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엄한 호스트 엄마를 만난 나의 마음고생
조인정의 미국 고등학교 유학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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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날부터 나는 호스트 엄마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남들 앞에서의 상냥한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졌고, 그녀는 가족들을 100% 다른 모습으로 대했다. 나는 그녀의 시중 노릇을 해야 했으며, 동시에 보모 역할을 소화해야만 했다. 호스트 엄마는 우리 학교의 유치원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나는 수업이 3시에 끝나는 동시에 호스트 엄마가 있는 교실로 갔다.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내 호스트 동생들 (에비, 주싸야, 제니퍼, 지오마라)도 그곳으로 왔고, 우리는 그녀가 퇴근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려야만 했다. 문제였던 것은 유치원 아이들 몇 명이 항상 부모님께서 데리러 올 때까지 있어야만 해서 우리는 그들이 떠날 때까지 마찬가지로 교실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호스트 엄마의 명령대로 그 유치원 아이들을 돌보았고, 동시에 네 명의 호스트 동생들 (10, 9, 두명의 8)까지도 돌보았다. 나는 그들과 장난감 놀이를 하고, 색칠공부를 하고, 그네를 밀어주고, 미끄럼을 타는 등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호스트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도와드리려고 했다. 그런데 호스트 엄마는 교실 청소도 나와 내 호스트 동생들에게 시켰고, 나는 그녀가 업무를 마치는 밤 8시까지 학교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청소를 하며 집에 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렇지만 밤이 너무 늦어, 호스트 엄마가 저녁 식사를 차려 주실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항상 가까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들려 끼니를 해결해야만 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는 거의 매일을 맥도날드, 피자헛, 서브웨이, KFC, Dairy Queen, Culver’s 와 같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 들러 드라이브 스루로 음식을 주문한 후, 그 음식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에서 먹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함께 먹었다. 나는 처음 두 달간 내가 먹고 싶은 패스트푸드를 메뉴판에서 골라 시킬 수 있었고, 열 살 에비도 자신이 원하는 음식을 주문했다.

하지만
, 불행히도 9살 남자아이 주싸야와 8살 쌍둥이 자매 제니퍼와 지오마라는 그러할 권리가 전혀 없었다. 내가 전에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이 세 명은 라틴계 미국인으로 血緣이었고, 우리 호스트 부모님에게 어렸을 때 입양 되었다. 호스트 엄마는 입양된 이 아이들에게 정말이지 심하게 엄격했는데, 특히 음식을 주문할 때 이 아이들은 맥도날드에서 가장 싼 달러메뉴나 다른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키즈밀밖에 시킬 수 없었다.

가끔 인스턴트 음식을 집에서 요리한 날도 상황은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냉동피자를 오븐에 데운 날에는 그 입양된 아이들은 한 쪽이나 두 쪽이라는 특정 양의 피자를 호스트 엄마로부터 지정 받았고, 그 들은 그릇을 손과 혀로 깨끗이 닳도록 핥아먹었지만 더 달라는 말을 전혀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호스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에비라는 아이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에비는 빈 접시를 받아 자신이 먹고 싶은 종류의 피자를 맘껏 받을 수 있었고, 접시를 다 비운 후에도 피자를 더 가져와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음식을 더 가져오는 것은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는 가끔 모두 식사를 끝내고 부엌에서 나가, 나와 입양된 아이들이 식탁에 홀로 남아 있던 경우에 내 음식을 몰래 그들의 접시에 덜어주곤 했는데 그 때마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 곧 그 음식들을 허겁지겁 목구멍으로 넘겼다. 통통한 에비에 비해 한참 말라있던 그 아이들을 보면 볼수록, 동화 속 계모가 자신의 자식들과 신데렐라를 차별하는 것 같이 보여 너무나 안타까웠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는데, 이때부터 나의 청소는 시작되었다. 호스트 엄마 자신은 전혀 집 안 청소에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녀는 나와 호스트 동생들에게 모든 청소를 분담시켰고, 따라서 나는 매일 밤 화장실 청소를 해야만 했다. 일층과 이층에 있는 화장실의 바닥을 닦고, 변기통 안을 솔로 문지르고 닦고, 너저분해 있던 세면도구와 빨래더미, 수건더미를 정리했다. 또 매일은 아니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나는 居室, 차고, 부엌 그리고 내 방을 청소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생겼던 몇 가지 가슴 아팠던 에피소드를 말해보고자 한다.


