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안에서 발견한 여권 속 어머니 편지를 읽으면서
조인정의 미국 고등학교 유학記(2)

曺認桯(조인정)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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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미국유학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대체 어떤 곳으로 어떻게 먼저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혼자 힘으로 내가 가고 싶은 미국 학교를 알아보려고 했으나, 너무나 광범위한 미국 영토에서 하나의 갈 곳을 선택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州 하나를 결정하는 것도 나에게는 벅찼다. 결국 나는 혼자 힘으로 미국 유학을 가는 것은 터무니 없는 짓이며, 많은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결국 제자리를 빙빙 돌 뿐 전혀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의 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가기를 원했던 미국 동부의 사립학교나 보딩스쿨은 대부분 가격이 오천만원 이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놀랄 만한 액수에 기겁했고 부모님께 재정적인 부담을 여쭙기 죄송했다. 조금 더 저렴하게 미국유학을 갈 수는 없을까? 나는 며칠 인터넷을 통해 저렴한 방법으로 갈 수 있는 미국유학을 조사해보았고,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어떤 캐나다 유학생들을 소개한 책을 통해 ‘고등학교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었다.
  
  대학생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미국 국무부에서 외국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1년 동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너무 기뻐 환희의 소리를 질렀다.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하는 학생들은 미국의 사립 또는 공립 학교 중 한 개를 선택할 수 있었고, 미국 현지에서 호스트를 하는 가족들과 일년 동안 함께 살 기회도 동시에 있었기에, 나로서는 공부와 호스트 생활을 한꺼번에 할 수 있어 一擧兩得(일거양득)이었다. 그리고 여기의 호스트 가족들은 학생들에게서 따로 급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봉사를 하며 외국 문화를 접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립학교 유학보다 훨씬 더 저렴했다.
  
   그러할 무렵, 엄마가 강남의 모 유학원을 내게 소개해줬다. 나는 그곳의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고 교환학생 프로그램 신청도 했다. 내 영어실력을 평가하는 SLEP TEST도 쳤다. 이제 남은 건 나를 한 명의 가족으로 환영하는 한 호스트 가족과 학교에서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미국의 고등학교 학기는 한국과는 다르게 9월에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중학교 졸업 후 남은 반년 동안 부천 여자고등학교에 재학하기로 했다. 더군다나 내가 당시에 미국에서 3년의 고등학교 생활을 모두 이수할 것인지, 아니면 짧게 일 년만 경험을 하고 올 것인지에 대해 불확실했기 때문에, 만약 일 년 후 한국 고등학교로 돌아올 것에 대비하여 女高를 다니기로 결정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학교에 있는 나에게 아빠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우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나는 당연하게 이쯤에서 나를 받아줄 호스트와 학교를 유학원에서 찾았기 때문에 아빠께 알려줘서 그 소식을 아빠가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화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빠가 하신 말씀은 불행하게도 오하이오주에 있는 한 학교에서 내 프로필을 보고 나를 학생으로 원하지만, 그 주변의 한 호스트는 유럽인만을 원하기에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순간 너무나 억울해서 눈물이 내 앞을 가렸다. 미국에 인종차별이 많다는 것을 예전부터 빈번히 들어왔지만, 미국을 가기 전부터 내가 차별의 피해자가 되니 나의 두려움은 한층 더 증폭되었다.
  
  다행히 며칠 후, 미국 중북부 위스콘신 주의 어느 호스트 가족이 나를 가족 구성원으로 수락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나는 그 집 주변에 있는 Eagle Christian Academy라는 크리스천 학교에서 고등학교 수업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위스콘신의 호스트 가족은 내 사진과 프로필, 학교 성적에 대한 세세한 사실까지 알 수 있었지만, 나는 그 가족의 기본적인 정보만 제공받았다. 내가 살게 될 곳은 정확히 Wisconsin주 Richland Center라는 동네였고, 나는 Jongquist 가족과 살게 될 것이었다. 그 가족은 현재 집에 엄마, 아빠, 10살 짜리 딸, 9살 짜리 아들, 그리고 여덟 살의 쌍둥이 딸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알 수 있는 최대한의 정보였다. 나는 아이들이 많은 집으로 가는 것이 조금은 힘들 것이라는 것을 예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과 놀며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집에 대한 한 줄의 프로필을 보며 따뜻한 가정집으로 상상하여 이미지화 시켰고, 그 한 줄 외 베일에 가려진 더 많은 진실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인천공항에서 시카고를 거쳐 위스콘신 주의 중심 도시 메디슨에 도착하기까지 약 14시간의 긴 비행을 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이 오자 나는 내 앞을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가 없었다. 나의 17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가족과 오랜 시간, 그것도 나 혼자서 他地에 떨어져서 남과 함께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니 지레 겁이 들고 앞이 캄캄했다.
  
