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7)/ 국군, ‘한강대교 폭파’로 退路(퇴로) 막혀
서울의 중학생들 인민군에 대거 ‘자원입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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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2010년대의 前方

만약 그때 야전삽 하나로 거뜬히 지하 벙커를 짓는 등 작업이라면 못하는 일이 없고, 더위와 추위에도 강한 농촌 출신 병사가 없었다면 철책선 소대장 직무 수행은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兵法(병법)에도 농촌에서의 募兵(모병)을 으뜸으로 쳤던 이유를 절실히 깨달았다. 요즘 철책선의 야간 경계방식은 動哨(동초) 방식을 취한 데다 철책선 바로 뒤에 잠시 쉬어가는 초소까지 설치해 장병들의 체력 소모가 최소화하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필자는 철책선 소대 막사에서 1박을 했다.

요즘 최전방 병력들은 대학 재학 중 입대가 대부분이다. 필자가 철책선 근무할 때만 해도 병사 대부분은 시골 출신이었고, 그 중에는 글을 모르는 머슴 출신도 더러 있었다. 그런 병사가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소대장들이 代筆(대필)해 주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시골 面(면)서기 ‘빽’만 있어도 철책선에는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낮에는 지하벙커와 교통호를 파고 클레모아 및 조명지뢰를 설치하며 除草(제초)작업도 하며 야간에는 2교대로 참호 속에 들어가 경계근무를 해야 했다. 2교대라 하지만 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는 소대의 全병력이 참호에 투입되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雨衣(우의)의 착용은 금지되었다. 졸음 방지를 위해서였다. 

적은 우리에게 휴전 이후 以逸待勞(이일대로)의 수법을 구사해 왔다. 즉, 당장 공격할 듯이 떠벌려 우리 군에게 장기간 비상근무에 들어가 피로에 젖도록 강요하는 것을 常用手法(상용수법)으로 삼아 온 것이다. 북한이 세계적으로 잘 하는 못된 짓이 몇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귀찮은 것이 땅굴이라는 ‘두더지 작전’이다.  

수 년 전, 연천군 백학면 峨嵋里(아미리)에는 북한의 장거리 남침용 땅굴이 통과하고 있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지의 비룡부대 사단장은 땅굴을 향해 화염방사기 등을 발사했다. 비룡사단의 GP에서는 지하로부터 지상으로 황급히 올라오는 다수의 敵兵(적병)들을 관측했다고 한다. 아미리는 백학초등학교와 백학저수지에 인접한 임진강 北岸(북안)의 마을이다. 사미천 東岸(동안)의 백학면 浦春里(포춘리)에서는 이미 우리 군에 의해 제일 먼저 발견된 ‘제1땅굴’이 있다.  

백학면에서 371번 지방도로를 7km 쯤 남진하면 임진강에 飛龍(비룡)대교가 걸려 있다. 비룡대교를 건너 3km쯤 남진하면 積城(적성)향교, 적성향교 바로 뒷산이 현재 국군의 진지가 있는 重城山(중성산)이다. 중성산은 羅唐(나당) 7년전쟁 시기(서기 670~676년) 양군 간에 쟁탈의 요지였던 七重城(칠중성)이다. 칠중성은 높이 148m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오르면 그때 왜 칠중성을 彼我(피아)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전방)의 임진강과 後方(후방)의 감악산(675m)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이다. 감악산 역시 나당전쟁과 6·25전쟁 때 쟁탈의 요지로서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중심인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중류의 모습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표주박[瓠蘆(호로)]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이다. 그리고 對岸(대안)에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군과 연합해 唐軍에 대항했던 요새인 ‘호로고루’가 보인다.

중성산 남쪽 1km에 위치한 馬智里(마지리)는, 필자에겐 GOP 근무 3개월 만에 처음 나와  감격했던 ‘그냥 사람 사는 마을’이었다. 마지리에 있던 보병 제70연대 본부는 지금은 어디론가 옮겨가고 그 자리엔 군인 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적성면 소재지로서 거리도 꽤 번잡해졌다.

