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 주장은 믿을 수 없다!
계엄령 하에서 철통같이 포위된 광주에 수백 명의 북한군이 어떻게 들어오나? 북한군 수백 명이 죽었다는데 屍身은 다 어디로 갔나?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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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를 목격하였던 시민, 시위자, 진압군인, 취재기자들 가운데 북한군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거나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이는 全無(전무)하다. 광주사태를 보지 않고 상상하는 이들중에서 믿는 이들이 많다.
 
 
수년 전부터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일부 단체에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 탈북자는 이런 요지의 주장을 했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개연성이나 증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광주사태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기자들이 취재했다. 외국 기자들도 많았다. 공개리에 일어나고 공개적으로 취재된 사건이다. 비디오와 사진도 많다.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나를 포함한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백 명이라는데, 시민군의 편에 섰다는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3. 광주사태 사망자는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193명이다. 이들중 군인은 23명이고 경찰관이 4명이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13명은 공수부대에 대한 국군 교도대의 오인 사격 등 진압군끼리의 충돌로 죽었다. 5월27일 광주 수복을 위해 계엄군이 진입할 때 국군 3명이 죽었다. 나머지 7명의 군인들이 무장시민들에 의해 죽은 셈이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 그것도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면 국군 사망자가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북한군이 소대규모로 일으킨 1·21 청와대 습격사건, 중대 규모였던 삼척무장공비 사건을 진압하는 데 국군은 各 수십 명의 戰死者(전사자)를 냈다.
  
   4. 당시는 계엄령이 펴진 상태였다.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광주 인근에 낙하산으로 내렸단 말인가? 침투병력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 아닌가? 무장간첩 한 명만 사살해도 부대 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5. 全斗煥(전두환) 정권하에서는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반드시 확인했을 것이다.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6. 탈북자의 증언은 傳言(전언)에 불과하다.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7. 광주사태는 1980년 5월18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직후 광주 일원은 봉쇄되었다.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市外(시외)로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에서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8. 1개 대대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면 약 2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屍身(시신)은 다 어디로 갔나? 갖고 올라 갔나? 북한군으로 의심 가는 屍身은 단 하나도 발견된 게 없다. 그들은 투명인간 부대였던가? 과학적 상식으로도 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요약하면 광주사태를 목격하였던 시민, 시위자, 진압군인, 취재기자들 가운데 북한군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거나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이는 全無하다. 광주사태를 보지 않고 상상에 의존하는 이들중에서 믿는 이들이 많다.
  
   9. 광주發(발) 과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망자가 2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수 차례의 정부 조사로 부정되었다. 또 하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학살장면이다. 5월21일 정오 무렵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원들이 명령 일하에 일제 사격을 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장면은 악랄한 空想(공상)이고 조작이다. 그런 학살도, 그런 사격명령도 없었다. 시민들이 차량을 탈취하여 공수부대원들을 덮쳤고, 현장에서 군인 한 명이 깔려 숨지자 군인들이 버스를 향하여 발포한 것이 본격적인 총격전의 시작이었다. 이런 미신에 북한군 개입이란 또 다른 미신을 추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正義(정의)는 진실에 기초해야 한다.
  
   10. 이념적 입장에서, 또는 희망적 관점에서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反정부적이었지만 親北的(친북적)이진 않았다. 시위대가 간첩 같은 사람이 끼여 있다고 軍 당국에 신고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나왔다. 대한민국 세력은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해선 안 된다. 신념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
  
   11. 일부 방송이 광주사태 시의 북한군 개입 주장이나 서울 도심으로 장거리 땅굴이 들어왔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여과 없이, 때로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소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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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특수부대 광주사태 개입했다”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 임천용 씨 공개증언
   기사출처: 프리존뉴스(2006년 12월20일자 보도)
  
   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의 탈북자 모임인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전 교도지도국 19여단 2대대· 계급 상위)은 20일 오전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80년 발생한 5.18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아래는 이날 기자회견을 주최한 임천용 씨의 증언을 요약한 것이다. <주>
  
   김일성, 김정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복들에게 “연방제 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남조선 혁명은 폭력적 방법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평화적 방법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해왔다.
  
