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6)/ 渡河지점을 놓고 고심하는 국군 1사단
白善燁(백선엽) 국군 1사단장의 奮戰(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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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로를 복원해 기차로 개성시 침입
 
6·25 남침이 개시된 그 시각에 38선의 軍 막사에 잠자고 있던 유일한 美 고문관은 한국군 제12연대에 배속되었던 조셉 다리고(Joseph Darrigo) 대위였다. 조셉 굴든(Joseph C. Goulden)의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는 다음과 같이 다리고 대위의 증언을 싣고 있다.   

<조셉 다리고 대위가 새벽 5시경에 포성으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포탄 파편과 총탄이 그의 막사로 날아왔다. 그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기 위해 개성 중심가로 지프를 몰았다. 중심가에서 그는 急(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수백 미터 떨어진 기차역에서 1천 명 기량의 북한군 병사가 기차로부터 15대 가량의 트럭을 내리고 있었다. 북한군은 야음을 틈타 38선 북방에 이미 파괴되어 있던 자기 쪽 철로를 고쳐놓고, 개성 북방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군 부대의 후방으로 그들의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다. 다리고 대위는 지프에 기어를 넣고 급선회하여 남쪽으로 질주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전쟁이 터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개성을 공략한 북한군 제6사단의 본래 주둔지는 압록강변의 국경도시 新義州(신의주). 6월13일자 민족보위상 최용건 명의의 남하 명령에 따라 6월17일 38선에 가까운 개성 북방 羅阿峙(라아치)에 도착해 남침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인접의 북한군 제1사단은 개성 북방 500m의 氷庫洞(빙고동)에 포진하고 있었다. 

6·25 발발 2개월 전인 4월23일, 白善燁(백선엽) 대령은 서부전선을 맡는 국군 제1사단장에 부임했다. 6·25 발발 당시에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에서 ‘고급간부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일요일 이침 7시경 제1사단 작전참모 金德俊(김덕준) 소령으로부터 숨가쁜 전화가 걸려왔다. 다음은 졸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백선엽 장군의 증언이다.

<내가 받은 6·25전쟁의 제1보였습니다. 新堂洞(신당동) 자택을 뛰어나와 마침 지나가는 군용 지프를 세워 타고 용산 삼각지 소재 육군본부로 달렸어요.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1사단으로 복귀, 지휘해도 좋으냐”고 묻자 “무슨 그따위 소리를 하는가! 빨리 사단으로 가라”고 소리쳐요. 그때는 택시 같은 것도 흔치 않은 시절, 1사단의 미군 수석고문 로크웰 중령의 남대문 관사로 찾아가 그가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水色(수색)에 있던 사단사령부에 직행했습니다. (<月刊朝鮮> 2003년 2월호 ‘최고의 야전사령관에게 배우는 실전 리더십’ 中)>

白 사단장이 제1사단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6월25일 오전 11시였다. 당시 상황은 개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전성호 대령)와는 통신조차 끊어진 상태였다. 또 汶山(문산) 방면의 제12연대는 교전 중에 있었고, 수색의 제11연대는 휴가·외출 중인 병력을 모아 전방 진지에 투입 중이었다.  

백선엽 사단장은 一線(일선)의 예하 연대를 바짝 붙어 지휘하기 위해 사단 사령부를 즉각 坡州(파주)국민학교로 전진시켰다. 예하 연대들이 시기를 놓쳐 임진강 방어 진지를 점령하지 못하면 단숨에 서울까지 밀리고, 퇴로를 끊겨 고립할 우려가 있었다.

白 사단장은 적 대부대의 渡涉(도섭, 걸어서 강을 건넘)이 가능한 高浪浦(고랑포)의 對岸(대안)으로 달려가 적정을 살핀 데 이어 하류의 京義線(경의선) 철교 쪽으로 내려왔다. 제11연대는 臨津江(임진강)에 걸린 경의선 철교를 중심으로 진지를 보강하고 있었다. 

白 사단장은 개성의 제12연대 主力이 철수하면 임진강 다리를 폭파하려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다리를 건너온 후 1시간이 지나도 약간의 병력만 다리를 건너왔을 뿐이었다. 제12연대 主力은 오지 않았는데, 敵은 후퇴하는 국군의 꼬리를 물고 다리를 건너오려 했다. 공병대는 철교의 폭파를 시도했지만, 도화선이 끊어진 탓인지 폭파에 실패했다. 임진강 철교는 전차를 앞세운 敵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파평산 진지에서 敵 전차부대 일단 저지

한편  坡平山(파평산, 496m) 진지를 점령한 제13연대는 전차를 앞세우고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도섭한 북한군 제1사단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병사들이 아직 전차를 본 적이 없는 데다 대전차훈련도 받아본 적이 없어 처음에 병사들은 돌진해 오는 전차에 겁을 먹었다. 金益烈(김익렬) 연대장은 몸으로라도 전차를 막기 위해 육탄공격 지원자를 모집했다. 제13연대 병사들의 육탄공격으로 敵 전차부대는 25일 중에 坡平山(파평산) 기슭 진지를 뚫지 못했다.

