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에서 북한군의 광주 개입설 검증,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냈다”
국정원의 당시 고위간부 증언, “위령비 사진도 광주와 무관”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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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李明博 정부의 국가정보원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하였던 한 인사는 “북한군이 광주사태에 개입하였다는 주장을 검증한 적이 있는데, 북한군이 온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 인사는 “일부 인사들이 그런 주장을 하기에 院 차원에서 조사를 하였다. 북한에 세워졌다는 남파 북한군의 위령비도 광주사태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말하였다.
   수년 전부터 한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고 일부 단체에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이 탈북자는 이런 요지의 주장을 했다.
   <5·18사태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우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 광주사태에 대해 긴급속보로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부 비 편제 서기로 자주 동원됐던 나는 나중에야 당시 제10군단장이었던 여병남과 7군단 참모장이었던 김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침투했었고 희생도 많았지만 공로가 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북한군 특수부대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광주에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말이 공공연한 비밀로 나돌았다. 특수부대들에서 선발한 최정예 전투원 1개 대대가 해상을 통해 남파됐으며 그중 3분의 2가 희생되고 나머지 인원이 모두 귀대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개연성이나 증거가 없다.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함이 타당할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1. 광주사태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광주시민 수십 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수백 명의 직업적 구경꾼들, 즉 기자들이 취재했다. 외국 기자들도 많았다. 공개리에 일어나고 공개적으로 취재된 사건이다. 비디오와 사진도 많다. 광주사태를 취재했던 나를 포함한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2.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한군이 대대규모, 즉 수백 명이라는데, 시민군의 편에 섰다는 이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다.
   3. 광주사태 사망자는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193명이다. 이들중 군인은 23명이고 경찰관이 4명이다. 군인 사망자 23명 중 13명은 공수부대에 대한 국군 교도대의 오인 사격 등 진압군끼리의 충돌로 죽었다. 5월27일 광주 수복을 위해 계엄군이 진입할 때 국군 3명이 죽었다. 나머지 7명의 군인들이 무장시민들에 의해 죽은 셈이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 그것도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면 국군 사망자가 이 정도에 그칠 리가 없다. 북한군이 소대규모로 일으킨 1·21 청와대 습격사건, 중대 규모였던 삼척무장공비 사건을 진압하는 데 국군은 各 수십 명의 戰死者(전사자)를 냈다.
   4. 당시는 계엄령이 펴진 상태였다.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어떻게 침투한단 말인가? 광주 인근에 낙하산으로 내렸단 말인가? 침투병력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이들을 섬멸한 국군이 있을 것 아닌가? 무장간첩 한 명만 사살해도 부대 표창을 받는데 수백 명을 사살한 국군 부대가 이 자랑스런 사실을 숨겼단 말인가?
   5. 全斗煥(전두환) 정권하에서는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이를 반드시 확인했을 것이다.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었다.
   6. 탈북자의 증언은 傳言(전언)에 불과하다.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7. 광주사태는 1980년 5월18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직후 광주 일원은 봉쇄되었다. 5월21일 계엄군은 광주시내에서 철수, 외곽을 포위했다. 이때 市外(시외)로 빠져나가던 시민들이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의 총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이런 상황에서 광주로 잠입했다면 국군과 대규모 전투가 발생했을 것이다. 광주에서 정규군끼리의 충돌은 한 건도 없었다. 김일성(또는 김정일)이 5월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의 출동을 명령했다고 해도 그 부대가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20일 이후일 것이다. 그때는 이미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되어 있을 때였다. 수백 명의 북한군이 등장할 무대는 없었다.
   8. 1개 대대중 3분의 2가 희생되었다면 약 200명이 죽었다는 이야기인데, 屍身(시신)은 다 어디로 갔나? 갖고 올라 갔나? 북한군으로 의심 가는 屍身은 단 하나도 발견된 게 없다. 그들은 투명인간 부대였던가? 과학적 상식으로도 성립이 불가능한 주장이다. 요약하면 광주사태를 목격하였던 시민, 시위자, 진압군인, 취재기자들 가운데 북한군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거나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이는 全無하다. 광주사태를 보지 않고 상상에 의존하는 이들중에서 믿는 이들이 많다.
   9. 광주發(발) 과장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망자가 2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수 차례의 정부 조사로 부정되었다. 또 하나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 나오는 학살장면이다. 5월21일 정오 무렵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비무장 시민들을 향하여 공수부대원들이 명령 일하에 일제 사격을 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장면은 악랄한 空想(공상)이고 조작이다. 그런 학살도, 그런 사격명령도 없었다. 시민들이 차량을 탈취하여 공수부대원들을 덮쳤고, 현장에서 군인 한 명이 깔려 숨지자 실탄을 갖고 있던 장교들이 차량을 향하여 발포한 것이 본격적인 총격전의 시작이었다.
   10. 광주사태에 대한 국가적 조사는 1980년 사건 직후 계엄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의 국회 청문회, 1995년의 검찰 및 국방부 조사, 1996~97년의 5.18 재판 등 다섯 차례가 있었다. 작년 국정원의 비공개 조사까지 더하면 여섯 번이다. 이 여섯 번의 조사중 북한군이 대대규모로 들어왔었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11. 이념적 입장에서, 또는 희망적 관점에서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는 反정부적이었지만 親北的(친북적)이진 않았다. 시위대가 간첩 같은 사람이 끼여 있다고 軍 당국에 신고하기도 했었다.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늘 나왔다. 대한민국 세력은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해선 안 된다. 신념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
   12. 일부 방송이 광주사태 시의 북한군 개입 주장이나 서울 도심으로 장거리 땅굴이 들어왔다는 주장을 검증 없이, 여과 없이, 때로는 시청률을 높이기 위하여 소개하는 것은 위험하다.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사태 개입 주장은 이래서 말이 안 됩니다!
   -상식적인 保守분들께 특전사 출신이 글을 올립니다.
   bulleter(토론방)
  
