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10)/ “우물쭈물하다가는 전멸 당한다!”
스미스 중령의 판단 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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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제24사단장의 방어구상

美 제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이 북한공산군의 6·25 남침 소식을 들은 것은 일본 규슈 북단 고쿠라(小倉)에 주둔하던 사단사령부에서였다. 제24사단 등 美 4개 사단은 미 8군의 예하부대로서 일본 점령업무에 임하고 있었다. 지상군 파견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駐日(주일) 미군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맥아더 원수의 명에 의해 딘 소장은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支隊(지대)를 한국에 급파했다.  

수송기 편으로 7월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한 스미스 지대가 기차로 북상하고 있을 때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대전의 충남도청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병력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1번째의 생일을 앞둔 딘 소장은 체중이 90kg이 넘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주둔군 사단장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1947~48년 駐韓(주한) 미 군정사령관으로 근무했던 군인이었다.

마침 충남도청에 집결한 스미스 지대를 목격한 정일권 총장은 “적의 전력을 너무 얕잡아 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피력하기도 했다. 미군 차량에는 ‘하나코(花子)’니 ‘사치코(幸子)’니 하는 일본 애인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스미스 지대를 후속하여 미 제24사단 예하 제34연대는 7월1일 수송선 편으로 사세보(佐世保)항을 출항하여 7월2일 부산항에 상륙했다. 미군들은 북한군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제1대대장 에이리스 중령은 중대장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인민군이라는 것이 쳐들어온 것 같다. 훈련도 부족하고 무기를 가진 자도 반수 밖에 되지 않으니 힘 안 들이고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작전은 치안을 위한 행동에 불과하며, 머지않아 귀환할 것이다.”
 
7월4일, 제24사단 제34연대 병력 1981명이 대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딘 사단장에게 도착 신고를 했다. 딘 장군은 이들에게 스미스 지대를 뒷받치기 위해 북위 37도선의 평택-안성에서 국도를 봉쇄하라고 명했다. 그는 평택-안성의 지형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다. 평택 서쪽에는 아산만이 길게 육지 쪽으로 파고 들어와 있고, 안성 동쪽은 車嶺山脈(차령산맥)이 펼쳐져 있어 적의 측면 돌파가 어렵다.

또 안성천이 평택-안성 線의 북방을 막으면서 흐르기 때문에 방어에 용이한 지형이었다. 만약 적군이 전략적  요충인 평택·안성의 두 읍(지금은 모두 市)을 2~3일간만 돌파하지 못한다면 딘 장군은 그 이남 지역의 요소요소에 미군을 배치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딘 장군은 그의 작전을 제34연대장 제이 러브리스(Jay Lovless) 대령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적군이 이 장벽을 돌파하게 된다면 우리의 지연작전은 대단히 곤경에 처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군 병사들의 사기는 어떠했을까? 조셉 굴든의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는 이야기》에 따르면 AP 통신의 킹 특파원은 美 제24사단 선발대가 한국에 도착한 후 인터뷰를 하고 나서 깜짝 놀랐다. 오히려 당연한 얘기지만, 젊은 미군 병사들은 전쟁 같은 것은 까맣게 잊고 패전국 일본에서 점령국 병사로서의 안락함에 더 관심을 보였던 것이다. 어느 젊은 병사는 킹 특파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일본 사세보에 있는 귀여운 ‘사다에’에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여태까지 본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그녀와 2년간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나는 최근 15년 동안 오클라호마의 아인트에서 지루하게 살아왔는데, 이젠 그런 상태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내 식사를 만들고, 세탁도 하고, 내 양말을 깁고, 내가 맥아더 원수처럼 명령을 내려도 그녀는 단 한 마디 말대꾸도 없이 복종을 합니다. 그녀는, 당신도 알겠지만, 남자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그 대가는 한 달에 겨우 37달러죠. 나는 여태까지 이런 것을 몰랐습니다.>


북한군 전차, 스미스 지대 陣地 돌파

스미스 지대는 7월5일 오전 3시에 비를 맞으며 오산 북쪽 고지인 竹美嶺(죽미령)에 도착, 이곳을 진지로 설정했다. 스미스 중령은 능선 부근의 1번국도 동쪽의 117고지에 B중대 주력을, 다시 그 동쪽 92고지에 C중대를, 1번국도 서쪽 95고지에 B중대의 1개 소대를 배치했다. 또 무반동총 1門씩을 B·C중대에 배치하고, 다시 4.2인치 박격포를 117고지 남쪽에 배치, 1번국도에 중점을 둔 사격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대전차지뢰도 없었고, 대전차장애물을 설치할 여유도 없었다.