   남한 내 친북세력들이 미군 기지를 공격하며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집회나 4.19나 광주봉기처럼 민주·평화·자주를 외치는 격렬한 시위가 전국을 뒤 덮을 때 민주·애국투사들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무력 개입한다는 전략이다.
  
   역대 남한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불행한 사건들에는 빠짐없이 북한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해왔다.
  
   “북한군 특수부대 광주사태 개입 공공연한 비밀”
  
   다른 것은 접어 두고라도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5.18광주민중항쟁의 경우에도 현역 북한군 출신들, 특히 특수부대 출신들은 북한군 정예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다음은 김일성이 76년 8월, 그리고 80년 5월 대남공작원들에게 내린 비밀지령의 전문이다.
  
   [비밀지령1] “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의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 투쟁을 조직 전개해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비밀지령2]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중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
  
   “북한군 특수부대 5.18 당시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
  
   김일성의 이 같은 비밀지령과 80년 5월을 전후한 북한군의 움직임 등 제반 상황은 광주사태에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됐음을 보여준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 침투 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 돌았다.
  
   또 북한군 4군단 70정찰대대 전투원으로 복무했던 이덕선 씨로부터 당시 정찰국 소속 정찰대대원들의 광주 침투 상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특수부대 1개 대대 해상 통해 남파, 3분의 2가 희생”
  
   이덕선 씨에 따르면 광주봉기 당시 2군단 정찰대대를 모토(motto)로 하고 각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 했다는 것이다.
  
   이덕선 씨가 알고 있는 광주봉기 침투자는 조장이었던 4군단 70정찰대대 상좌 황종인, 부조장이었던 4군단 33사단 중좌, 조원으로 침투했던 4군단 정찰대대 작전집체조의 홍씨 성을 가진 참모였다고 한다.
  
   통상 북한 당국은 남파돼서 임무를 수행하고 귀대하거나 임무수행 중 사망한 공작원 또는 전투원에게 공화국 영웅 칭호와 함께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데 그 수는 1년에 불과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도였다.
  
   이덕선 씨에 따르면 80년에 2군단 75정찰대대에서만 41명의 공화국 영웅이 배출됐고 타 부대들에서 21명, 도합 62명의 영웅이 나왔다고 한다. 북한의 경우 평화시기에는 남파간첩이나 전투원이 아니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 일이 거의 없음을 감안할 때 한 해 동안에 62명의 전투영웅이 탄생했다는 것은 대남침투관련 거대 작전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한군 광주사태 개입 확신, 진상 반드시 밝혀야”
  
   이외에도 당시에는 국군에 없었던 카빈 소총이나 M1 소총에 맞은 시신이 수십 여구라던가, 봉기자(시민군)들이 정부군의 탱크와 장갑차를 탈취해 진압군을 공격했다든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이 있는 등 아직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북한에서의 체험과 이상의 근거들만 가지고도 광주민주항쟁에는 분명히 북한군이 개입됐다고 확신한다. 대남적화통일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신성한 민주시위를 유혈 폭동으로 몰아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제물로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5.18광주 민주화 영령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광주 사태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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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사태 개입 주장은 이래서 말이 안 됩니다!
  
  상식적인 保守분들께 특전사 출신이 글을 올립니다.
  bulleter(토론방)
  