  
   상식적인 보수 분들을 위해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 현재 휴전 이후 對非正規戰史에 따르면 역대 最多병력을 침투시킨 사건은 1968년 10월30일부터 11월2일에 걸친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120명입니다. 북한이 세 번에 걸쳐 내려 보낸 병력이 1개 중대급인 120명이었습니다. 그것도 남한의 무력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전이 구상되었고 병력 차출은 1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준비기간이 필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이 기간 중에 남한화 교육은 많이 부족해서 실제 침투 후에는 별무 소용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작전은 모두 궤멸된 것으로 종료되었고 민간인이 24명이나 희생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터넷과 종편 방송에서 달궈지는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따르면 1개 중대도 아니고 1개 대대라고 합니다. 그것도 신출귀몰하게 모두 북한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도 300 명이 넘는다고 하고요.
   ▲ 여러분이 인민군 특수8군단의 총책임자라고 칩시다. 우발적으로 터진 광주사태를 찬스라고 보고 긴급히 400여명의 병력을 동원, 선박으로 목포 인근 해안까지 침투하는 작전을 시행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더구나 소요사태에 개입하여 사보타지를 하고 남한의 특전사 병력과의 전투를 치른 뒤에 단 한 명의 屍身이나 흔적도 없이 북한으로 철수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무기가 나돌아 다니고 계엄군과 시민군과의 총격전이 있었던 날짜는 5월20일, 21일, 22일, 5월27일입니다. 이 불특정 4일간을 위해 1개 대대가 내려와 함께 총질하다 철수했다고요? 철수 루트는 해상이나 육상일 텐데 그게 가능이나 할까요?
   ▲ 해상 철수라면 선박이 대기하고 있어야 합니다. 북한의 모(母)기지와 선박과 팀 간의 통신은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당시 對北 감청부대가 계속 잠만 자고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시 책임자를 찾아 문책해야 마땅합니다. 주한미군의 정보부대 역시 상당한 수준의 감청능력과 장비를 가동하고 있었을 텐데 그들도 잠을 잤을까요? 통신 없이 장기 작전을 1개 대대병력이 敵地에서 한다? 現代戰에서 前無後無(전무후무)한 일입니다. 그것도 귀신같이 사라지고 말입니다.
   ▲ 육상철수를 했을지 모른다고요? 그럼 全軍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휴전선에 구멍이 그것도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렸다는 얘기밖에 안됩니다. 게다가 屍身까지 짊어지고 돌아갔다면 더더구나 말입니다. 당시 前方 사단장을 찾아내 문책해야 마땅합니다.
   ▲ 게다가 대규모 비정규전으로 남한 사회를 뒤흔들었다가 몇 번의 실패를 하고 후회하던 金日成이 과연 이 작전을 허락했을까요? 1.21 침투작전이 실패하자 김일성은 美 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일으켜 빠져나가지만 실제로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거의 電光石火같은 추진력으로 그 해 4월1일 예비군을 창설합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그해 10월 말 대규모(120명) 공비를 울진과 삼척에 투입하지요. 이들은 한 달반 만에 궤멸됩니다. 예비군의 저력을 체감한 계기가 됩니다. 이 두 번의 대규모 공격이 북한에게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줍니다.
   남한은 M-16 개인화기를 생산하게 되었고 공군에서는 당시 아시아 최강기종인 F4-D를 수입하게 되지요. 본격적인 자주국방을 하게 되거든요. 그런 경험을 가진 김일성이가 광주사태가 어떻게 진행될지도 모르는 판에 1개 대대를 해상 투입했다?
   ▲ 잠시 特殊戰 이야기를 해 보지요. 특수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훈련은 수색, 정찰, 침투, 매복, 습격, 도피 및 탈출 정도가 되는데, 일반 보병들의 각개전투처럼 날이면 날마다 연습에 연습을 합니다. 부대 구성은 팀(조)단위로 구성되지요. 일반 보병처럼 중대니 대대니 하는 단위는 특수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통제가 안 되니 자멸하는 셈이거든요. 전술목표도 팀별로 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특수전은 線이 아닌 點의 전술입니다. 울진 삼척 침투사건도 15명 7개조로 운영된 작전이었습니다(당시 작전은 활동반경과 작전기간 등을 고려해서 15명으로 늘렸다고 합니다). 여러 팀이 각자 활동을 하다보면 별 별 우발사태가 다 생깁니다. 실제로 울진 삼척 공비들도 그랬습니다. 우발사태는 상상을 초월하므로 언제든 발생합니다. 그런데 북한이 내려 보낸 1개 대대가 그런 우발사태 하나 없이 사라졌다?!
   ▲ 特殊戰의 성패는 준비단계에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와 이를 토대로 사전의 예행연습이 수도 없이 반복되어야 은밀한 작전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준비 기간이 요구됩니다. 적어도 광주에 침투시켜 일반인들과 뒤섞여 사보타지를 하려면 현지화 교육에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립니다. 더구나 이 정도의 작전을 수행하려면 아끼는 엘리트級 부하들을 死地에 내 몰아야 하고 예산의 뒷받침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물론 막강한 권력이 실패의 책임을 막아 주어야 하고요. 이런 희생을 치렀을 때 구체적으로 김일성이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인지도 명확해야 할 겁니다. 이 설명에 대한 답안들이 현실적으로 마련되는지요?
