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필기를 통째로 암기하다!
조인정의 미국 유학奮鬪記(17)/ 고등학교에서 맛본 시련과 환희

曺認桯(조인정)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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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 합격한 거야?”

인터뷰 중 피츠버그 스틸러스(Pittsburgh Steelers)의 패배를 언급하며 빚어낸 나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펜실베니아주 에리(Erie)의 머시허스트 고등학교(Mercyhurst Preparatory School)로부터 나는 합격 소식을 통보받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고, 합격의 기쁨을 만끽하며 그간 고통 받았던 초조함에서 벗어나 그 날 밤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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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로운 학교가 위치한 에리(Erie)라는 곳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북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에리라는 이름은 北美 五大湖(오대호)의 다섯 개의 호수 중 네 번째로 큰 에리호(Lake Erie)와 남쪽 기슭에 살고 있던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명칭을 따서 만들어진 곳이다. 에리의 인구는 약 10만 2000명으로, 펜실베니아 주에서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피츠버그(Pittsburgh), 알렌타운(Allentown)에 이어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 비행기 착륙 존 창문에서 보이는 광활한 에리호의 모습은 마치 엄청나게 큰 도화지에 파란물감을 잔뜩 칠해놓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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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학교로 학교를 전학하면서 나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이제부터는 호스트 생활과는 다르게 기숙사라는 갇힌 공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2년을 살아야 했다. 내가 살았던 기숙사는 PIA(Pennsylvania International Academy)로 학교와는 스쿨버스로 약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고, 머시허스트 고등학교에 진학할 외국학생들만 수용하던 곳이었다.

방 열쇠를 받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배정된 방문을 여니, 썰렁하기 그지없는 방 한 켠에 두 개의 침대, 장롱 그리고 책상이 우두커니 들어서 있었다. 방은 2인 1실이었고, 나의 룸메이트가 된 친구는 중국에서 온 데이지(Daisy)였다. 데이지는 그 때가 그녀의 생애 첫 유학이었고, 나도 여태껏 한 번도 남과 같이 한 공간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첫 날부터 무언지 모를 불편함으로 빚어진 우리의 신경전은 시작되었다.

점점 더 추워지는 에리의 날씨 때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의 손은 자연스럽게 히터로 향했다. 하지만 데이지는 내가 히터를 켤 때마다 화를 냈다. 그 친구는 눈이 펄펄 내리고 추운 겨울 바람이 창문을 부술 듯이 흔들어대는 그런 밤에도 아주 두꺼운 목욕가운(bathrobe)을 입고 에어컨을 켰다. 물론 데이지를 설득하기 위해 추운 것을 잘 견디지 못하는 내 특성에 대해 이야기 해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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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솜이 내장되어 있는 바지를 입고 또 그 안에 내복을 입었고, 윗도리로는 반팔 티셔츠, 긴 팔 티셔츠, 그리고 점퍼까지 세 네 겹으로 입었다. 그런 갈등이 지속되자, 우리 사이는 서로를 이해 못할 정도로 더욱 악화되었다. 내가 히터를 튼 순간, 데이지는 달려와서 히터를 끄고 다시 에어컨을 켜기도 했다. 방은 냉장고보다 더 추웠고 나는 ‘냉동인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들고 카페테리아나 라운지에서 숙제를 했다. 물론 봄이 찾아오면서 그 동안의 히터 때문에 빚어진 갈등은 말끔히 해결되었고,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도 밝은 햇빛이 찾아들었다.

기숙사에는 사실 내 룸메이트를 비롯하여 약 90명의 외국학생들이 중국인이었다. 중국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고, 인구밀도 또한 엄청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에리라는 곳에 유학을 온 중국인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었지만 이처럼 유학을 온 중국인들은 부모님이 부자이기에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중국에서 시험 성적이 너무 낮아서 어느 학교 하나 들어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에 돈을 주고 미국 학교로 입학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내 룸메이트도 이버지가 중국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고, 엄마도 자신의 회사를 가지고 있는 사업가였다.

