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9)/ 北의 전쟁 협박에 ‘특사’ 운운한 南 위정자들
호주 공군의 誤認(오인)사격으로 불바다가 된 평택역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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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한강 도하

이 무렵, 국군은 美 지상군 투입의 통보를 받고 후퇴해 오는 부대 모두를 한강 남안에 집결시키고 있었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즉각 한강을 도하, 추격해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6월29일 북한군 제6사단의 일부는 한강 남쪽의 김포반도로 건너와 김포비행장에 공격을 가했다. 이와 함께 서울 정면에서도 한강 南岸(남안)에 대해 포격을 개시했다.

제1차 작전에 이해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6월30일부터 제2차 작전을 개시했다. 적의 계획은 “영등포→수원→평택 방향으로 主타격방향을 지향하고, 동시에 몇 개의 방향으로 타격을 가하는 것에 의해 美 지상군이 증원해 오기 전에 한강을 强行(강행) 도하, 한강 남안의 국군 방어선을 돌파해서 국군의 방어집단을 掃討(소토)하고, 우선 평택-안성-충주-제천-영월 등으로 이어지는 37도선 이북 지역을 해방한다”는 것이었다.

한강도하작전을 시작한 북한군은 노량진 방면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한강철교가 건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6월28일 새벽 육군본부가 서울을 철수하면서 한강대교(인도교)와 한강철교(철도교)의 폭파계획이 실행됐었다. 그러나 한강철교는 장치한 폭약의 신관이 녹슨 탓으로 上板(상판)만 조금 날아갔을 뿐 끊어지지 않았다.

북한군은 이 한강철교를 이용, 탱크부대를 도하시키려 했다. 포탄이 작열하는 가운데 국군은 공병대를 투입, 철교를 폭파하려 했다. 가까스로 교각에 폭약을 장치했으나 신관 고장으로 이번에도 폭파에 실패했다.

6월30일, 북한군은 한강 도하 작전을 개시했다. 국군은 이것을 수차에 걸쳐 격퇴하고, 필사적으로 버티었다. 한강철교를 사이에 두고 격전이 벌어졌다. 死六臣(사육신) 묘역과 月波亭(월파정) 부근에 국군 제7사단 제20연대가 포진했다. 아직도 노량진수산시장 구내에 보존되어 있는 월파정은 부산 피난정부시절에 국무총리를 역임하는 張澤相(장택상)씨의 저택이다.

7월1일부로 채병덕 참모총장이 해임되고, 미국 포트베닝(보병학교) 방문 중에 급거 귀국한 丁一權(정일권) 준장이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육·해·공 3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丁 총장은 미군과 협의, 遲滯(지체)작전에의 전환을 시도했다. 즉, 서울과 부산을 잇는 京釜本道(경부본도) 및 경부선 철도 以西를 미군이, 그 以東은 국군이 담당하기로 했다. 이 지역분담은 낙동강 방어작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7월3일 새벽, 북한군 전차부대는 우세한 화력지원을 받으며 한강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노량진역까지 북한군 탱크가 밀어 닥쳤다. 국군은 對전차무기가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混成(혼성) 수도사단과 혼성 제7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장세워 영등포로 침입했다 국군이 분산 후퇴를 시작하자, 북한군은 속속 한강을 도하했다. 


노들강변, 능수야 버들은 꺾어나지고…
 
졸자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맥아더 원수의 한강 전선 시찰을 생각하며 노랑진 일대를 답사했다. 영하 10도를 기록했던 2013년 1월8일 낮 12시, 노들역 4번 출구에서 답사에 동행할 이종덕 대표(前 동아일보 기자·國際新聞 사장 역임)와 만났다. 그는 鷺梁津(노량진)의 한강변에서 오래 살아 주변 지리에 해박하다.

노량진이라면 白鷺(백로)가 노니는 나루터라는 뜻이다. 이제는 ‘고시촌’으로 변한 노량진에서 ‘고시준비생’들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일금 3000원 짜리이지만, 깔끔한 ‘컵밥’으로 요기를 했다. 컵밥은 주머니가 얄팍한 젊은이들도 부담없이 먹는 볶음밥類(류)이다. 대학 졸업장이 취업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를 반영한 탓일 것이다. 서민 교통수단인  지하철 1호선과 9호선이 통과하는 노량진은 ‘공무원시험 메카’로 번창하고 있다. ‘스타 강사’의 모습을 담은 학원의 선전 현수막이 고층건물의 1개 층을 감쌀 만한 크기로 나붙어 있다.  6·25 때(1950년 7월3일)는 “노량진에 적 탱크 출현!”으로 한강방어선이 무너졌다.