   ▲ 광주사태 이후 오늘날까지 제법 많은 북한의 고위급 간부들이 우리에게 넘어와 살고 있지요. 그들 중에 과연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작전과 관련한 정보에 접촉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까요? 돌아가신 황장엽 선생도 광주사태에 병력을 침투시켰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는데도 말이지요? 아-, 밑에 사람들의 이야기, '카더라-'식의 이야기는 논의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봅니다.
   ▲ 자, 이제 차분하게 생각해 봅시다. 인민무력부장이 실패하면 자기 목이 달아나게 되는데 이런 작전계획을 수립해서 김일성에게 보고했을까요? 아니면 김일성이 직접 지시를 했을까요? 1968년 이후 김일성의 對南무력도발은 그 전술이 바뀌어졌습니다. 더 이상 대규모 침투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지요. 이 정도는 여러분도 다 아실 겁니다.
   ▲ 5.18이 나던 해인 1980년 3월23일에 한강 하구에서 3인조 무장공비가 침투하다 사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찰임무를 띠고 수중침투를 시도하다 아군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지요. 실상 이들이 최정예 요원들입니다. 81년 6월21일에는 충남 서산에서 무장간첩선이 격침됩니다. 전과는 9명 사살에 1명 생포였지요. 물론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정보는 고사하고 카더라 식의 첩보도 없었습니다. 선박과 탑승인원을 보십시오. 많이 태울수록 배는 느려집니다. 발각될 경우 도주를 위해 특별히 강화된 엔진을 달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이 무렵 제가 정보 분야에서 근무할 때라 합심조로 나가 현장조사에 참여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비닐을 씌우고 노란 고무줄로 칭칭 감은 防水 처리한 랜턴이었습니다. 게다가 허벅지를 보니 제 허리만큼 굵어서 훈련을 엄청 시킨다는 걸 알았지만...1개 대대라...
   ▲ 우리가 긴가 민가 확인이 안 되거나 지금처럼 주장이 난무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에 들어가서 조사할 수도 없을 경우 판단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5.18을 전후한 북한의 對南공작 수준을 견주어 보는 거지요. 침투장비나 기술, 전술적 변화 등을 모아 보는 겁니다. 갑자기 패턴이 바뀌지는 않거든요.
   80년대에 북한이 작심하고 크게 시행한 비정규전이 두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1983년 10월9일 아웅산 테러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 11월29일의 KAL 858기 폭파사건입니다. 작전의 성격과 규모 등이 보이지요. 최소한의 정예요원으로 최대의 타격효과를 노리는 테러전략으로 선회하는 겁니다.
   ▲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 1개 대대씩 투입해서 무얼 얻고자 한 것일까요? 김일성식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도 정권 담당자는 항상 수지 타산을 합니다. 손해날 짓은 안하는 겁니다.
   ▲ 자꾸 이상한 상상력을 동원하는 분들의 공통된 의문문이 있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민간인들이 중화기를 다루고 교도소를 습격하나? 다 뒤에 뭔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런 분들일수록 모범생으로 살아오신 공통점이 있습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규모 시위에 참여한 경험이 없다는 거지요. 그러니 흥분한 군중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는 겁니다. 그저 책상에 앉아 자신의 경험 속에서 상상을 하는 거니 답이 이상하게 나올 수밖에요.
   ▲ 저는 군생활(수색대대, 특전사 등)의 경험과 대학생으로서 시위 주동의 경험 둘 다 있습니다. 군중을 모아놓고 보면 그 안에 별의 별 주특기를 다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버스 운전, 중장비 운전, 106 박격포 주특기. 전기기술자, 보일러공, 폭약 전문가...더구나 흥분한 군중들은 자신의 군생활 경험 속에 녹아있던 무기 다루는 기술들을 충분히 발휘합니다.
   ▲ 요즘은 민주화, 정보화의 시대를 맞아 전직 특수전 용사들이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특수전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나누곤 합니다. 저도 한두 군데 드나들곤 하는데, 이 사람들이 예비역 특전용사들이지요. 이야기가 진행되면 점프했을 때의 추억부터 폭파하다 실수한 이야기 등등 많은 사건들을 회고하거나 해외 특수전 자료들을 개재해서 공유하곤 합니다. 비록 민간인 신분이기는 하지만 전투감각을 아직도 유지하려 무진 애를 쓰곤 하지요. 이들은 북한의 군사력과 군사정보에 관해서도 전문가 이상의 안목과 식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양반들에게 참 부끄럽습니다. 이 양반들은 '광주사태에 북한군 1개 대대가....'식의 이야기는 한 토막도 내 걸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끼리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피식 웃어버리고는 '재수 없다'는 식으로 시선을 딴 데로 돌립니다. 말로 하자니 입 아프다는 거지요. 그리고 사람대접을 안 해 줍니다. '왕따' 그 자체가 됩니다.
