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8)/ 맥아더가 알고 싶었던 한국군의 戰意
“스탈린은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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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장군의 공적
 
국군은 金弘壹(김홍일) 장군의 주도 하에 緖戰 패배로 뿔뿔이 후퇴하던 5개 사단을 3개 사단으로 재편성하고, 상급사령부로서 始興(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만들어 鷺梁津(노량진)을 중심으로 한 한강 南岸(남안) 방어선에 병력을 투입했다. 영등포 以東(이동)은 혼성7사단, 그 以西(이서)는 혼성수도사단이 방어했다.

김홍일 장군은 30세 전후의 청년들이 사단장을 맡고 있던 당시로는 노장(52세)이었다. 1898년 평북 龍川郡(용천군)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에 참가하고, 중국의 貴州(귀주)육군강무학교· 귀주육군실시학교 포병과·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된 그는 임시정부가 중국 國民黨(국민당)과 對日(대일) 협동전선 구축에 합의한 1933년 이후 국민당軍(군)에 참가, 제19집단군사령부 참모처장을 역임하고, 對日전쟁 말기에는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을 지냈다. 그는 당시 국군 지휘관들 중 사단급 전투를 지휘한 경력자로서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홍일 장군은 한강방어선을 5일간 지켜냈다. 이것은 국군과 미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그는 곧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모체로 창설된 제1군단 사령관으로서 낙동강까지의 지연전을 지휘하게 된다. 

한강철교에서 廣津橋(광진교)에 이르는 한강의 길이는 약 20km. 이곳의 강폭은 1~1.5km, 강물이 흐르는 江水의 폭은 400~500m, 그리고 수심은 2.5m로서, 어느 곳에서든 徒涉(도섭, 강물을 걸어서 건넘)이 불가능하다. 두물머리[兩水里(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合水(합수)하는 한강은 수량이 풍부하다. 현재 한국 국민의 절반이 이 한강의 물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朴憲永: “남침하면 20만 남노당원이 궐기한다”
  
북한군은 정면으로부터의 기습 공격으로 국군의 의표를 찌르는 데 성공했지만, 기습은 그것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습효과를 지속시켜 상대가 대응할 여유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전술학의 기본이다. 그런데 예비사단 등의 縱深(종심)전력이 충분치 않았던 북한군은 정면으로부터의 공격 뿐 아니라 국군 후방으로부터의 좌익 봉기에도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開戰(개전)에 앞서 남노당 당수로서 월북한 북한 정권의 부수상 겸 외상 朴憲永(박헌영)은 “만약 인민군이 남하하면 南에 있는 20만 남노당원들이 궐기해서 인민군의 군사작전을 지원하여 全남반부를 해방할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남침 다음날 북한정권의 수상 김일성도 ‘全조선 민족에 호소하는  방송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공화국 남반부의 남녀 파르티잔은… 적의 후방에서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도로·교량·전신·전화 등을 절단 파괴하고, 또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적의 전선과 후방을 차단하라.”

당시만 해도 ‘민족해방’이라는 깃발이 돌림병처럼 번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서울의 중학생의 절반 이상이 의용군에 ‘자원입대’하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 중의 상당수는 半(반)강제로 徵募(징모)당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박헌영과 김일성의 희망사항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국의 후방에 주둔한 제2·제3·제5사단이 서울로 北上(북상)했던 결정적 찬스에도 불구하고 남노당의 봉기는 불발로 그쳤다. 바로 이런 점에서 북한군은 결정적인 전승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말았다.

휴전 후 박헌영을 비롯한 월북 남노당 간부들은 ‘美帝(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을 쓰고 대거 숙청되었다. 숙청 이유의 하나로는 남로당 봉기의 불발도 손꼽히고 있다. 박헌영은 ‘괘씸죄’에 걸려 김일성 일당이 풀어놓은 사나운 세퍼드에 물려죽었다고 한다. 일제 때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형무소에 갇혔으나, 자기 똥을 스스로 집어 먹는 佯狂(양광)으로 풀려난 투사로서는 너무도 비참한 종말이었다.  


