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숙시킨 소프트볼
조인정의 미국 유학奮鬪記(13) / 손바닥과 엄지손가락에는 물집이 잡혀있었고 쑤시고 아팠지만, 나는 이를 영광의 상처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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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possible? No, I’m possible!” 하늘 위로 떠오르다가 나를 약올리듯 글러브를 튕겨맞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노란 소프트볼을 보며, 나는 그날도 이를 악물었다.

3월 초였을까? 나와 점심시간에 한 테이블에서 급식을 같이 먹던 친구인 크리스탈(Krystal Phillips)이 내게 소프트볼을 해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소프트볼(softball)? 아마 TV에서 예전에 본 것 같았다. 올림픽 때 일본 여자 선수가 공을 풍차 돌리듯이 휘휘 돌려 타자에게 던지는 모습. 그걸 내가 한다고? 정말 할 수 있을까?

결국 크리스탈에게 이끌려 방과 후에 있던 소프트볼 미팅(meeting) 장소에 갔다. 그 곳은 수학 교실이었는데, 나를 가르치던 수학 선생님이 알고보니 우리 학교 소프트볼 코치였다. 코치는 간단히 소프트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했고, 나는 그것을 쉽게 ‘여자가 하는 야구 경기’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종이에 자신이 맡고 싶은 포지션과 원하는 백넘버(back number: 등 번호)를 적었는데, 어떤 등번호 하나를 두고 몇몇 아이들간의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다. 숫자 하나가 엄청 민감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무 것도 개의치 않았던 나는16번을 골랐고, 우리나라 어느 유명한 야구 선수가 16번을 달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포지션에도 마찬가지로 ‘anything(아무거나)’이라고 적었다. 전혀 포지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며칠 뒤 방과 후 연습이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당시, 배드민턴이나 체력장에서 나름대로 반 친구들보다 잘했기 때문에 연습에 대해 별로 긴장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의 연습은 나를 완전히 땀에 젖은 생쥐꼴이 되게 했고,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처럼 숨을 거칠게 헥헥 몰아쉬었다. 처음에 소프트볼 경기장을 몇 바퀴 돌고 나면, 바로 두 명이서 한 팀이 되어 Throw & Catch(던지기 & 잡기) 연습을 했다. 글러브를 끼고 공을 어떻게 잡는지도 몰랐던 때라 날아 오는 공을 받긴 했는데, 배드민턴 치듯이 쳐버려서 공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가끔 날아오는 공을 향해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는데, 글러브를 끼고 있는 손은 왼손이었기 때문에 멍이 들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와 달리 다른 친구들의 던지고 받는 공들은 아주 말끔한 포물선을 그렸고, 글러브로 떨어지는 공의 소리 또한 경쾌했다.  