 어느 날 혼자 이층의 화장실 청소를 하던 중 나는 이상하게 생긴 내 팔뚝만한 길이의 나무 판자를 발견했다
. (이층 화장실은 사실 내가 가장 청소하기 싫어하는 구역이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화장실 옆에 호스트 부모님이 주무시던 안방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곳은 가장 신중하게 어떠한 실수도 내지 않고 청소를 해야 했고,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날 나는 된통 혼이 났다.) 내가 발견한 그 나무 판자에는 “Board of Education”이라고 쓰여져 있었고, 한참이 흐른 후에야 나는 그 나무판자의 용도를 알게 되었다. 호스트 엄마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사소하고 쓸데없는 일로 자신의 아이들을 혼냈는데, 예를 들어 어느 날 아침에 모두가 학교에 가기 위해 차에 올랐는데 호스트 엄마는 자신이 깜박하여 들고 오지 않은 검은 색 점퍼를 주싸야에게 시켜 가져오게 하였다. 그 아이는 조금 늦게 왔고, 엄마에게 점퍼가 안방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한참을 찾았다고 해명했지만, 그 날 밤 그 아이의 취침시간은 평소보다 한 시간 반이나 앞당겨졌고, 저녁을 굶어야 했으며, 그는 그 나무판자로 매 타작을 받았다. 이렇다 할 일이 거의 매일 끊이지 않고 일어났기 때문에, 나는 밤마다 일층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마음이 저려 내 방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다.

나의 기상 시간은 아침 6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530분쯤에 침대에서 잘 자고 있던 나는 난데없는 봉변을 당했다. 호스트 엄마가 갑자기 방문을 덜컥 열고 들어오셔서 방 불을 키더니, 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당장 일 층에 있는 부엌을 청소하라고 했다. 이게 도대체 왠 새벽의 날벼락인가? 그 이유인 즉슨, 내가 어젯밤에 부엌을 청소했고, 호스트 아빠가 아침에 출근하실 때 그곳을 검사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비틀거리며 일 층으로 내려가 싱크대를 빛이 나도록 행주로 문질러 닦았고, 食器세척기 안에서 깨끗하게 씻겨진 접시들을 찻장 안에 넣어 정리한 후 호스트 엄마에게 다시 검사 받았다.

하지만 청소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와 내게 대하는 행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심해졌고, 이는 내 숨통을 쥐어 고통을 줬지만 나는 반항 한 번 할 수 없었다. 약간의 반항은 곧 내 인생의 종말을 부르는 일과 마찬가지였으므로. 나는 그녀에게서 핸드폰을 하나 받았는데, 이것은 가족 요금제로 되어있었으며, 그녀는 내게 매달 사용비로 $40를 요구했다. 한국은 미국보다 15시간이나 빨랐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전화를 하기 위해서는 밤 9시에서 10시 사이가 가장 적합했다. 그런데 나와 한 방을 쓰던 에비에게는 bed time이 있었기 때문에 9시면 방 불을 꺼야만 했다. 나는 그 날 에비에게 엄마와 잠깐의 전화를 하는 것에 대해 미리 용서를 구하며, 깜깜한 방 안에서 조심스럽게 한국 번호를 눌렀다.