   ▲ 그래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 때도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만들어서 유포하는 바람에 ....만화영화로도 앞뒤가 안 맞을 내용을...
   ▲ 광주사태 당시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분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들로 비춰질지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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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조선 보도로 간단하게 부인된 북한군 개입說
  망월동에 북한군 시신을 묻었다는 주장, 북한에 열사묘가 있다는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
  조갑제닷컴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들어왔다는 탈북자의 주장은 어제 TV조선 보도국의 취재로 간단하게 부정되었다. 이렇게 황당한 주장을 믿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데 놀라지 말고 그 원인을 알아볼 만하다. 기자가 사명을 다하면 이렇게 신속하게 루머를 잠재울 수 있는데, 북한군 개입설이 확산되는 7년간 기자도,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다. 반박되지 않는 거짓은 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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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사태 관련 루머와의 투쟁史
  TV조선
   [앵커 최희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잊어서는 안되지만 잊고만 싶은 가슴 아픈 사건이 있습니다. 33년 전 5월 광주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실체적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각종 루머와의 전쟁을 거쳤습니다. 사건 초기에는 광주가 봉쇄되면서 피해자 측에서 나온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퍼졌고 최근에는 탈북자들로부터 흘러나온 주장들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광주가 겪은 어쩌면 지금도 겪고 있는 ‘루머와의 전쟁’을 이재민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1980년 광주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착되기까지 각종 루머와 치열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초기에는 피해자 입장에서 나온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루머가 광주에서 2천 명이 사망했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은 '2천명설'은 외신보도가 국내로 들어와 낭설로 떠돌았다고 증언합니다. 일부 언론도 '2천명설'을 보도했지만 1995년 김영삼 정부 때 서울지검은 사망자가 193명(조갑제닷컴 注: 군인 23명, 경찰관 4명, 민간인 166명)이라고 발표했고, 5·18 기념재단이 현재 보상 현황에서 밝힌 사망자는 154명(민간인)입니다. 뜬소문이 많이 나온 이유는 당시 광주가 외부와 단절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7공수여단은 40%가 호남 출신이었습니다.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화염방사기로 시위대를 사살했다는 루머도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 조남준 / 광주민주화운동 현장 취재기자
   "이상한 소리 퍼뜨리고. 2천명이 죽었네, 3천명이 죽었네. 그 사람들이 퍼뜨렸을 가능성이 있죠. 북한 방송 보면 그렇게 돼 있어."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유가족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실체를 밝히려는 노력이 이어졌고, 계엄군부터 1995년 검찰의 조사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조사를 통해 상당 수의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났습니다. 하지만 최근 탈북자들이 북한과 관련한 주장을 하면서 새로운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군 대대 병력 투입설이 대표적입니다. 사건 초기에도 북한군 개입설이 신군부의 입장에서 제기되기도 했지만, 근거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탈북자 증언 형태로 개입설이 주장되지만, 이런 루머도 언론 취재와 증거확보를 통해 진실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근거없는 소문을 惡意的으로 퍼뜨리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확대 재생산하는 부분입니다.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이 우선되면 근거없고 증거없는 루머는 사그라들 것으로 보입니다. TV조선 이재민입니다.
  