짧은 여름 밤이 지나가고 곧 26일 새벽이 밝아왔다. 敵의 기습공격에 허를 찔렸던 국군 제1사단은 적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 그리고 전차부대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26일 아침부터는 잘 싸우기 시작했다. 이곳 지형에 익숙한 데다 주요 거점에 미리 진지를 파두었기 때문에 강력한 저항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전날 밤 임진강 철교에 점령한 敵軍은 밤새 주변 고지를 점령, 임진강변의 汶山(문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문산을 빼앗기면 파평산의 제13연대가 퇴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었다. 白 사단장은 제11연대에게 역습을 명했다. 정오 경, 제11연대는 교도대대와 함께 사단 유일의 제6포병대대의 화력 지원 하에 돌격을 감행해 敵軍을 임진강 강변 가까이 몰아내기도 했지만, 敵의 火力優勢(화력우세)로 역습은 결국 저지되고 말았다.

26일 저녁 무렵, 敵 전차부대는 마침내 파평산의 제13연대 정면을 횡단하여 임진강 남안 도로를 따라 돌진, 문산으로 진입해 오기 시작했다. 白 사단장은 예하 모든 부대에게 후방 진지로 철수하라고 명했다. 이때 제12연대 고문관 도노반 소령이 서울에서 귀대해 다음과 같은 상항을 전달했다.

“육본은 의정부 방면에 6개 연대를 동시에 투입해 반격을 시도할 계획이며, 제1사단의 선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백선엽 사단장은 奉日川邑(봉일천읍)에서 金村(금촌)에 이르는 방어선으로 재집결하라는 명령을 예하 부대에 하달했다. 봉일천읍의 恭陵川(공릉천)은 서울 외곽의 최후방어선이었다.

26일 밤부터 적군은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적 전차가 야간에는 기동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남하하던 적 前哨兵(전초병)들은 기습을 받고 전멸했다. 제1사단 예하 각 부대는 큰 혼란 없이 27일 새벽까지 봉일천 방어진지에 투입됐다. 봉일천국민학교에 제1사단 임시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제1사단 임시사령부로 ‘육본 전략지도반장’ 金弘壹(김홍일) 소장이 방문했다.

김홍일 소장은 제1사단이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는 것에 대한 白 사단장의 견해를 물었다. 白사단장은 “한강 이북에서 敵을 방어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무모하다”면서 “제1사단마저 고립되면 한강 남쪽의 방어선도 위험해진다”고 대답했다. 육본으로 돌아간 金弘壹 소장은 채병덕 참모총장에게 제1사단의 한강 이남 후퇴를 건의했지만, 蔡 총장은 “미국이 개입하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면서 제1사단에 대해 “現 진지를 사수하라”고 명했다.


뗏목과 나룻배 타고 幸州나루에서 한강 건너 始興으로 철수

28일 새벽 미아리 고개를 넘은 적군이 서울시내로 들어오고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이 무렵, 국군 제1사단은 문산 탈환을 목적으로 하는 반격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탄약 보급을 받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사단 군수참모가 “녹번리까지 적이 들어오고, 서울시내에 인공기가 휘날리고 한강대교도 폭파되었다”고 전했다. 그때 이미 사단 임시사령부인 봉일천 국민학교 뒷산에는 적 騎馬隊(기마대)가 출현했다. 

白 사단장은 반격 중지의 명령을 내리고 황급히 수 백 미터 후방 恭陵川(공릉천) 다리 쪽 제방으로 사단 사령부를 이동시켰다. 그때 사단 左翼(좌익)에 美 항공기가 나타나 폭격을 가했다. 이 誤爆(오폭)으로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이 부상해 후송되었다. 사단은 전력을 최대한으로 보존해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목표는 우선 사흥 보병학교로 결정했다. 渡河(도하)지점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제11연대장 崔慶祿(최경록) 대령은 한강 하류 梨山浦(이산포)가 지형적으로 유리하다는 의견이었다. 반면 제13연대장 崔榮喜(최영희) 대령은 幸州(행주)나루가 철수병력과 중장비를 도하시키는 데 적합하다는 견해였다. 최영희·최경록 연대장은 백선엽 사단장과 같은 軍英(군영) 동기로서 후일 2인 모두 중장으로 累進,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결국 11연대는 이산포에서, 제13연대는 행주나루에서 도하했다. 결과적으로 이산포 쪽은 강폭이 넓고 물살도 빨라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많았다.

29일 동틀 무렵, 제1사단의 제1진은 육군보병학교 자리에 급히 창설된 시흥지구전투사령부에 도착했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이때 지휘체계가 무너진 서울 근처의 병력을 총지휘하여 한강 남안을 방어했다. 白 사단장은 사단의 현황을 설명하고, 우선 사단 재편에 착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건의해 양해를 얻었다.                            

서울의 서부 전선을 방어했던 국군 제1사단은 초전에서 선전했다. 1번국도와 경의선을 따라 공격해 온 북한군 제1사단과 6사단은 임진강과 공릉천을 활용한 국군 제1사단의 방어에 막혀 6월28일까지 서울로 진격하지 못했다.  

