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콘신의 추운 밤에도 溫氣(온기)를 느끼다!
나의 미국 고등학교유학奮鬪記(5)

曺認桯(조인정)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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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길었던 캄캄한 동굴을 지나, 저기 멀리서 보이는 한 줄기 불빛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고생 뒤의 樂을 의미하는 바일 것이다. 드디어 지역관리자에게서 새로운 호스트와 학교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남짓 세 달 동안 함께 생활했던 호스트 가족과 작별인사를 했다. 떠나기 전날 밤, 나는 엄마가 한국에서 보내준, 내가 침대 밑에 아껴두었던 한국 과자 몇 봉지를 꺼내어 호스트 동생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후였는데도 불구하고, 먹었던 것은 양에 차지 않았었는지, 그들은 과자를 눈 깜짝할 새 싹 다 먹어 치웠다. 호스트 동생들은 내게 이렇게 맛있는 과자는 생전 처음 먹어본다고 하니, 여태껏 그들에게 조금 더 먹을 것을 주며 잘해주지 못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호스트 동생들은 또 그 한글이 써져 있는 과자 봉지들이 신기했던지, 자기 방에 가져가 벽에 한 개씩 붙여 놓았다. 그 다음 날 아침이면, 나는 다른 교환학생들과 함께 미네소타 주의 ‘Mall of America (몰 오브 아메리카)’에 가기 위해 약속장소로 집합해야 했다.
  
  더욱이 나는 일리노이 주의 어느 호스트 가족들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호스트 집에 있던 모든 짐을 밤이 늦도록 정리했고 떠날 채비를 모두 마쳤다. 짐을 쌀 때도 호스트 엄마는 내게 정리를 서두르라며 화를 내고, 휴대폰을 당장 반납하라고 하고, 방 정리를 할 때 절대 문을 닫고 하지 말라는 등 여러 명령을 했지만, 나는 곧 다가올 내 밝은 미래를 생각하며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 설레는 맘에 밤 잠도 설치며, 아침 일찍 눈을 떴다. 호스트 아빠는 나를 차로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居室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호스트 엄마도 그곳에 계셨다.
  
  현관문을 열고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려니, ‘미운 정이 고운 정’이라는 말처럼 떠나려니 그 동안의 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호스트 엄마는 ‘Good Luck (행운을 빌어)’이라는 말만 내게 남긴 채, 다시 2층의 안방으로 올라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여 모든 짐을 차에서 내리고, 나는 호스트 아빠와도 마지막 인사를 했다. 호스트 아빠는 그래도 지난 석 달 동안 호스트 엄마와는 다르게 나를 조금은 더 딸처럼 아껴주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호스트 동생들도 아빠와 있을 때는 여느 다른 부모와 아이들처럼 생기발랄 했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물론 이 밝은 분위기는 호스트 엄마를 만남과 동시에 깨져버렸고, 아이들은 집에서는 숨을 죽인 채 오로지 제 각자 할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의 마지막 헤어짐은 못내 섭섭했고, 그가 아빠처럼 나를 안아주며 ‘항상 건강하게 잘 살아라’라고 했을 때에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2010년 11월 20일부터 21일의 1박 2일 동안 나는 미네소타 여행을 통해서 많은 國籍(국적)의 교환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을 함께 했던 충희와도 20일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성대하게 하자며, 쇼핑센터 안에 있던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호화롭게 파스타와 통감자를 즐겼다. 그런데, 21일 아침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충희와 아침에 호텔에서 일어나 朝食을 먹기 위해 일층의 카페테리아로 갔는데,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가 나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따로 나만 불러내었다.
  
  그녀는 자신의 옆에 서있던 위스콘신 주 총 지역 관리자인 마가렛을 내게 소개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경직되었던 데브라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가렛은 내게 “I am so sorry to tell you about this. (나는 너에게 이 것을 말하게 되어 유감이다)”라는 말로 첫 문장을 시작하더니, 내가 곧 같이 살게 될 거라며 기뻐했던 새로운 호스트가 내가 오는 것을 반대하는 통보를 그 전날 저녁 그녀에게 보냈다고 했다. 따라서 나는 이 여행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위스콘신의 끔찍했던 그 호스트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너무 기가 차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다시 예전 호스트 집으로 가는 것은, 갓 지옥에서 빠져 나와 세상의 자유와 행복을 맛본 나에게 다시 지옥의 문을 열고 하루하루 고통인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공포에 다시 사로 잡힐 것을 상상하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 예전의 호스트 집으로만 제발 돌려보내지 말라고 애걸복걸했다. 호스트 엄마가 다시 돌아온 나를 보면 분명 ‘이 요망한 계집애가 다시 제 발로 우리 집에 찾아왔네!’라 생각하며 나를 조롱할 것이 뻔했다.
  
  내가 간절히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답은 여전히 ‘예전의 호스트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와 지역관리자들의 심각한 대화를 눈치챘는지, 카페테리아에 있던 교환학생들과 호스트 가족들의 시선은 모두 우리를 향해 있었다. (그 때 저 뒤쪽 테이블에서 팬케잌, 소시지, 그리고 머핀까지 챙겨온 어떤 미국 남자 아이와 그의 엄마처럼 보이는 분이 다른 지역 관리자 한 명과 한 테이블에 앉아있었는데, 이때 반짝 스쳐간 이 인연이 후에는 내 인생의 지대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이 되었으니 이 장면을 꼭 기억하기를 바란다.)
  