나의 포지션은 Right Fielder(우익수)로 정해졌다. 소프트볼 경기에서 우익수는 타자가 치는 공이 많이 날아오지 않는 구역이었기 때문에, 다른 포지션보다 쉬운 자리였지만 수비면에 있어서는 강해야했다. 내가 우익수로 지정된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크리스탈과 그녀의 언니의 엄청난 도움이 내 실력을 향상시켜 우익수로 배정받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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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리스탈과 친했기 때문에, 부활절(Easter)에 그녀의 사촌 집에 초대받기도 했고, 그녀의 집에 놀러가 1박2일을 하기도 했다. 크리스탈의 집에 처음 방문했을 때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소프트볼과 관련된 엄청난 수의 메달과 트로피, 사진이었다. 알고보니 크리스탈의 언니 엔젤(Angel Phillips)은 그녀의 가족이 전년도까지 살던 애리조나 주에서 소프트볼 고등학교 MVP로 뽑혔고, 신문에도 그녀의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실렸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엄마도 학생시절 학교 소프트볼 선수였고, 아빠 또한 소프트볼 열성 팬이셨다. 크리스탈도 어릴 적부터 가족의 영향을 받아 소프트볼을 즐겼다고 했다. (크리스탈은 경기에서 많은 홈런을 날렸고, 공도 빠르게 잡으며 3루수를 맡던 우리 학교 최고의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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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과 엔젤 언니는 내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말마다 나를 이끌고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그들은 내게 뜬 공은 글러브를 이용해 잡되, 오른손은 대기하고 있다가 공이 글러브로 들어간 순간 빠져나가지 않도록 바로 글러브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배팅 연습도 철망과 몸이 배트 만큼의 거리를 확보한 후, 배트를 휘둘렀다. 이 때, 배트가 철망에 맞아 굉음을 내면 잘못된 스윙이었다. 우리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주말을 소프트볼을 위해 반납하고, 해가 질 때까지 고된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연습이 끝나고 내 손을 보면 배팅 연습 때문에 손바닥과 엄지손가락에는 물집이 잡혀있었고 건들 때마다 쑤시고 아팠지만, 나는 이를 영광의 상처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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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접어들면서, 거의 매주 두세 번은 다른 학교와 경기가 있어 8교시 중 7교시만 마치고 학교 버스에 올라 경기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8교시가 시작되는 종이 치고, 바로 과제를 받아들고 나는 여자 탈의실로 허겁지겁 뛰어갔다. 내가 항상 맨 마지막에 탈의실에 도착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광속으로 유니폼을 갈아입고, 머리를 질끈 묶으면 소프트볼 경기 준비는 완성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경기는 5월 3일 내 생일 날 있었던 Potosi를 상대로 한 홈경기였다. 나는 이 날 포지션 교체로 우익수에서 중견수(center fielder)로 이동하였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역할이라서 더욱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더군다나 관중석에는 나를 응원해주러 온 나의 호스트 동생 키근과 호스트 엄마 에이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날보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심장이 쿵쾅대는 소리와 투수가 던진 공을 받아 치는 타자의 배팅 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 나를 향해 날아오는 소프트볼을 제외하고는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 했다. 공은 나를 향해 포물선을 그리며 뜬 공으로 날아왔고, 점점 더 내 눈앞에서 커지는 공을 꼭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공이 내 글러브안으로 완벽히 안착되었고, 나는 크리스탈이 알려준대로 오른손을 이용해 글러브의 공이 튀겨 나가지 않도록 글러브를 막았다. 센터 필더로서 아웃시킨 첫 번째 공이었다. “Go Korean! (바로 그거야, 한국인!)” 관중석 쪽에서 키근이 외치는 응원소리였다. 관중석의 관객들이 나를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나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국인으로서 한 몫을 하게 된 것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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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연습에 가기 전, 크리스탈 집에 미리 가서 크리스탈과 함께 연습용 티셔츠를 만들었다. 주말에 함께 사두었던 검정색 티셔츠 위에 네온 색의 펜으로 각자의 이름과 등번호를 썼다. 소프트볼도 그려넣고 예쁘게 장식도 해서 당일 연습 시간에 커플티로 입고 갔는데,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코치의 이름도 내 티셔츠에 적었기 때문에 그 또한 우리의 티셔츠를 매우 흡족하게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이 티셔츠는 내게 크리스탈과의 즐거웠던 소프트볼 연습을 상기시켜주는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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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볼 연습은 매일 2시간씩 방과 후에 실시되었고, 일주일에 6일 연습을 해야 했다. 일주일 중 쉬는 날이 하루 있었지만 나는 크리스탈과 연습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 쉬는 날이 없었다. 가끔은 정말이지 녹초가 된 몸 때문에 하루 쉬고 싶기도 했고, 물집이 자꾸 생기고 터지고를 반복하는 통에 배트를 손에 쥐기도 버거웠다. 숙제는 연습을 마친 후 지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는 졸다가 깨다가를 되풀이해가며 버겁게 끝낼 수 있었지만, 다음 날 연습 때 피곤함으로 내려오는 내 눈꺼풀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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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프트볼을 통해 크리스탈을 비롯한 많은 미국 친구들과 폭넓은 교우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연습 중 공을 던지고 받으며 나누던 대화, 다른 학교로 경기를 오고 갈 때 버스 안에서 함께 했던 시간, 경기 중 우리팀을 향한 응원전, 마지막 대회 날 흘렸던 아쉬움의 눈물. 소프트볼과 함께 했던 내 소중한 시간들은 신체적인 단련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단련으로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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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7, 17:19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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