또 제52포병대대의 페리 중령은 105mm야포 5문을 보병 진지 후방 1.8km 능선에, 또 야포 1문을 보병진지와의 중간 부분의 국도변에 對(대)전차 전담 화기로서 배치했다. 그러나 고폭탄은 1200발에 보유했지만, 대전차고폭탄의 보유량은 6발에 불과했다.

날이 밝아왔다.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7월5일 아침이었지만, 시계는 양호하여 스미스 중령은 10km 前方(전방)의 수원까지 볼 수 있었다. 비구름이 낮게 갈린 만큼 공군의 지원은 바랄 수 없었다. 지금 1번국도는 6차선 포장도로로 차량들이 무서운 속도로 휙휙 달리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폭 10m의 2차선 비포장도로였다.

오전 7시, 1번국도상을 8대의 전차를 선두로 북한군의 大종대가 남하해 오는 것이 視界(시계)에 들어왔다. 긴장 속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 장병들. 드디어 죽미령의 진전 2km까지 육박해 왔을 때 미군 포병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오전 8시16분, 6·25전쟁에 있어 미 지상군의 初彈(초탄) 발사였다.

장병들은 북한군 전차가 爆煙(폭연)에 휩싸일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적 전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왔다. 속도를 늦추는 일도 없었다. 거리 600m로 육박해 왔을 때 스미스 중령은 무반동총으로 사격을 명했다. 2발 명중. 그러나 적 전차는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미군 보병은, 뒤이어 2.36인치 로켓포의 사격을 개시해 코나 중위도 스스로 10여 m의 거리에서 전차의 배후에 명중탄을 먹였지만, 이렇다 할 효과가 없었다. 그뿐인가. 전차는 직사포와 기관총을 발사하면서 비탈길을 올라왔다.

북한군 전차가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대전차 전담의 포병이 대전차고폭탄을 먹였다. 1대가 불타오르고, 또 1대는 캐터필러(무한궤도)가 끊어져 주저앉았다. 그러나 이런 저항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후속의 전차는 주저앉은 자기 편 전차를 길 밖으로 밀어내버리고 전진하면서, 對전차 전담 야포에 포탄을 먹여 파괴하고, 도로변의 차량을 불태우면서 남진을 계속했다. 이리하여 33대의 전차가 죽미령 진지를 돌파하여 오산으로 진출했다.


孤立無援- 적전 이탈

그로부터 1시간 후, 다시 차량의 大종대가 죽미령 陣前(진전)에 나타났다. 오전 11시45분, 스미스 중령은 진전 900m에 접근해오는 상황에서 사격명령을 내려 박격포·기관총의 맹렬한 사격이 개시되었다. 不意(불의)를 찔린 북한군은 당황했지만, 드디어 1번국도 양측으로 전개해서 반격을 개시하고, 약 1000명의 보병이 1번국도를 따라 공격을 걸어왔다. 그 후방에는 잇달아 大부대가 공격 梯隊(제대)의 뒤를 받치며 진군해 왔다. 북한군 제4사단이었다. 

스미스 중령은 지금이 바로 찬스라며 후방 포병의 포격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도해도 통신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앞서 적 전차의 통과에 의해 有線(유선)이 절단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강우로 無線(무선)도 눅눅해져서 사용 불능이었다. 이제 보병의 화기만으로 사격을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적군은 후방의 부대를 兩(양) 측면으로 우회시켜서 포위태세에 들어갔다. 12시30분, 좌익 95고지가 포위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스미스 중령은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1개 소대를 B중대 주력의 위치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13시경에는 우익의 C중대도 동쪽으로부터 사격을 받게 되어 지대는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더욱이 탄약도 바닥이 드러나고 통신도 아직도 不通(불통)이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전멸 당한다!”

14시30분, 스미스 중령은 드디어 敵前(적전) 이탈을 결심, B중대 基幹(기간)과 C중대 기간을 교대로 이탈시켜 오산읍을 향하도록 명했다. 각 중대는 급히 진지를 떠나 후퇴를 시작했다. 그때 무반동총과 박격포 등 공용화기는 방기되었다. 그러나 晝間(주간) 이탈이었던 만큼 시계는 양호했다. 더욱이 이미 C중대 후방에 진출해 있던 적이 집중사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미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런 혼란 속에 스미스 중령은 포병에게 이탈 명령을 내리기 위해 포병진지로 달려갔지만, 그곳은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있었다.

“이 야포로 한번 갈겨봤으면…”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포병은 조준경·마개쇠·방향틀만 빼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후퇴를 개시했다. 스미스 중령과 페리 중령을 선두로 한 차량 행군종대는 16시에 수청말(지금의 수청동)의 야포진지를 출발했다. 이 전투에서 지대는 181명의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내고 말았다.