  
   상식적인 보수 분들을 위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현재 휴전 이후 對非正規戰史에 따르면 역대 最多병력을 침투시킨 사건은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2일에 걸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120명입니다. 북한이 세 번에 걸쳐 내려 보낸 병력이 1개 중대급인 120명이었습니다. 그것도 남한의 무력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전이 구상되었고 병력 차출은 1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준비기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기간 중에 남한화 교육은 많이 부족해서 실제 침투 후에는 별무 소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작전은 모두 궤멸된 것으로 종료되었고 민간인이 24명이나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과 종편 방송에서 달궈지는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따르면 1개 중대도 아니고 1개 대대라고 합니다. 그것도 신출귀몰하게 모두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도 300 명이 넘는다고 하고요.
   ▲ 여러분이 인민군 특수8군단의 총책임자라고 칩시다. 우발적으로 터진 광주사태를 찬스라고 보고 긴급히 400여명의 병력을 동원, 선박으로 목포 인근 해안까지 침투하는 작전을 시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더구나 소요사태에 개입하여 사보타지를 하고 남한의 특전사 병력과의 전투를 치른 뒤에 단 한 명의 屍身이나 흔적도 없이 북한으로 철수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무기가 나돌아 다니고 계엄군과 시민군과의 총격전이 있었던 날짜는 5월20일, 21일, 22일, 5월27일입니다. 이 불특정 4일간을 위해 1개 대대가 내려와 함께 총질하다 철수했다고요? 철수 루트는 해상이나 육상일 텐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요?
   ▲ 해상 철수라면 선박이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모(母)기지와 선박과 팀 간의 통신은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당시 對北 감청부대가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시 책임자를 찾아 문책해야 마땅합니다. 주한미군의 정보부대 역시 상당한 수준의 감청능력과 장비를 가동하고 있었을 텐데 그들도 잠을 잤을까요? 통신 없이 장기 작전을 1개 대대병력이 敵地에서 한다? 現代戰에서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것도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입니다.
   ▲ 육상철수를 했을지 모른다고요? 그럼 全軍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휴전선에 구멍이 그것도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게다가 屍身까지 짊어지고 돌아갔다면 더더구나 말입니다. 당시 前方 사단장을 찾아내 문책해야 마땅합니다.
   ▲ 게다가 대규모 비정규전으로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다가 몇 번의 실패를 하고 후회하던 金日成이 과연 이 작전을 허락했을까요? 1.21 침투작전이 실패하자 김일성은 美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일으켜 빠져나가지만 실제로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電光石火같은 추진력으로 그 해 4월1일 예비군을 창설합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그해 10월 말 대규모(120명) 공비를 울진과 삼척에 투입하지요. 이들은 한 달반 만에 궤멸됩니다. 예비군의 저력을 체감한 계기가 됩니다. 이 두 번의 대규모 공격이 북한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줍니다.
   남한은 M-16 개인화기를 생산하게 되었고 공군에서는 당시 아시아 최강기종인 F4-D를 수입하게 되지요. 본격적인 자주국방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 경험을 가진 김일성이가 광주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는 판에 1개 대대를 해상 투입했다?
   ▲ 잠시 特殊戰 이야기를 해 보지요. 특수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훈련은 수색, 정찰, 침투, 매복, 습격, 도피 및 탈출 정도가 되는데, 일반 보병들의 각개전투처럼 날이면 날마다 연습에 연습을 합니다. 부대 구성은 팀(조)단위로 구성되지요. 일반 보병처럼 중대니 대대니 하는 단위는 특수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통제가 안 되니 자멸하는 셈이거든요. 전술목표도 팀별로 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특수전은 線이 아닌 點의 전술입니다. 울진 삼척 침투사건도 15명 7개조로 운영된 작전이었습니다(당시 작전은 활동반경과 작전기간 등을 고려해서 15명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여러 팀이 각자 활동을 하다보면 별 별 우발사태가 다 생깁니다. 실제로 울진 삼척 공비들도 그랬습니다. 우발사태는 상상을 초월하므로 언제든 발생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내려 보낸 1개 대대가 그런 우발사태 하나 없이 사라졌다?!
   ▲ 特殊戰의 성패는 준비단계에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이를 토대로 사전의 예행연습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야 은밀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준비 기간이 요구됩니다. 적어도 광주에 침투시켜 일반인들과 뒤섞여 사보타지를 하려면 현지화 교육에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립니다. 더구나 이 정도의 작전을 수행하려면 아끼는 엘리트級 부하들을 死地에 내 몰아야 하고 예산의 뒷받침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막강한 권력이 실패의 책임을 막아 주어야 하고요. 이런 희생을 치렀을 때 구체적으로 김일성이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인지도 명확해야 할 겁니다. 이 설명에 대한 답안들이 현실적으로 마련되는지요?
