기간 1945년 12월15일~1949년 4월7일) 우익 반동분자로 몰렸는데, 그때 시골에서 좌익이나 우익 사상이라고 할 만한 걸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겠나? 좌익들이 자신들을 따라다니지 않는다고 우익으로 몬 것이다. 전쟁 전에 진전면에는 「西靑(서북청년단)」이 와 있었다. 좌익들은 형이 西靑을 불러온 것이 아니냐며 형을 추궁했다. 형님은 요 앞 대방마을의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는 얘기만 했다고 한다』
  
  『좌익들이 인민군의 위세를 업고…』
  
  ―西靑이 진전면에서 좌익인사들을 괴롭혔나.
  『네댓 명 와 있었다. 「손짓(毆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 사람들이 이북에서 공산당 등쌀에 못 이겨 넘어온 사람들 아닌가. 「빨갱이를 해서는 안 된다」, 「지도하러 왔다」며 돌아다녔다』
  ―그렇다면 인민군이 점령했다고, 우익 인사들을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나.
  『전쟁 나고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좌익 쪽 사람들이 끌려가서 죽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權씨가 두 명, 卞씨가 세 명 죽었다. 좌익들이 그 분풀이를 한 것이다』
  ―좌익은 보도연맹원들이 끌려갈 때 관련 있었던 사람들을 죽인 건가.
  『경찰에서 끌고간 건데 면장인 우리 형이 무슨 책임이 있나. 또 죽여서 무슨 효력을 보겠나. 그저 私感(사감)으로 죽인 거다. 여기 있던 좌익들이 인민군의 위세를 업고, 우리 세상이 왔다고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췄다. 人民軍(인민군)이 그랬더라면 軍法(군법)이라도 있었을 텐데 자기들 마음대로 사사로운 감정으로 사람을 죽였다』
  산비탈에 위치한 양촌리는 산허리에 나 있는 길을 경계로 위쪽에는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이, 아래쪽은 「진전면 치안대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산허리 길을 주민들은 한때 「38線(선)」으로 불렀다고 한다.●
  
  盧武鉉씨 장인 측의 설명
  
  盧후보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4월11일 權五晳씨의 조카 권경식씨가 쓴 글이 하나 올라왔다. 다음은 그 내용 요약이다.
  <전혀 앞을 못 보는 종숙께서 공산당에게 부역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내 집안의 많은 종숙들은 좌익하다 죽고, 우익하다 죽어 갔습니다. 공직에 근무하다 하루 아침에 두 눈을 실명해 기나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외로운 종숙은 전쟁이 발발하자 아무도 찾아 주지 않는 외로움에, 주·객관이 무시된 채 군당위원회에 부역을 하였으나, 이름만 선전부장이지 종숙께서 행한 부역형태는 우리 모두가 그때 당시를 보지 못했지만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수복이 되어 군경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죄가 경미하다 하여 석방되어 종형도 낳고 평온한 가정을 꾸리다, 당시의 악질 죄인이었던 변모씨가 구속되자 자기가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창원군당의 악질적 일들을 앞도 못 보는 저의 종숙에게 모두 뒤집어씌워 평생을 교도소에서 마감한 종숙의 일생을 우리 후진들은 가슴에 묻고 살아왔습니다. 종숙께서는 집안의 영향을 받아 한학을 하였으며, 공맹사상가였지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출처 :
[ 2002-12-13, 18:37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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