국군 제1사단은 남침 당시 청단-개성-문산 일개의 94km의 넓은 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의 전면 남침 시 38선 상에서는 지형상 종심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임진강변을 연하여 主저항선을 구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제1사단은 전쟁 직전에 학생과 청·장년의 협조를 얻어 主저항선상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또 백선엽 사단장은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 예비인 제11연대를 수색으로 이동시켜 유사시에 대비했다. 이러한 조치는 문산-고랑포를 돌파하려 했던 북한군에게 큰 출혈을 강요했다. 다음은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귀절이다.

<파평산 북쪽 전선을 방어하던 13연대는 고랑포의 임진강을 넘어 남하하는 적 전차에게 고전하기 시작했다. 연대의 대전차중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나 57mm 대전차포와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T-34전차의 두꺼운 장갑을 뚫지 못했다. 특히 대전차중대가 철판 관통력이 큰 철갑탄을 보유하지 못했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은 전차를 본 적도 없거니와 대전차 훈련을 한 번도 치러본 적이 없었다. 병사들은 첫날부터 ‘전차 공포증’에 시달렸다. 전차라는 말만 들어도 겁에 질려 사기를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13연대의 병사들은 용감했다. 자발적으로 육탄공격조를 짜서 폭약과 수류탄을 지니고 적 전차에 뛰어올라 자폭하는 눈물겨운 투혼을 보여줬다.
이들의 목숨을 건 희생으로 적 전차부대는 첫날 파평산을 통과할 수 없었고, 문산의 우리  예비대(注: 제11연대)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고랑포와 칠중성
 
고랑포는 임진강 北岸의 나룻터이다. 고랑포에서는 임진강 南岸인 장좌리(파주군 적성면)까지 渡涉(도섭: 걸어서 강을 건넘)이 가능하다. 敵 제1사단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임진강을 도하했다. 1.12 사태 때(1968년)  북한 게릴라부대의 金新朝(김신조) 일당도 미 제2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넜다. 필자는 1968년 고랑포대대 화기중대 제2소대장 캘리버(구경)50 기관총 소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연천군 장남면과 백학면 사이로 흘러내리는 사미천 지역의 철책선을 지켰다.

수 년 전, 필자는 고랑포 등 임진강 북쪽 철책선 지역을 답사했다. 1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다가 문산 북방 2km 지점 여우고개에서 우회전, 37번 도로를 따라 2km를 달리면 花石亭(화석정)이다. 화석정은 임진왜란 때 義州(의주)로 피난하던 선조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면서 밤길을 밝히기 위해 임진강 南岸(남안) 초가집을 불태웠던 곳이다. 화석정에서 임진강 남안을 따라 37번 국도를 8km 쯤 달리면 장파리가 나온다.

장파리는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미군 기지촌으로 이름난 ‘장마루촌’이다. 장마루촌에서 임진강은 한번 볼록하게 彎曲部(만곡부)를 이루는데, 그 만곡부의 안쪽이 파주군 적성면 長佐里(장좌리)이다. 6·25 때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1사단이 對岸(대안)의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도섭하여 장좌리로 상륙해 파평산(496m) 기슭에 진을 친 국군 제1사단 제13연대와 대결했다.

다시 37번 국도를 6km쯤 달려 적성면 斗只里(두지리)에서 長南橋(장남교)를 건너가면 연천군이다. 연천군 장남면에서 임진강 北岸을 따라 4km쯤 西進(서진)하면 바로 고랑포다. 고랑포대대 OP에 올라가 대대장 하영재 중령에게 신고했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필자는 고랑포대대 출신이다.

고랑포 OP 바로 뒤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고려 태조 王建(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항복한 敬順王(경순왕)의 무덤이 있다. 경순왕의 비석에는 6·25 때의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필자의 군복무시절에 이곳은 美 제2사단 관할 지역이었다.      

경순왕릉 바로 앞이 남방한계선, 즉 철책선이다. 필자는 작전참모 金 소령과 함께 철책선 바로 남쪽으로 이어진 군용도로를 따라 임진강의 지류 砂尾川(사미천)까지 이동해 병사들을 인터뷰했다. 40여 년 전, 사미천을 중심으로 한 東西(동서) 400m는 우리 소대의 경계 책임구역이었다.

그날 밤 필자는 철책선에서 야간 경계근무를 하는 병사들과 만났다. 철책선을 지키는 방법은 부대마다 다르고, 또 어느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68년, 인접 연대장은 철책선 경계병들에게 밤새도록 左에서 右로, 이어서 右에서 左로 군가를 부르게 했다. 졸음 방지책이었다.  

필자가 복무한 보병 제70연대의 경우에는 철책선 뒤 교통호로 5~10m 간격으로 연결되는 無蓋壕(무개호) 속에 2인 1인조로 매복하는 방식이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판초 우의도 입지 못하게 했다. 역시 졸음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여름엔 모기에 뜯기고 겨울엔 모진 바람에 할퀴다 보니 도시생활에 젖어 있던 필자와 같은 체력조건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갑제닷컴> 컨텐츠의 외부 게재시 제목과 내용을 수정하지 마십시오.

 

[ 2013-07-15, 13:13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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