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5)/ 서울까지 쳐들어온 인민군
6·25의 傷痕(상흔)이 남아있는 철원 답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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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전철 1호선과 연결된 경원선 백마고지驛

최근 서울에서 87km 떨어진 大馬里(대마리)까지 경원선 철도가 연장되었다. 역 이름은 백마고지역. 수도권 전철 1호선의 종착역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철원읍과 동송읍 일대의 경기가 점차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한다.

다시 제5통제소 쪽으로 올라와 87번 지방도로로 나오면 길가에 노동당사의 폐허가 보인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김화·평강·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들을 수탈하고, 우익인사들에게  고문·학살 등의 만행을 자행했다고 한다.

이 건물 뒤 방공호에는 많은 인골과 함께 그때 사용된 고문기구가 발굴되었다. 노동당사 일대가 6·25 전에는 철원읍의 중심가였지만, 이제는 남방한계선과 너무 가까워 주위에 민가가 없다.

‘노동당사’에서 87번 지방도로 타고 잠시 내려오면 月下里의 ‘鶴(학)저수지’ 곁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到彼岸寺(도피안사)가 있다. 절 이름인 到彼岸은 “어리석고 미혹한 마음을 돌이켜 진리의 깨우침을 열어서 다함께 苦海(고해)의 世波(세파)를 건너 유토피아에 이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 대적광전에 모신 비로자나불 坐像(좌상)은 국보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앉은 키 90cm 쯤 되는 불상의 몸매가 오늘날의 한류 스타처럼 늘씬하다. 다음은 <월간조선> 2001년 8월호에 실린 拙者(졸자)의 비로자나불 좌상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가느다랗게 웃음진 눈, 크진 않지만 올곧은 코, 깨끗하고 또렷한 人中(인중)과 도톰해서 육감적인 윗입술, 단정한 一字形(일자형)의 아랫입술, 풍만하지 않는 갸름한 몸매, 그 위로 흘러내리는 투명한 佛衣(불의), 그것은 대자대비한 부처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아스라한 추억 속에 남아,憧憬(동경)의 세계로 이끄는 사랑의 化身(화신)이었다. 어느덧 필자는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인지, 3차원의 세계를 넘어 10代 소년 시절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았다.(하략)>

철원에는 인공 저수지가 많다. 그곳은 백로, 두루미, 왜가리 등 ‘철새의 천국’으로 되어 있다. 남북이 살벌하게 대치하는 곳이지만, 月井里(월정리)·月下里(월하리)·鶴(학)저수지·샘통 등 로맨틱한 지명도 많다. 샘통은 천연샘물이 4계절 내내 쉬지 않고 솟아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학이 飛翔(비상)해 춤추는 철새도래지로 보호 관리되고 있다. 

 
敵 제4사단 사령부의 주둔지였던 玉溪里 답사
 
다시 87번 지방도를 타고 ‘노동당사’ 쪽으로 올라와 3번 국도로 길을 바꾸었다. 이곳의 3번 국도는 平和路(평화로)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敵은 “제2의 조선전쟁이다”, “최후의 돌격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핵공격으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고 한라산에 공화국旗를 날리겠다”고 하는데 ‘평화로’라는 말은 잠꼬대처럼 들렸다. 

날은 어둑어둑해졌지만 연천읍까지 南下했다. 연천에는 임진강과 이것의 주요 支流(지류)인 한탄강이 종횡으로 흘러간다. 연천군의 거의 전부는 38선 이북에 위치하며 6·25전쟁으로 수복한 곳이다. 연천읍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연천역 부근 여관에 투숙했다. 하룻밤 숙박비 2만원, 허름한 방이었다.

다음날 아침, 차탄천변을 따라 북상하다가 78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남하해 玉溪里(옥계리)를 찾아갔다. 연천읍내에서 직선거리로 3.5km쯤이나 중간에 산이 가로놓여 길을 따라 가면 약 7km 거리이다. 옥계리는 남침 직전 북한군 제4사단 사령부가 설치되었던 곳이다. 38선까지는 약 12km. 이것은 敵 제4사단의 예하부대가 38선에 바짝 접근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북한군 제4사단장 李權武(이권무)의 <전투명령 No.1(1950년 6월23일부)>은 북한군의 남침을 증명하는 문서로 유명하다. 미국이 입수하여 1950년 7월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폭로한 것이다. 이 문서는 원래 러시아語로 기재된 것으로서, 러시아어 原文(원문)과 그 한글 번역문이 함께 발표되었다. 한국 국방부 발간의 방대한 《6·25 전쟁사(全9권)》 등 각종 서적에 남침 증거물로 인용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문서이다.

옥계리를 가로지르는 玉溪川(옥계천)은 이름에 비해서는 지금 그렇게 맑지 않다. 주위에 축산농가가 많이 있기 때문인 듯했다. 과연 군사적 요충이었다. 마을 동쪽으로 君子山(군자산, 328m) 등이 둘러싸고 있고, 서쪽으로는 임진강 本流(본류)가 마을을 휘감아 돌며 南流(남류)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은폐·엄폐되는 군사적 명당인 이 동네에는 현재 우리 최전방부대들이 주둔해 있다. 

옥계리에서 연천읍으로 돌아와 경원선의 중간역인 연천역에 들렀다가 입구에 세워진 ‘연천군 지도’를 보고 이곳과 필자가 45년 전 복무했던 임진강 지류 沙尾川(사미천)을 가로지르는 철책선 소대까지의 거리가 15km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사미천은 연천군의 동쪽 지역인 長南面(장남면)과 白鶴面(백학면) 사이를 꿰뚫고 흐르는 임진강 支流(지류)이다.