  
  
   [앵커]
   북한 인민군이 1개 대대나 광주에 들어왔다는 또 다른 근거로 제기되고 있는 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屍身과 행방 불명자들이 알고보면 북한군일 것이다, 이런 주장입니다. 이것 또한 상황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근거없는 얘기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강성명 기자입니다.
  
   [리포트]
   북한군 장교 출신 임천용 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십명의 행방불명자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屍身이 북한군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녹취] 임천용 / 전 북한 특수부대 장교: "망월동에 지금 있는 신원 미상자, 60~70명에 가까운 행불자! 5·18 광주 사건 때 70명 가까운 행불자가 어디로 날아갔어요."
  
   과연 사실일까? 5·18 국립묘지에 있는 '무명열사의 묘'입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시신은 5구에 불과합니다. 이마저도 당시 檢屍書를 보면 차 위에서 시위를 하다 떨어져 숨졌거나 4살짜리 아이 그리고 40대 남성 등으로 북한군과는 거리가 멉니다.
  
   [인터뷰] 송선태 / 5ㆍ18기념재단 상임이사: "특수군 부대라고 하면 차량에서 떨어질 만큼 어리석지 않을 것이고 4세 가량의 남자아이를 특수군 부대로 파견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신을 찾지 못해 행방불명자가 된 이들에 대한 주장은 더더욱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5·18 당시 실종된 66명의 행방불명자를 추모하는 곳입니다. 비석마다 이렇게 생년월일은 물론, 가족들의 이름까지 정확히 적혀 있습니다. 모두 대한민국 국적으로 가족이 있고 신원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들도 북한군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인터뷰] 정현종 / 국립 5·18 민주묘지 관리소장: "부모의, 신청인의 인적 사항이 있었고, 이렇기 때문에 첫째 행방불명되신 분은 분명히 6하 원칙에 의해서 이 지역에서, 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 호적상 증명이 되고 있어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5구의 屍身 그리고 시신을 찾지 못한 행방불명자들. 그 어디에서도 북한군 개입을 뒷받침할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TV조선 강성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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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
   광주민주화 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을 하는 쪽에서 근거로 드는 게 또 하나 있습니다. 북한에 있다는 ‘인민군 영웅들의 열사묘'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투입됐다가 귀환하지 못한 북한 특수 부대원들이 여기에 묻혀 있다는 건데, 이것 역시 황당한 얘기라는 게 대한민국 정보 당국이 내린 결론입니다. 정세영 기자입니다.
  
   [리포트]
   함경북도 청진시 낙양동에 있는 북한군 假墓(가묘)입니다. 가묘들 가운데 있는 비석 앞면에는 '인민군영웅들의 렬사묘'라고 적혀 있고, 뒷면엔 '당과 인민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라는 설명과 함께 이름들이 빼곡이 적혀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측은 이 묘비를 증거로 제기합니다.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바로 광주민주화운동에 투입됐다가 복귀하지 못한 북한군 특수부대원이라는 겁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에 성공한 공로로 북한 對南부서 소속 인원들은 훈장도 받았다"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나 김덕홍 전 려광무역연합총회사 사장 등 최고위급 귀순자들의 증언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게 우리 정보당국의 판단입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 중견 언론인도 같은 내용을 국정원 고위관계자로부터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북한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조종했다고 주장해 체제우위를 선전하고 내부결속을 다지려 했을지는 모르지만, 인민군 열사묘는 광주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TV조선 정세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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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狂信을 狂信으로, 거짓을 거짓으로 이길 수는 없다
  '북한군 개입설'을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천안함 폭침 북한 소행 부정'과 같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양식 있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趙甲濟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不朽의 명작('1984', '동물농장')으로 드러낸 조지 오웰은, 親知(친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공산주의 및 파시즘과 싸우려면 우리도 같은 정도의 狂信(광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에는 同意(동의)할 수 없다. 狂信者들을 이기려면 우리는 狂信者가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머리를 써야 이길 수 있다.>
  
   '광주사태에 대대규모의 북한군 잠입'이란 황당한 주장을 빌어 좌파를 공격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警句(경구) 같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용으로는 괜찮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狂信을 狂信으로, 거짓을 거짓으로 이길 수는 없다. 좌익이 즐겨 쓰는 방법을 답습하지 말고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이겨야 한다. 오웰은 말한다. "거짓이 판 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게 혁명이다."
   자유인들이 그런 진실의 무기를 포기하면 진다. 진실 위에 正義를 세워야지, 正義 위에 진실을 세우려 하면 자기부정으로 自滅한다. 가장 큰 설득력은 진실과 品格이다.
  
   '북한군 개입설'을 신봉한다는 것 자체가 '천안함 폭침 북한 소행 부정'과 같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고, 양식 있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좌익 선동세력과 같아지는 길이다. 자유진영은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포기해선 안 된다. 진실-正義-자유가 보수의 신조이다. 대한민국 세력이, '북한군 개입설'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지 못하면 종북좌파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 '북한군 개입설'은 자유투사들의 분별력과 용기를 잠재우는 수면제이다.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 개입설'과 같은 황당무계한 억지, 최소한의 認識능력만 있어도 허구성을 곧 바로 알 수 있는 주장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폭로가 된다. 600명의 군인들이 흔적도 없이 나타나, 유혈사태를 저지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투명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하고, SF 영화로도 만들 수 없는 일 아닌가? 30여 명의 특공대가 침투한 1.21 사태, 100여 명이 침투한 울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全軍이 출동해야 했었는데, 600명이 침투하였는데도, 보고된 충돌 한 건도, 屍身 한 구도, 그들을 본 국군 한 사람도 없다니! "나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믿으려 할까"라고 自省해보면 많은 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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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甲濟, '영화 '화려한 휴가'의 왜곡은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심각'
  5월22일 방영된 TV조선 <시사토크 판>에 출연한 趙甲濟 대표 대담록 全文
  조갑제닷컴
  
  
  *33년 전 광주사태 당시 부산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셨죠?
  
  趙甲濟(이하 성명 생략): 네.
  
  *사회부 기자로서 회사의 방침에 불복하고 광주에 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불복했다기보다는 제가 그 당시에 釜馬(부마)사태에 대한 책을 쓰고 있었어요. 그 연장선상에서 광주사태가 났기 때문에 직업적 호기심에 휴가를 내고 광주에 갔습니다.
  
  *그래서 해고까지 되셨죠?
  