트루먼의 첫 반응: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한다”
 
1950년 6월24일(미국시간) 해리 투르만 미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 인디펜던스(미주리州)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날 밤 9시(한국시간 6월 25일 오전 9시)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전화였다. 다음은 趙甲濟(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前 月刊朝鮮 사장)의 著書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의 한 대목이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 공격했습니다. 무초 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국지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애치슨은 (중략) “야간 비행이 위험하고, 국민을 놀라게 할 필요가 없으며, 이미 해야 할 조치를 취했다”며 즉각 귀환을 만류했다. 
일설에 의하면 이때 투르먼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곁에 있었던 딸 마거릿은 회고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25일 오후 2시(한국시간 6월26일 오전 2시) 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에 대한 철병 요구와 가맹국에 의한 이 결의의 실행을 결정했다. 이때 소련 대표가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회의에 불참한 것은 스탈린의 음모였는데, 이에 대한 배경설명은 後述(후술)할 것이다. 그야 어떻든 북한군은 안보리 결의를 무시하고 침공을 계속했다.

25일 저녁(미국 시각)에 전용기 인디펜던스號(호)가 위싱턴 국립공항에 착륙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마중 나온 애치슨 국무장관, 루이스 존슨 국방장관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고위급 인사 14명이 모인 블레어 하우스(미국의 영빈관)로 직행했다. 대통령은 참석자 전원이 발언하도록 유도했다.

러스크 국무차관은 “戰後(전후)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레들리 합참의장은 “공산당에 대하여 선을 그어야 한다”면서 “소련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 같다”말했다. 트루먼은 브래들리의 말을 받아서 “그 선을 단호하게 그어야 한다”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 소련은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 또 다른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싫어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한국을 공짜로 삼키려 한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 남침을 저지할 수 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에 반대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지원 요청, 그리고 東京(도쿄) 극동군사령부의 맥아더 원수로부터 한국군 붕괴 위기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맥아더 원수는 “한국군은 북한군을 저지할 수 없어, 완전한 붕괴가 임박했다”고 워싱턴에 보고했다.

駐韓(주한) 유엔한국위원회는 “북한군의 공격은 계획적인 전면 침공이다”라는 결론을 발표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6월27일 극동 해·공군에 대해 38선 이남으로 침공한 북한군에의 공격을 명령했다.


무초 대사: “이승만 대통령은 위기 때 일 처리 잘해”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극비리에 水原(수원)으로 내려갔다. 그는 전날 景武臺(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美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공산군에게 붙들리면 국가적 재난이 된다는 거야. 내가 먼저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무초 대사는 李대통령에게 “서울을 떠나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 그리고는 “각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만, 우리(美 대사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설득했다. 景武臺(경무대)는 수원으로 내려가면서 무초 대사에겐 알리지 않아서 무초는 대단히 화가 났고, 李 대통령은 이를 미안해했다고 한다. 이런 무초 대사는 1971년 워싱턴에서 ‘역사기록을 위한 육성증언’에 응해 “그날 한국은 기습을 당하고도 참으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군은 당일에 서울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북한은 전쟁을 먼저 일으킨 이승만 정부가 북한군의 반격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고, 국민들이 통일을 환영하고 있다면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여 미군과 유엔의 개입 근거를 없애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무초 대사는 한국사정을 잘 아는 만큼 6·25발발 초기 한국군의 패배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즉, 단기간에 건설된 한국군이, 미국이 무기를 제대로 대주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로 싸운 것은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그의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재미있다.