마지리 남쪽 2km 雪馬里(설마리)에 영국군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1951년 1월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 소속 1개 대대 760명이 紺嶽山(감악산) 기슭에 매복한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고 전멸당했던 곳이다. 그들은 60시간 동안 고립된 채 진지를 사수함으로써 영국 군인의 명예를 지켰다.

지금 감악산 계곡은 유원지化하여 곳곳에 모텔에다 가요주점까지 들어서 있다. 감악산 계곡을 빠져나와 南面에 이르러 364번 지방도로로 들어가면 바로 비룡사단 사령부가 있는 신산리이다. 비룡사단 정문 앞에도 라이브 카페의 간판까지 보인다. 敵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탄가지 개발해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최전선 接敵(접적)지대마저 긴장감이 사라져버렸다.


한강대교 폭파

당시 서울의 한강에는 한강대교(인도교)와 한강철교(철도교)가 걸려 있었다. 蔡 총장은 적의 서울 돌입 2시간 후에 이들 다리를 폭파하도록 공병감 崔昌植(최창식) 대령에게 명했다. 그러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의 폭파에 있어서 한국군 주력의 후퇴 및 서울시민의 피난에 대해서는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李承晩 대통령은 6월27일 水原으로 피난했다.

6월28일 오전 2시경, 蔡 총장은 미아리 방어선이 1시간 전에 붕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를 폭파하도록 崔 대령에게 전화로 지시했다. 그러나 그 직후 제5사단장 李應俊(이응준) 소장으로부터 “군의 주력도 서울시민도 아직 北岸(북안)에 있는 상황에서 폭파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받은 蔡 총장은 폭파 연기 지시를 張昌國(장창국) 작전국장에게 주어 최창식 공병감에게 급행시켰다.

그런데 그 무렵, 시내의 도로 곳곳은 피난민과 차량으로 매워져 張 국장의 지프는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張 국장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한강대교와 한강철교는 폭파되었다. 이때 시민·군인 등 500~800명과 그들을 태운 수십 대의 차량들도 폭발음과 함께 날려버리는 비극이 빚어졌다. 이렇게 자기 손으로 퇴로를 차단한 한국군은 일거에 붕괴했고, 150만 서울시민도 한강 北岸(북안)에 잔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강다리 폭파의 책임에 대해 조셉 굴든의 《한국전쟁-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에서 당시 한국군에 배속되어 있던 조지 세드버리 2세 소령은 美 군사고문단 본부에의 전화 보고를 근거로 蔡 총장은 억울하고 지적하고 있다. 다음은 조셉 굴든의 《한국전쟁-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관련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이(한강다리 폭파)명령은 한국군 고위 사령부에 커다란 문제를 일으켰으며, 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큰 소리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100킬로그램 이상의 거구였는데, ‘돼지’라는 별명을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일 정도였다. 미국 대사관의 해럴드 노블(참사관)에 의하면 그는 너무 뚱뚱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걸어 다녔다. 얼굴엔 거의 눈을 가릴 정도로 살이 쪄 있었다. 그러나 군인답지 않은 외모와는 달리, 그는 용사였다. 몇 시간만 더 교량을 고수한다면 며칠 내로 당장에 필요한 병력과 장비가 살아 남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 고위관리는 즉각 폭파시켜서, 비록 한국군 수천 명이 희생되더라도 북한군의 탱크가 한강을 넘는 것은 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蔡 총장이 계속 반대하자 그는 즉각 지프차에 실려 한강 너머로 보내졌다.>    

이때 한강대교는 끊어졌지만, 그 바로 서쪽에 있던 한강철교는 上板(상판)의 일부만 파괴되었을 뿐이었다. 美 공군기가 7월3일 한강철교에 대한 폭격을 감행했으나 絶斷(절단)에는 실패했다 

부산 임시 수도에서 공병감 崔 대령은 ‘敵前(적전)비행죄’란 죄목으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崔 대령에 대한 군법재판 전에 이미 채병덕 장군은 (1950년 7월) 河東(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 崔대령의 부인의 호소에 의해 이루어진 1964년의 재심에서 崔 대령의 무죄가 확정되기는 했다.