  그것 때문에 해고되고, 그 뒤에 新軍部(신군부)가 해고된 걸 모르고 解職者(해직자) 명단에 넣어서 확인射殺(사살) 당했습니다.
  
  
  ‘북한군 개입說’이 나온 지 7년… 아무도 檢證하지 않았다!
  
  *‘광주는 당시에 어땠다’라고 한 마디로 얘기하면 어떻습니까?
  
  제가 광주사태에 대해선 지금까지 취재하고 있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5월23일부터 27일까지 취재를 했습니다. 시민들도 만나고 진압한 공수부대원들도 만났습니다. 정치적으로 그 상황을 관리했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것은 그 성격이 이미 確定(확정)된 사건입니다. 최근에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루머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계속 바로 잡는 과정을 통해 광주사태의 眞相(진상)이 확정되었다고 봅니다.
  
  아까 TV조선에서 보도한 것도 광주사태를 정확하게 알리는 데 매우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의 특종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탈북자들의 주장이 나온 지 7년이 됐습니다. 7년이 되었는데 단 한 명의 기자도 그 말을 檢證(검증)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이 여기까지 커졌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습니까? 광주에서 북한군을 보셨습니까?
  
  광주사태가 마치 山中(산중)에서 일어난 것처럼 오해가 많아요. 이것은 수 백 명의 기자들이 보는 데에서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리고 금남로라고 하는 무대가 있어요. 여긴 크지 않아요. 이런 데에서 일어난 사건이 감춰질 수가 없어요. 그동안 다섯 번의 국가적 조사가 있었습니다. 한 번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정황도 증거도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간단합니다.
  
  제가 처음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說’) 이야기를 들은 게 2008년인데, 들었을 때 첫 인상이 ‘황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는데 6년 동안 커졌습니다. 이런 정치적 사안이 반박되지 않으면, 거짓말은 진실이 됩니다. 반박해야 할 사람이 반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렇게 커졌습니다. 반박해야 할 사람이 누구냐? 첫째 기자입니다. 기자들이 그 주장을 檢證(검증)했어야 해요. 오늘 墓域(묘역)에 가서 검증을 하니까 금방 드러났죠? 또 광주 희생자 분들도 반박하는 데 충분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계엄령 下에서 ‘600명 침투’는 ‘투명인간’ 아니면 불가능
  
  *왜 희생자 유족들이나 희생자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반박하지 않았나요? 너무 황당해서 그런가요?
  
  그런 것 같아요. 국가기관이 여기에 대해 반박을 했어야 합니다. 누가 했어야 했느냐? 국방부가 했어야 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600명의 특수부대가 흔적도 없이 나타나서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국방부는 무엇을 한 것입니까? 그 당시 계엄령下에서 철통같은 포위망이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광주 주변을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군 특수부대 500~600명이든 광주로 들어갔다면 에워싸고 있던 군인들은 완전 허수아비였다는 이야기인데요?
  
  1980년대 계엄령 下입니다. 계엄령 下에서는 간첩 한 사람이라도 上陸(상륙)하면 끝까지 추적해요. 그때 해안의 모래沙場(사장)을 깨끗하게 밀어서 발자국 하나만 있으면 온 부대가 動員(동원)이 됩니다. 그리고 광주는 또 다시 봉쇄가 됐죠. 二重(이중)봉쇄가 되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1·21사태 때 김신조 씨가 내려왔을 때, 총 34명이 내려왔습니다. 온 국군이 동원되어 그 사람을 잡는 과정에서 약 30명이 죽었습니다. 1968년 11월에 울진·삼척에 130명의 무장공비가 내려왔습니다. 이 사람들 잡는다고 그 숫자만큼 우리가 희생되었어요. 600명이면 그 다섯 배 아닙니까? 다섯 배 되는 사람이 내려왔는데 흔적도 없다? 이건 투명인간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커졌느냐? 반박해야 할 사람이 반박하지 않아서입니다. 모든 루머에는 이것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주에서 191명이 죽은 것이 아니고 2000명이 죽었다고 나왔을 때, 그걸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여기서 우리가 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왜 믿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북한군의 개입을 왜 믿고 싶어하는지 그 심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아마 여론조사를 하면, 지금도 북한군의 광주사태 개입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이 반 이상일 것 같아요. 왜 믿고 싶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죠. ‘어떻게 민간인이 총을 잡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민간인이) 교도소를 습격할 수 있냐?’고 이야기 합니다. 광주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군이 민간인들을 몽둥이로 打殺(타살)할 수 있느냐?’, ‘때려 죽일 수 있느냐?’, ‘帶劍(대검)으로 찔러 죽일 수 있느냐?’ 여기에 광주사태의 두 가지 큰 쟁점이 있어요. 시민이 본 광주사태, 공수부대가 본 광주사태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자들은 양쪽을 다 써주고 종합이 되는 그런 상황이 이미 다섯 번의 조사를 통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걸 잘 몰라요. 어느 한 쪽만 봅니다. 저는 다행히 현장에 가서 시민들을 취재했고, 공수부대를 취재했어요. 제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물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경상도 사람이었습니까?
  