조용히 엄마와 행복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호스트 엄마가 내게 소리를 지르며 지금 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악랄한 목소리와 인상을 쓴 얼굴은 나를 고양이 앞에 놓인 작은 생쥐처럼 공포감에 휩싸여 바들바들 떨게 했다. 그녀는 내게 에비를 방해하지 말고 당장 일 층으로 내려가 전화를 받으라며 손찌검을 했고, 나는 일층과 이층 사이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조용조용히 울며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내게 엄마가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내게 전화를 걸었냐고 물어보았고, 이 시간에 전화하는 엄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한국과 미국 시간의 차이를 설명하고 싶었으나, 내 온몸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굳어버렸고 목도 메여서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후에도 가끔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짧게 전화를 할 때, 그녀는 내게 집안에서 한국어를 쓰지 말라고 겁을 주었다. 그녀에게 난 단지 영어를 배우러 온, 그래서 영어만 써야 할 의무를 가진, 더불어 그녀의 말에 복종해야 할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학교였던 Eagle Christian Academy에서 나는 컴퓨터, 스피치, 생물II, 바이블, 드라마, 그리고 지리를 수강했다. 시간표는 A dayB day로 나누어져 있어서, A day에는 컴퓨터, 스피치, 생물 II, 바이블을 들었고, B day에는 컴퓨터, 드라마, 지리, 바이블을 들었다. 하지만 일 교시를 시작하기 전 15분 정도는 디보션(devotion)이라고 하는 성경책의 몇 구절을 읽으며, 학생들과 선생님이 그 구절의 깊은 교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 학교에서 두 명의 한국인이었던 녹경언니와 충희를 만났고, 이 둘은 내가 이 곳에 진학 할 동안 호스트 엄마에게 시달려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나를 항상 가장 옆에서 도와주고 진심으로 걱정해주며, 내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기댈 수 있었던 고마운 존재였다. 이 학교는 또 코스타리카의 어떤 국제 학교와도 연관되어 있어서, 매 년 몇 명의 코스타리카 학생들이 미국 교육을 받기 위해 이 학교로 전학을 왔다. 내가 다니던 때에도 남자 다섯 명과 여자 한 명이 코스타리카에서 왔는데, 스페인어를 쓰는 그들과 많이 친해지면서, 스페인 단어들도 배웠고 수업시간에도 그들과 잘 어울려 어렵지 않게 미국 학교 수업에 적응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친하게 지냈던 미국 친구도 많지는 않았지만 몇 명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라이베리아 라고 하는 작은 아프리카의 나라에서 이민 온 메이라고 하는 여자 아이였는데, 그녀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나는 호스트 엄마에게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금세 잊어 버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내게,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호스트 엄마가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내게 얼마나 내가 메이와 가깝게 친구로서 지내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 그리고는 곧 메이의 흉을 보면서 메이는 곧 나를 배신할 것이며 가깝게 지내서는 안 될 사악한 아이로 비유했다. 내 마음 속의 메이는 전혀 이렇다 할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호스트 엄마 말에 그 순간만 응수하려고 하였지만, 그녀는 순간 내가 메이와 학교에서 같이 말을 섞는지 쭉 지켜볼 것이라고 겁을 주었다. 대신 그녀는 학교에 다니던 다른 미국 아이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녀와 친하게 지낼 것을 내게 권유했다. 후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호스트 엄마는 메이와는 다른 기독교 교단을 따랐고 따라서 내게 자신과 같은 기독교 교단을 믿는 미국의 여자아이와 내가 친하게 지내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미국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 주고, 학생들이 그 숙제를 얼마나 노력하여 수행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것은 이제 내게도 해당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나로서는 숙제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여건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 학교를 마친 후, 나는 호스트 엄마의 유치원 교실에서 아이들을 돌보아야 했고, 그녀의 업무가 끝난 후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곧바로 청소를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애비에게 bed time이 주어졌기에 늦어도 9시 반에는 방 불을 꺼야 했으므로, 나는 전혀 숙제를 끝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재우 선생님과 유학 전 한국에서 했던 어떠한 장애물이 내 앞길을 막더라도 그것을 헤쳐나가야 한다라는 약속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나의 목표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숙제는 내 인생의 길목에 선 한 부분이었고,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를 끝내야만 했다. 어떠한 역경도 나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방은 불을 꺼 칠흑같이 깜깜했는데, 또 우리 방문은 호스트 엄마의 명령으로 닫을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들어 몇 분 후면 호스트 엄마가 나와 애비가 잠을 자고 있는지 체크를 하러 잠시 들렀고, 잠이 오지 않는 날에는 일부러라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따가운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2미터 정도 되는 복도를 앞에 두고 우리 방과 안방은 마주보고 있었는데, 나는 얼마 있지 않아 11시 또는 12시가 되면 호스트 부모님도 잠자리에 드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 바로 그들이 방에서 시청하고 있던 TV소리가 꺼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9시부터 그들이 방에서 TV를 보는 동안, 이불을 푹 덮고 엎드려 한국에서 비상용으로 가져온 휴대용 손전등의 불빛을 의지해 영어 단어를 외웠다. 그리고 몇 시간 후 TV소리가 멈추는 순간에는, 제대로 침대에 앉아 숙제를 하거나 그 다음 날 있을 시험 공부를 했다. 물론 왼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은 몇 분 동안 들고 있으면 팔이 떨어져 나갈 만큼 큰 고통이었지만, 숙제와 시험공부를 마쳐야 한다는 내 강한 의지에 비하면 이 정도의 아픔은 별 것도 아니었다. 왼손으로는 손전등을 들고, 오른쪽 발로는 교과서의 책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걸 막고, 오른손에는 연필을 잡고 노트에 숙제를 해나갔던 것은 곧 영화에서의 007작전을 방불케 했다. 안 방에 있던 두 부부의 작은 뒤척임에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손전등을 엄청난 속도로 껐고微動(미동)도 하지 않아 내가 아직도 깨어있다는 것을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매일 밤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나의 학교성적은 우수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 2013-06-27, 23:20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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