<이 대통령은 아주 머리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5년간 한국의 독립이란 목표를 위해 달려온 사람이었습니다,(중략)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 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정세를 정확히 이해했습니다.(중략) 그는 의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었으나 위기 때 일처리를 잘했으며, 자신의 뜻을 고급 영어로 잘 표현했습니다. 그는 제퍼슨流(류)의 민주주의자임을 自任(자임)했습니다. 이 분야에 관한 그의 레토릭은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맥아더가 알고 싶었던 것은 한국군의 戰意
          
6월27일, 맥아더사령부의 전방지휘소(Advance Commander and Liaison Group in Korea ADCOM)가 맥아더 원수의 긴급지시로 水原(수원)에 설치되었다. 맥아더 원수는 처치 준장을 책임자로 급파하면서 한국전선의 급변하는 전황을 수시로 보고할 것과 한국군 수뇌와 긴밀히 협조,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현지 실정에 맞도록 건의할 것 등을 지시했다. ADCOM은 美 제24사단이 한국에 상륙하기 전까지 수원·대전 등지를 전전하며 東京의 맥아더사령부와 핫라인을 유지했다.

27일(미국 시간),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30분 미 의회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의 西館(서관)에 모여 “대통령의 고유권한에 의해 전쟁을 지도하라”고 건의했다. 상·하원 합동회의도 이날 찬성 315표 對 반대 4표로 징병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7일 오후 3시(미국 시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북한군의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가맹국은 한국이 필요로 하는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중요한 결의를 채택했다.

193만 8330명. 이 숫자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이 숫자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했던 UN참전 16개국이 우리를 돕기 위해 파견했던 병력의 總計(총계)이다. 美 극동공군은 6월28일부터 항공작전을 개시, 순식간에 북한 공군을 압도하여 한국 상공의 制空權(제공권)을 획득했다. 또 美 극동해군은 동해안에 출격, 함포사격에 의해 침공로 차단을 단행, 북한군의 진격을 遲滯(지체)시켰다. 당시 동해안의 도로로는 강릉에서 부산까지 7번 국도 하나가 길게 뻗어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7월3일에는 美·英의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가 平壤(평양)을 공격하고, 다음날인 4일부터는 한반도 전역에 걸쳐 해상봉쇄를 단행했다.   

이렇게 미국의 해·공군 투입은 신속했다. 그러나 지상군의 투입에는 주저하고 있었다. 1949년에 핵을 보유해 미국을 별로 겁내지 않던 소련이 개입할 우려도 있었지만, 붕괴하고 있는 한국군의 戰意(전의)가 제1의 문제였다. 부족한 전력이야 증강하면 되지만, 전의가 없으면 구원도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한강변에 선 맥아더에게 한 국군 하사관: “무기와 탄약을 지원해 주십시오”  

6월29일 악천후 속에서 맥아더는 전용기 ‘바탄’을 타고 水原 비행장으로 날아왔다. 바로 한국군의 戰意(전의)를 파악하기 위한 전선 시찰이었다. 수원시 長芝洞(장지동)의 수원비행장은 日帝 강점기에 건설된 것으로 당시의 활주로는 1560m에 불과했다.

수원비행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영접을 받은 맥아더는 곧 수원농업시험장에 설치된 ADCOM으로 옮겨 처치 준장으로부터 전쟁 상황에 관한 브리핑을 청취했다. 이어 始興(시흥)전투사령부로 이동했다. 사령관 金弘壹(김홍일) 소장은 전선에 나가 있었고, 참모장 金鍾甲(김종갑) 대령이 맥아더의 한강 방어선 시찰을 안내했다.

마침 북한군은 한강 남안에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사정거리 6km에 불과한 국군의 舊式(구식) 105mm 야포보다 사정거리가 2배 이상인 122mm 곡사포의 위용을 자랑하듯 했다. 수행하던 美 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 등은 위험한 전선 시찰을 만류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한강전선을 보고 싶다면서 계속 차를 ‘가’고지로 몰게 했다. 맥아더 원수는 쌍안경으로 한강전선을 한동안 살펴보았다. 현재는 당시와 지형이 많이 변화되었지만,‘가’고지는 노량진의 사육신역사공원에서 흑석동 중앙대 후문 부근 어딘가의 고지로 보인다. 그때 맥아더의 나이 칠순이었다. 갑자기 散兵線(산병선)으로 다가가 손자 뻘 나이의 국군 일등중사(지금의 하사) 앞에 섰다.