   ▲ 광주사태 이후 오늘날까지 제법 많은 북한의 고위급 간부들이 우리에게 넘어와 살고 있지요. 그들 중에 과연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작전과 관련한 정보에 접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요? 돌아가신 황장엽 선생도 광주사태에 병력을 침투시켰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는데도 말이지요? 아-, 밑에 사람들의 이야기, '카더라-'식의 이야기는 논의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봅니다.
   ▲ 자, 이제 차분하게 생각해 봅시다. 인민무력부장이 실패하면 자기 목이 달아나게 되는데 이런 작전계획을 수립해서 김일성에게 보고했을까요? 아니면 김일성이 직접 지시를 했을까요? 1968년 이후 김일성의 對南무력도발은 그 전술이 바뀌어졌습니다. 더 이상 대규모 침투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지요. 이 정도는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 5.18이 나던 해인 1980년 3월23일에 한강 하구에서 3인조 무장공비가 침투하다 사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찰임무를 띠고 수중침투를 시도하다 아군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지요. 실상 이들이 최정예 요원들입니다. 81년 6월21일에는 충남 서산에서 무장간첩선이 격침됩니다. 전과는 9명 사살에 1명 생포였지요. 물론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정보는 고사하고 카더라 식의 첩보도 없었습니다. 선박과 탑승인원을 보십시오. 많이 태울수록 배는 느려집니다. 발각될 경우 도주를 위해 특별히 강화된 엔진을 달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 무렵 제가 정보 분야에서 근무할 때라 합심조로 나가 현장조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비닐을 씌우고 노란 고무줄로 칭칭 감은 防水 처리한 랜턴이었습니다. 게다가 허벅지를 보니 제 허리만큼 굵어서 훈련을 엄청 시킨다는 걸 알았지만...1개 대대라...
   ▲ 우리가 긴가 민가 확인이 안 되거나 지금처럼 주장이 난무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에 들어가서 조사할 수도 없을 경우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5.18을 전후한 북한의 對南공작 수준을 견주어 보는 거지요. 침투장비나 기술, 전술적 변화 등을 모아 보는 겁니다. 갑자기 패턴이 바뀌지는 않거든요.
   80년대에 북한이 작심하고 크게 시행한 비정규전이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1983년 10월9일 아웅산 테러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 11월29일의 KAL 858기 폭파사건입니다. 작전의 성격과 규모 등이 보이지요. 최소한의 정예요원으로 최대의 타격효과를 노리는 테러전략으로 선회하는 겁니다.
   ▲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 1개 대대씩 투입해서 무얼 얻고자 한 것일까요? 김일성식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도 정권 담당자는 항상 수지 타산을 합니다. 손해날 짓은 안하는 겁니다.
   ▲ 자꾸 이상한 상상력을 동원하는 분들의 공통된 의문문이 있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민간인들이 중화기를 다루고 교도소를 습격하나? 다 뒤에 뭔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런 분들일수록 모범생으로 살아오신 공통점이 있습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규모 시위에 참여한 경험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흥분한 군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겁니다. 그저 책상에 앉아 자신의 경험 속에서 상상을 하는 거니 답이 이상하게 나올 수밖에요.
   ▲ 저는 군생활(수색대대, 특전사 등)의 경험과 대학생으로서 시위 주동의 경험 둘 다 있습니다. 군중을 모아놓고 보면 그 안에 별의 별 주특기를 다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버스 운전, 중장비 운전, 106 박격포 주특기. 전기기술자, 보일러공, 폭약 전문가...더구나 흥분한 군중들은 자신의 군생활 경험 속에 녹아있던 무기 다루는 기술들을 충분히 발휘합니다.
   ▲ 요즘은 민주화, 정보화의 시대를 맞아 전직 특수전 용사들이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특수전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나누곤 합니다. 저도 한두 군데 드나들곤 하는데, 이 사람들이 예비역 특전용사들이지요. 이야기가 진행되면 점프했을 때의 추억부터 폭파하다 실수한 이야기 등등 많은 사건들을 회고하거나 해외 특수전 자료들을 개재해서 공유하곤 합니다. 비록 민간인 신분이기는 하지만 전투감각을 아직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쓰곤 하지요. 이들은 북한의 군사력과 군사정보에 관해서도 전문가 이상의 안목과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양반들에게 참 부끄럽습니다. 이 양반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 1개 대대가....'식의 이야기는 한 토막도 내 걸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피식 웃어버리고는 '재수 없다'는 식으로 시선을 딴 데로 돌립니다. 말로 하자니 입 아프다는 거지요. 그리고 사람대접을 안 해 줍니다. '왕따' 그 자체가 됩니다.
   ▲ 그래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 때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만들어서 유포하는 바람에 ....만화영화로도 앞뒤가 안 맞을 내용을...
   ▲ 광주사태 당시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로 비춰질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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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5-19, 16: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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