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서 손전등으로 하던 공부의 종말, 터널이 보이다!
미국 고등학교 유학記(4)

曺認桯(조인정)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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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액션 영화보다 더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에 휩싸여 하루하루를 견뎠다. 아침에 눈을 뜬 그 순간은 내게 다시 고문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임과 동시에,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 다시 고된 현실을 맞닥뜨리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손전등으로 버텨낸 매일 밤의 공부는 다행히도 내게 우수한 성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이 비밀스러웠던 공부 방법은 곧 들통 나고 말았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그날도 나는 칠흑 같던 어둠 속에서 손전등 빛에 의지해 숙제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날은 다른 날보다 더 녹초가 된 몸 때문에 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는 침대 위에서 많은 책들에 둘러싸인 채, 손전등을 왼손에 켠 채로 똑바르지 못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 날 저녁, 호스트 엄마는 나를 불러내어 내가 들고 잤던 손전등의 용도를 물어보았다. 그 전날 밤, 사실 그녀는 새벽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일어났고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내 방에 들렀는데, 곯아 떨어졌던 나의 모습과 그 손전등을 목격한 것이었다. 내 얼굴은 붉게 상기되었고, 그녀가 분명 어떠한 벌을 내릴까 싶어 속이 타고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녀는 더 이상 한 밤중에 공부하지 말라고 내게 호통을 쳤지만,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나의 강한 집념은 꺾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함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다가갈 수 있는 한 단계임을 힘주어 강조했지만, 그녀는 강경히 내 의견에 반대했다.
  
  자유롭게 공부 한 번 할 수 없었던 그때에 나는 한국에서의 ‘야자’시간이 너무 그리웠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에 너무 억울해 울분이 터졌다. 그 사건 후, 매일 밤 9시 30분만 되면 그녀는 더욱 철저히 내 잠자리를 검사했고, 내가 공부를 할 수 없도록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며칠 후, 호스트 아빠가, 공부 문제로 혼이 났던 내가 안쓰러워 보였던지, 호스트 엄마에게 부탁을 해 내가 밤 11시까지 부엌의 식탁에서 공부와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다. 부엌은 1층에 있었는데, 居室(거실)이 바로 그 옆에 있었고, 호스트 부모님은 항상 그곳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TV를 시청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숙제를 마쳐야만 했다. 다행히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호스트 엄마는 내가 11시가 넘어 까지 하는 공부에 대해 별 신경을 쓰지 않아서, 나는 부엌에서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공부를 맘껏 할 수 있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이 집에서 진정한 행복과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나의 이미지는 ‘공부 잘하는 한국인’으로 점점 刻印(각인)되어 갔고, 나는 이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학교생활에 나의 모든 힘과 노력을 쏟았다. 이때의 이미지 덕에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이날은 호스트 엄마가 나의 체육시간에 찾아와, 우리의 피구 경기를 갑자기 중단 시키더니 나를 화장실로 따로 불러내었다. 호스트 엄마는 나를 내 호스트 남자동생인 주싸야의 체육복 바지를 훔쳐간 범인으로 몰며, 많은 아이들이 보는 화장실 안에서 당장 바지를 벗으라고 소리 질렀다.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호스트 엄마로부터 학교 체육복을 한 벌 받았었다. 그리고 나는 집안에서 내 빨래만 모아서 직접 했기 때문에, 호스트 가족의 빨래와 섞일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너무 억울하고 황당해서 호스트 엄마가 던지며 내 것이라고 말했던 바지로 갈아입으며, 흐느껴 울었다. 다시 체육관의 피구 경기로 돌아 가 게임에 임하자, 한국인 녹경 언니가 울고 있던 나를 달랬다. 그 다음 시간은 지리시간이었는데, 나는 수업까지도 방해하며 친구들 앞에서 나를 도둑으로 몰았던 호스트 엄마에게 쌓인 원망 때문에 눈물을 계속 훔쳐내었다. 그날은 또 地理(지리) 단원 평가가 있는 날이었는데, 내 뒷줄에 앉아 있던 4명의 코스타리카 남자애들은 녹경 언니에게 “인정이 왜 울어? 오늘 시험인데 공부 못했나?” 라고 물었고, 지리 선생님은 “인정이가 시험 보는 걸 잊었었나 보다”라고 말했다. 내가 우는 이유를 쉬는 시간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녹경 언니는 내게 ‘제대로 된 한국인 이미지를 심어줬다’며 배를 잡고 웃어서, 나도 울다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옥 같았던 호스트 집에서의 생활에, 나는 점점 더 웃음을 잃어갔고, 공포와 불안감에 싸여 내 방에서 나가기를 꺼려했다. 미국의 주와 도시마다,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환학생들을 위하여 일 처리를 하는 지역관리자들이 있는데, 유학 전 오리엔테이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성공적인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에 필수적이었다.
  
  나는 당시 나를 담당하고 있었던 지역관리자 데브라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10월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는 나는 그녀에게 얼마나 지금 내 호스트 생활이 고통스럽고, 얼마나 내가 다른 학교와 새로운 호스트 가정의 경험을 원하는지를 강조하는 메일들을 여러 번 보냈다. 하지만 나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답은 항상 똑같았다. 교환학생이 시작되는 가을학기인 8-9월 또는 봄 학기인 3-4월을 제외한 때에는 새로운 호스트를 찾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고.
  