  호남 사람들이 더 많았어요. 처음 투입된 부대가 제7공수여단인데 그게 전북에 있었어요. 자연히 호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게(광주사태) 지역감정적 구도를 갖고 있다가 요새는 약간 이념적 구도를 가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이 루머가 오래가는 것입니다.
  
  
  사망자 수도 정부가 공식발표한 191명이 맞다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믿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과거와 완전히 반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과거에 ‘2000명이 죽었다’는 說이 확산될 때에는 ‘군인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전두환 정부에 대한 反感(반감)이 있었죠. 反感이 있었기 때문에 2000명이… 그래서 <월간조선>이 혼이 났습니다. <월간조선> 1985년 7월호가 ‘정부에서 발표한 191명의 숫자가 맞다’고 했더니 광주에서 不買(불매)운동을 당했습니다. 결국은 <월간조선>의 주장이 맞았습니다. <조선일보>·<월간조선>, 이번에 TV조선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봅니다만, 광주사태에 관한 보도를 가장 정확하게 했습니다. 정확하게 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그럼 왜 그런 주장을 믿고 싶어하느냐? 지금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광주에 대한 어떤 불만…
  
  *광주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있을 수 있죠. 너무 聖域(성역)시 한다든지요. 최근에 5·18기념식에서 있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것에 대한 불만, 또 호남 지역에 대한 불만, 이런 게 뒤섞여 있다고 저는 봅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민간인이 총을 들 수 있느냐’ 하는 데 대한 불만입니다. 이런 걸 가지고 북한군과 연결시키니까 (사람들은) ‘아, 그러면 그렇지. 북한군이기 때문에 교도소를 습격했을꺼야’라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그런데 루머가 너무 확대재생산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수준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은 아니고, 이게 인터넷에서 돌아다녔지 않습니까? 인터넷에 돌아다녔는데 기자가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런 사람들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한테 먹혀들었죠. 그런데 TV조선 기자가 어제 作心(작심)을 하고 취재를 하니까 하루 만에 판가름이 났습니다. 더구나 작년에 국정원이 별도로 조사를 했습니다. 물론 비공개로 조사를 했는데…
  
  
  언론과 국방부의 방관이 루머 확산에 一助
  
  *궁금한게 탈북자들은 왜 자꾸 ‘북한군 개입說’을 이야기 할까요?
  
  그건 남의 일이기 때문에 추측할 뿐인데, 탈북자들의 정보가 아주 제한적이에요. 그 분들 생활이 아주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탈북해서 한국에 오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어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매우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쟁점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사실관계에 대한 合意(합의)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진실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증거능력인 거 아닙니까? 저런 이야기를 상식에 비추어보면 간단하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언론의 책임이라고 봅니다.
  
  *전부 기자의 책임입니까?
  
  언론의 책임이고요. 언론이 이것을 사실과 구별했어야 합니다. 우리 국방부가 이 정도까지 오기 전에 이미 책임있는 이야기를 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다 피하다 보니까 강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어필하지 않았습니까?
  
  
  광주사태를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의 날조·조작
  
  *이번 사건의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광주사태는 지금도 살아있는 사건입니다. 이것을 어느 쪽이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광주 문제는 自重自愛(자중자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 합니다. 左든 右든 누구든지 정의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지, 정의 위에 진실을 세우려고 하면 ‘2000명 사망說’도 거짓말로 밝혀지고 ‘북한군의 개입說’도 거짓말로 밝혀집니다. 그래서 신념보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고요.
  
  그 다음에 지금까지 광주가 안고 있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증오심도 있고, 분열도 있고,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도 있고요. 다 종합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광주라는 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분열과 증오로 이용하지 말고 서로 이해하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가해자와 피해자, 광주사태 때 군인 23명이 죽었습니다. 경찰관 네 명이 죽었습니다.
  
  제가 제일 분노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떻게 보면 ‘북한군에 의한 광주사태說’이라는 황당한 루머보다 더 나빴던 게 2007년에 나온 ‘화려한 휴가’란 영화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造作(조작)입니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엎드려 쏴’ 자세로 누구의 명령을 받고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장면입니다. 꼭 나치 친위대원이 유태인 학살하듯이 하이라이트로 했어요. 그런 장면은 없었습니다. 학살 장면은 없었어요. 더구나 그 영화를 시작할 때 앞에 ‘이 영화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영화를 1000만 명이 봤느냐? 또 당시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도 그걸 보면서 여러 가지 동정적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루머가 확산된 것도 그것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실을 가지고 화해를 해야 합니다.★
  
  정리/趙成豪
  
  
  광주사태 사망자 수 논란
  月刊朝鮮 1985년 7월호: ‘191명이냐, 2000명이냐’ 발췌
  
  광주사태 취재 기자들 좌담회: 徐淸源(당시 국회의원·前 朝鮮日報 사회부 기자), 李榮培(당시 朝鮮日報 사진부 차장대우), 오효진(당시 月刊朝鮮部 차장대우), 趙甲濟(당시 月刊朝鮮部 차장대우), 趙南俊(당시 月刊朝鮮部 기자)
  
   -당시 사망자는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前에 취재할 때는 대체적으로 200명 線(선)으로 봤습니다. 요즘엔 2000~3000명이란 게 유행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200명 정도라고 말하면 ‘사꾸라’라고 비난받기 십상인 실정입니다. 막상 취재하신 분들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사실 제일 신경쓴 게 시체 숫자였습니다. 광주 시내 병원에 있는 시체를 샅샅이 뒤졌지만 100구 정도밖에 확인을 못했어요. 도청 앞서 분향제까지 지낸 숫자이므로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광주시민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2000~3000명 선이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물어보면 “50여 명이 모처에 암매장됐다”느니 “바다에 쓸어 넣었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전부 “~더라”식의 이야기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입니다.
  