중국인들과 가까이서 지내게 되면서 한 가지 너무 부러웠지만 안타까웠던 점은 그들의 돈쓰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학교를 마친 주중이든 주말이든 상관없이 몰(mall)을 다니면서 쇼핑을 했는데, 한 번 쇼핑을 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내가 살 생각도 못하는 비싼 名品(명품)의 옷과 악세서리 등을 몇 봉투씩 사왔다.

하루는 중국인 친구 한 명이 그 당시 새로 출시된 아이패드를 구입하자, 그 친구에게 뒤쳐지지 않고자 다른 중국 학생들이 월마트로 달려가 아이패드를 곧장 구입한 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기숙사에서 제공되는 식사가 마땅치 않은지 저녁이 되면 꼭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중국 음식점에서 음식을 시켜먹곤 했다.

실제로 매일 저녁 중국음식을 주문해먹던 한 친구는 한 달에 거의 60만원을 음식비로 사용했다. 그런데 더욱 기가 찼던 건, 배달원이 왔을 때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대부분 카드를 사용해 지폐를 잘 사용하지 않던 중국 친구들은, 잔돈을 지갑에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중국 학생들이 약 15달러 정도의 음식 비용을 100달러짜리 지폐로 지불했고, 배달원은 당황한 눈치로 매번 “미안해, 잔돈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다니게 된 머시허스트 고등학교(Mercyhurst Preparatory School)는 1926년도에 설립된 가톨릭 사립학교였는데, 바로 옆에는 머시허스트 대학교(Mercyhurst University)를 두고 있었다. 私服(사복)을 입고 등교하던 공립학교와는 다르게 나는 정해진 학교 교복을 입고 등교해야만 했다. 하얀 폴로 티셔츠와 회색의 정장 바지 또는 치마가 교복이라 사실 한국의 교복보다는 훨씬 편했다.

이 학교에서는 졸업을 위한 크레딧(credit)을 채우기 위해 필수과목과 선택과목을 조합·선택해서 수강해야만 했다. 나는 총 6개의 필수과목과 2개의 선택과목, 이렇게 총 8개의 과목을 선택했다. 가톨릭 학교 특성상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했던 신학(Theology)을 제외하고, 난 정규과목보다 더 많은 과제가 부여되는 우등반(honors)과목들을 선택했다. 그리고 2년 동안 나는 4과목 부분에서 IB과목을 선택했다.

여기서 잠시 미국의 교과과정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미국 고등학교에서는 크게 세 가지로 과목을 분류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정규과목’이라고 불리는 CP(College Prep)가 있고, CP보다 더 많은 과제와 업무량을 요구하는 Honors(우등반)이 있으며, 우등반 보다 더 많은 노력을 요하며 대학에서 학점이 인정되는 과목인 AP 그리고 IB 프로그램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미국 학교는 ‘advanced Placement’를 의미하는 AP프로그램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데, AP는 미국에서 대학입학시험을 주관하는 기관인 College Board에서 만들어진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은 34개의 다양한 과목의 테스트를 연간 응시할 수 있다. 머시허스트 고등학교는 특이하게 유럽에서 인지도가 높은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프로그램을 지도했다.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6개의 과목에 대한 논문을 비롯해 엄청난 양의 과제를 약 1~3년간 수행하고, 후에 해당하는 모든 과목의 시험을 치게 되는 IBDP(디플로마 프로그램: The IB Diploma)가 있고, 이와 상관없이 학생의 기호에 따라 IB 코스에서 제공하는 과목들 중 원하는 수와 과목을 선정해서 시험을 보는 Certificates(수료반)가 있다. IB 프로그램은 또한 개념의 깊이와 정도에 따라 기본적인 Standard와 더욱 심화된 Higher 레벨로 분류된다. 이때 중요한 건 AP와 IB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거둘 경우, 대학 지원 시 우대를 받을 뿐 아니라 어느 점수 이상을 획득할 시에는 대학에서 학점 인정도 받기 때문에, 대학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생활 중 엄청난 양의 과제와 시험 때문에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나를 쓰러질 듯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던 과목이 두 개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주니어(junior: 고등학교 4년 중 3학년에 해당) 당시 수강했던 Chemistry IB(화학 IB)클래스였다. 화학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서 가장 무섭기로 유명한 女 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째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학생들을 바라보았고, 그 두 눈은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 이글이글했다. 숙제를 다 해오지 못한 학생은 거의 살아남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그 선생님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해온 숙제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만약 어느 학생이 이에 대답하지 못면 그 학생은 수업 후 따로 선생님과 일대일 면담을 해야 했다. 이렇다 보니 다른 과목을 들을 때는 생기발랄했던 학생들도 그 수업시간만큼은 입을 꾹 닫고 선생님께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 정자세로 수업에 집중해야만 했다. 교실 안은 언제나 찬 물을 끼얹은 듯 冷氣(냉기)만이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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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수업 방식 또한 내가 따라가기에 너무 벅찼는데, 선생님은 대학 강의처럼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했을 뿐, 도움이 될 만한 프린트물을 나눠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화학 수업을 영어로 듣는데다가 선생님의 눈초리에 완전히 기가 꺾여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당연히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고, 내용에 대한 노트 필기를 하는 건 더욱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화학을 듣고 있던 친한 친구에게 수업이 끝난 후 노트를 빌려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색색의 볼펜으로 깔끔하게 필기를 했던 내 노트를 항상 시험보기 전에 친구들이 서로 빌려간다고 다투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노트를 빌려야 하는 처지가 되니 서러웠다.