  여권을 검사하고 게이트 문이 열리자 마치 나의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듯했고, 나는 그 문이 다시 닫힐 때까지 엄마와 아빠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드시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내가 탄 첫번째 비행기는 인천공항에서 시카고 공항까지 13시간을 쉬지 않고 비행했는데, 내 좌우로 모두 외국인이 탔기 때문에 나는 더 겁이 났다. 다행히도 내 왼쪽에 앉아 있었던 혼혈인 (한국인과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언니가 내가 비행기 안에서 작성해야 할 몇 가지 서류들을 어떻게 쓰는지 도와주었기에 많이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이 서류를 작성할 때 필요한 여권번호를 찾기 위해 비자가 있는 부분의 여권을 펼치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안에는 엄마가 비밀로 보내신 작은 분홍색 봉투에 담긴 편지가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편지 봉투에는 엄마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트가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내 사랑 인정’이라는 말이 쓰여져 있었다. 편지를 감히 열어보기도 전에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편지에는 엄마가 얼마나 나를 자랑스러워 하는지, 나를 떠나 보내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허전한지, 하지만 꿈을 향해 떠나는 내 旅程(여정)을 엄마가 얼마나 흐뭇하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사랑의 마음이 한 장의 종이에 다 담겨져 있었다. 이 편지는 훗날에도 내가 지갑속에 넣고 다니면서 힘들 때마다 꺼내어 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하루하루를 견뎌낼 수 있는 원기회복제와 같이 큰 힘이 되었다.
  
  위스콘신의 메디슨 공항에 드디어 도착했다. 문제는 어디에서 내가 한국에서 보냈던 수화물을 찾느냐였다. 너무나 많은 미국인들이 공항에 있는 모습에, 나는 곧 낯선 이방인이 되어버렸고 그들의 視線(시선) 하나하나가 곧 레이저 빔으로 나를 압박했으며, 내 심장 박동수는 거의 절정에 달했다. 다행히도 나는 내 앞 좌석에 앉아 있었던 한 남자의 옷모양을 기억해놓고 있었으므로 비행기에서 내리자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그도 분명히 짐을 찾아야 할 거라는 예상 하에 말이다. 다행히도 내 예상은 적중했고 그는 수화물을 찾는 곳으로 갔으며, 나도 내 수화물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또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그토록 상상했었던 나의 호스트 가족이 ‘InJung, Welcome to Wisconsin!’이라는 종이를 들고 서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색하게 웃으며 첫 인사를 건냈다. 호스트 엄마는 조금 뚱뚱한 백인이었고, 한 통통한 여자 백인 아이와 라틴계로 보이는 세 명의 아이들이 나에게 자기들 소개를 했다. 곧 호스트 아빠가 내 짐을 자신의 차에 옮겨 줬고 드디어 나는 정식적으로 Jongquist 가족의 한 멤버가 되었다. 작은 벤 안에 있는 동안, 분명히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이건 분명 그 당시 내가 너무나 떨려서 제대로 호스트 부모님과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또 나는 겁을 먹어 전혀 집중을 할 수 없는 정신분열의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가 나눴던 모든 이야기들은 내 한 귀로 흘러 들러와 한 귀로 흘러나갔다.
  
  나의 첫 음식은 호스트 엄마가 사준 페퍼로니 피자 한 쪽과 라지 사이즈의 콜라였다. 나는 배가 고파서 콜라를 큰 걸 시켜 주신다길래 속으로 좋아했었는데, 막상 직접 본 콜라는 거인이 먹어도 될 만큼 엄청난 슈퍼사이즈였다. 피자도 한국 것과는 다르게 너무 짜서 결국 먹다가 버리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당시 쓰던 일기에 따르면 ‘저녁은 우유에 찐 감자와 고기국물을 섞은 것이었는데 너무 짜서 먹다가 남겼다’고 나오는데, 찐 감자와 고기국물은 mashed potato와 gravy sauce를 말하는 것으로 정말 미국에서 먹은 최악의 음식이었다.
  
  일단 그 음식은 그 자체만으로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어떻게 으깬 감자에 고기국물을 섞어서 먹는 음식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음식이 한끼의 식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엄마의 얼큰한 김치찌개와 따뜻한 밥이 너무나 그리웠다.
  
  나의 호스트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근무하셨다. 우리 학교는 작은 크리스천 학교였고, Pre kid라고 불리는 유치원생부터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같은 건물 안에서 공부를 했다. 호스트 아빠는 트럭 관련 일을 하셔서 아침에 일찍 나가셨다. 에비라고 하는 여자애는 그 두분 사이에서 태어난 열 살짜리 딸아이였는데, 나와 같이 한 방을 쓰게 되었다. 또 주싸야라고 하던 귀여운 남자아이와 쌍둥이 자매인 제니퍼와 지오마라는 사실 혈연이었는데, 그들은 라틴계 미국인으로 나의 호스트 부모님께 어릴 때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다행히 첫 날에는 아이들이 내게 친근하게 다가와 자기 소개를 하며 잘해줘서 너무나 고마웠고, 내 침대를 에비 옆에 내 주시며 잠자리를 잘 챙겨주시는 호스트 부모님께 너무 감사했다. 물론 이 날은 내 호스트 생활이 행복의 시작을 알리는 동시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그날부터의 생활들은 하루하루가 내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었다.
  
[ 2013-06-26, 08:0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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