   -국민이 오해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습니다. 국회에서 말썽났던 광주市 통계도 그 중 하나입니다. 年鑑(연감)의 原本(원본)을 보면 착오이거나 통계 자체가 엉터리임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當局(당국)의 해명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유력한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0명說’에 대해 과거 취재노트를 들추어봤습니다. 25일 도청 앞 궐기대회에서 한 학생이 나와 “확인된 시체 69명, 파묻은 것이 100구쯤 되리라고 추정. 부대로 데려간 시체는 700구 쯤 될 것이다. 연행자 수가 1000~2000명이고 다친 사람은 중상자만 300~400명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5월26일 마지막 궐기대회에서는 “시체는 101구까지 확인했다. 변두리에서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500구다. 연행자는 2000명, 부상자 200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2000명說’은 당시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것입니다. 이번에 광주사태 부상자 모임에 가보니 부상자가 800명이라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사망자수가 부상자의 2배를 넘는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정부 발표 191명 외에 사망자가 다소 더 증가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광주 시내 밖에서 죽은 사람 가운데 혹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밖에 사망신고를 부득이 할 수 없었던 경우도 있을 수는 있겠지요. 공무원 자제들이나 큰 기업체와 관련된 遺族(유족)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편상 신고를 기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지요.
  
   -이런 숫자를 합쳐도 광주사태 때의 사망자수가 200명대 이상은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광주 분위기로 보아도 사망자가 더 있었다면 신고를 안 할 리가 없습니다.
  
   -유족회 회장을 비롯 유가족 여럿을 만나 “사망자가 더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더니 “지난 5년간 우리도 계속 희상자를 더 찾으려고 애썼으나 찾지 못했다면서 앞으로도 희생자 유가족을 찾기 위해 노력을 쏟겠다”고 밝히더군요.
  
   -당시 외신들이 ‘2000명 희생說’을 보도해서 그게 다시 국내로 들어와 신빙성 있게 퍼졌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때 외신 기자들과 함께 취재를 했지만 그들은 현장에 우리처럼 쉽게 접근할 수 없어서 기사 내용은 우리의 풀(pool)을 받을 정도였지요. 그러니까 이들이 그런 소문을 듣고 기사를 썼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번에 당시 시민 측 수습위원이었던 분을 만났더니, 역시 ‘2000명說’을 얘기해요. 그러면서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복역 중 사망한 박관현 씨가 법정에서 그렇게 얘기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잘 알다시피 박관현 씨는 광주사태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예요.
  
   -사실 2000명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몇 백 명만 더 있다 해도 문제가 벌써 터졌을 겁니다. 광주 시내에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2000여 명이나 된다면 동네마다 그런 사람이 몇 명씩 있어야 할 테니까 드러나지 않을래야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또 당시 광주에는 10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 취재를 열심히 했는데 어느 누구도 ‘2000명說’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캐내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이 점 때문에 정부가 제일 골치를 앓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말해도 믿지를 않거든요. “어디에든 신고를 하라”고 해도 “신고하면 보복하니 신고를 안할 것”이라면서 다시 ‘2000명說’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잖거든요.
  
   -그런데 광주사태는 얼마나 죽었느냐는 문제도 큰일이지만, 어떻게 죽었느냐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계엄사가 1980년 6월에 발표한 144명의 시민 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頭部(두부)손상·刺傷(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되어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인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 있고, 頭部손상 사망자 중엔 65세 노인도 있습니다. 광주부상회 회원 131명 중 12.2%인 16명이 구타에 의한 부상이고 약 80%가 허리 위에 총격을 받아 다친 사람입니다.
   광주시민과 학생들을 격분케 한 것은 최초 진압부대의 모욕적인 진압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가혹행위는 앞의 광주사태 日誌(일지)나 광주시민들의 증언에서 언급됐기에 여기서는 상세히 거론치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해 유언비어와 과장과 왜곡이 일어났어요. 언론이 제대로 보도만 했더라면, 광주사태의 응어리는 벌써 풀렸을지 모릅니다.
  
   -언론의 진실보도가 얼마나 중요하냐면, 글쎄 그때 광주에서 함께 취재하던 광주의 당시 언론인들도 사망자를 1000명 혹은 2000명 이상으로 보고 있었어요. 물론 단 한 건도 확실한 증거는 없었죠. 그래도 양심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마 정부 발표의 倍(배)”는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같이 앉아서 얘기하던 사람들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귀에 대고 속삭이듯 ‘200명 대’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광주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라도 보다 정확한 숫자와 眞相(진상)을 밝히는 언론이 제 구실을 해서 국민의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주어야겠지요.
  
[ 2013-05-20, 17:25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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