한편 북한군은 그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공격선두에 섰던 제105전차사단(7월5일부로 제105전차여단에서 승격함)의 문화부사단장 안동수 대좌 등 42명의 전사자와 85명의 부상자를 내었고, 전차 4대가 격파되고 2대가 반파되었다.
 

輕敵이 자초한 참패

스미스 지대는 공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시간적 여유도 가지지 못한 채 전투에 돌입했다. 졸속의 파견이었던 만큼 충분한 화기 및 탄약도 보유하지 못했다. 특히 대전차화기가 敵의 T34전차에 무력했다는 동정적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스미스 중령의 임무에 대한 판단이었다. 전투의 목적은 후속하는 제24사단 제34연대가 평택-안성 線(선)에 진출하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적 전차를 저지하는 데 있어 오산 북쪽 국도상의 낮은 능선에 진지를 구축한 것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하는 의문이 남는다. 필자는 수원에서 오산에 이른 1번국도를 2차에 걸쳐 답사했지만, 차라리 오산 시가지를 종단해 흐르는 오산천의 다리를 끊고 그 南岸에서의 하천방어가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스미스 지대는 북한군 따위는 간단하게 저지 가능하다고 자만하지 않았을까? 세계 최강의 미군에 있어 북한군은 土匪(토비), 기껏해야 馬賊(마적) 정도로 輕敵(경적)했던 듯하다. 그런 까닭에 대전차지뢰도 휴대하지 않고 피아노 철조망 같은 장애물도 설치하지 않았다. 이 북한군에 대한 과소평가가 예상치도 못했던 패퇴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스미스 지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군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애당초 T34전차에 밀리는 한국군에 대한 미군의 평가는 매우 낮았다. 맥아더사령부 先發(선발)조사대의 처치 준장은  일찍이 한국에 와 본 적도 없으면서 “한국군 전체보다 뉴욕 경찰관 100 명으로 싸우는 것이 낫다”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다. 이런 미군에게 오산전투의 참패는 輕敵必敗(경적필패)의 교훈을 안겨주었다.


八字가 세 번 변한 水原

수도권 6·25 전적지 답사는 수도권 전철을 이용하면 좋다. 오늘날 수원-오산-평택-천안은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들어와 서울의 통근권에 속하게 되었다. 전철과 1번국도는 어깨동무를 하듯 나란히 남쪽으로 뻗어 있다. 물론 6·25 전쟁 당시엔 수도권 전철뿐만 아니라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철도는 없었다. 그래도 오산전투의 현장을 답사하려면 1번 국도와 병진하여, 그것도 지상으로 달리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을 타면 좋다.

수원은 서울의 남쪽 관문이다. 수원은 세 번 八字(팔자)가 바뀐 도시이다. 첫 번째 변화는 조선왕조의 중흥주 正祖(정조)가 아버지 思悼世子(사도세자)의 능을 이곳에 옮기고 八達山(팔달산) 아래에 호화로운 華城(화성)을 쌓아, 留守府(유수부)를 설치했던 일이다. 八達山(팔달산)은 143m에 불과하지만, 평지 가운데 우뚝 솟아 사방이 내려다보이고, 또 그 위치가 四通八達(사통팔달) 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도세자는 집권파인 老論 辟派(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父王(부왕)인 英祖(영조)의 미움을 받고 쌀뒤주에 갇혀 蒸殺(증살: 쪄서 죽임)당했던 비극적 인물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쌓은 뒤 이곳에 최정예 친위군을 주둔시켜 서울에 또아리를 틀고 있던 노론 벽파 세력을 견제했다. 만약 정조가 독살당하지만 않고 장수했다면 수원으로 천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수원에는 저수지가 유별나게 많은데, 경부선 철도변의 西湖(서호)는 화성을 쌓을 때 만든 저수지다.

두 번째의 변화는 수원이 日帝(일제) 강점기부터 우리나라 농업기술 보급의 중심지 구실을 해 왔다는 점이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지금은 果川으로 이전), 농촌진흥청, 농업기술연구소, 농산물이용연구소, 농공이용연구소, 작물시험장, 맥류연구소, 원예시험장 등이 西湖(서호)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곳 서울농대 수원 캠퍼스 본관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이 임시 경무대로 잠시 사용했고, 수원농사시험장에는 1950년 6월28일 육군본부 전방지휘소와 맥아더사령부의 전방연락소가 설치되었다. 또 수원역 근처 매산초등학교에는 육본 작전지휘부가 잠시 자리를 잡았다.  
  