  데브라는 나의 고생 하나하나를 내가 그녀에게 여태껏 보냈던 메일들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이를 모두 마가렛에게 설명해주었고, 마가렛은 그렇다면 다른 지역관리자들과 한 번 더 토의를 해본 후에 마지막 결정을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알려주기로 나에게 약속했다. 여행이 곧 끝나갈 무렵, 마가렛은 나를 위한 마지막 결단을 내렸다. 그녀의 대답은 나의 모든 예상을 깨는 것이었는데, 이는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의 집에 가 새로운 호스트 가족과 학교를 찾을 때까지 잠시 동안 그녀의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곧 예전 호스트의 집으로 다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이 선택에 찬성했다.
  
  모든 교환학생들은 짧고 즐거웠던 여정을 뒤로 하고, 아쉽지만 다시 본래의 학교 생활을 하기 위해 집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나도 내 짐들을 모두 싣고 버스에 오르려는 순간, 어떤 여자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잠시 불러 세웠다. 그녀는 자신을 에이미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의 집에서 한 명의 스웨덴에서 온 남자 아이를 호스트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에이미는 그 날 아침에 카페테리아에서 그녀의 아들과 함께 테이블에 있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녀는 또 나의 복잡한 상황들을 지역관리자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하면서, 내가 괜찮다면 자신의 집으로 와 함께 살아도 된다고 했다. 뜻밖에 내게 찾아 온 기회가 너무 반가웠고, 이 또한 天運(천운)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곧 그녀의 집이 위스콘신에 있고, 그 집에는 자신과 스웨덴 남자 아이, 두 명의 아들, 그리고 남편이 모두 함께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일단, 나는 전 호스트 때문에 위스콘신 주에서 사는 것에 치를 떨었고, 어쩌면 호스트 엄마를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겁이 났다. 뿐만 아니라, 나는 17년 인생 동안 한 번도 많은 남자들과 한 지붕 아래에 살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한국에 돌아가기 전까지 약 일곱 달을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와 그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에이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그녀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에 나는 기가 완전 눌려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터프한 성격 때문에 예전 호스트 집에서와 같이 내가 항상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달랬고, 지역관리자와 함께 하게 될 생활에 행운을 빌었다. 참 이상하게도, 나는 오는 내내 버스 안에서 그 기회를 놓친 것이 후회되어 계속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나 자신을 달랬지만, 그녀의 말 하나하나와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생생히 반복되며 기억되었다.
  
  나의 지역관리자인 데브라는 위스콘신 주의 쿠바시티(Cuba City)라는 작은 도시에 살았는데, 이곳은 나의 예전 호스트 가족이 살던 리치랜드 센터(Richland Center)로부터 차로 약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져 있던 곳이었다. 데브라의 남편은 낙농업이 유명한 위스콘신의 다른 사람들처럼 농부였고, 옥수수 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젖소도 길러 젖을 우유공장에 납품했다.
  
  데브라의 아들도 자신의 아버지와 공동으로 일하는 농부였으며, 둘은 항상 밭에서 그리고 사육장에서 함께 일했다. 이 때문에, 데브라의 집 마당에는 거대한 사이즈의 사일로(silo) – 가축을 위한 木草의 발효와 저장을 위해 세워진 탑 모양의 건조물 - 가 세워져 있었으며, 땅에 뿌려져 있던 거름냄새는 항상 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녀는 한 명의 독일인 남자아이를 호스트 했는데, 그의 이름은 벤이었고 우리는 그렇다 할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내가 이 집에 있는 동안 서로 말은 주고 받는 사이였다.
  
  내 방은 2층에 있는 벤의 방 바로 앞이었다. 혼자 방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잠을 잘 때 누구의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너무 편했다. 그렇지만 나는 또 엄청난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것은 데브라의 집이 약 100년 전에 지어진 집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개조한 쪽에 살고 있는 벤의 방까지만 들어오는 보일러가 내 방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스콘신에 한번쯤 살아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위스콘신 주는 미국의 캐나다의 국경지대와 맞닿아 있는 북쪽에 있기 때문에 항상 다른 州보다 더욱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낸다. 겨울의 위스콘신 주는 영하 15도를 밑돈다.)
  
  내 방에는 오직 한 장만의 이불이 있었고, 이 한 장으로는 전혀 위스콘신의 강력한 추위를 이겨낼 수가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서 엄마가 보내준, 두꺼운 털이 안쪽에 있는 야상잠바의 단추를 다 잠가 입었고, 목에는 털 목도리를 둘렀으며, 손에는 장갑을 꼈고, 조금이라도 더 추위를 피하기 위해 발에는 두꺼운 수면양말을 신었다. 누가 보면 꼭 나를 에스키모라고 부를 만한 복장이었다 유리창을 흔들며 사납게 돌진하는 강추위에 내 입술은 바르르 떨렸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추위에 점점 움직임이 둔해져 갔다. 하지만 위스콘신의 차디찬 겨울 바람도 예전 호스트 엄마의 冷氣(냉기)가 흐르는 말투와 視線(시선)에 비하면 훨씬 견딜 만했고, 오히려 내 마음은 이곳에서 평화로운 온기로 가득했다.
[ 2013-07-02, 00: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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