노량진은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교통의 요지였다. 강 건너 都城(도성)을 지키기 위해 水軍(수군)의 병영인 津(진)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수양버들이 울창해 노들나루라고 불렸다. 그때는 각종 물산과 사람이 모이는 동네였지만, 한강철교가 만들어지면서 그 역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배수지공원이 조성되었다.

우리는 눈 덮힌 死六臣(사육신)역사공원의 ‘전망 좋은 곳’으로 올라갔다. 이곳에 오르면 서쪽으로 한강철교, 동쪽으로는 한강대교를 굽어볼 수 있다. 

강 건너편이 용산구 二村洞(이촌동)이다. 196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이촌동 강변 모래밭은 매우 넓었다. 매년 10월1일 국군의 날에는 이촌동 모래밭에 출입을 금지시키고 공군기가 모의 폭탄 투하 시범을 보였다. 시범이 끝나면 黑石洞(흑석동) 일대 꼬마들까지 탄피를 먼저 주으려고 흑석동 고개를 넘어 한강대교로 줄달음질쳤다고 한다. 

1964년 봄, 필자는 한강대교를 건너 이제는 고인이 된 대학친구의 노량진 집에 놀러갔었다. 그때만 해도 노량진 강변과 한강대교 밑 노들섬에는 늘어진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이곳에는 7~8인승 놀잇배도 노들섬을 오가고 있었다. 놀잇배 안에는 치마 저고리를 차려 입은 ‘논다니 아까씨들’이 장구 등으로 제법 흥을 돋우고 있었다.
 
李 사장과 필자는 9호선 노랑진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東進(동진)해 노들역을 거쳐 黑石驛(흑석역)에 내렸다. 흑석동은 흑석동주민센터 일대에서 나오는 돌빛이 검은 색이라 하여 붙은 동네 이름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으면 못 산다“하던 질퍽한 동네였다.

흑석역 인근 88도로변 고지 위로 눈 덮힌 계단 100여 개를 밟고 올라갔다. 고지 위에 있는 孝思亭(효사정)은, 조선 世宗(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분(盧閑)이 모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후 바로 옆 언덕에 효사정을 지어 놓고 자주 올라다니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곳이라고 한다. 

효사정은 예로부터 한강변의 명승지로서 申叔舟(신숙주)·鄭麟趾(정인지)·徐居正(서거정) 등 제1류 문인들이 찾아와 그 경관을 상찬하는 시를 남긴 곳이다. 개발연대를 거친 지금 한강변의 능수버들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李 사장은 그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마침 강바람이 센 겨울철이라 효사정 주위엔 우리 둘 이외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50여 년 전에 함께 배운 가락을 목놓아 불렀다.


능수야 버들으은 꺾어나지고 으으음
그 누굴 붙들고 으으음 하소연하리오


 
전쟁을 하자고 협박하는 타이밍에 특사 운운

6·25 때만 해도 서울의 한강에 걸린 다리는 한강철교와 한강대교, 두 개뿐이었다. 광장동과 천호동 사이의 한강에 廣津橋(광진교)가 걸려 있었지만, 그때 그곳은 경기도였다. 제2한강교(지금의 楊花대교)는 필자가 군에 입대했던 1968년 봄까지 완공되지 않았다.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는 1970년대 중반에 완공되어 당시 인기 절정의 가수 혜은이가 “강물은 흘러갑니다/제3한강교 밑을/당신과 나의 꿈을 싣고서/흘러만 갑니다”라고 노래하던 다리다. 6·25 때 한강다리는 2개뿐이었지만, 지금 강북과 강남을 잇는 다리는 무려 30개에 달한다

이제 전쟁이 나면 어찌할 것인가? 다리도 많고 길도 좋다. 제2차대전 때 독일 기갑부대는 프랑스의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탈취해 사용함으로써 기동력을 발휘했다. 지금 수도권, 나아가 전국의 주유소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고, 가정의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듬뿍 들어 있다. 서울을 노리는 북한의 전략가들은 당연히 이런 기막힌 好(호)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려 할 것이다. 지금 북한정권은 전쟁을 하자고 협박을 하고 있는 타이밍에, 한국에서 내로라는 일부 정객들은 “북한에 특사를 보내라”는 ‘잠꼬대’까지 했다. 적을 유혹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내부에 있지 아니한가?  