수원의 세 번째 변화는 삼성전자의 디지털시티가 靈通洞(영통동)에 들어와 컸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이제 세계 브랜드 파워 베스트 10의 대열에 합류한 超(초)일류기업이다. 첨단제품 메이커의 기지가 靈(영)이 通(통)하는 마을(洞)에 자리잡았다는 것은 무슨 운명의 소리처럼 들린다. 이제는 영통동도 모자라 靈通區(영통구)까지 설치되었다. 그러나 6·25 때만 해도 한국에는 삼성전자라는 존재조차 없었다.


美 제5공군 최신예기의 출격기지 수원비행장

수원역 다음역이 細柳(세류)역이다. 세류역 바로 서쪽이 水原(수원)비행장이다. 수원비행장이 6·25전쟁 초기인 6월29일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가 한강 전선을 살펴보기 위해 처음 방한했을 때 착륙했던 비행장이었음은 앞에서 썼다. 그때 한국 국내에는 제트기를 운용 가능한 비행장은 없었지만, 1951년 2월에는 미군이 야간에 근접 항공지원을 할 때 레이더를 사용해서 공격하는 방법을 개발,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레이더 개발 1개월 후인 3월, 수원비행장은 활주로를 2770m로 확장되어 휴전 시까지 미 제5공군의 최신예 전투기인 F-84·F-86전투기의 출격기지로 사용되었다.

세류역 다음이 餠店(병점)역이다. 병점을 우리말로 하면 ‘떡가게’이다. 전철의 차창을 통해 열심히 시가지를 살폈지만, 고층건물만 즐비할 뿐 떡가게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병점역에서 84번 지방도로를 따라 2km만 西進(서진)하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었던 龍珠寺(용주사: 화성군 태안읍 송산리)에 와 닿는다. 용주사에서 500m 거리의 화산(108m) 기슭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隆陵(융릉)과 그의 아들 正祖의 무덤인 健陵(건릉)이 있다. 융릉·용주사·화성은 하나의 역사적 고리로 엮여 있다. 세 곳 모두에 정통성 회복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正祖(정조)의 의지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孝心(효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한다면 正祖(정조) 자신의 정통성마저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릉 못지않은 아버지의 묘를 조성하고, 그 願堂(원당)으로 용주사를 지었다. 한강에 舟橋(주교: 배다리)를 놓아 陵幸(능행)을 하면서 임금의 위엄을 과시했다. 정계의 非(비)주류였던 南人(남인)을 중용하면서 아버지를 죽인 원수 벽파의 세력을 깎으려 했다.

그럼에도 정계의 주류는 여전히 노론 벽파였다. 벽파의 뿌리는 그만큼 깊었다. 그 대책으로 정조 18년 2월, 서울 도성에서 100리 이내인 곳에다 새로운 성곽도시 건설에 착수했다.《經國大典(경국대전)》에 임금은 都城(도성) 밖 100리 이상은 나다닐 수 없게 되어 있었다. 丁若鏞(정약용)의 《城說(성설)》을 설계지침으로 하고, 영의정 蔡濟恭(채제공)이 공사를 총지휘했다.

착공 2년6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된 이 성곽도시는 華城(화성)으로 명명되었다. 돌과 벽돌을 혼용한 과감한 공법, 기중기 등을 활용하여 공사비를 절감하고 用材를 규격화한 점, 화포를 主무기로 하는 방어구조물 설치 등은 同시대의 축성술로서 가장 선진적이었다. 정조는 화성에다 강력한 친위군영을 설치했다. 용주사의 僧兵(승병)들도 화성 수비대에 편입시켜 훈련을 강화했다. 임금이 머무는 行宮(행궁)도 새로 지었다. 상당수의 부호·巨商(거상)들을 화성으로 이주시켰다. 돈을 돌게 하기 위해 소(牛) 시장도 신설했다. ‘수원갈비’가 생겨나게 된 물적 배경이다. 천도 계획도 가만히 논의되었다.

조선왕조 중흥의 임금 정조는 화성 완공 4년 만인 1800년 急死(급사)했다. 반대파에 의한 毒殺(독살)이란 미스터리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왕조는 世道(세도)정치에 의해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결국에는 日帝(일제)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병점역 다음이 세마역이다. 세마역 동남쪽 500m의 1번국도변이 미 제24사단 예하 스미스 支隊(지대)가 1950년 7월5일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던 竹美嶺(죽미령)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9월15일 仁川(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상륙부대인 미 제10군단과 낙동강 전선에서 북상하던 미 제8군이 처음 접촉한 곳도 죽미령 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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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29, 17:46 ] 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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