필자는 다시 3번 국도를 남하해 全谷邑(전곡읍)을 지났다. 전곡읍 동쪽 4km의 임진강으로 철원·연천을 관류한 한탄강이 흘러들어간다. 전곡 일대에는 벽돌공장과 노인요양시설이 많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에 따라 수도권 일대에서 부쩍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노인 요양시설의 급증 현상이다. 전곡의 용암지대에서는 1979년에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구석기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옛날 옛적 이곳이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전곡을 지나 동두천에 이르렀다. 동두천은 한탄강으로 북류하는 신천의 좁은 골짜기에 자리한다. 수도권 전철 제1호선의 동두천역에서 바라보는 소요산(536m)은 기암괴석이 특출하고 가을 단풍도 빼어나다. 동두천 시가지는 신천 동쪽 산록의 3번 국도를 따라 약 4km에 걸쳐 발달되어 있다.

경원선 철도의 작은 驛前(역전) 취락이었던 동두천은 6·25전쟁 후 미군의 기지촌으로 기반으로 급성장하여 1963년 읍이 되고, 1980년대에 市로 승격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美軍의 후방 철수로 경기는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동두천에서 양주를 거쳐 의정부에 도착했다.

의정부는 中浪川(중랑천) 상류에 위치한 비교적 넓은 분지이다. 중랑천은 道峰山(도봉산, 740m)과 水落山(수락산, 638m) 사이의 골짜기를 통해 市界(시계)를 벗어난다. 원래는 작은 역전 취락이었던 의정부는 동두천처럼 6·25 전쟁 후 미군의 기지를 기반으로 급성장해, 1963년 시로 승격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美軍이 대거 후방으로 이동해 기지촌 경기는 크게 위축되었다. 


서울 북동부의 최종방어선 붕괴 

의정부 정면에서 苦鬪(고투)가 계속되고 있던 무렵, 육본은 회의를 열어 금후 취해야 할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서울 固守(고수)’와 ‘서울 放棄(방기) 후 한강 남안에서 방어’라는 2개 안이 검토되었다. 다수의 참석자들은 ‘한강 남안에서 방어’를 주장했지만, 申性模(신성모) 국방장관과 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반격에 의한 ‘서울 固守’를 주장했다. 6월26일 오전 11시, 긴급 국회에서도 蔡총장은 반격에 의한 북한군 격퇴를 단언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긴요한 축석령은 점령되어 의정부는 함락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사실상 서을 死守(사수)는 어려워졌다. 

북한군의 남침 사흘째인 6월27일, 정부는 水原(수원) 천도를 결정, 축차적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서울 사수’라는 방송이 되풀이 되는 가운데 은밀히 진행된 정부의 천도는 서울시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드디어 피난행렬이 거리에 흘러넘치게 되었다. 오후 들어 육군본부는 극비리에 수원으로 후퇴를 개시했지만, 그때 미국의 해군·공군의 참전 발표가 전해졌다. 蔡秉德 총장은 다시 서울 死守(사수)를 결의했고, 피난길에 올랐던 서울시민 중 일부도 되돌아왔다.

이 사이에도 서울 북방에서는 비장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의정부 함락 직후 의정부 남측에 도착한 제25연대는 白石川(백석천)에 포진, 敵과 격렬한 사격전을 전개했다. 연대는 26일 밤에 들어서도 백석천 선을 확보하고 분전을 계속했지만, 27일 오전 4시 북한군 전차에 돌파당하고 말았다.

6·25 緖戰 당시, 연천에서 의정부에 이르는 3번 국도 상에는 16개 교량이 걸려 있었지만,  국군은 그 중 하나도 파괴하지 못했다. 이로써 敵 전차의 돌파를 지연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제7사단의 수치라 할 수 있다. 

북한군은 다시 남하하여 倉洞(창동) 방어선에 육박했다. 6·25 당시 창동은 양주군, 1963년에 창동을 포함한 도봉구가 서울에 편입되었다. 창동에는 전방으로부터 후퇴해 온 부대들이 모여 있었지만, 25일의 급거 출동 이래 잠자지도 쉬지도 못했기 때문에 장병들의 피로는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27일 정오 지나 敵 전차부대가 창동에 나타나자, 대전차화기를 갖지 못한 부대들은 즉각 후퇴를 개시해 그것이 후방에 전파되고 있었다. 탱크를 앞세운 적은 광주산맥에서 뻗어내린 수락산과 북한산 사이의 계곡인 3번 국도로 뚫고 내려왔다. 이리하여 창동의 방어선은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창동에서 후퇴한 부대는 그 남방 5km의 미아리 고개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들 부대와 6월27일 오전 光州(광주)로부터 도착한 국군 제5사단(이응준 소장)의 2개 대대로써 미아리 고개의 수비에 임했다. 수비대는 도로상에 차량을 橫轉(횡전)시킨다든지, 교량을 파괴해서 전차의 돌진을 저지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미 大勢(대세)는 기울었다.
 
敵은 창동에서 미아삼거리를 거쳐 吉音橋(길음교)를 건너 미아리고개로 육박해왔다. 창동에서 미아리 고개까지는 현재의 지하철 4호선 진행방향을 따라 공격해 온 것이다. 이때 수비대는 육박공격을 가하여 敵 탱크를 일단 후퇴시켰다. 

그러니 6월28일 0시경, 敵 탱크부대는 폭파되지 않았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고, 또 敵 보병부대도 침투해 왔다. 수비대는 분전했지만, 敵 탱크는 국군의 바리케이트를 돌파하고 전진해 오전 1시경 미아리고개를 넘어 돈암동-삼선동-혜화동을 거쳐 중앙청으로 돌진했다. 이 무렵, 다수의 피난민이 南下해서 서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총을 감춰 지닌다든지, 국군 병사를 가장한 상당수의 게릴라도 서울시내에 잠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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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09, 18:2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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