사실, 6·25 緖戰에서 국군은 하천에 걸린 인도교와 철도교 폭파에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는 지연전이 필요했던 시기에 국군이 범한 최대의 실책 중 하나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상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대교를 폭파시킨 공병감을 처형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當代의 名品 전차 T345/85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서 앞세워 국군의 방위선을 유린한 것은 소련제 전차 T34였다. 제2차대전 중의 名전차로서 獨蘇(독소)전쟁 중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탁월한 공을 세워‘모스크바의 수호신’이라고 찬양되었다. 필자는 10년 전 늦가을에 러시아를 여행하는 기회에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러시아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밟으며 찾아간 大平原(대평원), 그곳이 바로 獨蘇간에 전개된 일대 탱크戰(전)의 현장이었다. 전쟁기념관 곳곳에는 실물의 T34/85탱크들이 전시되어 있고,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의 기록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諸元(제원)은 다음과 같다.

탑승인원 5명, 戰鬪重量(전투중량) 31.5톤, 主砲(주포) 85mm 52口徑砲(구경포), 裝甲(장갑) 60-90mm, 시속 53Km, 장비탄수 55발, 항속거리는 300km. 

북한은 남침 전에 T34 전차 242대를 소련으로부터 양도받았다. 단 한 대의 전차도 없는 한국군은 그 위력에 놀라 패닉에 빠졌다. 북한군의 주력병기 T34/85는 소련의 중형 전차로서 1943년에 初期型(초기형)이 생산되었다. 제2차 대전의 유럽전선에서 각국이 속속 신형 전차를 투입하던 중 中型(중형)전차로서 완성형을 나타낸 것이었다.

T34의 개발·생산을 언급하려면, 우선 1941년 6월에 개시된 독일군의 소련 침공(바르바롯사 作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獨蘇戰의 緖戰(서전)에서, 탁월한 전차운용능력을 가진 나치스 독일은 소련 영내에 침입해, 당시 세계 최대로 알려진 소련의 전차군단을 여지없이 분쇄했다. 이 독일 기갑부대의 거센 물결을 처음으로 틀어막은 것이 76mm포를 탑재한 T34/76이었다. 그때까지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던 독일의 전차는, 대량생산된 T34/76 앞에 맥을 추지 못했다. 그것은 ‘T34쇼크’로서 독일 전차병의 戰意(전의)를 꺾었다.

이후 독일은 T34/76의 디자인을 흉내 낸 ‘판사’ 전차를 출현시키는 등으로 독소 간에 치열한 전차 개발 경쟁이 시작되어 점차 T34/76의 優位(우위)를 잃어갔다. 이에 소련은 85mm포를 장비한 신형 포탑을 탑재하여, 공격력이 강화된 T34/85를 생산했다. 신형 포탑에는 戰車長(전차장)·포수·장전수 등 3인이 탑승하고 개량 전에 비해 포수의 부담이 경감되어 교전 능력이 향상되었다.

獨蘇전쟁에서 이기고, 滿洲(만주) 침공에도 활용한 소련군의 신형병기는 북한군에게 그대로 인계되었다. 다만 전차와 보병의 협동작전에서 북한군은 아직 미숙했지만, T-34/85는 步戰(보전) 협동 없이도 임무 수행에 큰 지장이 없었다. 兵器(병기) 자체의 우수성이 이미 평가받고 있었다.

한국전에서 T34의 진격속도는 美軍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한국군은 하천에 걸린 교량의 파괴, 지뢰 설치 등의 유효한 저지수단을 강구하지도 못했고, 美軍도 자국의 신형 전차 M26팻싱 및 M46페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T34/85을 정면에서 막아설 수 없었다.

사실, 6·25 남침 8개월 전인 1949년 10월 북한군의 군사력이 계속 증강되고 있는 사실을 들어 국군 수뇌부는 미국에 M26퍼싱 전차의 지원을 요청했었다. 이에 6·25 발발 직전까지 주한 美 군사고문단(KMAG)의 로버츠 준장 등은 무책임하게도 “한국 지형에는 탱크전이 맞지 않는다”면서 “산이 많고 길은 협소한 데다 논·밭이 널려있어 탱크를 끌어들이면 수 시간도 못 버티고 박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당시 미국은 야속할 정도로 한국군 지원에 인색했다. 무초 駐韓 미국대사조차 태평세월이었다. 