“하사관, 자네는 언제까지 그 참호 속에 있을 셈인가?”

김종갑 대령이 통역을 했다. 연희전문학교(現 연세대학교) 재학 중 學兵(학병)으로 입대, 일본군 소위로 지낸 28세의 그는 영어회화를 잘했다. 일등중사는 부동자세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다음은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옛,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대한민국 군인입니다”
다음 순간 일등중사의 입에서 무슨 말이 이어질지 모두들 숨을 죽였다.
“군인이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중대장으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장하다. 자네  같은 군인을 만날 줄은 몰랐다. 딴 병사들도 같은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각하!”
“지금 소원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맨주먹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무기와 탄약을 도와주십시오. 그것뿐입니다” “알았네. 내가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군”
맥아더 원수는 일등중사의 흙 묻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김종갑 대령에게 말했다.
“이 씩씩한 용사에게 전해 주시오. 내가 東京에 돌아가는 즉시 미군의 지원군을 보내겠다고 말이오. 그리고 그동안 용기를 갖고 싸워 주기 바란다고”>
  
하사관의 답변은 맥아더가 알고 싶었던 핵심을 찔렀다. 김종갑 대령이 그 하사관의 말을 정확히 통역했는지, 다소 윤색했는지는 알 수 없다. 金 대령은 그 후 累進하여 육군중장까지 승진하고, 국방차관을 역임했다.


“스탈린은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맥아더 원수는 6월30일 새벽 3시(워싱톤 시간 29일 새벽 3시) 미 국방부는 한강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원수의 電文(전문)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만 아니라 육군의 투입이 있어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 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트루먼은 벌써 일어나 면도를 마친 상태였다.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보고했다. 트루먼은 주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공산주의자의 침략을 저지하여 자유국가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아시아에서 큰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는 걱정 사이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이날 일기에서 트루먼은 “毛澤東은 무슨 짓을 할까? 소련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 기념물의 銘文(명문)대로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에 파병된다. 3년간 이 전장에서 미군은 5만 명이 죽고 10만 명 이상이 다쳤다.

당시 美 군부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놓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그해 1월 내셔널 프레스 클럽 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확인했다. 이는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미국의 책략이었다. 이에 대한 내막은 後述(후술)할 것이다.

그렇다면 트루먼은 왜 지상군 파병을 결단했을까. 언론인 趙甲濟 대표는“한국인 5000만이 오늘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이 사람의 위대한 인간성 덕분이다”말했다. 다음은 趙甲濟 기자의 저서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에 기술된 트루먼의 인간성 형성 배경이다.

<그는 미주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철도회사 檢數員(검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직접 작은 상점을 꾸려가다가 大공황 때 부도를 낸 적도 있는 서민이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20세기 미국의 유일한 대통령이기도 했다. 그는 陸士(육사)에 들아가고 싶어 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나쁜 視力(시력)을 무릅쓰고 프랑스 전선에 가서 포병장교가 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한국전의 급박한 상황을 보고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6월30일 美 지상군의 투입을 발표했다. 다음은 이어지는 《트루먼과 스탈린의 한반도 게임 秘史》의 인용이다.
 
<그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골사람이었다. 순박하고 솔직하고 용감하며, 힘센 사람이 으스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反骨(반골)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에게 스탈린이 김일성을 앞세워 뺨을 때린 격이었다. 슬며시 돌아드는 게릴라전이 아닌 공개적인 전면 남침은 최강국 미국의 체면과 함께 트루먼의 성깔을 자극했다.>

<조갑제닷컴> 컨텐츠의 외부 게재시 제목과 내용을 수정하지 마십시오.

[ 2013-07-22, 17:42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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