7월3일 동틀 무렵, 노량진에 적 탱크가 출현하자 수도사단과 제7사단은 安養(안양)으로 철수했다. 水原 육본 상황실에는 더욱 충격적인 보고가 날아들었다. 

“가평-양수리로 남하 중인 敵 제2사단이 金良場(금량장) 부근으로 접근 중!”
 
금량장은 수원 동쪽 19km에 위치한 龍仁(용인)의 한 마을이다. 그렇다면 水原 농업시험장에 위치한 임시 육본은 정면과 측면, 양쪽의 공격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보고 접수 후 즉시 제1사단을 수원 동북쪽 豊德川(풍덕천)으로 이동시켰다. 그때 제1사단은 사단이라고 하지만, 대포도 없고 병력도 반감된 상황이었다.
이어 육본 작전명령 제18호가 긴급 하달되었다.

―북괴군 3일 새벽 한강을 완전히 넘어섰다.
―미 지상군이 작전을 시작할 때까지 지연전을 편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서서히 철수, 烏山(오산)에 집결하라.    
―제1사단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철수를 마칠 때까지 풍덕천을 지킨 뒤 철수하라.

이 즈음(7월1일), 부산 水營(수영)비행장에 도착한 駐日 美 지상군 선발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발 부대는 열차편으로 大田(대전)에 집결 중이었다.


병력 540명 규모의 스미스支隊를 먼저 투입 

美 지상군 투입의 결정에 따라 한국에 파견되는 미국의 선진부대는 한국에 제일 가까운  일본 큐슈(九州)에 주둔하고 있던 제24사단이었다. 사단장은 당시 美 장성으로서는 이례적인 ROTC 출신의 딘 소장이었다. 그러나 일본 점령 업무를 맡고 있던 제24사단은 전혀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었다. 

맥아더는 한강 전전의 시찰 때부터 제24사단을 급파하여 지연작전을 수행케 하고, 오사카 등 간사이(關西)지방에 주둔하던 제25사단을 仁川에 상륙시켜 남북에서 적을 협격·섬멸한다는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딘 사단장은 한국에서 東西(동서)의 폭이 가장 좁은 북위 37도 선상의 평야지대인 平澤(평택)-安城(안성)의 선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제21연대 제1대대(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를 基幹(기간)으로 하는 스미스支隊(지대)를 한국으로 급파하기로 했다. 스미스지대는 B·C 중대, 무반동포소대(75mm 무반동총x2), 박격포소대(4.2인치 박격포x2) 등 제1대대의 보병 406명에다 제52포병대대(105mm 곡사포x5문 등)의 병력 134명이 배속되어 합계 540명으로 이루어졌다. 

6월30일 스미스지대는 주둔지 구마모토(熊本)를 출발, 후쿠오카 교외의 이다츠케(板付) 비행장으로 이동, 7월1일 공중수송으로 부산의 수영공항에 도착,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7월2일 오전 8시 대전역에 도착했다. 스미스 지대에 배속된 제52포병대대(페리 중령)는 후쿠오카의 하카다 기지에서 부대편성을 실시한 후 LST(전차수송선) 편으로 부산에 상륙, 7월3일 오후에 열차편으로 大田(대전)에 도착했다. 이때까지 스미스지대는 정확한 임무를 부여받지 못했다. 피로에 지친 그들은 무거운 더불백을 매고 일단 대전비행장의 숙영지로 이동했다.

스미스 중령은 대전에서 맥아더사령부의 전방지휘소가 설치된 충남도청에 가서 제24사단 副(부)사단장을 겸임한 처치 준장을 처음 만났다. 처치 준장은 며칠 전(6월27일) 한국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동승한 駐韓(주한) 美 대사관의 노블 참사관에게 “한국군 전체가 뉴욕 경찰관 100 명보다 못하다”고 떠벌렸던 장본인이었다. 그는 그때까지 한국에 와 본 적도 없던 인물이었다. 