  절망적이었지만 또 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학교와 호스트를 찾을 수 있다는 기대 자체를 버렸다. 그런데, 나는 곧 암울한 상황을 뒤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았다. 나는 나와 같은 프로그램의 교환학생들과 함께 2010년 11월 20일에 미네소타 주에 있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쇼핑몰인 ‘Mall of America (몰 오브 아메리카)”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행 날 이틀 전쯤에 나는 지역관리자로부터 일리노이 주에서 새로운 호스트를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세달 남짓 겪었던 엄청난 마음고생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이제는 한시름 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행복했다. 나는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기쁨에 제대로 숨을 가누지 못한 채로 그 메일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호스트 부모님은 이 사실을 지역관리자에게서 곧 전해 들었고, 호스트 엄마는 나를 ‘호스트 가족을 배신하고 떠나는 이기적인 자’로 몰아 붙였지만, 나는 곧 그녀와 작별을 할 거라는 생각에 그녀의 말들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은 내가 사랑하던 친구들과의 작별이었다. 내가 가끔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며, 울고, 한국의 가족들을 그리워할 때면, 녹경 언니와 충희는 내 옆에서 항상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많은 조언을 해 주었다. 또한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서로 고민을 나누며, 한국인의 깡으로 모든 시련들을 잘 이겨내리라고 다짐했다. 따라서 그들과의 작별이란 곧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의 작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나의 정신적인 지지자였던 코스타리카에서 온 남자아이 대니와의 작별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내가 앞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나는 호스트 엄마의 업무처리로 인해 밤 8-9시까지 학교에 남아 호스트 동생들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때,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학교에 남아있던 고등학생이 대니였는데, 그는 곧 내게 살사 댄스도 가르쳐준 좋은 친구가 되었다. 대니는 미국 교육을 받고 싶어, 엄마를 설득해 이 학교로 내가 다니던 연도에 처음 미국에 왔는데, 그의 엄마는 코스타리카인이었고 아빠는 이스라엘에서 온 유대인이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몇 시간을 학교에 남아 학교 부엌 청소를 했는데, 이로서 그는 학교로부터 얼마 정도의 등록금을 減額(감액)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서로 같이 보낼 시간이 많다 보니 우리는 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처음에 시작했던 한국과 코스타리카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 주제는 곧 나의 호스트 가족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대니는 내게 있어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몸소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호스트 엄마에 대한 고민거리를 풀어놓을 때면, 항상 그는 따뜻한 마음과 동정으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였고, 그의 갚진 조언과 위로는 나를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내게 닥쳤던 시련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내게, 그의 인생에서 겪었던 가슴 아팠던 사건을 말해주었는데, 이는 그의 ‘부모님의 이혼’이었다. 그 당시 어렸던 대니는 얼마 후 엄마와 단 둘이 살게 되었고, 급작스러운 변화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기를 꺼려했을 뿐만 아니라 집 밖으로 나가기도 두려워했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한 성경책을 읽고, 그 책 속에 등장하는 엄청난 시련과 고난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꼭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했다. 대니는 성경책을 한 구절 한 구절 읽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자신도 그 주인공들처럼 곧 모든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러한 마음으로 대니는 나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께 항상 기도를 드렸다.
  
  내가 모든 짐을 싸 들고 위스콘신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던 바로 그 전날,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대니에게 달려가 내가 다른 호스트 가족과 생활하게 되었음을 그에게 알렸다. 물론,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그는 깜짝 놀라서 마시고 있던 오렌지 주스 병을 거의 식탁에 떨어뜨리다시피 내려놓았지만, 내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음에 얼싸안고 축하해주었다. 녹경 언니, 충희, 미국 친구들, 코스타리카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한 분 한 분에게 작별을 하기란 마음이 찢어질 듯 힘들었다. 인간관계에서는 항상 ‘만남이 있다면 동시에 헤어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헤어짐은 내게 언제나 너무 힘든 일이었다. 친구들은 새로운 곳에 잘 도착하여, 좋은 호스트 가족을 만나 즐거운 미국 생활을 하기를 응원해주는 편지들을 내게 직접 전해주거나 내 서랍장에 몰래 넣어두었다. 녹경 언니, 충희, 라이베리아에서 온 친구 메이, 코스타리카에서 온 캐런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나눌 때, 우리는 거의 울음바다를 만들었고, 우리의 흐느낌은 곧 학교 전체를 울렸다.
  
  호스트 엄마는 그 때도 내게 “울면서 드라마를 찍지 마라”고 다그쳤고, 내가 마지막으로 녹경언니네서 친구들이 열어 줄 작별파티에 참석하는 것도 반대했다. 녹경 언니의 호스트 엄마가 나의 호스트 엄마를 설득해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이렇게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다시금 눈물이 샘솟았고, 나는 언젠가 다시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호스트 엄마는 내가 우는 모습에 화가 나서 호스트 동생에게 당장 나를 그녀가 있는 교실로 데리고 오라고 시켰고, 나는 몸을 숨길 곳을 향해 도망쳤다. 다행히도 그날에 학교 부엌에서 대니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그는 겁을 잔뜩 먹은 나를 위해, 청소 중 부엌의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기고, 부엌의 모든 문과 창문들을 닫고 기둥 뒤에 숨죽여 울고 있는 나를 안아주며 위로를 건넸다. 호스트 동생에게는 미안했지만, 대니는 나를 데리러 온 호스트 동생도 겁을 주어 돌려보냈다. 모든 일이 다 잘 될 거라고, 하루만 더 참으면 된다고, 새로운 호스트는 분명 다를 거라며 대니는 나를 달랬다. 몇 분 후 호스트 엄마는 학교 밖에서 차의 경적을 울리고 내게 소리를 지르며, 당장 차로 올 것을 지시했다. 나는 대니와 조금만 더 헤어지기 전에 대화를 하고 싶었고, 그 동안 내가 졌던 모든 신세에 대한 감사를 다 표현하고 싶었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계속되는 경적소리에 우리는 마지막 포옹으로 작별을 했다.
  
[ 2013-06-30, 14:58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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