“우리 미국인이 한 사람이라도 남한에 남아있는 한 북한은 감히 쳐내려오지 못할 것이다”

후일 낙동강 방어전 초기, 美軍이 보유한 M24 輕(경)전차, M4셔먼 中전차도 북한군의 T34전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T34전차를 제압했던 것은 나치 독일의 重(중)전차에 대항해 개발한 미국의 M26 퍼싱 및 M46 패튼 등의 전차를 투입한 이후부터였다. 
 
 
敵 治下의 서울: 중학생 반 이상이 인민군에 ‘자원입대’

 
한강 북쪽에 있던 국군 장병의 다수는 그 후 갖은 난관을 뚫고 한강을 건너 自隊(자대)에 복귀했다. 나머지는 지하에 잠복한다든지, 탈출을 시도하다 붙들린다든지, 혹은 투항해서 敵軍에 편입되는 자들도 있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로부터 피난했던 시민은 약 40만, 나머지 태반의 시민은 서울에 남았다. 집이나 산속에 숨은 사람들, 군인과 경찰관들처럼 잠행한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敵旗(적기)를 흔들며 敵軍을 맞이한 자들도 있었다.

이리하여 서울은 사흘 만에 함락되고, 국군의 병력은 반 토막이 되었다. 그런데 서울을 진격한 북한군 1군단의 제3·제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제1線 부대로서는 이상한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전술적으로 당연한 추격을 하지 않고 왠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사흘 간이나 서울에서 정지했다. 이에 대한 깊은 배경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각 부대는 우선 정부기관·발전소·방송국·은행의 장악 및 정치범의 체포, 죄수의 석방 등 전술적으로 한가한 짓을 했다. 그래서 6월28일·29일·30일의 사흘 간을 허비했다는 것은 국군에게는 起死回生(기사회생)의 기회를 제공한 셈이었다. 이후 한강철교의 補修(보수)·확보에 7월1~2일의 이틀간을 소요되어 7월3일 새벽이 되어서야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이 한강철교를 도하했다. 결국 한국군은 5일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던 셈이었다.

서울 출신의 국회의원 元世勳(원세훈) 등은 反공산주의 혐의자와 한국정부 전직 관료들에 대한‘인민재판’을 주관하는 데 동의했다. 건군 초기 경비대총사령관(준장)을 지낸 宋虎聲(송호성)은 북한방송에 출연하여 “인민의용군을 구성하여 인민군과 함께 싸우자”고 선동했다. 다음은 굴든의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美 CIA의 분석에 의하면 宋장군의 연설은 한국 국민과 세계에 대한 북괴의 장래 심리적·선전적 접근의 전조였다. 즉, 한국군은 박살나고 정부 관리들이 붙잡혔기 때문에 한반도 전체에 걸쳐 임시통일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이 북한 정권에 시도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략) 며칠 후 공산주의자들은 CIA가 예상한 일들을 저질렀다. 그들은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남한 출신 인사로 구성된 서울인민위원회를 결성했다(편집자―위원장 이승엽도 남노당 출신의 월북자였다). 위원들 중 많은 수가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던 공무원과 국회의원 등이었다. 또 공산주의자들은 군인·경찰·관리의 가족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중략)서울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북한군에 자진 입대함으로써 공산침략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는 보고를 뒷받침했다.>

서울 학생들이 대거 북한군에 ‘자진 입대’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거리엔 공산주의 데모에 참가한 젊은이들로 붐볐다. 전직 국회의원 48명이 敵에 부역했다. 이런 것들은 수도를 敵에게 빼앗긴 나라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 업보였다. 敵 治下(치하) 서울의 쌀값은 대구·부산의 7~11배에 달했다.

 

[ 2013-07-18, 14:11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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