처치 장군은 스미스지대가 오면  계속 밀리기만 했던 戰勢(전세)를 대번에 뒤집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지도를 펴놓고 수원-오산 방향을 가리키며 처치 장군은 스미스 중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군은 이 윗 지역에서 거의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탱크를 보자마자 도망치는 군대가 아닌 용감한 군대가 거기에 있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귀관이 한국군에게 사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기대한다.”


스미스지대의 방어준비

스미스는 지프 몇 대를 빌려 참모장교들과 함께 대전에서 수원 방향으로 올라갔다. 이 길이 북한군이 쳐내려 올 1번 국도였다. 북한군의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다. 탱크부대와 보병들은 하루에 6~13km를 진군하고 나서 후방으로부터 다시 탄약과 연료를 공급받기 위해 전진을 중단해야 했다. 

스미스 중령이 찾고 있었던 것은 매복할 장소였다. 그는 水原(수원)비행장 남쪽 10km, 烏山(오산)북쪽 5km 지점을 찾아냈다. 불규칙적인 능선이 도로와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기 때문에 보병에게는 유리한 위치였고 수원 쪽 10km 지점까지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로를 둘다 관측 가능한 지점이었다. 

한편 스미스 지대 병사들은 서서히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오면서 스미스 중령이 적을 맞아 싸울 장소를 정해 주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기차 안에서 철둑길을 따라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는 피난민과 후퇴하는 한국군 병사들의 행렬을 보았다. 여기저기에서 지난 1주일 간의 전쟁이 불러온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북쪽으로 향하던 9량의 탄약 수송 열차가 수원 남쪽 64km인 平澤(평택)에서 쉬고 있었다. 기관사는 북한군이 어디쯤 내려왔는지를 수소문했다. 마침 그때 유엔군으로 참전했던 호주 비행기 4대가 탄약수송 열차를 발견했다 호주의 파일럿들은 이 수송 열차를 적으로 오인하고 열차를 향해 대여섯 차례에 걸쳐 로켓포와 기관총을 갈겨댔다. 갑작스런 공습으로 평택역 일대는 불바다가 되었다.  

스미스 지대를 태운 열차가 긴급히 복구한 철로를 통해 평택역을 지날 때 미군 병사들은 딩구는 시체를 바라보며 그들이 이제 숨막히는 전쟁터의 煉獄(연옥) 속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다른 지역에서도 오폭사고가 벌어졌다. 수원 동북방 풍덕천에서 방어 중이던 국군 제1사단이 미군기의 오폭 때문에 여러 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제12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화가 난 병사들이 미군 비행기를 쏘아 격추시켰다.
 
오산 남쪽부 振威川邊(진위천변)의 西井里(서정리)에 배치된 국군 17연대도 강둑을 따라 참호를 파고 있다가 호주 공군기 4대의 오폭으로 200여 명의 장병이 죽거나 다치고 트럭 30대가 불탔으며, 연대장 白仁燁(백인엽) 대령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후송되었다. 부연대장 金熙濬(김희준) 중령이 연대장대리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때 국군 제17연대는 한국 지리에 어두운 스미스 지대의 뒤를 받치기 위해 육군본부의 특명으로 진위천변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7월3일 하루 동안만 해도 미국·호주 비행기에 의해 국군 군수창고, 수원비행장 활주로, 열차, 수송부대, 수원의 한국군사령부 등이 폭격을 당했다. 화가 난 처치 장군이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렛마이어 장군에게 “미쳐 날뛰는 조종사들을 진정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트기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출격했다. 제트 엔진의 소리가 ‘쌕쌕’ 한다고 해서 ‘쌕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좀 뒷날의 우스개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李 대통령의 부인인 프렌체스카 여사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오해하고 ‘호주댁’이라고 부르면서 “李 대통령의 처갓집에서 비행기를 보내 사위 나라를 돕는다”고들 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 전 국적은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아니라 유럽의 오스트리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27일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사를 집무실로 사용하다가 7월1일 다시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대구를 거쳐 가는 경부본도가 상식적인 코스였지만, 도중의 秋風嶺(추풍령)이 경호팀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호남으로 향하는 1번국도를 피난길로 선택했지만, 폭우 때문에 길이 매우 미끄러웠다. 대통령 일행은 裡里(이리)에서 기차(호남선)를 타고 목포까지 내려가서 거서서 500톤 짜리 소해정인 514함에 승선, 19시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했다.

[ 2013-07-24, 15:14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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