하루는 방과 후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질문하러 선생님께 찾아갔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게 “왜 이게 이해가 안돼? 이거 기본적인 부분인데. 한국에서 안 배웠어?”라며 내 마음에 强打(강타)를 내리쳤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화학은 내 손으로 끝낸다’는 다짐을 굳게 했다. 이날 이후로는 선생님께 따로 찾아가기가 무서워서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항상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한 단원이 끝나면 꼭 치러야만 하는 단원 시험 또한 피할 수 없었다. 교과서, 노트 필기, 선생님의 강의, 이 모든 전반적인 내용들이 혼합되어 나오는 단원 시험은 그 존재만으로도 큰 스트레스였다. 나는 교과서 한 단원의 장수를 세어보았다. 앞뒤로 10장 남짓 되었다. 나는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스캐너를 이용해 한 단원을 스캔받아서 펜으로 밑줄을 긋고 또 그어가며 이해가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그런데, 한 단원 시험을 볼 때는 어느 정도 괜찮았지만, 두 단원을 묶어 볼 때는 스캔 받아 두툼한 한 뭉텅이의 내용을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끈기와 인내를 요했다.

나는 이해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은 순간부터 노트에 있는 모든 내용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서술형과 논술형 문제도 단원 시험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따로 준비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무식하게 외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노트에 있는 글자 하나하나를 쉼표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려고 노력했다. 솔직히 이만큼 노력을 했기에 서술형 문제를 받아보았을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2주에 한 번씩 특정 주제의 실험이 끝나면 실험보고서(lab report)를 작성해야만 했다. 나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실험보고서를 쓸 때, 온갖 인터넷 자료와 교과서 정보를 찾아서 완벽한 답을 끌어내려 노력했다. 부족한 답이 단 한 개라도 있을 경우 깐깐한 화학 선생님에 의해 감점받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실험보고서 작성을 마치면 항상 내 친구 중에서 화학 전공을 원하는, 또 가장 잘하는 브래난(Brennan McAndrew)에게 이메일을 보내 그 실험보고서의 답과 文法(문법)을 확인받았다. 브래난은 보고서 제출 하루 전, 내가 도움을 구했던 것을 기억하고, 밤새 조사를 해도 답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는 날 위해 아침부터 부리나케 달려와 보고서 쓰기를 도와주었다. 브래난은 프랑스로 교환학생을 가 있는 당시에도 내 이메일을 보고 보고서를 수정·보완해주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그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그는 내게 가장 훌륭한 화학 선생님이었고,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화학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학교 생활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2년을 목표로 한 에리(Erie)에서의 새 출발로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환경을 접하며 심적으로는 매우 힘들었다. 하지만 꿈을 향한 나의 노력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고, 인생의 새 장을 열 수 있었다.             
   
 

[ 2013-07-26, 10:1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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